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귀족틋녀근친] 늑대는 혈육을 이길 수 없다.
개념글 모음

“이게... 뭐야...”


이예준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중얼거리는 와중에도 그 목소리는 낯설기만 했다.


이예준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얼굴을 양손으로 덮고. 심호흡하며 재차 머리를 굴렸다.


이미 한 번 죽었던 탓에 앞으로 살면서 더 놀랄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세상 참 묘한 일이로구나.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고.”


그렇게 중얼거린 이예준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런 몸이 되어 버렸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가 바란 건 일족의 부흥이었다.

엄청난 무위를 지닌 동생을 내세워 이 왕국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려면 일단 동생이 강한 자식을 낳아야만 했다.

겸사겸사 그도 오랫동안 살아남을 필요가 있을 테고.


토지신은 그 소원을 들어준 게 분명했다.


그는 이제 랑족이었기에 병약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었다.

아마 강한 여자가 되었으니 마찬가지로 강한 아이를 잉태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 시점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예준은 죽어야만 한다.’


다시 죽으란 소리는 아니었다.

그는 이예준이되 이예준이어서는 안 되었다.


이내 그는 머릿속에서 적당한 변명을 떠올렸다.


이예준은 죽었다. 랑족은 그가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날 보냈다.

난 이예준의 기억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내려와 사람들을 보필하는 게 목적이다, 라고.


그렇다면 적당한 이름이 필요했다.

이제 그는 여자였으니 이것조차 써먹을 수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맨 마지막 글자를 고쳐... 되었군, 이예지.”


그렇게 중얼거린 이예준, 아니.

이예지는 심호흡하며 삐걱거리는 자아를 최대한 맞춰 넣으려 들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여자가 되었다.


솔직히 조금 억울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감히 소원을 들어준 토지신님에게 한 번 소원을 들어 달라며 떼 쓸 용기는 없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한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천막 문을 젖히고, 주위를 둘러보며 누군가 없는지 살폈다.


“게 아무도 없느냐! 미안하지만, 좀 시장하구나! 먹을 걸 가져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다행히 말 달리는 소리와 함께 동생이 허겁지겁 오는 게 보였다.


이예지는 천천히 손을 흔든 뒤에 손을 뻗어 동생의 허리에서 육포 주머니를 잡아챘다.


“쯧, 이거라도 먹어야지.”


“혀, 형님...?”


“나는...”


이예지가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네 형님이 아니라고 말하려던 것도 잠시.

이미 그녀의 동생은 모든 사실을 짐작하고 온 게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토지신이 소원을 들어주는 과정을 직관했을 수도 있었다.


결국, 그녀는 거짓말하는 대신 의문을 풀자고 마음먹었다.


“난 어떻게 된 거냐.”


“갑자기 쓰러지시더니 입에서 살덩이를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 살덩이에 휘감겨서...”


“으음...”


“며칠이 지나자 그 살덩이를 스스로 찢고 나오셨습니다. 그러고는 앞으로 자기를 현인신이라 칭하라고 하시고는... 다시 잠드셨던 겁니다.”


“내가, 현인신이라고...?”


“예, 형님. 대관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몸은... 아무쪼록 괜찮으십니까?”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훨훨 날아갈 것만 같다. 예형아, 넌 모르겠지만... 기분이 정말로 좋구나.”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참, 그것보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일단... 이 몸에 적응부터 해야지. 아녀자의 몸은 좀 불편하구나. 이 몸으로 말을 다시 타려면 꽤 힘들겠어.”


“도와드리겠습니다.”


“또 달거리나 그런 것도 하겠지. 음, 이거 참... 생각만 해도 피곤하군. 뭐, 그래도 괜찮겠지.”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녀의 동생이 흠칫, 하고 시선을 잠깐 피했다가 눈을 마주했다.


“예형이 네가 있으면 무서울 게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


“형님!”


“참, 부탁 하나만 하자. 사람을 시켜 먹을 걸 가져와라. 그리고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안 바쁘면 부상병들 재활하는 것처럼 날 도와줄 수 있겠니?”


“제, 제가 감히 형님의 몸을...”


“형제 사이인데 무얼 그러냐. 어딜 만져도 상관없으니 며칠 내로 말을 탈 수 있게 도와줬으면 좋겠구나.”


“일단, 알겠습니다...”


“쯧, 귀찮게 됐군.”


그건 여러 의미의 말이었다.

이예지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급선무는 아까 말했듯 말을 타는 일이었다.


초원의 유목민들은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곧 죽어가는 병자도 말을 타고 어디론가로 이동할 수 있어야만 했다.

세 살 아이부터 말을 타는 그들에게 말을 탈 수 없다는 건 그만큼 위독한 일은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녀는 지도자였다.

그것도 유목민들을 야만인이라며 멸시하던 나라에서 도망쳐 온 무리의 지도자.


그런 만큼 약한 모습 같은 건 전혀 보일 수 없었다.


‘암, 그렇고말고.’


재차 다짐한 그녀가 얌전히 누군가 상을 들고 오길 기다렸다.


음식은 맛있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을뿐더러 오랜만에 먹는 고향의 음식이기도 해서였다.


그녀는 군말 없이 후루룩 국물을 삼켰다.

입을 벌려 절임 채소를 아삭아삭 씹어 먹고. 고기를 양손으로 한가득 뜯었다.


원래라면 이 양의 절반도 먹지 못했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모든 음식을 먹어치우고도 허기를 느꼈다.


동생의 부하가 황급히 구운 고기를 가져왔다.


이예지는 고기를 게걸스럽게 뜯었다.

부하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가죽 주머니를 빼앗아 그 안의 마유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얼마나 지났을까.

상당히 얼굴이 붉어진 그녀가 재차 음식을 가져오라며 성화를 냈다.


부하는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하면서도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그렇게 세 번째 상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유목민들이 가장 좋아하는, 손님은 세 번째 상까지를 드디어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내 그녀는 취기에 힘입어 밖으로 나갔다.

그동안 걸치고 있던 옷을 대충 훌훌 벗어 던진 뒤, 봄바람을 만끽하며 자기 말 위에 올라탔다.


“예형아! 어디 있느냐! 이예형! 식사 다 끝났으니 소화도 할 겸 말이나 타자꾸나!”


“혀, 형님!? 바람이 찹니다!”


“안 차다! 마유주까지 마셨는데 차면 그게 이상한 일 아니겠냐!”


“넘어집니다! 형님! 으아아아...!”


“넘어진다고?”


그녀가 장난스럽게 말 허리에 매달린 채 씩 웃었다.

원래라면 절대 할 수 없을 묘기조차 이 상태에서는 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고양된 그녀가 꼬리와 귀를 마구 흔들었다.

어쩌면 이제 말 위에서 활을 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얼른 따라오거라! 안 따라오면 못 잡을 테니까!”


그러니 일단 말부터 달리면서 실전으로 감을 잡으려던 순간.


“형님!”


동생이 몸을 휙 날려 말 앞을 능숙하게 가로막았다.

손짓 한 번으로 말을 진정시킨 그가 곧장 말 위에 몸을 올리며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낙마했다간 다칩니다.”


“끅, 그러냐.”


“게다가 술을 마시고 말을 모신 적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직후, 그가 황급히 팔을 풀며 변명을 들어놓았다.


“앗, 형님. 조금 전 그 일은 실수였습니다.”


“음? 무엇 말이냐. 내 허리를 감은 것 말이냐? 괜찮다. 그것보다...”


이예지가 눈을 흘겼다.

조금 전의 반응은 손위 형제의 몸에 손을 함부로 댔다는 놀람과는 다소 달랐다.


‘동생의 나이가 벌써 스물을 넘었는데.’


원래라면 진즉 아이를 봐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생해서 여자와는 연이 없던 탓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진즉 황족이나 권문세족의 여식을 들였을 것 같았다.


“으이구, 예형아.”


“형님?”


이예지는 취기에 힘입어 동생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가슴 쪽으로 이끌며 일갈했다.


“만져라, 이게 아녀자의 가슴이다.”


“...혀, 형님.”


“만져보래도. 만지작거리면서 거부감을 없애라. 앞으로 허구한 날 쥐게 될 테니까.”


“그, 그래도...”


“어때, 보드랍지 않으냐?”


훅, 하고 술기운을 살짝 내뿜은 그녀가 손을 아래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이게 아녀자의 허리다. 이건 아녀자의 엉덩이고.”


“윽...”


“아녀자의 몸이라고 해서 별것 없다. 그리고 말을 가르치다 보면 엉뚱한 곳이라도 만질 수 있는 것 아니냐.”


“그, 그건 그렇지만...”


“녀석, 내가 사내였을 적에는 부담 없이 몸을 만지고 때렸으면서 인제는 안 그러느냐?”


“아, 아녀자에게 손찌검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알아들었으면 얼른 말을 몰기나 해라! 며칠 내로 전하를 알현해야 할 테니까!”


동생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직도 손끝에 남아 있는, 보드라운 가슴의 촉감을 되새김질하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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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