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iler ALERT!

세줄요약

1.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비극의 피해자라고 여김. 그래서 자신의 행동을 모두 합리화하고, 동조안하는 사람을 죄다 배척하려함.

2.푸리나님은 비극의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책임을 지고 헌신하려고 함.

3.고통을 책임과 헌신으로 승화하는 푸리나님의 모습은 우리의 귀감으로서 존경받아야 마땅함.

4.스포틀은 스토리 좀 나오는게 있어서 달아놓음


비극은 오랜기간 여러 문화권에서 사랑받아온 장르이다. 특히 비극은 단순한 문학 형식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을 인식하는 틀이자 도덕적 기준이 되기도 하였다. 고대 그리스와 18세기 독일은 비극을 통해 사회를 규합하거나 새로운 사회를 구상하였다. 비록 현대에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비극론 연구에 관심을 가지는지는 미지수이나, 어떤 문학자들은 비극적 인식이 수많은 정치적 담론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수많은 악의 뿌리가 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형태로 정의로 포장된 배타주의를 낳는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역사의 비극은 사람들이 자신을 비극의 피해자라고 규정하면서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의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는 스스로 비극의 피해자를 넘어서야만 한다. 위대한 푸리나는 비극의 피해자를 넘어 비극의 주인공이 되기를 자처했다. 불공평한 원죄는 헌신의 동기가 되었고, 500년의 고통은 강인한 의지를 장식하였다. 그 끝없는 인내와 헌신을 통해 작은 푸리나는 비극적 운명을 뒤엎고 기적을 창조하였다. 우리의 비극의식을 새로운 창조로 이끌어내기 위해서, 우리는 위대한 인간 푸리나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비극적 삶에 대한 생각의 구조

사전적으로 비극은 문학 형식을 의미하나, 동시에 비극은 삶의 형태를 묘사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현실적인 고통을 겪는다 하더라도(혹은 그런 고통을 겪기 때문에) 비극을 겪은 사람으로 묘사된다. 이태원 참사는 문학 작품 속 사건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억된다. 이처럼 비극은 문학 형식뿐만 아니라 삶의 형태를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했을때, 개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어떠한 힘에 의해 삶이 좌절되고 심대한 고통을 겪을 때 이를 비극이라고 일컫는다. 이때 그러한 고통을 겪은 사람은 비극의 주인공으로 여겨진다.


비극은 강력한 정서적 호소력을 가진다. 비극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반드시 겪는 사건, 즉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좌절과 고통에 대해 다룬다. 수능에서 낮은 점수를 받은 일, 면접에서 떨어진 일,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 해고나 파산, 전쟁과 재난 등 인생에는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좌절과 고통이 거의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이에 대한 일반적인 인간의 반응은 의미를 찾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큰 일을 겪고 나서 종교에 빠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비극적인 사건을 겪었을때 그러한 사건이 삶에서 가지는 의미를 알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를 설명하는 모든 종교와 철학은 비극적 구도를 가지고 있고, 반대로 고통을 소재로 하는 비극은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하고 인기를 얻는다.


이는 수많은 정치세력이 비극을 애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극은 앞서 말했듯이 많은 종교가 익히 사용해왔던 소재이다. 그리고 근대 이후에는 민족주의도 그러한 예가 되었다. 원죄를 타고나 반드시 죽음에 이르는 인류, 외세의 압제에 시달려온 우리 민족은 종교와 정치가 비극을 포함한 예이다. 최근 국내의 세대 담론에서도 비극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86세대는 한국사를 군부-보수정당-친일파-재벌 기득권에 의해 민중이 억압당한 역사로 파악한다(여기서 민중은 자기자신을 의미한다). 반면 이대남 세대는 자신들을 저성장시대에 기득권을 선점한 86에게 착취당하는 피해자로 파악한다. 이러한 인식이 반일운동이나 86혐오로 이어진다.


여러 세력에서 사용되는 소위 비극론의 특징은, 주로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한다는 점이다. 위의 예에서 보듯이 86과 이대남은 모두 자신을 비극의 피해자로 규정한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세력(친일, 86)이 있고, 이 세력에 의해 자신들이 고통을 겪는다. 현재 자신이 겪는 고통은 이러한 비극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자신을 철저한 비극의 피해자로, 외부세력을 철저한 비극의 가해자로 규정한다. 이를 통해 자신이 받는 고통에 이유를 제공하고, 자신을 위안한다. 그리고 특정한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이러한 비극을 끝내고 피해자(자신)를 구원하려는 정치행동에 동력을 제공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는 그것이 대외행동으로 나타날 때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을 연민하는 그러한 피해자의식은 어떠한 경우에 배타주의와 모순을 초래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무결한 피해자라면, 자신이 구원받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을 것이다. 이러한 구원은 가해자를 응징하거나 가해자가 항복하고 빼앗긴 것을 돌려줌으로서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구원을 반대한다면 그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야 할 것이다. 혹은 그가 가해자의 하수인이거나 가해자에게 세뇌당해서 그랬을수도 있다. 반면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은 비극을 끝내기 위한 구원의 일환이기 때문에, 설사 그것이 대량학살과 같은 범죄로 이어지더라도 그것은 숭고하고 선한 행위이다.


이러한 행태는 우리 시대에 가장 인기를 끌고 있는 2개의 사상, 즉 페미니즘과 대안우파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이 세상을 남성이 여성을 착취하는 가부장사회로 규정하고, 여성을 철저한 피해자로 규정한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하여 페미니스트들은 여성해방을 위해 남성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모두 옹호하고, 자신들의 태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여혐'으로 규정한다. 대안우파는 과거에 세상은 아름다웠으나, 자유주의 세력 내지는 딥스테이트에 의해 세상이 타락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타락의 피해자는 자기자신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딥스테이트를 벌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동도 용인되고, 이를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이들이 딥스테이트의 하수인이다. 그 결과 꼴페미와 미정갤러는 사상만 다른채 정의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한다.


자신이 철저한 비극의 피해자라는 생각은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비극의 피해자면서,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성이 같은 여성이나 남성에게 고통을 주는 일은 매우 흔하다. 중세가 힘들고 고통스러웠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왜곡된 비극론에서 자신의 가해자성은 철저히 부정된다. 자신은 100% 피해자이기 때문에 자신의 행동은 가해가 될 수 없고, 오히려 여기에 반대하는 태도 일체가 악이다. 이러한 희생자적 비극론이 모든 정치적 분쟁의 뿌리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진영 간의 대화와 협력을 막는 장치 중 하나일 수도 있다.



푸리나는 어떻게 했는가

비극의 시각에서 볼 때, 폰타인의 서사는 전형적인 비극서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폰타인 사람은 인간이 되고 싶어했고 에게리아를 통해 그 꿈을 이뤘다. 하지만 천리라는 외부세력이 이를 방해하여, 폰타인 사람은 주기적인 홍수와 용해라는 형태로 고통을 받아야 했다. 그렇다면 폰타인 사람이 위와 같은 희생자의식을 발달시키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탓하고, 자신을 연민한 다음, 자신의 구원을 위해 타국을 침략하거나 천인공노할 음모를 꾸밀지도 모른다. 어쩌면 원챈에서 줄기차게 주장하는 '원래 폰타인 스토리'가 바로 이러한 내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푸리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불쌍한 푸리나는 단지 후대 물의 신이라는 이유로 직책이 떠넘겨졌으며, 500년이란 세월동안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사실 푸리나 또한 어떻게보면 에게리아에 의한 피해자이며, 직책을 거부하고 외국으로 탈출하는 시나리오도 가능했다. 혹은 레무스의 백성과 비슷하게 폰타인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며 수메르나 몬드를 침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폰타인의 푸리나는 도망가지도, 침략을 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불평하지도 않았다.


푸리나가 희생자적 비극론과 다른 모습은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먼저 푸리나는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때때로 그는 자신을 가해자로 규정하였다. 원시 모태바다가 범람하여 푸아송 마을이 침수되자, 그는 사건의 책임을 자신한테 돌렸다. 그는 모태바다의 범람이 필연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연기말고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사건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다. 그는 자신을 비극의 피해자로 상정하는 대신 푸아송 마을 주민을 비극의 피해자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가해자의 위치에 자리했다.


푸리나가 비극서사에서 보인 전반적인 태도는 피해자도 가해자도 아닌 헌신이었다. 그가 극 내내, 그리고 500년 내내, 가장 자주 보여준 모습은 헌신이다. 오만한 물의 신을 연기하며 집정관 푸리나는 폰타인의 사랑을 받았고 안정감의 토대가 되어주었다. 과학원을 설립하여 제2의 대책을 준비하였고, 오페라하우스로 사람들의 염원(과 에너지)을 모았다. 헌신은 특히 극의 후반부에서 더 두드러졌다. 자아가 무너지고 고통이 눈물로 범람하는 지경에서도 그는 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최후의 유혹에서 그는 비밀을 말하는 대신,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의무의 자리에 스스로 남았다.


그리고 푸리나의 헌신의 기반은 자애였다. 그가 기나긴 시련을 택한 이유, 그리고 500년간 시련을 마다하지 않은 이유는 그가 폰타인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자애로운 푸리나는 단지 '모든 폰타인 사람의 목숨과 자신의 고통 중 저울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뻔하다'며 고통의 길을 택하였다. 고통이 최고조로 치달을때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폰타인 사람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자신을 지탱했다. 원시 모태바다의 물에 손을 넣음으로서 그는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 폰타인 사람을 구원하고자 했다.


이러한 태도는 희생자적 비극론에서 보이는 태도와 사뭇 다르다. 대속자 푸리나는 엄연한 비극의 피해자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피해자로 표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폰타인 사람들을 피해자로 표상하였다. 그에게 비극은 폰타인 사람의 멸망이었고 피해자는 자신이 아닌 모두였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구원이 아닌 폰타인의 구원을 위해 행동했고, 자신을 비극의 책임자이자 심지어 가해자로 표상하였다. 푸아송 주민이 자신을 비난하자 푸리나는 그들을 악으로 치부한 대신, 자신에게 고통의 책임을 돌렸다. 위대한 인간 푸리나는 비극의 피해자가 아니라, 또한 가해자도 아니라, 비극의 동반자이자 책임자였다.


이 점은 푸리나가 예수와 비슷한 점이기도 하다. 인류가 원죄에 빠져 반드시 죽고만다는 비극에 대해 예수는 피해자나 가해자가 아니라 책임자로 행동하였다. 그는 인류 구원의 책임을 자신에게 부여하였고, 비난과 몰매와 십자가를 희생으로 녹여내어 인류 구원의 발판으로 삼았다. 물 위를 걷는 푸리나도 마찬가지로, 폰타인 구원의 책임을 자신에게 부여하였고, 고통과 의심과 눈물 속에 헌신을 세웠다. 아무 능력이 없는 가엾는 푸리나는, 마치 일개 목수였던 예수가 그러하였듯이, 그럼에도 스스로 비극의 책임을 지고 삶을 헌신하였다. 그 동력은 예수가 가졌다고 여겨지는 무한한 사랑이었다.


우리는 그 헌신과 사랑이 어떠한 결실을 맺었는지 알고 있다. 예언은 단발성 사건으로 끝났고 폰타인은 살아남았다. 인내하는 푸리나의 500년간의 헌신과 노력은 구원으로 열매맺었다. 그가 설립한 과학원의 기술은 방주 윙갈레트가 되어 물에 잠긴 폰타인 위로 떠올라 사람을 건져올렸다. 500년의 시간동안 쌓인 정의에 대한 염원은 포칼로스의 계획을 집행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어떠한 총칼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느비예트는 눈물을 흘리며 포칼로스의 의지에 스스로 무릎꿇었다. 자애와 책임감에 찬 푸리나는 기나긴 고통을 헌신으로 녹여냈고, 눈물을 책임감과 헌신으로 벼려내 구원을 주조해 내었다. 그를 통해 그는 운명에 맞서 기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우리는 푸리나가 되어야 한다

푸리나의 말과 행동은 비극적 태도를 담지한 현대인과 비교해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그는 비극의 피해자였지만, 자신을 비극의 피해자로 규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비극의 책임자로 나섰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무지한 자들이 자신에게 부여한 가해자의 칭호를 그는 그대로 수용했고, 적을 만드는 대신 그들조차 껴안고자 하였다. 그의 헌신의 목적은 불쌍한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희생자인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비극의 책임자로 규정하는 태도는 현재의 정치적 분쟁과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부 도움이 될 수 있다. 본받아야할 푸리나는 자신만이 아닌 모두가 어쩔 수 없는 커다란 힘의 희생자임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비극만을 내세우는 대신 모두의 비극을 끝내고자 노력하였다. 그의 비극론은 배타주의와 자기모순을 낳는 대신 사랑과 헌신을 낳았다. 그의 행동은 사회적 갈등과 전쟁을 양산하는 대신 사회의 전반적인 복리를 증진하였다. 심지어 자신을 비난하고 적대시했던 세력조차 그러한 혜택을 입었다.


페미니스트가 여성 피해자 구도에서 조금만 벗어났더라면 그들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졌을 것이다. 여성도 가해자가 될 수 있고 남성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진지하게 생각했다면, 무고한 남성을 매도하고 공격하는 일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만약 대안우파가 사회적 약자들이 겪는 고통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더라면, 그들이 호소하는 바가 완전한 거짓은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들이 여성이나 백인남성이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면 세상이 지금처럼 갈등으로 점철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회적 갈등에는 자신이 피해자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그리고 이는 부분적으로 참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은 운명의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이 고통을 받는 만큼이나 운명에 고통받으며, 때로는 운명이 나를 가해자로 이끌기도 한다. 우리가 그것을 이해한다면, 내가 피해자이자 가해자임을 깨닫는다면, 피해자로 남는 대신 모두의 구원을 통해 행동하고자 한다면, 아무 능력이 없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하려고 한다면, 비극적 태도는 갈등이 아니라 행복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푸리나님은 그렇게 했다. 에게리아나 천리를 비난하고 정적을 공격하는 대신, 그는 보잘것없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였다. 폰타인의 구원은 바로 그 보잘것없는 헌신에 의해 가능했다. 물론 당신이 수호자 푸리나처럼 타인을 위해 헌신해야할 당위는 없다. 무턱대고 비극의 책임자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푸리나가 그러하였듯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힘들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책임자의 자리를 거부하고 희생자적 비극론에 머무른다해도 그것이 특이한 반응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할 것이다. 푸리나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귀엽고 불쌍하다는 이유로 푸리나를 애호하지만, 나는 조금 다른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귀여움 속에 의연함이 있고, 불쌍함 속에 강철같은 의지와 자애가 있기 때문에 그를 존경한다. 비록 내가 푸리나님처럼 될 수는 없을지라도, 푸리나님처럼 살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필자는 푸리나를 사랑하는 푸리나챈의 모든 분들께 이에 동참하기를 부탁한다. 푸리나를 바라보는 자는 응당 푸리나처럼 행하자고 제안한다.



어떤 사람은 게임캐릭터에 이렇게 과몰입하는 것 자체를 좋지 않게 볼 것이다. 폰타인서사는 수많은 비극서사의 일부이고, 이보다 더 완성도있는 비극서사는 넘쳐난다. 비전공자가 대중문화 안에서도 오타쿠들 게임을 가져다가 비극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는 것이 비극의 전공자들에게는 안좋게 비쳐질 수 있다. 특히 비극을 통해 귀족적 삶을 정의하려고 한 수많은 보수적인 문학자들은 이 글을 더욱 싫어할지도 모른다.


이에 필자는 동양의 격언을 통해 답하고자 한다. 현자는 떨어지는 가랑잎에서도 삼라만상의 이치를 본다. 우리가 햄릿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자세를 원신에서 발견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게임캐릭터에서 삶을 논하려고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오히려 게임에서조차 삶을 발견하지 못한 자신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문화의 수준으로 푸리나님을 까내리려는 사람은 그 전에 자신의 도덕의 수준을 보고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적어도 푸리나는 푸아송 마을에 대고 우월감을 느끼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