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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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이전 화






...5월 15일


여러모로 힘든 날이었다. 전에는 일기를 적는 일이 단순한 취미이자 일과였지만 이제는 복잡한 심정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적고 있다. 우선은 엘시 양을 떨쳐내는 데에 힘을 많이 써야했다. 전에는 엘시 양이 중간에 일어나지 않아 나만이 아가씨를 발견했지만, 이번에까지 엘시 양을 깨우지 않고 몸을 일으킬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또한 자칫한다면 엘시 양에게 내 일기를 들키게 될 지 모른다는 불안또한 컸다. 나는 일기를 보관할 때 선반 서랍 가장 밑 칸을 들어내, 밑바닥에 둔 뒤 도로 서랍을 되돌려 놓는 식으로 보관해놓는다. 이런 식으로 보관해놓으니 왠만해서는 다른 사람에게는 일기를 보일 일이 없지만 앞으로 내 방에 신세를 지게 된 엘시 양에게는 혹시라도 일기를 적거나 수납하는 모습을 보일 염려가 있으니 아무래도 불안하다. 물론 그 착한 아이라면 일기를 마음대로 옅보지는 않겠지만,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나쁠 일은 없지 않겠는가.


밤이 되자마자 어련히 엘시는 내 방으로 왔다. 마침 내가 일기를 전부 적고 선반 안에 넣어 둔 순간이었다. 우리는 침대 위에 누웠다. 내가 언제 말을 꺼낼까 기다리던 도중 엘시 양이 먼저 일어나 나를 불렀다.


“미시즈 웰링턴. 주무시나요?”


“왜 그러시죠, 엘시 양?”


“조금 춥지 않나요?”


“창문에서 먼 자리로 바꾸시겠어요?”


“아니요, 괜찮아요. 참을게요.”


엘시 양은 말을 마치고서 내 몸을 안았다. 몸은 겁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이대로 엘시 양을 나에게서 떨어트린다면 얼마나 두려워할지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언제까지고서야 내가 어머니처럼 곁잠을 자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다못해 집 안의 모범이 되어야 할 하우스 키퍼가 스스로 정한 규칙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이 알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마음을 다지고 엘시 양에게 전부터 하려고 한 말을 해주었다.


“엘시 양. 역시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주무시는 편이 낫겠군요.”


“네?”


“충직한 하인은 언젠가 혼자서 불을 사용해야 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법이라는 사실을 엘시 양도 잘 아시겠죠. 제가 배웅해드리겠습니다.”


“그렇지만, 미시즈 웰링턴.”


“괜찮을 겁니다.”


“잠시만요!”


엘시 양은 큰 소리를 내며 내 옷깃을 붙잡았다.


“싫어요. 잠시만, 며칠 동안만 같은 방에서 더 잠잘 수는 없을까요?”


“엘시 양. 다른 직무처였으면 무단 외출만으로도 진작에 엄중한 경고를 받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사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가요?”


“알고는 있습니다. 그래도 부탁할 수 없을까요?”


우리는 잠시 동안 언쟁을 벌였다. 엘시 양이 여기까지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지금껏 함께 일을 하면서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아직 미숙한 점이 많지만 영특하고 착한 아이인지라 반항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고는 생각치 못해서, 나로서는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전에 있던 사건이 엘시 양에게 이만큼이나 큰 충격을 남겼다면 차라리 두 메이드에게 이 사실을 공표하고 당분간 특별 취급을 용서해달라고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방관하다가 아가씨 같은 신경 쇠약으로 발전할 바에는 그 편이 낫다. 거기다가 굳건히 마음을 먹은 엘시 양과는 달리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나로서는 이 이상 이 논의를 길게 끌어서도 좋을 일이 없어서, 결국 내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특별한 사안이니 당분간은 봐주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두 분 께도 제가 말하도록 하죠. 그렇지만 각기 다른 이불에서 잠을 자도록 하고, 서로를 껴안지도 말도록 합시다. ”


“알겠어요. 그럼...”

“단, 저로서는 현재와 같은 생활 방식을 그다지 권장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 만큼은 잘 알아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네. 마음에 담아두겠습니다. 미시즈 웰링턴.”


엘시 양은 대답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나는 장롱에서 누런 이불을 하나 더 꺼내어, 엘시 양에게 덮어주었다. 엘시 양은 이불을 어깨 위까지 덮어 쓰고 눈을 감았다. 나는 그 옆에 누워 힐끔힐끔 엘시 양이 언제 잠에 드는 지 용태를 곁눈질했다.


엘시 양은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아이답게 금방 잠에 드는 체질이라 다행이었다. 새근거리는 콧소리가 뺨을 건들자 나는 방을 나서 복도를 걸어갔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세상은 커져갔다. 서늘한 밤공기가 한껏 달아오른 피부를 베었다. 이대로 가면 갑작스레 아가씨의 나신이 나타나 눈 앞을 가득 채워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밀려왔다.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나와 손을 덥혔다. 점점 커지고, 좁아지던 세상은 어느 순간 한 번에 확 트이고 넓어졌다. 양 옆에 사자의 흉상이 나란히 선 계단이 로비 중앙에 서있었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쪼그려 앉아 중앙 계단 앞을 엿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가씨께서 어떠한 형상으로 튀어나올 지 쉬이 종잡을 수 없었다. 나신으로 나타나 계단에 걸터 앉을지도 모른다. 아침에 입으신 검은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나 또박또박,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가 중앙에 쪼그려 앉아 스커트를 들춰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상상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계단 앞에서 대기한지 삼십 분이 지났지만 아가씨께서는 오지 않았다. 회종시계 속 시침이 2를 가리켰을 때 나는 포기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또 다른 불안감이 엄습했다. 만약 아가씨의 변태 행동이 일정 주기를 가지고 찾아오는 충동이라면 어떻게 해야할까? 주인을 보좌해 마땅한 직위에 있는 자로서 알아내야만 하나, 아니면 잊어버려야만 하나. 나는 메이드로서, 나와 주인 양쪽이 ‘품위’ 를 지키기 위해서는 내가 이 사건을 잊어버리는 편이 맞다고 생각한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주인이 보내는 성생활에 관해서는 메이드가 ‘침묵’ 을 유지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피츠로이가를 섬기기 위한 의무로 태어났고, 주인을 존중하는 길이야말로 피츠로이가를 섬기기 위한 의무로 태어났고, 주인을 위한 삶을 살아가는 존재인 우리들이 생을 살아가며 고를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지이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이야기한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꼭 거절해야만 하는 무언가’ 에는 주인의 사생활에 도넘게 간섭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나는 고민 끝에 당분간 표면상으로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아가씨의 동향을 살피기로 했다. 혹시 행위를 하는 도중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나로서도 무안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심을 하면서 나 나름대로는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망설임이 남아있었는지, 잠을 자고 일어나서는 그만 사소한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아가씨께서 목욕을 하실 때였다. 본래라면 아가씨께서 옷을 벗자마자 곧바로 지시하시는 대로 옷가지를 챙겨야만 하나, 오늘은 그만 한 순간 잠옷 밖으로 빠져나온 아가씨의 나체를 바라보고 말았다. 아가씨께서는 작은 나무를 관리하듯 물기를 머금은 수건으로 몸 구석구석을 닦았다. 발톱 사이사이, 손가락 사이사이, 배꼽 안, 깊게 파인 양 겨드랑이, 우유색 피부가 물기를 머금어 광택을 내었다. 날카로운 눈매가 햇빛을 머금었다. 속눈썹 밑에 짙은 그늘이 졌다. 물론 내 직무를 생각해보면 여성의 나체를 바라보는 경우야 실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사소한 일이다. 허나 이번 일 같은 경우는 명백한 실수라고 말할 수 있다. 밤산책을 하던 아가씨와 몸을 닦는 아가씨가 자꾸만 겹쳐보여 일에 방해를 하는 탓이다.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하는 고용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 공상은 몇없는 내 악습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어서 이 감각에 익숙해져야만 한다.


오늘 아가씨께서는 옷을 고르며 깊게 고민하셨다. 평상시 입는 검은색 드레스를 입고 나서 바로 벗어 던져버리고, 다른 옷을 입고 바로 벗어버리기를 방 바닥에 천으로 이루어진 강이 범람할 때까지 반복했다. 아가씨께서는 결국 옷장에 든 옷을 전부 꺼내 바닥에 펼치라고 지시하셨다.


“제기랄, 어울리는 옷이 없어. 프레이아.”


“네.”


“네가 골라보지 그래?”


나는 영광입니다, 하고 바닥에 펼쳐진 옷을 내려다보았다. 대개는 검은색이다. 아가씨께서는 어렸을 적부터 밝은 쪽보다도 이런 계열 색을 선호하셨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던 도중, 장미 잎 깊숙한 곳을 뜯어내어 만들어낸 듯한 드레스를 한 벌 발견해냈다. 내가 무릎을 꿇어 그 옷을 건네자 아가씨께서는 그 옷을 받아 입었다.


“어때, 프레이아. 어울리나?”


검정에 가까운 적색이 눈 앞에 가득 찼다.


“네. 오늘도 아름다우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