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글 모음


*간략히 썼기에

약간의 누락이나 오류가 발생 할 수 있다*



1. 로스바흐와 로이텐 이후

1757년

프리드리히 2세는 로스바흐 전투로이텐 전투에서 승리를 이뤄냄과

프로이센 보병의 우월성도 함께 보여줬다


프라하 전투와 콜린 전투에서 얻은 탄약이 부족한 순간 주도권을 빼앗긴다는 것과

기병대의 돌격으로 상대 군의 작전을 방해하여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술을 보여줬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되찾을 때까지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오스트리아에 큰 피해를 주었지만, 오스트리아 군대를 완전히 파괴할 기회를 놓쳤다

그래도 오스트리아의 진격을 막아냈고 러시아도 보급 문제로 진격을 안 할 것 같았으니

프로이센은 이 틈을 타 스웨덴으로 진격한다


대북방전쟁의 여파 탓인지 스웨덴을 쉽게 격퇴해 나아갔고

스웨덴 포메라이나의 수도인 슈트랄준트까지 봉쇄한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왕 조지 2세는 클로스터-체번 평화협정을 깨고

하노버는 다시 7년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한편, 영국은 북미에서 패배하고 있었지만

본토에선 안전성을 확립되어가고 있었다


1757년 8월

뉴캐슬과 피트가 연이어 이끄는 정부가 몰락하고 난 뒤

두 사람은 정치적 제휴에 합의하고 연립정부에 구성하게 된다


이 정부가 나타난 후로 전쟁에 확고한 방향을 제시했는데

유럽에서는 하노버를 지키려는 뉴캐슬

프랑스의 식민지를 점령하기 위해 해군력을 쓰겠다는 피트

이중전략은 향후 5년간 영국 정책을 지배하게 된다



2. 밀리는 프로이센

1758년 1월

빌겔름 페르모르가 지휘하는 러시아 군대는 다시 동프로이센을 침공한다

그러나 그곳에 있는 프로이센 군대는 병력이 적어 저항하지 않았고

프리드리히는 이곳을 점령하는걸 막아내는 것보다 오스트리아를 평화 협상으로

이끌어 내는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동프로이센에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3월

프랑스는 로스바흐 전투의 패배로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줄이겠다고 했고

(베르사유 조약)


4월에는 영국 - 프로이센의 동맹을 공식화하면서

강화된 지원금과 다른 별도의 평화조약을 맺지 않기로 한다

그리고 프랑스가 유럽 전선에 관심을 줄인거지 아예 참전을 안 한 건 아니기에

라인라트 부근에 9,000명의 군대를 배치했다

프리드리히가 계획했던데로 슐레지엔에서 오스트리아를 물려냈고

이제 올로모우츠를 점령할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5월 20일

프리드리히가 예상했던 것보다 강한 저항을 하면서 버텨냈고

이 틈을 타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에 대항하기보다 보급을 끊어

포위 공격을 중단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올로모우츠 공성전)

실제로 레오폴트 요제프 다운은 소규모 기습전을 벌여 보급을 차단했고

전쟁에서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던 프리드리히는 보급부대를 대규모로 편성

이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규모로 편성했을 때의 단점은 들키기 쉽다는 거였다

다운 백작은 빨리 보급부대를 격퇴하지 않으면 올로모우츠가 뚫릴 거라고 생각했고

바로 에른스튼 기데온요제프 폰 지스코비츠 장군을 보내 올로모우츠의 생사가 걸린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

1758년 6월 28일

호송대는 이른 아침에 도착했고 오스트리아는 선두 마차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대대가 적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전찰 나갔지만 포병에 의해 패주했고

길가에 포병 포대를 형성하며 반격을 하였다


5시간이 지나 프로이센이 점차 전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기데온은 후퇴하려고 명령했고

빌헬름 폰 모젤은 빨리 따라잡으라고 하였으나 충분한 기병대가 없어 

아무 문제 없이 후퇴에 성공한다


기데온은 후퇴하였지만, 프로이센보다 입은 손해가 적었고

무엇보다 올로모우츠로 갈려고 하는 작전을 막아냈다

6월 30일에도 전투는 계속 되었다


오스트리아군은 숲으로 둘려쌓인 지형을 활용해 매복하기로 했고

지스코비츠는 먼저 도착해 도로의 왼쪽 숲에서 적을 기다렸고

기데온은 전투 중반에 반대편에서 나와 혼란을 주기로 했다


먼저 선봉대가 도착하여 진군하였으나 지스코비츠는 중요한 부대가 아니라고 판단해 내보냈고

호송대의 본대가 지날갈 때 기습하였고 지스코비츠는 3 대 1의 열세에도 지형을 잘 선정해

성공적으로 싸우고 있었고 기데온 부대까지 전투에 가세하자 승패는 결정되었다

(돔슈테트 전투)

전투를 개별적으로 보자면 프로이센에 엄청난 피해는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프리드리히에게 보급에 관한 문제를 안겨줘서

꽤 성공적인 승리였다


4,000대로 구성된 마차 중에서 고작 100~200대만 목적지에 도달했을 정도니

탄약 부족으로 올로모우츠 공성전을 중단하고 슐레지엔으로 후퇴한다

올로모우츠에서 좌절한 프리드리히는 보급 문제를 해결한 러시아의 진격을

막아내기 위해 동프로이센으로 진군한다


1758년 8월 15~24일

러시아는 브라덴부르크 국경에 도착하여 퀴스트린을 포위하며 불태웠고

프리드리히는 퀴스트린 근처에 있는 조른도르프에 가서 유리한 위치를 점령했다

8월 25일

프리드리히의 보병은 젊은 징집병으로 구성된 러시아의 정찰병을 공격을 시작으로

프로이센의 기병대와 러시아의 기병대가 충돌했다


러시아 기병대는 프로이센과 대치했지만 먼지나 포연에 의해 아군을 프로이센군으로

착각하고 포격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엄청난 좋은 기회에 프리드리히는 가만히 있을 수 없았다

바로 프리드리히의 특기인 측면공격을 해 러시아 좌익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조른도르프는 늪으로 유명한 곳이라 작전을 수행한 순간 후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러시아의 자리 잡던 지형은 우익은 강, 좌익은 고지라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라

프로이센은 불리한 지형과 거센 러시아의 저항으로 포위할 수 없었고

전투는 극도로 좁은 전장에서 정면에서 충돌하는 유혈사태로 이어졌다

오래 기간 진행된 전투로 화약은 다 떨어졌고 백병전으로 계속 싸웠다

일부 프로이센 대대가 지친 기미를 보이자 프리드리히가 직접 이끌고

전투에 나셨으나 새벽부터 오후 9시까지 이어진 전투 탓에

더 계속하면 무리라고 판단, 결국 프로이센은 철수하게 된다


이렇게 러시아가 점령하긴 했다지만 며칠 지나자 바로 란츠베르크로 퇴각하고 오스트리아와 합류는 실패했다

(조른도르프 전투)

양측 다 승리를 주장하여 명백한 승자는 누구인지 갈리나

확실한건 그 누구도 이득을 얻지 못했다


러시아의 사상자는 16,000명에 달했고 포로 2,800명과 정찰 부대 80%가 전멸당했다

프로이센은 36,000명 중 12,800명을 잃었고 대부분 숙련병이었다

그 후, 프리드리히는 작센으로 향하여 다운을 무찌르기로 했다

엄청 신중했던 다운은 그대로 베를린으로 가면 저항 때문에 힘들다고 생각해

드레스덴을 점령하기로 했다

 

대왕이 작센으로 오자 다운은 바우첸의 동쪽으로 9km 정도 떨어진

호르키르히 마을 동쪽에 참호를 파고 진지를 구축하며 프로이센이 오길 기다렸다

프리드리히는 맘 같아서는 진지를 치고 달려다가고 싶었으나 수적으로 우세해, 도발을 해 먼저 공격하길 희망했다

그러나 도발에도 넘어오지 않자 장군의 만류를 뿌리치고

다운과 가까운 위치에다가 진을 쳤다


10월 14일

어두운 밤과 안개를 엄폐물로 삼고 통제와 은신이 용이하도록

소규모 총격 부대로 편성된 오스트리아군은 5시를 알리는 종이 친 순간

프로이센 포대를 공격하여 방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프로이센군이 동쪽만 경계하고 있었기도 했고 소심하기로 소문이 난 다운이

이렇게 과감한 작전 펼쳤으니 프로이센은 적을 맞서 애썼으나

막 잠에서 일어났고 안개가 가득해서 오인사격하는 일이 벌어졌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마을에 불을 지룬 후 텐트 밧줄을 끊어

텐트가 잠자는 병사 위에 떨어지게 한 다음 텐트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병사들을 찔러 죽이는 전략까지 펼치기 했다

프로이센은 6시가 되어야 반격할 수 있었다

서둘러 대형을 구축한 뒤 기습해온 적을 어찌저찌 물리쳤으나

다운이 바로 포격을 퍼붓게 하였고 호르키르히는 화염에 휩싸였고

프로이센 우익 전체가 막대한 피해를 보게 되었다

프로이센 우익을 지휘 맡고 있던 키스 공작은 상황이 심각한 걸 그 누구보다 잘 깨달았다

재빨리 병사들을 수습하고 오스트리아군을 마을에서 밀어내기 위해 돌격했으나

포병으로 맹렬한 반격을 해왔고 본대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상황이 긴급이다 보니깐

혼란에 빠져 아무런 응답을 하지 못했다


결국 키스는 심장에 총탄이 관통당하는 바람에 전사하게 되었고

그 뒤 지텐의 기병대가 도착해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냈다

단순한 교전이라고 생각했던 프리드리히는 키스의 전사 소식으로

이제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우익으로 급파해 우익을 붕괴하는 걸 막게하고 자신도 전선으로 가

군대를 수습하려고 애썼고 모리츠 폰 안할트 데사우도 기병대를 이끌고

역공을 가했지만, 오스트리아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똑같이 기병대로 역습과 보병대로 반격까지 하니

안할트 데사우는 큰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대왕은 호크키르히 마을로 진격했으나 기병대에 의해 공격당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자이틀리츠 기병대가 격퇴하긴 했지만 상황은 영 좋지 않았다

오전 8시가 되어 안개가 풀리긴 했지만 작전 지도만 봐도 프로이센은 둘러싸인 상태인데 가다

오스트리아는 높은 고지에서 전열을 정비한 탓에 측면 공격하기 어렵고

게다가 수적으로 앞서나가니 프리드리히는 후퇴하기로 했다


다운은 후퇴한 거로 만족하며 후퇴하려는 적을 방해하지 않고

오스트리아의 깔끔한 승리로 호크키르히 전투는 끝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8만 명 중에서 5,400명의 사상자라는 피해를 입었으나

프로이센은 33,000명 중에서 9,400명의 사상자를 입게 되었다

게다가 프로이센에는 키스와 안할트 데사우까지 잃게 되었으니

잘 나가던 프리드리히의 평정심을 심하게 흔들리게 되었다

그나마 오스트리아는 승리해도 작센에서 전진하지 못해 보헤미아로 철수

스웨덴도 보급품 문제 때문에 포메라이나로 후퇴했고

1758년 겨울, 영국으로부터 재정 원조받은 탓에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지만

카이 전투로 많이 뒤바뀌었다

1759년 7월 23일

프로이센군 선두 부대가 카이 근처에 도착했다

프로이센 좌익 기병대는 코사크 연대가 점령한 도로로 진격하고 선봉대 5개 보병대대가

이를 따라와 코사크 연대를 후방으로 몰아냈다


이후에는 러시아 기병대를 공격하여 보병대로 몰아넣고 그 후에는

러시아 남쪽 진지 모퉁이를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혼란에 빠져 뒤로 물러나게 되었고 이에 기세가 오른

카를 하인리히 폰 베델은 지속적인 공세를 지시했다

그러나 러시아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야전 포대를 재배치하여

팔츠이크 마을 안팎에서 새로운 대열을 형성했다


이후 러시아는 압도적인 포화를 이용하여 프로이센 기병대와 보병대를 상대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프로이센 기병대는 러시아군의 화력에 휘둘려 패퇴하였고

보병대 역시, 압도적인 숫자로 밀려나 패퇴했다

당시 프로이센 포병대는 제때 현장에 도착하지 못해

엄호받지 못했고 큐라시어 연대를 투입해 러시아를 공격했고

임무를 잘 수행해내기 했으나 전투의 전황을 바꾸진 못했다

더 이상 전투를 벌일 수 없다는걸 깨달은 베델은 결국 후퇴하기로 한다


전투의 사상자보다는 여파가 더 컸단 전투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합류하게 되었고

수적으로는 완전히 앞서 나가게 되었다


프리드리히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을 섬멸하기로 결심했고

5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전투를 지휘하게 된다



3. 쿠너스도르프 전투

일단 전투를 설명하기 전에 쿠너스도르프 지형을 어떤지 알아보자

쿠너스도르프를 둘러싼 지형은 공격보다는 방어에 더 적합했다


오데르 강을 막는 데 도움이 되는 긴 흙으로 쌓은 보루인 프랑크푸르트 댐과

쿠너스도르프 북쪽에는 3km 길이의 언덕인 유덴베르게, 뮐베르게, 워크베르게...

다양한 언덕이 길게 뻗어있다


남쪽은 북쪽에 비하면 덜 가파르지만, 습지로 구성되어 있고

동쪽은 개울가가 많고....공격해볼만 곳은 서쪽이긴 한데

이쪽도 좁은 도로로 공격에 불리하다

1759년 8월 12일

러시아군은 쿠너스도르프에 숙영지를 세운 후 오데르 강의 상류 지점에 위치한

계곡 부근에 우익을 배치했다

 

이 계곡은 시냇물이 가로지르고 습지가 많아서 측면공격을 하기엔 적절하지 않은 위치라

측면 공격에 능통한 프리드리히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기엔 어려웠다

또한 좌익은 쿠너스도르프에서 가장 가파른 높이인 주덴버그 언덕에 진을 쳤고

중앙은 비교적 평탄한 그로스 스피츠버그 능선에 진형을 갖췄다

프리드리히의 전술을 카운터하는 듯한 진형을 발견한 프로이센군은 놀랐다

일단 지형을 얘기했듯 개울가아 습지대로 가득해 군대 배치가 어렵고

차악으로 피해를 입더라도 러시아를 몰아내어야 했다


오전 10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핀크 장군이 분견대를 이끌고

트레틴 고지를 공격해 적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는 사이 프로이센 주력군은 숲을 해쳐 지나가며 적의 좌측면으로 이동했다

프로이센의 대대가 숲 가장자리에서 나타나자 러시아의 장군 표트르 살티코프는

단순한 분견대가 기습하려는 것으로 생각했고 보병대를 파견해 이들을 저지하게 했다

그러나 대왕은 척탄병 6개 대대를 우익 앞에 2개 대열로 배치했다

그리고 프로이센 기병대 전체가 좌익 뒤에 집결했고 주 프로이센 군단은 러시아 좌익 앞에 배치되었다

11시 30분

클라이츠버그에 설치된 프로이센 야전포대와 핀크 장군 설치한 야전 포대가 포격을 시작했다

또한 세이들리츠베르크에도 야전 포대가 설치되고 있었다

3개의 야전 포대가 제대로 화력을 쏟아붓는다면 지형 차이를 이겨낼 수 있엇을거다


그러나 야전 포대 중 2개는 전선에서 너무 떨어져 있어 폭탄이 닿지 않았고

나머지 1개는 사정거리에 있었으나 뒤집어 보면 적에도 사정거리에 해당하는지라

적의 집중 포격을 맞고 큰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러시아군은 좌익에서만 100의 야전 포대를 구축하고 있어서

애초부터 프로이센의 포병 전략은 가망이 없었다

(그래도 끝까지 포격을 가해 피해를 주긴 했다)

12시 30분

프리드리히는 묄베르크 언덕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척탄병 8개 대대가 일제히 진군해 언덕 위로 올라갔고 러시아군이 격렬하게 반격했지만

척탄병을 몰아내는데 실패했고 프로이센은 언덕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지만, 이때 기병대를 투입시켜 도주하는 러시아 병사를 사냥했다면

이겼을 수도 모르지만 기병대가 좌익 후방에 있어 우익에서 있던 도망가는 러시아를 놔둬야 됐다


한편, 살티코프는 프로이센이 좌익 일부를 돌파했고 군대들이 도주하고 있다는 소식에

급히 전선을 반전시키고 보병 및 포병대를 동원한 새로운 방어선을 조직했다


즉, 프리드리히가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썼던 전략이 새 전선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새로 정비된 방어선에서 격렬히 저항하고 지형이 습지대였기에 빠른 기동이 불가능해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피해를 양산했다

오후 3시 경

프리드리히의 친동생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왕자와 자이틀리치을 비롯한

많은 장군들이 대왕에게 전투의 승패는 정해진 것 같으니 빨리 철수할 것을 고려하라고 건의했지만

프리드리히는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러시아를 격퇴하고 조국을 수호하고 싶은 야망을 품은 대왕은 계속 전투를 지휘했다


그러나 대왕의 계획을 위해서는 묄베르크에서 낮은 쿠그룬트로 내려와

방어가 잘 된 고지대, 살티코프가 병력을 지켜 요새화 한 그로스 스피츠버그를 공격해야 했다

이에 자이틀리치 기병대가 진군을 개시했지만 러시아의 격렬한 포격으로

진군이 제한된 다가 예비대로 물려서 있던 오스트리아 기병대가 투입되어

진로를 저지하는 바람에 실력을 발휘 할 수 없었다


프르드리히의 기병대의 강점은 기병과 말이 무릎과 어깨를 맞대고 전속력으로 공격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러니깐 기병이 흐틀어지지 않고 빠르게 공격 할 수 있는 능력이었는데

하필 기병대가 돌격했던 땅은 부드럽고 습지였으며 연못으로 인해

땅이 울퉁불퉁해 서로 모이고 싶어도 못 모였고 이 때문에 돌격은 실패했다

(기병대 뿐만 아니라 16시간 동안 일어나야 됐으며 진흙탕과 불균형한 지형을 행군

 그냥 여름도 아니고 8월인 한여름으로 보병도 지형 떄문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후 5시가 되자 프로이센 상황은 심각해졌다

사실 러시아도 묄베르게와 쿠그룬트에서 적을 밀어냈다는 점 말고

딱히 성과가 없었지만 프로이센 보다는 나았다


러시아 기병대가 프로이센 좌익 보병대까지 덮쳐 좌익이 붕괴되었고 이에 따른 대열이탈......

프리드리히 대왕도 작은 언덕에 고립되어 있었다


퇴로를 확보하려던 척탄병 투입했지만 실패했고 말 2필이 탄환에 맞아 쓰러지기도 했다

언덕에 칼을 꽂은 채 자살을 고려할 정도였으며 기병대 200명이 달려와

후퇴해 간신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큰 절망에 빠진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옛 교사였던 카를 빌헬름 핀크 폰 핀켄슈타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오늘 아침 11시에 나는 적을 공격했소......

내 모든 병력들은 놀라운 일을 해냈지만 무수한 손실을 입었소.

그 순간 병사들은 혼란에 빠졌소. 나는 병사를 세 번 모아봤지만

잡힐 위험에 처했고 후퇴해야만 했소.

....

내 외투는 총알로 구멍이 뚫렸고 말 두 마리는 총에 맞아 죽었소.

나의 불행은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것이오. 우리의 패배는 끔찍할 정도요.

48,000명의 군대에서 3,000명의 병력만 남아있으며,

이 모든 것을 기록하는 순간 모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소.

나는 더 이상 내 군대의 주인이 아니오.

......

내가 살아남지 못하는 것은 잔인한 실패요.

전투의 결과보다 전투 그 자체가 끔찍하다오.

나는 더 이상 자원이 없으며 솔직히 고백하자면 모든 것을 잃었소

나는 조국의 파멸에서 살아남지 못할 같은 운명이오....

영원한 작별을!"


거의 자살하기 직전일 정도로 프리드리에게는 큰 패배였다

일단 각각의 피해는

러시아는 41,000명 중에서 14,000명, 오스트리아는 18,500명 중에서 2,300명

프로이센은 출처마다 다르지만 적게 잡아도 50,900명 중 19,000명으로 37% 이상이다

(전투도 전투지만 전투 후 승리한 코사크 부대가 약탈하고 부상자의 목을 벤것도 한 몫한다)


기병대의 60%을 잃었고 끌고 나온 대포도 다 잃어버렸고

프리드리히의 충실하고 유능한 장군인 자이틀리치, 핀크, 웨델, 훌센....등은 부상당하고

푸트카머 장군은 전사했다


이렇게 지형, 살티코프의 전술, 프리드리히의 판단력 실수로

쿠너스도르프는 러시아-오스트리아 승리로 끝났다

근데 어쩌다가 프로이센이 이렇게 되었을까?


7년 전쟁 초반부의 프로이센 전략은 적군이 합류하기 전에 먼저 각개격파한다는 것이였다

그리고 각 전투에서 아주 빠른 행군 속도로

상대의 측면을 공격해 진영을 무너뜨리는 전술을 사용했다


만약 측면 방어에 공을 들인다고 해도 좌익과 우익 중 어느 곳을 집중적으로 돌격할지

정해서 측면 방어를 무력화 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측면 전략의 단점은 지형을 잘 탄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을 깨우친 오스트리아-러시아는 프로이센이 접근해 오면

측면에는 언덕이나 습지대를 끼고서 방어해 동맹국이 합류하기를 기다리는 식으로 대응했다


이러한 수비적 전술을 상대하려면 경기병을 풀어서 적의 정찰과 보급을 방해해야 되지만

러시아의 넓은 평원 지대에서는 경기병을 풍부하게 수급할 수 있기에

프로이센이 경기병 전력에선 열세였다


어쩔 수 없이 정면 돌격을 가해야 됐고 대부분 옳은 선택이 아니였다

과연 프리드리히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잘 타파해내갈까?

아니면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조국의 파멸에서 살아남을 수 없게 될까?



분량 조절 이슈로 3부











프랑스는 측면공격을 잘 활용해 승기를 잡았지만

러시아한테는 지형으로 약해지는.....

흠...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