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엘프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건, 인류가 어머니-지구의 호적에서 파였음을 뒤늦게 깨닫고 난 다음이었다.

 끊임없는 전쟁과 환경 파괴로 인해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해갔고, 인류 문명은 빠르게 쇠락했다.

 비슷한 시기, 그 외에도 새롭게 밝혀진 사실이 많았다.

 가령 지구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살기에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는 것.

 우주에는 엘프와 오크, 드워프 등의 다종다양한 고등 생명체가 있으며, 그들이 종족의 명운을 건 전쟁을 벌이는 중이라는 것.

 그리고 달의 뒷면에 나치 잔당의 비밀 기지따위는 없고, 대신 그곳에는 예로부터 엘프들이 살았다는 것 등이 그 예였다.

 엘프는 인류에게 지구를 버릴 것을 제안했다. 극적인 협의를 통해, 지구 대표측은 제안을 수락했다.

 인류는 달의 시민권을 정식으로 구매할 권리를 보장받았다. 버려진 지구는 외계 종족들의 전쟁터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 많지도, 지위가 높지도 않은 대다수의 지구인들에게, 달의 시민권을 얻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떠나지 못해 남은 이들이 많았고, 그들이 얻을 수 있는 직업은 한정되어 있었다.

 협잡꾼과 약탈자, 걸인과 매춘부….

 그러니 나처럼 군대에 들어간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비록 왼쪽 눈과 팔다리가 날아간 걸로도 모자라, 나중에 가선 신체를 통째로 갈아치워야 했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군인과 그 가족은 달로의 이주를 보장받는 것이다.

 지난 26년간, 나는 엘프라인-연합군 소속 제4사단 콰트로니타스 포병연대에 소속되어 복무했다.

 지난 26년간, 크고 작은 전쟁을 수도 없이 겪었으며, 가족을 먹여 살리겠다는 일념 하에 그 난리통 속에서 버텨냈다.

 그리고 26년만에, 나는 오늘 달에 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

 [2]
 전상자가 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둘 중 하나였다.

 전혀 명예롭지 않은 명예전역을 하거나, ‘시술’을 받고 다시 전장에 투입되거나.

 죽느니만 못한 상이용사의 처우와 연금 때문에, 가족들에게 다음 호봉의 봉급을 보내주기 위해서.

 나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고 내가 여자가 된 이유는 단순했다.

 여성형 스페어 바디가 더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와 달을 잇는 궤도 엘리베이터를 타고 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제3대합실은 천장이 높고 조명이 환해 쾌적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서 나는 제2지구로 가는 셔틀 포트를 기다리고 있다.

 제2지구는 지구 출신의 이주민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내 가족들도 그곳에 있다.

 집, 가족들의 곁, 내가 있어 마땅할 곳.

 오늘,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아니, 돌아간다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을 것이다. 지난 26년간, 나는 달에 있는 가족들과 만나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집이란 돌아가야 할 곳이라는 뜻을 함유하고 있다. 그렇지 않고선 ‘귀가’라는 단어가 괜히 만들어졌을까.

 나는 되뇌었다.

 집, 가족들의 곁, 내가 있어 마땅할 곳….

 지구-달 궤도 엘리베이터의 제3대합실은 사방에 커다란 창이 났으며, 잘 관리된 인조대리석 바닥은 승객들의 실루엣이 비쳐보였다.

 운행 안내방송이 엘프어와 표준 행성어로 흘러나왔다.

 편의시설을 이용하는 승객과 데스크를 찾기 위해 헤매는 승객, 캐리어를 끌고 가는 승객의 다리들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그리고 냄새. 햄버거와 커피와 은은한 방향제와 소독제와 기대에 부푼 여행자의 마음의 냄새.

 창가 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문득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봤던 30년 전 신혼여행이 뇌리에 스쳤다.

 그런 기억이 떠오를 만큼 제3대합실은 전체적인 구조에서 30여년 전 지구에서 볼 수 있었던 공항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지만 창에 비친 풍경은 기억과는 아주 달랐다. 창밖으로는 광활한 달의 표면과 달의 하늘이 보였다.

 달의 표면은 지구에서 보던 치즈색이 아닌 짙은 회백색을 띄었고, 달의 하늘은 파란색이 아닌 새까만 우주 그 자체였다.

 시선을 멀리 두면 희끄무레한 빛이 우주와 맞닿는 지평선이 있었고, 지평선과 수직으로 맞닿은 도로는 달의 뒷면까지 이어져있을 터였다.

 우주는 깜깜했지만, 지구에서 본 밤하늘과는 달리 깨알같은 별빛이 와글거렸고, 달 대신 지구가 파란 구슬 모양으로 떠있었다.

 그래, 지구는 푸른색이었다.

 땅과 바다를 가리지 않고 전쟁터로 쓰이고 있을 텐데도 푸르렀다.

 이런 걸 두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던가….


 셔틀포트 승차권을 살 때 내게 향하는 묘하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느끼며, 나는 아주 조금 당당해지는 동시에 불편함을 느꼈다.

 제2지구로 향하는 포트의 매표소에서는 줄을 설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이용객이 적은 한적한 곳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적함에 어울리는 조그마한 범죄 행위가 벌어지기 일보 직전인 상황.

 몇 번인가 전쟁을 거치며, 나는 딴청을 피우면서 주변을 살피는 능력이 발달했다.

 대합실은 총 2층의 복층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층을 잇는 중앙 에스컬레이터의 옆면은 관목 화분들로 장식되어 사각지대를 만들어냈다.

 그 외진 공간에서 어떤 금발 여자가 책을 읽고 있었고, 그녀의 뒤편엔 인기척을 죽인 채 그녀 주변을 알짱거리는 인간 꼬맹이가 있었다.

 굳이 엘프가 아닌 금발 여자라고 표현한 이유는, 엘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금발에 긴 귀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지만, 금발 여자의 경우는 미묘하게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발 여자의 금발은 완전한 금발이라기보단 탁한색이 섞였고, 눈동자는 갈색이었으며, 1차대전 프로펠러기 조종수가 쓸 법한 애비에이터 캡을 써서 귀를 덮고 있었다. 

 눈에 띄게 예쁜 인간 여성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인간과 엘프의 혼혈일 것이다. 앉은 자리가 자리인 만큼 그녀는 도둑질을 하기에 만만한 타겟이 된 모양이었다.

 꼬맹이는 목격자가 있진 않나 주변을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숙련공의 솜씨는 아닌 듯했다.

 나는 내심 꼬맹이가 도둑질을 그만 두기를 바랬다. 아주 오랫동안 망설이길래 저러다 포기하겠구나 싶어, 잘 됐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기대가 무색하게도 녀석은 손을 뻗었고─

 “거기 아가씨.”

 그때가 되자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내가 말했다.

 “뒤 좀 봐요.”

 금발 여자는 처음에 자신에게 말하는 줄 몰랐는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지만, 아이는 금세 손을 거두고 시치미를 뗐다.

 그제야 아이의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고, 나는 꼬마애에게 다가가 네가 이 여자의 물건을 훔치려는 걸 다 보았노라고 말했다.

 “뭔데 너는, 증거 있어?”

 꼬마는 처음에 자기보다 키가 작은 나를 노려보며 반항적으로 쏘아붙였으나, 말없이 폐쇄회로를 가리키는 내 손에 두말 않고 도망쳐버렸다.

 쏜살같이 멀어지는 꼬마를 나와 금발 여자는 굳이 쫓거나 신고하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꼬마는 인간종이었고, 이곳은 달. 엘프가 사는 곳이었다.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가재는 게 편이라고, 무작정 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도둑이 되기 위해 태어난 아이도, 저절로 도둑이 되는 아이도 없는 법이니 말이다.

 [3]
 “진짜진짜 고마워! 사실은 사정이 있어서, 이 가방이 지금 내 전재산이나 다름없거든. 어떻게 사례하면 좋을까?”

 금발 여자는 연신 고마움을 표했다.

 “참, 밥은 먹었니? 아직이면 식사라도 대접하게 해줘.”라고도 했다.

 한 일에 비해 과분한 감사를 받는다는 느낌이 들어 나는 사례를 받을 순 없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문득 장난기가 돌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아가씨, 이런 의심은 들지 않았나? 아까 전 꼬맹이가 나와 공범이어서, 사례금을 받고 나눠가지기로 했다면?”

 “응?”

 이상한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드는 건 내 나쁜 버릇이었다.

 하나 금발 여자는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을 뿐, 이내 눈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아니… 아무래도 그럴 것 같지는 않아보여서. 척 보기에도 착한 애 같아.”

 내가 말했다.

 “허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이건 내 진심어린 조언이었다.


 그녀가 앉은 의자 앞 테이블 위에는 반쯤 먹고 남긴 샌드위치와 병맥주가 놓여 있었다.

 귀를 덮는 모자 아래로는 무스탕과 카고바지를 입었고, 군화 비슷한 장화를 신었다.

 손에는 반쯤 읽은 책을 들고 있었는데, 골든바우사(社)에서 낸 우주문학전집 21편, 작자 미상의 「언더 더 스타라이트」였다.

 그 책은 진중문고로 선정되어 나도 읽어본 적이 있다.

 생이별한 가족과 우연히 만난다는 내용이었던 것과, 그 책을 읽으며 기시감을 느꼈던 것이 기억났다.

 “내가 아는 소설이 그 소설이랑 닮았어. 대신 그쪽은 주인공이 아버지 쪽이었거든. 단편이었고.”

 “오, 그런 소설이 있었나? 유명한 소설이야?”

 “옛날에는 유명했지.”

 기억이 나는 대로 소설의 내용에 대해 떠들다 보니 어느새 대화가 길어졌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녀의 사정을 대강 알게 되었다.

 그녀는 내가 예상한 대로 혼혈이었으며, 아버지가 인간이었고 어머니가 엘프인 하프 엘프였다.

 아버지에 대해서는 인간이라는 것만 알고 본 적이 없어 모른다.

 어머니는 그녀를 홀로 키웠으며, 연금 생활을 하다가 1년 전 자살했다고 한다.

 “이거 미안하네. 아픈 기억을 건드리게 되었어.”

 “으응, 벌써 1년이나 지난 일인 걸. 그리고 엘프들한테 자살은 자연사나 다름없으니까.”

 엘프의 입에서 나온 “벌써 1년이나”라는 말은 어딘지 이상하게 들렸다.

 나이 지긋한 중년이 만화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지, 그런 부조화가 느껴졌다.

 인간과 엘프의 차이는 외관에만 있지 않다.

 짧은 삶을 살다 가면서도 쉽게 망각하는 인간과 다르게, 엘프는 긴 세월을 살며 기억을 축적한다.

 그렇게 축적된 아픈 기억과 트라우마가 속에서 곪아 들어가, 비극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엘프들의 문화에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걸 높이 사는 경향이 있다 보니, 자살이 자연사 취급을 받는 사회가 되는 것도 어쩔 수 없어 보였다.

 아픈 기억이 흐려지지 않고 선명하게 남는다면 분명 끔찍하겠지. 이럴 때면 인간으로 태어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구로는 아버지를 찾으러 간다고 했나?”

 “뭐어, 사실 일이 마냥 잘 풀릴 거라곤 나도 기대 안 해. 지구는 달보다 넓으니까. 그냥 먹고 살 길 찾으러 가는 셈이지. 내 친구들도 다들 사정이 비슷해.”

 먹고 살 길을 찾으러, 라고 그녀는 말했다. 아무래도 자원입대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반평생 군대밥을 먹어온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다지 추천할 만한 선택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말했다.

 “아버지를 찾으려고 한다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는 건가? 아버지의 이름은 알고 있나? 사진 같은 건 있고?”

 “이름은 모르지만 사진은 있어. 하지만 사진 속 얼굴은 나랑 엇비슷한 나이대라서.. 인간들은 금방 나이가 드니까, 지금 모습이랑은 많이 다르겠지?”

 그녀는 자켓 안쪽을 슬쩍 들춰보였다. 군번줄과 비슷한 은빛 목걸이 줄이 안주머니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끝에 아마 로켓 같은 것이 달려 있을 테다.

 “그런데 너는 어디서 왔어? 지구 태생이야?”

 이번엔 반대로 그녀 쪽에서 내게 물었다.

 “나는……” 대답을 하려다가, 말문이 막혔다.

 지난 26년간 나는 줄곧 한반도, 그 안에서도 강원도 봉평에서 복무했다.

 한국에서 나고 자랐다. 이제는 없어진 나라.

 “싱가포르.”

 “아하.”

 그런데,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아 스스로도 당황했다.

 거짓말은 한 건 어째서일까?

 나는 자문했고, 곧 스스로에게 대답했다.

 그 거짓말은 어떤 기시감과 불안한 예감, 그리고 시간의 순서에 상관없이 뒤죽박죽이 되어 떠오른 기억에서 비롯되었다.

 전쟁의 기억과 제목을 잊은 소설의 기억.

 그리고 잊고 있었던,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잊고 있었는지,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한 하룻밤의 기억….


 집, 가족들의 곁, 내가 있어 마땅할 곳.


 하지만, 나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다.

 흘려보낸 지 20년이 더 되는 기묘한 인연에 엮일 필요도, 여유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