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 이전 ~ 총사령관 임명 직전 https://arca.live/b/histor25385328036y/106119161?target=all&keyword=&p=1



1861년 7월 21일, 연방군 어윈 맥도웰 장군이 이끌던 연방군은 불런, 황소들의 길이라 불렸던 냇가 주변에서 패배한다.


남부군 북부군 서로 제대로 훈련도 안된 오합지졸들로 엉겨붙어 싸웠던 처절한 전투에서 나중에 한번 글을 써보고 싶은 무명의 남부군 준장이 불굴의 방어로 연방군에게 엿을 먹이는데 성공하고 패배한 연방군은 수도로 도망가서 존버를 타기 시작한다.


정말로 북부의 처절한 상황이었는데 불런이 어디에 있냐면..


(매나서스 정션이라는 마을 안에 있었다)


한 48km (30마일) 떨어진 곳으로, 서울로 치자면 오산, 화성이 거리가 비슷한 셈이다.


수도 앞에서 연방군이 대판 깨진 진짜 절체절명의 위기였는데 여기서 전에 구원투수가 누가 나온다고 했었지?



3. 선배까지 농락하는 사상 최대의 천재

전에도 언급했듯이 매클랠런은 스콧 장군과 이미 얼굴을 튼 상태이고 멕시코 전쟁에서 많은걸 배운 스승과 다름없었다.


내가 간략하게 그들의 사이를 정리하긴 했지만 매클랠런은 스콧 장군 아래에서 그가 공성전때 민간인에게 피해가 최소한 가지 않게 군기를 빡세게 잡는 모습을 진심으로 존경하는등 훈훈한 일화도 있었음.


근데 남북전쟁이 개시되고 난 후, 오하이오 군관구에 부임한 매클랠런은 다시금 스콧과 편지를 주고 받는데 이때 그들의 사이가 슬슬 틀어지게 돼.



 


매클랠런은 8만 대군으로 오하이오 남부에서 동진, 반란군 수도인 리치먼드를 직접 공격하고,


또 다른 8만의 군대로 오하이오 강을 남쪽으로 따라가서 남군의 요충지인 테네시와 켄터키를 박살낸다, 라는 의견을 제출해


근데 이 도합 16만의 군대를 어떻게 부릴지, 보급은 어떠할지, 훈련은 어찌할꺼며 어디에서 차출할건지 전혀 설명을 안해줌



 

혈기가 왕성해서 믿음은 가네만.. (실제로 한 말)


당연히 스콧은 그 계획을 기각했고 원래 훈훈했던 이 둘은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데



조지 매클랠런 (수도 방위 사령관, 미합중국 정이대장군)


이야 이제 대통령까지 빌빌대면서 하고 싶은거 다 하라는데 기분 존나 좋네? 그래도 겸손하긴 해야지 암! (실제로 한 말)


어쨌든 이제 우리는 10만 군대랑 맞대고 있으니 워싱턴에 비상 사태 선포하고 진지 구축해라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 매클랠런의 따가리) 

그.. 장군의 경험을 제가 감히 부정하는건 아닌데..

10만 대군이라는 수치는 정확히 어디에서 나온겁니까?



?? 몰루 ㅋㅋ 사실 15만일지도 몰루 ㅋㅋ


수도 방위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그는 망상적인 태도로 남부군이 거의 10만의 대군을 운영한다고 믿었고, 그걸 뒷받침할 과학적 수치는 거의 하나도 없었으며... 나중에는 이 수가 15만으로 불어났다고 착각을 하였다


역사를 거쳐간 우리야 다 알고 있기는 하지만 불과 몇 주전에 일어난 불런 전투에서 남부군은 그 예상의 3분의 1인, 3만을 기용하였으니 반란군이 10만, 15만을 굴렸으면 연방 정부는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져 있었을 것이었다.



이 사람도 어쨌든 핑커튼 탐정을 고용해서 정보수집을 시키긴 했고, 실제로 이 망상적인 수치에 핑커튼이 영향을 주긴 했지만, 15만이라는 숫자 자체는 온전히, 매클랠런 자신이 생각해낸것이다.



스콧 장군과 균열이 생긴것도 이 사람이 대전략이나, 심지어 군대의 전쟁 수행 능력이나 준비 태세, 장비 등등 일체 아무런 정보도 나누지 않으려 했기 떄문인데



통신보안 ㅋㅋ 통신보안 모릅니까? 내가 정보 나눠주면 당신네들이 기레기들한테 흘리지 않을거란 보장이 있소? 절대로! 안 알려준다 이기야! ㅋㅋㅋ



스콧 장군만 왕따 시킨것도 아니고 자신의 보스 링컨과 자신의 친구들 (정치 끄나풀)이 있었던 전쟁 내각한테도 모든 정보에 대해서 함구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니, 얼마나 철저하게 아군에게 정보를 숨겼는지 의회의 과격파 공화당원은 부하 장교들에게까지 정보를 숨기는 태도에 더불어 매클랠런의 민주당 당적과 흑인 해방에 회의적인 태도를 잡아 매클랠런이 쿠데타를 일으키려는것 아니냐, 라는 의심까지 했는데..



다행히도 쿠데타가 아니라 그냥 망상적 무능이었다!


이런 기열을 더 이상 참을수 없었던 윈필드 스콧 장군은 사표서를 내기까지 하면서 사의를 표명했지만, 링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결국 이 둘의 관계가 틀어질대로 틀어진 상황에서 스콧 장군의 "건강 문제"로 사표를 수리한다



그리고 총사령관의 지위는 수도 방위 사령관에게 넘어간다.



4. 포토맥군 창설, 유일한 업적


연방 총사령관에 부임한 매클랠런은 곧바로 군대를 재정비 하여 포토맥군 이라는 거창한 군대를 만들어낸다.


사실 이 사람이 다른 모든것에선 똥별이었지 이 포토맥군 창설과 재정비는 아주아주 훌륭한 업적이었는데,


매클랠런을 야금야금 씹어대는 미국 공식 공병대 사이트도 이점에 대해서는 "later Union victories.. owed much to his forging of the Army of the Potomac", 즉 후대 연방군의 승리는 이 사람이 포토맥군을 재련해 내었기 덕분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실제로 포토맥군은 매클랠런 아래에서..


- 도합 12만 군대로 불어나고,

- 사기도 충만했고,

- 수도에 견고한 방어를 보장해 민간과 군대에 불필요한 스트레스를 주지 않는 역할로..


연방의 전쟁수행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 그리고 포토맥군 자체도 매클랠런을 좋아하기도 했고 일단 인기는 아주아주 많았다.



이 노고를 치하하러 집에 방문한 링컨 대통령을 문전박대하고 고릴라라고 뒷담화를 하는등 기합찬 상관 기열을 보이긴 했지만..



굳이 이새끼는 인성 문제까지 꺼내서 까야할만큼 소재가 없는게 아니다.



매클랠런이 1861년 11월 1일, 총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링컨과 연방 정부는 장장 두 달이라는 세월을 감내하는 시간을 보낸다.


사실 2개월 정도는 기다려줄수 있지. 전쟁통인데 뭐 군대가 스타 하듯이 T 누르면 전차 나오고 A 누르면 병사 나오냐?



총사령관이라는 새끼가 아무런 브리핑도 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2개월이였기 망정이지..



하여튼 1862년 1월, 새해를 맞이하고 슬슬 좀이 쑤시던 링컨은 작계를 꾸미고 반란을 토벌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것까지 말하면 좀 글이 길어지니까 다음에 매클랠런의 행보를 소개함



조지 B. 매클랠런, 총사령관직 해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