개념글 모음

“가만 보면 있잖아. 너는 항상 공부를 하지 못해서 안달인 것 같아. 모처럼 방학이니 여유롭게 지내도 될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유선이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래도 열심히 해야지. 학생의 본분은 공부잖아?”

지난번의 일 이후로 다시 기운을 차린 유선이는 요즘 공부가 부쩍 늘었다.

바깥에 나가서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돌아다니는 것 보단 이렇게 방 안에서 얌전히 공부하는 편이 훨씬 낫기는 했지만….

지금의 몸이 되면서 발달한 어떤 감각이 계속해서 찝찝함을 호소하고 있었다.

“혹시 이렇게 공부하는 척하면서 뭔가 하려는 건 아니지?”

“아니야.”

공부를 하는 유선이를 바라보던 나는 잠시 다른 곳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근데 이렇게 있으니까 갑자기 선율이가 생각나네.”

내 입에서 나온 선율이 이야기에 유선이는 잠시 연필을 멈추었다가 다시 끄적이며 말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정말 좋은 애였으니까.”

“그렇지.”

선율이는 이사를 간 이후로 그대로 연락이 끊어졌다.

화인들만 모여사는 곳으로 이사를 간다고 들었는데 그 뒤로 곧바로 전화번호도 바꿔버리고는 소식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서 잘 지내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요즘은 가끔식 이렇게 생각이 나곤 했다.

“오늘은 이쯤해야겠다.”

“오늘은 그만 공부하게?”

“응, 그냥 배운 거 복습만 하는 정도니까. 오늘은 여기서 끝내도 될 것 같아.”

“그러면 잠시 어디 같이 좀 갈래?”

“응? 어디?”

“그냥 아무대나. 가끔은 생각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좋잖아.”

내 말을 들은 유선이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유선이를 데리고 나온 곳은 동래구 쪽에 있는 온천천 시민공원이었다.

금정산을 갈때 이용하는 시민공원 길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유선이는 그다지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평소에 등산에 데리고 다니면서 체력을 단련시킨 성과가 빛을 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한 걸.

내가 살아있던 시절만 해도 잘 정리되어 있던 길은 이제 콘크리트로 대충 덮어져서 그야말로 사람이 간신이 걸어다닐 수 있는 정도의 길이 되어있었다.

그마저도 풀이 무성하게 자라나 아무렇게나 뻗어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생의 내 친구가 공익을 할 때 여기서 했었지.

그 친구가 공익할 때 심은 나무가 저기 어딘가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선이가 말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아무것도 아니야.”

고개를 절래절래 저은 뒤 나는 유선이에게 말했다.

“어때,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바람 쐬니까 좋지?”

“응, 좋네. 그리고 한가지 수수께끼가 풀린 기분이야.”

“수수께끼?”

“응, 항상 궁금했거든. 금정산으로 가면서 저쪽으로 가면 어떤 풍경이 있을까 하고.”

“그래서 직접 와본 소감은?”

“딱히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아.”

그렇게 멍하게 광경을 바라보던 유선이는 시선을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아니면 그냥 너랑 같이 있어서 그런가?”

“무슨 뜻이야?”

“…아니야, 아무것도!”

유선이는 말을 얼버무린 뒤 미소를 지었다.

“아, 그리고 있잖아….”

내게 무언가 말하기 위해 입을 열던 유선이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진동 소리에 입을 다물었다.

“이거 네 휴대전화 같은데?”

유선이의 말에 파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뒤 전화를 받았다. ‘엄마’인가?

“여보세요?”

-….

“엄마야?”

대답을 듣기 위해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으려니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인아. 나야. 선율이.

“선율이? 선율이야?”

“응?”

-잠시 만나자. 우리들이 항상 놀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선율아?”

몇번 이름을 불렀지만 선율이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선율이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야, 선율이야?”

“응, 갑자기 만나자는데. 우리가 놀던 곳에서.”

“일단 가보자. 갈때는 지하철로 가는게 좋겠어.”

유선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율이가 말한 곳에 도착하니 선율이가 석양이 지는 가운데 어딘가 쓸쓸한 표정을 지은 채로 반쯤 밖으로 나와있는 타이어에 앉아서 가방을 끌어안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얘들아.”

“선율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연락도 안되다가….”

“그럴만한 일이 있었어. 일단 이야기 좀 하자. 자리에 앉아서.”

선율이의 말에 따라 유선이와 나는 선율이 맞은 편에 있는 타이어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잘 지냈어?”

“응, 선율이 너는?”

“나도…. 나쁘지 않게 지냈어.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몇년 지나니까 그럭저럭 견딜만 해졌고 더 지나니까 괜찮아 지더라고 그러니까 삶이 나쁘지는 않아.”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던 것도 잠시 곧 추억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선율아. 너 그때 산 스마트폰 아직도 가지고 있어?”

“그 가짜 말이지? 도저히 쓸 데가 없어서 그냥 방치해두고 있는 중이야. 헛돈 쓴 것도 결국 돈이니까 아깝잖아.”

가짜 스마트폰 이야기에서 부터.

“부산고등인문학교라고? 우와 진짜 대단하네. 하긴 너는 옛날부터 공부를 잘했지.”

“그치? 좀 더 칭찬해도 좋아!”

유선이가 부산고등인문학교에 입학한 이야기.

“참, 학교에서 일어난 일은 정말 유감이야. 나도…. 전해들었거든.”

“…더 힘든 사람들도 많아.”

학교에서 일어났던 비극까지.

겉으로 보기에는 대화가 오가는 것 같았지만 처음 스마트폰 이야기 말고는 선율이는 우리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만 했다.

마치 우리의 인생 이야기를 계속해서 듣겠다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가 오고 가는 사이에 우리 사이의 어색했던 기류는 어느덧 약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뒤 선율이는 여전히 가방을 끌어안은 채로 말했다.

“있잖아. 나 계속 생각해봤거든. 그날 우리 엄마가 왜 죽은 걸까 하고.”

“…응.”

“처음에는 정말 죽도록 미웠어. 우리 엄마를 그렇게 만든 녀석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 사람들을 전부 죽이고 싶었지. 정말, 정말로 말이야.”

선율이는 조용히 가방을 지익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거기서 더 생각을 해보니까. 이런 감정을 품는 것도 같은 ‘동등한’ 인간끼리 품는 거잖아? 거기서 나는 생각했어…. 애초에 이런 감정을 품을 정도로 사람은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선율아?”

유선이가 이름을 불렀지만 선율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야, 우리는 신인류잖아. 더 앞서나가고 더 뛰어난 신인류. 하지만 엄마는…. 그런 몸을 가지고도 실패했어. 단지 그것뿐이야. 그렇게 받아들였더니 마음이 편해졌어.”

그렇게 말하는 선율이의 표정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입가에 미소가 번져있었다.

나는 선율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너 괜찮아?”

내 물음에 선율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했다.

“응, 어느때보다 좋아. 그래서 말인데. 유선이를 죽이자.”

“뭐라고?”

말을 마치기 무섭게 선율이는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던졌다.

퍽하고 터지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무언가로 흠뻑 뒤덮였다.

“우읍! 크으윽!”

그리고 다음 순간 코를 찌르는 피냄새로 인해 나는 내가 무엇을 뒤집어 썻는지 깨달았다.

피다. 그것도 돼지의 피가 아닌 인간의 피.

귀에서 엄청난 이명이 들리는 가운데 선율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일에 끌어들여서 미안해 화인아.”

그리고 곧 톤이 올라간 목소리가 귀청을 때렸다.

“나, 최근에 깨달았거든. 진정한 신인류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나약한 인연따위는 모두 끊어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나는 역시 사람이 싫어!”

“…화인아!”

유선이는 곧바로 겉옷을 벗어서 양팔에 돌돌 말아 밧줄같이 만들었다.

“우읍, 크윽.”

피와 살점에 익숙해지는 훈련을 했는데도 여전히 나는 미숙하다.

몇번이고 충동을 견디면서 나는 앞을 바라봤다.

유선이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으려는 선율이와 막기위해 애쓰는 유선이.

나를 보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지금….

지금 먹어도 된다는 뜻 아닐까?

“큭!”

나는 입안의 살을 짓씹었다.

아릿한 통증과 함께 약간 정신이 맑아진 나는 그대로 선율이에게 달려들었다.

“뭐야, 너 어떻게….”

선율이가 놀라는 것도 잠시 나는 곧 주먹을 들어 선율이의 얼굴을 내리쳤다.

머리카락을 타고 흐른 피가 뚝뚝 떨어진다.

동시에 나는 눈앞에 선율이를 부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부숴야 한다. 망가트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유선이가 위험해지니까.

유선이는 내꺼니까.

그렇게 몇번을 내리쳤을까.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끌어당겼다.

“화인아! 이제 그만해! 그러다가 진짜 죽어!”

뒤에서 나를 끌어내느라 같이 피투성이가 된 유선이를 바라봤다.

“…유선아.”

“이제 괜찮아. 정말이야.”

“….”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유선이에게 몸을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