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폐허가 된 한복판에서 신유승은 이길영을 찾아냈다. 잔뜩 웅크린 소년의 주위를 징그러운 황충들이 멤돌고 있었다. 

이길영을 구하기 위해 다가가던 신유승은 희미하게 들려오는 눈물 젖은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굳었다.

"떼리지 마요 . . . 날 내버려 둬요."
" . . . "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신유승이 아는 이길영은 김독자가 관련되지 않는 한 매사 당돌한 남자애였으니까.

- "아, 글쎄. 곤충이 더 세다니까."

바보 같은 곤충 빠돌이.

- "내기할래? 누가 더 높은 점수를 얻을지?"

지기 싫어하고 승부욕이 강한 남자애. 

- "안 다쳤어?"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내 친구.

그것이 신유승이 아는 이길영이었다. 눈앞의 경광은 그녀가 모르는 친구의 어두운 면이었다.

. . . 어쩌면, 그것은 신유승이 외면한 일면이기도 했다. 

- "넌 부모님 걱정 안돼?"
- " . . . 딱히."

이길영은 가족과 관련해서는 유독 말을 아꼈다. 다만, 타고난 감수성은 가끔씩 당찬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희미한 떨림을 포착하곤 했다. 

-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짐작은 하고 있었다.

길영이의 상처가 어떤 종류인지.

그것이 얼마나 괴롭고, 또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을지. 

"날 내버려 둬!"

그리고 그 상처를 들추는 게 얼마나 악독한 일인지도. 

신유승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먹먹한 목소리로 외쳤다.

"정신 차려! 이길영!"

일순, 이길영의 몸부림이 멈췄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귀기 어린 원한이었다. 이길영을 에워싸던 황충들이 일제히 신유승을 바라봤다.

무저갱의 황충들. 

아바돈의 권속보단 열화된 버전이었으나, 파괴력은 원판에 못지 않았다. 하늘을 덮을 듯 날아오른 벌레 떼가 신유승에게 달려들었다. 

쇄애액!! 

전방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갉아먹는 죽음의 쓰나미. 위태로운 신유승의 앞을 레서 드래곤이 막아섰다. 쩍 벌린 입에서 파멸의 숨결이 쏟아졌다.

콰콰콰!! 

화염에 휩쓸린 벌레들이 지상으로 추락했다. 드래곤은 목을 좌우로 흔들어 브래스의 범위를 넓혔다. 

그러나 몸집이 작은 황충들은 그 와중에도 살아남아 래서 드래곤의 피부에 턱을 박아 넣었다. 

물론 단단한 비늘엔 공격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황충들은 상대적으로 연한 배 부위에 달라붙어 공세를 이어갔다.

신유승이 드래곤의 등에 올라타며 소리쳤다.

"깔아뭉게!"

눈높이가 확 내려갔다. 약한 지진과 함께 무언가 파바박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드래곤이 바닥에 엎드리자, 배에 달라붙은 황충들이 그대로 압사한 것이다. 

배에 묻은 진물이 찜찜하다는 듯 머리를 갸웃거린 드래곤은 이윽고 포효를 내지르며 비상했다.

"크롸롸롸!!"

해츨링이어도 드래곤은 드래곤. 강한 날갯짓에 벌레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이길영에게 접근하긴 아직 녹록지 않았다. 벌레의 진가는 끈질긴 생존력에 있었으니까. 

끼륵. 끼륵. 

" . . . !"

벌레가 약해빠졌다고 말한 것을 마음에 담아두기라도 했는지, 이길영이 부리는 황충들은 드래곤의 꽁무니를 정말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었다.

고민 끝에 신유승은 레서 드래곤에게 두번째 명령을 내렸다.

"아래로 강하해 줘. 속도는 유지한 채로."

장엄한 날개가 접힌 것은 그때였다. 양력을 잃은 거체가 운석처럼 낙하하기 시작했다. 황충들이 달려들었으나 그들의 가벼운 중량으론 저지할 수 없었다.

[화신, '신유승'이 A급 아이템 '황금고삐'를 사용합니다!]

길게 늘어뜨린 사슬이 드래곤의 뿔에 휘감겼다. 단단히 맨 고삐로 강풍을 버텼다. 드래곤의 등에 상체를 바짝 붙인 채, 신유승이 지상을 노려봤다.

키륵.

이길영이 티타노라 이름 붙인 충왕종이 낫처럼 생긴 앞발을 내밀고 있었다.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이면 이길영한테 한 소리 듣겠지?'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벌써 들리는 듯했다. 심술 가득한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신유승의 시선이 다시 고통스럽게 울부짖는 이길영에게 닿았다. 

"아아아!"

이대로 충돌하면 티타노가 곤죽이 되는 것을 물론이고, 이길영도 무사할 수 없다. 속 좁고, 괜히 신경 쓰이게 만드는 녀석이지만 다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신유승은 전략을 수정했다. 레서 드래곤이 뚫은 길로 혼자 진입하기로. 결단을 내린 신유승이 못 살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깨어나면 가만 안 둘거야."

신유승이 드래곤의 목을 어루만졌다. 드래곤의 거체가 금빛 마력에 휩싸였다. 

"해제."

츠츠츳! 

아직 제한 시간은 끝나지 않았지만, 신유승의 명령에 드래곤의 신형이 축소됐다. 이제 공중에 남은 것은 신유승 혼자. 황충들은 뒤늦게 신유승의 꽁무니 쫒았고, 충왕종은 겹눈으로 떨어지는 신유승을 포착하여 앞발을 휘둘렀다. 

중력에 몸을 맡긴 채 추락하던 신유승의 머릿속에서, 얼마 전 배후성과 나눈 대화가 재생됐다.

- "상대가 펫들을 뚫고 접근하면 어떻게 대처해요?"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그럼 접근전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의문을 갖습니다.]

- "하지만 . . . 전 약한걸요?"

자신을 못 믿겠다는 말에 배후성은 이렇게 말했다.

-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내 화신이 약할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 믿음이 고마워, 신유승은 계속 노력했다. 시간이 날 때 유중혁의 지도를 받고, 쉴 틈 없이 실전을 치르며 감각을 익혔다.

고된 시간이었다. 숨 쉬는 게 괴로웠고, 온몸에 달라붙은 피로는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수라장을 거치며, 살아남은 신유승이 알게 된 점은,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츠츠츳!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신유승의 왼팔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장미보다 붉고, 그것의 가시보다 날카로운 손톱이 자라났다.

흉측한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지.

[화신, '신유승'이 '핏빛손아귀'를 사용합니다.]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핏빛 손아귀를 내질렀다. 그대로 충왕종의 앞발과 충돌하는 듯 싶다가, 이내 궤도가 꺾였다. 충왕종을 스치듯 지나간 핏빛 손아귀가 이길영을 포박했다. 

터엉!!

앞발은 반댓손으로 흘려 냈다.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대로 쇄도한 신유승이 이길영을 안고 옆으로 쓰러지듯 몸을 날렸다. 

갑작스러운 온기와 충격에 이길영의 동공이 커졌다. 뒤이어 분노한 충왕종과 황충의 공격이 신유승의 등에 닿기 직전.

" . . . 신유승?"

모두 정지했다.

신유승은 정신을 차린 이길영을 보고 뭐라 이를 수 없는 표정을 짓다가 머리를 한대 쥐어박았다.

"아악!"
"이길영, 이 바보탱이!"
"아, 왜 때리는데?! . . . 야, 너 피나!"

[소수의 성좌들이 어린 두 화신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싸우다 보면 정이 들고, 정이 들다 보면 . . . 뭐 어떻게든 잘되지 않겠나며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참으로 화목한 정경이었다. 


*


['강철화'가 발동합니다!]

정희원이 눈앞에 드리운 광경을 주시했다.
그리고 한 가지 이미지를 떠올렸다.

'성.'

그것은 강철로 된 성이었다. 투박한 질감 대신 은빛 광채를 품은 채, 뚜벅뚜벅 전진하는 성이었다. 

검을 휘두르면 날이 나갈 것이다.
화살을 날리면 심지가 부러질 것이다.

아군일 땐 한없이 든든하던 남자는, 적으로 만났을 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정희원은 탄식을 흘리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지옥염화'가 발동합니다!]

지옥의 유황불이 일대를 휩쓸었다. 가공할 열기에 건물의 골조가 녹아내린다. 땀이 순식간에 증발한다. 숨 쉬는 것조차 버겁다.

동료에게 배후성의 성흔을 사용하게 된 현실은 더더욱 버겁고 애달프다. 

[성좌, '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안타까워합니다.]

하지만 해야만 했다. 

- "현성씨는 희원씨한테 맡기겠습니다."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 . . . 조금 아플거예요, 현성씨."

자세를 잡은 정희원이 용수철처럼 튀어 나갔다. 동작은 발검으로 이어진다. 대천사의 화염을 두른 검을, 이현성이 팔을 교차하여 받아냈다. 

콰앙!! 

대장간에서 들릴 법한 소음이 고막을 후벼팠다. 그러나 한 번의 망치질로는 철을 제련할 수 없었다. 정희원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콰앙!
콰앙! 

단조가 시작되자 이현성이 울부짖었다. 

"이병 이현성! 그런 사실 없습니다!"

이현성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스킬의 전조를 파악한 정희원이 다급히 몸을 뺐다. 

'태산부수기'가 허공에 작렬했다. 

콰앙! 

단순한 기파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대 맞으면 그걸로 끝이구나. 

"이러다 나 죽겠어요. 정말 정신 안 차릴 거예요?"
"이병 이현성 . . . ?" 

이현성이 잠시 멈칫한 틈을 타, 정희원이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다시 망치질이 이어졌다. 거세게 타오르는 지옥 염화가 이현성의 마음을 가두고 있던 껍질을 조금씩 벗겨 냈다. 

단조를 계속하며 정희원이 말했다.

"히든 시나리오 때도 이랬죠. 그땐 내가 보호받는 입장이었는데."

재앙을 앞에 두고 미끼를 자처하는 이현성.

"걱정하지 말라고. 믿어달라고 했잖아요."

자기도 무서울텐데, 되려 동료를 위로하는 이현성.

"남의 속 타들어 가는 것도 모르고, 바보처럼 웃기나 하면서 . . . !"

강철 같은 사내였다. 우직함으로 모두의 본보기가 되는, 정의로운 화신이었다. 

그래서 정희원은 이현성이란 인간이 좋았다. 멸망한 세계에서 그는 누구보다 인간다운 인간이었으니까. 

고로, 정희원이 뱉은 말은 전부 진심이었다. 지금 막 뱉은 말까지 포함해서.

"돌아와요, 현성 씨. 제발 돌아와줘요."
" . . . "

수십 수백 번의 두드림과 대장간의 열기. 무엇보다 동료의 진심에, 내면 깊숙이 잠든 강철의 영혼이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츠츠츳! 

"큭!"

정희원은 한걸음 물러나 고통스러워하는 이현성을 주시했다. 이현성의 이마에 떠오른 연꽃무늬가 흐릿해졌다가 선명해지길 반복했다. 

정희원은 이현성이 이겨 내리라 확신했다. 재앙 시나리오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비온 뒤 땅이 굳는 것처럼, 그는 고난을 겪으면서 더욱 단단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정희원이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그의 강인함을 믿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창공으로 솟구친 불꽃이 이현성의 몸에 닿기 직전. 

파스스.

이마에 걸린 연꽃 무늬가 바스라졌다. '강철화'가 깨졌다. 정희원은 검로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빗겨나간 불꽃이 이현성의 왼편에 위치한 건물을 박살냈다.

[성좌, '악마같은 불의 심판자'가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가슴을 졸이고 있던 건 정희원 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희원은 이현성의 신체를 이모저모 훑어봤다. 


" . . . 희원씨? 제가 왜 여기에 -"
"어디 아픈 데는 없어요?"
"음, 그게 제가 탄피를 잃어 버린 걸로 선임한테 두들겨 맞는 꿈을 꿨는데."
"꿨는데?"
"그 꿈이 현실이 된 느낌입니다."
" . . . "

구체적인 감상평에 차마 자기가 복날에 개패듯 두드렸다고 말할 수 없던 정희원이었다. 아무튼, 치명상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나중에 천천히 설명해줄 테니까 일단 돌아가요. 한시가 급해요."

정희원이 이현성의 손을 잡은 채, 성큼성큼 걸어갔다. 이현성은 평소와 다르게 상기된 정희원을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자신이 여자와 손을 잡았단 사실을 깨닫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의 손은 굳은 살로 거칠었으나, 따뜻했다. 그래서일까. 두 사람 사이에도 봄이 오는 듯 싶었다.

그러나 화목한 분위기는 얼마 안 가 들려온 메시지에 다시 얼어붙었다. 

[최강의 화신이 사망했습니다.]

['최강의 희생양' 시나리오가 종료됩니다.]

"뭐?"
"네?"

당황한 두 화신은 이내 믿기 힘든 비보를 전해들었다.

[서울 돔에서 가장 강한 화신은 '가장 못생긴 왕 김독자' 입니다.]


*

유중혁과, 41회차의 신유승, 니르바나가 망연한 표정으로 영면한 사내를 바라봤다. 

무엇이 그리도 기쁜 지, 김독자는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 

- "뒤는 부탁한다, 유중혁."

진천패도를 움켜쥔 손이 경련했다.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허망함에 기름을 부은 것은 니르바나의 가증스러운 추모사였다. 

"타인을 위해 현재를 주저 없이 버리다니. 실로 대단한 화신이었다."

니르바나가 김독자의 복부를 관통한 손으로 김독자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리고 일어서며 고했다.

"저 아해의 희생을 헛되게 하면 안 되지 않느냐. 어서 날 받아들여라, 유중혁. 네 목표엔 내가 필요하다."
". . . 닥쳐라."
"현재를 외면하지 마라. 저 아해는 죽었다. 죽음은 바꿀 수 없다. 후회는 무의미하다. 너와 나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우리는 서로의 유일한 이해자니까."

진천패도가 하늘에 닿을 듯 솟구쳤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깨달은 니르바나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어째서냐. . . 어째서 나는 안 되는 것이냐! 저 화신이 대체 뭐길래!" 

유중혁이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는 내 동료였다."

그 말을 신호로 41회차의 신유승과 유중혁이 니르바나를 몰아치기 시작했다. 진천패도와 야수왕의 감수성이 어지러히 춤을 춘다. 

니르바나는 다급히 천수관음으로 대항했으나, 김독자의 전인화에 입은 부상 탓에 피하기 급급했다. 무소유를 사용할 틈도 없다.

이대로 가면 니르바나의 패배는 확실시 된 상황. 결국 니르바나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화신, '니르바나'가 '백팔번뇌 Lv.3'를 발동합니다!]

백팔번뇌. 

본래 정신 수양을 위한 스킬이나, 타인에게 적용했을 땐 정신에 강력한 디버프를 준다. 41회차 신유승과 유중혁의 동작이 물에 빠진 사람처럼 서서히 느려졌다.

그리고 완전히 정지하기 직전. 

['제 4의 벽'이 '백팔번뇌' 효과를 완전히 무효화시킵니다!]

니르바나의 간섭이 저지당했다. 마치 단단한 벽에 막히기라도 하듯. 비슷한 경험을 이전에도 겪은 바 있었다. 경악한 니르바나가 미동없이 누워 있는 김독자를 바라봤다.

"불가능하다! 분명 숨이 멎었을 텐데 . . . !"

머릿속에서 죽은 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러니까. 나도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어.'

[채널 내 성좌들이 당황합니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사자(死者)의 간섭에 흥미로워합니다.]

전지적 1인칭 시점의 조건.

그것은 김독자 자신이 의식을 잃고, 등장인물이 김독자를 떠올리는 것.

필드내 세 화신은 두 조건을 모두 만족했기에, 영혼체 상태인 김독자는 셋 중 누구한테나 빙의할 수 있었다.

설사 그 대상이 김독자를 적대하는 적일지라도. 

니르바나가 머리를 부여잡았다.

"내 머릿속에서 나가라!"

- '지금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네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잊었나?'

김독자의 촌철살인에 아차 싶던 니르바나가 정면을 바라봤다. 유중혁의 진천패도가 허공에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동시에, 환생자의 팔이 떨어졌다. 

텅 빈 니르바나의 품으로 41회차의 신유승이 파고들었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

 피할 수 없는 일격. 죽음을 직감한 니르바나가 허탈한 심정을 내비쳤다.

"이번 생은 여기까지구나."

콰앙! 

굉음과 함께 니르바나의 신형이 사라졌다. 허리가 접힌 채 날아간 니르바나는 필드에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정지했다. 

"쿨럭!"

입 밖으로 핏방울이 튀어나왔다. 방금 전 충격으로 갈비뼈가 완전히 박살났다. 숨쉬기조차 버거웠으나.

"하하."

니르바나는 웃고 있었다. 

"어째서 웃는 거지?"
"쿨럭 . . . 그럼 너는 우습지 않느냐? . . . 어차피 우리는 또 만나게 될 것이다."

니르바나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그 누구도 윤회를 벗어날 순 없다. 나는 되살아날 것이고, 결국 너와 하나가 되겠지."

이번이 아니면 다음에 성공하면 된다. 니르바나에겐 유중혁만큼이나 많은 기회가 남아있었으니까. 

정신 승리를 하는 니르바나의 머릿속에서 김독자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 '맞아. 너를 완전히 죽일 순 없겠지.'

김독자는 니르바나의 말을 인정했다. 

환생자는 죽지 않는다. 그의 유지는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음 회차에서도. 그다음 회차에서도. 

- '하지만 그것은 '다음' 회차가 존재할 때의 이야기야.'

니르바나의 웃음에 금이 갔다. 어째서일까. 그는 다음에 이어질 문장이 짐작할 수 있었다. 

- '유중혁의 이야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시간의 바퀴에서 해방된 너는 유중혁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겠지.'

[화신, '니르바나'가 '백팔번뇌 Lv.3'를 사용합니다.]

죽어 가는 니르바나가 스킬을 발동하여 자기 내면을 관조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반투명한 인영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역시, 조금 전 죽은 화신이었다. 

니르바나가 김독자를 향해 발악하듯 외쳤다.

- '시나리오의 끝을 보는 것은 . . . 불가능하다! 설사 유중혁이라 하더라도-'
- '가능해.'
- '뭐?'

김독자가 만신창이가 된 니르바나를 향해 말했다.

- '내가 그렇게 만들거니까.'
- '네가 누구길래 . . . '

그때, 니르바나의 영혼체가 흩어지기 시작했다. 질리도록 겪어본 현상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니르바나는 갑자기 그렇게 질리도록 겪어본 환생이 두려워졌다.」

벽이 나타난 것은 그때였다. 

「어쩌면 저 화신의 말대로 자신은 유중혁이 없는 세상을 영원히 윤회하게 될 운명인 것은 아닐까.」

니르바나의 사고를 시작으로 수많은 문장들이 벽 위를 수놓았다. 아주 길고 장엄한, 한 인간의 대서사시가 그곳에 있었다.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는 세 가지 방법」

니르바나의 동공이 커졌다. 믿을 수 없었다. 세계의 진실이 고작 한 인간의 설화 속에 있다는 사실을. 수백 년 동안 찾아헤맨 해방의 실마리를 눈앞에서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김독자는 그러한 니르바나의 번뇌를 현실로 만들었다.

- '나는 네가 해탈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내 동료들을 건들지만 않았다면 너는 네 숙원을 이룰 수 있었겠지.'

[성흔, '환생'이 발동합니다.]

-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늦어 버렸네.'

니르바나가 광분했다.

- '아직 늦지 않았다! 어서 바깥의 화신에게 연락해 나를 살려라! 내가 너를 돕겠다! 네가 원하는 무엇이든 이루어 주마! 함께 현재를 사는 것이다, 김독자!' 

[성좌, '만다라의 수호자'가 자기 화신을 가엾게 여깁니다.]

니르바나가 몸부림쳤다. 그의 영혼체에서 수많은 형상들이 튀어나왔다. 이전 생의 육신들이었다. 

「그는 한때 개구리였고, 아나콘다였다. 독수리였으며 크로노스의 전사였다. 천재 음악가였으며 재능 넘치는 시인이었다.」

「그 모든 것이 니르바나였다.」

방대한 이야기에 김독자는 순간 압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렇게 강대한 설화를 가지고도 니르바나는 김독자에게 닿을 수 없었다.

츠츠츳!

고장난 컴퓨터 화면처럼, 니르바나의 영혼이 노이즈를 남긴 채 급속도로 분해되기 시작했다. 말단 부위에서 발생한 균열이 이윽고 전신으로 퍼졌다. 

- '날 구해라!'

김독자는 그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봤다. '제 4의 벽'에 새로운 문장들이 적혀 나갔다. 

「니르바나는 결코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거듭된 환생에 지칠 때마다 그는 오늘을 곱씹으며 후회할 것이다.」

「그것은, 니르바나에겐 죽음보다 더 끔찍한 형벌일 것이다.」

김독자가 고했다. 

- '너는 이제 현재를 살 수 없어, 니르바나 뫼비우스.'

니르바나는 알아들을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빛으로 변했다. 반짝이는 입자들은 아주 먼 곳으로, 아마 세계선의 경계가 있을 장소로 사라졌다.

환생자가 의식을 소실함과 동시에, 김독자의 영혼이 외부로 방출됐다. 아무튼 이겼다. 김독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가 문득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나저나 일행들한테는 뭐라 말해야 되지? 특히 유중혁 그 자식은 . . . '

'전지적 1인칭 시점'을 알아차린 유중혁과 신유승에게 어떤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는 김독자였다.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김독자'에게 관심을 보입니다.]

죽지 않은 자신에게 명계의 여왕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예상한 일이었다만. 

[성좌,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 화신 '김독자'를 <명계>로 초대합니다.]

초대장을 받는 것은 천하의 김독자조차 예상 못 한 전개였다. 

.
.
.

고민 끝에 김독자는 결국 초대를 수락했다. 

'여덟 개의 목숨'으로 부활하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72시간. 그동안 딱히 할 수 있는 일도 없으니, 훗날 '기간토마키아'에 대비하여 여왕의 호의나 사놓자는 합리적인 생각에서였다. 

'거신병 플루토의 완성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면 페르세포네도 좋아하겠지.'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호의는 곧 하데스의 호의로 이어진다. 원작에서도 과묵한 명왕이 어떤 인물인지는 두고 봐야할 일이지만. 적어도 <올림포스> 소속 성좌들 보단 도움을 줄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여긴가."

심판관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성에 진입한 김독자는 얼마 안가 결혼식장에 있을 법한 식탁을 발견했다.

하얀 식탁보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산해진미가 가득했다. 명계의 설화를 아는 김독자는 음식보다 식탁 끝에 자리한 옥좌에 관심을 보였다. 

놀랍게도 옥좌엔 유상아가 앉아 있었다.

". . . !"

그것도 차이나 드레스에 가터벨트를 착용한 채로.

김독자는 황급히 눈을 돌렸으나, 유상아로 변장한 존재는 그마저 간파한 듯 소리내어 웃었다.

[후훗, 반응 한번 귀엽군요.]

['제 4의 벽'이 강하게 활성화 됩니다!]

" . . . 오해입니다."

눈 돌 곳이 없어 김독자는 고개를 살짝 돌린 채, 직진했다. 그러다 좌석 수를 보고 문득 의문을 품었다.

"'가장 어두운 봄의 여왕'이시여.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하세요.]

"혹시 저 말고 다른 내빈이 있습니까?"

페르세포네의 맞은편은 분명 본인의 자리였다. 그렇다면 그녀에게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작은 의자의 주인은 누구일까. 

페르세포네가 흥미롭다는 듯 속삭였다.

[눈치가 빠르네요. 과연, 그녀가 눈여겨 본 화신 답달까.]

그녀?

김독자가 물음표를 띄운 순간, 어두운 장내에서 누군가 존재감을 드러냈다. 김독자의 시선이 무심코 페르세포네의 뒤쪽으로 향했다. 

설화급 성좌 앞에서 한눈을 파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행위인지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김독자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제 4의 벽'이 적의를 드러냅니다!]

사르륵.

어둠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 속에서 한 여성이 걸어 나왔다. 

어깨에 닿을 듯 찰랑이는 보라색 머리카락. 얇게 휘어진 눈망울과 그 아래 걸린 장난기 어린 미소.

자칫 가볍게 보일 요소들은 특유의 퇴폐적인 분위기와 어울려 가히 독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마침내 김독자의 시선이 여인의 머리에 자란 뿔에 이르었을 때,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낯익은 음색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김독자.]

그때와 다를 바 없는 천진난만한 태도에, 표정 변화가 적은 김독자의 얼굴에도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왕님.]






늦었지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