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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밤의 여왕이자불사자들의 군주그믐의 어둠 아래에서 순결한 피를 약탈하는 흡혈귀들의 수장이다

 

나의 적에게는 언제나 끊이지 않는 악몽과도 같은 무자비한 공포를 안겨주었고나의 벗에게는 끊어지지 않을 강철의 신의와 보답을 안겨주었으니그것이야말로 왕이 된 자의 이상이리라.

 

세상의 어느 것도 나를 두렵게 하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밝은 낮의 수장태양만이 나의 유일한 적수였으나그것을 이용하려던 암살자는 언제나 선사할 수 있는 극한의 고통 속에 자신의 무력함과 무의미함을 깨달으며 죽어갔다.

 

...한 명만 빼고 말이다.

 

그 유일한 한 명의 암살자가지금 나를 두렵게 한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이 70년 전이던가.

 

지금과는 달리막 태어난 티를 벗지 못한 어렸던 그는조잡한 은도금 단검과 말라 비틀어진 마늘어딘가의 시골 성직자가 축복한 성수를 들고 나를 찾아왔었지

 

말하길내 목에는 막대한 현상금이 걸려있다고 했었다.

 

제 발로 스스로 진미가 찾아오다니식욕이 동한 나는 적당히 그를 제압하고 시종으로 삼았다.

완전한 공복의 시간에 맛이 무르익기를 기대하면서.

 

그 순간 내가 덫에 걸렸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좋았을 것을...

 

 

 

10그가 극상의 진미로 자라나기까지 걸린 시간.

 

20왕이 아닌 여자로서의 행복을 내가 깨닫게 해주기까지 걸린 시간.

 

30그와 내가 만들어낸 기쁨이 태어날 때까지 걸린 시간.

 

40언제나 모든 것이 그 자리에 있으리라는 착각이 깨질 때까지 걸린 시간.

50그의 그림자가언제나 그를 따라다녔던 죽음의 자취라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 걸린 시간

 

60깨어있는 그의 모습보다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될 때까지 걸린 시간.

 

 

그리고 70... 

 

처음 만날 날 동했던 그 욕구가 식욕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걸린 시간.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짧은 것이다.

 

그는 인간이기에.

 

저주스럽게도 나약한 인간이기에.

 

 

왕이 된 자로서가장 비천한 동족조차 할 수 있는 것을 왜 시도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것을 거절했다.

 

나는 물었다.

 

부부의 관계에서 주종의 관계로 바뀌는 것을 두려워하는지.

 

그런 것 따위는 마음먹기에 달린 것 아니겠냐면서

 

그러나그는 내가 좋아했던 그 은은한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침에 저 멀리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없다는 것한낮의 푸른 하늘 아래에서 햇살이 불러온 따스한 바람을 느낄 수 없다는 것.”

 

당신의 권속이 되어서도나는 그것을 수없이 긴 밤마다 그리워하겠지.” 

 

 

그에게서 태양에 대한 사랑을 빼앗아 가고 싶었다.

 

그의 모든 것은 내 것이다.

 

그래야만 해.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그가 슬퍼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얼굴을 나는 견디지 못할 것만 같았다.

 

항상 적들에게도 벗에게도 단호했건만...

 

가장 단호해야만 할 일에서 물러지는 것이다나는

 

 

부탁이야나를 성 밖의 정원에 데려가 줘.”

 

삶의 마지막은 저 너머에서 뜨는 햇살을 보면서 맞이하고 싶어.”

 

 

자정의 정원은 그믐의 밤이었기 때문에 희미한 별빛만이 보였다

 

찬 바람이 그의 몸을 스치고 갔지만이미 그의 몸을 잠식하는 죽음의 냉기보다는 따스했다.

 

밤새 그와 함께나는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 만났던 날의 기억그와 함께한 모든 기쁘고 슬픈 순간들.

 

그믐처럼 졸면서도 그는 좀처럼 오지 않는 여명을 기다렸다.

 

하늘이 그믐의 어둠을 걷어내고짙은 청색으로밝은 하늘색으로 거듭났다.

 

 

눈을 떠.

 

당신이 보고 싶어했던 여명이야.

 

그토록나와의 영생을 버리고서라도 보고 싶어했던.

 

제발 눈을 떠.

 

마지막은 태양을 보고 싶어했잖아.

 

저 산너머 동틀녘이세상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보고 싶어했잖아.

 

제발...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저 멀리 산맥의 발치에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퍼져나왔다.

 

그 밝은 순백의 광선은본디 자신의 것에 속하지 않는 것들을 멸하기 시작했다.

 

태양의 자손을 사랑해버린 밤의 그림자를 걷는 괴물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밝은 빛이 살을 태우고뼈를 부쉈다.

 

온몸이 으스러져 가는 고통 속에도그녀는 비명지르지 않았다.

 

수천년을 살아온 그녀에게 그런 사소한 육체적인 고통은 간지러움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대신 그녀는 일생 처음으로 그토록 밝은 광휘를 마주했다.

 

 

당신이 보았던 태양은... 이리도 아름다웠구나.”

 

 

태양의 빛이 그녀의 눈을 지져다시 그녀의 눈 앞을 끝없는 암흑으로 만들기까지는 단 수초면 충분했다

 

그러나 그 잠시의 순간동안 보았던 세상은 그녀를 매혹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보잘 것 없는 언덕과 나무들도그 사이 어귀를 채우는 작고 다듬어지지 않은 이름없는 들풀들도태양의 광휘 아래 제왕과 같은 위엄으로 황금빛 옷을 갈아입는 것이다.

 

그녀가 미소짓고 있었다

 

 

당신을 이제서야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

 

 


불사(不死)는 불생(不生)이다.

 

언제까지나 운명은 그 신념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보인다

 

그렇기에 운명은 시작도끝도 아득해보이는 불사종들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내었나보다.

 

이것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불사자를 죽이는 병이라 불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