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하. 그러니까, 너는. 인간이라는 거네?"


차가운 목소리에 몸을 떨었다. 점점 온기를 찾아가던 소녀의 눈은 처음 봤을 때보다 더한 겨울이었다.


"아, 아가씨. 그게...그러니까...제가 속이려던 게, 아니."


"하, 대놓고 말까지 더듬는구나.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뭐라고 말 좀 해봐. 아니면 뭐. 이제 연기할 필요도 없다는 거야?"


처음 눈을 떴을 땐 낯선 몸이었다. 혈액 대신 기름이 흐르는 육체. 그것도 여성형. 가슴은 쓸데없이 거대했다.

영문도 모르고 상황에 멍하니 끌려가니 눈앞의 소녀는 주인이 되었다.


"...됐어. 폐기처분 하진 않을게. 대신 내 눈앞에서 제발 꺼져줘."


원래 자신은 인간이라고 진실을 밝힐 수는 없었다. 말하면 불량품 취급 받고 폐기처분 되는 미래가 뻔히 보이는데 그럴 수는 없었다.

누구든 그럴 것이다. 누구에게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정당했노라고. 잘못한 것따윈 하나도 없다고.


...정말로?

피눈물을 흘리며 오열하는 아가씨를 두고 정말로?

차라리, 그때 정체를 밝히고 얌전히 폐기처분 당했더라면, 아가씨가 저렇게 슬퍼하진 않았을 텐데.


"거짓말쟁이..."


그 말이 내 가슴 정중앙에 박혔다.

그래, 나는 거짓말쟁이였다.


처음 본 소녀였지만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소녀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불신이란, 다른 것에 믿음을 의탁할 수밖에 없는 생물이기에.

그 누구보다도 거짓말에 상처입은 소녀는, 절대로 거짓말 할 수 없는 기계를 맹목적으로 믿었다.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로봇 연기는 잘 먹혀들어갔을 정도니까.


"무슨 가사 안드로이드가 가사도 똑바로 못 해?!"


"본 가사 안드로이드의 가사 기능은 따로 DLC로 팔고 있으며, 아가씨가 원하는 기능을 탑재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매장까지 걸어가는데 뙤약볓에 찜찜하게 땀을 흘리고 새하얀 살결을 태워먹으며 1시간 동안 걸어가 가사기능 레벨 1부터 1.0달러 가사기능 레벨 2부터 10.0..."


"아, 알았어! 그냥 살지 뭐!"


믿었었다.

이제 소녀는 기계조차 믿을 수 없을 것이다.

다름아닌 나 때문에.


기계였으나, 기계가 아니었고.

인간이었기에 거짓말을 할 수 있었던 나 때문에.


현명한 소녀는 같은 실수를 세 번이나 반복하지 않으리라.

가장 믿던 것에게 두 번이나 배신당한 소녀는 해결책을 찾겠지.

무엇에게도 신뢰를 주지 않는다면 무엇에게도 배신 당할 일도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나 비참한 인생일 것인가.


"나에게 사랑을 속삭인 것도 다 거짓말. 인간이, 그런 몸까지 되어가면서 나에게 잘 대해준 것은 어떤 꿍꿍이가 있었는진 모르겠어. 하지만 다 이뤘으면 좋겠네. 그러면 더이상 볼 일도 없을테니."


소녀의 작은 손이 나를 밀쳤다. 나는 연약한 손길에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밀려난다.

몸이 저택에서 밖으로 쫓겨난다. 문이 느릿하게 닫혀가는 듯한 착각 속에서 소녀의 입모양이 생생하게 들렸다.


"나는 영원히 당신을 증오할 거야."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소녀와 나의 인연의 고리가 깨지는 소리기도 했으며, 소녀의 인생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소리였고, 내가 더이상 존재할 의의를 잃어버리는 소리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을 차마 포기할 수 없어서.

깨져버린 무엇인가를 잔뜩 상처입으면서도 그러모아서.

겨우,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을 말을 완성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저는 아가씨를 영원히 사랑할게요."


부디 아직도 문 뒤에 주저앉는 소녀에게 이 말이 닿기를.

구원이 있기를.


"어차피 그것도 거짓말일 거잖아...인간은 모두 거짓말쟁이..."


인간을 초월한 강철의 청각이 소녀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비틀거리면서도 자기 방으로 가는 소리가 들렸다.

무엇인가 슬픈 일이 있으면 그자리에서 주저앉아 몇시간이고 주저앉는 아가씨는, 드디어 자기 방으로 돌아갔겠지.


그때처럼 현관에 6시간을 앉아있다 감기에 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기계적으로 계속 쿡쿡 찌르며 닦달하는 나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볼을 부풀리며 입에 죽을 담는 소녀도.

이젠.


"...흐."


여태까지 힘들게 이어붙인 미소가 무너져내린다.

더이상 아가씨를, 소녀를 만날 일은 없으리라.

힘이 풀릴 리 없는 다리가 풀려 쓰러진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제 아가씨가 안 그러니 내가 그러네.

비록 내가 감기에 걸릴 일은 없겠지만...


깜빡이지 않아도 되는 눈에 물이 맺힌다.

하늘을 보니 비가 오고 있었다.






"...비 오네."


이러면, 소풍을 못 가는데.


떠올린 생각에 화들짝 놀란 시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어딘가 바보 같고 뻔뻔한 가사 안드로이드는 보이지 않았다.


"...흥! 그놈이 내 곁에 있으면서 빼먹은 기밀로만 기업 하나를 인수할 수도 있을텐데 잘 먹고 잘 살겠지!"


괜스레 입밖으로 뱉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럴싸했다.

속으로 자신의 바보 같은 메이드를 마구마구 씹어주던 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거짓말 안하는 안드로이드를 잔뜩 데려와야지.

들여오기 전에 꼭 가상인격가상버튼을 꾹꾹 누르고 하나하나 테스트 해보는 것이다.

그런데도 그 안에 인간이 섞여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불안했지만.


소녀는 계획대로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바보 같았는지.


기계는, 시키지 않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기계는, 자신에게 장난을 걸어오지 않는다.

기계는, 바보 같은 짓을 해버리면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지 않는다.

기계는, 자신이 다쳐도 걱정스럽다는 듯 안절부절하지 않는다.

기계는, 사랑을 속삭여도 거기에 애정의 한조각도 담겨있지 않다.

기계는.

기계는.


"아."


기계에게 둘러쌓인 소녀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제서야 한구석에 처박힌 소풍 가방이 보였다.

자신이 가장 믿던 메이드의 거짓말을 눈치채게 해준 물건이다.

소녀는 홀린듯이 가방을 집어들었다.


소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의 메이드가 갑자기 안 보이던 가방을 들고 있던 것을.

그게 무엇이냐 질문한 소녀에게 메이드는 대놓고 거짓말을 했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기계는 절대로 불가능한 거짓말을.

소녀는 추궁했고 메이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어놓았다.


정말로 내가 지금까지 날 속여왔던 걸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걸까?


할까 보냐.


지금껏 자신이라면 당연히 용서받을 것이라는 표정을 자신의 부정을 이야기하는 혈육이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부모였으며, 부모기에, 당연히 자식이 용서할 거라고 생각했고, 그 말대로 착한 아이를 연기했다.

소녀는 많은 것을 감내했고, 희생했으며, 그때마다 배신 당했다.


생일 날, 호사스러운 부모가 호화스러운 카지노 크루즈에 있을 때 소녀는 병원에서 귀리죽을 먹었다.

병명은 과로였다.

뻔뻔하게 돌아온 부모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용서를 구했다. 그것이 친하니까 당연하다는 것처럼.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 소녀는 차가운 얼굴로 부모를 버렸다.


그러니 이번에도 다르지 않으리라.

저 가방에 든 것이 무엇이 됐든 간에 소녀의 분노를 타오르게 할 것이 분명했다.

지금껏 좀 친해졌다 싶으면 기어오르는 인종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빤뻔한 거짓말투성이였지만.


소녀는 가방을 열었다.

케이크가 보였다.

그제서야 이해했다.

메이드가 했던 거짓말을.

소녀를 깜짝 놀래키기 위해서 꺼냈던 참으로 하찮은 거짓말을.


그 날은 소녀의 생일이었다.














이러고 나서 아가씨가 안드로이드메이드틋녀를 찾지만.

갑자기 습격한 적대 기업이 휘두른 칼 대신 맞고 쓰러지거나

어디 창관에 처박혀서 반쯤 망가져 있거나

아무튼 회생불능 판정을 받은 틋녀를 보고 오열하고.

시간이 지나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서 훌쩍 커버린 아가씨가 메이드 틋녀를 깨우고 감동의 상봉 한 번 찐하게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