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1화

"란도야 이게 맞냐아악!"

머리 끝까지 차오른 울화통에 키보드를 쾅 내려찍었다.

자판에 손바닥이 찝혔지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아픈 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까.

"하필 거기서 판데믹이 뜨고 지랄이야..."

마른 세수와 함께 한탄하길 잠시. 고개를 들어 모니터를 바라봤다.

모니터에는 내가 수십 시간을 들여 가꾼 정착지가 비춰지고 있었다.

아니지 '정착지였던 것'이 펼쳐져 있었다.

행성 탈출을 앞둔 최첨단 기술을 자랑하던 내 정착지였지만 이제는 생존자 하나 없는 폐허만 남고 말았다.

"하필 거기서 벽을 쳐 가지고..."

몰려오는 자괴감과 허탈감에 나는 또다시 머리를 부여잡았다.

지금 플레이하고 있는 게임의 이름은 님플래닛(Nimplanet).

세계적인 게임 유통업체 스트림에서 유통중인 1인 개발 인디게임이다.

게임의 목적은 간단하다.

어느 행성에 불시착한 님(Nim)들을 조종해 정착지를 일구고 기술을 발전시켜 행성을 탈출하는 것.

말만 들으면 간단해보이지만 실제 난이도는 악랄하기 그지없다.

아니, 정확히는 억까가 심하다.

시간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적들, 님들의 정신력 스텟, 그리고 완전 랜덤 이벤트들까지.

뭐 하나 잘못 꼬이는 순간 나락행 편도 티켓을 끊고는 제작자를 부르짖게 되는 게임인 것이다.

그래. 지금의 나처럼.

"진짜 어떻게 키운건데."

방금 망한 판은 최고 난이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안 그래도 억까가 심한 게임인데 그 억까에 억까가 한술 더 얹어진 난이도인 것이다.

실제로 판이 망할 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버텼건만.

"안일 스택 쓰바..."

마지막 습격에서 사선에 놓인 벽 하나가 거슬린다고 그걸 부수는 뻘짓을 하고 말았다.

그 탓에 불리한 거리에서 싸움이 붙었고, 어떻게 물리쳤을 때는 피해가 막심한 상황이었다.

거기서 뜬 것이 대규모 전염병 이벤트인 판데믹, 즉 억까였다.

그리고 결과는 아시다시피.

"에혀, 결국 내 뻘짓 때문이지."

실로 아쉽고 분하기는 하지만 이 이상 몰입하면 건강한 게임생활을 망치는 법.

빠르게 마음을 정리하고 시간을 확인했다.

"다음 회차 하기에는 조금 애매하네. 간만에 갤질이나 할까."

그대로 게임을 끄고 님월드 갤러리에 접속했다.

들어가자마자 바로 개념글을 확인해봤다. 념글들을 보고 그 날의 떡밥을 파악하는 것이 하루 갤질 루틴의 시작이었다.

"응? 죄다 모드 얘기 뿐이네?"

확실히 념글 대부분이 모드 이야기로 잔뜩 불타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면 나쁜 의미보다 좋은 의미에 가까웠다.

그중 조회수와 추천수가 가장 높은 글 하나를 확인해봤다.

허니비모드 <역대급 goat인 이유.

(조그만 아이 님들이 꽃에 들러붙은 사진)

(대충 알록달록한 꽃으로 도배된 사진)

(온갖 곤충 괴물들이 몰려오는 사진)

이 짤들로 요약 가능ㅋㅋㅋㅋ

ㅡ모드 따리가 분량이 어케 dlc 급ㅋㅋㅋ

ㄴㄹㅇ dlc가 따로 없음

ㄴ이게 dlc지 아이덴티티 따리가 dlc가 아니라 ㅋㅋ

ㄴ아이덴티티? 그게 뭐죠?

ㄴ이 게임에 아이덴티티라는 dlc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ㅡ란도가 모드 만든 사람 모셔가야 하면 개추

ㄴ너 이자식 방금 ''라고

ㄴㅇㄷㄴㅂㅌ

ㅡㄹㅇ 개꼴리는 모드

ㄴ?

ㄴ제발 숨을 1년간 참아주세요.

ㄴ아니 모드가 꼴린다고 모드가

.

.

.

댓글들은 말그대로 찬양 분위기였다. 중간 중간 정식 dlc나 제작자를 까는 글도 엿보였다.

"흠. 모드 퀄리티가 그 정도로 좋은가?"

문득 궁금증이 일어 무슨 모드인지 찾아봤다.

다행히 제작자가 한국인이라 갤에 소개글이 올라와 있었다.

그것들을 한번 쭉 읽어 본 결과.

"나쁘지 않은데?"

대충 글만 읽어봐도 재밌을 것 같은 느낌이 물씬 풍겼다.

미치도록 귀여운 종족 추가에 컨텐츠도 빠방하고 엔딩까지 구현되어 있단다.

그야말로 dlc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최근 업뎃된 dlc에 데인 갤럼들이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번 해볼까?"

여태껏 모드를 등한시하던 나조차 혹할 정도였다. 그만큼 매력 넘치는 모드라고 할 수 있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스트림에 접속해서 모드 구독을 박았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동안 애써 외면하던 모드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편의성 개편 용도였다.

"게임이 확실히 불편하고 불친절하긴 했어."

이왕 모드 쓰는거 이번에는 쾌적하게 해보자는 속셈이었다.

"그럼 살짝 맛만 볼까?"

시간이 애매하지만 지금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쾌적한 게임생활을 위해 사전답사는 필수인 법이었다.

다시 게임을 켜서 준비한 모드들을 하나씩 적용시켰다.

기왕 하는거 더 크게 저질러보자는 생각에 다른 종족 모드도 넣었더니 시간이 꽤 걸렸다.

"어디보자... 시나리오가 꽤 늘었네?"

아마 적용한 모드들에 추가 시나리오가 들어있었나 보다.

당장 그것들을 할 생각은 없었기에 죄다 넘겼다.

"어디... 아 찾았다."

이번 허니비 모드의 시나리오는 총 두개였다.

하나는 님 하나로 시작하는 추방된 로열 허니비.

요약하면 동족들에게 온갖 차별과 핍박을 받다가 쫓겨난 로열 허니비의 홀로서기다. 차별의 이유는 다른 로열 허니비와 다르게 유난히 작은 체격 때문이라고.

다른 하나는 4인 스타트인 몰락 부흥기.

몰락한 둥지의 생존자들이 다시금 자기 무리를 부흥시키려한다는 스토리다.

"어느걸로 해볼까."

전자는 조금 꺼려졌다. 처음에 호기롭게 1인 님 스타트를 했다가 된통 깨진 경험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4인 스타트는 너무 많이 해봐서 질리는 느낌이었다.

"그냥 1인 스타트 할까?"

솔직히 그동안 플레이하면서 경험이 쌓이긴 했다. 뉴비 시절처럼 처참히 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처음하는 모드인 게 걸리긴 했지만 그것도 경험으로 커버하면 될 터.

게다가 맛만 보는거다. 각 잡고 하는 것은 다음 기회인 것이다.

"그럼 1인 스타트 하고. 지형은... 대충 아무데나 고르고. 스탯은... 뭐 이번에는 그리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사막 1인 스타트가 결정되었다.

심지어 스탯은 재배만 높고 그 외엔 괴멸적인 수준.

그마저도 종족 보너스 덕이니 그야말로 망캐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빠르게 망하기 좋은 구성이었다.

맛보기만 아니었으면 바로 때려질 수준이었다.

"좋아 그럼 바로 스타트!... 어라?"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 버튼을 누르자 눈앞이 조금 흔들렸다.

그러면서 시야도 점점 흐려지는 것이 뭔가 이상했다.

'요즘 밤샘을 많이 해서 그런가?'

확실히 최근 무리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분명 피로가 쌓인 것이리라.

'이러면 게임은 다음에...'

컴퓨터를 끄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보다 몸이 기우는 것이 빨랐다.

'아.'

속으로 뱉은 짧은 단말마와 함께 의식이 완전히 끊어졌고.

"어?"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란도야 이게 맞냐아악?!"

나는 한 마리의 응애 꿀벌이 되어있었다.


2화

......!



...ㅅ...!



...히비스커스!



"응악!"



난데없이 귓가에 울린 큰소리에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아으... 누구야... 응?"



간만의 꿀잠을 방해하는 경우 없는 녀석을 향해 근엄한 중얼거림을 날리려는데 무언가 위화감이 들었다.



'내 목소리가 원래 이랬나?'



자랑은 아니지만 내 목소리는 살짝 중저음이다.



이렇게 가녀리고 어린 느낌은 절대 아니었다.



혹시 목이 맛이라도 간걸까. 아님 잠결에 잘못 들은걸까.



"나참.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거야!"



살짝 혼란스러운 상황에 날카로운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몸을 일으켜 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니 웬걸?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세상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나잇대는 대략 10대 초중반 정도에 갈색 세미 롱 헤어와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머리에 달린 더듬이 닮은 장식이랑 등 뒤로 얼핏 보이는 다채로운 색상의 벌레 날개 비스무리한 게 아니었으면 평범하게 예쁘고 귀여운 여자아이로 보였을 것이다. 코스프레인가 뭔가일까.



'아니지 눈색도 보면 평범한 건 아니지 않나? 그보다 얘는 어떻게 들어온거지?'



잠들기 전 마지막 기억이 맞다면 나는 분명 내 방에서 잠들었다.



그럼 이 아이는 무단침입인게 된다. 보호자한테 돌려보낼 필요가 있다. 안 그러면 뭔 누명을 쓰고 잡혀갈지도 모른다.



"저... 응?"



그런 생각에 아이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극심한 위화감이 나를 덮쳤다.



'여기 내 방 맞나?'



방 생김새가 묘하게... 아니 확실히 달랐다.



벽부터 바닥까지 내 방의 그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그리고 아까는 당황해서 눈치 못 챘는데 묘하게 시야도 낮고 침대 감촉도 딱딱한 듯 하면서도 끈적한 느낌이 드는...



"어, 뭐야?"



침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리고 한 번, 직후 놀라면서 또 한 번 당황했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니었다.



그니까 이렇게 시야를 성인 남자의 몸이 시야에 들어와야 하는데 웬 어린 여자애 몸만 보이고 있었다.



목소리도 그랬다. 이건 목이 맛이 갔다거나 잘못 들은 수준이 아니었다. 확실하게 내 목에서 나는 내 목소리였다.



"이게 뭐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의 반도 안 되는 낮은 시야에 경악할 새도 없이 거울을 찾아 헤맸다.



낯선 여자애를 신경 쓸 틈 같은 건 없었다.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긴건지 알아야!



"너 뭐하냐?"



얼음장 같은 목소리에 몸이 흠칫 떨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그 여자애가 팔짱을 낀 채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대답 안 해? 너 뭐 하냐고."

"어... 그..."

"하..."



당황스런 상황에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여자애가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분위기가 너무 냉랭해서 나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대답 똑바로 안해? 뭐 하냐니까?"

"어... 그..."



내가 말을 절자 여자애는 나를 더욱 거세게 째려봤다.



그에 내 몸은 더욱 움츠려들고 말았다.



이게 맞냐. 고작해야 열댓살 먹은 애한테 쪼는 게 맞는거냐 나 새끼야.



"그, 거울... 찾고 있었어."

"거울? 그건 또 왜?"

"내 모습 확인하려고..."



용기를 쥐어짜내 대답하니 여자애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웃음을 흘렸다.



유쾌함이나 즐거움보다는 어처구니없음에 가까운 웃음이었다.



"와 진짜 가지가지한다. 왜? 잠 좀 오래 잤다고 몸이 좀 컸을 것 같애?"



여자애는 그리 말하면서 바짝 다가와서는 나를 내려봤다.



그에 따라 내 시선도 자연스레 올라갔다.



이 정도 키 차이면 머리 하나보다 조금 더 큰 수준이다. 내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걸까.



"잘 들어. 꼴에 로얄 허니비라고 뭐라도 되는 줄 아나본데."



응? 방금 뭐라고?



"네가 뭔 짓을 해봤자 네 말을 들어줄 허니비는 없어. 그것도 그 귀한 로열 젤을 훔쳐 먹은 주제에 그 빈약한 몸을 아직까지 유지하고 있는 네 말은 말이야."



어... 잠깐만, 잠깐만.



"그, 내가 로열 허니비라고?"



"뭐? 허, 참. 설마 그래놓고서 자각도 없었던거냐? 그래! 자격도 없이 그 귀한 로열젤을 훔쳐드신 위대한 로열 허니비시지!"



아니, 미친 이게 맞냐 란도야?



.

.

.





그러니까 지금 상황을 요약해보면 나는 님월드라는 게임에 빙의한 것만 같다.



그것도 곧 추방되는 캐릭터로.



'진짜 이게 맞냐 란도야?'



몇 번이고 란도를 부르짖었지만 제작자가 내게 답해주는 일은 없었다.



그야 당연하지. 그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는걸.



'아니 그보다 로열젤 훔쳐먹은거야? 스토리에는 그런 소리 없었는데?'



혹시 세계관만 같고 스토리는 다르게 흘러가는걸까.



'그럴 수도 있어. 님월드 별명부터가 서사생성기니까.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기는... 개뿔이!'



내가 무슨 잘못이 있다고 이딴 상황에 내던져지는가.



심지어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내 평판은 그리 좋지 못할 게 분명하다.



어쩌면 아까 골랐던 대로 홀로 추방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스탯도 구릴 확률이 높다!



'이럴 줄 알았으면 4인 스타트 고를걸!'



심히 후회된다. 앞날이 막막한 느낌이다.



4인 스타트로 골랐다고 그대로 빙의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자꾸만 미련이 생기고 만다.



그런 내 우울한 기색을 느꼈는지 여자애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이제야 네가 뭔 짓을 했는지 깨달은 것 같네. 뭐, 그래봤자 늦었지만."



"늦었다고?"



"그래! 방금 로열 허니비 회의에서 네 추방이 결정됐어. 어디 사는 누구씨께서 처 주무시느라 빠진 덕이 컸지."



어머나 이미 결정됐구나? 이건 뭐 어떻게 할 수 있는게 없겠는걸?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 그동안의 정이 있다고 맨몸으로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기본적인 자원은 보태줄거야."



그것 참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래봤자 그렇게 많은 양은 아니겠지만.



"그럼... 언제 떠나는거야?"

"그래 이제야 협조적으로 나오시네. 뭐 그렇게 늦는건 아니고 지금 당장"

"뭐?"

"짐쌀 준비 하라고."





.

.

.





나는 힌창 공중에 살짝 뜬 채로 나아가는 여자애의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똑같이 공중에 살짝 뜬 채로.



'저 날개 같은 것도 장식이 아니었구나.'



여자애가 따라오라면서 공중에 붕 뜰 때는 솔직히 조금 당황했었다. 생긴 것만 봐서는 장식 같았거든.



그리고 뒤따라 걸으려고 하니 내 몸이 떠올라서 두번째로 당황했다.



알고보니 나한테도 날개가 달려있었다. 아주 컬러풀한 날개가. 더듬이도.



아무튼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면 내가 챙길 짐을 가지러 가는 중이다.



짐이 준비된 곳까지 거리가 꽤 되는 덕에 주변을 살펴볼 여유가 있었다.



'꼭 벌집 테마 같네.'



그 말대로 이곳은 벌집을 테마로 삼은 듯한 디자인이었다.



일단 방 형태부터 육각형에 바닥부터 천장까지 육각형 무늬가 없는곳이 없었다.



그 다음으로 시선을 끄는 것이 한가지.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허니비들이었다.



'귀여워...'



확실히 곤충계에서 한 귀여움 하는 꿀벌을 모티브 삼은 종족답게 하나하나가 귀여웠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 중학년 정도 되는 여자아이들이 샛노란 옷을 차려입은 채로 뽈뽈뽈 날아다니는 모습은 심장에 해로웠다.



'근데 내 덩치가 저거랑 비슷하다고?'



그럼 나도 저런 응애라는건가.



음. 그건 솔직히 뭔가 뭔가다.



겉모습은 응앤데 속은 아저씨라니. 우욱.



속으로 쓸데없는 생각을 훌훌 털어내고 다시 주변을 살피는데 집중했다.



'어라?'



그런데 어느부턴가 주변 생긴게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디자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저기 금간 곳이나 흙먼지가 묻어 있는 것이 꼭...



'최근에 습격이 있었나 보네.'



그것도 이렇게 흔적이 많이 남아 있을 정도면 규모가 꽤 컸던 것 같다.



'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겠지.'



이제 서로 볼 일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게 아무 말 없이 나아가기를 잠시.



우리는 한 방 앞에 도달했다.



"여긴..."



"여기서 원하는대로 가져가."



'하, 이럴 줄 알았다.'



도착한 곳은 반쯤 타버려 뼈대만 간신히 남아 있었다.



아마도 습격의 여파를 정통으로 맞은 듯 했다.



이런 상태여서야 안에 있는게 무사할리가 없었다.



이러니 안 좋은 이유로 추방되는 녀석에게 챙겨준다고 하지.



"응? 뭐해? 마음껏 챙기라니까?"



"알았어..."



솔직히 기분 나쁘긴 하지만 지금 아쉬운건 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뭐라도 챙겨야지.



속으로 투덜거리며 안에 있는 것들 중 그나마 멀쩡한 것들을 꺼냈다.



그래봐야 씨앗 몇개랑 꿀 두어 병이 고작이었지만.



길안내 해준 여자애가 비웃은 것이 심히 속을 긁어댔다.



'오냐 딴건 몰라도 넌 꼭ㅈ후회하게 만들어줄게.'



속으로 그리 다짐하고 있을 때 여자애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 쳤다.



"맞다! 나갈 때 그것도 가져가."



"그거?"



"그러니까, 아. 마침 저기 오네."



여자애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따라가보니 허니비 하나가 이쪽으로 포르르 날아오고 있었다.



"넌..."



어느새 내 앞까지 날아온 허니비는 나와 시선을 맞추고는 해맑게 웃었다.



"저랑 같이 가요 엄마!"



뭐?



"엄마? 내가?"



"? 네!"



이게... 뭔 소리지?



"뭘 그렇게 놀라? 네가 낳은 딸이잖아?"



"네? 엄마 알에서 태어난 엄마 딸이에요?"



그게 무슨 소리니 쾌락 없는 책임아.


3화

ㅡ퉁!



바닥이 울리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고개를 드니 내 딸임을 주장하는 허니비ㅡ 릴리가 바구니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도 살짝 기지개를 켜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래의 바다가 보였다. 사막이었다.



'염병.'



솔직히 예상이 가긴 했다.



'좀 제대로 된 데로 고를걸.'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이미 늦었다.



여기가 우리가 평생을 지내게 될 곳이었다.



아주 머나먼 여정을 떠나지 않는 한.



"릴리. 이제 내리자."



"네!"



릴리의 활기찬 대답을 들으며 바구니 밖으로 꼬물꼬물 기어나왔다.



아주 친절하게도 내 몸에 딱 맞는 사이즈였기에 나오는 데에 무리는 없었다.



'에혀.'



속으로 한숨을 삼키며 바구니에 매달린 천을 회수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건 열기구 비스무리한 무언가였다.



우리끼리 보내면 분명 좋은 데로 골라갈거라 생각했는지 이런 식으로 보내주더라.



참 끝까지 엿을 먹여주는 녀석들이었다.



'그래봤자 내... 이 몸 원 주인 업보지만.'



억울함에 결국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걸 들은건지 릴리가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엄마, 화났어요?"



"응? 아, 아니야. 그냥 다른 것 때문에."



아니, 얘 지분도 조금 있기는 한데...



이 릴리라는 아이는 아무래도 내 딸이라는 것 같다.



보니까 허니비는 여성만 있는 종족이다.



그중 번식이 가능한 건 어릴때 로열젤을 먹으며 자란 개체들.



그러니까 로열 허니비다.



참고로 번식 과정에 수컷이 필요 없다.



다시 말해 단성 생식 하는 종족이라는 소리다.



그리고 나는 로열 허니비다.



즉 릴리는 내가 낳은 아이일 확률이 높다.



'나한텐 그런 기억이 없어서 문제지.'



릴리를 낳은 건 이전 몸 주인이다.



나랑은 관계 없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오서 나와 릴리는 반쯤 남남이다.



'그런데 저렇게 잘 따르는데 딱 자를 수도 없고.'



참 복잡한 상황이다.



"짐 다 챙겼으면 물 있는 곳부터 찾자."



"네!"



이게 게임이었다면 물가까지 찾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물이 없으면 파국이다.



그렇게 시작된 물 찾기는 의외로 빠르게 끝났다.



착륙한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적당한 강줄기가 있던 것이다.



"강이다!"



물이 그렇게 좋은지 포르르 날아드는 릴리.



"후흣."



그 묘한 귀여움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차 이럴 때가 아니지."



나도 재빠르게 릴리의 뒤를 따랐다.



그러고는 강물에 내 모습을 비춰보았다.



뒤끝이 뭐가 그리 긴지 끝까지 거울 한번 안 보여주더라.



그래서 내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게 수면에 비친 내 모습은 단적으로 말해서.



'예쁘고 귀엽네.'



딱 그 말이 어울렸다.



허니비의 공통점인 듯한 금빛 눈과 신비로운 은발이 말랑뽀짝한 얼굴과 더해져 파괴적인 귀여움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기어 화룡점정으로 조그만 더듬이가 더해지니 심장 폭격기가 따로 없었다.



'확실히 이렇게 보니까 작긴 하네. 릴리랑도 닮았고.'



쪼매난 릴리랑 눈높이가 비슷한 부분에서 대략 깨닫긴했는데 뭔가가 뭔가인 느낌이었다.



그것과는 별개로 생김새는 매우 흡사했다.



차이가 있다면 헤어스타일이려나. 나는 길게 늘어뜨린 모양새고 릴리는 반 땋은 단발이니까.



"좋아 얼굴 확인 여기까지 하고! 릴리 우리가 이제부터 뭘 해야할지 알고 있어?"



"음. 꿀을 모으나요?"



아쉽게도 오답이었다.



나름 길게 고민하면서 내놓은 답이었는지 틀렸다니까 금세 시무룩해졌다.



이건 조금 미안한걸.



"가장 먼저 해야할 건 집을 마련하는 거야."



생존의 기본은 의식주의 마련에 있다.



특히나 사막 같은 환경에서는 더더욱.



낮에는 밑도 끝도 없이 덥고 밤에는 죽도록 추운 게 사막이니까.



"그러니 우선 재료부터 구해야 하는데..."



"재료는 이미 있어요!"



"응?"



"밀랍을 쓰면 돼요!"



밀랍이라.



확실히 벌은 밀랍을 집을 짓는다고 들은 적 있다.



그건 허니비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따로 밀랍을 챙겨오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만들면 돼요! 잘 봐요!"



릴리는 당당히 외치고서는 자세를 잡았다.



밀랍을 만든다고?



혹시 내가 모르는 개쩌는 능력이 있는건가?



그런 막연한 기대감을 안고 바라보자 릴리는 뿌듯한 미소와 함께 입을 벌렸다.



그리고.



ㅡ카아아악 퉤!



침을 뱉었다.



"응?"



뭔가... 이상한데? 이게 맞나?



내 혼란을 아는지 모르는지 릴리는 막 뱉은 침을 손가락으로 집어올리고는 나한테 들이밀었다.



"그, 릴리? 혹시 내가 너한테 잘못한 거라도 있니?"



"움? 아뇨?"



"근데 왜 침을 뱉고 그걸 나한테 들이미는..."



"침이요? 이건 밀랍이에요!"



릴리는 그리 말하며 손가락을 더욱 들이밀어서는 내 뺨을 콕 찔렀다.



반사적으로 기겁했지만 예상과는 다른 감촉에 살짝 벙쪘다.



그러니까 침의 끈적하면서도 미끌한 감촉 대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릴리의 손가락을 그제서야 살펴보니 확실히 침이라기에는 밀랍에 가까운 무언가가 굳엊있는 것이 보였다.



"다들 이걸로 집을 만들어요!"



"그, 그렇구나?"



그러니까 열기구 타고 오면서 본 그 웅장한 성채가 죄다 응애들 침으로 만들었다는거지?



음. 더 이상은 생각하지 말자.



"아무튼 이걸로 집을 만들 수 있다고?"



"네!"



"그래. 그럼. 집, 만들자..."





침으로 집을 만드는 것은 상당히 고역이었다.



그야 침을 계속 뱉고 그게 또 굳기 전에 모양을 잡을 필요가 있으니까.



거기에 사막의 열기가 합쳐지면 탈수 증상이 올수도 있었다.



뭐, 나도 침 밀랍 생산이 가능했던 것도 있고, 근처가 수원이라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바위 그늘에 붙여 지은 집은 그러니까.



'못 생겼네.'



드럽게 못 생겼다. 뭔 씹디 뱉은 껌을 뭉쳐 만든 모양새였다.



'아니 거기도 이런 식으로 만든 거라매.'



혹시 릴리 저 순수한 아이가 뭔가 잘못 알고 있던걸까.



"엄마 모양 다듬는건 언제 해요?"



아니구나. 따로 다듬는 작업이 필요했던거였어.



"아냐. 당장은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래. 외관은 당장 중요한 게 아니다.



그보다 먼저 챙겨야할 게 있었다.



가구는 아니다. 그런건 천천히 추가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의식주의 식의 기반을 마련해야했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슬쩍 읽어둔 배경에 따르면 우리는 꿀을 먹어야 돼.'



반드시 꿀만 먹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음식을 먹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일정량 이상의 꿀을 섭취할 필요가 있는 것뿐이다.



다시 말해 일일 꿀 섭취량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려면 꽃을 심어야 하는데.'



문제는 꽃이 피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게임에서야 심고 몇분 걸리면 된다지만 이건 현실이니까.



'일단 심어보기라도 할까.'



한번에 다 심었다가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 적당량 덜어서 심기로 했다.



릴리도 꽃을 심는다니 신나서 씨를 이리저리 뿌리고 있었다.



그 대부분이 모래라서 그렇지.



"저러다 싹도 안 나면 크게 실망할텐데."



어린애가 축 처질걸 생각하니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일단 나라도 제대로 심자.'



다행히도 근체어 널린 바위 주변에는 흙이 제법있었다.



혹시나 싶어 슬쩍 파보니 양은 꽤 되어보였다.



'막 그렇게 황량한 지역은 아닌 모양이야.'



부디 땅에 양분이 조금이라도 있길 기도하며 씨앗을 심었다.



강에서 물을 떠와 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음, 당장 가진 꿀이 많지는 않으니 꿀 찾아 삼만리는 준비해둬야 하나?'



최대한 아껴먹으면 좀 더 버틸 수는 있겠지만 결국 꽃이 피기 전에는 강행군이 필요할 수도 있을 터.



'막막하네.'



그 와중에 릴리는 뭐가 좋은지 콧노래까지 부르며 씨 뿌린 곳에 물을 뿌리고 있었다.



'어린애는 좋겠네. 큰 고민도 없어서... 음?'



릴리의 재롱 아닌 재롱 구경하다가 문득 이상한 게 눈에 들어왔다.



'저거 새싹 맞지?'



살짝 떠 있는 릴리의 발치에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얼핏 보이고 있었다.



'그러고보니 허니비는 재배 스탯이 월등히 높았자?'



설마하는 마음에 내 밑을 내려다보았다.



음.



란도야 이건 맞다. 아주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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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고 감상 남겨주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