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세상에는 TRPG라는 게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내가 확신하건데 먼 옛날···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래 전부터 명맥을 유지해오던 이 TRPG는 수명이 너무 길었다.


그래. 고작 목소리와 주사위로만 이루어진 게임이라기엔 지나치게 수명이 길었다.


픽셀에서 시작해서 2D를 지나 3D, VR을 넘어 캡슐 속 뇌파 이루어진 진짜 가상현실 세계가 등장한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지 못 할 이유도, 잊혀질 이유도 차고 넘쳤지만 신기하게도 TRPG는 여전히 망하지 않았다.


그 뿐일까? 심지어 TRPG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이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꾸준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사실은 내게 잔잔한 울림을 주었다.


응당 놀랍지 않은가. 현실보다 더 현실같은 게임을 놔두고도 여전히 목소리와 상상, 주사위로만 플레이 할 수 있는 시대착오적인 게임에 매달리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그렇다면 도대체 이 TRPG만의 재미는 무엇이길래 사람이 이렇게 매달리는가.


나는 그것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한계가 없는 자율성. 뭐든지 상상할 수 있는 즐거움."


하지만 이게 현실이 된다면 나는 이렇게 평가할 것이다.


"한계가 없는 억까. 무슨 일이든지 일어날 수 있는 좆같음."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하지만 현실로 일어나지 않았다면 내가 욕을 뱉지도 않았을테다.


달리 말하면 그 말은 즉.


"···진짜로 빙의했네."


내가 TRPG 세계 속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시간은 조금 뒤로 거스른다.


내가 어벙하게 중얼거렸다.


"어···. 그러니까 제가 죽었다구요?"

"네 이현우님. 아, 이제 이 이름은 의미가 없어질테니 그냥 환생 예정자님이라 부르겠습니다."

"···그게 더 부르기 어렵지 않나요?"

"괜히 고유명사로 불러서 독자님들의 혼란을 초래하는 것보단 낫습니다."

"네···? 독자요···? 여기도 독자가 있어요?"

"그런게 있습니다."


탁탁.


자신을 천사라고 소개한 하얀 머리에 하얀 눈을 가진 여성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책상에 부딫혀 정리했다.


내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눈 앞에 있는 존재가 천사라는 것도 의심스러웠다.


그야···.


천사가··· 이렇게 징그러워도 되는건가? 하는 뭔가 인간적인 마음의 발로랄까.


내가 동공이 없이 흰자위 밖에 없는 천사의 눈을 보았다.


이에 천사는 한숨을 내쉬더니 읊조렸다.


"실례입니다."

"···혹시 생각도 읽을 수 있나요?"

"저는 천사입니다. 제가 물로 보입니까?"

"오우···."


나는 즉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천사님 만세.


그래. 생각해보면 동공이 없는게 뭐 어떤가.


동공을 제외하면, 또 좀 알비노병 환자처럼 온통 새하얗다는 점도 제외하면 아주 아름다운 외형이 천사님이셨다.


옛 설화에 따르면 천사는 아예 인간의 형상도 아니고 크툴루에서나 나올 것 같은 형상이었다고 하니 이 어찌 축복이 아닐까.


음.


내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니 천사가 눈을 훑겼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아뇨. 저는 지금 모습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건 동공도 만들 수 있다는 뜻 아닌가요? 그럼 그런 모습은 천사님의 취-"


따악!


머리에서 불똥이 튀었다.


서문수··· 아니, 천사표 핵꿀밤이었다.


아아아악!


내가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눈앞에 별이 보인다는게 이런 말이었구나!


앞으로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고작 꿀밤 맞고 엄살떤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아야겠다.


이건 정말로 비인간적인 고통이었다.


만약 이곳이 만화 속 세상이었다면 머리에서 치이익- 하고 연기가 올라올 것 같은 나를 앞에 두고 천사가 새침하게 주먹을 쓰다듬었다.


"좋습니다. 이제 농담 따먹기는 그만하죠."

"그건 천사님이-"


스윽.


"네. 그만합시다. 저도 그만하고 싶었어요. 하하. 천사님이 몇살이신진 모르겠지만 대충 연배를 추측해봐도 저랑 개그코드가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안드네요."

"진짜 죽고싶···. 하아. 아닙니다."


천사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다가 내렸다.


"혹시 그런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무슨 말이요?"

" '사람이 죽으면 그 사람이 연재했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찾아온다고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

"무척이나 두려워한다···?"

"아뇨. 정답은 '무척 좋아한다' 입니다."


천사의 말에 내가 표정으로 말했다.


'예? 그게 무슨 개소리세요.'


물론 천사는 그러던 말던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조금 와전된 이야기입니다. 정확히는 주인공들이 작가를 찾아가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설마?"

"예. 그 설마가 맞습니다."


딱.


천사가 손가락을 튕겼다.


동공이 없는 눈동자가 요사스럽게 반짝였다.


"당신이 찾아가셔야 합니다."

"···진짜요? 진심으로요? 거짓말 아니고?"

"예. 예. 아닙니다."

"···저는 싸움 같은거 할줄 모르는데요?"

"하다보면 할 수 있을겁니다."


천사가 자애롭게 웃었다.


이쯤되니 슬슬 두려워진다고 할 수 있었다.


뭔가 무서운데. 이거 혹시 이렇게 말하다가 갑자기 '안녕히 가십시오 휴먼. 당신의 좆같은 농담 센스는 차마 들어주기 어려웠습니다.' 같은 말을 하면서 보내버리는거 아닌가?


조금 고민해보았더니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결론이 났다.


이럴 수가!


내가 벌벌 떨면서 그 공포스러운 광경을 생생하게 떠올리고 있자 천사가 일축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습니다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려고 했다는거 아닌가요?"

"결과적으로 안했잖습니까."

"못한거겠죠."

"···진짜로 아무 설명 없이 쫓겨나고 싶습니까?"


천사가 으르렁거렸다.


깨갱.


나는 한대 얻어맞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말았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천사가 파락파락 서류를 넘겼다.


"좋습니다. 이제 설명해드리죠. 두 번 해드리지 않을테니 잘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네."

"우선 당신이 빙의할 소설의 종류는 10가지입니다."

"···10개나 되요?"

"원래는 연중 및 구상중 파기품까지 합쳐서 142개쯤 되는데 깔끔함을 위해서 생략된 숫자입니다."

"···오우."


연중작까지 다 아는거야···? 그런 허망한 혼잣말 너머로 천사의 말이 이어졌다.


"우선 첫번째 기획은 당신이 한 차원을 구원할 때마다 다음 차원으로 넘어간다는 구상이었습니다."

"었다는건 이젠 아니라는 뜻이죠?"

"예. 그쪽은 시뮬레이션 해본 결과 이야기가 너무 길어지고 히로인의 공기화 문제라던가 여러 문제점이 발견되어서 폐기 되었습니다."

"아하···."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히로인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런 오묘한 눈빛은 치워주시길 권고하는 바입니다."


그 말에 나도 눈을 돌렸다.


왜, 뭐. 나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고.


혹시 모른다는 상상 정도는 해볼 수 있잖아.


천사는 그런 나를 하찮다는듯 픽 비웃더니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온 것이 두번째 플랜입니다."

"아 네. 그보단 뭔데요, 아까 그 표정? 완전 기분 나쁜데요?"

"그래서 네가 뭘 할 수 있죠 휴먼?"

"······."

"농담입니다."


하나도 재미 없는 농담이었다.


적어도 천년은 묵은 노괴 같은 사람 다운 센스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우드득.


왜인지 천사의 손쪽에서 그런 흉악한 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내가 애써 모른척했다.


다행히 천사도 넘어갔다.


"···후우. 아무튼 그래서 나온 플랜이 두번째. 길게 이야기하면 복잡하니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여러번 반복하는게 문제라면 한번에 다 겪게하면 되잖아?' 입니다."

"네?"

"한마디로 당신은 좆됐다는 뜻입니다."

"정확히 어떻게 좆된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당신은 당신이 집필한 소설 중 저희 신님의 기준에서 인상 깊었던 소설 10개를 동시에 진행하게 됩니다."


천사가 그렇게 일단락 했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다시 질문하려 했으나 그보단 천사가 한발 더 빨랐다.


"여기엔 당신이 좋아하는 TRPG적 요소도 포함될 예정입니다."

"오?"

"당신은 소설에 빙의하고 '챕터'라는 것을 진행하게 되고 한 챕터를 완전히 마무리하면 다른 랜덤한 소설으로 워프합니다. 이걸 반복하는게 두번째 플랜의 핵심입니다."

"오···?"

"그럼 이제 가지고 갈 능력 하나를 여기에 적어주시길 바랍니다."


스윽.


천사가 내게 자신이 들고있던 서류 중 하나를 내밀었다.


그곳에는 이렇게 쓰여있었다.


[제목 : 귀하의 빙의에 대한 통지


1. 귀하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귀하는 1996년에 태어나 현재 28살의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3. 하지만 저희의 신님은 당신이 쓴 소설을 재미있게 보고있던 바, 당신의 영혼을 수거하여 이곳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자 합니다.

4. 저희는 귀하의 발전과 행복을 바라며 다시 한번 귀하의 무궁한 미래과 행운을 바랍니다.


붙임 : [상태창]  끝.]


나는 그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으윽··· 이건··· 머리가···."

"뭐, 세상 돌아가는 곳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겠습니까. 회사 PTSD에 몸부림 치지 말고 붙임 파일에 상태창이나 눌러보십시오."

"이거요? 이거 그냥 글자인데 눌러도 아무 일-"


띠링!


거기까지 말하던 내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야, 정말로 눈 앞에 상태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름} 미정


{고유 능력} 여기에 입력해주십시오.


{능력치} 미정


{설명} TS물을 주로 쓰던 작가입니다. 지금은 그 업보로 인해 어떤 인물로 빙의하던 TS될 슬픈 운명을 지닌 남자이기도 합니다. 과연 이 남성은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자신의 남성성을 보존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기함을 토했다.


"잠깐, TS요? 저는 TS가 좋긴 한데 제가 그렇게 되고 싶다는건 아닌데요?"

"진심은?"

"뻐킹 감사합니다. TS만세. 신님 만세."

"푸흐. 웃기군요. 좋습니다. 이제 거기 고유 능력이라 쓰인 곳에 원하는 능력을 입력하기만 하면 빙의할 수 있을겁니다."

"오···."


나는 시험삼아 [전지전능]이라고 입력해보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안일어나는데요?"

"흠···. 제가 사람을 착각했나봅니다. 그정도 융통성도 없습니까? 상식적으로 전지전능이 가능할리 없지 않습니까."

"그치만···."

"뭘 그치만 입니까. 이건 이야기입니다. 당신도 작가라면 알고 있을텐데요? 신님이 즐기기 위해서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아무런 위기도 슬픔도 없으면 그게 무슨 재미입니까."

"일상물··· 안될까요?"


내가 간절한 눈빛으로 바라보았지만 천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작가님. 작가님이 주로 쓰신 장르는?"

"···성장형 먼치킨, 천재, 사이다"

"그렇다면 필수 불가결한 것은?"

"전투···."

"아셨으면 빨리빨리 진행합시다."


흑.


내가 마음 속으로 또르르 눈물을 흘렸다.


과거 나라를 팔아먹는 수준의 불평등한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맺는 신하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고심에 고심을 반복하던 나는 결국 한가지 능력을 정했고, 적어넣었다.


그러자 천사가 흥미롭다는듯 턱을 쓰다듬었다.


"[사망회귀]? 작가님이라면 분명 좀 더 안정적이고 보호적인걸 택할줄 알았습니다."

"어떤 창작물에서도 무한회귀는 사기에요···. 주인공인 경우에, 한정되지만."

"뭐,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떠나실 차례군요."


짝.


천사가 박수를 쳤다.


그러자 등 뒤에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쩌어업.


차원이 갈라져서 나를 향해 그 혓바닥을 날름거리고 있었다.


진짜로 가야하는구나.


내가 눈을 질끈 감자 갑작스레 다가온 천사가 나를 껴안았다.


"작가님, 모르셨겠지만 사실 저도 작가님 작품 좋아합니다."

"네? 갑자기 이렇게 커밍아웃을? 그럼 저한테 뭔가 선물이라도···."

"그런데 공과 사는 별도라서요."


천사가 짓궃게 키득거렸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실망하는 사이 어느 순간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볼에 묘한 따스함이 남았다.


어?


무슨 일이 일어난지 파악하기도 전에 슈욱 하고 내가 밀쳐졌다.


"그러니까 이건 공이 아닌 사로써의 제 선물입니다."


방긋 웃는 천사의 신형이 멀어지고 차원 저 너머에서 앗, 너무해! 이 불여시 같은 년아! 따위의 각양각색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덕분에 나는 차원을 넘으며 의식이 희미해지는 와중에도 이런 생각 밖에 할 수 없었다.


'히로인 아니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