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귀족틋녀근친] 늑대는 혈육을 이길 수 없다.
개념글 모음

이예준은 입을 가렸다.


드넓은 고원에서 부는 바람은 모두 기분 좋다며 웃곤 했다.

하지만 병약한 그에게 있어선 이런 바람조차 폐부를 찌르는 비수일 뿐이었다.


“콜록... 콜록...”


뒤이어 헛구역질이 나왔다.

바로 뒤에 있던 동생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고집을 부렸다.

앞으로 있을 겨울에 대비해 식량을 모으려면 봄인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농사를 짓겠다며 자원한 사람의 수는 적었다.

그에 비해 먹여 살려야 할 사람의 수는 많았다.

아무리 현대인이었다고는 하지만, 농사에는 아는 게 별로 없던 그로서는 별수가 없었다.


‘그러니 몸이라도 갈아야지.’


그렇게 생각한 그가 강박적으로 주변 땅을 살폈다.


황금 씨족이 아닌, 그것도 정착민이었다가 무리의 일원이 된 그들로서는 별다른 수가 없었다.

그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무슨 성과를 내야만 했으니까.


‘내겐 책임이 있어. 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이예준은 눈을 깜박였다.


황족 출신이던 그의 아버지가 반역을 저지르고 후다닥 도망쳐 몸을 의탁한 것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귀족 출신이라는 점을 인정받았지만, 허울뿐인 씨족 자리를 받은 것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언제 어디서 씨족이 모두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는 것도 상관없었다.


그는 책임이 있었다.

별생각 없이 아버지를 부추긴 책임이 있었다.


그러니 적어도 그가 죽기 전에는 씨족이 목숨을 구할 방안을 찾아야만 했다.


“콜록... 콜록...!”


“형님, 형님! 그만 천막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바람이 찹니다.”


“예형아, 신경 꺼라. 나는...”


“이러다가 아버지에 이어 형님까지 돌아가시면 저희는 끝입니다!”


“...그걸 아니까 이러는 것 아니겠니.”


이예준은 후후 웃었다.


어떻게든 자리만 잡으면. 그래, 자리만 잡는다면.

이예형의 압도적인 무위를 이용해서 온전히 이 유목 왕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가 제안한 방법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드넓은 고원에도.

그래, 작물이 자랄 수 있는 땅이 있으니 그곳에 거점을 꾸려 양식을 공급하겠다는.


그렇게 생각한 직후, 칼바람이 폐부를 재차 찔렀다.


“우웩, 우우욱...!”


“형님!”


“일없다! 얼른 네 할 일이나 하거라! 병사들을 훈련하다 말고 여기까지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형님...”


“냉큼 꺼져라!”


이예준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흘겼다.


그리고 말에 탄 동생이 사라지는 것까지 보다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입가를 가린 천에 거뭇한 피가 묻어 있었다.

태생부터 병약했던 그가 이런 곳까지 왔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는 직감했다.


‘얼마 안 지나서 죽겠네.’


이미 한 번 죽었던 몸.

전생이나 현생 둘 다 요절한다는 건 슬펐지만,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애꿎은 사람들까지 함께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악수 때문에 피바람이 부는 건 두 번 겪을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땅을 관찰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한 그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이제 남은 건 이걸 정리해서 보고하는 일뿐이었다.

이쪽 지역을 개간하고 싶으니 전사들의 힘을 빌려달라는... 뻔한 내용.


머릿속으로 문장의 내용을 고민하던 이예준은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숨을 헐떡인 그가 코에서 피가 흐른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 단순히 코에서 피만 흐르는 게 아니었다.

입가에서도 거뭇한 핏덩이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씨발!’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킨 그가 콜록거리며 피를 토했다.


이미.

이미 예상했던 일인 만큼 크게 두렵진 않았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몰랐던 만큼 남길 것도 남긴 뒤였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죽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이예준은 황급히 말허리에서 활을 꺼냈다.

신호를 보내기 위한, 촉에 구멍 뚫린 화살을 꺼내 시위를 매겼다.


삐이이 -


화살이 울었다.


누군가 급하게 말을 타고 오는 소리도 들렸다.


이예준은 낙마했다.

다행히 말에게 짓밟히기 직전 누군가 그의 몸을 들어 올렸다.


그는 기절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왕이라 자칭하던 유목민의 지도자가 내준 게르 안이었다.


“형님!”


동생이 눈물을 글썽였다.

이예준은 잠시 그 모습을 보다가 침통하게 입을 열었다.


“침구 밑에 책이 있다. 내 유언이니 읽고 그대로 행하거라.”


“형님... 아버지에 이어 형님까지 잃을 수는 없습니다...”


“흥, 약한 소리 말거라. 내가 죽으면 다음은 너다. 우리...”


이예준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다분 그의 혈족뿐만 아니라, 겸애의 기치에 공감했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일족, 겸애의... 사람들을... 네가 지켜야 한다...”


“형님...”


“말을 준비해라. 전하께는 그리 고해라. 미천한 흙 파먹는 자 이예준은 초원의 붉은 늑대를 알현하러 갔다고.”


“형님!!!!”


이예준은 대답 대신 씩 웃었다.


초원에는 전설이 하나 있었다.

간절하게 빌면서 초원의 토지신, 붉은 늑대를 만나겠다고 하면 붉은 늑대를 만날 수 있다고.

그 늑대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보라며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말이 있었다.

그렇게 토지신이 소원을 들어준 이들은 랑족이 되어 초원에서 이름을 남기게 된다는 말도 있었다.


그는 왕이 농담 삼아 말하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자신은 랑족의 피가 흘러서 체모가 살짝 붉다던, 그 우스갯소리를.


“간다.”


“형님!”


“만약 내가 알현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양지바른 곳 말고 여기 그대로 묻어라.”


“형님...”


“시체라도 이 땅의 거름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어디서 힘이 솟아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천막 밖으로 나간 그는 훌쩍 몸을 일으켜 말에 올라탔다.


그리고 가볍게 말허리를 툭툭 치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앞으로. 계속. 또 계속.


언제까지나 길이 이어질 것처럼...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다가 문득 낙마했던 것 같다.

그는 들판에서 몸을 일으켜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있을 리가 만무했다.


그는 주변에 가득 낀 안개를 보다가 피식 웃었다.


‘어쩌면 난 이미 죽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그가 홀가분하게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지키는 것이니 자리를 잡는 것이니 하는 것들도 이젠 신경 쓸 필요 없었다.


그는 죽었으니까.

그의 동생이 어떻게 어떻게 잘 해주기를 빌며 계속 걸어가던 순간.


“...”


우뚝 멈추어 선다.


몸을 돌린다.


“아, 씨발!”


욕지거리를 입에 담으며.


콜록거리면서도 달리기 시작한다.


“안돼, 죽을 순 없어! 못 죽어! 못 죽는다고!”


이를 악문 그가 넘어졌지만, 달렸다.

네발로 기는 듯 마는 듯하면서도 달리고 또 달렸다.


“제발! 붉은 늑대님! 토지신님! 한 번만, 한 번만 빌게요...! 이토록... 빌겠습니다...!”


그가 으흐흑, 울음을 삼켰다.


어떻게든지. 좀 더 살아서. 동생과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볼 낯이 없었다.

겸애의 사상을 주장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어쩔 수 없이 반란을 일으켰던 아버지를.

그리고 그를 따랐다가 죽어 나간 수많은 사람을 볼 낯이 없었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발, 부흥시킬 수 있는... 힘을... 토지신님, 제발...!”


그렇게 말한 이예준이 풀썩 넘어졌다.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데굴데굴 굴렀던 것도 같다.


그러다가 그가 정신을 차렸다.

숨을 토하며. 눈을 뜨고. 익숙한 천장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아악!!!!”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목소리가 가늘어?“


그렇게 생각한 그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서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옆에 놔둔 물그릇을 거울삼아 본 그가 얼빠진 신음을 내뱉었다.


“하?”


물그릇 안에는 적발 적안의 미녀가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그것도 늑대의 귀가 쫑긋거리는.


-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