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아무도 없는 빈 집. 방금까지 사람이 있었다는 온기와, 여자아이 특유의 좋은 냄새가 방 안에 퍼져있다.


가만히 이불속을 뒹굴거리다 느낀 감상은 오로지 '따뜻하다'는 생각 뿐.


마치 녹아버릴 듯한 감각에, 다시금 속이 우글거려왔다.


"우읍... 우웨엑..."


겨우 벽을 짚고 바닥을 기며 도착한 화장실.


조금만 더 걸으면 좌변기에 도달하지만, 아쉽게도 작아질대로 작아진 비위는 그마저 버티지 못했다.


이렇게 자신을 속이고 생김새처럼 귀여운 애완동물을 연기해서일까?


확실한 것은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


이 방에 처음 들어온 순간부터 체내에 벌레가 가득 찬 듯한 갑갑함을 느끼고 있었다.


가볍게 토사물을 물로 흘려보낸다.


바닥에 물줄기가 닿으며 허무히 하수구로 쓸려가는 그것들을 보고 있자니, 묘한 동질감이 들어 눈물이 찔끔 배어나왔다.


자신을 낳은 대상에게도 사랑받지 못한채 버려진다.


저것들이 보기에 난 기만자와 같겠지.


어찌되었든 나는, 저렇게 하수로 흘러가 이름모를 생물의 먹이가 될 운명을 피해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의미없는 반성회를 마치고는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바닥에 냅다 몸을 던진다.


무릎과 이마가 세게 부딪히며 강한 충격이 다가오지만, 오히려 역겨움을 잊기엔 좋았다.


송장이 되어버린 듯 온몸에 스며드는 한기를 즐긴다.


어째선지 웃음이 나는 동시에, 열린 문틈 사이로 주인의 전신거울이 비쳤다.


나는 기괴하게 웃고 있다. 달콤하고 포근한 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그게 나였다는 사실을 의심케 할 정도로 흰 머리와 작은 몸을 갖고서.


일그러진 표정으로 히죽대는 열 살 남짓의 여자의 모습.


언뜻 보기엔 무서워, 지박령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ㅡ 띵동♪


그때, 경쾌한 벨소리가 울렸다.


반쯤 감긴 눈으로 쳐져 있다가도 번뜩 눈이 뜨였다.


반사적으로 몸이 튀어오르며 출입문으로 달려간다.


주인이다! 날 사랑해주는 주인님이 돌아왔어!


그의 성별과 나이는 중요치 않아. 마치 신화 속 구원주와도 같은 무조건의 사랑을 내게 주는 존재.


어디에서도 사랑받지 못한 채 버려진 나를 거두어주고, 삶의 의미를 만들어 준 대단한 존재!


아까까지의 허무가 다른 존재가 된 것마냥 비워졌던 속이 행복으로 가득찼다.


안이 벌레로 우글대는 속을 파내고 폭신한 솜을 가득 채워넣어! 나는 사랑받을 준비가 된 인형인거야!


눈물은 손등으로 훔쳐 허공에 날려버렸다.


무해한 미소를 헤실거리며 현관문을 활짝 여니, 곧바로 나를 들어올려 포옥 안아주는 주인.


"다녀왔어요? 에헤, 헤헤헤..."


"응! 언니 갔다오는 동안 별 일 없었지? 응...? 그런데 왜 몸이 먼지투성이야? 이마는 왜 부어올랐고..."


사실대로 방을 구르며 혐오감을 지우기 위해 머리를 박았다고 말한다면 실망하겠지.


어쩌면 순수함을 기대한 존재에게서의 싫증과 배신을 느끼며 날 쳐낼지 몰랐다.


다시금 버려지고 싶지 않아. 지금 나에겐 여기밖에 없는 걸.


내가 가장 신뢰하고 믿는 주인님께 버림받게 된다면, 차라리 그보다 먼저 죽음을 고르는 편이 나을 정도니까.


차마 진실을 뱉을 수는 없어, 가장 그럴듯한 거짓을 꾸며내기로 했다.


희망적이고, 사랑스러우며, 순진무구한 답을.


"그, 그으... 주인님이 언제 돌아올까 싶어서 기다리다 지쳐서요... 그게, 그 전에도 그러지 말라고 하긴 했지만... 소파가 폭신거리고 막 붕붕거리는 것도 좋아서요... 뛰어다니다 넘어졌어요..."


"으이그. 내가 그러게 조심하라고 했잖아. 일단 따라와. 같이 씻고 약부터 바르자."


천천히 나를 안아들고 화장실로 향하는 주인님.


날 무턱대고 안아주는 것이 아닌, 허벅지를 받쳐 엉덩이를 지탱하듯 몸을 기울인 것에 다시금 사랑을 느낀다.


빤히 얼굴을 내려다보다, 스윽 다가와서는 속삭이듯 말을 건네었다.


"그, 그러고보니 다녀왔다는 의미의 키스를 안했네? 깜빡했다 해도 이제와서 안 하는 건 역시 좀 그렇지? 응... 절대 내가 막 하고 싶어 미치겠다는 게 아니라..."


한참을 횡설수설하다 천천히 입을 맞추어 주었다.


닫힌 입술틈을 비집으며 소중하게 혀를 휘감는 따스한 감촉.


입안을 달콤한 설탕물로 가득 채운 행복감이 뇌를 강렬하게 때릴 때쯤, 주인님은 급히 입을 떼며 얼굴을 찡그렸다.


"으엑... 너, 너 혹시 뭐 상한 거 먹었어? 언니가 분명 저거 버릴 거라고 했잖아! 왜 실패한 요리를 굳이 먹어본다고..."


토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남아있던 냄새.


마침 상황좋게 오해해 줄 요소가 있었으니, 배시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 그치만 언니가 한 요리인데요. 저 주려고 했던 거니까 제가 맛은 봐야죠. 헤헤..."


"이, 이, 이... 귀염둥이 진짜! 냄새난대서 미안해. 지금 당장 키스하자. 응? 아니, 오늘 백만 번 하자!"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의 파도에 휩쓸리듯 황홀감에 젖는다.


함께 있을 때 원없이 사랑을 주는 사람.


나는 사랑받기 위해, 오늘도 세자릿수가 넘는 거짓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