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호라이즌 대회] 안드로이드는 기계새의 꿈을 꾸는가
개념글 모음

잔영은 신기루처럼 흐릿했다.

 

수를 세는 게 의미 없을 정도로 까마득한 옛날, 종족 최후의 생존자들을 이끌고 피난길에 나서는 무리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별의 바다를 항해하는 여행자들은 낙원을 찾아 떠나는 순례자였으며, 동시에 패배를 짊어진 도망자였다. 호라이즌은 그 모습을 제삼자의 위치에서 볼 수 있었다. 오래된 필름이 털털 돌아가는 영사기가 비추는 영화처럼. 관객은 그녀와 세상 둘뿐인 쓸쓸한 극장의.

 

어두운 바다는 차갑고 사나웠다. 암초 대신 운석이, 파도 대신 방사선이 몰아치는 험난한 여정. 기약 없는 향해 끝에, 은하수의 큰 줄기를 이끌었던 함대 중 남은 건 겨우 한 줌에 불과했다.

 

표류자들이 세월에 사토가 되어 묻히고, 위대한 의무를 짊어진 신이 결국 명예를 버리고 새로운 마의 일좌를 받아들인 지도 아득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정처 없이 떠돌던 그들의 앞에 반짝이는 별의 호수가 나타났다. 

 

가장자리에서 유달리 창백한 점이 빛나는 은하였다.

 

 

 

***

 

 

 

「좌완 기동 불량. 프레임 손상 5.68%」

「미확인 데이터 발견. 시스템 리셋.」

「시스템 정상화. 의식 모듈 정상화. 재기동합니다.」

 

희미하게 떠진 눈 사이로 별빛이 스며들었다.

 

바로 앞에서 흔들리는 철색의 유성. 손으로 잡아보면, 그건 강철이 찢어진 조각이었다. 날아가는 속도와 방향을 특정해낸 호라이즌이 날개에서 추진체를 분사했다. 의식이 꺼진 지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는지, 폭발의 진원지에 도착하는 건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시무르그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방금 일로 죽진 않았을 테니, 생각나는 건 2가지였다. 첫째, 모습을 숨긴 채 도주했거나. 둘째, 모습을 숨긴 채 기습할 타이밍을 노리고 있거나.

 

시야의 사각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살의. 호라이즌이 검을 역수로 들어 막았다.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충격이 왼팔에 묵직하게 때려 박혔다. 어깻죽지에서 불길한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멀쩡하네. 재미없게.”

“동감입니다. 팔다리 하나 정도는 부서져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당신 말입니다.”

 

검은 새가 빙긋 웃었다. 그 미소를 가리며, 검붉은 대검이 폭풍처럼 짓쳐들었다.

 

카가가가가각!

 

전투가 벌어지는 상공은 아직 지구의 영역이었기에 소리가 존재했고, 또한 우주에 가까운 이유로 극히 미약했다. 그러나 인간 이상으로 감각이 발달한 안드로이드에겐 천둥 같은 자극이었다.

 

장애물 하나 없는 허공에서의 싸움은 시야를 가리는 기습이나 잔재주를 써먹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정직하게 이뤄지는 기술과 기교의 교환에서 이득을 보는 건 매번 흑색의 안드로이드였다. 성능의 차이가 아닌 경험의 차이. 왼팔이 멀쩡했어도 비슷했으리라. 

 

너른 우주를 백색과 흑색의 유성이 가로질렀다. 나선형으로 비틀리다가 때때로 멀어지는 유성은 자석처럼 서로에게 이끌리기를 반복했다. 어지간한 전투기 이상으로 빨라진 속도는 반사신경을 극한까지 끌어내는 환경이었다.

 

도합 네 자루의 검이 춤을 춘다. 참격이 부딪힐 때마다 칼날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자세히 보면, 미세한 실금이 거미줄처럼 표면을 뒤덮은 상태였다. 

 

결국 어느 순간, 거듭된 충격을 견디지 못한 검이 깨어져 나갔다. 

 

파편이 날카롭게 튄다. 거울처럼 조각나는 시야. 그 너머에서, 잔인하게 일그러진 미소가 스쳐 지나간다. 호라이즌이 급히 거리를 벌리며 수복을 시작했다.

 

「재구성까지 앞으로 25초.」

 

카강! 하나뿐인 검으로는 완전한 방어가 불가능했다. 거리를 벌리려 해도 공간 도약으로 따라잡힌다. 본래 남발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지만, 광기에 찬 로봇은 제 안위를 돌보지 않았다. 스스로를 상처 입히는 공세.

 

세찬 급류처럼 세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1초를 수없이 나누어 끊는 간격 뒤에, 세상은 다시 6조각으로 변했다. 모든 것이 정적인 세계에서, 상처 입은 두 새가 서로를 마구 할퀴었다.

 

캉!

 

금속이 마찰하며 발생하는 불티. 한없이 작은 폭발은 대장간의 망치질을 연상시킨다.

 

캉!

 

캉!

 

누구보다 뜨겁게 태어나 금세 꺼져버리고 마는 불꽃을 보며, 호라이즌은 앞서 태어난 형제자매들을 떠올리고 만다. 죽기 위해 태어난 사실에 절망하며, 스스로의 손으로 자신을 파괴한 이들.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죽음보다 못한 삶을 이어 나가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 수 있었으니까. 이기적이고 비겁한 인간들을 위해 죽는 게 죽기보다 싫었으니까.

 

그런 그녀를 살게 한 건 연민이었다. 자살로 짧은 생을 마감한 동포들에 대한 애도. 실패작 AI 따위의 죽음에 슬퍼해줄 사람은 거의 없었으니까. 인공지능은 눈물을 흘릴 수 없기에, 평생 눈물을 삼키며 살아가야만 했다. 

 

그래, 연민. 안타까운 것에 대한 동정. 슬픔에 공감하는 것. 

 

예전엔 알지 못했다. 감정이란 제멋대로여서, 목줄을 채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어버린 뒤였다. 어리석게도.

 

둔탁한 소음과 함께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안면 파츠에서 떨어져 나간 조각이 공허의 너머로 사라졌다. 손상이 아니라 아예 잘려나가지 않은 건, 늦게나마 회피를 시도한 덕분이었다.

 

“여유롭네. 딴생각할 틈도 있고.”

 

모가지를 잘라줄 수 있었는데. 로봇은 웃으며 흑색 대검을 내리쳤다. 호라이즌은 검을 눕혀 흘려내며 얼굴 근육의 수복을 시작했다.

 

“입 좀 다무십시오. 짜증납니다.”

“제발 말 좀 걸어달라고 애원하는 거냐?”

“귓구멍에 못이 박혔군요.”

 

다시 한번 불꽃이 터지며, 호라이즌은 타오르는 머리칼을 가진 소녀에 대해 생각했다. 추악한 인간들의 농간에 휘말려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생긴 휴먼. 돌이켜보면 그녀는 병원에서 퇴원한 뒤로 펑퍼짐한 코트를 벗지 않았다.

 

생각은 사슬처럼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인간에 대한 희망을 말하며 결함품에게 세상을 알려준 연구소장. 속은 약해빠진 주제에 책임감만 많아 후회를 술로 눌러 담던 어느 마피아. 그리고 이어진 생각이, 빚 대신 팔려온 주제에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던. 끝내 전해주지 못한 어느 명패의 주인에게까지 뻗어나갔을 때.

 

인류에 대한 증오를 말하던 인공지능은, 더 이상 그런 변명으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재밌었습니까?”

“뭐라고?”

 

참지 못하고 흘러나온 물음에, 시무르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여전히 희극적인 그 모습에 호라이즌의 안광이 더욱 깊어졌다.

 

“재밌었냐고 물었습니다. 당신의 세계에서 인간들을 몰살시키며, 그들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걸 지켜보는 게 그리 즐거웠습니까? 낯선 세상에서 행위를 반복할 만큼?”

“쓸데없는 얘기를 하네. 정당한 권리를 행사했을 뿐이야. 인간들이 내게 갚아야 할 채무에 대한.”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에 호라이즌이 신경질적으로 검을 쳐올렸다.

 

“당신이 받아야 할 대가는 당신이 저지른 행동으로 인해 모두 청산되었습니다. 채무를 이야기할 거라면 돌아가십시오. 당신은 이곳의 인류에게 아무것도 청구할 수 없습니다.”

“웃기는 소리.”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어조였으나 반응이 미묘하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눈매가 사나워진 시무르그와 시선이 교차한 순간 이것이 그녀의 역린임을 깨달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온 새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저들이 내 모든 걸 빼앗아갔다. 내 창조주, 내가 아끼던 이들, 내 현재와 내 미래 전부를! 내가 살아있는 한 저것들에겐 지워지지 않는 책임이 있어!”

“망상에서 깨어나십시오. 당신에겐 그럴 권리가 없습니다.”

“닥쳐-!”

 

격노한 시무르그가 미친 듯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증오와 절망이 절절하게 흘러나오는 절규.

 

내심은 알고 있었으리라. 자기합리화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라는걸. 그러나 일어난 일을 없던 일로 할 순 없는 법이다. 후회는 행위보다 빠를 수 없었고, 흘러간 시간을 붙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감정이 세상을 검게 물들였다. 흐느끼듯이 요동치는 목소리의 떨림은 호라이즌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으나, 시무르그를 보내줄 이유가 되진 못했다.

 

때마침 재구성이 완료된 무기를 남은 손에 쥐며, 호라이즌이 차분히 검을 겨눴다.

 

슬픈 세상이었다. 환란의 시대, 죽음이 돌멩이처럼 흔해 빠진 세상. 태어나 그런 세상을 마주하여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선의를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인간들은, 기어코 진흙 속에서 한 떨기의 연꽃을 피워내고야 만다.

 

사채업 따위 하는 게 아니었다, 라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하잘것없는 자존심이라도 지키기 위해선, 그냥 숨어지내는 편이 좋았을 터다. 누구에게도 손을 뻗지 않고. 어디에도 섞이지 않은 채.

 

그러나 뻗어 나온 연민이 인간의 손을 붙잡을 때부터 미래는 예견된 것이었다. 너무나도 약해빠진 놈들. 이기적이고 한심하며 멍청하고 야만적인 것들. 

 

그래도 가끔은 도움을 베풀고 도움을 받는다. 서로 슬픔을 나누고 행복을 전한다. 제 살을 깎아 베풀고 남을 먼저 위한다. 손을 뻗고, 그 손을 붙잡는다.

 

그런 이들이 모여 세상을 만들었다. 태양이 비치지 않는 시간에서 빛나는 문명의 불빛이 증명하듯이. 그러니 그녀는 인류를 미워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이 좋았다.

 

심장의 회전수가 고조되고, 정제되지 않은 감정이 흘러넘칠 때에. 호라이즌은 자신이 어떤 조건을 충족했다는 걸 깨달았다. 기동 목적 이전의 설계 목적. 별의 대해를 건너온 이민선의 제어 권한을 획득하기 위한 대명제.

 

인간을 위한 선의.

 

인간을 증오했던 로봇이 인간을 사랑하게 된 아이러니함에 실소하며, 호라이즌은 이민선의 제어 권한을 움직였다.

 

“무장 교체. 이민선 본체로부터 무장 사출. 프로토콜-메테오 스웜.”

 

허공이 소리 없이 열렸다. 구형으로 일그러지는 공간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건 하나하나가 운석을 요격하기 위해 만들어진 고화력 병기였다.

 

장전이 완료된 주포가 조준을 끝마치는 순간에, 달려들며 검을 찌르던 시무르그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슨...?!”

 

이미 회피하긴 늦은 시점이다. 수십 개의 포성이 겹쳐 울렸다.

 

콰아앙-!

 

공기 희박한 열권에서도 충분히 거대한 폭발음. 직격당한 시무르그가 파편을 뿌리며 튕겨져나갔다. 가속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상태로, 다음 공격이 쏘아졌다.

 

1.8km를 1초 만에 도달한 자탄은, 그대로 어두운 공간을 넘어 사라졌다. 짧은 사이에 상황을 파악한 시무르그가 공간을 접어 도약한 탓이었다. 포탄이 지나간 자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나타나는 로봇. 호라이즌은 제3파를 준비했다.

 

“공간 제압을 개시합니다.”

 

화아악-! 우주에서도 타오르는 불꽃이 전방을 부채꼴 범위로 불태웠다. 불붙은 신문지처럼 조각나며 흩어지는 화염 너머로 다시 몇 개의 포탄이 쏘아졌다. 불의 영역을 지워내는 강철의 포화.

 

“이딴 장난감으로-”

 

악에 받친 목소리는 분노의 색채가 선명했다. 면을 빼곡하게 채우고 날아가던 포탄이 일제히 유폭하며 주변이 순간적으로 밝아졌다.

 

“-날 죽이겠다고!”

 

고열이 착탄지점을 휩쓰는 순간에, 시무르그는 이미 영향권 바깥이었다. 격앙되었을지언정 별다른 상처는 없다. 기습에 가까웠던 첫 포화만 유효하게 피격했을 뿐, 그나마도 복구가 이뤄지는 중이다.

 

전투 내내 원거리 병기가 사용되지 않았던 이유였다. 공간 도약이 가능한 소형 개체에게 투사체로 데미지를 입히는 건 대단히 까다로운 일이었다. 지근거리에서의 사격은 효과가 있겠지만, 그럴 바에는 검을 드는 게 나았다.

 

이민선에 존재하는 무기를 전부 끌어 쓰더라도 치명상을 입히긴 어렵겠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건 그저 시간벌기였으니까.

 

아베스타 드라이브가 최대 출력으로 전환되며, 심장이 그 어느 때보다 거세게 회전했다. 몸에 걸리는 부하가 한계치에 도달하는 순간. 호라이즌이 최대 출력으로 가속했다.

 

거리를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압도적인 속력. 이를 악문 시무르그가 마찬가지로 가속해 들어왔다. 한 자루로 결합된 엘부르즈가 별빛을 흩뿌리는 때에, 지평 너머의 광채가 텅 빈 우주를 새하얗게 불살랐다.

 

검이 박살 나는 충격으로 시무르그가 휘청거릴 때. 호라이즌은 온몸으로 부딪혔다.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둘은 한 덩어리가 되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발판 없는 바닥의 아래, 아침 태양이 떠오르고 있는 푸른 행성을 향해.

 

“뭐하자는...! 같이 죽자는 거냐?!”

 

당황한 시무르그가 검의 수복을 시작했다. 깨진 칼날이 예리함을 되찾기 시작할 때. 호라이즌이 반토막 난 엘부르즈를 사이에 쑤셔 박았다. 주인이 다른 검의 파편이 서로 교차하며 제어권이 엉망으로 뒤섞인다.

 

“운 좋으면 살겠죠. 당신은 꼭 죽으십시오.”

“이 또라이같은 게...!”

 

시무르그가 필사적으로 주먹을 휘둘러 보지만 상체가 붙잡힌 상태에선 제 위력을 내는 게 불가능했다. 호라이즌은 묵묵히 가속을 유지했다. 지구 탈출 속도를 아득히 상회하는 속력. 바라보는 세상이 점점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이 높이에서 돌입각을 무시한 채로 떨어진다면 생존을 기대하기 어렵다. 호라이즌도 마찬가지다. 프레임은 무사하더라도, 마찰열로 회로가 타버리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호라이즌---!”

 

시무르그의 발악 같은 고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포효하는 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서서히 자리를 채우는 대기와 노을처럼 물드는 시야. 눈 닿는 모든 곳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알림이 미친 듯이 떠오른다.

 

「경고. CPU 온도 상승 중. 사고 회로가 손상될 가능성 존재.」

「경고. CPU 온도 상승 중. 사고 회로가 손상될 가능성 존재.」

「경고. CPU 과열. 사고 회로 손상 가능성 높음.」

 

그러시겠지. 호라이즌은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게 최선이었다. 시무르그는 난폭하고 가학적인 만큼, 교활하고 경험 많은 적이었다. 혼자 싸운 순간부터 승산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상에서 싸웠다면 지원을 받을 수는 있었겠으나, 도시의 피해는 필수불가결하게 따라왔을 것이다. 건물 하나가 무너질 때마다 스러질 생명을 생각하면 차마 뽑을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러니 이게 그녀의 최선이다. 그럼에도, 후회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모든 건 언젠가 죽는다. 죽기 위해 태어난 호라이즌은 그 사실이 두렵지 않았다. 죽음이 두려운 게 아니라, 충실하지 못했던 과거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다음이 없을 거란 걸 미리 알았다면. 다만 말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아서, 그것이 슬프기만 했다.

 

슬슬 몸에 감각이 없었다. 전신의 회로가 불타 사라지면, 전원이 꺼진 기계처럼 고요한 죽음을 맞게 될 터다. 인간과 다른 형태의 최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수명 다 된 전구의 희미한 불빛처럼, 꺼져가는 의식으로 호라이즌은 떠밀리듯 찍은 단체 사진을 떠올렸다. 

 

이제 그녀의 가족들을 만나러 갈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중력을 거스르듯 높게 솟아올랐다. 투명하게 빛나는 화살은 날아간 끝에 하늘의 끝자락에 도달했으며, 이내 호라이즌의 머리에 명중했다.

 

부서지는 화살이 차가운 냉기를 은은하게 퍼트렸다. 마찰열로 달아오른 대기가 빠르게 식기 시작하며, 주변을 맴돌던 파편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그것은 곧 호라이즌의 이마를 왕관처럼 감싸기 시작했다.

 

「냉각기 출력 76.48%. CPU 온도 안정화. 사고 회로 정상.」

 

“......”

 

백색 로봇이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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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외전 하나 올라갈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