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이 글은 아주 오랜 삶을 살아온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예상했겠지만 그 남자는 지금은 살아있지 않다. 오랜 삶을 살았다는 말은 인간의 수명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 아니라, 그는 진정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봐도 그렇다. 처음부터 그에게 긴 수명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의 노력이나 발견을 통해 후천적으로 얻은 것도 아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선 '그녀'라는 인물도 이 이야기에 등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녀는 아주 조용하고, 차가운 사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가 '다가왔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둔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냥 그녀가 아주 치밀하고 똑똑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되려 그는 자신이 그녀에게 다가갔다는 기억을 가지고 죽었을 것이다. 오래된 이유에서 비롯된 접근이었겠지만, 그 이유가 이 이야기에 핵심적인 요소는 아니다.


남자는 꽤 열심히 살고 있었다. 작은 단칸방에서 좋아하지는 않지만 잘하는 일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여자는 그보다 먼저 그 건물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건물에 살면서 1년 동안이나 마주치는 일이 없었지만, 강한 운명에 이끌린 것처럼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옥상으로 올라와 각자의 시간을 보내었다. 남자는 반복되는 지겨운 일상의 스트레스를 담배 연기로 흘려 피워냈고, 여자는 어째서 인지 난간에 팔을 얹고 하늘을 바라볼 뿐이었다. 담배 한 개비를 모두 태운 남자는 문득 궁금해졌는지 말을 걸었다.


"하늘 보는 거 좋아해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태양이 지평선을 건너 주홍 빛 일광이 남자의 눈을 덮쳤다. 여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이 아프지도 않은 지 하늘만 자꾸 바라보았다. 답답해진 남자가 담배를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뜨는 찰나, 그녀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좋아해요. 높은 곳에서 보는 건 더 좋아하고요."


남자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다시 자리에 돌아왔다. 여자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 있었지만 상관 없었다. 책이나 인터넷에서 본 작업 멘트들이 여럿 생각났지만 막상 입 밖으로 꺼내기에는 전부 식상해 보였다. 예상 외로 어색한 정적을 먼저 깨고 말을 꺼낸 건 여자였다.


"같이 가실래요? 아는 높은 곳이 있는데."


남자는 약간 망설여졌지만 좋다고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쩌죠, 제가 오늘은 바빠서요. 다음에 시간이 된다면.."


여자는 남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쇠로 된 손잡이를 열고 문을 나설 때까지 남자는 한 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는 한참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자리에 서있다 넣어둔 담배를 다시 꺼내 하나를 입에 물었다. 한 번 마주친 이후 그들은 꽤 자주 마주쳤다. 하지만 여자는 데이트 신청은커녕 대화도 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남자를 무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여자라면 괜히 쑥스러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상은 그녀 없이도 평소처럼 계속됐고, 남자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기요."


우연히 동시에 문을 열고 외출하던 날, 눈까지 마주쳤지만 못 본 체하고 지나가려던 그녀를 남자가 불러 세웠다. 여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남자를 뒤돌아보았다. 남자는 외출의 목적도 잊은 체로, 홀린 듯이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시간 되는데. 같이 가요, 높은 곳."


여자는 처음으로 얼굴에 작은 미소를 띄우더니 고개를 도로 돌렸다. 


"따라와요."


그녀를 따라 도착한 곳은 산이었다. 높은 곳에 걸맞은 곳이면서도 어울리지 않는 슴슴한 장소였다. 하지만 무언가에 홀린 것일까, 산은 입구부터 그 너머로 보이는 길과 기로까지 반짝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남자는 그때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의 옆에서 같이 걸어 올랐다. 그녀는 충분히 걷다가 중간에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 


".. 이쪽 길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는 이상한 감각이 느껴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처음 오른 산이었지만 이쪽 길이 맞는 길이라는 확신이 느껴졌다. 입으로 나오는 말과 다르게 뇌에서는 데자뷔를 느끼고 있었다. 풀이 우거진 길은 도저히 길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기도 애매한 수준이었지만 걷는 데에 문제될 건 없었다.


"기억나는 곳으로 가요."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우는 법은 알고 있는 것. 아니, 그것보다는 기억상실증 환자가 말하는 법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비슷했다. 나뭇가지에 베인 상처들은 어느 순간부터 아물어있었다. 그녀는 그와 함께 가지 않았다. 숲에서 빠져나와 길을 타고 산을 내려 그대로 건물로 돌아왔다. 


"..."


남자의 기억은 서서히 사라졌다. 며칠 동안 그녀와의 기억은 전부 파도에 휩쓸린 소금처럼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란 수염도 도로 들어가고 피운 담배도 담뱃갑에 꽃처럼 다시 피어났다. 그리고 남자는 말없이 집으로 향했다. 건물 아래까지 도착하자 옥상 난간에 처음 보는 여자가 팔을 얹은 채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래도 네가 죽는 건 싫어.."


어린 소녀가 고리로 된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늙은 남자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글쎄, 난 당신 인생의 일부가 되는 것 만으로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방문 밖에서 흐느끼는 소녀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 남자는 초를 끄고 이불을 덮었다. 뚫린 문풍지로 그녀가 남자를 밤새 쳐다보았다. 밤이 지나고, 소녀는 일찍이 밖에 나와 마루에 앉아있었다. 이후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죽어도 하늘에서 당신을 보고 있을 거야. 내가 눈이 안 좋아 별이 되면 당신이 안 보일 거 같으니 구름이나 돼서 매일 어떤 세상을 보았는지 알려줄게."


소녀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와 장생을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소녀가 여러 차례 그를 설득했지만 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소녀는 남자의 말을 듣고 결심했다. 


"네가 내 인생의 일부인 건 싫어, 전부가 아니면 안돼. 그러니까 날 잊어도 좋으니 내 옆에만 평생을 머물러줘."


남자는 순식간에 어려지고 생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그녀를 알아보진 못했다. 그녀는 그가 갈만한 곳에 늘 먼저 이동하며 그의 삶에 접근했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거나 너무 늙어버리면, 그녀의 나이와 비슷한 나이로 돌려버렸다. 때때로 그가 보고 싶었지만 하늘을 보면 그와 대화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졌다. 그녀도 느리지만 천천히 나이를 먹었고, 남자와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