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나는 눈앞의 경광에 기함을 토했다. 무수히 많은 별들과 우중충한 이계의 신격이 어우러진 무대. 


그 위에 오른 등장인물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미지의 신격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채널 내 성좌들이 분노합니다!]


그들이 시선이 만들어 낸 기파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털이 곤두선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내 편이라곤 전무한 저 난장판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입안이 바짝 말랐다. 가슴 부근이 뜨거워지고 시야가 평소보다 좁아졌다. 


많이 긴장했나 . . . 아니다, 긴장과는 궤를 달리했다.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하고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무심코 입가를 만졌다. 입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열이 오른 이마를 쓸었다. 강렬한 도파민에 뇌가 타들어 가는 기분.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오랜 억압에서 벗어납니다!]


그렇다. 나는 흥분한 것이다. 


아주 오래전 '73번째 마왕' 에피소드를 읽었을 때처럼. '영원과 종장' 파트에서 희생과 구원의 역설을 깨닫고 전율했던 것처럼.


저 아름다운 난장판에 눈을 빼앗긴 것이다. 


1초를 수어번 쪼갠 찰나에, 나는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읽어내렸다. 번개가 치고 뒤늦게 도착하는 천둥처럼, 개연성 스파크가 번쩍일 때마다 준동하는 활자들. 


망가뜨리기엔 아까운 경광이었다. 그러나 나의 핏빛 손아귀는 이미 만개한 상태였다.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더 이상 읽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속전속결 입니다.]


그 말을 남기고, 나는 은하수를 향해 달렸다. 다른 마왕들도 자신이 맡은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움직였다. 


[시나리오가 허용된 개연성을 초과했습니다!]

[무대의 붕괴가 가속됩니다!]


힐끗 상부를 쳐다보니, 성좌들의 눈빛이 하나 같이 장난 아니었다. 농담 안 하고 내 살점을 뜯어먹고 싶어하는 눈빛들이었다. 


[<에덴>은 어디 갔나?! 저 미친 마왕들 안 잡고!]


집 갔는데?


대답해 줄 의무는 없어 그냥 지나쳐가던 중, 힘겹게 이계의 신격을 상대하던 한 성좌가 나를 손가락질했다.


[그대들은 자존심도 없나! '이계의 신격'에 맞서 공동전선을 꾸려도 모자랄 망정 - ]


[시끄럽다.]


푸욱! 


짧은 피륙음과 함께 나를 꾸짖던 성좌의 목이 떨어졌다. 분수처럼 치솟은 설화는 아몬의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아몬이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진체가 아닌 게 아쉽군. 맛이 없어.]


[이, 이 미친 자가!]


이에 대여섯 명의 성좌들이 아몬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정도 숫자라면 제아무리 아몬이라도 당해내기 버겁다. 지금 시나리오가 일반적인 국지전이었다면, 아몬은 치명상을 입거나 명을 달리할 게 분명했다.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경우에서는 말이다. 


쿠구구. 


전장의 한 곳이 갑자기 밤이 되었다. 아몬과 성좌들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저건!]


[. . . !]


그리고 누가 뭐랄 새도 없이 뒤쪽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앙!!!


그들이 있던 자리에 거대한 촉수가 떨어졌다. 이내 사방으로 요동치는 둔중한 무게에 성좌이고 자시고 전부 나가떨어졌다. 


다른 곳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속출하고 있었다. 의도치 않게 양면전선을 맞이한 성좌들이 정신 못 차리고 우왕좌왕하다가 암살에 성공한 마왕들을 놓치기 일 수 였다. 


지독한 혼전. 


성마대전에서 김독자 컴퍼니가 혼돈 수치를 올렸던 것처럼, 마왕들의 개입은 무대를 혼란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물론 이는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성좌들은 바보가 아니다. 거대성운들이 건제한 지금, 혼란을 수습하는 것은 시간문제겠지. 


그러니까 우리에게 유리한 무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성운을 흔들어야겠죠.]


츠츠츳!!


[성좌, '우레를 먹는 새'가 당신에게 이빨을 드러냅니다!]


말하기 무섭게 <베다>의 성좌가 나를 막아섰다. 

진명은 가루다. 

아몬처럼 머리가 새대가리인 설화급 성좌였다.


[여기까지다, 마왕.]


[팔부신인가요. 이거 곤란하게 됐군요.]


[호오, 내 설화를 아는 모양이군.]


가루다가 우쭐거리며 날개를 펼쳤다. 탐스럽게 반짝이는 푸른 날개엔 돌풍이 감겨 있어 깃털끼리 스칠 때마다 회오리가 몰아쳤다. 


썩어도 신이라는 건가. 


가루다가 격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포기해라. 너는 나를 이길 수 없다.]


[글쎄요.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이죠.]


본래 네 상대는 내가 아니었는데, 스스로 명을 재촉하는구나. 그가 <베다> 소속 성좌라는 것만으로 죽일 이유는 차고 넘쳤다.


서로 물러설 생각이 없음을 확인했으니 살육전은 피할 수 없었다. 짧은 비웃음을 흘린 가루다가 하늘로 솟구쳤다.


그의 날갯짓 한 번에 수십 가닥의 돌풍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콰콰콰!!


꽤 위헙적인 공격이긴 했으나 아가레스의 공격을 정면에서 받아본 나에겐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설화, '마계의 이단아'가 포효합니다!]


나는 클로를 가볍게 휘둘러 돌풍을 일시에 무마시켰다. 흩어진 바람 너머로 당황한 가루다의 표정을 보는 것은 꽤나 즐거운 유희였다. 


[생각보다 강해서 놀랐나요?]


[ . . . 무슨 수를 쓴 거지?]


나는 조금 전 동작을 천천히 재생하며 말했다.


[그대도 따라 할 수 있어요. 이렇게 힘을 빼고 휘두르면 됩니다. 참 쉽죠?]


이에 표정을 굳힌 가루다가 전신에서 격을 발출하기 시작했다. 전력을 다하려는 낌새였다.


[설화, '힘과 업의 신조(神鳥)'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가레스보다 약할 뿐이지 가루다도 만만한 성좌는 아니었다. 그도 엄연히 한 세계관의 주축이자, 신이었으니까.


다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영광일 뿐이다. 


과거의 영광에 취해 멈춘 존재는 느리더라도 끊임없이 나아가는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설령 그것이 한 세계관의 신일지라도, 시간 앞에선 전부 평등할지어니. 


[거대설화, '하나의 마계'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타성에 젖은 가루다는 나를 이길 수 없었다.


그것이 가루다의 패인이다. 


[크아아아!!]


영험한 빛을 내뿜던 가루다의 날개가 또 한 번 수십 가닥의 회오리를 쏟아 냈다. 아까와 다르게 가루다는 손을 뻗어 바람을 통제했다. 그의 손에서 돌풍이 실오라기처럼 엉키며 몸집을 키워나갔다.


콰콰콰!!!


본능적인 거부감을 지피는 자연의 굉음이 고막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그 가공할 기세에 몇몇 성좌들의 이목도 이쪽으로 쏠렸다. 


그들의 시선과 적의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침착하게 가루다를 향해 클로를 겨눴다. 마치 거울 속 자신을 가리키듯. 놈의 돌풍을 흉내 내어 클로에 성흔을 둘렀다. 


츠츠츳! 


핏빛으로 물든 클로가 날카로운 예기를 머금었다.


동시에 바닥을 강하게 짓눌렀다. 자세를 낮추고 시선을 위로 향했다. 전신의 근육이 찢어질 듯 아파왔는데, 응축된 마기가 내 안에서 난동을 부린 탓이었다. 설화까지 두르니 여러모로 죽을 맛이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다. 


모으고 또 모았다. 


화신체가 터질 때까지 모았다. 


그리고 이젠 태풍이라 불러야할 가루다의 공격이 그의 손을 떠나는 순간.


모든 것을 게워냈다. 


콰쾅!!!


지면을 박차고 쇄도하는 신형. 가속을 거듭한 화신체가 소리를 초월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단지 흐릿한 신형이 눈앞을 가리자 그것을 부숴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간혹 붉은빛이 보였는데 온몸이 따끔거리는 것을 보니 칼날 같은 바람에 살갗이 뜯겨 나간 모양이다. 이제와 멈출 수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간 것에 신경 썼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한없이 직진했고, 그 끝엔 가루다가 있었다. 손가락조차 까딱이지 못한 채로. 그저 경악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가루다. 


최후의 순간에도 그는 멈춰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표적을 맞추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었다. 


퍼엉! 


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주인을 잃은 깃털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날개를 펼친 반발력으로 가까스로 정지한 후 뒤를 돌아보자, 상반신을 잃은 화신체가 힘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성좌, '우레를 먹는 새'가 치명상을 입고 시나리오에서 이탈합니다!]


진체나 다름없는 화신체였으니, 살아도 산 게 아니겠지. 


결과에 만족하며 한숨을 내쉴 즈음, 서늘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다급히 고개를 돌리자 시야가 녹빛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아아아아아】


[이런.]


그것은 코앞까지 다가온 이계의 신격의 촉수였다. 그들은 성좌의 편도 아니지만 마왕의 편도 아니었다. 


대장격인 모략가의 심경의 변화가 있지 않은 이상, 이계의 신격들은 공평하게 설화를 가진 존재들을 말살시키려 들 것이다. 


방금 내가 보여 준 기술 때문인지 이번 목표는 나로 잡은 것 같고 말이다. 


아무튼 피하긴 늦어 그냥 무식하게 막으려고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목이 졸리는 느낌과 함께 촉수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누군가가 내 뒷덜미를 잡고 내뺀 모양이다. 


누구지? 


뒤를 돌아보자 재수 없는 면상이 보였다. 


[모략스?]


모래폭풍에 휩싸여 도주하는 모략스가 나에게 타박을 줬다.


[아까 흥분할 때부터 알아봤다. 네 표적은 어따두고 거기서 그 지랄을 떨고 있어?]


[ . . . ]


[뭐? 불만 있나?]


고개를 저었다. 불만은 없다. 나를 구해 준 마왕에게 불만을 가질 이유는 없으니까. 다만 조금 뜻밖이라 당황했을 뿐이다. 


내가 가진 의문을 알아차린 듯, 모략스가 말했다. 


[저번의 빚은 이걸로 갚았다.]


빚.


생각나는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레메게톤과의 격전에서 나는 위기에 빠진 모략스에게 내 인장을 던져 구해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이 오늘 돌아온 것이다.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흥. 뻔뻔한 소리군. 네 년은 빚이 있다면 이용해 먹을 족속이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순 없어 빚을 갚았을 뿐이다.]


뭐, 이유는 됐고. 아무튼 감사 인사는 해야겠지. 


[고마워요.]


[ . . . 오글거리는 소리는 집어치워라.]


쑥스러워하긴. 


나는 모략스의 손에서 내려왔다. 모래 발판의 감촉이 상당히 신기했다. 준비해온 아이템으로 화신체를 수리하는 동안, 모략스가 전황을 읊었다.


[우리가 거대성운만 노리는 것을 눈치챘는지 놈들과 연이 없는 성좌들은 구태여 맞서려들지 않더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성좌라고 다 성운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스타스트림>의 광할함을 떠올린다면, 오히려 성운에 속한 별들이 소수일 것이다. 


다만 성운을 이룬 별들이 강대한 설화를 가졌기에, 다수를 압살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그 과정에서 놈들은 성류방송을 통제하고 시나리오를 독점하는 만행을 저질러왔다. 


그런 횡포에 시달린 성좌들에게 거대 성운에 대한 좋은 감정이 남아있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때문에 척준경이나 제천대성 같은 성좌들은 우리를 힐끗 바라보기만 할 뿐, 나서지 않았다.


[꼴 좋군.]


척준경이 냉소적인 한마디를 던지면서 촉수들을 베어넘겼다.


'이계의 신격'이라는 좋은 핑곗거리도 있겠다,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 않는다면 빌어먹을 성운을 구하기 위해 마왕을 상대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싸워야 할 놈들만 싸우는 것. 


그것이 내가 유도한 이번 전장의 흐름이었다. 


전황을 살피던 모략스가 혼절 직전인 상급 도깨비를 보더니 문득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시나리오가 이 지경이 됐는데 네 말대로 대도깨비는 코빼기도 안 보이는 군.]


[뭐, 어디서 데이트라도 하고 있나 보죠.]


운 좋게도 저번에 신유승에게 강림했을 때 아슬아슬하게 이계의 신격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고로, 아직 내겐 소원권이 하나 남은 상태였다. 


나는 그것을 관리국을 막는 데 사용했다. 그러니까 아마 지금쯤 도깨비들은 혹부리들과 1대1 소개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오랜만에 '정욕'의 마신으로서 책임을 다한 듯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혹여 둘이 결혼해서 아기라도 낳는다면 종족은 무엇으로 정해야 할까?


혹깨비? 혹두꺼비? 


[설화,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흥미로운 수수께끼라 생각합니다.]


뭐,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도깨비들에겐 오늘이 사상 최악의 하루라는 것이다. 어쩌면 기념일로 지정될지도 모르겠네.


그나저나 이 모래 바람은 어디로 향하는 것일까.


그것은 얼마 안 가 알 수 있었다. 머지않은 곳에서 가루다와 비견되는 격이 다수 관측됐다. 


이계의 신격의 시체를 밟고 선 곳에, 한 성운이 있었다. 


<올림포스>


그중 12주신의 일각을 차지한 성좌가 내게 적의를 드러냈다.


[성좌, '흉포의 군신'이 당신을 노려봅니다!]


진명 아레스. 


과거 신유승을 죽이는 데 개연성을 보탠 성좌는 내가 점찍어둔 표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