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것처럼."


"너 푸리나 맞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럼 귀신이게?"


날이 밝자마자 다시 푸리나의 집으로 가니. 평소와 다름없는 푸리나였다.


어젯밤은 악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끔찍하고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악몽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태연하게 있는 푸리나가 소름이 돋았다.


"어제 그거 도대체 뭐였어?"


"어제? 아! 어제 너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저녁에 오라고 해서 갔더니 치오리의 모습을 하고 연기한 주제 어젯밤에 기다리다 잠이 들었다는 우습지도 않는 변명했다.


그러고 보니 방의 구조도 바뀌어 있었다.


무섭다. 무서운 나머지 푸리나를 피해 뒷걸음질 쳤다.


"너 괜찮아?"


불쑥. 푸리나가 다가오자 꼴사납게 자빠졌다.


어제 일을 묻기 위해 왔지만 푸리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로 일관했고 생각할 수록 어제 일이 모호했다.


시야가 노이즈가 일어나듯이 치오리와 푸리나가 뒤바뀌어 보였다.


"너… 어제 치오리인척 연기 했다고."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해? 그것보다 너 밥은 먹었어? 괜찮다면…"


귀신의 집에 들어간 사람 같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갔다.


분명히 치오리의 흉내를 내는 푸리나였는데 이쪽이 잘못된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같이 혼란이 오고 있었다.


어젯밤 일은 그럼 도대체 뭐냐고. 미친 듯이 달려서 간 곳은 치오리 부티크. 매장 안으로 들어서자 치오리가 깜짝 놀라 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고 치오리도 차마 뭐라 할 수 없었는지 하던걸 멈추고 다가왔다.


"왜 그래?"


"너 치오리 맞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안색은 또 왜 그렇고."


앉아보라며 의자를 가지고 와서 앉히고 치오리가 물을 가져 왔다.


어젯밤 일을 말해도 되는 건가. 미치지 않고서야 푸리나가 맞는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이제 연인도 아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치오리가 맞는 건가. 어제 치오리를 연기한 푸리나가 부티크에 가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설마 푸리나가 아닌가. 그럴 리가. 진짜 치오리는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진정해. 숨 좀 고르고."


"미안 해. 잠시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미안 해… 미안 해."


"아니야. 조금 놀랐을 뿐이니까, 뭘 확인해야 하는데?"


"어. 그게 아니야, 아무것도."


"들어 주는 거라면 가능해. 당장은 힘들더라도 언제든 말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제 연인도 아니고 차인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는데 치오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어색함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네가 싫어서 이별한 게 아니니까. 말했다시피 흥미도 없고 그런 감정이 결여 됐을 뿐이야. 좋은 친구로 남는 것도 좋잖아."


"나는 아니야! 노력하고 있었어! 너는 타인의 기분 조차 모르는 거냐!"


혼란 속에서 머리가 어떻게 됐는지 처음으로 치오리에게 화를 냈다.


치오리도 놀랐는지, 겁을 먹은 건지 눈이 움찔했다.


"…입장을 바꾸면 네가 화내는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돼."


치오리도 일방적으로 이별 통보 한 게 신경 쓰이기는 했다.


성격이 이렇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만큼 악인이 아니다.


좋은 사람이다.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을 만큼 좋은 옷이라고 할 수 있었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하지만 받아주기에는 치오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식으로 매몰차게 차버린 거다.


사랑이 결여 됐다는 말은 진심이라. 연인이 될 수 없었다.


"사랑 없이 어떻게 너랑 함께 있겠어. 실제로 시시했잖아. 우리들의 연애라는 거."


"네 진심이 뭐야?"


"너한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아.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계속 함께 있어도 너만 애쓰다 지치는 거야. 그러니까 더 좋은 인연을 만났으면 해."


"그게 너잖아! 바로 여기 있는 너! 레플리카 따위가 아니라 진짜 치오리 너 말이야!"


레플리카 라고. 그런 가짜가 아무리 위로해도 채울 수 없는 게 있다.


진짜를 원해. 바로 여기 있는 치오리를 원하고 애쓰는 것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결여된 감정이라면 애쓰고 애를 써서 채워 나가면 되는데 치오리는 아니라고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생각해도 연애는 무리야. 지금의 나한테는."


"나는 멋대로 부딪힐 거야."


"여기서 내가 대주겠다고 하면 포기할 거야? 결국 끝은 관계를 맺는 거잖아. 아니라고 부정해도 조금은 내 몸의 욕망이 있는 거잖아."


무엇을 대답해도 옳은 선택지가 없고 어떤 대답해도 치오리의 답은 정해져 있어서 듣지 않은 척 돌아서서 부티크에서 나왔다.


기분 탓인가. 부티크에서 나오기 전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는데.


이럴 거라면 부티크에 왜 온 거지. 가짜 치오리 덕분에 터놓고 말한 것까지 좋지만.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기만 했다.


"산책이라도 하는 거야?"


방금 부티크에서 치오리와 대화하고 나오는 길인데. 치오리가 골목에서 나왔다.


아니지. 치오리가 아니라 치오리를 자칭하는 푸리나지.


치오리의 레플리카가 길을 막아섰다.


안 그래도 미치기 직전인데 또 치오리의 모습으로 나타나니 환장할 노릇이었고. 대답도 없이 팔을 잡아 골목으로 데려갔다.


"적당히 해!"


"보기보다 터프하네. 그런데 내가 무슨 짓했다고 이러는 거야?"


목소리, 눈빛, 표정, 사소한 것까지 치오리를 완벽하게 연기 하는 푸리나였다.


"너는 푸리나 잖아! 장난은 집어치워! 가짜 한테 위로 받을 정도는 아니야! 더 미치게 하지 말라고!"


"힘들었겠구나."


치오리의 모습을 한 가짜가 품에 안겼다. 빌어먹을 몸에서 나는 향기 마저 치오리와 같았다.


"너는 아픈 거야."


토닥여주는 손길이 흥분된 감정을 누그러트리고 있었다.


분명 푸리나가 맞는데 치오리 한테 위로 받는 기분이다.


고개를 든 푸리나와 마주치자. 정말로 치오리가 보여 소름이 돋아 얼어붙은 듯 몸이 굳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마음이 아픈 거야. 괜찮아, 위로는 얼마든지 해 줄게."


"저리 가…"


"장소 옮길까?"


"저리 가라고!"


푸리나를 패대기치고 사색이 된 얼굴로 골목에서 빠져나왔다.


"정말 손이 많이 간다니까."


대낮에 귀신이라도 본 것같이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푸리나는 피식 웃었다.


당장은 혼란스러운 게 당연했다. 그의 마음, 기억 속에 치오리를 지우고 새로 덧씌우는 데 필요한 시간과 과정은 길고도 험난하다.


조금씩, 조금씩 스며들고 의지하도록 해야 하는 게 레플리카의 역할이다.


새롭게 덧씌워지는 치오리는


"너를 버리지 않아. 네가 원하는 데로 뭐든지 할 거야."


푸리나는 불쾌하다는 듯이 치오리 부티크를 쳐다 봤다.


아무리 자신이 진짜를 진짜 같이 연기해도 덧칠하는 과정에서 진짜는 당해낼 수 없었다.


실컷 가지고 놀다 차버리더니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기다니. 푸리나가 대본을 꺼내 펼쳐서 페이지 한 장을 뜯었다.


치오리 라는 이름의 연극. 1막은 예기치 못한 전개로 뜻하지 않은 사고가 일어났다.


"치오리는 나야."


푸리나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고 친구 이상의 관계로 발전 할 수 없었다.


"도망치지 마."


푸리나가 숙소에까지 침입해 왔다.


자연스럽게 침대 위에 앉아 치오리의 눈을 하고 아련하게 보고 있으니 미치기 직전이다.


"네 말대로 나는 가짜일지도 몰라."


부정하더니 순순히 인정하는 모습에 당황스러웠다.


"마음대로 생각해. 보이는 그대로 받아들여. 하지만 내가 네게 품고 있는 마음은 거짓 없는 진심이야."


점점 다가오는 푸리나를 피해 물러났지만 곧장 가로 막혔다.


"안아줘."


"그만해… 너는 치오리가 아니야."


"네 마음대로 해.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안아줘."


치오리가 유혹해 오는 것만 같았다.


"안기고 싶은데, 용기가 나지 않았어. 어젯밤에는… 미안 해. 잔뜩 기대만 시켜 놓고."


"너는 푸리나야. 나는 너랑 할 수 없어."


"그럼 푸리나는 괜찮아?"


라고 푸리나의 목소리로 말하자. 심장이 멎을 만큼 무서웠다.


몸에서 힘이 풀려 그대로 몸을 누웠다.


"안아줘 내가 네 소유라는 걸 각인 시켜줘. 이 몸에 지워지지 않게 깊게."


이번에는 치오리의 목소리로 말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푸리나를 밀어 버리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무섭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었다. 왜 이렇게까지 자신을 괴롭히는지 욕을 뱉으며 윽박을 지르자. 푸리나는 멀뚱히 쳐다만봤다.


치오리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눈은 푸리나의 눈을 하고 있었다.


"나가! 소름 돋으니까, 나가라고!"


"너는 이미 알면서 왜 나한테 이렇게 심하게 하는 거야?"


"무슨 말하고 싶은 거야. 너야말로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런 몰꼴로 몇 번이나 괴롭히는 거냐고."


푸리나가 씩 웃더니 다가와서 손을 내밀어 가슴을 밀어내듯이 쳤다.


지금 느끼고 있는 감정은 공포뿐이었다.


"네가 나한테 말했잖아. 치오리가 제일 좋다고, 사귀고 싶다고 말했잖아. 그래서 내가 되어 준다고 네가 제일 좋아하는 치오리가."


공포에 질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푸리나의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숙소 안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