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Scan the shade




-어? 그 자식 처음 만날 이야기가 왜 궁금해?


다소 늘어지는 말투로 그녀는 소파 위의 벗어둔 옷처럼 늘어진다. 술을 달고 다니는 여성이었지만, 하루 일을 끝마친 뒤. 샤워까지 끝내고 나서 들이켜는 위스키는 긴장이 풀리는지, 벌써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다.



-아으으으, 음. 뭐, 재수 없는 꼬맹이였지.



끝이 덜 마른 녹색 머리카락을 몇 번 털고 난 후에 한 잔. 진한 오크 향과 깔끔한 맛이 목을 태우며 그녀의 기억 속에 파문을 일게 한다. 전부 삼켜 버리고서 탁하고 내려놓은 잔, 다시 꼴꼴꼴하고 따른다.

매캐한 공기가 가득한 사무실 소파. 그 앞의 직사각형 테이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이야기가 취기와 함께 유리잔을 채우고 있다. 그 위로 엎어지듯 그녀는 상체를 기울인다. 커튼이라도 되는 양 녹색 머리카락이 테이블을 덮는다.


-대뜸 그러는 거야. 인간이 싫다느니 뭐냐니. 나도 잘됐지. 싫었거든.


아이 참, 언니는. 하고 샤워실에서는 서투른 강아지 같던 여자아이가, 술잔에 들어갈 것 같이 위태로운 머리칼을 붙잡아서 손 빗질을 한다. 그런 뒤에 자신의 끈을 하나. 빙글하고 돌려서 가지런히 묶는다. 이러한 보살핌 자체가 익숙한 것인지 녹색 늑대는 위스키 잔과 함께 상체를 일으킨다. 다시 소파 커버가 된 것처럼 몸을 젖히고서 잔을 흔든다. 넘실거리며, 절대 넘치지 않는 추억. 불타는 차. 비명. 애원. 복수. 알고 있지만, 말로만 알았던 것들. 그 시절의 소용돌이.



-질렸지. 질렸어. 그래도 뭐, 어쩌겠어. 꼬맹아. 

 아, 그러고 보니⋯



잔을 내려놓는다. 주변을 둘러본 후에 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고서⋯⋯



- 그 자식 완전 어린애야. 화풀이라고 해야 하나, 꽁꽁 숨기지만 다 보이거든.



네? 사장님이 어린애라고요? 그야 귀엽긴 하지만. 옆자리 여자아이의 말에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린다. 새끼손가락만 잔을 쥐지 못하고 삐져나온 포즈로 들이킨다.



- 넌 꼬맹이고, 걘 어린애라니까. 그거 알지? 실은 좋아하는데 부끄러워서 싫은 척하는 거야.

 근데 엄청 서툴러서 다 보인다니까? 아, 뭐⋯ 솔직하지 못하다고 해야 하나⋯



입 안에 남은 향을 음미하고서는, 괜히 꼬맹이를 쥐어박는다. 그녀는 아이 뭐 하시는 거에요 하면서도, 그녀에게 달라붙으며 안긴다. 하지 말라고 떼어내려 하지만, 자신과 다른 체온. 그 미묘한 차이가 주는 온도 체감에 잠시 동안만. 아주 잠시 동안만 그렇게 지냈던 밤이 있었다.

여자 아이는 알고 있다.

두 사람은 닮았구나. 하고, 솔직하지 못한 두 어른아이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죽는 순간까지, 알고 있었고, 거기에 있었지만,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위스키 잔을 흔들어도, 넘치지 않는 것처럼. 한 번 병을 딴 위스키의 에이징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알고만 있었던 사실은. 그늘 밑에서 조용히 썩어간다. 양지가 아니었기에 부패가 조금 느릴 뿐. 겹겹이 쌓인 세계의 단층 아래로, 가라앉듯 없었던 일이 되어간다. 세월을 쌓은 위스키가 그럴진대, 추억이라고 그러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으니.











원제

Scan the shade

그늘을 훑는다.


-4








“자, 나만 믿어. 이렇게 보여도 이면세계 탐사 전문인 그릴 파티 현장 요원이니까.”

“⋯⋯좋습니다. 휴먼.”


실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호라이즌은 헤더의 제안에 동의한다. 고심도 이면세계를 달리던 중 나타난 커다란 차원함선. 이전부터 지면에 박혀있었던 것인가, 혹은 갑자기 나타난 것인가는 모른다. 하지만 때마침 연료가 떨어졌다. 타고 왔던 험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애초에 스캐빈저, 클리너들은 이면세계, 그 세계 자체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아니다. 세계를 넘어, 부상 중인 함선을 노리는 등의 히트 앤 어웨이가 생존전략인 이들이다. 이면 세계를 탐사하는 용도의 차량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다기보다는 노획한 물건이었을 것이다. 당연히 연료나 정비에 신경을 쏟지는 않았을 테니까. 오히려 잘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호라이즌의 사고회로가 판단을 내린다.


입구에서 몇 분. 중간 부분 해치를 열고서 들어선 함선. 안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먼지와 매캐한 내음. 콜록콜록하고 기침하는 헤더를 뒤로하고서 호라이즌이 앞선다. 


“앗, 위험해. 얼마나 오래된지도 모르는 함선은 갑자기 바닥이 꺼져버릴 수 있다니까?”


푸른 눈이 밝게 빛난다. 걸을 때마다 끼기긱하고 울어대는 철판의 공간 속에서, 헤더를 잠시 바라본 뒤에 짧게.


“따라오시죠. 휴먼.”


앞서 나간다. 




이면세계에 버려진 차원함선이라는 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현실세계에서 건조되어 내려온 것들. 어떠한 이유로 망가져, 좌초된 함선. 그 이유는 침식체, 전쟁, 조난 등 셀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원함선은 두 번째 가능성이다. 원래부터 그 곳에 있었던 것.


흔히들, 아티팩트라 부르는 것들을 잔뜩 실은 보물선. 알 수 없는 구조, 설계관점, 내외장재의 구조 관념, 역설계해야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것들. 지금 둘이 올라탄 함선은 전자에 가깝다. 그렇게 호라이즌이 너무나 쉽게 판단 내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남아 있을 수도 있겠군요.”

“응? 뭐가?”


뒤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벽을 짚고 따라오던 헤더에게 말을 건넨 뒤 성큼성큼 걷기 시작한다.





호라이즌은 이 함선을 알고 있다. 본적이 있고, 기억하고 있고, 무엇보다 탑승했었다. 지금의 수금용 위력 행사 프레임이 아니었을 뿐.



“⋯⋯콜록, 콜록. 아유 먼지 좀 봐. 호라이즌, 정말 제대로 알고 가는 거 맞아?”

“네. 제 저장 정보가 틀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남아 있을 겁니다.”



70도 가까이 기운 선 내를 미끄러지듯 내려와 도착한 한 선실. 선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대기실에 가까운 분위기의 빈 곳. 그 곳을 지나 다시 격벽을 연다. 열자마자,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격벽 문이 아래로 떨어지고 어린아이가 잔뜩 뒤흔든 것 같은 과자 상자가 하나. 


“우와아⋯⋯창고 였나본데, 완전히 다 쏟아져서 엉망이네.”

“여기에 있을 겁니다. 리⋯아뇨, 주로 궁핍한 휴먼들은 연료 자체가 돈이 되다 보니 부식 창고에

 빼돌릴 분량을 보관했다고 들었습니다.”

“뭐어⋯그렇긴 하지. 아무래도 부식 쪽에서 삥땅 치는 경우가 많긴 하니까⋯”



문을 기듯이 넘어온 헤더가 말을 받는다. 호라이즌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쏟아진 선반 쪽으로 몸을 움직인다.



“연료를 찾아주십시오. 휴먼. 저는 차량에 들어갈 연료에 관해서는 모릅니다.”

“어? 어⋯? 엥? 왜? 호라이즌 기계⋯아차, 이건 실수.

 그럼 넌 뭐 하려고?”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쉽게도, 이쪽으로 올 때 잃어버려서요.”



그렇게, 아직 닫힌 선반을 열고 찾기 시작한다. 옆으로 기울어진 부식 창고에서, 그녀는 잃어버린 것을 찾는다고 했다. 그녀가 잃어버리는 것은 없다. 하지만 많다면 많다. 들고 왔던 캐리어에 있던 물건. 잃어버린 직원. 잃어버린 신뢰. 그래도 자신이, 자신만은 다르다고 깔봤던 만큼 해주지 못한 것들.


헤더의 기침과 호라이즌의 거침없는 발굴이 이어진다. 쏟아진 식재 외에 각종 음료 사이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것은 발굴에 가까웠다. 선체가 기울어진 만큼 더더욱 힘이 든다. 다행히 헤더가 찾던 연료는 금세 찾을 수 있었다. 그야, 몰래 팔아치우기 위해서 구석진 곳에 박아 둔데다, 일반적인 식자재들과 비교하면 금세 찾을 수 있는 크기였다. 겉 부분의 식자재로 위장한 라벨은 이미 충격으로 벗겨져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반면, 호라이즌의 찾는 것은 아직이다.

창고 바깥에 낑낑대며 연료를 던져 넣은 헤더가 아직도 찾고 있는 호라이즌을 바라본다. 쏟아진 식자재의 산더미에서 은발의 여자아이가 파헤치고 있다. 묵묵히, 기계처럼. 땀조차 흘리지 않고 하나씩. 작은 종이 케이스를 발견해 열어서 냄새를 맡은 뒤, 던져버린다. 썩은 치즈. 이 난리 속에서 깨지지 않은 병을 따서 냄새를 맡아본 뒤 던진다. 겉보기부터 와인이었지만, 그녀는 잘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있다. 하지만 구태여 확인하고 있다.

그걸 잠시 지켜보던 헤더가 입을 연다. 쌓인 식자재 더미 위에 걸터앉은 채.




“호라이즌.”

“뭡니까 휴먼.”

“뭘 그렇게 찾고 있어?”

“⋯⋯.”

“연료라면 찾았어. 두 통이나 있더라?”

“⋯⋯그렇습니까.”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번에는 라벨을 보자마자 넘긴다. 콜라였다. 그다음은 꽤 그럴듯한 케이스. 연다. 버터였다. 던진다. 일어서서, 아직 안 연 선반이 있는지, 혹은 문이 뜯겨나간 냉장고 외에 다른 보관 장치가 있는지 살핀다.



“후우, 저기, 사채업자 하면 돈 많이 벌어?”


“금융업과 고소득을 연관 짓는 것은 안일한 발상입니다. 휴먼.

 하지만 휴먼들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으로 관찰할 수 있죠.”


“흐응, 그래? 켈록, 켈록. 먼지가 너무 많다.

 그렇게까지 해서 뭘 하고 싶은 건데?”


“⋯찾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뿐입니다. 그건 왜 궁금하시죠?”


“그냥, 켈록. 켈록. 직원들을 찾으러 이면세계까지 왔다는데. 켈록 켈록. 부럽잖아.

 난⋯하하하, 하하. 여기서 혼자 이 고생이었는데.”



그렇습니까. 라고 말한 뒤에, 다시 발굴을 이어 나간다.

그런 호라이즌을 보고서, 몇 분. 다시 헤더가 입을 연다.



“호라이즌.”

“뭡니까 휴먼.”

“너, 직원들을 찾으러 왔다고 했지.”

“⋯⋯그랬, 그렇습니다. 휴먼.”




“너. 진짜 직원들을 찾으러 온 거 맞아?”



조용히 고개를 돌린다. 그러라고 시켰다. 그녀의 모든 정보처리 장치가. 그렇게 하라고 시켰다.



“소문이 날 정도로, 이런 나도 알 정도로 있지? 

 그 사건을 모두가 다 안다는 건⋯⋯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다는 거잖아.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난 줄 알아?”





“직원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혼자 교전 중이던 당신을 발견했죠.”

“직원들⋯⋯?”

“네. 저는 호라이즌 파이낸스의 대표로서,

 실종된 직원들을 수색할 책임이 있습니다.”

“호라이즌 파이낸스, 들어 본 적 있는 이름이야.

 하지만 그 사채업자는 빚쟁이한테 속은 것 때문에 미쳐서

 정신병원에 갇혔다고 했는데⋯⋯”

 

 

푸른 눈은 잠시, 멈춘다.

언제지. 언제부터지? 왜 직원들을 찾고 있다고 생각했었지? 왜?



둘러대려고 한 말이다. 그랬었다. 그랬는데 왜, 언제부터, 찾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

왜 그런 거지?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지? 호라이즌은 들고 있던 캔 하나를 놓친다.

그건 그러길 바랐던 것이다.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사고회로와 논리회로에게 그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반복적인 기억 재생으로 과부하가 걸린 CPU의 눈을 가리고, 그러라고.


차라리 그러길 바란다고. 벌써⋯⋯ 몇 년이나.

아니, 그렇지 않다. 그럴 리 없다. 



“그, 그러면 역으로 물어보죠. 헤더. 당신은 왜 여기에 있습니까?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말은 안 통합니다. 클리너가 당신을 쫓는 이유도 로직 에러,

 단순히 약탈한 배에 타고 있던 승조원을 쫓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다. 이것은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다. A의 결괏값이 B인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기 싫어서 A의 결괏값이 C가 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라이즌. 넌 직원을 찾으러 온 게 아니지?”

“아뇨, 제 단말의 마지막 기억정보와 후에 생존자들에게서 얻어낸 진술, 그리고 관리국 공표 사실로 보자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죽었다는 근거가 없습니다. 가능성으로 보건데⋯”



마치, 어린아이의 투정 같았다. 조금 머리가 큰 아이가 떼쓰는 것처럼, 아닐 이유를 찾고 있다.

찾으면서 만들고 있다. 확신 따위는 없다. 그것은 곧, 그러길 바란다는 것이 아닌가.

헤더는 한차례 기침을 거둔 뒤, 그 투정을 잘라낸다.



“꽤, 시간이 지났다는 거 알고 있지?”


“넌 인간을 혐오한다고 했어. 역겹다고 했잖아.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마치 죽으러 온 사람 같아.”


“⋯⋯휴먼. 당신이 관여할 부분이 아닙니다. 당신이야말로 살아남고 싶다면⋯”


“내가 맞춰볼까? 콜록, 콜록. 호라이즌. 넌, 지금 슬픈 거야. 어쩔 줄 몰라서 그냥 헤매는 아이 같아.

 이미 죽은 직원들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어. 여긴 고심도의 이면세계야. 여기에서 시간이 현실과 같을 리가 없어. 심지어 내가 그 사람들이 죽었다. LOST 처리되었다는 걸 알 정돈데.”



사실. 그저 한없이, 그러한 것. 호라이즌의 방열판이 떨고 있다. 시스템 온도는 그대로인데도, 떨며 열기를 내뱉고 있다. 




“윌버라는 놈에게 속았다면서? 그럼 그 자식을 쫓아야지 여긴 왜 온 거야?”


“거듭 말씀드립니다. 휴먼. 당신이 관여할 사항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윌버의 행적을 좇기 위해⋯”


“호라이즌. 니가 모르지 않을 거 같아서 그래. 콜록, 콜록. 후우, 방호복의 공기정화 시스템이 안 좋나 봐. 여기서 얻은 아티팩트가 관리국에도, 블랙 네트워크에도 풀렸다는 정보는 들은 적이 없어.

그러면 자연히⋯”


“경고합니다. 휴먼. 더 이상⋯”



지적하지 마라. 내 오류를 지적하지 마라. 결국 혐오스러운 인류 주제에, 내 오류를.

내 결점을, 내 실패를, 그녀들을 지키지 못한 나의 이 고까운 오만을.




“너는 여전히 복수해야 할 대상을 못 찾았고, 여기엔 추모하러 온 거야. 맞지?”



“억측은 그만두십시오. 휴먼. 두 번째 경고입니다.”



한 마디가, 버그가 된다. CPU에 달라붙은 벌레처럼 온갖 회로를 뒤집는다. 로직 에러가 일어난다. 정상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고회로의 이상을 느낀다. 어디지. 어디야. 그녀는 자신을 헤집지만 찾을 수 없다. 여태까지의 이상을 찾기 위해 강을 기어오르듯이 저장장치들을 끄집어낸다.


이상은 없다. 계속해서 재생하고 있던 장기기억 장치의 몇 가지 밖에 없다.

역겨운 인간들의 역겨운 짓거리.

한심하고,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자신에게 칼날을 들이밀고, 때로는 옥죄고, 그게 힘들면 서로에게 들이민다.

베어내고, 잘라내고, 걷어차고, 온갖 합리화를 한 후에 아름답게 포장하는 말들.

빌린 돈은 갚는다. 계약한 사항은 이행한다. 약속이라는 말을 손바닥처럼 뒤집고서,

돌아오지 않는 추악한 부류들.


-하란다고 정말 하냐. 등신.

-하지만, 언니. 기회를 주고 싶어요. 언니와 사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살려⋯주세⋯요.

-그런 말랑한 생각으로는 세상 살기 어렵지. 이번 기회에 그걸 알아주길 바랄 뿐이야.

-울지⋯않을 거예요⋯내가, 내가 해야만⋯⋯

-아가씨 기다려야지. 다 살아야 할 거 아냐!

 


정말. 그렇습니까?

정말, 추악하기만 했습니까?

이 긴 이야기 속에서, 그런 것밖에 없었습니까?

분명히 악인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애매한 선인은 추합니까? 존재해선 안 되는 것이었습니까?

지킬 가치조차 없었습니까? 어리석은 선인은 그렇게 참혹하게 죽어야만 합니까?


그렇다면 뭘 확인하기 위해 당신은 여기에 있습니까?

그만큼 오랜세월 혐오한다는 것은 그만큼 기대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우리의 행동은

그저 화풀이였던 것이




“⋯⋯호라이즌. 나도 마찬가지야.”


“여기서 죽어버린 바보같은 사람을 하나 알거든.”



“⋯”



하나. 단말이 보내온 기억 속에서 하나. 일치하는 것이 있다. 호라이즌은 깨닫는다.

그릴 파티의 헤더 영. 그 성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것 한가지.

그날. 그곳. 함선에 있었던, 용병. 역겨운 선의를 내보이다 바보같이 죽어버린 용병.

‘앵거스 영’



“⋯⋯그렇군요. 그 용병의 친지였습니까.”


“응. 맞아. 바보 같은 아빠. 병신같은 새끼. 어디서 어떻게 뒈졌는지, 보러 왔다가 이런 꼴이 된.

 병신같은 딸이야.”


“관리국에서 대강의 정황은 들었을 텐데요.”


“들었지. 너처럼.”


“⋯아뇨. 휴먼. 저는 그저⋯”


“아니지 않아. 호라이즌. 부정하지 마. 넌 아까, 스스로를 인간이 만들어낸 강인공지능.

 그 실패작이라고 했지만, 아니야. 넌 인간들을 미워한다고 했잖아?“


“네. 본질적인 혐오입니다.”


“아직 모르겠어 호라이즌? 넌 미워한다고, 혐오한다고 믿고 싶은 거야.

 단지 그것 때문에 실패했다고, 그렇기 때문에 혐오하려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야.”


“휴먼⋯더 이상은⋯”



주제넘게, 어딜. 끓어오르는 혐오를 참을 수가 없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나도 그랬거든. 나도 아빠가 죽어버렸음. 좋겠다 생각했었어.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이렇게 죽었다는 걸 알고 나서⋯⋯”



인간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일 수 있다.

혐오가 그 위를 덮고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합리화이지 않은가?

사실을 사실대로 판단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인간은 혐오스럽다고 하면서, 왜 직원들을 곁에 두었는가.

그 직원들을 ‘비품’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찾으러 왔는가.

왜 아직도 그녀의 사고처리 CPU 중 하나는 그때의 기억만을 재생하고 있는가.


왜 미워하는가. 왜 싫어하는가. 왜 혐오스러워하는가.



“호라이즌. 그건 인간의 감정이야. 넌 실패한 게 아니라 성공한 거야. 지금, 적어도 내가 본 인간들보다도 인간 같아. 거부 당한 게 무서워서, 억지로 싫어할 이유를 만들고 있는 거야.”



“억측입니다. 휴먼. 과장이구요. 저는⋯”



“콜록, 콜록, 우... 우웁... 우우우...후욱, 후욱...후우, 하아⋯아⋯”



“휴먼?”



“⋯하아⋯하아⋯”

“알고 있었지? 호라이즌? 넌 똑똑하니까.”


“⋯네.”


거짓말이다. 호라이즌은 몰랐다. 정확히는 이상을 발견했지만, 그 이상증상에 대한 답은 도출했지만. 구태여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눈앞의 썩은 사과의 부패가 더 빨라질 것임을 알고 있지만, 먹을 수 있는 부분만 봤다. 이것 외에도 무수히 있지만.


헤더 영의 이상증세. 분명히 방호복을 쓰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하는 기침. 감기라도 걸렸다면 모를까 그럴 일은 없다. 게다가 이곳은 고심도의 이면세계. 저런 구닥다리 방호복으로 완전히 막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동시에, 벌써 그녀를 만난 지 13시간이 넘어간다. 호라이즌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녀에게서 허기라는 생체신호는 오고 있지 않다. 이렇게 많은 식자재를 두고도⋯⋯.


호라이즌은 헤더에게 달려간다. 움켜쥔 방호복 아래의 팔이 물컹거리는 감촉.



“진정제를 찾아보죠. 아니면 더 괜찮은 방호복을 찾아서⋯⋯”


“아니, 알잖아? 이미 글렀어.”


“헤더. 당신은 죽으러 여기에 온 겁니까?”


“아니⋯⋯하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난 그냥. 그 자식이 죽은 자리에 시원하게 욕 한번 해보고 싶어. 너도, 그렇지 않아?”


“⋯⋯왜죠?”


“그야, 그 직원들이 너한텐 어땠는지는 몰라도⋯⋯ 나한테 아빠는 쓰레기였거든.

 사람 좋았지? 그거 아무한테나 그래. 그래서, 콜록. 콜록. 엄마도 못 견디고, 늘 가난했거든⋯.

 하아,하아. 이유라면 알지. 이해할 수 있어. 근데, 다 죽어가는 할머니 하나 구하자고

 온 가족을 지옥으로 밀어 넣어야 해?”


“왜 말 안 해줬어. 왜 찬찬히 설득 안 했어? 왜 날 때렸어?”


“하하, 하하하. 호라이즌. 이해하는 거랑 공감은 너무나 멀리 있어. 멀어. 너무 멀어.

 가슴으로 오는 말이랑, 이제서야 후회되는 건 왜 이렇게 멀까.”


“뒤지긴 또 왜 이런 먼 곳에서 뒤졌어.”


“마지막까지 누굴 살리려다, 병신⋯⋯.”


“그래서 난 그 자식이 싫어. 하지만, 그렇지만⋯⋯.”



헤더의 말이 이어진다. 그건 이미 넋두리에 가까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넋두리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녀의 모든 것을 호라이즌은 알지 못한다. 본래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활발한 부류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침식증후군의 시작이 이전부터였다고 한다면 그녀는 계속 환각과 환청 속에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미움과 후회와 절망을 반복해가며, 도대체 어디로 가려고 한 것인가.



“마지막으로⋯⋯”


“봐두고 싶어.”


“도와줘.”


“⋯⋯네. 좋습니다. 그 용병이 죽은 위치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경비가 듭니다.

 청구할 계좌를 알려주시죠.”


“하하, 돈이야?”


“네. 휴먼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가치인 ‘돈’조차도 배신하지 않습니까?”


“응. 좋아. 현실로 올라가면 그릴 피터, 태스크포스 명목으로 보험금이 있을 거야. 그걸 받아낼 수 있는 인증키야. 그리고⋯⋯.”



헤더는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새까만, 오래된 필름 카메라. 그건 잘 알고 있다.

호라이즌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이건.”


“그 녀석들 배에서 훔친 거야. 아티팩트라고 하더라. 이걸로 우릴 찍어서 관리했었지.”


“이건 사용자의 미래를 일시적으로 비추는 물건입니다. 이걸로 당신들을 찍었다는 겁니까?”


“어, 잘 모르겠지만 선별작업이라고 했어. 인위적으로 카운터, 아니지. 그림자 코어? 잘 모르겠지만. 그 작업에 쓰던 거야. 비싼 건지 로켓런처를 쏘면서 쫓아 오더라?”


웃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호라이즌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덤덤히 받아서 든다.

이 물건은, 그때 연구소에서 나온 아티팩트. 그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블랙 마켓에서도 나돌지 않는 그때의 발굴품. 하지만, 클리너들이 들고 있다. 그것만으로 충분한⋯⋯.


“하지만, 콜록. 이 기회를 놓치면 다음이 없었으니까⋯⋯ 남은 애들한테는 미안하네.”


“알겠습니다. 휴먼. 그 장소까지 데려다 드리죠.”


“헤더로 불러 줘. 이제 어느 정도 휴먼인지 모르겠어서 그래.”


“네. 헤더. 설 수 있겠습니까?”


“응.”


육체가 아닌, 반쯤 액체가 흔들거리는 소리가 난다. 싸구려 보호복 아래가 어떤 모습이 되어있는지, 가늠할 수 있지만 호라이즌은 내버려 둔다. 아직 멀쩡해 보인다. 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인 것은 변함없다.


“아차, 그러고 보니 호라이즌.”


“네.”


“그래서 뭘 찾으려던 거야? 아니, 아니, 상세한 종류 말이야. 술인지 뭔지.”


“⋯⋯”


호라이즌이 좌우를 둘러보다, 겨우 입을 연다. 그 모습이 헤더는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하는 아이 같다고 느꼈다. 꼼지락거리며 뒤에 숨긴 카네이션을 들키지 않으려는 아이 같다고.











“위스키와 케이크입니다. 그 둘이 아주 좋아했거든요.”


“그래? 아, 나도 치킨이라도 찾아볼 걸 그랬나.”


“그거라면 저기에 있습니다.”


“아냐, 됐어. 뭐 하려고. 둘 다 빈손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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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트릭이란 걸 해봤는데 앞부분에 힌트 너무 많이 줘서 의미 없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