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난 복싱을 좋아함

예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럼.

처음에, 내게 있어 복싱 양궁 사격 검술 이런건 다 사람에게 내재된 폭력을 해소하는 다소 저열한 스포츠였음


그러다가 어느 날, 너무 화가 나는 일이 있어서 그 복싱이라는걸 시작해 봤는데

너무 좋은거임


원래 헬스도 좋아했고 수영 줄넘기 배드민턴 사소한 호신술 이거저거 하긴 했었는데


복싱을 하면 흥분하고 폭력성이 증가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차분해지고 나, 그리고 내 앞의 것에 집중할 수 있게 되더라고

숨이 차고 땀이 바닥에 방울방울 떨어지면 내 복싱화 바닥이 그걸 밟고 기분 나쁜 소리를 내고, 팔이 타버릴 것 같은데


오히려 평온해짐. 이슬이 맺힌 새벽녘의 초원, 그 시골 특유의 비료 냄새와 벌레들이 있는 그곳에서, 벌레를 털면서도 가만히 누워 있는 기분. 불편한데 평온한 이중적인 느낌


정신에게도 낙원이 있다면 복싱을 할 때가 그 낙원에 앉아 있을 때구나 할 정도로

복싱이 좋았음


물론 선수할 생각은 없었고 그 취미에 미치는 정도? 딱 그 정도

다른 운동에서는 찾을 수 없는 몰입감과 긴장감이, 팔과 어깨가 탈 것 같고 평발이라 발바닥이 아파오는데도 계속하고 싶은 그 즐거움이 내가 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주된 방법이었음


근데 작년 4월 말에 사고가 나서


오소독스인 내게 있어 중요한 오른쪽 손목이 작살나고, 생명이나 다름 없는 오른쪽 발목의 양쪽 복숭아 뼈가 아예 가루가 된거임. 근육? 인대? 다 맛이 갔지. 본래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로 색이 검푸르게 변한데다가, 모양은 거의 ㄷ자가 됐고. 거기에 추가로 왼쪽 무릎 인대가 뼛조각을 물고 튀어나갔어. 지금도 이쪽 인대 많이 약해. 내가 위빙을 좋아하고 하체가 좋아서 그걸 잘 쓰는 편인데 큰 손실이기도 하지.


무엇보다 복서라면 부상을 입어서는 안 될 뇌와 두개골을 크게 다쳤음.


아버지가 수술 끝나고 중환자실에 있는 나랑 “아들, 트럭이 너보다 더 많이 부셔졌더라.” 하면서 농담하고 웃는 한편에도, 복싱은 어떡하지, 일상으로 복귀할 수는 있는건가, 나 하던 일은 그만해야 하나? 언제 나을 수 있지? 그런 걱정을 했음


물론, 사람의 정신이라는게 생각보다 강해서, 위험한 상황임을 본능적으로 알고 한 6개월 동안 이성적으로, 이성에 미친 사람처럼 지냈지만


5과가 협진을 하면서 나를 관리했거든

회진이라고 돌아다니면서 자기 주관 환자에게 가는게 있는데

나도 모르게 내 주치의 선생님한테 자꾸 여쭤보게 되더라고

혹시 복싱은 언제 쯤…?


대부분 다 안 된다고 했고, 나도 안 되는건 알았지 근데

6년?

6년을 가다리라고 하더라고

그마저도 불확실하다고

일상 복귀도 2년은 잡던데


나도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때는 이성적이지 않으면 내가 우울로 죽겠구나

설령 광기에 가까울 지라도 웃어야 살겠구나


그래서 약 때문에 속이 매스껍고 온몸이 항상 아픈데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쳐먹고 힘들어도 조금이라도 앉아 있으려고 하고 온몸이 다 부러졌으니까 체스라도 열심히 하고, 주변인들이랑 연락하고, 시간도 많겠다 깊은 대화나 고민도 들어주면서


악착 같이 하니까 1달 만에, 어렴풋이 나마 걷더라고

아마 2~3주만에 재활 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를 받았었던 것 같은데

그 때 진짜 미친새끼 마냥 모든 운동을 땀으로 환자복이 절여질 때까지 하니까

3개월만에 정상인처럼 걷고 행동할 수 있었음


수술 받은 병원 가서 외진 받는데 회복력 보더니 다시 운동할 수 있는 기간을 줄이고, 점점 허용하는 운동의 종류가 넓어지더라


물론 내가 의식해서 걷기도 했지만 겉은 정상이 됐고

1년 지난 지금은 핀이나 이런저런 흉터 다 지워서 겉은 멀끔함


스파링만 안 하면 복싱도 7월, 비앙카 올 때부터 할 수 있음


내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집착하고, 웃고, 계속 노력한건

희망이 있거나, 거짓일지라도 희망처럼 비추어지는 것들이 있어서 그랬던거임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사람은 미쳐야 함

병원 생활 하면서, 난 단 한 번도 울지 않았음

오히려 웃지 않았던 적이 더 드물었음


내 주변에 저런 분들이 있었냐… 그건 아니지만

내 주변에 있으면서 저렇게 밝아지신 분들은 있었지


병원에 있으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억지로 할 필요는 없음

다만 불안감, 우울감 이거를 원천적으로 끊고

무의미한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웃으면


적어도 그러지 않았을 때보다 백 배는 더 좋은 결과가 나옴


내가 이성에 미친다고 표현을 했는데

사실 이성적이라고 보기도 힘들지


다만 이런 마인드를 유지하는거야

해결 할 수 

있나 ——> ㅇㅇ —-> 그럼 해

없나 ——> ㅇㅇ ——> 뭘 걱정함 그 시간에 딴거하셈


논리적이진 않은데

본질적이지


저런 생각으로 병원 생활 하다 보면


가장 늦게 들어와서 가장 빨리 나가는 환자가 돼


아직 이브 심문 다 안 봤는데, 너무 공감가는 말이 있어서 청승 맞은 짓 좀 해봄

이브는 여러 모로 신경이 많이 쓰이는 수감자임

겉으로 보기엔 일관적인 감정, 우울만을 가진 것 같지만, 다른 수감자들과는 다르게 표정 변화가 매우 다양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