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어두컴컴한 연구소같은 장소에서 눈을 뜬 라붕이. 금방 자신의 몸에 이변이 생긴 것을 알아채고, 근처에 있는 '유리로 된 원통이 달려있는 뭔지모를 기계'에 다가가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기겁합니다.


라붕이는 자신이 라오 세계의 익스큐셔너가 되어있다는 걸 깨닫습니다. 전생이든 빙의든 뭐든간에 말이죠. 이어서 이곳은 6지역 배경인 김지석의 묘고, 거울로 썼던 이 기계는 생체재건장치라는 것도 추측해냅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개꿀잼 몰카인지... 길고도 짧은 당황시간을 마치고, 라붕이는 상황분석이나 할 겸 자신의 새 몸을 살펴보기 시작합니다. 여러번의 시행착오 끝에 손을 칼 형태로 변형시키는 방법도 알아내고, 공중에 둥둥 떠서 이동하는 방법도 터득하죠. 왜곡장은... 뒤지게 쳐맞지 않는이상 뭘 어떻게 시험하거나 확인해볼수도 없으니 보류.


자신의 주변에 떠다니는 칼과 방패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조종하는 건지, 아니면 일종의 AI가 탑재되서 자신을 따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라붕이는 지 칼과 방패에게 검돌이, 방순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딱히 대화가 가능한 건 아니지만 현재로서 유일한 자기 편이니 정이라도 붙여두면 좋잖아요?


그리고 또 한가지, 라붕이는 자신에게 익스큐셔너로서의 인격이나 기억이 없는 것도 확인합니다. 익큐의 기억이 남아있었으면 뭐 철의 교황이 인간을 죽이고 오너라~하고 명령한걸 들은 기억이 있을텐데 라붕이에겐 본인 기억 말고는 전혀 생각나는게 없어요.


잠시 후 멀지 않은 곳에서 소란이 들려오고, 슬쩍 가보니 사령관 일행이 변이된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지금 실시간으로 메인 6지역 스토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라붕이는 그 6지역의 보스 역할이고요.


자신의 처지를 깨달은 라붕이는 급격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합니다. 일단, 싸우기 싫다! 굳이 악당노릇 하며 주인공 팀과 적대하기도 싫고, 어차피 싸워봤자 뒤질게 뻔한데 왜싸워. 그냥 조용히 튈까? 그랬다간 철충 측에서 탈영병이라고 죽이려들겠지?


빠른 고민 끝에 라붕이는 사령관 편에 붙기로 결심하지만, 이번엔 어떻게 저쪽 편에 붙을지가 문제군요. 바이오로이드나 AGS랑은 달리 대놓고 철충인데 항복한다고 말해봤자 안믿을 것 같고, 그전에 익큐가 지구 언어를 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이고.


그렇지! 말로는 안된다면 행동으로 보여주자! 마침 오르카쪽이 변종 고블린들과 싸우고 있으니, 고블린들 해치우는걸 도와주고 '적의 적은 아군이다' 작전으로 가자!


결론을 내린 라붕이는 냅다 전장에 난입합니다. 라붕이는 검술이라고는 전혀 모르지만 익스큐셔너의 몸에 전투감각이 베여있는건지, 라붕이가 대충 팔 붕쯔붕쯔만 해도 익큐의 몸이 자동으로 살육기술로 변환해줍니다. 거기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적을 요격하고 자신을 지켜주는 검돌이와 방순이의 어시스트까지.


전투 결과, 라붕이는 훌륭하게 잘 싸워서 적들을 일소합니다.

너무 잘 싸워서 탈이었죠.



오르카호의 시점에 비춰진 익스큐셔너의 모습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나서 순식간에 적들을 전부 도륙낸 미확인 연결체'였거든요. 참살을 끝낸 익스큐셔너가 침묵 속에서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오르카측은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낍니다. 


'다음 타겟은 우리인가!?'


사령관은 즉각 해당 연결체를 위험도 최상이라 판정내리고 공격 명령을 내립니다. 오르카호의 정예 대원들은 적에게 집중 포화를 퍼부었지만, 연기가 걷히자 나타난 건 그 연결체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방어력에 움츠러든 사령관 일행. 이윽고 간지럽지도 않다는 듯 묵묵히 공격을 받아주던 연결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어 이게 아닌데? 도와줬는데 왜 날 때리지?'


왜곡장 능력이 정상작동한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뭔가 잘못됨을 느낀 라붕이. 행동으로 아군임을 보여주기 작전이 안먹힌 것 같자 대화라도 시도해보기로 합니다. 먼저 대검으로 바꿨던 손을 원래 형태로 되돌리고, 진정하라는 제스쳐를 취하며 말을 시작합니다.


"저기, 겁 먹지 마세요! 저는 당신들과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무기를 내려주세요!"



+++사령관 시점+++


 "두려워 말라." 


그 연결체가 손바닥을 펼쳐보이며 처음으로 꺼낸 말이었다.


 "나는 너희들과 적대할 의향이 없다. 무기를 내려놓도록." 


"저것이... 설마 말을 하는 건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있는 거지?"


마리가 당혹스럽게 중얼거렸다. 비록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방이 스스로 무장을 헤재했기 때문에 공격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령관은 슬쩍 눈동자만 마리 쪽으로 돌렸다.


"마리, 넌 저게 하는 말을 못알아듣는거야?"


"예? 제 귀에는 이상한 잡음으로밖에 안들립니다만... 설마, 각하께선 저 소리를 이해할 수 있으신 겁니까?"


 "예상한 대로군. 거기 인간. 네가 나의 말을 통역해서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도록 해라." 


연결체가 손가락으로 사령관을 가리키자 마리와 라비아타는 곧장 무기를 치켜들고선 적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명령만 떨어지면 언제든지 달려들 수 있도록. 그러나 저것의 말을 이해한 사령관은 손짓으로 둘을 제지하고 입을 열었다.


"넌... 누구야?"


 "익스큐셔너. 과거 교황의 적을 처형하는 임무를 부여받은 몸이었으나, 난 더이상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다." 


저것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사령관은 쉽사리 판단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익스큐셔너라 밝힌 연결체의 목소리에선 어떠한 어조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익붕이 시점+++


'어? 뭐지 이거? 뭔가 존나 잘못돼가고 있는거 같은데?'


익스큐셔너의 몸이 강제로 폼잡게 만드는 기능이라도 있는건지 라붕이가 무슨 말을 하든 자동으로 건방지고 위엄있게 필터링되서 나왔습니다. 말투가 이러니 사령관측은 계속 경계태새를 유지하고, 라붕이도 어떻게 오르카측의 경계를 풀어야 할 지 똥줄이 타고있고. 강제 착각물 뭔데.


역시 대화만으로는 무리인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밖에 답이 없나? 어디서 백기라도 찾아와서 휘둘러야 하나? 아님 바디랭귀지?

항복이나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는 바디랭귀지가 뭐가 있지? 무릎꿇고 손들기? 이건 다른거 같고. 손바닥 내밀고 도게자? 쟤들이 알아먹을까? 차라리 적의가 없음을 표현하는 거 말고 상대방에게 호의가 있음을 표현하는 건 어떨까? 그런 바디랭귀지는 뭐가 있지?


그 순간 어떠한 포즈가 라붕이의 뇌리를 스치고, 라붕이는 이판사판으로 실행에 옮깁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봐도 적의는 안느껴지고 친근함에 더불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경계심을 해제하기 위해서라면 쪽팔림을 무릅쓰고 시도할 가치가 있는 궁극의 제스쳐다!


익큐의 갑분 모에모에 큥에 어안이 벙벙해진 라비아타와 마리는 당혹스런 눈빛으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고, 사령관의 "아무래도... 적은 아닌 것 같아."라는 말에 비로소 경계를 풉니다. 물론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익큐 라붕이가 평화롭게 오르카호에 들어가기 위한 한 걸음은 내디뎠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라붕이는 사령관 일행에게 생체재건장치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고, 저쪽이 안심할 수 있도록 생채재건을 하는 동안은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라붕이는 저 장치를 쓰면 자신도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지만 자기 크기 때문에 물리적으로 저 유리 원통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현재 자신의 몸 안에 인간의 뇌가 존재할 것 같지도 않으니 소용없을 거란 추측을 합니다.


사령관의 몸 바꾸기가 끝나고 나면 익큐 라붕이도 오르카호에 들어가고, 오르카호의 일원으로서 철충과 싸우게 되겠죠. 

하지만 그건 그거고, 라붕이는 정말 앞으로 평생 익스큐셔너로 살아야 하는 걸까요? 라붕이가 인간으로 돌아가는 날이 올까요?


나도 몰라 여기까지밖에 생각안했다


언젠가 소설로 쓰려고 했던 소재인데, 각잡고 소설로 예쁘게 다듬지 않고 그냥 시놉시스만 요약해서 올리기로 함

어차피 쓴다고 해도 단편소설로 짧게 끝낼 생각이었고. 익큐가 오르카호에 들어간 이후의 에피소드 추가해서 분량 늘려도 3~5화 정도?

따지자면 두번째 인간은 아니지만 관점에 따라선 두번째 인간물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