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마군 파순

마라 파피야스


세 딸을 시켜 선각자 싯다르타를 유혹케한 욕계의 왕.


하지만 싯다르타는 유혹과 협박에 굴하지 않았고

조화와 내면의 평화를 가르치며 인류를 구원으로 이끌었다.


누구나 살다보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행동한다.

그것이 식욕, 수면욕, 색욕, 배설욕, 명예욕, 그 어떤것이든지.


싯다르타는 그런 욕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각자의 오욕칠정을 억압하고 숨기기보단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때로는 놓아주고, 때로는 정도껏 행함으로서 마음을 평안케 한다.


고통의 본질은 자신에게 있는 것.

그것이 선각자의 가르침이다.


그렇기에 마라는 싸워서 없애야 할 대상이 아니게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욕계의 왕으로서 중생들을 유혹한다.


마라의 딸들 중에선 싯다르타에게 감명을 받고 귀의하여 비구니가 된 자도 있다.

반대로 마라의 곁에 남아 보필하는 자도 있다.


여자도 그러했다.
하늘하늘한 옷을 입고, 머릿속을 헤집고, 망상과 환각을 보여주며

싯다르타를 유혹했지만, 참혹하리만치 내쳐져 실패했다.


‘네 뱃속엔 똥만 가득하구나’


싯다르타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다.


자신의 자매들과 달리

있는데로 꺾여버린 자존심을 다른 수도자를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것으로 채우고자 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

여자는 싯다르타에게 행한 단편적이고 선형적인 유혹의 방식을 바꾼다.


싯다르타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나약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남자를 하나 고른다.


속세와 연을 끊을 정도로 강하지 못하다.

수도자가 되어 탁발을 하며 돌아다니지 않는다.

머리를 기르고, 부모를 봉양하고, 농사를 짓고, 해로운 미물을 살생하며, 고기를 먹는다.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경전을 읽고 불법을 듣고 자비를 행하기 위해 노력하나

그뿐이다.


제 머리를 깎는 것 조차 두려워 수도자가 되지 못한 칠푼이를 점찍는다.



—-

—-

—-


“혹시, 하룻밤만 재워주실 수 있을까요?”


여자는 나그네의 옷차림으로 남자의 집 문을 두드린다.


“안으로 드시지요.”


아녀자 혼자서 먼 길을 여행한다니.

남자는 여자가 의심스럽지만, 손님을 내치는 것 또한 하지 않는다.


“감사합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남자는 없는 살림 안에서 여자를 극진히 대접한다.

여자는 남자에게 여행길의 목적을 꾸며낸다.


부처님의 말씀을 따라 여행을 한다는 것.

언젠가 사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고자 한다는 것.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수나무를 직접 보고자 한다는 것.


석가모니의 설법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는 남자는 

여자와 합장을 하며 기도한다.


“부처님의 자비가 이 집에 가득하군요”


“과찬이십니다.”


남자는 여자에 대한 의구심을 거둔다.


남자에게 있어서 석가모니의 해탈과 열반은 천추의 한이다.

남자는 배움이 모자라고, 참을성이 모자라다.

다른 제자들처럼 싯다르타의 곁에서 수행을 계속하지 못했다.


농사를 짓고, 부모를 부양하고, 해충을 잡고, 잡초를 뽑으며, 고기를 먹는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떠났었고, 찾아오는 수도자들에게 보시도 하지만

그 자신이 수도자가 되어 깨달음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그저, 자신이 내키고 여유가 있을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손 닫는 주변 이웃들에게 자비의 이름으로 도움을 줄 뿐이다.


“식대만 축내고 그냥 떠나는건 예의가 아니니

 제가 길쌈을 하여 보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어찌 손님께 일을 시키고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대로는 제가 편히 떠나지 못합니다.”


“그래도 아니됩니다.”


노모의 오래된 베틀 앞에서 남자와 여자가 옥신각신을 한다.

여자의 고집에 하는 수 없이 남자가 물러선다.


밤이 새도록, 아낙네의 길쌈하는 소리가 울려퍼진다.


-


“이게 다 무엇입니까?”


“시장에 내다 파시면,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겁니다.”


여자는 한아름 가득한 천 묶음을 건넨다.

도저히 하룻 밤나절에 짤 수 있는 분량이 아니다.

더군다나 천마다 제각기 섬세한 자수들이 놓여있다.


가히 신의 기술이라 할 수 있는 솜씨다.


“저는 이걸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제 얼굴을 보아서라도 받아주시지요”


여자는 남자를 바라보며 눈을 천천히 깜박거린다.


여자의 계획이 찬찬히 진행된다.

마음씨가 여리고 가냘픈 이 남자에게 접근해서

돈이 될 수 있는 물건을 쥐어준다.


자수가 놓인 천을 시장에 내다 판다면

큰 돈이 손에 들어온다.


돈이 생기면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집에서 잠을 잘 수 있고

일을 하지 않고 사람을 부릴 수 있으며

천 옷이 아니라 비단옷을 입고

헝겊이 아니라 가죽신을 신고 

처첩을 거느리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다.


아무리 욕심이 없고 선량한 사람도

재물이 눈에 들어오면 생활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

오욕과 칠정을 채우기 위해 힘쓴다.


그것이 제 살을 파먹는 짓이란걸 알지 못한채로.


“감사히,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대신, 부디 오늘 저녁식사만이라도 하고 떠나시지요”


남자는 여자가 건네는 천을 가지고 시장으로 향한다.


-


아침나절에 나간 남자가 해가 질 때가 되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양 손에는 시장에서 산 물품들이 한가득이다.


양젖으로 만든 버터.

양갈비와 채소와 과일이 담긴 바구니

술과 식초와 요구르트, 그리고 향신료가 담긴 병을 

보자기가 넘치도록 가져온다.


어쩜 이 남자는 이리 생각대로 움직여줄까.

부처처럼 대쪽같이 곧은 사람도 있는 반면에

이 남자처럼 갈대마냥 흔들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남자를 보며 여자는 미소를 짓는다.


“돌아오셨습니까”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녁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그 날 저녁, 남자는 손님을 위해 커다란 잔칫상을 준비한다.

늙은 노모와 손님과 남자가 빵과 난을 주고받고

술과 음료를 나눠마신다.



“부디, 안전하고 평안한 여행길이 되길 기원합니다.”


어제 장을 보았던 보자기에

남자가 떠나는 여자를 위한 음식들을 가득 담아 건넨다.


그것으로 끝이다.


광주리 한가득 가지고 나간 천으로

꼴랑 한끼 식사를 하고

남은 음식을 여자에게 들이민다.

치즈, 버터, 난, 말린 고기, 향신료.

여행을 하면서 먹을 수 있도록 가지런히 준비된 식료품들.

맛도 좋고 보관성도 좋으며. 비싸다.


남자의 집안의 살림살이는 

어제 여자가 들어올 때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남자는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며 합장을 한다.

여자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며칠 더 묵어도 되겠습니까?”



여자는 매일같이 광주리 가득 옷감을 지어 남자에게 건넨다.


남자는 아침마다 그것을 시장에 내다 팔고

저녁이 되면 한아름 물건을 사서 들어온다.


처음엔 식량만 주구장창 사오더니.

부엌 찬장이 넘칠 지경에 되어서야 물건다운 물건을 사온다.

헌데, 

그 물건의 종류가 여자가 예상한 것들과 다르다.


여자가 입을 옷과 튼튼한 신발을.

노모가 덮을 담요와 먹을 약을.

낡고 헤진 집을 고칠 나무판과 못을.

가족 모두가 사용할 새로운 조리도구나 가재도구를…


남자 자신을 위한 물건이라곤

삭아서 바스라진 괭이의 손잡이가 전부다.


시장에 나가면

비단과 가죽으로 만든 외투가 있기도 하고

구리로 만들어진 고급 주전자와 컵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따라서 마실 값비싼 술과 음료가 있기도 하고

으슥한 뒷골목에서 제 몸을 파는 사람들이 있기도 하고

꿀과 설탕과 물엿이 가득 들어간 간식거리가 있기도 하고

하다못해 쓸데라곤 없는 목마인형이라도 판다.


집 천장에 물이 새더라도

당장에 큰 돈이 생기면 사치품에 손이 먼저 가는게 사람이거늘.

이 남자는 제 자신을 위해 쓰는 돈이 한정적이다.


하는 수 없이 여자가 천을 이어 붙여 모자를 만들어준다.


“이거라도 쓰시지요.”


남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조물락거려지지 않는다.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남자에게 모자를 건넨다.


“감사합니다. 퍽 모양새가 예쁘군요”


여자가 짠 자수가 놓인 천은 마지못해 받아들면서

무늬하나 없는 모자는 좋다고 받아서 쓴다.

민무늬의 모자를 쓰고 함박웃음을 짓는다.


손잡이를 새로 바꾼 괭이를 들고 농사일을 하러간다.


—-


그게 전부다.

이제는 농사일이 밀린다며 시장에 물건을 팔러가지도 않는다.


식료품이 떨어지면, 물건이 헤지면. 노모의 약값이 필요하면,

여자에게 필요한 물건이 생기면 그때그때 시장에 천을 내다팔고, 

필요한 물건을 사올 뿐이다.


자신을 위한 것이라곤 농기구의 손잡이. 신발이 하나.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서 구매한 주머니칼 하나가 전부다.


가끔 거나하게 주안상을 차리기도 한다.

저녁식사에 향신료가 떨어지지 않게 신경쓴다.

양갈비나 닭고기를 사오기도 하는데

절대로 혼자 먹는 법이 없다.


가장 먼저 손님으로 오신 여자에게 닭다리를 건네고

그 다음으로 노모에게 또 다른 닭다리를 건네고선

자신은 퍽퍽한 몸통살을 뜯는다.


사치를 부리지 않는건 아닌데,

욕심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재물을 천하게 여기거나 멀리하지도 않는데.

씀씀이가 고만고만하다.


부처의 때와 달리 갈대마냥 유약한 사람을 고르고 골랐거만, 

흔들리기만 하지 심지가 부러지지 않는다.


다른 사람같으면 광주리에 천이 쌓일 때마다 시장에 내다 팔고

집을 바꾸고 옷을 바꾸고 토지를 늘리고 술과 고기를 흘리며 살아갈텐데.

그마저도 부족해서 여자에게 천을 내놓으라며 

아니, 값싼 면직물이 아니라 비단을 짜라며 누에실을 한가득 가져올텐데

광주리엔 저번 주에 짜고 남은 천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아.


“날씨가 무척이나 덥네요. 벌레도 많고”


여자는 모자를 벗어 휘두른다. 벌레를 내쫓는다.

옷을 펄럭이며 더위를 식힌다.

대낮에도 남자가 사다준 연한 도수의 술을 벌컥 들이킨다.

속이 탄다. 답답하다. 미련한건지 멍청한건지.


자연스레 머리카락이 찰랑이고, 옷 사이로 안쪽을 비춘다.


“크흠. 흠. 흠.”


남자가 고개를 돌린다.

귀 끝이 새빨갛고 헛기침을 한다.


오호라


“왜 그러십니까, 사래가 들리셨나요? 이거라도 드시지요”


여자는 자신이 마시던 가죽부대를 남자에게 건넨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남자는 연신 손사래를 하며 가죽부대를 밀어낸다.


남자라. 

고개를 돌리는 남자를 여자가 곁눈질로 바라본다.



여자는 손님용 사랑채에서 옷을 펼쳐두고 고민한다.


부처를 유혹할 때 입던 하늘하늘하고 얇은 선녀옷.

몸을 가리는 천의 면적보다 옷에 달린 장신구의 면적이 더욱 넓다.


도무지, 이것을 입더라도 남자가 넘어올 것 같지 않다.


닭 잡는 데에는 닭 잡는 칼을.

소 잡는 데에는 소 잡는 칼을.


이런 화려하고 얇상한 옷은 학식있고 덕망있는 샌님을 꼬시려는 때나 쓸만하다.


행동이 점잖고 자신의 욕망을 가슴속 깊숙히 감추는 사람일수록

화려하고 화사한 것에 정신을 빼앗긴다.

그것이 얼마나 좋고, 얼마나 부드럽고,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지 알기 때문이다.


저런 남자는 그 가치를 모른다.

오히려 이런 옷을 입고 돌아다닌다면 멀찍이 거리를 둘 것이다.

알지 못하고 이질적인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여자는 그 옆에 단정한 옷자락을 펼친다.


거리의 아낙네들이 입을 평범한 일상복이다.


지금까지 입던 여행객의 옷처럼 냄새나고 군데군데 기워진 옷이 아니다.

일 할때 입는 작업복처럼 펑퍼짐하고 헤진 옷이 아니다.


장을 보고, 외출을 하고, 친구 아낙네들과 거리를 노다닐 때 입는

평범하고 단정한 옷이다.

머리카락을 덮는 천도 옷과 색깔을 맞춘다.


그리고, 밋밋한 옷을 완성시키는 여자만의 안목.

화려하고 얇은 옷자락에서 장신구를 딱 하나 떼어내어

단정한 외출복 가슴자락에 달아준다.

흔들거리는 장신구에 눈길이 팔리다 보면, 필시 여자의 몸매에도 눈이 간다.


완벽하다.

여자는 화사한 옷을 도로 집어넣어놓고

자신이 가꾼 외출복을 입는다.

옷매무새를 확인하며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찰랑거리는 긴 머리를 빗으로 쓸어내리고

그 위에 천을 얹는다.

머리카락을 꽁꽁 싸매어 숨기는게 아니라,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언뜻언뜻, 여자의 매력이 흘러나오도록 얹는 것이다.


단정하지만 화사하고

단아하지만 야릇하다.


남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이해할 수 있는 매력이지만

그렇다고 기품이 떨어지지 않는

서로 상반되는 두 가치를 동시에 실현시킨다.


자신의 아름다움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필시 석가 집안 왕자의 눈깔이 이상한 것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여자는 사랑채를 나서며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남자는 여자보다 일찍 일어나 물을 길어오고 마당을 정리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거봐라, 적중했다.

여자를 보며 인사를 하던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빗자루로 연신 바닥만 쓸어낸다.


여자는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남자를 향해 걸어간다.

여자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남자의 빗자루질이 빨라진다.


“오늘, 혹여나 무슨 일정이 있으신지요?”


“ㅇ…오늘은, 아니, 오늘도 농사를 지어야지요”


“오후 한나절만, 시간을 내어줄 수 있으실지요”


여자는 차분한 어조로 남자에게 외출을 권유한다.

평소보다 느리고, 부드러운 어조로 남자를 회유한다.


“어쩐… 일이십니까”


“필요한 물건이 있어 시장에 가보려고 합니다.”


“말씀만 하시면 제가 대신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아녀자의 물건인지라… 대신 사다달라 말하기엔 조금…”


여자는 고개를 돌려 얼굴을 가리는 시늉을 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남자에게 사다달라 말하기는 껄끄러우면서

남자보고 같이 사러가자 할 만한 물건이 있기야 하겠는가.


그냥, 그때그때의 입바른 변명을

고개를 살짝 돌려 입가를 가리고 말하면

남자들이라곤 분명…


“죄..죄송합니다. 농삿일이야 오늘이 안되면 내일 하고, 내일이 안되면 글피에 하면 되지요”


“불편하시면 저 혼자 다녀오도록 하겠습니다.”


남자가 괜찮다고 할 때, 튕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아닙니다. 상관 없습니다.”


남자도 그제서야 여자를 똑바로 바라본다.

눈높이에 위치한 여자의 머리카락과 

장신구처럼 덮어진 천자락을 바라본다.

찰랑거리는 머릿결을 따라 내려오면

그에 맞추어 똑같이 흔들리는 장신구가 보인다.

그리고…크흠…


그대로 다시 얼굴이 새빨개져서 바닥에 얼굴을 쳐박는다.


끝났다.

쉬운 이야기였다.

필시 석가족 왕자놈의 눈깔이 잘못된 것이고

욕계의 공주인 자신의 매력이 쇠한게 아니다.


여기서 톡 한번 건드리기만 해도

남자는 진흙으로 쌓아올린 옹벽보다 쉽사리 무너져 내릴 것이다.


굳이 알아서 무너질 울타리를

제 손을 더럽혀가며 밀치는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그럼. 잠시 뒤에…”


여자는 걸음을 돌려 사랑채로 들어간다.

자신의 걸음걸이를 바라보는 눈빛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진다.

이리도 쉬운 일을 왜 몰랐을까.


-


“이것도 드셔보시지요. 견과류에 설탕을 입혀 튀겨낸 과자입니다.”


여자는 튀긴 경단과도 같은 동그란 과자를

막대에 끼운 채로 남자에게 내민다.


건네는게 아니라 내미는 것이다. 그것이 중요하다.

수많은 인파들 사이에서, 남자에게 직접 과자를 먹인다.


손가락으로 집어서 먹여줄 만큼 천박하지 않게

가느다란 꼬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다.


“그… 주시면 제가 직접 먹겠습니다.”


“손에 묻습니다. 떨어지기 전에 어서 드시지요”


밀가루반죽이 막대기에 깊숙히 꼽혀있는데 떨어지기는 무슨.

남자의 항명을 그때그때의 변명으로 어물쩍 넘겨버린다.


마지못해 남자가 과자를 받아먹는다.

달콤한 맛이 미각을 뚫고 퍼져나간다.


오욕칠정중에서 겨우 여색 하나만 건드렸을 뿐이다.

싯다르타의 제자놈을 꼬드겨 지옥도로 보내버리기 위해선

인간의 모든 욕망을 철저히 자극시켜야 한다.


열반한 석가놈을 떠받드는 자들에게

수렁에 빠져 허우적대는 부처의 제자를 보여주는걸 상상하면

지금 이 남자가 먹는 과자보다 달콤한 맛이 입가에 맴도는 것 같다.


“맛이 꽤 좋군요. 처음 먹어봅니다.”


남자의 표정이 다채롭다. 

처음엔 씹기에만 급급하다가

퍼지는 단맛에 웃음을 짓다가

삼켜버리고 나면 아쉬워한다.


끌고 다니며 먹이는 보람이 있다.


“저쪽에 다른 맛있는 것들도 많습니다. 한 번 가보시지요”


“뒤에 저녁식사도 해야하지 않겠습니까. 군것질은 그만하면 충분합니다.”


재미없기는. 

과자를 사먹을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저녁은 무슨 해는 아직도 중천에 높다랗게 떠있다.


“한두개 정도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습니다. 저쪽 건너편에서~~”


여자가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남자에게 시장 건너편을 가리킨다.

그쪽을 향해 나아가며 남자에게 걸음을 재촉한다.


“앞. 앞! 앞에!”


짐꾼이 수레를 끌고 나아가는 길을 여자가 미처 바라보지 못했다.

황급히 남자가 여자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긴다.

여자가 중심을 바로잡지 못한다. 남자의 쪽으로 넘어진다.

남자의 가슴팍으로 여자가 쓰러진다.


“...”


“괜찮으십니까?”


그대로 여자를 끌어안은채로

남자는 여자의 안위를 살핀다.


“괜찮…습니다.”


생각보다 단단하다. 보던 것보다 탄력이 있다.

음. 이 남자, 보이는 것 만큼 쑥맥이고 어리숙하지만은 않군.


노린 것이라면 적중할만 했고, 합격점이다.


보통의 여자들은 이런 반전에 약하다.

남자가 작금의 상황을 알아챌 때 까지,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다.

여자가 굳이 나서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것도 모양새 빠지는 일이다.


“미안합니다!. 그러려던게 아니라…”


“괜찮습니다.”


“함부로 아녀자의 몸에 손을 대려던 것이 아니라.”


“괜찮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정 그러시다면. 책임을 지시던지요”


“채…책임이라면. 어떤…”


사내대장부답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라고 했으면

보통의 여자는 모두 넘어갔을 터인데


이 남자는 그 한걸음이 부족하다.

뭐, 내가 보통의 여자이진 않다만.


“하아. 됐습니다. 저쪽에 그 과자나 먹어보러 가시지요. 그거면 됩니다.”


여자는 긴 한숨을 쉬며 당초의 계획을 착착착 진행시킨다.

남자의 행동이 굼뜬것이 답답하다.



남자의 노모가 돌아가셨다.



크게 앓던 분이 아니다.

식사도 잘 하셨고.

거동이 불편하신 것도 아니고.

정신도 온전하시며 지혜로우신 분이다.


손님으로 온 여자를 환대하고

장기간 식객으로 머물러도 불평 한 번 안하셨다.


노환이다.

생명 자연스러운 과정 중 하나이다.

생전에 행한 과와 업에 따라 윤회를 거듭할 것이다


집의 기둥을 기대고 앉아.

마당 바깥을 바라보고 앉아계신다.


오후에 집 나간 아들이, 언제쯤 돌아오려나

바라보고 기다리다 숨이 자연스레 멎으셨다.


남자는 앉아계신 어머니를 바로 눕혀드린다.

평온하게 눈을 감으신 어머니에게 이불을 덮어드리고

마당께 한 켠에 나무를 쌓는다.


집에 구비된 장작이 모자르다.

도끼를 들고 산에 오르려다.  뒤돌아 어머니를 바라본다.

착찹한 마음으로 여자가 만들어낸 천 광주리를 들어올린다.


방금 나온 시장으로 돌아가 천을 팔고 장작을 산다.

손으로 나를 수 없어 지게도 구매한다.


산더미만한 장작을 이고 지고 집으로 나른다.

마당켠에 계속해서 나무탑을 쌓는다.

남자의 땀이 비오듯 흐른다.


“도와드릴까요?”


“아닙니다. 충분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화장에 쓰일 나무도 여자에게 손을 벌려 구한 것이나 다름없다.

더이상 폐를 끼치고 도움을 구할 수 없다.


다음 날,

평안한 얼굴의 어머니를 안아들어

장작더미 사이로 눕혀드린다. 


가느다란 장작 하나에 불을 지피고

남자는 나무더미와 마주선다.


순서가 맞는지 잘 알지 못하고

방식이 올바른지 잘 알지 못한다.


석가모니의 아래에서 수행을 쌓을 때 배웠던 방식을 떠올려

나름대로 어머니의 화장을 준비한다.


손에 든 횃불을 저 나무더미에 내려놓으면 장례가 시작된다.

3시간 남짓이면 모두 타오른다.

습골을 하고, 잘게 부수어, 땅에 뿌린다.


헌데, 남자가 횃대를 내려놓지 않는다.

점점점, 손에 든 나뭇가지는 타들어가는데

누워계신 어머니와 장작더미를 마주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내려놓지 못한다. 놓는게 쉽지 않다.

계속해서 그래왔다.


옛 스승은 남자에게 가르침을 주었다.


‘놓아라’


고통의 근원이 되는 근심과 걱정을 놓으라 알려주었다.


수행을 같이 하였던 많은 제자들이 내려놓았다.

재산을 내려놓고

명예를 내려놓고

권위를 내려놓고

때로는 인연마저도 내려놓았다.


많은 이들이 스승의 깨달음을 따라서 출가한다. 


남자는 내려놓지 못하였다.

출가를 하지 못하였고

얼마 없는 재산을 내려놓지 못했고

갖지도 못한 명예와 권위도 내려놓지 못했다.

다시 어머니와 살던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도 내려놓지 못했던 가족과의 인연을 

손에 꼭 쥐고서 내려놓지 못한다.


“...”


계속해서, 남자는 장작더미를 마주한다.


“이리 주시지요”


“네?”


“본인이 직접 하실 수 없다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여자가 남자 대신 나선다.

남자가 모자의 인연을 내려놓을 수 없다면

그 인연이 좀 더 가벼운 여자가 식객으로서의 인연을 내려놓겠다 말한다.


나뭇가지가 벌써 반이나 타들어간다.

남자가 손아귀의 힘을 푼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횃불을 받아든다. 

어쩌면 뺏는 것일지도 모른다.


장작더미 가장 아래쪽에 횃불을 찔러넣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불길이 커진다.

아래쪽부터 하나씩 하나씩, 장작들이 타올라가더니

순식간에 나무더미 모두가 타오른다.


뜨거운 불길에 남자가 한걸음 물러선다.

일렁이는 화염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다.


여자가 먼저 합장을 한다.

눈을 감고 기도한다.


그런 여자를 남자가 바라본다.

남자도 이내, 합장을 하고 기도한다.


무언가를 바라고 기도하는게 아니다.

어머니의 윤회를 거쳐 더 좋은 세상으로 가길 바라는게 아니다.

부디 옥황상제가 불쌍한 어머니를 가옆게 여겨주길 바라는게 아니다.


기도하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비우고, 어머니와의 추억을 회상한다.

놓는다는건, 잊고 버리는게 아니다.

신경쓰지않고 무시하는게 아니다.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상황 그 시점 그대로. 자신에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기도를 통해서, 남자는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고자 한다.


노모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쉬웠던 여자가 먼저 기도를 끝낸다.

남자는 아직 기도중이다.


눈물을 흘리는 남자의 등을 여자가 쓸어내린다.


-


“감사했습니다. 정말”


“제가 뭘 한게 있다고,아닙니다.”


남자는 여자의 도움을 받아 

어머니의 뼛가루를 저 멀리 산자락에 올라 뿌려드렸다.


아직, 어머니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중이다.


“혹시…떠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우물쭈물. 여자를 바로 보지 못하며 의중을 묻는다.


“제가 있는게 혹여나 불편하십니까?”


이제 이 집엔 남자와 여자 단 둘뿐이다.

며칠 전까지 집안의 어르신은 남자의 어머니였고.

어머니의 동의 하에 여자는 장기간 식객으로 지낼 수 있었다.


지금 이 집의 가장은 이 남자다.

가족 하나 없이 오래된 집 한채만 있어도

남자가 가주이고, 가장이다.


결혼도 하지 않은 아녀자를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식객으로 들이기는 어려울테지.


“아닙니다! 아닙니다.

 당신께 받은 도움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은혜를 갚고자 하는데, 조금만 더 머물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자가 걱정하는 것 만큼 꽉막힌 사람은 아닌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더’는 뭐야.

‘평생’ 까진 바라지 않아도

적당한 표현은 얼마든지 있을텐데.


이런 면에서 이 남자, 참 아쉽다. 안타깝다.

왜 석가놈 밑에서 수도자가 되지 못했는지 뻔히 보인다.


“정 그렇게 청하신다면… 부처님을 만나뵈러 가는걸 늦출수도 있습니다”


여자는 부처를 모시는 사원이 있는 방향을 바라본다. 

딴청을 피우며 남자를 떠본다.


“부디. 여기서 편히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말 하지 않아도 그리 할것이다.

아직 이 남자를 오욕칠정에 완벽히 물들이지 못했다.


이번 생의 업을 겹겹이 쌓아올려, 다음 생에는 축생으로도 윤회하지 못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 좋고 넓은 집에서

더 맛있는 음식도 먹어보고.

더 많이 놀러도 다녀보고.

여자를 만나고 안아보기도 하고.

빈둥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내기도 해봐야 한다.


모든게 어정쩡한 이 남자를 타락시켜 보이리라.


시간을 찬찬히 들여, 차도가 보이던 여색을 탐하게 하리라.



병신새끼. 고자새끼. 배알도 없는 새끼.

눈치라고는 없는 새끼.


여자가 남자와 같이 지낸 기간이 일년이 다 되어간다.


싯다르타는 라훌라라는 건장한 아들내미도 보았는데

이 남자는 여자 손 한번을 잡지 못한다.


여자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핀다.

머리카락 끝자락도 살핀다.


분명히 부족하지 않다.

자신은 욕계의 공주다.

지상의 미천한 것들과 아름다움을 비교할 수 없다.


이렇게 거절당하기만 하면 체면이 서지 않는다.



“술 한잔 하시지요”


여자가 주안상을 차려 남자의 방문을 두드린다.


남자가 밭일을 나간동안 힘좀 썼다.

시장에서 술과 음식을 사고.

저녁 설거지를 자신이 하겠다 우기고


남자몰래 술상을 차려 내온다.

도수가 높은 과일주.

이 시골자락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술이다.


“이게 다 어디서 났습니까”


“시장에서 사왔지요.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남자는 술상을 보고, 여자를 본다.

수행자의 모습과 사뭇 거리가 있지만…


본인도 출가에 실패한 팔푼이다.


“감사합니다”


여자의 술상을 받아 옮긴다.


남자가 자리에 앉는다.

자리도 많은데, 여자는 구태여 남자의 옆에 앉는다.


남자가 엉덩이를 밀며 멀찍이 떨어지면.

여자가 무릎을 밀며 다가간다.


“드시지요”


옆에서 남자에게 술을 따른다.

남자가 도망치지 못한다.


좋은 술을 아녀자가 옆에 붙어 따라준다면야.

이 남자는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이다.


당연히 부엌에 한 병 더 있다.

준비는 철저하다.



“위에 언니며 오빠며 죄다 출가해서는.

부모님께서 저만 뭐라하지 않습니까”


“아. 형제자매가 있으십니까?”


“있지요. 많이도 있지요.

 위로도 아래로도 셀수도 없이 많습니다.”


“하하. 저는 저 혼자인지라 상상도 안가는군요”


여자가 하소연을 한다.


남자가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석가네 이야기도 빼고.

자신의 부모 이야기도 뺀다.


“자. 시간도 많고, 술도 많습니다.

한 잔 더 하시지요”


여자가 다시 남자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이미 한 병은 모두 비운 뒤에

새로운 한 병을 비워나간다.


“하하. 저는 이것만 마시고 그만하도록 하겠습니다.”


“얼마 남지도 않았는데, 마저 다 드시지요.”


“이미 많이 마셨습니다.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흐음… 아까워서 어쩌나.

요만큼 남은걸 버릴 수도 없고.

나 혼자 마시기도 많고.”


여자가 남자를 곁눈질한다.


“다음에 또 드시지요. 

 적당히가 중요합니다. 적당히.


 부처님께서도…”


“왜 여기서 그 석가놈 이야기가 나옵니까!”


또또또 그놈의 싯다르타다.

뱃속에 똥만 들은 것들이라며 모욕만 푸짐히 먹었는데

형제자매들은 그의 설법을 듣고 출가를 한다.


부처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은건 자신인데.

부모란 작자는 자신만 구박한다.


‘왜 아직도 유혹하지 못하느냐!’


정작 마라 자신도 18억의 군대와 권능과 출세와. 심지어 인간계의 구원마저 걸어놓고도

부처를 꿰어내지 못하였으면서.




“아니, 말씀이 너무 심하신거…”


“심하긴 그대가 더 심하지요.

 아낙네가 옆에서 달라붙어 웃어주고, 술따르고, 이야기 하는데도. 그놈의 석가모니 석가모니.


 그리 좋으시면 출가를 하지 그러셨습니까”


심술이 난 여자가 남자의 아픈부분을 찌른다.


남자가 자신의 스승 이야기를 꺼낸건 이번이 처음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자랑이기도 하고,

자신의 부끄러움 이기도 하다.


자신도 부처의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고 싶었다.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게 제 미련입니다.”


남자는 여자가 따라준 술을 한 번에 털어넘긴다.


이런 행동마저도 부처의 가르침과 알맞지 않다.

내려놓은 술잔을 바라보기만 한다.


남자의 술잔을 여자가 다시 가득 채운다.


“잊으시지요. 한 잔에 털어넘기면

 근심과 걱정이 모두 사라질겁니다.”


“하하.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여자가 청하는 화해의 한 잔.

아니면 유혹하는 매혹의 한 잔.


분위기상 털어넘길 법 한데.


남자는 술잔을 계속해서 바라보기만 한다.



결국, 다시 그 하늘하늘한 옷자락을 꺼낸다.


천의 면적보다 장신구가 더 많은 옷을 들고 고민한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술을 먹여보아도

반응이 뜨듯미지근하다.


분위기만 무거워지고, 어색하기만 하다.

술을 안마시니만 못하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하는데, 도통 마땅한 것이 없다.


정녕 이 방법뿐인가.


어라?


허리끈의 위치가 과거와 다르다.

그럴리 없다.


남자가 진수성찬은 아니더라도 

매일같이 맛있는 식사를 차려주긴 했다.

욕계의 정찬과 비교하면 퍽 모자라지만.

봐줄만 하고 먹을만 했다.


인간계의 식사따위를 먹고 살이 찔리 없다.


나는 욕계의 공주다.


물론 농사일은 남자가 하고.

집안일도 대부분 남자가 하고.

자신은 집에서 얼마 없는 소일거리나 하며

남자를 기다리는게 하루의 전부이지만.


남자에게 욕망을 부추긴다며

시장에서 파는 간식과 술을 두루 섭렵했지만.


겨우 설탕과 술과 밀가루따위에

체형이 변할리 없다.


허리끈을 좀 더 강하게 끌어당긴다.

단전에 힘을 주고

숨을 들이쉰다.

까치발을 들고 팔을 당긴다.


“흐읍!...하아.. 한번만 더어! 

아얏”


결국 중심을 잡지 못하고 사랑채에서 넘어진다.

사랑채 문자락을 밀치고 마룻바닥에 쓰러진다.


“괜찮으십니….까?”


남자가 우당탕탕 큰 소리에 마루로 달려온다.


넘어진 여자.

양 손으로 묶이지 않은 허리끈을 부여잡는다.

입고있는 옷이 평소와 다르다.


아니, 저런건 옷이 아니다.

옷으로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얇은 천이 몸을 가려주지 못하고.

그나마도 천의 면적이 장신구보다 적다.


“.....……”


여자가 허리춤의 끈을 놓지 못한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겨우 일어난다.


“어…그게 아니라…옷이…면적이 너무 작은게…”


“안작아요. 잘 맞는다구요. 어쩌다 보니까….당신때문에…”


여자의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부르르 떨린다.


“전 아무것도 못봤습니다. 아무것도.”


남자가 양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다.

한걸음 한걸음 뒤로 도망을 친다.


“책임 지라구요! 당신 때문이야!!

 당신 꼬신다고 시장에 과자는 죄다 먹으러 다녀서!!”


“네? 책…책임이라니요”


“그러면. 어떡할건데요. 어떻게 할거냐구요.

이대로 돌아간다면 언니들한테 평생 놀림만 당할거란 말이에요”


“책..책임 지겠습니다”


“어떻게, 어떻게 질건데요. 어?

이게 지금 장난으로 보여요?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알기나 해요?


내가 뭐 때문에 여기서 이라고 있는데!!”


여자가 남자의 멱살을 붙잡고 흔든다.

그 석가네 왕자새끼에게 차이기까진 채 한나절도 걸리지 않았는데

이 제자놈을 꼬시느라 1년 가까이 인간계에서 빈둥거린다.


해탈과 깨달음을 얻은 그 자식에게 깨진건 그려려니 할지라도

제 머리도 깎지 못해 수도자가 되지 못한 이 칠푼이를

1년 씩이나 먹이고, 돌아다니고, 웃어주고, 눈을 깜빡이고, 

온갖 아양은 다 떨어주었거늘. 차도가 보이지 않는다.


이대로 아무런 수확도 없이 돌아간다면 창피를 면할 수 없다.

체면이 서지 않는다.

잘 맞지도 않게된 이 선녀옷을 입은 꼬라질 본다면

위아래로 가득가득한 형제자매들이 면박을 있는데로 줄 것이다.


“겨..결혼 하겠습니다!

 평생을 책임 지겠습니다!


 저와 같이 삽시다”


남자가 양 손으로 눈을 가린채 외친다.

혼약을 약속하는 자리인데 

사랑하는 이의 얼굴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목덜미며 귀끝까지 시뻘개져선 

고개를 천장으로 바짝 쳐올린다.


그제서야 여자가 자신의 옷매무새를 살핀다.

묶이지 않은 허리끈이 마룻바닥을 나뒹군다.

허리끈에 고정되어야할… 치마인지 바지인지 천쪼가리인지 뭔지 알 수 없는 하의도

마찬가지다.


“...네?”


대답인가, 아니면 질문인가.

여자는 쪼그려앉아 팔과 몸으로 자신의 하반신을 가린다.


-


-


“첩을 들이시지요”


계획에 ‘조금’ 차질이 생겼지만

어쨌든 찬찬히 진행된다.


여자는 남자와 혼례를 올리고 신혼생활을 만끽한다.


방법론이 잘못된건지

선택과 집중을 하지 못한건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드디어 남자를 여색에 빠뜨리는데 성공했다.


이 집안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어서

그 다음의 오욕칠정을 공략한다.


여자의 능력과 신통력이면

남자의 어머니가 남겨주신 베틀에서 천을 원하는만큼 뽑아낼 수 있다.


남자가 농사일을 하러 나가면

여자는 옷감을 짜고, 시장에 나가 물건을 판다.


이제는 동네 많은 사람들이 여자가 짠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누에실로 된 비단을 짜봤자 이동네엔 살 사람이 없다.

목화실로 만든 천도 귀하다.


여자는 천을 팔아서 가장 먼저 집을 뜯어고친다.

기와를 올리고, 마당을 정비하고.

부엌을 넓히고 벽지를 새로 가꾼다.


참나무로 바닥을 깔고

옻칠이 된 가구를 들이고

거위와 오리털이 채워진 이불을 들이고

구리와 놋쇠로 만들어진 주전자와 물컵을 들이고

음각과 양각으로 무늬가 새겨진 식기도구를 들인다.


구비된 향신료의 가짓수를 늘리고

매일같이 양고기와 닭고기를 굽고

빵과 난에 버터를 듬뿍 발라 먹는다.


헌데 또 제자리다.

뜨듯미지근하다.


남자는 농사일을 할 필요가 없는데도

굳이 매일같이 김을 매고 물을 댄다.


양고기를 구워오면 가장 큰 갈빗대를 여자에게 건네주고

닭고기를 쪄오면 닭다리를 모두 여자에게 건네준다.

빵이나 과자가 있으면 절대로 혼자 먹는 법이 없이

여자와 나눠먹고 이웃과 나눠먹는다.

그나마 요리도 남자의 손길을 많이 탄다.


가죽으로 된 외투를 입고 신발을 신을 법 한데

아직도 헝겊을 발에 두르고, 천으로 만든 옷을 입는다.


여자가 시장에 내다파는 자수가 들어간 옷감이 아니라

민무늬 옷감으로, 여자가 만들어준 옷만 입는다.


호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딴 생각도 할 법한데

시장가 으슥한 골목에 미녀들의 손짓을 신경도 쓰지 않는다.


일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오고

시장에 나가면 옆에 있는 아내를 보느라 앞을 보지 않는다.


농사를 지어 나온 수확물을

주변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


남자도 사람인지라 가진 재산을 모두 나눠주는건 아니다.

곡식을 수확하면 방앗간에서 가루로 만들고

포대자루에 담아, 수레에 싣고 돌아온다.


커다래진 부엌에 식료품을 차곡차곡 쌓고나서도

수레에는 아직도 많은 포대자루가 남는다.


그러면 그걸 끌고서 어려운 이웃들의 부엌을 드나든다.

그들의 부엌에도 남자의 집과 똑같이 식료품을 차곡차곡 쌓아주고서

집에 빈수레만 요란하게 끌고 돌아온다.


애써 키워낸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서 창고에 쌓지도 않고

시장에 내다 팔아서 비단으로 바꾸지도 않고

노력도 안하고, 능력도 없는 가난한 이에게 나눠주는게


여자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허허. 우리는 이만하면 충분하잖아요”


결국 여자가 벌어온 돈으로 먹고사는 주제에

사람좋게 웃기만 한다.


집만 으리으리해지고

가구만 빤짝빤짝해졌지

아침마다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남자의 모습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다.

옷에 기워진 자국만 없다.


여자의 선녀옷은 아직도 허리끈이 맞지 않는데.

이대로 가다간 내세에 축생으로 윤회하는건

저 남자가 아니라 여자이게 생겼다.


남자의 욕망을 더욱 자극해야 한다.


“지금 뭐라고…”


“첩을 들이자고 하였습니다.”


여자는 오늘도 마당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남자를 바라본다.


자신의 미모가 모자라다는게 아니다.

욕계의 공주인 자신을 지상의 어느 누가 넘볼수 있는가.


세상에 ‘한 번만’은 없다.

한 여자를 취하고 나면

다른 여자를 안고 싶은 법이다.


두 번이 세 번이 되고,

세 명이 네 명이 될 것이다.


부양가족이 몇명 늘어나는 정도로 가산이 위태롭지 않다.

계집질에 빠져 사치와 향락에 빠져들면

결국 아귀도를 너머 지옥도 끝자락으로 굴러떨어진다.


지옥을 수 만번 반복해도

축생의 윤회를 수 백번 반복해야하고

그 다음에야 겨우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


번뇌를 버리고 욕계를 벗어나는건 요원해진다.


“지금 그런게 중요하지 않잖습니까”


“중요합니다. 대를 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울좋은 핑계를 대준다.

남자를 회유할 땐, 논리가 중요한게 아니다.

명분을 만들어주고, 도망칠 구석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하물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처가 나서서 첩을 들이자는데

남자들이라 하면 분명….


“부인,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니잖아요.

 움직이는것도 조심해야 하는데”


“남자의 넘치는 양기를 풀어야 삶이 순탄치요.

 비록 제 몸이 이러하여…”


“내 생각 하지말고. 부인 생각만 하세요.

 먹고싶은건 없어요?

 딸기라든가. 포도라던가.”


“....포도.”


여자는 산만한 배가 무거워 양손으로 받친다.


“알겠어요. 내 오전에 산에 올라 포도가 있는지 살펴볼게요.”


“다 익어서 달달한거 말고. 시큼새콤한걸로 가져와요”


“알겠어요. 알겠어요. 욘석.

 뭐가 되려고 이리 엄마를 힘들게 할까”


남자는 여자의 배를 한번 쓰다듬는다.

여자를 품에 꼭 껴안아주고

산을 타러 떠난다.


“너무 멀리가지 말고. 일찍 돌아와야 해요”


남자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남자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기둥에 기대어 앉아. 떠나가는 남자를 바라본다.

남자가 보이지 않아도. 남자를 바라보며 기다린다


“아차, 이게 아닌데.”


이제와서 후회해봤자 소용없다.



-


-


“그러니까, 당신이 밀가루 넣어주는 그 집에 딸이 있는데”


“아, 산치타?”


남자는 여자에게 빵을 건넨다.


“버터도 같이 줘요. 잘 알고 있으니 좋네요. 그 아이가 내년이면 나이가 열 셋이랍니다. 그러니까…”


“건넛마을에 라시드랑 이번에 혼례를 올린답니다. 잘되지 않았습니까”


이번엔 남자가 요거트를 여자의 입에 가져다댄다.


“음. 충분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라시드라면… 저번에 이쪽에서 만났던…”


“맞아요. 당신이 짠 자수천 구하러 왔던 그아이.

이쪽에 왔다 눈이 맞았다는데. 참. 벌써 결혼할 나이랍니다.”


도대체 되는일이 없…


남자가 이번엔 산에서 따온 포도를 먹여준다.

새콤한것이 꽤 괜찮다.


도대체 되는 일이 없다.


그나마 남자와 나아가 가까운 여자아이인데

자신이 뿌린 인연이 닿아서 홀라당 계획이…


“이거 괜찮네. 하나만 더 줘봐요.”


“맛있죠?  산에 포도가 아직 남은게 있더라구요.

 더 먹고싶으면 말만 해요”


“그래도, 당신 힘들잖아요”


“힘들긴 부인이 더 힘들죠. 나는 괜찮아요”


남자의 손에는 여자에게 떼어주느라 포도물이 잔뜩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웃는다.


여자는 방금까지 생각하던게 무엇인지 잘 떠오르지 않는…


“그게 아니라!  자. 다시. 크흠. 

첩을 들이 시지요”


“부인, 나는 부인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도, 남자의 양기가…”


“이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나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요.

 

 내 생각 하지 말고, 당신 생각만 해요”


남자가 여자의 뺨에 묻은 포도를 닦는다.


---

-

-


배가 눌려 똑바로 눕지도 못한다.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야 겨우 잠을 잔다.

그와중에도 뱃속의 아이가 발길질을 하느라 잠에서 깨어난다.


10달 가까이 잠 한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어지럽고 구토감이 몰려오기도 했고

갑자기 배가 고프고 달거나 신게 먹고싶기도 했고

이런 식으로 아이가 움직이면 잠들지도 못하고

허리나 발목이 아프기도 하다.


이 아이도 계획에 있는건 아니었다.

옆집의 혼례도 계획에 있는건 아니었다.

자꾸만 일들이 옆으로 샌다.


눈을 뜨니 남자의 자는 얼굴이 보인다.

사람 성미가 좋아서 참 잘도 웃는다.


“여보”


“으움…왜에…”


“나 목말라요”


“우웅… 기다려요. 금방 가져다 줄게요”


남자는 불평 한 번 하지않고 부엌으로 향한다.


앞으로 얼마나 이 남자를 꼬셔야 타락시킬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시간이 길었으면 좋겠다.


“...”

“...”

“여보?”

“여보? 무슨 일 있어요?”


물 가지러 간지 한참이 된 사람이

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보? 대답좀 해봐요”


[쿵]


소리가 좋지 않다.

마치 포대자루 쓰러지는 듯 한 소리가 난다.


여자가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여보. 뭐 떨어졌어요?

 내일 정리합시다. 불도 없는데 위험해요”


한걸음 한걸음 난간이나 턱을 밟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넘어간다.


부엌 앞에 당도할 때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다.


그곳에 보이는건…


“어…어떡하지. 죽었나봐”

“뭔 상관이야. 물건이나 챙겨”

“저기 또 사람이다”

“어쩌지? 죽일까?”

“여자잖아?”


세넷쯤 되는 괴한이 부엌에서 포대자루를 나른다.

시장바닥에서 자주 마주쳤던 시정잡배들.


아궁이 옆으로 남자가 쓰러져 있다.

머리에서 새어나오는 피가 바닥을 적신다.


“오…오지마아”


눈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텐데

여자의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말한다.


“죽일까?”

“아냐. 잡아가자. 얼굴 반반하네.”

“임신했잖아. 어쩔건데”

“그러니까 좋은거야. 2명분 이라고”



“...”


여자는 주변 상황을 둘러본다.

쓰러져 피흘리는 남자.

남자가 애써 수확한 곡식들.

남자와 시장에서 같이 골랐던 구리 주전자.

어쩌면 자기 자신과

아직 태양빛도 보지 못한 아이까지.


이 시정잡배들이 뺏고 부수고 털어간다.


“…”


“거기 여자. 가만히 있으면 해치지 않을테니까”


“제바알… 제발 아내와 아이만은…

 이 집에 모든걸 가져가도 되니까아”


[퍽]


잡범 중 키가 제일 큰 녀식이

남자의 머리통을 다시 후려갈긴다.


남자가 경련이 온 것처럼 움찔움찔 거린다


“시끄럽기는. 이 집 모든것엔 당연히 저 여자도 들어간다고. 


니 남편처럼 되기 싫으면. 가만히 있어.”


시정잡배중 제일 키가 큰 녀석이 어깨에 힘을 준다.

여자를 위협하기 위해 다가간다.


여자는 시정잡배들 따위 떼거지로 몰려와도 관심이 없다.


남자가 계속해서 경련한다.


“나는… 마군 파순의 딸.”


“파순? 누굴 말하는거야? 

 야! 가서 묶을 끈좀 가져와!


“나는… 욕계의 공주이며.

바느질과 자수와 길쌈을 관장하며.

나와 18억 군대가 함께 행진하나니…”


“공주? 이런 깡촌에? 이게 미쳤나

 무슨 헛소리를…

 

 야! 끈가져 오라니까…아?


그제서야 키가 커다란 잡배가 동료를 살핀다.


동료 하나가 말을 하지 못한다.

앞을 보지 못하고, 숨을 쉬지 못한다.


입이 꿰매지고

눈이 꿰매지고

코와 귀가 꿰매진 채로

부엌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다.


머리에 뿔이 돋고 월도를 들은 작달막한 마귀들이 매달린 제물을 둘러싸고 춤을 춘다.


다른 한 명의 동료도 마귀들에게 포승줄이 매어지고.

공중에 떠다니는 바늘이

한땀 한땀.

얼굴의 구멍들을 꿰매어 나간다.


“너희들에겐 지옥도의 가장 말석도 아깝도다.”


“뭐…뭐…뭔데 이거. 저리꺼져! 저리 가!”


마귀들에게 남은 잡배가 막대기를 휘두른다.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귀가 날아간다.

아궁이에 부딪치며 짓뭉게진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턱이 날아가고

머리가 깨진채로

마귀가 다시 일어난다.

웃으며 춤을 춘다.

월도를 휘두르며 잡배를 향해 나아간다.


“시끄럽구나.”


여자가 잡배를 향해 손짓한다.


날아다니는 실이 잡배의 입을 향해 나아간다.

다른 이들처럼 입술을 꼬매지 않는다.

날카로운 바늘과 실이 직접 치아를 꿰뚫는다.

윗니와 아랫니를 오가며 치아를 꿰맨다.


“우..으!!!우으으우으!!!”


고통이 크다.

소리를 질러도 입을 벌릴 수 없다.

비명소리가 치아 사이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여자가 한 번 더 손짓하자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포개져

일자로 박음질 된다. 


드디어 잡배녀석이 조용해진다.


마귀들이 산제물을 둘러싸고 춤을 춘다.

사람의 손가락만한 월도를 들고 제물의 살을 썰어나간다.


발끝부터, 손끝부터, 귀나 코부터, 신체 말단부터 중심부를 향해 마귀들이 전리품을 챙긴다.

피 한방을, 내장 한 쪽 마저도 흘리지 않도록 대야에 담아낸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축생으로조차 윤회하지 못하리라.”


매달린채로 바둥거리는 녀석들이

마치 능지저참을 당하듯 몸이 조각조각 사라져간다.


-



여자는 남자를 바라본다.


“으으..윽..우….윽”


숨을 쉬는지, 경련하는지.

이상한 숨소리를 뱉어낸다.


이대로 두면 이 남자는 죽는다.

여자와 태어나지 못한 자녀를 두고 죽는다.

인간계의 미련을 놓지 못하고, 버리지 못하고 죽는다.


수 없이 윤회를 거듭하더라도 

욕계를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미련과 원망이 이 남자의 영혼을 계속해서 따라다닐 것이고.

번뇌와 오욕과 칠정을 벗어던지지 못한다.


부처나 부처의 제자들처럼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남자의 타락은, 지금 막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깨진 머리로 움찔거리는 남자에게 다가간다.

여자는 손짓으로 날아다니는 실을 가져온다.


안된다.

아니된다.

아직 이 남자의 오욕칠정을 채워주지 못했다.


본디 사람의 욕망이란 밑빠진 독과도 같은지라

채워도 채워도 부족하기만 하다.


그래서 안된다.

먹어보지 못한 산해진미도 있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의 성장도 지켜봐야하고.

수 해전 자신과 약조한 백년해로도 지키지 못했다.


여자는 바늘과 실과 천으로 남자의 상처를 덮어나간다.


실은 혈관이 되고

천은 살이 되고

여자위 바느질 솜씨가 이음매를 매꿔나간다.



—-


“여보”

“여보오.”

“여보오! 일어나봐요!”


여자가 남자의 등짝을 때린다.


“으헉!”


부엌 바닥에 널부러진 남자가 고개를 든다.


“물 가져다 달라니까 왜 여기서 잠들어있어요”


“아니…그… 도둑이…”


“네에? 고양이요? 안보이던데?”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며 도둑고양이를 찾는 시늉을 한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까?”


“낭군님께서 부엌바닥에 퍼질러 잠들어 있는게

 ‘아무 일’도 아니라면, 없었지요”


“내가. 잠결에 꿈이라도 꾸었나보오. 지독한 꿈을”


남자가 여자를 꼭 끌어안는다.


“괜찮아요. 꿈이잖아요”


여자도 남자를 끌어안는다.

뒤통수를 만지작거리며, 상처가 잘 봉합되었는지 살핀다.


아직. 남아서 나뒹구는 손가락 한 마디를 몰래 발치로 밀어낸다.


어깨너머로 아직 돌아가지 않은 마귀가 춤춘다.

여자가 손짓으로 마귀를 물리지만.

마귀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는다.


손에 든 야자수잎을 흔들어 보인다.


남자의 등 뒤로 보이지 않도록, 몰래 건넨다.

야자수잎엔 글씨가 빼곡히 쓰여져 있다.


“어머.”


“왜그러십니까”


“부모님께서 한 번 오라고 하시네요”


“부모님이시라면…”


“그냥… 평범한 부모님이세요.

이웃다툼이 좀 잦으신…”


여자가 말을 흐린다.

남자의 심성과 학식을 생각하면

인간계를 포함한 욕계의 지배자라 말하기 힘들다.


부처와 다투어 패배한 자신의 부모 앞에.

부처의 제자를 데려가는게 괜찮은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한 번 인사드립시다.”


“괜찮겠어요?”


“사람 발길 닫는 곳인데 멀어봤자 얼마나 멀다구요”


“하하하…발길로는 갈 수가 없어서…”


여자가 한번 더 말을 흐린다.


“부인의 고향이 어디신데 그러시오”


“저~어기. 저 곳입니다.”


여자는 손가락을 하늘 높이 치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