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문장을 정리하는 데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기술을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런 방법을 쓰는 이유는 불필요한 텍스트를 줄이고, 의미를 조밀하게 구성하며, 깊게 표현해야 할 부분에 더 많은 텍스트를 할애하기 위함입니다



1. 부가적 문장성분 정리


부가적 문장성분은 대상을 꾸며 주는 역할을 합니다

원하는 이미지를 형성하기 위해서 한 번은 반드시 들어가야 하지만, 같은 내용이 두 번 이상 들어갈 필요는 거의 없습니다


ex) 그 또래 애들은 대개 호기심의 노예였다. 그러나 시우는 또래들과는 다르게 나뒹구는 낙엽, 창문에 맺힌 물방울 경주, 벽지에서 공룡 모양을 찾는 데에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굵게 표시한 부분은 앞에 나온 내용과 중복입니다

그렇게까지 이상한 문장은 아닙니다만, '그러나'가 대조의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으므로 걷어내도 무방합니다


혹은 앞 문장 + 그러나 까지를 잘라도 되겠습니다

다만 예시가 정말 명확해야만 독자가 쉽고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예시만 남기고 두괄문을 자르는 건 위험 소지가 있습니다



2. 불필요한 대명사 정리


소설은 구어체와 문어체의 중간에 있습니다

구어체처럼 필수적인 문장성분을 제외하고 다 생략해 버린다면 무게가 떨어지고 의미도 모호해지지만, '문건'을 작성하는 것처럼 모든 사항을 명확히 밝힐 필요도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영어 번역 텍스트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져 마치 영어처럼 대명사로 문장성분을 꼬박꼬박 채워넣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ex) 필리아 씨는 고상한 여인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사뿐하고, 목소리는 청명했다. 그녀와 대화를 할 때면 누구나 지식에 눈뜨게 되며, 겸허를 배우게 된다. 마을 다른 꼬맹이들처럼 나 또한 그녀를 마음속에 '누나'로 담아 두고 있었다. 


굵게 표시한 '그녀'들은 들어가는 게 문법상 적절한 표현이며, 딱히 부자연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전부 같은 대상을 지시하고 있으므로, 생략한다면 텍스트의 크기를 줄일 수 있습니다


ex2) 필리아 씨는 고상한 여인이었다. 발걸음은 사뿐하고 목소리는 청명했다. 대화를 나누면 누구나 지식에 눈뜨고 겸허를 배우게 되었다. 마을 다른 꼬맹이들처럼 내게도 마음 속 '누나'였다. 


문맥이 명료하므로 굳이 문장마다 '그녀'를 사용해서 필리아 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걸 되새겨 줄 필요가 없어집니다


물론 문맥으로 내용을 보충하기 어려울 때엔 생략하지 않고 문장성분을 다 밝히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래야 한다면 혹시 글의 문단이 산만하지 않은가 하는 검토를 먼저 해야 합니다

문단 하나의 주제는 하나뿐인 게 좋고, 문단 개념이 희박한 웹소설에서도 한 대상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한 후 다음 대상을 이야기하는 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내 문단이 두 사람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에 문장마다 누구에 대해 이야기하는지 밝히고 있다면, 한 사람에 대해 먼저 충분히 이야기하고 다음 사람에 대해 그와 비교해서 이야기하는 식으로 문단을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3. 문장을 끊고 잇기


한국어는, 특히 문학에서는 문장을 끊을 수 있는 위치를 자유롭게 잡을 수 있습니다

문장에는 서술어가 하나 필요하지만 문장성분의 격을 변화시키면 어지간한 건 다 서술어로 세워 줄 수 있는 게 한국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장이 길어진다면, 또는 문장이 연속된다면 각 문장을 의미 단위로 절단하는 게 유용합니다


제가 떠오르는 대로 적었던 문장을 정리하면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국왕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껴 마지않던 장남이 자기 기대를 걷어차고 이국에서 왔다는 자칭 성녀와 눈 맞아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는 사실은 단순 국력 손실뿐 아니라, 그가 지금껏 베푼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보기 좋게 폭로한 셈이었다. 눈이 뒤집혀 응접실 집기를 깨부수기 시작한 국왕 앞에서 차남은 음독을 기도했다는 보고를 올릴 깜냥 좋은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위 문단에서 문단의 요점은 첫 문장입니다

하지만 시간순으로는 장남이 도망을 간 게 먼저입니다

시계열순으로 문장 순서를 바꾸면서, 엄청나게 긴 두 번째 문장을 좀 절단해 보겠습니다


두 번째 문장은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장남이 도망갔다

2. 그건 국력의 손실이다

3. 국왕이 지금껏 (장남에게) 베풀었던 은혜가 보잘것없었다

(그래서 국왕이 날뛰며 화를 내고 있다)


의미 단위로 쪼개면 대략 이렇게 됩니다



아껴 마지않던 장남은 국왕의 기대를 걷어차고 이국에서 왔다는 자칭 성녀와 눈이 맞아 국경을 넘어 달아났다. 


그건 국가적으로는 국력의 손실이었다. 또 개인적으로는 국왕이 베풀었던 은혜라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폭로한 셈이었다. 


그래서 국왕은 날뛰고 있다. 눈을 뒤집고 응접실 집기를 깨부수고 있다. 


그런 국왕 앞에서 차남은 음독을 기도했다는 보고를 올릴 깜냥 좋은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새로운 첫문장은 여전히 두 가지 의미가 포괄되어 있습니다

이국에서 온 자칭 성녀와 눈이 맞아 달아난 것 = 국왕의 기대를 걷어찬 것은 의미상 동격이지만 전자는 장남에게, 후자는 국왕에게 의미상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따라서 한 번 더 분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껴 마지않던 장남은 국왕의 기대를 걷어찼다. 이국에서 왔다는 자칭 성녀와 눈이 맞아 국경을 넘은 것이다. 

(후략)



이제 마지막 문장을 봅시다

차남의 소식은 장남과 대충 동격입니다

한 놈은 야반도주, 한 놈은 음독자살 기도


그런데 차남 이야기는 동격인 것치고는 문단에서 비중이 너무 적습니다

그러니 비중을 좀 늘리면서, 여러 개의 문장으로 세분해서 의미를 더 명확히 해 줄 수 있겠습니다

이 과정에서는 아마 원문에 없던 새로운 표현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전략) 

국왕에게 유감스러운 소식은 하나 더 있었다.


 형의 시도로부터 영감을 받기라도 했는지, 차남은 음독을 기도한 것이다. 지난 밤의 일이었다. 


보고해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길길이 날뛰고 있는 국왕 앞에서 비보를 전할 깜냥 좋은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이쯤 하면 문장이 적당히 나누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다듬자면 다듬을 수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를 갈고닦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 연재속도가 늦어지기 마련이니 어느 정도 타협이 필요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