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환상향에 남아로 태어난 이상, 인생의 선택지라고 할 것이 그다지 많진 않다. 좁디 좁은 인간 마을에 갇혀사는 신세, 뭘 그리 욕심내서 바라겠느냐만 지루함이라는 건 가끔 세 끼 밥을 굶는 것보다 견디기 힘들만큼 끔찍했다.

내가 책과 지식에 관심을 두게 된 것도, 순전히 지루함을 달래고자 하는 이유였다.

먹는 즐거움은 한 시진도 못 가 꺼지고, 홍등가에서 왁자지껄 놀아봤자 나쁜 풍문만 괜히 도는 법. 
타인이 보기엔 점잖아 보이고 제법 존중도 받으니 내겐 이만한 취미가 없었다.

책을 읽을 마땅한 곳이 서당밖에 없기에, 나는 그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서당의 선생도 나를 대견히 여겼는지 위층의 서재까지 열어서 나를 들여주었고, 난 종종 선생의 수업을 돕는 대가로 책들을 자유로이 읽게 되었다.



"오늘은 또 무슨 일로 저리 시끄럽습니까?"

서당의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은 시시덕거리며 도망치듯이 자신의 집을 향해 뛰어갔다. 케이네 선생은 평소답지 않게 진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평소처럼 짖궂은 장난에 당해줬을 뿐이야. 하여간, 아무리 가르쳐줘도 효과가 없다니까."

무심히 머리카락을 넘기는 뒤로 그녀의 귓가가 붉었다. 저런 반응이라면 뭘 당했는지 물 보듯 뻔했다.

"아직도 그 소문을 떠들고 다니는 겁니까?"

'선생님이 서재에 남자를 숨겼다!' 
내가 위층 서재에서 나온 걸 아이들이 목격한 후로 계속해서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냥 무시했다면 아이들도 흥미를 잃고 질렸을 테지만, 얼굴까지 붉히며 화를 내는 케이네 선생의 반응이 영 재밌었는지, 아직까지 이 소문은 진화될 기미조차 없었다.

"뭘 그렇게 신경을 쓰십니까. 아이들이 순진한 마음에 떠드는 부언유설에 불과한데."

"나야 괜찮지만, 혹여 네게 누가 되진 않을까 싶어서 그러는 거야. 혼기도 머지 않은 참에 그런 풍문은 좋을 게 없잖아."

혼인,
물론 혼인을 생각하기에 이상하지 않은 나이긴 하다만은,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닌가.

"어차피 조만간은 색시를 찾을 생각 없으니 제 걱정은 마셔도 됩니다. 관심만 주지 않는다면 소문은 자연히 사라지는 법이예요."

그럼에도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지, 케이네 선생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술을 오물거렸다. 매사에 저렇게 진지해서야 평소엔 어떻게 사는 건지.

"아니면, 아예 소문을 진실로 만들어 버린다면 더 이상 그런 뒷말이 퍼지지 않을텐데요."

진지한 표정도 풀어줄 겸, 나는 실없는 농담을 대충 던지고 그녀를 지나쳤다. 뒤늦게서야 내 말을 이해했는지, 등 뒤에서 무어라 시끄러운 말이 들려왔다. 지금쯤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어 있으리라.

저렇게 재밌는 반응을 보여주는데 어린애들이 어떻게 장난을 끊겠는가. 케이네 선생의 과실이 크다. 나는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이 수업했던 방을 청소하고, 마당을 빗질하면, 자기 전까지 책을 읽을 여유가 생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오늘은 수업도 많지 않았으니 서재에 일찍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응?"

모퉁이를 돈 순간, 저 멀리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여성, 그것도 제법 키가 크다. 마을의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도 클 정도였다. 입고 있는 옷은 마치 이국의 황비처럼 화려하고 눈에 띄어, 서당의 평범한 배경과는 동떨어지는 이질감이 들었다.

저런 복식을 입을 수 있는 사람은 마을에 극히 드물다. 그리고 그 '드문' 사람들 중에서 금발은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저게 누구겠는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침을 삼켰다. 그래, 드문 일이긴 하지만 요괴도 종종 서당에 찾아오곤 한다. 비록 저렇게 성숙한 여성의 모습을 갖춘 요괴는 처음이긴 하다만.

"...서당에 용무가 있으십니까?"

케이네 선생을 불러야 할지 고민했지만, 우선 먼저 의중을 떠보기로 했다. 나는 적절한 거리를 남긴 채로 최대한 친절하게 말을 건넸다.

녹슨 칼집을 뽑아내듯 어색하게 그녀의 고개가 회전했다. 잘 깎은 보석처럼 선명히 빛나는 적안이, 내게 고정됐다.

나는 그녀의 눈을 마주한 순간 굳어버렸다. 공포에 질렸다느니,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훨씬 멍청한 이유였다.

내 생애 보았던 그 누구보다도, 그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그대인가."

누구도 깨지 못하는 침묵 속, 먼저 입을 연 것은 외부인이었다. 목이 졸린듯 작고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알아듣긴 어렵지 않았다.

그대? 처음 만난 사람을 부를 호칭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맹세코 나는 그녀를 알지 못했다. 스쳐 지나가는 중에 봤더라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절 아십니까?"

겨우 용기를 내어 질문을 했다. 큰 용기였다. 예전에 마을을 돌아다니던 대요괴와 어깨를 실수로 부딪혔을 때도 지금처럼 떨리지는 않았었다.

"...아주, 잘 알지."

어떤 의미인지 모를 희미한 미소가 그녀의 입술에 배어들었다. 웃음이라기엔 너무나 쓴, 고통을 닮은 미소였다.

"혹시, 제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오신 거라면 안으로 들어가서..."

여인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수많은 고민 끝에, 결국은 포기해버린 듯 허탈함이 목소리에 묻어나왔다.

"지금은...아니다, 도저히 전할 수가 없구나."

같은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게 맞긴 한 걸까.
우수에 차 중얼거리는 그녀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다.

사별했던 연인이라도 만난 듯한 저 애틋함이 어째서 나를 향하는가. 아무 말 없이 떠날 거라면 그녀는 왜 이곳에 온 것인가.
그 수많은 의문 중 하나조차 풀어주지 않겠다는 듯이, 여인은 내게서 발을 돌려버렸다.

"때가 된다면, 그대에게 다시 전하러 오겠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마치 꿈에서 깨어나듯, 그녀는 서서히 내게 멀어져 어느샌가 그 기척을 끊어버렸다.

"...허."

요괴에게 홀려버렸던 건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뒤뜰에 홀로 남아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환상인가 싶어도, 방금 전보다 저물어있는 석양이 현실임을 증명했다.

케이네 선생에게 상담을 청해야 하나. 
요괴와 접촉할 일 자체도 드물지만, 오늘같은 일은 전대미문이었다. 전문가에게 도움을 받는 것이 낫겠지.

'때가 된다면, 그대에게 다시 전하러 오겠다.'

"...뭘 전하러 오겠다는 건지."
지금 머리를 짜내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다시 만난다면, 어쩌면 알 수도 있을 테지만.



***



"금빛 머리칼에 화려한 고대 복식, 키가 5척하고도 3촌 남짓? 으응..."

케이네 선생은 긴 침음성을 흘리며 턱을 쓰다듬었다. 주위엔 여러 책들이 펼쳐져 있었지만, 정보를 얻는 데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는 듯 했다.

"여성치고 큰 키와 금발이라면 요괴의 현자와 그 식이 떠오르는데, 아마 그 자들은 아니겠지?"

"아닙니다. 제가 봤던 여인은 눈이 아주 붉었어요. 마을에 약 팔러 오던 토끼 요괴처럼요."

케이네 선생은 내 부연 설명에 더더욱 미궁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녀가 이토록 무언가를 고심하는 것은 흔치 않은 광경이었다.

"인간 마을에 자주 방문하거나, 위험한 요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긴 하지만...네가 말한 여인은 생소해. 기록을 뒤져봐도 단서 하나 안 보이고."

인간 마을의 가장 명석한 선생조차도 그 여인의 단서 하나 모른다니. 낭패였다. 귀신도 아니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건가?

"...미안해, 모처럼 부탁받았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네."

"죄송하실 필요 없어요. 제 변덕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죠."

실망한 건 사실이지만, 그게 어디 선생의 탓이겠는가. 난 아쉬운 마음에 뒷목을 매만졌다.

그 정체불명의 여인은 서당에서 만난 이후로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때처럼 말을 걸어오진 않았고, 저 멀리서 가끔씩 이쪽을 바라보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말을 걸려고 다가가도 어느샌가 사라져 있으니, 정말 무언가에 홀리지 않은 건가 싶지만, 케이네 선생의 진단에 따르면 심신은 멀쩡하다고 한다. 그렇기에 더 답답한 노릇이었다.

"바람 좀 쐴 겸 시장 좀 다녀올게요. 원하시는 찬 있으세요?"

"평소처럼 사오면 돼. 그리고 곧 만월이니까, 창문이랑 문을 가릴 어두운 창호지 좀 더 부탁해."

밖이라도 걸으면 답답한 게 좀 풀릴까. 난 케이네 선생의 심부름을 자처해서 시장으로 나가기로 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그 여인을 보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끼익,
돈꾸러미를 서재에 뒀던가. 난 위층 서재로 들어갔다. 그새 켜뒀던 초가 꺼졌는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고 깜깜했다.

상관 없겠지. 돈만 챙기고 나가자. 난 책장을 더듬으며 돈꾸러미가 있을 곳으로 엉거주춤 나아갔다.

책상이 이쯤이던가.

물컹.
"히약!"

뭐야 이거.

"당신, 누구?! 읍..!!"

손에 쥐어지는 이상한 부드러움과 작은 비명.
그 수상한 인기척에 소리를 지르려는 즉시, 입이 다물어졌다. 마치 인형실에 조종당하는 듯이 몸 한 마디 옴짝달싹 하지 못하게 됐다.

"정마알, 요즘 환상향 아이는 다 이렇게 대담하니? 갑자기 내 몸을 더듬다니, 용감하기도 해라."

딱,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광원이 생겨났다. 그제서야 내 앞에서 히죽거리는 침입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대체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의복인지 짐작조차 안되는 해괴한 복식이었다.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알리듯이 세 개의 거대한 구체가 주위를 둥실거리며 떠다녔고, 그 중 붉은 구체 하나가 그녀의 머리 위에 있는 검은 똬리에 안착해 있었다.

"...당신, 뭐야."

목소리를 작게 죽이고서야 나는 침입자에게 질문을 할 수 있었다. 소리라도 지르면 케이네 선생이 들을 수 있을 까 싶었지만, 그걸 실천으로 옮길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앗, 나 지금 경계받고 있는 건가? 그럴 필요 없어, 얘야. 난 그냥 너한테 용건이 있어서 찾아온 손님일 뿐이라구."

침입자가 손을 휘젓자 내 몸을 묶고 있던 정체불명의 힘이 사라졌다. 그녀는 무해함을 강조하듯 실없이 싱글싱글 웃어댔지만, 당연히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용건이 있으시면, 빨리 말하시죠."

하지만 내가 뭘 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는 일에 대해선 빠른 체념이 답이다. 나는 쌓여있던 책들을 대강 치우고 둥근 탁상 앞에 앉았다.

"얘야, 너 요즘 어떤 여자 하나가 계속 쫓아다니지 않니? 금발에, 세상 다 무너진 거 같은 눈 하고 있는 키 큰 여자 있잖아."

"당신이, 그걸...어떻게 압니까?"

침입자는 내 맞은편에 아주 편안한 자세로 앉은 후, 대뜸 생각치도 못한 화두를 던졌다. 나는 자세를 고쳐앉으며 그녀에게 몸을 기울였다.

"어떻게 알긴, 그 스토커가 바로 내 친구라서 알지. 하여간, 순호 그 기집애, 요즘엔 맨날 당신 쫓아다니느라고 얼굴 보기도 힘들어."

"...이름이, 순호입니까?"

"응? 아직 이름도 못 들었던 거야?"

"이름은 커녕 제대로 된 말 몇 마디도 나눠본 적 없습니다. 첫 대면 이후로는 아예 마주치려고 하지도 않고..."

바보같은 계집애, 여자는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고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이윽고 긴 한숨을 푸욱 내쉬더니, 여자는 대뜸 이쪽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얘야, 내가 용건이 있어서 찾아왔다고 한 거, 기억나지?"

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함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 경박하던 그녀의 눈에, 순식간에 무게가 담기기 시작했다.

"너한테 부탁을 하나 할 거야. 난 말야, 내 친구가 불행해지는 꼴을 절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거든.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네 도움이 필요해."

"...제가 왜 그 부탁이라는 걸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겁니까?"

협박이라도 할 셈인가. 난 차갑게 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힘이라면 강제로 따르게 하는 것도 어렵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네가 따르지 않는다고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지. 만약 내가 너에게 손끝이라도 댔다는 걸 순호가 안다면...그 순간, 나랑 순호의 관계는 끝나버릴 테니까."

방금 전까지의 활기 넘치는 목소리는 어디 가고, 그녀는 자조에 가득 찬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까지 긴장했던 자신이 괜히 맥빠질 정도였다.

"하지만, 만약에 네가 날 도와서 협력한다면, 얘야."

툭, 툭. 가느다란 손가락이 탁자를 두드린다. 여자는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조곤조곤 속삭였다.

"뭐든지 하나, 네가 원하는 소원을 이루어줄게."

뭐든지.
그 대담한 약조에선 여자가 가진 자부심의 크기가 엿보였다. 하지만 좀처럼 믿기 힘든 약조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뭐든지'라고 말하는 사람은 주변에서도 제법 봐왔지만, 언제나 제 기준을 만족시키는 사람은 없었는데요."

"흐흐흥, 아직 모르는구나, 얘야. 네 얄팍한 상상력이 떠올릴 수 있는 '뭐든지'는, 내가 가진 권능의 극히 일부에 불과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당찬 선언이었다. 내가 품은 불신마저도 흔들리게 할 만큼 확신에 찬 태도였다.

"무한한 재화? 그런 건 너무 싱겁지. 권력? 환상향의 그 어떤 요괴도, 신조차 널 무시하지 못할 거야. 그 뿐일까, 환상향의 모든 여인을 네 허리 아래에 깔아뭉갤 수 있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나한테 말이 안 되는 건 없어."

여자는 흐흥, 하는 바보같은 웃음을 지으며 콧대를 높였다. 어떤 반문과 의심도 무용지물이 될 확답이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나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해볼 거야?"

...얘기를 듣고 판단해도 늦지 않겠지.
도저히 떨쳐내기 힘든 강렬한 호기심은, 나를 점차 그녀에게 옭아맸다.



***



자칭 지옥신 헤카티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난 후, 난 '순호'라는 여인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천년 전, 환상향이 설립되기도 전, 순호는 하나라에서 자신의 남편, 아들과 함께 살던 소박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하나라의 황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에 빠져서, 남편과 아들을 죽여 그녀를 빼앗았고, 순호는 그 시점부터 복수에 미쳐 망가졌다고 한다.

결국 황제를 죽임으로써 복수의 일부는 마쳤지만, 정작 그녀의 아들을 죽이도록 부추긴 황제의 첩, 상아라는 여인은 멀쩡히 도망쳤기에 지금껏 그녀는 복수의 신령으로서 죽지 못하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그 슬픈 뒷배경에 나는 무슨 상관이 있길래 그녀가 나를 쫓아다니는 것인가?

이것에 대해선 헤카티아도 잘 대답해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알기론, 일전에 순호의 복수를 도와주던 재상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전생이라는 것이다.

말인즉, 전생의 나는 그녀의 복수를 도와주던 협력자였다.



"..."

나는 딴청을 피우는 척 벽에 등을 기댄 채, 흘깃 옆을 살펴보았다. 저 너머, 순호라는 여인이 나무 뒤에 숨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 모르겠네."

내게 감사라도 전하고 싶은 걸까? 하지만 그건 전생의 이야기, 기억이 없다면 아무리 영혼이 같다고 한들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단순히 감사를 전하고 싶었던 거라면 저렇게 부담스럽게 굴 필요도 없지 않은가.
분명히 무언가 더 있어보이지만, 지금은 알 길이 없었다.

'일단 첫 번째 작전! 순호가 도망치기 전에 말을 걸어야 해!'

헤카티아가 지난 밤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떠올랐다. 우선은 그녀와 말을 나누는 것을 목표로 하라고 하던가. 

하지만 조금만 다가가도 귀신처럼 사라져 버리니, 나무 위에서 원숭이 쫓기보다 몇 곱절은 어려운 임무였다.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헤카티아가 해준 조언이 있긴 하다만...정작 시행하려고 하자니 여간 눈치가 보이는 게 아니었다.

"...후."

그래도 가야지. 어쩌겠는가.
난 등을 떼고 그곳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순호 역시도 내 뒤를 밟아 따라오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향하는 곳은 마을 외곽 깊은 곳에 있는 곳, 알 사람들만 알고 계속 찾아오는 불경한 지역,
고작 몇 푼으로 여자의 하루를 사고 노름을 벌여 밤새도록 노는 홍등가였다.

혹여 얼굴을 들킬까봐 노심초사하며 들어가는 꼴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영 한심했지만, 헤카티아의 조언을 들어보기로 했다. 이렇게 한다면 분명 스스로 다가올 것이라나, 믿기 힘든 얘기였다만...선택권이 있어야 하는 말이지.

왁자지껄하는 욕설과 비명이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온다. 
탕녀가 내뻗은 손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단순히 주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는 광경이었다.


설마 아직까지 따라오고 있을까, 나는 힐긋 뒤돌아 순호가 있을 곳을 살폈다.

"...!"

있다.
아니, 있다 뿐인가.

순호는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를 살벌하게 번뜩이며 내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의 무감정하고 딱딱한 표정에 금이 가, 은은한 분노와 실망감, 그리고 안절부절함이 새어 나왔다.

마치 유흥을 즐기는 남편을 발견한 조강지처의 반응과 닮았다. 저런 표정을 보고 있으면, 어쩐지 그녀에게 영 못할 짓을 한 쓰레기가 된 것만 같았다.

어찌나 당황했으면 평소처럼 거리를 두는 것도 생각 못하고, 손을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며 내게 따라붙고 있는가.

계속 이러고 있기엔 들킬 위험도 있고, 괜스레 죄책감도 들었기에 빨리 끝내기로 마음 먹었다. 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허름한 창관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

숨을 삼키는 탄식이 들려온다. 그리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기척이 다가왔다. 인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기척의 접근이 잘만 느껴졌다. 

마침내, 그녀가 창관 주위를 가까이 기웃거릴 때.

타악,
"...읏?!"
"...잡았다."

잘못 쥐면 부러질 것처럼 작고 가녀린 팔이, 내 손아귀 안에 들어왔다. 



***



"계속 아무 말 안 할 겁니까?"

"..."

홍등가에서 멀리 벗어난 한적한 숲, 마을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이지만 그녀가 있으니 요괴를 걱정할 일은 없었다. 나와 순호는 나무 밑동에 앉아 일방적인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첫만남 때도 의아한 말만 남기고 훌쩍 사라지고는, 지금도 아무 말 안 하실 생각이에요?"

순호는 고개를 부자연스럽게 돌려 아무것도 없는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화라기보단 죄인을 신문하는 것에 더 가까운 분위기였다.

헤카티아에 관한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말라고 했으니, 무어라 대화를 이어나갈 화제도 없었다. 그녀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더더욱.

"...이름이 뭐예요?"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미처 묻지 않았던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물었다. 계속해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녀도, 이제야 힐긋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뭐, 이름 정도야 밝힐 수 있는 거 아니예요? 제 이름은..."
"순호."

무거운 입술이 떨어지고 감미로운 미성으로 울린 첫 마디는 그녀의 이름이었다. 드디어 대화라는 게 성립했구나. 이미 헤카티아에게 들어 알고 있던 것이지만, 그녀에게 직접 들으니 괜히 성취감이 들었다.

"...그대는 이름이 무엇인가?"

대답만으로 그치지 않고, 순호는 내게 이어 질문했다. 나는 반가운 심정에 주저없이 이름을 밝혔다.

"...푸훗."
내 이름을 들은 순호는 우아하게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내 이름을 비웃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릴 만큼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네겐 참 안 어울리는 이름이구나."
"...부모님이 무책임하셨던 탓이죠."

비아냥대는 걸 농담으로 알아들은 건지, 순호는 더욱 길게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살면서 이름으로 비웃어진 적은 없었다만, 대체 무엇이 그녀를 웃게 한 걸까.


조금은 부루퉁한 심정에, 방금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왜 절 쫓아오셨는지는...여전히 말할 생각 없으시죠?"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순호는 다시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없는 숲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확고한 묵비의 의지였다.


계속 추궁해봤자 지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게 뻔했다. 난 결국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백기를 들었다. 적어도 지금은 때가 아니였다.

"절 좋아해서 따라다니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헛소리를."

순호는 작게 헛기침을 한 후,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렇게까지 정색을 할 필요가 있는가. 분위기를 풀고자 농담한 셈이었는데, 오히려 역효과였던 모양이다.

괜히 분위기만 어색해졌잖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헤카티아의 말대로 첫 번째 작전은 성공시켰는데, 두 번재는 뭐더라?

'두 번째 작전! 순호랑 어떻게든 다음 약속을 잡아. 그래야 앞으로도 계속 만나면서 친해지지!'

첫 번째 작전의 난이도도 쉽지 않았지만, 두 번째는 더욱 쉽지 않았다. 저런 목석을 상대로 어떻게 주기적으로 만남을 가지란 말인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순호는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정면을 응시할 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할 점은, 방금까지와 다르게 가끔씩 내게 시선을 던진다는 점이었다.

부끄러움인지, 어색함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무언가가 그녀와 나의 거리를 벌리고 있긴 하지만, 그녀가 나를 향해 보내는 감정은 일단 호감에 가까웠다. 그녀도 나와의 시간을 싫어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명분을 만드는 게 중요할 터다. 그녀와 내가 시간을 보내고, 앞으로도 만날 수 있는 명분, 명분이...

"순호 씨, 아니면 당신 설마..."

그래, 하나가 있는 것 같다.

"...서당 일에 관심이 있어서, 절 쫓아다니던 건가요?"


"...?"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 순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능청스레 그 눈길을 무시하고 연기를 계속했다.

"안 그래도 요즘 서당에 학생이 많아져서 손이 부족하거든요. 그래서 계속 사람을 구하고 있었는데...그 공고 보고 오신 거 아니에요? 참, 진작에 말을 하시지!"

물론 거짓말이었다. 손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케이네 선생이 워낙 유능해야지. 인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크게 힘들거나 곤란한 일은 없었다.

"아니다, 나는 그저..."
난 순호가 더 말을 꺼내기 전, 그녀의 손 위에 손을 다정히 포개쥐었다. 그녀가 당황하여 말을 멈춘 사이, 나는 얼굴을 들이밀고 빠르게 쐐기를 박았다.

"다행이에요. 저도 혼자서 서당 일을 돕긴 많이 힘들었거든요. 너무 힘들어서 어떻게 할지 고민이 많았는데...당신같은 사람이 와주면 정말 안심이에요."

"..."

그녀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인다. 몰아붙이는 것에 약한 성정인가. 난 그녀의 자그마한 손을 두 손으로 꼭 감싸쥔 채 사정하듯이 부탁했다.

"처음 한 달만으로도 충분해요. 마음이 바뀌시면 언제든지 그만둬도 괜찮아요. 그러니까..."

저, 도와주실 수 있으시죠?



***



"...저게 네가 말했던 그 여인이니?"

"네, 서당일에 관심이 있던 것 같더라고요. 안 그래도 요즘 서당일도 바쁜 참인데, 제가 제안해서 데리고 왔죠."

케이네 선생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기사, 반인반요인 그녀라면 순호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을 것이다.

"...그럼, 저 여인이 지금껏 널 쫓아다녔던 이유가 고작 서당일을 배우고 싶어서였다는 거야?"

"고작이라니, 말이 심하시네요. 순호 씨가 얼마나 아이를 좋아하는데요. 저것 좀 봐요."

난 문 너머를 턱짓했다. 그곳에선, 순호가 아이들을 자상히 껴안은 채로 자신의 한문 수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순호의 태도는 가식 한 점 없는 순수한 애정만이 가득했다.
...설마 정말 어린애들과 잘 어울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뭐 잘 된 일 아닌가.

"애들도 순호 씨를 잘 따르고, 문제될 건 없지 않아요? 그리고 계속 서당일을 하실 것도 아니고, 몇 달 뒤면 떠나실 테니..."

순간, 방 전체가 싸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케이네 선생은 들고 있던 붓을 내려놓고 내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솔직하게 말하렴."

"..."

"지금껏 수많은 요괴와 신들을 마주하고 살아왔지만, 저 여인같은 존재는 처음이다. 무엇 하나 읽어낼 수 없는 의문투성이 존재, 그게 바로 저 여인이야."

차갑고 완강한 그녀의 목소리엔, 나를 향한 걱정과 불안함도 담겨 있었다. 그걸 알았기에, 나도 무책임한 변명을 늘어놓을 수는 없었다.

"선생님."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순 없었다.

헤카티아가 약조한 보답에 대한 것은 미루더라도, 순호라는 여인에 대한 호기심은 이미 마음 깊은 곳까지 뿌리 뻗었으니까.

어쩌면, 다른 감정까지도.

"걱정하시는 거 압니다. 그래도 믿어주세요. 순호 씨가 서당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없을 거라고 보장할게요."

"대체 뭐가 널 그렇게까지 만든 거니? 저 여인이 도대체 뭐길래?"


"그걸 알고 싶어서 부탁드리는 거예요."


반요 특유의 섬찟한 기운이 방 안에서 흩어진다. 어느새 평소처럼 돌아온 케이네 선생은 말썽쟁이 학생 하나를 대하듯 푹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석연찮은 점이 느껴진다면 망설이지 않고 내칠테니 조심해."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난 고개를 몇 번이고 조아려 감사를 표한 뒤에야 그녀의 방을 나섰다. 수업이 끝났는데도 아직까지 교실 내부에선 많은 아이들이 순호의 주위에서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앗, 기둥서방이다!"

"기둥서방 형, 안녕!"


슬쩍 교실에 발을 들이자, 나를 알아챈 아이들의 귀신같이 이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둥서방이라니, 케이네 선생의 남편자리에서 거기까지 격하가 된 건가, 소문이라는 건 참 무섭기 짝이 없다.


"...아이들이랑 있을 땐 잘 웃어주시네요? 저랑 있을 땐 안 그러더니."


순호는 나를 발견하자마자, 아이들에게 보여주던 포근한 미소를 순식간에 감췄다. 그럼에도 한층 느슨해진 입가와 뺨은 숨기지 못했다.


"...애정으로 자라는 아이들에겐 항상 호의가 필요하다. 네겐 웃어줄 이유가 없지 않느냐."


하여간 매정하긴, 그쪽 나이에 비하면 나도 갓난아기에 불과할 텐데.

난 목 끝까지 튀어오른 말을 다시 삼켰다. 목숨은 언제나 중요한 법이었다.


"그보다, 그, 기둥서방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어? 누나, 모르셨어요? 저 형, 케이네 선생님 남편이라서 맨날 서당에서만 살잖아요!"

"케이네 선생님이 아까워요! 대체 뭘 보고 혼인했지?"


듣자마자 한숨이 푹 나오는 말들이었다. 역시 사랑의 매가 없다면 참된 교육은 불가능한 것인가. 

반쯤 체념한 채로, 내가 고개를 젓고 있을 때였다.


"...뭐, 라고?"


한문의 획을 차분히 하나씩 긋던, 순호의 손이 멈췄다. 피부가 삽시간에 창백히 질려,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건조하게 뚝뚝 끊어졌다.


"그대, 벌써...배필이 있던 것인가?"


"예?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갑작스런 태도 변환이 놀랍기는 나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아이들조차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순호와 나를 의문스런 표정으로 번갈아 바라봤다.


"그랬, 던가."


감정의 격통을 꾸역꾸역 체념이라는 상자에 쑤셔넣는 것처럼, 불안정하게 들썩이는 그녀의 마음이 표정과 목소리에서 드러났다. 아랫입술은 파르르 떨려댔고, 평온을 가장하는 동공은 자세히 보면 쉼없이 떨려댔다.


 "그리 이상한 일은...아닐테지. 지금의 그대 또한,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을 테니..."


가늘어지던 한자의 마지막 획이 뭉개지면서, 먹이 종이 위로 퍼진다. 고대 명필이 최선을 다해 그어 만든 듯한 한문이 순식간에 망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뭘 위해서 이제야..."

"순호 씨, 순호 씨!"


난 그녀의 양 뺨을 감싸 차분히 이름을 불렀다. 어둡게 가라앉던 그녀의 동공이 초점을 되찾았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 애들이랑 놀아주는 것도 힘들죠? 자, 잠깐만 같이 나가서 쉬어요. 애들아! 너희들도 이제 집에 가!"


"으응, 그치만 누나랑 더 있고 싶은데...."


"케이네 선생님이 빨리 안 나가면 또 수업 한댄다. 너희 밤늦게까지 서당에 있을래?"


 아이들은 추가 수업이라는 말을 듣고 마치 요괴라도 쫓아오는 듯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다. 이윽고, 잠잠한 방엔 우리 둘만이 남게 되었다.


"...애들이 많이 짖궂죠? 얼토당토않은 소문도 퍼트려대고 그래요. 맨날 제가 서당에서 일하고 책만 읽으니까, 케이네 선생님의 기둥서방이라고 멋대로 놀리는 거예요."


"...그럼, 방금 그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죠. 실상은 혼기 찼는데도 데려갈 처자 하나 없다고 놀림받는 몸이에요. 저, 여인이랑은 도저히 연이 없더라고요."


순호는 멀뚱멀뚱 눈을 깜빡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곧 자신이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뺨부터 귀끝까지 발갛게 색이 물들어갔다.


"...어, 괜찮아요?"


"...밤이 많이 깊었구나. 내일 다시 찾아오겠다."


"이렇게 어두운데 그냥 가게요? 머물고 가셔도 되는데..."


탁.

순호가 나가면서 장지문이 소리내어 닫혔다. 어쩐지 방을 나간 그녀의 표정이 상상이 되어서, 큭큭 웃음이 새어나왔다.


"생각만큼 목석은 아니었네."


내가 케이네 선생과 혼인을 했는지 아닌지가 뭐가 그렇게 심각한 일이길래 분위기를 그리 잡는단 말인가.

질투?

그렇다면, 전생의 나는 그녀의 질투를 받을만큼 대단한 몸이었었나.


"..."


먼 옛날, 하나라의 제일미녀라고 불렸던 여인, 순호.

복수귀가 되어 황제를 죽이고, 끝내 인간까지 포기하여 고향을 떠난 비극의 존재.

그렇다면, 그 곁에 있었던 나는 무슨 존재였을까.


궁금하다.


...이 층 서재에 하나라에 관한 서적이 있던가.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밤은, 책을 읽는 시간이 평소보다 길 듯 싶었다.




 ***



"너, 생각보다 잘하고 있더라?"


늦은 밤, 서재에서 수많은 책을 뽑아 탑을 세우고 있을 때였다. 요근래에는 듣기 힘들었던 그 여자의 목소리가 공중에서 대뜸 튀어나왔다.


"순호의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어. 어제는 내가 했던 농담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니까? 응? 평소 같았으면 아예 들은체 만체 신경도 안 썼을 텐데~"


"...잘 됐네요."


"그렇지? 그렇지? 너한텐 정말 감사하고 있어, 정말이야! 이대로 간다면 분명 내가 부탁했던 것도 금방...응?"


난 그녀의 사담을 무시하고 계속 읽던 책에 집중했다. 내가 책에 몰중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 그녀도 내 곁으로 슬쩍 다가오더니 내용을 곁눈질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하나라 시절 편년체잖아? 이런 건 또 어디서 구한 거야? 환상향에선 구할 방법이 없었을 텐데?"


"홍마관이라고, 저 멀리에 있는 연못 하나 지나면 나오는 큰 저택이 있어요. 그곳에 있는 도서관이 생각보다 쓸만한 책을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요."


"뭐? 흡혈귀의 저택으로 너 혼자 간 거야?! 아니지? 너, 만약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순호가...!"


"걱정 마세요. 믿을 만한 사람이랑 같이 갔어요. 대가도 충분히 지불했고요."


위험했던 건 사실이다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모험이었다. 흡혈귀의 저택 아래에 있는 대도서관에는 내가 찾던 정보들이 만족할 만큼 숨어 있었다.


그 덕분에, 나도 장막 아래에 감춰져 있던 순호와 나의 과거에 대해서 많은 걸 알 수 있었다.


"...'한착', 이 사람이죠?"


반란을 꾀해서 하나라의 황제 후예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사내. 유궁有窮 한착韓浞.

그리고 아마도, 나의 전생.


"...용케도 네 힘으로 스스로 찾아냈네."


헤카티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비로소 확신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순호 씨를 도와서 전대 국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것까진 대부분의 기록이 비슷하지만...그 이후의 이야기는 너무 달라요."


난 다 읽은 책을 덮어, 주위에 있던 서적의 탑 위에 쌓았다. 순호라는 여인과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계속 정보를 찾아왔지만, 이것만큼은 도저히 명쾌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어떤 기록에선 한착이 순호와 혼인하여 아이를 낳았다고도 하지만, 어떤 기록에서는 아예 체제 전복 이후 그녀의 행보가 적혀있지 않아요. 정사도, 야사도, 하나같이 내용이 다르니까 뭐가 뭔지..."


"그 부분은 나도 자세히 몰라."


헤카티아는 매정하게도 내 기대를 저버렸다.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이것도 안 되나. 깊은 한숨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내가 순호와 알게 됐을 땐 이미 후예는 죽어버린 후였고, 순호는 너와 있던 시절의 이야기는 좀처럼 꺼내지 않았어. 나뿐만이 아니라 모두에게도. 알고 싶다면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만..."


그야 말해주지 않겠지. 벌써 두 달 남짓한 시간동안 순호와 함께 시간을 보냈지만, 그녀는 전생의 이야기에 대해선 입 하나 뻥긋하지 않았다.


"별로 상관없지 않아?"


"...무슨 뜻이에요?"


"굳이 순호의 과거를 알지 않더라도, 너희들은 이미 잘 지내고 있잖아. 순호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너와 새로운 관계를 맺고 싶은 걸지도 몰라. 만약 그렇다면...과거를 파헤치는 행위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거 아냐?"


"그건 안 돼요."


순호와 같이 지내는 시간동안 항상 느꼈다. 그녀와 나의 사이엔, 뭔지 모를 벽이 항상 존재했다.

비록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많은 웃음과 표정을 보여줬지만, 순호는 절대로 자신이 정해둔 선 안으로 나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들여보내기 싫은 건지, 아니면 무서운 건지, 

하다못해 내가 그 선을 건너갈 수는 있는 건지,

그 모든 것에 대한 대답이 그녀와 나 사이의 과거에 숨어 있었다.


"헤카티아 님."


"으응?" 


"약속을 지키기만 한다면, 뭐든지 소원 하나를 이루어주신다고 하셨죠."


'모든 복수를 이룬 후,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자신의 친구에게 살아갈 이유를 만들어 줘라.'

그것이 헤카티아가 내게 제안한 조건이었다. 추상적이고 미묘했지만, 지금의 내겐 이것을 성공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소원, 지금 가불해주시죠."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혹시 머리 아픈 거 아니지?"


"진심입니다. 무엇보다, 당신이 제게 했던 부탁을 들어주려면 반드시 이 소원이 선행되어야 해요."


날카롭게 이쪽을 쏘아보던 헤카티아는 내 말을 듣고선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소원이라는 게 뭔데?"


"제 전생, 한착의 기억을 되찾아 주십시오."


가능할까.

말하고도 그 생각 뿐이었다.

그녀가 그토록 위대한 지옥의 신이라면, 부디 이런 무리한 소원도 이뤄줄 수 있기를 바랐다.


아예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소원이었는지, 헤카티아는 황당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게 너한테 무슨 이익이 있는 거야? 너, 그 소원 하나를 얻기 위해서 내 제안을 받아들였던 거 아냐? 내 제안을 이루기 위해서 그 소원을 써버리면...너한텐 대체 뭐가 남는데?"


"순호 씨가 남죠."


...

긴 침묵이었다. 스스로 말하고도 괜스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내 대답이 뭐가 그리 큰 충격이었는지, 헤카티아는 눈만 커다랗게 뜬 채로 바보처럼 꿈뻑거렸다. 


"흠, 흐흠."

잠시 후, 작은 헛기침 소리와 함께 그녀의 귓가가 붉게 물들어갔다. 헤카티아는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로 꼬며, 어색하게 말을 꺼냈다.


"...내가 생각을 잘못하고 있었네, 너...순호한테 정말 진심이구나?"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요."


"낭만 있네, 솔직히 두근거렸어. 순호 그 애가 너한테 빠졌었던 이유가 있구나. 흐응..."


 연애 소설의 인상적인 구절이라도 읽은 소녀처럼, 헤카티아는 무언가를 입가에 곱씹으며 히죽거렸다.

이윽고 그녀는 평소처럼 장난스런 미소를 지으며 쾌활히 대답했다.


"...좋아, 안 될 거 없지. 대신 이건 소원이랑은 별개로 칠게. 만약 네가 성공한다면...그땐 이것과 별개로 다른 소원을 들어 줄테니까 안심해."


"그렇게 안 봤는데 생각보다 통이 크시네요."


"흐흥, 운 좋은 줄 알아. 네 덕분에 재미있는 경험을 하게 됐으니까 그 서비스라구. 지옥에선 이렇게 가슴 찌릿한 재밌는 일이 별로 없거든."


서비스...? 헤카티아는 영문 모를 말을 마지막으로 점점 허공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 그녀의 흐릿한 마지막 말이 들려왔다.


"최대한 빨리 구해올게. 그 전까지 순호를 잘 부탁해."


든든하기도 해라.

옷도 이상하게 입고 말투도 요상한 신이라지만, 이럴 때는 언제보다도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그 전까지는, 평소처럼 순호 씨와 일상을 지내면 되겠지.

이 뿌리깊은 호기심의 끝도, 이제는 가까워졌다.




***



"거기서 뭐해요?"


이른 새벽, 마당을 쓸고자 빗을 들고 내려왔을 때 익숙한 뒷모습이 눈에 띄었다. 순호가 바닥에 쪼그려 앉은 채 조그마한 강아지를 쓰다듬고 있었다.


"...먼저 나와 있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기에."


처음 왔을 땐 어린애 말고는 관심 하나 안 주더니, 이젠 강아지에게도 관심을 주는 건가.

순호의 품에 안긴 강아지는 낑낑거리며 귀여운 혀로 순호의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꼬리가 어찌 빨리 흔들리는지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귀엽네요. 이 근방을 떠돌던 강아지 같은데...부모와 헤어진 걸까요."


"거둘 생각인가?"


"잘 곳과 먹을 것 정도는 줘야죠. 남을지, 말지는 이 아이의 선택일 테고요."


난 순호에게서 조심스레 강아지를 받아들었다. 강아지는 순진한 눈을 한 채로 젖은 코를 들이밀어 내 얼굴을 킁킁거렸다.


"...선택을 해야되는 건 이 짐승만이 아니겠구나."


"무슨 말이에요?"


"내가 이곳으로 온지 벌써 세 달이 지나지 않았느냐."


벌써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나.

돌이켜보면 짧기만 한 시간이었다. 그녀와 만나고, 이상한 부탁을 받아들이고, 그녀와 가까워지다가, 결국엔 마음에 품게 되었으니.


이렇게 될 운명이었던 건가.

만약 그렇다면 그 결말은 어떻게 되는가.


"앗..."


강아지를 잠시 놓아주자, 녀석은 서당의 밖을 향해 아장거리며 뛰어갔다. 아직 밥도 주지 못했는데 떠나가다니, 매정한 녀석이었다.


"나도 이제 떠날 때가 온 것 같구나."


"...뭐라고요?"


"무얼 놀라느냐, 언제든지 떠나도 된다고 한 것은 그대였거늘."


강아지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며, 순호는 충격적인 말을 무심한 목소리로 늘어놓았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평탄했는지, 내용을 알아채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아니, 하지만...이제 와서 떠난다고요? 순호 씨 떠나시면, 수업 안 나오려는 애들도 있을 걸요? 이렇게 갑작스러운 건...좀..."


다급한 마음에 혀가 자꾸만 꼬였다. 갑작스러운 것도 정도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런 억지가 어디에 있는가.


"지금 떠나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할 걸 알기에 그러는 것이다."


"왜 떠나지 않으면 안되는 겁니까? 그냥, 원하는 만큼 이곳에서 계실 수는 없는 거예요? 이곳에서의 삶이 그렇게 별로던가요?"


조급함에 쫓겨 목소리가 올라갔다. 순호는 여전히, 원망스러울 정도로 잠잠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세 달이라는 시간동안, 그녀의 가면을 충분히 부쉈다고 생각했는데 전부 나의 착각일 뿐이었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가슴 속에 뜨거운 열기가 몰아쳤다.


"불편한 점이 있었으면 제가 어떻게든 개선할게요. 그러니까...조금만, 조금만 더 머물러줘요. 아이들한테도 말하고, 케이네 선생님께도 말하려면 시간이..."


"...더 이상 연기할 필요 없느니라."


순호가 한 걸음 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약간만 발끝을 들어도 입술이 닿을만큼 우리의 거리는 가까웠다. 

연기? 그녀의 말이 마음 한 구석을 날카롭게 찔렀지만, 난 애써 능청스레 모르는 척을 했다.


"그게 무슨..."


"나를 끝까지 바보로 만들려고 드는구나. 헤카티아가 네게 접근한 것을 내가 모를 것이라 생각했나?"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이, 그녀의 말이 숨겨둔 비밀을 깊게 찔렀다. 순호는 씁쓸한 뒷말을 이어갔다.


"아마도 그 바보같은 것이 네게 종용했겠지. 어떻게든 나와 어울려 달라고, 그렇게 해서 내게 하루를 보낼 힘을 만들어 달라고...틀린가?"


"...언제부터 알았습니까?"


"오래 되었지. 그대의 연기는 탁월했어. 다만, 헤카티아 그것은 나를 속이기엔 너무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어."


순호는 서당을 등지고 섰다. 그 뒷모습이, 마치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흐릿했다.


"알고 있었으면, 대체 왜...그동안 모른 척 서당에 머무르셨던 겁니까?"


"행복했으니까."


어깨 너머, 바람에 찰랑이는 금발 사이로 그녀의 미소가 보였다. 어느 때보다 밝고 솔직한 눈부신 미소였다.


"복수를 다 마치고 살아갈 연유 하나 없이 썩어가는 노괴에게, 그토록 성심성의껏 대해주는 건 그대가 유일했다. 정말이지...그대는 전생과 무엇 하나 달라진 것이 없더군."

"비록 그대는 헤카티아 그것의 부탁을 받고 마지못해 행한 것이겠지만...그 작위적인 친절과 애정이 뭐가 그리 달콤하던지, 그곳에서 도저히...빠져나올 수가 없었지."


무엇 하나 맞는 게 없잖아.

마지못해 행한 것이 아니다. 계기는 헤카티아의 제안이었을 지언정, 그녀를 향한 친절과 애정은 모두 진심이었다.


"허나 그 거짓된 애정을 위해서 언제까지 그대를 희생시킬 순 없는 법이 아닌가."

 

"희생한 적 없어요. 전부 다 제가 좋아서 한 일입니다. 당신과 있던 시간이 좋아서, 그 헤카티아라는 신의 부탁과는 별개로 제가 원해서 한 일이라고요."


내 외침에 순호는 눈을 감았다.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단 한번도 보인 적이 없던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렀다.


"...그대는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다."


흐으, 떨리는 한숨이 입김으로 화해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기억의 일부는 영혼에 새겨지는 것, 만약 내가 그대의 곁에서 계속 세월을 지낸다면...그대는 언젠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어설프게 이어붙인 거울은 더욱 산산히 깨져버리겠지." 


"...그러지 않을 겁니다. 분명히요."


순호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더 넓게 번진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셨다.


"그대는 그대의 전생에 대해 모를 거야. 수천 년 전, 흔적도 남지 않은 고대의 시기, 그 시대에도 그대는 지금처럼 상냥하고 친절한 말로 날 일으켜 세웠었지." 


알고 있다. 수많은 서적에서 그녀와 나의 과거를 파헤쳤었다. 가족을 잃고 꼭두각시로 전락한 순호에게, 한착이라는 인물은 오직 선의 하나만으로 손을 내민 은인이었다.


"나는 그대의 아내가 되겠다고 맹세했다. 국왕 후예를 죽이고 가족의 복수를 끝마친 후에 말이다. 그대는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 그 피바람이 부는 전쟁터로 발을 내딛었지. 여인 하나를 얻기 위한 싸움치곤, 무익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어."


한착은 후예를 죽이고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했다. 순호는 그 과정에서 분명 자신의 복수를 이뤘을 터다.

하지만 그 너머의 역사는, 그 어떤 역사서도 제대로 기술하고 있지 않았다.


"...후예를 죽인 다음엔, 어떻게 되었습니까?"


길었던 기다림 끝, 순호는 드디어 그 답을 직접 말해주었다.


"후예는 죽었지만, 그 첩인 상아는 죽지 않고 도망쳤지. 내 아들을 죽이도록 부추긴 장본인, 그 탕녀가 진정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였어."


상아, 헤카티아에게도 들었던 이름이다. 

지금껏 수천년을 쫓아온 끝에, 고작 몇 달 전에야 겨우 그 복수를 이뤘다고 들었었다.


"국왕의 자리가 비었으니 누군가는 왕이 되어야 했지. 그렇게 그대는 왕이 되었어. 약조대로였다면, 나는 그대의 처가 되어 살아가야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군요."


"도망쳤지. 상아를 죽이기 위해서 그대를 배신하고 떠났어. 그대가 주었던 호의도, 약조의 대가도 모두 저버리고...복수를 위해 인간의 껍질까지 벗어던져 버린 거야."


이제야 알았다.

그녀와 나의 관계를 가로막는 가장 큰 일선, 그것은 바로 전생의 나를 향한 그녀의 죄책감과 후회였다.

한착은 순호를 잃은 상실감에 슬픔에 빠져 지내다, 결국은 부하들의 반역으로 인해 마찬가지로 단명하게 되었으니까.


"..."


"그대의 곁에 있으면 나는 자꾸만 행복해진다. 삶의 목적을 잃었음에도, 그냥, 내일로 나아가고 싶어지는 기분이 들지."

그럴 자격따위는 없을 텐데도, 가증스럽게.


마음을 굳게 다지듯, 순호는 눈을 감고 한참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선고하듯이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 '때가 된다면, 그대에게 다시 전하러 오겠다.'...기억하느냐?"


"...예."


서당에서의 첫 만남, 그녀가 나에게 전했던 영문을 모를 말이었다. 


"이제야 그걸 전할 수 있겠구나."


순호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물기에 가득 찬 목소리가 가냘프게 갈라졌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신께 사죄합니다.


"혹여 다음 생에라도, 그대와 다시 만나게 된다면..."

제 모든 걸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겸한 감사와, 속죄.

그녀는 첫 만남 당시, 내게 이것을 말하고 세상에서 사라지고자 했던 것이다.


"...부디, 안녕히."


순호는 몸을 바로세워, 서당을 떠나기 시작했다.

죄책감과 후회로 망가져 스스로 행복을 거부하고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아."


결국,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로 깊이 스며들었다.

그녀를 향한 서운함과, 약간의 분노까지 섞어서, 나는 멀어지는 인영을 향해 외쳤다.


"ㅡ멈추거라, 현처!!"

 

짐승의 발성처럼 시끄러운 외침이 새벽공기를 쩌렁쩌렁 울린다. 어느새 저멀리까지 사라진 작은 뒷모습이 그 자리에 멈춰섰다.


나는 멈춰선 순호를 향해 달려갔다. 순호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 생각 한건지, 평소답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뒤돌아 있었다.


집중하자, 집중.

지금의 나는 곧 한착이다. 할 수 있다.

헤카티아가 지난 밤 가져다 주었던, 그 기억을 사용한다면 나는 그녀의 과거의 상처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너는 계속 천방지축으로 굴어대는구나. 현처여."


"그대가, 그 이름을 어떻게..."


짝ㅡ


마침내 거리가 좁혀진 순간, 난 망설임 없이 그녀의 뺨을 쳤다. 손바닥이 찡하고 울리며, 그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생각보다 세게 친 건가? 하지만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의 그녀는, 이만한 충격이 없다면 움직이지 않을 테니까.


"내가 널 용서하지 못할 거라고? 왜 그런 걸 네가 마음대로 정하는 거지?"


"..이게, 무슨 짓인가? 그대, 갑자기 무슨 의중으로 이런..."


"그대의 남편인 후기와, 아들인 백봉이 연회장에서 목이 잘릴 때, 그대의 눈을 가려준 건 누구였나?"

 

순호의 가장 깊은 역린.

그곳을 비틀자,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숨조차 쉬기 힘들어질 만큼의 강대한 기운이, 그녀 주위의 공기와 땅을 침식하기 시작했다.


"그걸...어떻게...!"


"자네가 밤중에 나의 방에 침입해 그 살덩어리로 나를 현혹하며 애원할 때도, 나는 그대의 몸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마음이 죽어버린 시체의 몸을 희롱하는 역겨운 취미는 없었으니까!"


 나는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혼란스러움으로 인해 그녀의 표정엔 이미 가면따위 남아있지 않았다. 조금씩 뒷걸음질치는 그녀의 몸짓에선 두려움까지 느껴졌다.


"현처여."


그녀가 자식을 잃으면서 버렸던 옛날 이름. 이젠 그녀 자신밖에 기억하지 못할 이름.

나는 그 이름을 또박하게 뱉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다.


"내가 널 원망할 거라고 생각하나?"


"...원망하지 않을 리가, 없잖느냐."


"고작 연약한 인간 여인에 불과했던 네가, 정말 궁의 모든 경비를 뚫고 기적적으로 탈출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정말 그 정도로 멍청한가?"


순호의 눈빛에 의문이 스쳤다. 그 잠깐을 놓치지 않고, 나는 밀어붙였다.


"네가 배신한 것이 아니라, 내가 놓아준 것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그녀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등을 감싸 받쳤다. 순호는 여전히 머리가 정리되지 않은, 혼란스런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비오던 적막한 밤에, 침실에서 우리가 맺었던 약조를 기억하느냐?"


'국왕 후예를 죽이고 가족의 복수를 끝마친 후에 그의 아내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한착과 순호가 맺었던 약조였다. 순호는 천천히 그 내용을 따라 읊었다.


"반란의 날, 후예의 첩인 상아를 잡지 못한 것은 내 실책이었다. 약조를 지키지 못했던 것이지, 상아 그 악녀야말로 네 가장 큰 원수였을 테니까."


"...하지만, 왜, 그렇게까지...!"


순간, 말을 뱉기 전에 목이 턱 막혔다.

정말로 쉽지 않은 말이었지만, 여기서 막혀선 모든 게 끝이었다.

난 애써 마른 입술을 적시며 그 말을 똑바로 발음했다.


"...널 사랑했기에 그랬다."


한착은 훗날 상사병에 걸리면서까지, 순호가 궁을 도망치는 것을 도왔다. 그 이유는 지독하게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그는 이전 국왕과 다르게, 진심으로 순호를 사랑했으니까.


그렇게 평생을 그녀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한착은 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맹세코, 한착은 단 한 번도 순호를 원망한 적이 없었다.


"저, 는."


순호는 더 이상 뒷걸음질 칠 생각도 못한 채, 내 품에 가만히 안겨 있었다. 어느새 눈물은 쉼없이 흘러넘쳐 눈가가 흉하게 부었고, 평소의 미성은 어디 갔는지 울보 아이처럼 끅끅거리며 발음조차 계속 끊겨댔다.



"...저는, 당신을 버렸습니다. 당신이, 부하들에게 반란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전, 복수에 눈 멀어 아무것도...!"


"행실을 바르지 못하게 하여 국가를 어지럽혔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건 당연한 일. 내가 초래한 말로일 뿐이다."


"지금의 제가...대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복수만을 좇아 살아온 그 수많은 세월 끝에, 이젠 영혼마저 피와 불결함에 물들었는데...!"


어느새 그녀가 내뱉는 말은 자기파멸적 망발밖에 없었다. 난 그녀의 멱을 잡아 가까이 끌었다. 흐끅, 울먹이는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터져나왔다.


"네가 뭘 해야 할지 알지 못하겠다면,"


한 때는 피를 닮아 섬찟하던 붉은 눈이, 이젠 깨져가는 유리조각처럼 보였다. 난 마지막으로, 이 모든 연극을 끝낼 쐐기를 박아넣었다.


"이전에 지키지 못했던 약조부터 마저 지키거라."


복수는 끝났다. 이제 상아는 죽고, 그녀의 가족과 엮인 모든 비극은 역사 너머로 사라졌다.


비록 그 시절의 한착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을 지언정, 그 영혼은 눈 앞에 남아 있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그래야만 한다."


물기에 젖었던 눈가가 차분해지기 시작한다. 불안정하게 떨리던 호흡도, 점차 가라앉는다.

순호는 어느새 착한 아이처럼, 몽롱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품에 안겨 있었다.


...됐나?

이제 다 끝났나?


헤카티아에게 받았던 한착의 기억을 토대로 한 연극도, 끝나고 보니 수치심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쩌면 얼굴에 티가 나고 있을까. 순호는 내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품 안에서 몸을 부비고 있었다.


"...순호 씨?"


아주 조심스럽게, 평소같은 어조로 그녀를 불러본다. 그녀를 잡은 손을 놓으려고 해도, 순호는 내게 매달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게 아닙니다."


"...네?"


"... 안사람 될 사람을 그렇게 차갑게 부르면 안 되는 법입니다♥"


쮸웁.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억센 악력이 나를 끌어당겼다.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눈을 감은 채 있는 순호의 진한 눈꺼풀, 그리고 느껴지는 건, 입술로 파고드는 따스하고 축축한 살덩이였다.


"으읍....!"


부드럽지만 완고한 힘이 두 뺨을 감싸안는다. 순호는 마치 갈증난 이가 물을 들이키듯 내 입 안과 혀를 모조리 훑어 표시를 남겼다.


"...그대가 용서하고 명하였으니, 이젠 당신에게...제 모든 삶과 마음을 맡기겠습니다♥"


"읍, 잠깐만...!"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면, 내 몸이 바닥에 눕혀져 있어졌다. 호흡이 부족해서, 내 옷 속으로 파고드는 그녀의 손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어, 내가 잘못된 때에 온 거지?"


허공에서 고개를 내민 헤카티아의 목소리가, 내게 남아있던 기억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