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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피.

악마의 혈족.

붉은 눈.

 

나의 가문에 달라붙은 경외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흉칭들.

허나, 세간의 기대와 달리 우리의 가문은 무척이나 따뜻한 곳이었다.

 

아름다운 저택이 있었다.

근심 없는 웃음이 있었다.

차가운 북방임에도 온기가 있었다.

 

적어도 한때는 그랬다.

 

-콰직!

 

사내의 손에 들린 컵이 고철로 명칭을 바꾸어 찌부러졌다.

하도 부셔먹어 재질을 쇠로 바꿨는데도 이 지경이다.

 

"아프다. 머리가 아파."

 

사내가 자신의 머리조차 고철로 바꿀 듯 쥐어짠다. 

거칠게 숨을 고른다.

 

"너인가?"

 

천천히 올라오는 붉은 눈동자.

그곳에는 내가 비친다.

 

금방이라도 피로 얼룩질 것만 같은 기분.

나는 사내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몸을 떨었다.

 

"너 때문인가?"

 

하지만 사내는 그저 물음을 반복했다.

나는 여전히 답 없이 몸을 떨었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사내가 두려웠다.

 

한때나마 반가웠던 사내의 눈동자가 이제는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너 때문이구나. 그렇군... 너 때문이었어."

 

혼잣말을 지껄이던 사내가 내게 손을 뻗어온다.

 

아, 이번에도 광증에 잡아먹혀 버렸구나.

 

저번에는 2주 정도 앓았었던가.

오늘은 저번보다 심한 것 같은데 3주 정도 뻗으려나? 그것도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죽으려나?

 

"아버지..."

 

공황적으로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결국 버티지 못해 작게 중얼거렸고.

 

"……."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약간의 총기를 되찾은 사내는 툭 하고 손을 떨어트렸다.

 

이어지는 침묵.

그 속에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사내는 다시금 통증이 찾아온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안... 미안하구나."

 

자책, 슬픔 여러 감정이 느껴지는 한마디.

나는 그에 위로도 뭣도 하지 못한 채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와 숨을 골랐다.

 

무척이나 가증스러웠으니까.

 

"이번에도 수고하셨습니다."

 

방문 밖에서 대기하던 집사장이 수건을 건넸다.

나는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이곤 내 방을 향했다.

 

"하아... 하아..."

 

두려움이 떠나가지 않는다.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급히 이불 속에 숨어들었다.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마음을 지배했다.

 

이걸로 몇 달이나 버틸 수 있을까?

다음 주, 아니 내일 맞아 죽는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죽음을 앞두고서도 도망이라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용감했기 때문도, 죽음을 바라기 때문도 아니다.

 

피.

우리 가문의 피에는 악마가 깃들어있으니까.

 

악마.

그것은 사람에게 사람답지 않은 힘을 준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앗아간다.

 

한때는 그래도 괜찮았다.

어머니가 살아계셨을 때는 모두가 괜찮았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저택을 밝히시던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그녀는 아버지를 사랑했고, 나를 사랑했고, 모두를 사랑했다.

반대로 아버지도, 나도, 모두도 그녀를 사랑했다.

 

그래, 우리는 따뜻한 가족이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불행은 그때부터였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그 슬픔을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내는 슬픔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또 그만큼 미쳐갔다. 

악마는 지금까지 억눌렸던 만큼의 본성을 드러냈다.

 

부서져 가는 저택.

꺼져가는 웃음.

사그라드는 온기.

 

우리가 지키려 노력했던 어머니의 유산들이 미쳐버린 한 남자에 의해 붕괴돼 갔다.

 

"밉습니다."

 

언제나 차가운 피는 앗아간다.

 

"당신이 밉습니다."

 

그것도 그리움만 둔 채 앗아간다.

 

웃으며 나를 쓰다듬던 손길도.

미쳐가는 자신을 전장에 가두던 과거도.

미쳐버렸음에 자식만큼은 알아보는 눈길도.

 

"아버지... 저는 당신이 밉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리움이었기에.

 

나는 그저 눈을 감았다.

 

 

 

 

**

 

 

이튿날 아침.

 

침묵만을 이어가던 저택에 큰 소란이 일었다.

 

물론, 그것이 물리적인 소음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마음에 그만큼의 소란이 일었을 뿐이다.

 

"…?"

 

몽롱한 눈으로 거울을 바라본다.

그에 사내의 모습이 비친다.

 

부친의 '부'자도 닮지 않은 부드러운 외모.

악마의 '악'자도 물려받지 못한 푸른 눈알.

그나마 모친의 '모'자를 닮은 백금발의 머릿결.

 

이것만 보면 여느 때나 다름없는 사내의 모습이었다.

 

부푼 젖가슴과 잘록한 라인이 그가 여인임을 나타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머니?"

 

그래, 거울에 비친 사내의 모습은 그가 떠나보낸 모친의 외모와 퍽이나 닮아있었다.

내려간 입꼬리와 무척 불행해 보이는 눈가만 뺀다면.

 

 

사내... 아니, 여인이 눈을 비볐다.

그리고는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아... 끝장인가..."

 

사내는 부친이 있는 이 가문이 무척이나 미웠다. 

동시에 모친이 있던 이 가문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안 그래도 무너지고 있는 가문이다. 

 

계속된 승전으로 인한 배상금으로 버티고는 있으나, 그 승전을 만든 사람 스스로가 그것을 갉아먹고 있으니 본말전도. 

 

충성을 바치던 가신들은 하나하나 부친의 손에 사라져갔고 때문에 사기는 바닥. 

그나마 후계자가 버티곤 있으나 정작 그 미친 부친의 능력에 반절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런 상황임에도 최후의 희망은 반푼이의 후계자.

 

현 가주가 자멸하고, 악마의 피를 물려받지 않은 장자가 가문을 승계한다면 지금까지 이뤄낸 것들로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을 테니.

 

물론, 그 장자는 이제 없다. 장녀라면 모를까.

 

"하아..."

 

지금 이 농담 같은 상황을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달라는 가신들의 눈초리가 벌써 심장을 조여오는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 정도면 약과일지도 모르지. 이런 이변에 환장하는 마탑놈들이 배때지를 따보려 올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여인은 귀를 막고, 눈을 막고, 입을 막고, 그냥 맘 편히 울고 싶었다.

후계자라는 입장 때문에 그럴 수 없을 뿐. 

 

더군다나 하늘도 무심하다.

눈물을 마음으로 삼키기도 전에 다급히 걸어오는 발소리가 울렸으니까.

 

- 덜컹!

 

노크도 배려도 없이 문이 열린다.

사용인으로서 벌을 받아도 한참을 받아야 할 행동이었지만, 이 저택에서는 가끔 허용되는 일이었다.

 

"도련님! 서두르셔야 합니다!"

 

땀을 뻘뻘 흘린 채 들어오는 노인.

가문의 집사장이었다.

 

"가주님의 광증... 이?"

 

후계자와 함께, 그 이상으로 온갖 일을 겪어왔던 집사장이었다.

그런 그가 긴급사항을 다 잇지도 못한 채 굳어버렸다.

 

너무나 어색하고도 익숙한 여인이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으니까.

 

"하필... 돌겠군."

 

그 원인이 된 여인은 어떠한 해명도 없이 노인을 뒤로하고 달려나갔다.

애초에 해명할 길도 없었고, 광증에 시달리는 가주를 냅두면 안 그래도 부족한 가신이 또 하나 사라질 것이기에 필사적으로 달렸다.

 

사람을 지나쳐갈 때마다 당황스러운 눈빛이 비친다.

그녀의 모습에 누군가 제지할 만도 하다만 누구도 여인을 제지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지 못했다.

 

그 이유를 누구보다 잘 이해한 여인은 입을 꾹 닫고 달렸고, 결국 밖으로 나온 가주를 볼 수 있었다.

늙은 가신의 목을 한 손으로 붙잡아 든 가주를 말이다.

 

"하아... 하아..."

 

고통에 가득 찬 가주가 머리도 가신도 터질 듯 쥐어 짜낸다.

그리고 그런 가주를 말리는 것이 후계자의 역할이자 의무였다.

 

하지만 다가가기는커녕 여인은 자리에서 멈칫 뒷걸음질 쳐버렸다.

 

'이건...'

 

이유는 간단했다. 스스로를 방에 봉인해두다시피 한 가주가 스스로 빠져나왔으니까.

지금 그는 거의 모든 이성을 잃은 수준이나 마찬가지였다.

 

변하기 전의 신체였어도 죽음을 각오해야 할 판인데 변해버린 지금은 어떨까?

무심히 툭 건드려져 네 갈래로 찢어져 버리지 않을까?

 

"아... 아버지! 그만두십시오!"

 

그런 불길한 예감에도 여인은 떨리는 다리를 움직여 사내에게 다가가 외쳤다.

 

용기 따위의 감정은 아니었다. 

단순히 가주의 손에 들린 가신이 가문에서도 이승에서도 곧 하직할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하아... 머리가..."

 

허나, 후계자 외침에도 불구하고 가주는 그녀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 중 불행인 일이었다. 그가 지금 그녀를 보았다면 방금의 상상처럼 찢겨져 버렸을 테니.

 

'무섭다.'

 

만약, 여기 선 이가 사내인 후계자였다면 한 발짝 물러서 관망했을 게 분명하다.

뿌려지는 피가 가주를 진정시켜 주길 바라며 말이다.

 

"제발 정신 차려주십시오! 아버지!"

 

그러니 이 행동의 원천은 그야말로 자포자기였다.

 

여인이 되어 후계자 노릇도 제대로 할 수 없어진 자신이 가신들을 외면하는 순간, 자신 또한 가신들에게 외면될 것이 눈에 선했기에.

 

지금 부친의 손에 죽든, 부친이 죽은 뒤 가신들에게 암살당하든, 그도 아니면 다 함께 몰살당하든 어차피 죽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아프다... 머리가 아프단 말이다...!!!"

 

정말 악마라도 든듯한 가주의 붉은 눈에 오금이 저려든다.

저리다 못해 정말 찔끔 지려버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여인은 가주의 시선을 어떻게든 돌리려 애썼고.

 

"아, 아버... 커흑...?!"

 

그 발버둥이 무의미하진 않았는지 가주의 손과 그녀의 목이 겹쳤다.

 

"커헤윽... 아그그,윽......"

 

가주의 고개가 석상처럼 무거이 돌아간다.

그 느림마저 우스꽝스레 발버둥 치는 먹잇감의 공포가 되는 듯.

 

"아, 아..."

 

여인의 눈에 절망이 검게 들이찬다.

가주의 눈에는 그것이 붉게 칠해져 비친다.

 

좀 더 붉게. 

좀 더 붉게.

 

"살... 살,려..."

 

너무나 달콤한 비명소리다. 

평생을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외견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것을 가진다는 것에 새빨간 충동이 따위가 돼버릴 정도로.

 

 

…아.

 

 

"……아버지?"

 

갑자기 품에 들어와 영문을 모르는 여인의 불행한 눈동자와 눈을 맞췄다.

그리고는 기억 저편의 그때처럼 무척이나 달콤하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아, 메릴다. 당신이 너무나 보고 싶었소. 무척이나 긴 악몽을 꾸어온 듯하오."


너무나 갑작스러운 변화.

 

"그게 무슨..."

 

그에 질척한 끔찍함을 느낀 여인이 본능적으로 그를 밀어내려 들었다.

하지만 눈앞의 남성은 너무나 크고 강해서 아무리 밀쳐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흐음, 무슨 일일까? 오늘따라 내 부인이 우울해 보이는구려. 앙탈도 심하고 말이야."

 

그것이 앙탈이라 생각했는지 가주의 얼굴이 더욱 장난스러워져 간다.

여인에게는 혐오와 비슷한 감정이 더 짙어질 뿐이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아버지가 완전히 미쳐버린 걸까?

 

판단력이 좋지 않았던 후계자는 이번에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사실만을 알았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한낱 꿈처럼 넘어가려 한다는 것을.

우리의 분노와 슬픔을 가린 채 자신의 슬픔만을 달래려 한다는 것을.

 

역겨웠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순간에는 이성도 역할도 없었다.

 

여인이 사내의 목을 물었다. 

살의로, 증오로. 역겨움을 찢어발기기 위하여.

 

그리고는 1, 2, 3 정신이 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인다.

가슴 깊숙이 공포를 새겨두던 그 눈동자가.

 

증오는 두려움으로 변해 여인의 심장을 난도질한다.

 

참을 수 없어 눈을 질끈 감는다.

비명을 내질렀다.

 

"흐읏..."

 

죽어가는 이의 비명이 아닌, 어딘가 야릇하기까지 한 신음.

 

사내가 여인의 목을 물었다.

 

무척이나 미약하게, 잘근잘근, 냄새를 맡으며.

자신의 것이라는 듯 진득한 흔적을 남기며.

 

동맥의 피가 생생하게 흐름이 느껴진다.

약간의 열기도, 장난스러운 웃음도.

 

"아니야... 이건 아니야..."

 

빛이 들지 않는 동공을 한 여인. 그녀가 떨리는 손으로 가볍게 사내를 물린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꼼작 않던 사내였지만 이번만큼은 스르르 뒤로 밀려난다.

 

신은 어떤 현실을 담고 싶었기에 우리를 망가뜨렸나.

만약 악마의 소행이라면 얼마나 더 망가뜨려야 속이 후련해질까.

 

아버지가 자식을 탐한다. 있어서는 안될 만큼 뒤틀린 일이다.

아름다웠던 과거가 비쳐 눈을 감고 싶어지는 일이다.

 

그때의 우리 가문은 얼마나 아름다이 빛나고 있었는가.

 

아이였던 나의 눈에 아버지는 너무너무 대단한 사람이어서 작은 가슴으론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 큰손이 쓰다듬어주는 것이 너무너무 좋아 부푼 볼로도 다 담아내지 못할 만큼 크게 웃었다.

 

그러니 지금의 남자는 얼마나 애처로운가.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비참해졌는가.

 

"아버지... 내 아버지..."

 

여인이 곱디고운 손을 위로 뻗었다.

애정도 증오도 한가득 담아서.

 

이 손길은 어디로 향해가는가?

 

미쳐버린 아버지?

피를 뿌려댄 악마?

그것도 아니면 인간을 우롱하는 신?

 

아마도 그 전부였겠지.

 

"메릴다...?"

 

여인의 손이 아직까지 장난을 치는 부친의 뺨을 부드러이 쓰다듬는다.

그리고 간절히 바랬다.

 

"부디... 제발 죽어주십시오. 우리의 시간이 더 추락하기 전에. 우리가 더 미쳐버리기 전에..."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인다.

이태까지 흘릴 수 없던 눈물도 주렁주렁 맺힌다.

증오하면서도 증오할 수 없던 아버지였기에.

 

"하하, 메릴다 그게 무슨 소리요. 죽어달라니... 아버지라니..."

 

마지막 발버둥, 가주의 붉은 눈동자에 혈흔과 같이 일렁임이 인다.

여인은 직감한다. 이것이 우리가 가족이었음을 기억하며 사라질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아버지. 메릴다는 죽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는 십이 년 전 그날에 떠나셨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매릴다는 살아있어. 이렇게 내 눈앞에 있지 않으냐...? 머리가... 머리가 아프구나..."

 

가주가 머리를 쥐어 싼다.

여인은 마지막으로 소리를 높인다.

 

"아버지. 저는 메릴다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의..."

 

"메릴다. 메릴다 마님이십니다. 가주님."

 

하지만 그것은 닿지 못한다.

 

지친 듯 가쁜 숨을 몰아쉬는 노인의 목소리.

마치 뱀을 닮은 그것이 여인의 말을 끊고 뒤에서 속삭여온다.

 

"…집사장?"

 

"허허, 장난이 너무 심하셨습니다... 마님."

 

"농이라고...?"

 

빛이 꺼져가는 가주의 눈빛에 어두운 생기가 돈다.

 

"…아, 그렇군. 농담이었어... 농담... 맞아. 메릴다는 이리 멀쩡히 살아있지 않나."

 

노인에게도 마찬가지다. 그의 눈동자에는 갈망이 깃들어있다.

 

"물론이지요. 가주님. 마님은 농담을 무척 즐기셨으니까요."

 

가만히. 너만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이라는. 늙은 인간의 깊은 갈망이. 

 

"집사장..."

 

어째서인가? 무너져가는 가문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세상 모두가 배신해도 당신만큼은 내 편인 줄 알았는데.

 

"이 미친 늙은이가...! 싫어!! 싫다고!!"

 

치솟는 배신감과 역겨움. 그것이 참을 수 없어 여인은 노인을 향해 소리친다.

 

이따위 이유로 짓밟히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죽더라도 이 증오는, 추억은 잃어선 안 되는 것이었다.

 

여인이 노인을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차라리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면 좋겠다고.

 

하지만 이번에도 닿지 못한다. 

끝의 끝까지 아버지였던 광인은 자신을 놓아주지 않았다.

 

"미안하오 부인. 많이 섭섭했겠지. 오늘부터는 늘 곁에 있을 테니 용서해주오."

 

"허허, 가주님 이 늙은이는 빠지는 게 좋겠지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마님."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노인은 등을 돌린다.

여인은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리고 입이 없어 지를 수 없었다.

 

"하읍... 개자식... 흐읏......"

 

거칠고도 부드럽게 희롱해오는 혀가 안을 누벼대는 순간, 부부가 입을 맞추는 것은 신의 섭리라는 듯 탈력감이 쏟아졌기에.

부인은 미숙하게 저항하며 그저 젖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메릴다. 당신의 웃음을 되찾고 싶소. 내 온 힘을 다해 당신을 즐겁게 하리라."

 

후계자였던 자는 모조리 짓밟힌 채 부친이었던 것의 손에 의해 힘없이 끌려나갔다.

 

그리고 무척이나 끔찍한. 그리고 혐오스러울 정도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눈을 파내고 싶을 정도로 내리며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사랑하오. 부인. 언제라도 좋으니 마침내 미소를 보여주시오. 내 언제나 그대와 함께할 테니."

 

시간은 속절없이 지나 밤이 되었다.

찢어져 가는 가문을 기우던 후계자는 부인이 되어 얇은 속옷만을 입은 채 그의 품에 안겼다.

 

그것은 푹신한 침대보다도 아늑해 여인은 속삭였다.

 

"밉습니다."

 

차가운 피는 앗아간다.

 

"당신이 밉습니다."

 

그것도 그리움만 둔 채 앗아간다.

 

"아버지... 저는 당신이 밉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거짓말처럼 지나쳐가.

 

여인은 그저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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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우... 뜌땨이... 간만에 쓰니 엄청 안 나오네...

근친피폐암타의 길은 무척이나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