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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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멈춰 엘리시아."


"네?"


"고블린이야. 녀석들의 악취가 방금 느껴졌어."


"아… 여, 역시. 이번 던전은 상당히 위험하네요. 아직 입구인데 벌써부터 마물이…."


"걱정하지 마. 아무리 강한 적이라 해도─ S급 용사인 이 몸이 전부 해결해 줄 테니까."


"역시 S급은 대단해요!"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여자가 주먹을 불끈 쥐며 큰 소리로 외쳤다.


"게다가 이 던전은 저번 회차에 이미 클리어한 곳이거든. 오른쪽으로 가면 마물이 없어. 그러니까 왼쪽이 아닌 오른쪽으로 가자."


"세상에… 방향을 바꿔서 가다니…, 전 생각조차 못 했는데…!"


"넌 저번 회차에도 그렇고 항상 눈치가 없다니까. 알았으면 얌전히 내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와."


"네, 네…! 용사님만 믿을게요!"


"그럼 어디… 먼저 상태창으로 전투력부터 올려 볼까?"


남자는 거만한 표정으로 허공에 손짓하기 시작한다.


마치 스마트폰의 음량을 조절하듯, 아래에서 위로 우아하게 손을 올린다.


"좋았어. 가자, 엘리시아!"


"네!"


타닥, 타닥.


남자와 여자는 이윽고 지면을 박차고 뛰어간다.


그들이 '고블린'이라 부른 존재는 남자의 말대로 왼쪽에 무리 지어 서 있다. 다들 표정이 심각하다.


"그래서 이번 분기 예산 말인데, 다행히 시에서 지원이 추가로 나와서 조금 넉넉하게 배분해도 될 거 같아."


"그럼 이참에 점심 메뉴는 추가하는 거 어때? 쏘야 좋긴 한데, 맨날 그것만 먹으니까 좀 물린단 말이지."


"글쎄다. 일단 생선은 가시 못 발라 먹는 애들이 있어서 절대 안… 거기, 복도에서 뛰면 안 돼요~."


"됐어, 기운 넘치고 보기 좋네 뭐."


"뭐… 그건 그렇긴 하지. 어쨌든 메뉴 추가가 어려우면 부식이라도…."


남자의 예상대로 '고블린'은 오른쪽으로 뛰어간 그들을 쫓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떠드느라 바쁘다. 그 모습을 돌아본 남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훗, 역시 내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니까."


"그야 용사님은 S급인걸요!"


"그럼, 그럼!"


완벽한 계획이 성공적으로 통한 것만으로 그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넘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둥 너머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빛을 가렸다.


"꺄악…!? 저, 저건 설마…!"


"45레벨… 블랙 다이어 울프인가!?"


"어라, 수호랑 지수잖아. 회진 벌써 끝났니?"


"어, 어떻게요 용사님…? 블랙 다이어 울프는 제 마법이 안 통하는데…!"


"큭… 시작부터 은빛 날개를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쩔 수 없지!"


"안 돼요 용사님! 너무 무리하시면…!"


"하아아아아앗!!"


여자는 다급히 남자를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남자는 손에 든 은색의 칼을 상대에게 휘둘렀다.


"어머나?"


챙─!


이윽고 요란한 금속질의 소리가 공간에 울린다.


아쉽게도 소리에 비해 효과는 미약했다.

상대는 뒤로 밀려나기는커녕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오히려 고개만 갸우뚱거렸다.


"오늘도 기운이 넘치는구나~ 근데 지금 아줌마가 식당 가는 길이어서 말인데. 잠깐 비켜주지 않을래? 점심 식사 날라야 하거든."


"이, 이럴 수가… 데미지 제로…!?"


"용사님!"


"오면 안 돼 엘리시아!"


"으음… 곤란한데 이거."


상대는 뽀글뽀글한 머리를 긁으며 난처해했다. 덕분에 그녀가 밀고 있던 수레가 살짝 옆으로 굴렀다.


"앗, 기회──."


"삼─ 초── 온───!!!!"


"끄아악!?"


퍼어억!!


틈을 놓치지 않은 남자가 재빨리 뛰어오른 순간이었다.


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은 소녀가 남자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덕분에 마치 만화 속 한 장면처럼 남자가 붕 날아갔다. 데굴데굴 굴러 벽에 쾅 부딪힌 건 덤이다.


"요, 요요, 용사니임!?"


"하아… 하아… 진짜, 이 망할 삼촌이 잠깐 한눈판 사이에 또…!"


"아, 여신님! 제 기도를 듣고 내려오신 건가요!?"


"아… 어… 크흠, 그… 그렇… 지. 삼… 아니, 용사님이 위험한 거 같아서…."


"에헤헤, 역시 여신님이에요. 믿고 있었다구요♡"


"자, 잠깐만…!?"


겁에 질려있던 여자는 소녀를 보자마자 어린아이처럼 쪼르르 다가가 달라붙었다.


당황한 소녀는 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이내 한숨을 쉬며 그 포옹을 받아줬다.


"아! 그런데 큰일이에요! 던전 입구부터 블랙 다이어 울프가 나타났어요!"


"블랙… 어… 으음……… 혹시 저거?"


"네!"


"어머나, 수지 너도 있었구나? 오늘도 온 거니?"


"네, 네… 엄마가 방학에 삼촌 좀 돌보라고 하셔서…."


"어쩜 어쩜, 요즘 이렇게 참한 애가 또 어딨을까~ 엄마가 정말 좋아하게다 야."


"아, 아하하… 그… 저희 삼촌 때문에 항상… 죄송합니다…."


"에이~ 아냐. 오히려 적막한 병원에 활기가 도는걸?"


"그… 그렇군요. 어, 어쨌든 삼촌은 제가 데려갈 테니까, 가던 길 가시면 돼요."


"그래? 그럼 이따가 보자~ 식당 오면 반찬 더 줄게."


"네… 안녕히 가세요….."


소녀가 공손하게 꾸벅 고개를 숙이자, 상대는 다시 수레를 끌며 가던 길을 갔다.


여자는 그 모습을 빤히 보더니 소녀를 휙 돌아봤다. 안 그래도 커다란 여자의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이다.


"굉장해요! 용사님도 어쩌지 못한 마물을 말 몇 마디로 쫓아내다니!"


"어… 그, 벼… 별 거 아니지 뭐."


"여신님~!"


"흐앗!?"


여자는 감동한 얼굴로 소녀를 더더욱 꼬옥 껴안았다.


참고로 여자가 소녀보다 못해도 한 뼘은 더 컸다. 키도, 가슴도 전부. 덕분에 소녀는 여러모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아야야… 어이 잉여신! 이 몸이 활약할 타이밍에 끼어드는 게 어딨어!"


"………삼촌은 제발 좀 닥쳐줘."


"날 이세계로 보낸 것도 모자라서 허구한 날 때리고 욕하고 흉보고…!"


"알면 욕먹을 짓을 안 하면 되잖아. 에휴… 됐으니까 돌아가기나 하자고."


"에? 아, 아야야야…!?"


소녀는 한숨을 푹 쉬며 자기보다 머리 두 개는 더 큰 남자의 귀를 잡아 질질 끌고 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던 남자는 저항은커녕 꼴사납게 버둥대기만 했다. 그 뒤를 졸졸 쫓아가는 여자는 여전히 싱글벙글 웃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