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판타지 세계에서 꼭 필요한 건 뭐가 있을까.

 

마법? 당연하다. 마법이 없으면 판타지가 아니지.

 

다양한 종족? 그것도 맞다. 종족이 인간밖에 없으면 그건 그냥 지구겠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정령이라고 생각한다. 뭐 사실 웹툰이나 소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거 같기는 하지만.

함께 싸우며 강한 마법으로 도와주고 서로 웃고 떠들 수 있는 동료를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참 매력적이다. 그래서 항상 판타지 세계로 가면 정령술사를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왔네? 이게 왜 진짜냐?”

 

진짜 와버렸다. 정말 마법이 있고 다양한 종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판타지 세계에.

 

“저기 누구세요?”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왜 네가 먼저하냐?

옆에 있던 엘프가 손에 쥐어진 마법 지팡이를 꽉 쥐고 있었고 드워프는 멍한 표정으로 엘프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근데 둘이 사이 안 좋은 거 아니었나?

 

엘프의 이름은 메르디, 드워프는 파르칸이라고 한다. 알고보니 간단한 소환마법을 진행하고 있었지만 모종의 이유 때문에 내가 온 거라고. 그리고 사이가 안 좋다는 건 소설에서 지어낸 이야기였다. 조금 김새네.

이왕 온 거 마왕이라도 처리해야하나 싶었지만 여긴 너무 평화로웠다. 어쩌면 지구보다 더.

 

“그렇게 됐으니 그냥 여기서 지내세요. 마침 하고 싶으신 것도 있으셨잖아요.”

 

맞다. 정령술사! 죽기 전에 꼭 해봐야지.

메르디는 나를 친절하게도 직접 직업 선택소로 데리고 갔다. 직업 선택소로 가는 도중에 보인 풍경은 이곳이 진짜 판타지 세계라는 것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낮은 건물, 현실에 없는 종족들, 온갖 신기한 도구들.

상상이 현실로 바뀌자 심장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다시 한 번 살아난 것처럼.

 

“자, 여기에요. 여기서 원하는 직업이 적힌 방으로 가시면 돼요.”

“고마워.”

“에이, 저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오셨잖아요. 이 정도는 도와드려야죠.”

 

착하네. 어디보자 정령술사는...3층 302호네.

계단을 오르자 삐걱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긴장되기 시작했다. 문을 열기 전까지 꿈인지 의심했을 정도다. 꿈이면 영원히 깨지 말라고. 아니면 차라리 빨리 깨게 해달라고.

하지만 확실히 깨달았다. 여기가 현실이라고. 눈 앞에 불의 정령이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걸 봤으니까.

눈물이 맺혔다. 그리고 뺨을 타고 흘렀다.

 

“어서 오시... 엥? 자네 왜 우나?”

“젠장, 수능 망치고도 안 울었는데 여기서 우네.”

“수능...?”

 

궁금증을 띄운 정령의 말은 가볍게 무시하고 눈물을 닦고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앞에 앉은 사람도 궁금한 것 같지만 그딴 건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서 정령을 소환하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이제 저도 정령 소환할 수 있는 건가요?”

“흐흠, 정령술사에 대한 의지는 보인다만 재능이...”

 

시발. 여기서도 재능충들이 다 해먹는 건가. 에라이 빌어먹을 세상.

 

“아, 아니네. 다른 건 좀 그렇지만 물의 정령만큼은 괜찮겠군.”

 

최곱니다. 역시 재능만능주의. 짜릿해.

 

“우선 주의 사항을 알려주겠네. 기본적으로 정령은 친구, 동료로서 대해야 하네. 무조건 그래야 하네.”

 

암, 당연하지. 설마 정령을 도구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겠어?

 

“정령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고 있다네. 그 점을 유의하게.”

 

그것도 맞지. 그게 정령의 알파이자 오메가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령과는 어느정도의 호감을 유지해야 한다네.”

 

나를 싫어하면 안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호감을 최대로 쌓아놔야겠네.

근데 방금 옆에 불의 정령이 정령술사를 조금 째려본 것 같은데 기분탓인가?

 

“그래도 하겠는가?”

“당연하죠! 제 인생의 목표인 걸요?”

“하, 알겠네.”

 

정령술사는 종이 한 장과 물을 꺼냈다. 종이에는 알 수 없는 말이 적혀있었고 물은 굉장히 신비로운 색을 띄었다. 마치 에메랄드를 녹인 것 같았다.

정령술사는 종이 위에 물을 올리고 내 손을 잡아 종이 위로 올렸다.

 

“힘을 잘 느껴보게.”

 

그 순간, 잔잔한 물에 파장이 일더니 천장에 닿을 듯이 위로 솟구쳤다. 어쩌면 조금 닿았을 수도.

위로 솟아오른 물이 걷히자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손바닥만한 사람이 보였다.

 

“와! 너구나! 내 계약자가! 당장 계약하자!”

 

정말 정령이다. 나만의 정령. 항상 꿈만 꿨던 그 존재가 지금 내 눈 앞에 있다.

 

“그래! 당장 하자!”

 

정령술사의 말에 맞춰 우리 둘은 서로 손을 대서 계약을 완료했다. 나도 뛸 듯이 기뻐했고 물의 정령도 내 머리카락에 올라타 기쁨을 만끽했다.

나가기 전, 정령술사가 뭐라고 말을 걸려고 했지만 옆의 정령에게 말이 막혔다. 옆에 불의 정령은 웃는 표정으로 행복하게 살라는 말을 남겼다.

 

“나오셨어요?”

 

1층으로 내려가자 메르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까지 기다려주다니 이거 좀 감동인데?

메르디는 잠시 내 머리를 보더니 지도 하나를 건넸다.

 

“저도 이제 할 게 있어서요. 더 도와드리지 못할 것 같아요.”

“괜찮아. 충분히 도와줬지. 이제 내가 알아서 해볼게.”

“그럼 갈게요.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메르디는 손을 흔들며 빠르게 문 밖으로 사라졌다. 방금 굉장히 오해 될 만한 말을 한 것 같은데. 그리고 왜 이 정령은 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는 거지.

 

“그럼 우선 모험가 등록부터 하러 가볼까? 아! 그 전에 너 이름이 뭐야?”

“나? 이름은 없어! 너가 지어주면 돼! 뭐로 지어줄 거야?”

 

물의 정령은 머리카락에서 나와서 호수같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았다면 그 호수로 빠졌을 것이다.

 

“엔데라 어때?”

“좋아! 엔데라, 마음에 들어!”

 

엔데라는 이름 붙여진 것이 그렇게 좋은지 주위를 빠르게 날아다녔다. 그렇게 좋을까?

이제 모험가 등록을 하러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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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완료되었습니다.”

 

모험가 등록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모험가 생활이 시작되었다. 가벼운 긴장과 설렘이 몸을 떨리게 만들었다. 엔데라도 긴장이 됐는지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렇게 한 모험가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게임도 혼자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정령술사는 정말 완벽한 선택이었다.

내가 몬스터들을 모아오면 엔데라가 강한 마법으로 한 방에 쓸어버린다. 심지어 내가 다치면 회복도 해주고 적을 무력화하기까지 한다. 정말 최고의 동료다.

 

“역시! 엔데라! 최고야!”

“헤헤, 좀 더 쓰다듬어 줘!”

 

이렇게 한 번의 전투가 끝나면 항상 엔데라를 쓰다듬는 걸로 마무리 된다. 어떨 때는 안기기도 하지만 좋다는 데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지.

호감을 유지하는 건 중요하니까.

그렇게 우리는 합을 맞춰 나가면서 점점 친해졌다. 같이 생활하면서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으며 그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게 되었다. 단순한 친구나 동료가 아니라 조금 더 깊은 사이로 생각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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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엔데라. 삐졌어?”

“흥!”

 

난감하네. 설마 다른 사람이랑 함께 싸운 걸로 삐질 줄이야. 아무리 그래도 고작 이 정도로 삐지는 건 좀 아니지 않나?

 

“그래도 나도 혼자 싸우기는 그렇니까...”

“왜 혼자야! 나랑만 같이 싸우면 되잖아! 앞으로는 절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지마!”

 

무리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하고도 같이 있지 말라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너가 뭔데 내 인간관계를 박살내는 건데?”

 

좀 말이 세게 나왔다. 엔데라도 충격을 강하게 받았는지 한참동안 말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반응. 노려보는 눈빛에 따가움이 느껴지고 본능적인 두려움이 느껴졌다.

 

다리부터 차오르는 숨막힘.

물 속으로 가라앉는 듯한 답답함.

그 순간 느꼈다. 엔데라는 나와 다르다는 걸. 막연히 정령이 좋다고 생각한 과거의 내가 후회스러워졌다.

그리고 하면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내 입을 꼬매고 싶을 정도였다.

 

“그럼 잠깐 서로 머리 좀 식히자.”

“잠깐... 야!”

 

소환을 해제하자 작은 물방울오 변해 사방으로 펼쳐지는 엔데라. 머릿속이 복잡하다.

이렇게까지 어긋난 적 없었는데. 왜 이럴까.

 

“하... 계약 해지를 해야하나...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져볼까? 요즘 마법사 땡기던데.”

 

실없는 혼잣말을 하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다. 도시를 천천히 걷자 그림자가 길어진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를 가득 메운다.

머리가 살짝 식었다. 자야겠다.

근처에 있는 여관으로 들어가자 예쁜 여관 주인이 반겨주었다.

 

“50실버입니다. 아침은 드실 건가요?”

“네. 먹을게요.”

 

여관 주인은 201이라고 써져있는 열쇠 하나를 건넸다.

2층으로 올라가는 길에 누군가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뒤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은 없었다.

 

“뭐지. 잘 못 느낀건가?”

 

괜시리 불안한 마음이 들어 확실히 문단속을 하고 침대에 눕는다. 아까 엔데라와 싸운 생각이 났다.

 

“내일 말해야겠네.”

 

그렇게 말하며 옆으로 도는 순간 축축해진 벽이 보였다.

뭐지? 물이 새나? 영 별로네.

한 마디 하러 일어나는 순간 이질감이 느껴졌다. 원래 방이 이렇게 추웠나? 그리고 바닥에 왜 이렇게 물기가 많지?

뭔가 이상하다. 어서 나가야 해.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자 문고리가 녹아내렸다.

 

“뭐... 뭐야. 이게.”

 

머리가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머리가 새하얘진다는 뜻이 이런 건가?

내가 문과 씨름하고 있을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오랫동안 함께한 목소리.

내가 가장 의지했던 그 목소리.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목소리.

 

“엔데라!”

 

엔데라가 뒤에 서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조금 큰 모습이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여길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까.

 

“엔데라, 어서 여기를...”

“응. 걱정마. 이제 평생 여기서 같이 살거야.”

“어...?”

 

이건 무슨 소리지? 잠깐. 분명 나는 엔데라를 소환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온 거지?

엔데라가 한 걸음씩 다가온다.

무섭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듯

도망칠 수 없는 압도적인 공포감이 내 몸을 휘감는다.

어느새 엔데라는 나를 안고 있었다. 그러고는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그러게 왜 계약 해지같은 말을 하는 거야. 나만 있으면 충분하잖아.”

 

어떻게... 그 말을...

그 순간 직업 선택소에서 만난 정령술사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 뜻이...

 

“이제 절대 도망 못 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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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여관 주인은 평소처럼 고객들을 깨우러 돌아다닌다. 특히 아침을 신청한 사람은 더더욱

 

“저기요. 모험가님. 아침 식사 신청하셨죠.”

 

방 안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가겠습니다.”

 

문을 열자 물바다가 된 방만이 모습을 들어냈다. 가지고 온 짐도 그대로였다. 마치 사람만 사라져버린 듯이.

그 날을 마지막으로 그 사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정령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