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시리즈?]

대전쟁이 끝났다. 


“끄응….”


나는 바닥을 아려오는 냉기에 머리를 쥐어짜며 눈을 떴다.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등불의 빛에 의지한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제되지 않은 투박한 돌바닥. 녹슨 쇠창살. 끊어지지 않는 족쇄. 얼마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아, 일어났나보네?”


인류를 구하지 못한 죗값을 치루는 곳이라는 것을.


“용사 주제에 패배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마왕 엘리아, 테렛 대륙을 떨게 만든 침략자, 인류의 공포, 그리고… 내가 꺽어야만 했던 경쟁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 그녀의 붉은 눈이 기묘하게 빛났다.


“정말 아쉽겠어 그치? 1분만 내 술식이 늦었어도 너한테 끔살당했을텐데.”

“…왜 죽이지 않은겁니까.”

“음…글쌔?”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고민하던 시늉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좋아해서.”

“좋아한다는…말입니까?”

“응. 사랑! 너는 몰랐겠지만 나는 너가 소환됐을 때부터 지켜보고 있었어. 떄로는 마력드론으로, 인간으로, 몬스터로 계속해서 관찰했는데, 진짜로 너무 즐겁더라. 나와는 완전히 다른 개체… 외모도, 가치관도, 능력도, 진영도, 원하는 목표도! 너무나 새롭고 흥미로웠어.”


나는 그녀의 기묘한 눈빛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이제서야 읽을 수 있었다. 그 것은 바로 ‘흥미’ 마치 새로운 장난감을 본다는 듯이. 자신이 가지고 싶으면 어떻게든 가지려하는 어린 아이들의 결연한 의지가 흘러나왔다.


“그래서 말인데, 너 나랑 오래 있자. 어차피 제국으로 돌아가봤자 사람들이 널 좋아해줄 것 같아?”

“…”

“너희들은 100번의 호의는 기억하지 못해도 1번의 적의는 두고두고 기억해. 그게 인간들의 야만적인 습성이지. 반면에 우리 고귀한 마족들은…”


그녀의 말은 사실이였다. 현세에서도, 지금 이 세계에서도 아무리 도와준다고 한들 뒤에서 시기하고 질두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였으니까. 하지만,


“당신의 말이 맞습니다. 저희 인간들은 욕심은 많으면서 능력도 의지도 없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을 위해, 국가를 위해,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속죄하기 위해서라도 죽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저의 운명입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서 이야기했다. 그녀는 말문이 막힌듯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봐도 멋있는 말이였으니 그녀가 놀랄 것은 당연지사 했을지 모른다. 그녀는 계속해서 입술을 달싹이다 한숨을 쉬었다.


“하아… 귀찮게 하네. 대체 누가 세계를 위해 헌신했대? 뭐 있다고 치자. 그들 중에서 너 주변에 있던 사람들 중 한명이라도 대봐.”

“제 동료들도 있고, 제국 기사단장 리안 각하도 계십니다. 그 중 단연코는 황녀 전하 아니겠습니까?”


내가 자랑스럽게 가슴을 두드리자 그녀는 뭐가 우스운지 폭소했다.


“푸핫! 아…미안해 푸흡, 웃음이 안멈추네.”


나는 그녀를 영문도 모른채 멍하게 쳐다봤다. 그녀는 눈물을 닦고서 말했다.


“너랑 다녀던 동료들은 내가 인정할게, 근데 리안이랑 황녀? 기사단장이라는 녀석이 빼먹은 군납비리액수만 500억 디라크야. 뭔 말인지 이해해? 10년동안 제국 GDP의 30퍼 가량을 파먹은 놈이야. 그런 녀석이 세계를 위했겠어?”

“오,오백억? 내가 지금까지 받은 금액이 5억 디라크인데….”

“그리고 황녀? 걔가 가장 악질이야. 걔만 아니였어도 벌써 우리는 멸망했을거야.”


그녀는 안주머니에서 한 기계를 꺼냈다. 한껏 비웃음을 머금은 채 그녀는 기기를 키며 말했다


“1년 전 동부전선에서 일어난 대폭발 기억하지?”

“…당연합니다. 제 동료들이 모두 다 죽은 원인불명의 사고였으니. 헌테 그것은 왜 말씀 하십니까? 설마 그 짓을 당신이”

“했겠어? 멍청하기는, 문맥파악 좀 해.”


그녀는 내 머리에 딱밤을 날리고선 영상을 틀었다. 1년 전 동부전선의 종결을 선포하는 축하연에서의 영상. 많은 사람들이 보였지만, 영상의 시점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단 한명이였다.

“황녀 전하…?”


황녀께서도 당연히 대전쟁의 총책임자로써 오신 것은 당연지사. 허나 분명히 업무가 많다면서 얼굴만 비추고 가신 줄 알았는데… 황녀는 연회장 뒷편에서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일은 성공시킬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황녀 각하. 헌데 저 우려되는 것이 있습니다만,”

“뭔 말인지는 알지만 제국의 명령이야. 중대장”

“허나, 이것은 용사파티에 대한 크나큰 위험을 초래할 수가….”

“마족 첩자가 축하연에 왔다고 몇번을 말하나? 그 위험을 초래하고서라도 마족을 제거해야만해. 그니까 따르라고. 따르기만 한다면 그대가 안전지대 행정관이 되는 것은 따놓은 당상이야.”

“….”

“만약 하지 못한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가문까지 어떻게 될지 몰라. 수고하게”


남자가 ‘죽어서 천국가기는 글렀겠군요’라 나지막히 말하는 장면을 끝으로 영상은 끝이 났다. 영상을 보는 것을 지켜보던 마왕이 내 손을 쓰다듬었다.


“어때 애들이 얼마나 나쁜…어머, 창백한거봐. 따듯한 물이라도 갖다줄까?”


손을 내려다보니 그녀의 말대로였다.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투명할 지경이였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손등을 적셨다. 나는 떨면서 그녀에게 읊조렸다. 그 것을 물어봐야만 용서는 못하더라도 이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족, 마족이 정말로 그 곳에 있었습니까?”

“아니. 마왕의 권위를 말하고 맹새하건데 없었어. 나 또한 황녀가 너무 임무를 잘 수행하길래 놀랐다니까?”

“그게 대체…?”

“내 말의 뜻이 뭔지는 너가 알아서 생각해봐.”


그녀는 키득거리며 입을 가리고 웃었고, 나도 웃었다. 그 웃음의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달랐지만.


“크흐흐…크하하하”

“푸훗, 너는 갈 곳이 없어. 날 죽이지 못한 이상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도, 제국의 품으로 안길 수도 없을테니까.”


하지만,


그녀는 방긋 미소지었다. 기억에도 없는 어머니가 미소를 지어줬다면 이런 모습이였을까 싶은 자애롭고도 사랑이 듬뿍 담긴 미소.


“나라면 널 거둬줄 수 있어.널 죽이는 건 하등 이득도 없을 뿐더러 손해 투성이니까.”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 손을 잡는다면, 아픈 기억들을 잊을 수 있을까.


“이미 제국은, 인류는 새로운 용사를 찾고 있을거야. 너는 이미 잊혀졌어. 그러니까, 나랑 있자. 영생을 줄게. 내 남자로써 살아가자.”


따듯한 광휘가 그녀의 손짓에 맞춰 지상에서 흘러내려왔다. 어두컴컴한 흑색의 침묵을 일깨우는 거대한 환희. 바람이 불리 없는 적막한 이 곳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흑요석 같은 매끄러운 머릿결과 조각같은 이목구비. 악마뿔이 있는 것만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미녀인 그녀를 현세로 돌아간다고 한들 평생이고 난 만나보지 못하겠지만….


“죄송합니다.”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녀의 눈에는 뭔 이런 X신이 다 있지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녀가 입술을 달싹대는 사이 나는 이어서 말했다.


“인류에 대한 배신자가 아무리 많다고 한들, 저까지 배신을 해야되는 이유는 없을겁니다. 차라리 고독한 인류의 촛불이 되는 것을 선택합니다. 또한, 저는”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그녀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내 마지막 말을 듣고 그녀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감옥을 환하게 밝히던 빛이 사라지고 케케한 냄새의 어둠이 차올라서 목을 매이게 한다는 차이가 그녀의 대답을 대신한 것 같았다. 그녀는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맨정신으로 받아줬다면 더 좋았겠지만… 나쁜 아이에게는 벌을 줘야겠지.”


펑–


거대한 굉음과 함께 그녀는 사라졌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어도 나를 가지기 위해 그 어떤 것이든 할 것이라는 걸. 나는 다짐했다.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내가 사랑하는 얀순이를 반드시 마음 속에서 지켜내겠다고.

 

***


“얀붕아… 미안해. 나 사랑하는 남자가 생겨서”


얀순이가 멋쩍은듯이 웃었다. 마치 정사를 바로 전까지 나눈 것을 뽐내듯 전라로 있던 그녀는 나에게 옆에 있던 남자를 소개시켜줬다.


“새롭게 알게 된 남자친구 리안이야. 오빠 인사해”

“아, 안녕? 니 약혼녀 죽이더라? 친구들도 다 맛있다고 칭찬해.”

“아잇, 오빠도 참….”


서로 꺄르륵대며 웃는 그 둘. 리안은 얀순이의 어깨를 감싸며 날 비웃었다.


“내가 아무리 이런 것을 한다한들, 넌 저항도, 분노도 못하는 찌질이야.”

“이런 도발에도 대답 못하는 거 보니까 되게 하찮네. 내가 어릴 때는 대체 왜 이런 남자애랑 약혼했는지 몰라”


시선을 돌리려해도 고정된 듯 멈춰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입을 맞추려던 그 순간,


“허억!”


나는 잠에서 깼다. 온몸이 땀 범벅이 된 나를 옆에 있던 얀순이가 걱정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여보, 괜찮아요? 요즘따라 계속해서 악몽을 꾸시니까 제가 다 걱정되잖아요.”

“아, 미안해. 별 것 아니야”


나는 그녀에게 애써 미소를 짓고서 창문을 열었다. 탁 트인 정원과 아름다운 시골 풍경. 그녀가 혼수로 해왔다고 했던가. 사냥꾼이라는 그녀가 어디서 이런 돈을 벌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 고마웠다.


“요즘 계속해서 얀순이가 꿈에서 나타나거든.”

“얀순이요? 얀순이는 왜 찾는거에요?”

“어? 그야 내 약혼녀….”


그녀는 의뭉스럽게 날 째려봤다.


“왜 그 여자가 나오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엘리아에요. 당신의 맘을 짓이겼다는 그 약혼녀랑 저를 착각하시….”

“아… 그랬나? 그러게. 얀순이가 정확히 누구였더라?”


나는 그 이름이 누구인지 팔짱을 끼고 곰곰히 기억해내려 애썼다. 안개에 가려진 듯 흐린한 기억을 떠오려보려 하던 순간, 엘리아가 나를 안았다.


“우리 과거는 생각하지 않도록 해요. 앞으로 착각 안하면 되는거니까. 용서해줄게요.”

“아…. 너 말이 맞아. 고마워 엘리아.”

“고마우면, 알죠? 뭐해야 되는지”

“당연하지.”


나는 그녀의 입에 살포시 입을 맞추었다. 방긋 웃는 그녀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 나가야지. 도시락 싸줄게”

“오늘은 쉬는 날이에요~”

“아, 그래? 그러면… 산책이나 하고 올까?”

“좋아요!”


나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 계단을 내려갔다. 복도를 지나 나가려는 그 순간, 지하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꺄아아악”

“뭐야? 엘리아 들었어?”

“네,네? 무슨 소리를…”

“비명소리 말이야! 지하 창고에 뭔 일이 있는지 확인해봐야겠어”

“아니에요! 저희밖에 안쓰는 지하창고에 누가 있다고…”


나는 그녀의 만류를 뿌리치고 재빠르게 내려갔다. 오랫토록 안쓴 것이 분명한 지하창고에서 비명소리가 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는 않았지만, 설령 노숙자들이 몰래 들어와 사고를 쳤을 수 있는 노릇이였다.


“얀,얀붕이?”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얼굴이 창살 사이로 보였다. 헌데 막상 그녀의 이름은 생각나지 않아 머리가를 움켜진 나는 그녀가 누군지 떠올리고자 물었다.


“누군데 저희 집에…”

“나,나야 시아! 너가 충실히 따르던 제국의 황녀!”

“시아? 제국? 그게 대체…”


머리가 더욱 아파져왔다. 뭔가 거대한 어스름이 내 기억을 흐려놓았다. 뭔가가 떠오를 듯 말듯한 그 때, 엘리아가 헉헉대며 날 따라왔다.


“여보! 도대체… 아니 얀순이? 당신이 왜 여기에?”

“얀순이? 이 친구가 얀순이라고?”


엘리아는 그녀를 가리키며 노호성을 저질렀다.


“내 사랑하는 얀붕이를 망쳐놓고 여기가 뭐라고 기어들어와!”

“뭐,뭔소리야? 내가 언제 용사님을…마왕 너야말로 용사님을 이렇게 바꾼거야!”


도통 알 수 없는 소리였다. 엘리아는 그녀…얀순이?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나에게 말했다.


“흑흑…여보 저 사람이 얀순이에요. 당신의 친구들을 모두 죽이고 리안이라는 군인과 바람나서 도망친 그 사람!”

“…아!”


나는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근래에 들어서 꿨던 흐릿한 그 꿈은 현실이였던 것이다. 내가 엄청난 충격을 받고서 완전히 잊어버린 듯이 살았던 것이다! 나는 엘리아의 손을 붙잡고 얀순이를 노려보았다.


“당신이 내 친구들을 다 죽였었지?”

“그,그걸 어떻게”

“맞았구나. 널 한때 약혼녀로써 데리고 있던 내가 가증스럽다.”

"약혼녀? 그게 무슨, 설마 저를 사랑했던…"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자 얀순이의 눈에는 습기가 맺혔다. 엘리아는 내 등을 토닥이며 안심시켜줬다.


“여보, 제가 해결할게요. 이런 일은 제가 전문이잖아요.”

“그래? 기억이 잘안나네… 미안해”

“충격을 먹었으니까 단기기억상실이 올 수도 있죠. 걱정마요 제가 확실히 해결할게요. 먼저 정원에 나가있어요. 저도 금방 내쫒고 찾아갈게요.”

“알겠어 사랑해 엘리아”

“저도 사랑해요.”


나는 그녀의 귓가에 사랑을 흩뿌리고서 계단을 올라왔다. 소름끼치는 쇳소리와 비명소리가 울려퍼졌지만 상관없었다. 적어도 내 사랑 엘리아의 목소리는 아니였으니까.



-END E:

BAD ENDING: 거짓된 사랑, 아니 진실된?


-GAME 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