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시작은 부모와 아들, 딸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가족이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내 둥지 옆에 정착한 그들은 땅을 개간하고 작은 동물을 사냥했다.


 처음에는 내쫓을까 생각했지만 의외로 몰래 지켜보는 재미가 있어 저들 모르게 농작물을 심은 땅에 축복을 걸고 사냥감을 조종해 덫에 걸리게 하는 등 소소한 도움을 주며 지켜봤다. 그럴 때마다 행복해 하는 모습이 퍽 보기 좋았다.


 이따금 소통이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만뒀다. 용의 모습으로 다가가면 내가 괜찮다고 해도 무서워할 것이 뻔하고 폴리모프는...사용하기 싫었으니까. 


 그렇게 십 년이 조금 넘게 흘렀을까. 어느덧 정착하는 인간의 수가 늘더니 마을을 형성했다. 내가 드래곤 피어를 이용해 근처 몬스터들을 모두 내쫓은 덕에 안전한 곳으로 소문이 난 모양이었다. 처음 정착한 가족의 부부는 마을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마을 유지 겸 촌장 역할을 맡게 되었다. 아이들은 다른 정착민들 사이에서 맞는 짝을 맞아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마을이 된 탓에 조금 시끄러워 졌지만 천천히 성장하는 모습이 뭔가 도시 건설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 같아 즐거워 그냥 놔두었다.


 땅에 내린 축복 덕에 마을은 빠르게 발전했다. 이 땅의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영주가 찾아와 세금을 거둬가는 일도 생겼다. 이 마을에 소속된 사람들과 물건들을 모두 내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순간 죽여버릴까, 하는 충동이 들었다. 아무래도 용의 본능인 듯 했다. 다행히 현대인의 이성이 용의 본능을 억누르는데 성공했다. 영주도 게임 시스템의 일부로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또 훌쩍, 십 수년이 지났다. 처음 정착한 가족의 부부가 죽었다. 일방적인 관계였지만 내적 친밀감을 많이 쌓은 탓에 멀리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는 울적함을 달랠 수 없었다. 그래서 장례식이 끝난 뒤 무덤을 찾아갔다. 물론 인간의 모습으로 폴리모프 했다.


 내 폴리모프 모습은 한 쌍의 뿔과 꼬리를 가진 청발벽안의 아름다운 미소녀였다. 키는, 음...150cm가 아슬아슬했다. 그리고 이게 내가 폴리모프를 싫어하는 이유였다. 블루 드래곤으로 전생한 터라 드래곤라X의 지골X이드 형님 같은 멋있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했는데. 아니, 애초에 난 남자였다고. 대체 왜 여자인데.


 아무튼 늦은 새벽, 나는 그들의 무덤에 꽃을 내려놓고 조용히 명복을 빌어주었다. 떠나려던 차, 화장실이라도 가려 했던 것인지 부부 아들의 두 딸이 손을 잡고 비몽사몽한 얼굴로 집 밖으로 나왔다. 달이 밝은 밤이었던 터라 나는 둘과 눈이 마주쳤고, 검지 손가락을 입에 올려 '쉿'하는 소리를 냈다. 두 딸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을 보고는 블링크를 이용해 둥지로 돌아왔다.


 ......둥지에 돌아와서 알았는데 알몸이었다. 시발. 드래곤으로 지낸 기간이 너무 긴 모양이다.


 그 후로 마을에 수호신이 있다는 이야기가 퍼졌다. 어린아이 둘이 떠든 신빙성 없는 소문이었음에도 워낙 살기 좋은 곳이라 그런지 그 목격담은 제법 진지하게 받아 들여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딸의 증언에 따라 내 폴리모프 모습을 묘사한 듯한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졌다. 다행히 동상에는 옷이 입혀져 있었다. 고맙다! ......그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드래곤의 모습으로 갈걸.


 그래도 동상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그 해에 대 출혈 서비스를 제공했다. 땅에 축복을 왕창 걸었고, 마을은 엄청난 풍년을 맞으며 성대한 축제를 벌였다.


 또 십 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그날 만났던 아이들은 내게 제사를 올리는 무녀 비슷한 것이 되어 있었다. 용의 무녀라. 좀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토착 종교가 있는 것 같던데, 다신교를 인정하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문제가 생기면 내가 어떻게 든 해결하면 되겠지 싶었다.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함인지 촌장은 전혀 모르는 집안의 사람이 하고 있었다. 대충이나마 삼권분립이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기에 좋은 현상이라 생각했다.


 그나저나 눈만 감았다 뜨면 십 년이라니. 드래곤이 된 이후로 시간 감각이 마비되는 기분이다. 


 마을에서 봄 축제를 준비하던 중 전쟁이 터졌다.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 오가는 상인들이 떠드는 이야기에 따르면 마을이 속한 왕국이랑 옆 왕국이 무슨 광산을 두고 분쟁이 발생했다고 했다. 이번에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에 대한 내 관심 여부와 무관하게 전쟁은 내 마을에 아주 관심이 많은 듯 했다. 세금을 거둬가던 영주가 군대를 이끌고 찾아온 것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노인이 된 영주는 지쳐 보였다. 그는 내 마을에서 건장한 남성 몇 명과 곡식 따위를 징발해 갔다. 화가 났지만 예전처럼 살인 충동까지 일어나진 않았다. 이성이 성장한 것인지 본능이 죽은 것인진 모르겠다. 아무튼 좋은 현상이었다.


 그리고 그땐 몰랐지만 영주는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으면 다른 영지보다 세율이 굉장히 낮다,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는데도 정기적으로 순찰대를 보내주신다 같은 이야기가 들려왔다. 전쟁으로 인해 부득이하게 물자와 인력을 징발할 때는 마을 사람들에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까지 했다. 그가 살아 돌아오길 바라며 갑옷에 가벼운 축복을 부여했다. 마법사가 있어 들키지 않을까 했지만 용언은 마법이 아닌 것일까,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 뒤로 이 년이 지났다. 돌아온 것은 영주의 군대가 아니었다. 비슷하지만 낯선 복장을 한 그들은 무언가 대처를 할 틈도 없이 마을을 공격했다. 약탈이었다.


 이때는 참지 못했다. 바로 뛰쳐나가 그 빌어먹을 것들을 쓸어버렸다. 브레스를 뿜어 튀기고 짓이겨 터트렸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여버렸다. 그리고 살아남아 도망치는 자들을 향해 포효했다.


"이 땅과 마을에서 나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다! 그 누구도 내 허락 없이 내 것을 가져갈 수도, 해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소리 내어 말할 일이 없어 몰랐는데, 내가 드래곤일 때 내는 목소리도 여성스러웠다. 아니, 소녀스러웠다.


 이런 시발.





이상하다. 분명 생각바구니 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