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좆됐다. 이 말보다 내 상황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려면 앞에 욕설 한두 개를 더 붙이면 될 것이다.


 나는 한 게임에 빙의 됐다. 그것도 남성향 야겜에!


 이건 각 에피소드마다 해피엔딩이 대여섯 개씩 있는 미친 게임이다. 문제는 그 해피엔딩이 '나'를 기준으로 해피인 게 아니라 '3황녀'를 기준으로 해피인 게 문제다.


 자잘한 해피엔딩은 문제가 안된다. 그건 3황녀가 스스로 파멸로 기어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일부러 접근하지 않는 한 절대 발생하지 않으니까. 문제는 각 에피소드를 꿰차고 있는 핵심 인물들과 관련된 해피엔딩이다.


 1황자의 비밀 메이드 되기, 대공의 애첩 되기, 2황자에게 지고 뒷골목에 팔려가기, 하급 귀족에게 약점 잡힌 좆집 되기, 1황녀의 애착 인형 되기, 2황녀에게 최면 걸리기, 심지어는 키우던 개한테 깔리기 등등......


 답도 없는 라인업 이지만 마냥 희망이 없진 않다. 눈 앞에 날 이곳에 처박은 것 같은 놈의 메세지가 띄워져 있었으니까.



[ 타락하지 않고 황위 계승식 치르기! ]


보상 :: 게임 관리자와 만남 및 원래 세계로 귀환 선택권!



 지금부터 내 목표는 단 하나 뿐인 베드엔딩. 황위 계승전에서 이기고 황제 되기 뿐이다.


 반드시 살아 남아서 나를 이 빌어먹을 게임에 처박은 놈 낯짝을 보고 말리라.




 ......성공했다. 이겼다! 게임 끝!


 마침내 모든 해피엔딩을 피하고 베드엔딩 루트에 진입했다. 아니, 진입한 게 아니라 100% 확정이다. 이 이상 일어나는 이벤트도 없고 일주일 후면 황위 계승식이니까.


 나는 정말 오랜만에 상태창, 아니 퀘스트창을 열어봤다.



[ 타락하지 않고 황위 계승식 치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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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었다. 정말 길었다. 큰 언니......아니, 1황녀가 힘들지 않느냐며, 그만하고 자기 비호 아래에서 편하게 쉬라며 안아줬을 땐 진심으로 흔들렸다. 실제로 인 게임에서도 묘사만 보면 진심으로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해피엔딩 중 하나 였으니까. ......아마 내가 여자였다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숨겨 놓았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시아였다. 나는 뽑아 들었던 단검을 화장대에 올려놓은 뒤 옆에 있는 침대에 털썩 주저 앉았다.


"하아, 시아야. 내가 노크하고 허락 받으라고 항상 말했잖니."

"죄송합니다. 몇 번이고 했는데 대답이 없으셔서 허락 없이 열었습니다."

"괜찮아. 너라면 뭐."


 시아는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주워 온 고아 여자 아이였다. 당연히 길가의 아이가 불쌍해 보였느니 하는 같잖은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게임에 등장하지 않는, 온전한 내 편이 필요했을 뿐.


 그래도 나는 시아를 진심으로 아꼈다. 좋은 것을 먹이고, 좋은 것을 입히며, 좋은 잠자리를 줬다. 힘들어할 땐 꼭 끌어안아 토닥여주기까지 했다.


 그 결과 시아는 오롯이 나의 손길 만 타고, 나의 이야기만 들으며, 나의 뜻에만 따라 움직이는. 내가 이 미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내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아, 별건 아닙니다. 주인님께 보여드릴 게 있어서."

"응? 보여줄 거......"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그도 그럴게 시아의 손에 들려있는 저 붉은 건.


"후후, 어떤가요? 주인님의 머리카락 색과 어울리는 걸로 골라봤답니다. 보시면 금속 부분은 하이라이트를 주기 위해 금색으로 칠했어요. 예쁘죠? 분명 주인님께 꼭 맞을 거예요. 제가 주인님의 치수를 착각할 리 없으니까요."


 개목줄이었으니까.


"너, 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재빨리 일어서며 화장대에 올려 둔 단검을 집어 들었다.


"2황녀 짓이니?! 아냐, 최면술사면 1황자도...젠장,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주인님. 1황자도, 2황녀도 아니랍니다. 이건......오롯이 제 의지에요."


 시아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주인님, 혹시 알고 계셨나요?

 주인님이 1황자에게 메이드가 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대공에게 첩이 되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2황자가 노예제를 부활 시키자는 소리를 했을 때,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귀족에게 말도 안되는 사업을 제안 받았을 때,

 2황녀가 정체 모를 마도구를 들고 왔을 때. 그들과 헤어지고 난 후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혹시 알고 계셨나요?"


 시아의 빈 손이 천천히 올라왔다. 무심코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대로 시선을 돌렸다. 화장대였다. 거울이 있는.


"아...아?"


 그곳에는 환희와 열락으로 일그러진, 추잡하고 음란한 암캐의 표정을 지은 '내'가 있었다.


"아...아냐. 이건......아냐!!!!"


 쨍그랑 - ! 하며 단검과 거울이 부딪혔다. 호흡이 진정되지 않았다. 온 몸이 떨렸다. 내가, 내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고?


"거짓말......!"


 나는 뒤로 돈 순간 코 앞까지 다가온 시아의 얼굴에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깨진 유리조각이 구두에 밟히며 일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양손에 쥔 목줄을 내밀었다. 그녀 말대로 붉은 가죽에 금으로 장식된 버클이 예쁜, 내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에 꼭 어울리는 마음에 드는 목걸이였다.


아냐! 아냐아냐. 마음에 든다니. 미친 소리! 나는 남자야. 애초에 이 세상 사람도 아니라고. 일주일 뒤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나는......내 이름, 뭐였지?


 나는 필사적으로 내 이름을 떠올리려 했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이름을 들을 일도, 말할 일도 없어서 까먹은 것 이리라 여기며. 그러나 시아는 내게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을 사랑해요. 그 뒷골목에서 쓸쓸히 죽어갔어야 할 저를 주워주신 주인님을, 먹여주고 재워주고 애정을 주신 주인님을 사랑해요. 그러니까 저는, 주인님이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저는 멍청해서, 주인님이 시키는 것 밖에 할 줄 몰라서. 뭘 해드려야 주인님이 행복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에 쥔 목걸이 만큼은 여전히 내 눈 앞에 있었다.


"그러니까, 이건 제가 아는. 주인님을 행복하게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깨진 유리파편이 그녀의 무릎에 박히며 피가 흘러 나왔다. 그것 만으로도 그녀의 고백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받아주시겠어요? 아니면 제가 직접 채워주길 바라시나요? 후후, 그러네요. 주인님은 그쪽을 더 좋아하실 지 모르겠네요."


 천천히 일어난 시아가 걸려 있던 버클을 풀었다. 목줄이 축 늘어지며 금속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때, 퀘스트창이 제멋대로 열렸다. 그리고 몇 년 동안 단 한 글자도 바뀌지 않던 메세지가 바뀌어있었다.



[ 오직 죽음만이 ]

당신의 손으로 만든, 당신을 위해 준비된 마지막 이벤트 입니다!

그녀의 뒤틀린 애정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맙소사! 무려 제가 만든 이벤트에 간섭할 수 있을 정도로요.

오직 죽음만이 당신과 그녀를 갈라 놓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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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다가오는 시아를 보며 단검을 쥔 오른손에 힘을 줬다. 찌르면 된다. 지금 시아의 행동은 황족을 모욕한 죄로 즉결 처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중죄다. 사람을 죽이는 게 처음도 아니다. 찌르기만 하면......!


 그때. 찰칵, 하고 버클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주인님......"


 나는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내 목에서 이어진 은색 줄이 시아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단검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퀘스트창이 사라졌다. 시아가 목줄을 당겼다. 몸이 기울었다. 그녀가 나를 꼬옥 끌어 안는 게 느껴졌다.


"이제 영원히 함께예요, 주인님. 제가 꼭 행복하게 해드릴게요......"


 나는 지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이상하다. 분명 1000자 정도의 바구니로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