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쇄도하는 우두머리 화산게를 등지고, 세라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 표정에는 비장함이 깃들어있었다.


"아, 안 돼!"


뭔가를 해보기에는, 용사는 너무 지쳐있었다. 그저 의미 없는 비명을 지르며, 세라를 향해 닿지 않는 손을 뻗을 뿐이었다.


우두머리 화산게의 여덟 다리가 땅을 울렸다.


극도의 흥분 상태 속에서, 세상이 느려졌다. 용사는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우두머리 화산게가 점점 세라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라가 죽는다.


용사는 저 우두머리 화산게가 세라와 부딪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있었다. 부드러운 세라의 살덩이가 사방으로 튀기고, 연약한 뼈가 조각나 부러지는 광경이 그려졌다.


"세라!"


이도저도 아닌 하프엘프는 용사가 될 수 없다는 편견, 하프엘프 여자는 불길하다는 멸시, 용사는 그것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지금까지의 여정을 견뎌왔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일말의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용사라는 주제에, 동료 한 명도 구하지 못 하고 있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었다.


세라는 유독 위험에 빠지는 일이 잦았다. 매 위기마다 행운이 겹쳐 세라가 어찌어찌 살아남기는 했으나, 그 중 단 한 번도, 용사가 직접 세라를 구해낸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 듯 했다.


'어쩌면 그 사람들이 옳았을지도 몰라. 나 같은 건 용사가...'


용사는 세라가 우두머리 화산게와 충돌하는 장면을 차마 바라보지 못 했다. 동료가 찢겨나가는 광경 따위, 볼 자신이 없었다. 대신 눈을 질끈 감고, 스스로의 유약함을 자책했다.


묵직한 파열음.


끈적하고 따듯한 액체가 용사를 흠뻑 적셨다. 용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탄식했다. 토하고 싶은 느낌이었다.


"아아... 아?"


하지만 스스로의 몸을 뒤덮은 액체가 푸른 색이라는 걸 확인하자, 용사의 절망스러운 목소리는 끝부분이 올라가며 곧 의아함을 표현하는 소리로 바뀌었다.


"세라?"


세라는 그 자리에 멀쩡히 서 있었다. 대신 우두머리 화산게는 묵직하고 견고한 무언가에 부딪힌 듯, 머리 부분의 갑각이 깨져나간 채 죽어있었다.


"이 화산게, 혼자서 발을 헛디디고 죽던데?"

세라가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


나는 처참하게 죽은 우두머리 화산게를 보며, 화산게가 혼자 발을 헛디뎌서 죽은 것으로 적당히 둘러댔다. <나하고 부딪혔는데, 얘가 졌어>라고 말할 패기는 없어서였다.  


"미안, 미안해! 내가 약해서... 흐흑, 흑... 세라, 미안해..."

울먹이는 용사가 달려와 나를 끌어 안았다.


다른 동료들도 용사의 뒤를 따라 나의 안전을 살폈다.


나는 용사가 내게 안긴 채 웅얼웅얼 하소연을 하게 내버려두고, 조심스럽게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나의 7번째 용사파티 이탈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계획 자체는 완벽했다. <살아라> 따위의 클리셰 범벅인 말을 건낸 뒤에, 돌진하는 우두머리 화산게에 치여서 날아가고, 슬쩍 폭포로 떨어져서 실종 처리.


이 쓸데없이 귀여운 몸뚱이가, 거대한 우두머리 화산게에 받혀도 다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나게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짠 계획이었다.


하지만 직접 계획을 실행해보니, 이 몸은 내 예상보다도 단단했다. 불구가 되지는 않더라도, 엄청나게 큰 우두머리 화산게에 치이면 엄청 아플 거라 생각하여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외려 나와 부딪힌 우두머리 화산게가 부숴져버린 것이었다.


축 늘어져 깨진 갑각 틈으로 푸른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우두머리 화산게의 모습은, 거의 화물차에 깔린 경차 꼴.


작은 것과 큰 것이 부딪히면 작은 것이 날아가는 것이 상식인데, 이번에는 큰 쪽에 참혹하게 박살났다. 질량 차이도 무시하는 파괴력을 보니, 이 몸이 대체 얼마나 강한 건지 가늠조차 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항상 내 계획은 이런 식으로 망가졌다. 중간 보스급과 마주칠 때가 되면, 나는 패배로 위장하고 용사파티에서 이탈할 그럴듯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러나 막상 계획을 열어보면, 이 지랄맞게 강한 몸뚱이가 의도치 않게 오히려 상대를 뭉개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격파한 상대가 이번 우두머리 화산게까지 합쳐서 모두 일곱.


하루 빨리 귀찮은 용사파티에서 벗어나 이세계에서 치유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이 쓸데없이 강한 몸이 탈출계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 좀 진정했어?"

이제 충분히 울었다 싶어, 나는 용사의 양 뺨을 잡고 얼굴을 쭉 밀어냈다. 용사의 눈물 때문에 어깨가 축축했다.


나와 눈을 마주친 용사가 빨간 눈으로 말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실은 아까부터 멈췄던 울음이다.


나는 용사의 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럼 오늘 점심은 화산게 전골로 하자. 거대 갑각류가 그렇게 맛있대."


"그래?"

용사가 울어서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 용사의 모습이 귀여워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나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렇다니까. 정말 맛있대. 저기, 화산게 해체할 줄 아는 사람? 없으면 그냥 내가 아무렇게나 해보고."


용사파티를 자연스럽게 이탈할 다음 계획보다는, 지금은 어떻게 화산게를 요리할지가 더 중요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