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그나저나 참 많이도 데려왔군요.]


아스모데우스의 지적에 김독자가 허공을 바라봤다. 


츠츠츳!


스파크와 함께 성좌들의 메시지들이 폭주했다. 문맥의 폭류에 김독자가 인상을 찡그린 것도 잠시, 그는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소수의 성좌들이 '격노와 정욕의 마신'의 ■■을 궁금해합니다.]


" . . . 거대설화를 얻으셨습니까?"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군요.]


성운을 세웠다는 소식은 대강 알고 있었지만, 거대 설화는 그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도대체 마계에서 무슨 깽판을 부렸기에 . . . 


그런 김독자의 생각을 꿰뚫어 본 듯, 아스모데우스가 웃으며 말했다.


[후훗. 별거 아니예요. 마계를 하나로 통일시켰을 뿐이랍니다.]


. . . 그게 별거 아니라고? 


어처구니가 없는 것과는 별개로, 김독자는 자신이 모르는 설정에 호기심을 품었다. 


'하나의 마계'는 작중 마왕들의 입을 빌려 '최초의 악'의 강함을 보이는 서술장치로 쓰인, 일종의 맥거핀이었기 때문이다. 


'아스모데우스는 어떻게 거기서 거대설화 시나리오를 찾아낸 것일까? 어쩌면 정말로 그녀는 . . . '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이곳은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김독자의 정면엔 설화급 성좌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자리에 앉아서 대화하죠.]


". . .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결국 이번에도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었다. 김독자가 쓴물을 삼키며 자리에 착석했다. 페르세포네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한편, 페르세포네는 김독자라는 화신을 가늠하고 있었다.


진언을 아무렇지 않게 견뎌 내고, 마왕의 기세에도 눌리지 않는다.


확실히 비범한 구석이 있었다. 다만, 그것이 <명계>의 후계를 이을 자격으로 이어지기엔 아직 시기상조였다.


'더 지켜보면 알겠죠.'


페르세포네가 가볍게 박수를 치자, 명계의 심판관들이 요리를 대접했다. 


[마왕, '헤아릴 수 없는 엄격'이 비주얼은 그럭저럭 괜찮다고 말합니다.]


새하얀 식탁보가 금세 알록달록해졌다. 페르세포네는 윤기 나는 스테이크를 작게 잘라 입에 넣었다. 아스모데우스도 그녀와 같은 메뉴를 탐식했다. 그리고 다소 날카로운 시식평을 입에 담았다.


[염도는 적당하지만 조리한 설화가 다소 물리는 감이 있군요. 맥락도 조잡하고.]


[이 정도면 무난한 편 아닌가요?]


['32번째 마계'의 특식을 맛보면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겁니다.]


[그대가 그렇게 자신할 정도라면 조만간 가봐야겠네요.]


김독자가 그녀들의 모습을 한마디로 정의했다.


'미식가들.'


미식협의 일원답게 눈앞의 존재들은 음식을 먹는 행위보다 설화의 품질을 논하는 데 중점을 뒀다. 이에 몇몇 성좌들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여놓았다. 


[성좌, '긴고아의 죄수'가 하품을 합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다며 투덜거립니다.]


그때까지, 김독자는 눈앞의 별미에 손도 대지 않았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페르세포네가 김독자에게 물었다. 


[입맛이 없나요?]


"죄송하지만, 저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죠?]


김독자가 <명계>의 전승을 떠올렸다.


- 한번 <명계>의 음식을 맛본 존재는 다시는 지상으로 올라갈 수 없다.


"당신처럼 이곳에 남고 싶을 정도로 정을 붙이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 . . "


김독자의 시선이 접시 위에 놓인 명패로 향했다.


- 한 소드 마스터의 일대기


"아직 제겐 이른 이야기입니다."


벌써 설화를 탐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설화를 읽는 독자일 뿐이다. 


아스모데우스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그럴 줄 알고 내가 준비해온 게 있답니다.]


아스모데우스가 아공간 코트에서 무언갈 주섬주섬 꺼내더니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내밀었다.


김독자는 간만에 강적을 만난 기분이었다. 도무지 상식이 먹히질 않았다. 


"도시락 . . . 입니까?"


[맞아요. 지상의 음식이고 설화도 함유되어있지 않으니까, 걱정 없이 먹을 수 있겠죠? ]


김독자가 페르세포네의 눈치를 슬쩍 봤다. 이승의 음식이 <명계>에 반입되었음에도, 여왕은 딱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사실 후계자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었지만. 


김독자는 이를 암묵적인 허락이라 생각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김독자가 도시락통의 손잡이를 잡자 갑자기 스파크가 일었다. 


[성좌, '심연의 흑염룡'이 화신 '김독자'에게 강한 적의를 드러냅니다!]


아스모데우스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어린아이를 다그치듯 말했다. 


[그쪽은 내가 자주 만들어줬잖아요.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겁니까? ]


둘이 친한가?

. . . 아니, 그것보다 '만들어줬다'고?


김독자의 시선이 도시락으로 향했다. 고급 레스토랑의 코스요리를 축소시킨 듯한, 예술에 가까운 반찬 배치. 


페르세포네의 만찬이 잠시 빛을 바랠 정도로, 어마어마한 정성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도시락도 . . .


"설마 직접 만드신 겁니까?


아스모데우스가 당연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데요?]


". . . 아닙니다."


혹여 떨어뜨리기라도 할까봐 김독자는 두 손으로 조심히 도시락을 받았다. 마왕의 수제 도시락이라니. 정말 오래 살고 볼일이다. 


젓가락으로 육전을 집어 한 입 크게 베어물자, 김독자의 눈이 요리만화의 심사위원처럼 휘둥그레졌다.


"!!"


입에 넣자 사르르 녹아내리는 육전. 

톡톡 터지는 과즙이 일품인 샐러드. 

그 밖에 수많은 '맛'이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멸살법처럼 묘사하면 여섯 페이지는 꽉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잘 먹는 김독자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스모데우스가 질문했다.


[맛있나요?]


"맛있습니다. 다만 저 혼자 먹기엔 양이 많네요."


[남는 건 포장해서 데우스 액스 마키마로 보내줄게요.]


순간 '데우스 액스 마키마'라는 배달업체가 새로 생겼나 의심한 김독자였다. 물론 그럴 확률은 없었다. 


". . .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대가 그렇다면야.]


정말로 보내줄 생각이었는지 아스모데우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수긍했다. 이쯤 되니 어째서 마왕이 자신에게 이런 호의를 보이는 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대가 없는 호의는 존재하지 않음을 방증하듯, 아스모데우스가 식사를 마친 김독자를 향해 음험한 문장을 꺼냈다. 


[그럼 이제 도시락 값을 치러야겠죠?]


진언에 실린 탐욕의 부피에 김독자가 흠칫 몸을 떨었다. 물론 지금까지의 행적을 보건대, 그녀가 자신을 해코지 할 확률은 없었다.


그럼에도 김독자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초반 시나리오에서 강림할 정도로 막나가는 마왕이다. 또 어떤 미친 짓을 벌일지 모른다. 뭐, 그런 의도였다.


쫙. 아스모데우스가 외투에서 주섬주섬 수첩을 꺼내더니 한 장을 찢었다. 조그마한 백지. 김독자는 순간 싸인 용지를 떠올렸다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유중혁도 아니고.'


마왕이 자기 싸인을 필요로 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차라리 저 종이가 특수한 아이템이라 생각하는 편이 더 합리적 -


[싸인 좀 부탁할게요.]


. . . 정말로 싸인 용지였다. 김독자가 아스모데우스를 관찰했다. 상기된 표정과 반달 모양으로 휘어진 눈.


놀랍게도, 마왕은 진심이었다. 


차마 의심을 버리지 못한 김독자가 용지를 받아 만지작거렸다. 


'여기다 이름 쓰면 죽는 거 아니겠지?'


[성좌,'악마 같은 불의 심판자'가 자신에게 팔 생각 없냐고 묻습니다.]


. . . 그렇진 않나 보군. 안심한 김독자가 펜을 휘갈겼다. 조그마한 백지에 '김독자', 세 글자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주인에게 도로 돌려주면서 질문했다. 


"제 싸인은 왜 필요하신겁니까?"


아스모데우스가 용지를 고이 접어 품에 넣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거든요.]


"저는 일개 화신일 뿐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가치를 좌우하진 않죠. 가치는 자신과 타인이 함께 부여하는 겁니다.]


영문 모를 소리가 서서히 문맥을 이루기 시작했다.


[설령 선한 의도로 행한 일일지라도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그것은 위선이 될 수도 있죠.]


김독자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경고'라고 생각했다. '오만한 위선의 왕'이란 칭호를 얻을 정도로 엉망진창인 자신을 꼬집는 문장. 그러나 마왕의 문장은 단지 '경고'에서 끝나지 않았다. 


[아마 당신도 골이 깊어지는 것은 원치 않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악역을 자처할 겁니다.]


그것은 통찰이었다. 겸허하면서도 아릿한 진실. 김독자가 아스모데우스의 두 눈을 바라봤다. 형연할 수 없는 감정이 실린 눈빛에 내면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불쾌함보단 의문이 앞섰다. 당신은 어떻게 그리 확신하는가. 


"어째서 . . . 그렇게 확신하시는 겁니까."


아스모데우스가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그것이 내가 아는 김독자니까.]


['제 4의 벽'이 약해집니다.]


그것은 김독자가 늘 달고 살던 문장이었다. 


- '내가 아는 유중혁이라면 -'


김독자가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나 역시 누군가에게 읽히고 있던 것은 아닐까.'


숨 고를 틈도 없이, 아스모데우스의 문맥이 다시 이어졌다. 날카로운 통찰력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따사로운 위로와 걱정 뿐. 


[마음을 열고 살아요, 김독자. 자신을 너무 몰아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진심이 담긴 소망. 


[한 번 사는 인생, 기왕이면 재밌게 살아봐요.]


김독자가 다시 질문했다. 질문을 통해 아스모데우스를 읽어내려고 했다. 


"제 이야기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그리고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김독자가 마음껏 자신을 읽을 수 있도록 내버려두었다. 진솔한 어조와 솔직한 미소로. 투명한 벽 너머로. 


[적어도 내게는 있어요. 왜냐하면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좋아하거든.]


그 표정은 마치 멸살법을 읽는 김독자의 표정과 닮아 있어 김독자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어쩌면 그녀는 작가가 아니라 . . . '


3000화가 넘는 이야기를 완독한 유일한 독자와 1000년이 넘는 시간을 기다려온 독자의 독자.


그것은, 운명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만남이었다. 운명적인 첫 대면에서 두 독자들은 서로를 독해했다. 


아주 흔한, 그들만의 소통 방식이었다. 아스모데우스가 품에 넣은 싸인 용지를 다시 꺼내 흔들며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이야기가 잠시 딴 길로 셌군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간추리자면 . . . 나는 당신의 팬입니다, 김독자.]


팬.


그 한 단어가 주는 울림에 김독자의 독해가 끊겼다. 하지만 김독자는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tls123이든 누구든 상관없다.'


지금은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사랑해주는 이를 향해 감사를 표할 따름이다. 김독자가 입술을 달싹였다. 


"저도 마찬가지 입니다."


.

.

.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지다가 아스모데우스가 문득 화제를 전환했다.


[그럼 이제 여왕님과 대화할 차례군요.]


그제야 김독자의 시선이 페르세포네에게로 향했다. 자식들 대화에 끼지 못해 소외된 부모의 기분을 느끼던 페르세포네가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날 바라봐주는군요, 화신 김독자.]


". . . 기다리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여왕님"


뭐, 얼마 안 가 풀렸지만. 


[딱히 화나진 않았어요. 나도 그대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들었답니다.]


덕분에 여왕은 아스모데우스가 김독자를 아끼는 이유도 조금이나마 유추할 수 있었다. 


'꼭 데칼코마니를 보는 것 같군.'


설화를 쌓는 방식이며 능글맞은 어투까지. 쏙 빼닮았기에 마왕이 애정하는 듯 싶었다. 누구나 자신과 비슷한 존재에게 마음이 끌리는 법이니.


한편, 이런 페르세포네의 생각을 알 리 없는 김독자가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마왕만큼은 아니지만 명계의 여왕에게도 물어볼 것이 많았다.


"절 보자고 하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냅킨으로 입술을 닦으며, 여왕이 스스럼없이 말했다.


[단순한 호기심이었어요. 죽음을 거부하는 화신이 어떤 인물인지. 꽤 흥미가 동했거든요.]


"그래서 직접 보신 소감은 어떻습니까?"


페르세포네의 호박색 눈동자가 김독자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보인 기지는 합격점. 하지만 그것만으로 그가 어떤 화신인지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페르세포네가 의뭉스러운 미소를 꾸며내며 말했다.


[그대 같은 화신은 처음이예요.]


"그게 전부입니까?"


[흠, 저 불청객들처럼 구경료라도 낼까요?]


김독자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고작 코인 몇 푼 따위가 아니었다. 


"아니요. 대신 제 이야기를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코인 대신 이야기라. 발칙하면서도 흥미로운 제안에 페르세포네의 호기심이 동했다.


[말해 봐요.]


지금 이 상황이 마냥 즐거운 듯 관전하는 아스모데우스를 힐끗 보며, 김독자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 '기간토마키아'가 얼마 남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화신 '김독자'의 발언을 주시합니다.]


"타르타로스에서 거신병을 개발 중이라곤 하나, 지금 속도라면 완성까진 꽤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 . . ]


"제가, 완성 기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페르세포네의 눈이 가늘어졌다. 제아무리 예언자라고는 하나 직접 본 적도 없는 거신병을 상세히 묘사하는 게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물론 그와는 별개로 구미가 당기는 제안임은 분명했다.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가 영롱하게 빛났다. 


[지름길을 알려주는 대가로 그대는 무엇을 원하죠?]


그리고 뒤이은 김독자의 요구는 페르세포네의 예상을 초월했다. 


"딱 한 번. 거신병을 사용할 기회를 주십시오."


[채널 내 성좌들이 화신 '김독자'의 발언에 경악합니다!]


얼빠진 페르세포네를 대신해 아스모데우스가 김독자에게 질문했다.


[어디에 쓸 계획인가요?]


"그건 비밀입니다."


김독자와 마왕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페르세포네와 다르게 어두운 보라색 눈동자. 그것과 마주친 순간, 김독자는 상대방이 자기 계획을 모조리 꿰뚫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스모데우스 진언을 발했다.


[당돌하군요. 그래서 더욱 마음에 들어.]


하기야, 설화 병기를 사용할 곳이 '거대 설화 시나리오' 말고 또 어디에 있겠나. 페르세포네도 이를 눈치챘는지 어이없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고작 8번째 메인 시나리오가 끝났을 뿐인데, 그대의 눈은 벌써 아득한 저편을 바라보고 있군요.]


"미리 준비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그 뻔뻔한 모습은 페르세포네의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의심마저 날려 버렸다. 결국 계시가 옳았던 것이다. 


'네가 <명계>의 후계자구나.'


다소 혼란은 있었지만 이걸로 매듭지어졌다. 결단을 내린 페르세포네가 복잡한 눈으로 아스모데우스를 바라봤다.


'그대도 내 자녀가 됐으면 좋을련만.'


본래 그녀가 지지하던 후계자가 아스모데우스였다는 사실은 아마 그녀가 죽을 때까지 안고 갈 비밀일 것이다. 


눈을 감은 페르세포네가 구석의 그림자를 향해 한낮의 밀회를 보냈다.


-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데스? 


줄곧 숨죽여 왔던 어둠이 속삭였다.


- 후계자가 원하는 대로 들어 줘.


그렇게 김독자의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너무 쉽게 받아들여져서 정작 본인은 얼떨떨했지만. 


아무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명계>의 후계자로 낙점받은 김독자였다. 그 사실을 눈치챈 아스모데우스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김독자의 영혼체가 빛나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이건 . . . "


[시간이 참 빠르군요.]


김독자의 영혼이 <명계>를 건너는 과정에서 발생한 시차로 인해, 지상은 벌써 이틀이 지났다.


지금쯤 돌아가면 딱 맞겠지.


이대로 순조롭게 부활 절차를 밟을려는 찰나, 일이 터졌다.



*



지랄을 한다, 아주.


욕을 안 하고 싶어도 저 꼴을 보면 욕을 안 하고 배길 수가 없다.


[성운, <파피루스>가 화신 '김독자'에게 소생의 설화를 하사하고자 합니다.]

[성운, <에덴>이 화신 '김독자'를 메시아의 길로 이끌고자합니다.]

[성운, <올림포스>가 화신 '김독자'의 영혼을 부릅니다.]


[하여튼. 다들 욕심이 많아요.]


수만 살씩 처먹은 것들이 나잇값을 못한다. 그리도 설화를 재현하고 싶은가.


별들에게 사면으로 포위당한 김독자가 전구처럼 발광하고 있었다. 


얼씨구? 저러다 승천하겠네. 


그럼 저절로 <에덴>의 설화를 계승하는 건가, 메타트론의 고도의 작전인가, 따위의 잡생각하다가 나는 한순간에 격을 발출했다. 


츠츠츳!!!


별들의 기세가 다소 사그라졌다. 허나 끗발 높은 몇몇 성좌들이 내게 창끝을 돌렸다. 


여기가 누구의 나와바리인지 생각하면 참으로 멍청한 선택이었다. 


[성좌, '부유한 밤의 아버지'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냅니다.]


사방에서 솟구친 그림자가 별들의 횡포를 일거에 물리쳤다. 페르세포네가 중재에 나섰다.


[중요한 것은 화신 본인의 의지예요. 그를 연회에 불러 스스로 결정토록 하죠.]


[소수의 성좌들이 여왕의 개입에 불만을 품습니다.]


[다수의 성좌들이 여왕의 중재에 물러섭니다. ]


페르세포네가 손가락을 튀기자 김독자의 옷이 순식간에 연마복으로 갈마무리됐다. 체형의 슬림한 터라 수트핏이 꽤 살았다. 


그나저나 벌써 별자리의 연회인가. 시간이 참 빠르다. 


[축하해요. 곧 그대의 별이 <스타스트림>에 걸리겠군요.]


"마왕님은 . . . 연회에 오실 순 없겠죠."


김독자가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아쉽기는 매한 가지였다. 내가 갔을 때 즈음엔 김독자는 이미 지구 시나리오로 복귀한 이후일 테니까. 


아마 다음 만남은 '73번째 마계'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암흑성 시나리오가 마무리되면 볼 수 있음을 위안으로 삼아야지.


나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다음엔 위에서 보자고요. 만나서 즐거웠어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츠츠츳!


김독자의 영혼이 명계의 심판관의 인도를 받아 별자리의 맥락으로 출발했다. 채널이 닫히자 고대 그리스 정통 복식으로 환복한 페르세포네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몸조심해요, 아스모데우스.]


[걱정 마요. 죽을 생각은 없으니까.]


확신 어린 어조에 애써 마음을 놓았는지, 그 뒤로 페르네포네는 별말 없이 김독자를 따라 연회장으로 출발했다.


나 역시 포탈을 타고 '32번째 마계'로 복귀했다. 


그리고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충성스러운 권속의 등 뒤로 검은 포신이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구해왔군요.]


그리고리가 탄식을 흘렸다.


[하아, 말도 마십쇼. 영감님 설득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대는 '양산형 제작자'와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웬만한 건 다 들어 주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얼토당치도 않은 부탁이라면 차라리 주인님께서 가시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양산형 제작자'한테 커스터마이징을 맡기는 것은 도대체 무슨 심보입니까.]


[안 그래도 직접 갈려고 했습니다만, 이쪽도 마왕들을 설득하느라 애를 좀 먹어서요. 그래도 기한에 맞춘 건 다행이군요. 하마터면 계획이 처음부터 어긋날 뻔했어요.]



그리고리가 등에 메고 있던 대포를 내 앞으로 대령했다. 대포치곤 작은 크기나 거기서 느껴지는 '설득력'의 힘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바르바토스 님의 설화병기에 장착한 채 시범 운행을 진행해봤습니다. 효과가 장난 아니더군요. 멸성탄의 위력이 배로 늘어났습니다.]


다만, 개연성을 많이 잡아먹는 게 흠인데 . . . 


말끝을 흐리는 그리고리를 향해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방이면 충분합니다.]


한낮의 밀회가 발동한 것은 그때였다. 발신자는 아몬이었다. 


- 합류해라. 


나는 대포를 '아공간 코트'에 수납한 뒤, 그리고리의 독려를 받으며 '별자리의 연회'가 열리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품에서 수첩을 꺼냈다.


내 마기를 인식한 종이가 활자들을 토해냈다.



생(生)


페르세포네

제천대성

우리엘

척준경

이순신 

.

.

.



살(殺)


마루

가루다

하누만

아누비스

아레스

.

.

.



아몬의 메시지가 뒤늦게 도착했다. 


- 오늘, 별을 떨어뜨린다. 






완결 낼 수 있으려나? + 웹툰 진도를 슬슬 따라잡기 시작하는 게 더 공포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