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조금씩 산너머로 모습을 감추는 태양을 보며 개운하게 올라야 할 퇴근길


꽤나 기울었지만 아직은 저물지 않은 노을 빛이 측면 유리를 향해 강렬하게 쏟아지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어딘가 들릴 새도 없이 집으로 향했겠지만,


내비게이션의 경로는 이제껏 향한 적 없던 낯선 경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목적지로 나를 안내하고


목적지에서 마주하게 될 불쾌할지 통쾌할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을 어떻게 마주해야할지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는다.




딱히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바람을 인정하고 이별을 통보한 연인과의 이별 후 6개월이 지난 후에야 얼굴을 한번 볼 수 있을지 연락을 받는다면,


그렇게 나간 장소에서 서로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는 굳이 장소를 나가지 않아도 뻔히 알 수 있으니까




굳이 응할 필요 없는 요청을 승낙하고 약속장소로 향하는 이유는 


연락 전 부터 소문을 통해 그녀 또한 버려졌음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더 이상 이별 당시의 나약했던 나는 남아있지 않음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함도 있었다.




가볍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차를 몰아 약속장소인 술집에 도착하니


구석 창가에서 익숙한 모습으로 손을 들어올리는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이별 후 6개월.. 모습이 바뀌는게 이상할 짧은 기간이었기에


외모가 특별히 바뀐건 없었음에도 이별 당시에 본 마지막 모습과는 어딘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져 있었고


그리고 그 차이를 인지하면서 씁쓸하게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 했다.




그녀를 믿는다는 명목으로 간섭하지 않았던 모임활동


그 모임에서 만난 남자와 가벼운 스킨십이 오가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자신한 그녀가 곧장 내린 가혹한 결정


배신의 가시덩굴이 신뢰의 벽을 허물고 자리잡던 그 날 그 시간에 나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연락은 되지 않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꿈에도 모른 채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으니 연락을 주겠지 생각하며 기다린 다음 날, 


하루만에 자라난 배신의 가시덩굴은 기다렸던 전화를 통해 나의 귀를 거쳐 심장을 가차없이 난도질했다. 


갑작스런 충격에 정신이 나가 그녀의 마음을 다시 잡겠다고 필사적으로 매달려 잠깐의 유예를 얻었지만


그 기간은 관계를 되돌릴 수 있는 기회의 기간이 아닌.. 차라리 놓아버리느니만 못한..


이미 시작되어버린 그 남자와의 관계가 이별의 유예와 상관없이 이어지는..


남은 마음마저 갈가리 찢겨나가는 절망뿐인 시간이 되었을 뿐




더러운 배신의 장에 추잡한 미련의 발버둥까지 더해져 서로를 위한 선택이니 뭐니 하는 


고결하고 이상적인 모습같은 건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이라 칭할만한 이별의 기억이 빠르게 스쳐가고


그런 나의 상태를 눈치챘는지 그녀는 내가 기억을 다시 욱여넣고 어색한 인사를 건네기 전까지 미동도 없이 나의 동태를 살폈다. 




마주앉은 둘 사이에 흐르는 침묵




잡념을 떨쳐내고 가볍게 인사를 건넨 뒤, 어차피 뭔가를 먹을 생각은 없었기에


메뉴판에서 적당한 메뉴를 하나 되는대로 주문하고는 함께했던 세월이 무색할 정도의 어색함이 깔린 테이블에 


잔도 없이 덩그러니 놓여진, 이 불편한 기류에 더할나위없이 어울리는 소주 한병이 눈에 띄어 바라본다.


내가 오기 전부터 준비해놓은 소주 한병


문득 '사귀는동안에 소주를 마시는 모습은 거의 보지 못했는데..' 라는 생각과 함께 먼저 고요의 흐름을 깨기로 한다.






"할 얘기가 있다고 부른 사람은 내가 아닌데"






앞서 떠오른 기억때문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다.


그것때문이 아니어도 굳이 상대 기분을 신경쓰면서 말을 뱉을 이유는 없었지만,


직후 그녀의 표정에 아주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으나 바로 감추고 태연한 척 안부를 물어왔다.


아무리 뻔하고 의미 없는 겉치레용 멘트라지만 자신이 가차없이 마음을 부숴버린 상대에게


잘지내냐는 질문만큼은 던지면 안되지 않나... 더 상할 감정은 남아있지 않았기에


기분이 나쁘다기보단 한숨이 나왔다.






"카톡으로나 할법한 얘기하려고 부른건 아니잖아?"






1~2년도 아니고 수년을 함께했던 사이.. 어떤 의미로든 겉치레가 필요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나의 마지막 모습은 이별 당시의 한없이 약해지고 초라해진 모습이었기에,


지금와서는 언제 그런 적이 있었냐는듯 빠르게 본론을 요구할 뿐인 나에게 


그녀는 생각보다 꽤나 충격을 받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지만,


이내 결심한듯 긴장한 얼굴로 테이블 밑으로 내리고 있던 양손을 들어 준비해둔 소주병을 집고는,


그대로 반 이상을 들이켰다. 




장소가 술집이니 술의 도움을 받아 맨정신에 못할 말을 해올거란건 당연히 예상했지만


설마 시작부터 병나발을 불어댈거라고는 예상을 못했던터라 살짝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감당도 못할 양을 한번에 들이키는 중인 그녀에게 내 표정같은걸 살필 여유는 없었고


술기운이 올라오길 기다리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있는 그녀를 말없이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윽고 떨군 고개를 천천히 들어올린 그녀는,


역시나 누구든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뻔한 멘트를 입밖으로 꺼내고야만다.






"나.. 다시 돌아가도 될까?.."






하... 예상했던 멘트지만 직접 들으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돌아올 생각을 하는것도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상황이지만


저 말을 하기전에 앞서 사과를 했어야하는게 맞지않을까


요청의 답은 정해져있기에 대답에 뜸을 들일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바로 대답 하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나는 저 말을 듣기 위해 이 곳에 왔고, 저 말이 나오는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녀가 저 말을 뱉은 직후의 모습을 반드시 상세하게 봐야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버린남자에게 돌아갈 자리를 간청하는 비참한 상황에서 그녀의 표정, 눈빛, 자잘한 몸동작과 습관 등


나락으로 떨어진 그대로의 모습이 드러나는 이 절망적인 순간을 확실하게 확인하고 눈에 담기 위해


그 비참한 순간의 기분을 그녀가 조금이라도 오래 유지할 수 있도록 나는 대답을 미루고 있는것이다.


눈도 마주치치 못한채 두손을 꼼지락거리며 초조하게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사실 마음속 깊이 아직 티끌만큼은 남아 숨어있는 나약했던 나의 잔재가 미약하게나마 날뛰는 것을 느꼈지만


이미 한차례 지옥을 겪은 직후인 내가 그정도에 휘청일리는 당연하게도 없었다.


바라던 그림을 충분히 확인한 나는 이어서 내가 안고 있던 고통을 비록 똑같진 않아도 어느정도는


그 고통의 무게를 체감할 수 있도록 준비한 선물을 그녀에게 건넨다.






"이미 만나는 사람이 있어서"






대답을 들은 그녀의 눈썹이 치켜올려지고 눈에서 기다리기라도 한듯이 눈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의 기분은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헤어진 후에 정말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어. 집에선 혼자니까 울고불고 난리를 쳐도 상관없었지만 

밖에서 아무일 없는듯 일상을 지켜내는게 죽을맛이더라고.. 3개월정도 지났을때 우연한 계기로 지금 만나는 사람과

알고 지내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사귀기 시작한건 이제 1달정도 지났어."






이어지는 정적, 아마도 그녀는 그 사이에 자신의 자리에 벌써 다른 누군가가 자리잡고 있을거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못한 듯 했다. 분명 자신이 몇차례 거부당할것은 각오했을것이고, 어떻게든 그냥 거부당하는것뿐이라면


헤어질 당시의 내가 그랬듯 줄기차게 매달려서 나의 곁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을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자리가 비어있을때나 통할 이야기,


그 자리에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있다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 상황에서 그녀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단언컨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단박에 치명적인 일격을 맞아버린 탓에 그녀는 자리에 앉은 후로 몇마디가 오가지도 못했음에도


더 이상 꺼낼 수 있는 말이 없어져버렸다.


그 날.. 내가 있어야할 자리에 다른놈이 앉아있는 상황에서 느꼈을 절망감을 이제는 조금이나마 이해했을까?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그녀는 다시 남은 소주병에 손을 뻗어 맹렬하게 들이키기 시작한다.


지금 들은 말, 떠오르는 기억, 차오르는 감정 그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듯했다.


혼자 한병을 비우고 다시 한병을 추가로 주문한 그녀는 술기운에 더욱 풀어졌는지


울먹이며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새끼.. 나말고 다른여자 2명을 더 끼고는 최종적으로 누굴 만날지 간을 보고 있었어.. 

심지어 나를 포함한 3명이 서로 아는사이인데도.."


"...."






연인이 있는 여자를 건드린데서부터 글러먹은 놈이라 생각하긴했고 


결코 저 둘의 결말이 아름답지는 않을꺼라 확신하긴 했지만


저 정도로 막장을 달리고 있을거란 생각은 사실 하지 못했다.






"셋중에 결국 내가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결국 그 새끼랑 만나게 되었어..

나는... 다 버리고... 다 잃었는데... 어떻게 해야해..? 너를 떠나는게 아니었는데...."



"이제와서 그런말 해봐야..."






곱씹어보면 더럽게 기분 나쁠 수 있는 말이다.


아니... 나쁠 수 있는게 아니라 그냥 나쁘지.


내가 그렇게 애를 쓸땐 싸늘한 표정으로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 모든걸 잃고나서야 나를 떠나는게 아니었다며 후회하는 꼴이라니


술기운에 계속 풀려나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무래도 멀쩡히 집에 보내려면 슬슬 일어나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시킨 안주도 채 나오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상태가 이래서야 느긋하게 주정을 다 받아줄 수 는 없겠다 싶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려는데..


이 대책없는 주정뱅이가 차마 못할 말을 내뱉고야 만다.






"저기.. 나 정말 힘들어서 그러는데.. 조금만.. 조금만.. 여자친구 몰래 만나주면 안돼..?"


"...뭐?"






순간 제대로 들은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녀의 불행을 확인하고 싶었고 그 불행에 나의 고통도 얹어주고싶었다.


날 떠나고 시작하는 그녀의 연애가 당연히 행복하지 않기를 바랬다.


이런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옹졸하고 추잡하다 생각해도 나는 분명 그녀의 불행을 꿈꿨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말을 꺼낼 정도로까지 무너지길 바란건 아니었다.






"몇달만... 조금만 만나줘...부탁할게"


"말도 안되는 소리 그만하고 물이라도 좀 마셔라"


"오늘.. 집에 안갈거지..? 같이 있어줘.."


"그만하라고"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술김에 하는소리가 아니라 진심을 말하고 있다.


과음은 그저 용기를 내기위한 액션이라 생각했는데, 술에 취한 것을 빌미로


자리를 마무리하려는걸 거부하고 날 붙잡아두려 하고 있다.


늦은 시간까지 발목을 잡아 끝을 볼 셈이라고밖에 설명되지 않는다.


분명 의미 없는 발악이라는건 알고있을텐데






"너 잠깐 그대로 앉아있어"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일 순 없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는 그녀를 두고 빠르게 근처 편의점과 약국에서 술깨는데 쓸만한 약이나 음료를 구해왔다.


술로 수작으로 부리겠다면 술깨는 약으로 응수하리라.


술깨는약이 사실 효과가 있으면 얼마나 있겠냐마는 저 상태로 냅두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갔다오는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사이 아까보다 수상할정도로 빠르게 술이 깬듯한 모습의 그녀..


약을 들고 돌아왔을때 버리고 간 줄 알았다고 하는걸 보면 충격에 약간 깬건지.. 아니면..






"약 먹고 10분만 있다 일어나자.. 집까진 데려다주지 않을거니까 술은 빨리 깨도록 해"






술한잔도 안마시고 차도 끌고왔는데 집앞까지는 태워줄 수 있지 않나 생각 했지만 


이전의 충격적인 요구때문에라도 오늘은 절대 어떤 여지도 주지 않으리라 다짐 했다.


생각보다 얌전히 약을 먹은 그녀는 잠깐 쉬고나니 걸을 수는 있는정도로 회복 되었다.


약을 사러 나갔던 중에 안주가 나왔고 빈속에 깡소주를 들이킨 대책없는 민폐 전 여친에게 


속 챙기라고 억지로라도 몇개 집어먹게 하고 술집을 나왔다. 





"약은 뭐하러 사온거야.."


"약먹을 소리를 하니까 사온거지. 이제 일어나 나도 이제 집에 가봐야 돼"


"그..."


"뭐 왜"


"아까 얘기했던건 그냥 잊어줘.."


"...기억 안난다"


"근데.. 진짜 안되겠지?"


"너 이ㅆ..."


"미안... 미안해...."





서서히 산 너머로 사라져가던 태양이 이제 완전히 떨어져 자취를 감춘 시간


그녀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차로 돌아와 시동을 걸었다.


집으로 출발하기 전 잠시 생각에 잠긴다.


오늘 나는 날 버린 그녀가 버려져 추락한 모습을 확인하고, 


혹시나 다시 나의 곁에 있을 생각이라면 


이제는 그럴 수 없다는걸 확고히 하기 위해 그녀를 만났다.


목적은 확실히 달성했기에 아마 앞으로 그녀를 보게 될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고


그녀 또한 오늘 이후로 나에게 연락하는 일을 없을거란 생각이 들었다.


원하던바를 하나도 이루지 못했고 꽤나 추태를 보였으니 이정도만 해도 연락하기는 충분히 껄끄러울테니까


우리의 만남은 6개월 전에 끝이 났지만, 오늘을 기점으로 그동안 떨쳐내지 못했던 자잘한 부스러기들마저 모조리


털어낸듯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확실하게 끝이 났다는 느낌이다.


이제는 날 지옥에서 꺼내준 새 연인과 행복한 추억을 쌓는데 노력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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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책이나 글을 읽는 취미를 들이면서 직접 써보고싶다는 생각도 들어 써보긴했는데

이걸 소설이라 할 수 있는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업무목적 외 장문의 글을 써본게 거의 처음이라

읽을만 하게 쓰긴 한건지 일단 여자측이 후회하는 입장인데 그.. 후회의 정도랄까.. 살리지를 못한것 같아서

이래서야 후회물의 범주에 들어가긴할지 객관적인 판단이 안되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