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요 근래 나는 고통받고 있다.


꿈같던 공기업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행복해야할 내가!


상사 하나 때문에 하루 하루 회사에 나가기가 싫다.



"민서씨."


"부르셨어요?"


"그럼 민서씨가 박민서씨 말고 또 누가 있죠?"


시비조로 쏘아붙이는 이 여자.


같은 부서의 상사인 임다혜 과장이다.


오늘은 어떻게 날 괴롭히려 할까?


"나 목 말라요."


"저기 정수기 있습니다만."


"민서씨."


한숨을 푹 쉰 임 과장은 날 매섭게 노려보았다.


"도대체 센스 어디다 팔아먹었어요?

내가 목마르다 하면 커피 마시고 싶다는 거 몰라요?"


"죄송합니다."


"죄송하단 말 듣는 거 지겨워요."


어쩌라는 건지.


악마같은 년.


"어쭈? 눈을 왜 그렇게 떠요?"


"아... 아닙니다. 눈이 뻑뻑해서요."


"민서씨만 눈 뻑뻑해요?

나도 매일 하루 종일 회사 앉아서 모니터 보면서 일하느냐 눈이 아파 죽겠어요."


무슨.


매번 탕비실가서 뒹굴거리고 외근 나간답시고 월루하는 주제에.


어이가 없지만 난 일개 사원일 뿐.


나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고 커피나 갖다줘요."


"알겠습니다."


"탕비실 캡슐커피 말고 스x벅스에서 사오세요.

스니커즈 프라푸치노 벤티, 생크림 올리고 논커피로.

법카 가져가지 말고 본인이 직접 결제하세요."


나는 당황했다.


논커피면 커피가 아니니까.


게다가 내 돈 주고 결제하라고...?


커피는 지출결의서 대상도 아닌데.


사탄도 울고갈 임 과장의 지시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고생 많으십니다."


"수고 많으십니다."


업무 중 유일하게 허락된 담배 타임.


옥상 정원에서 만난 타 부서 대리님과 담소를 나누었다.


날씨로 시작된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어느덧 회사 이야기로 번졌다.


"정 대리 얘기 들었어요?"


"총무부 정 대리님 말씀이시죠? 

아뇨, 무슨 일 있으셨대요?"


"고백했나 보대요."


"네?"


"윤 과장님한테요."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인지.


정 대리랑 윤 과장은 공석에서도 서로 호통치고 싸우는 사이인데.


"그랬더니 윤 과장님이 요즘 정 대리 피해다니느냐고 바쁜가봐요."


"윤 과장님이요?"


"그렇죠. 고백 공격 당했으니."


대리님은 담배를 깊게 들이마셨다.


"요즘 세상 참 무서워요. 민서 씨도 조심하세요."



오늘 있었던 대리님과의 대화가 머릿 속에 맴돌았다.


미친 여우라고 악명이 자자한 윤 과장을 한번에 보내버리다니.


대체 고백 공격이란 게 뭘까...


나는 무엇에 홀린 듯 인터넷에서 고백 공격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는 전율했다.


다양한 사례를 보면서 나는 확신이 생겼다.


같은 여자한테 고백 받으면 더 당황스럽겠지?


악마같은 임다혜를 한번에 보내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나는 칼을 갈았다.



"민서씨. 잠깐 나좀 봐요."


역시나.


다음날 바로 임 과장은 나를 찾았다.


"어제 시킨 일 왜 안하고 갔어요?"


"차장님께서 하시겠다고 업무 인계해달라고 해서 직접 인계해드렸습니다."


"그럼 나한테 보고를 했어야죠!"


"어제 외근가신 뒤로 복귀 안하시고 퇴근하셨잖아요."


"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으면 어쩔 건데.


"됐고, 저기 생수기 물통 좀 바꿔놔요."


"제가 왜요?"


"뭐라고요?"


임 과장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다.


"키도 크면서 그정도도 못해요?"


"키랑 물통 교체랑 무슨 상관인데요?

분명 오늘 당번 임 과장님이시잖아요."


"아니 같은 여자면 알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여자인데 저 혼자 하라고 지시하는 건가요?"


"박민서씨."


"네, 임다혜 과장님."


임 과장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똑똑히 들어요."


머리를 뒤로 넘기고는 한 발자국 더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상사고 당신은 부하 직원이에요."


"맞아요. 근데."


"근데?"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뭐가요?"


"저 회사 다니기 너무 힘들어요.

이제 그만 좀 해주세요."


"그럼 평소에 좀 잘하시던가!"


임 과장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반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수 밖에.


"그게 아니라."


"?"


"과장님이 저한테 계속 관심가지시니까 업무 집중도 잘 안되고..."


"네?"


"과장님이 점점 더 좋아진다고요!"


"저희 같은 여자라고요...?"


어라라.


왜 갑자기 얼굴이 빨개진 건데.


소녀같이 왜 다리를 꼬고 손을 매만지냐고.


평소 볼 수 없었던 악마 임다혜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원래 예쁜 건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까 진짜 연예인 못지 않다.


너무한 건가...


마음이 약해질 무렵.


난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물러날 순 없다.


확실하게 보내버려야 하니까.


"뭐 어때요? 사랑하는데 성별이 중요해요?"


임 과장은 후다닥 사무실을 뛰쳐나갔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리고 그 날 오후.


임 과장은 반차를 썼다.


엄청난 충격이었겠지.


사내엔 소문이 싹 돌았고 난 크싸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럼에도 상관 없다.


날 괴롭히던 미친 년을 없앴으니.


아 너무 속이 후련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초창기에 진작 고백할 걸!


업무 내내 싱글벙글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민서씨."


예상치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


당분간 말을 걸지 않을 것 같았던 임 과장이 내 앞에 섰다.


"나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네."


"나 예전부터 둔하다는 소리 많이 들었거든."


"네?"


"그래서 상대방이 나한테 호감 갖는지 안갖는지 구별을 잘 못했었어."


"그러세요?"


"응, 그래서 민서씨한테 함부로 해서 미안했어.

민서씨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거든."


하.


첫 입사 때 부터 그렇게 갈궈대면 안 싫어할 사람이 있겠냐고.


"이상형한테 미움받아서 더 나쁘게 굴었던 거 같아."


"네...?"


"키 크면서 쿨하고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가 이상형이었거든."


이상형이라니.


뭔가 잘못 흘러가고 있음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민서씨가 그랬지?

사랑하는데 성별이 중요하냐고."


"아... 그... 그게..."


"기뻤어."


"네...?"


"나, 사실 여자 좋아하거든."


갑자기 귀에 삐 소리가 들렸다.


바닥이 갈라지고 땅 밑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


나는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잘 부탁해. 민서씨."


동료들의 열띈 환호와 박수 갈채.


과장은 눈물을 흘리며 행복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나는 원치 않게 악마 과장과 연인이 되었다.


고백 공격은 실패로 끝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