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치오리가 앞으로 나와 푸리나의 손을 쳐 내 검을 떨어트렸다.

팔을 잡고 업어치기 까지 속전속결로 이어지며 푸리나의 몸이 붕 떠올라 거실에 내동댕이쳤다.


잠시라도 망설이거나 주춤 했더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를 푸리나에게 당하는 건 치오리였다.

목숨이 달린 상황에서 먼저 움직여야만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다.


지금 푸리나는 자신이 치오리 라는 최면에 걸린 광인이었다.

자기 존재, 인생 자체를 빼앗으려는 정신 나간 여자다.

선을 넘은 푸리나에게 느껴지는 감정은 분노와 의문이었다.


내동댕이 쳐진 푸리나는 텅 빈 눈으로 천장을 보고 있었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돌연 부티크에 와 자신을 도발하며 이야기했던 연극에 대한 일이 떠올랐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 모든 일이 차근차근 시작된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처음에는 친구였거든. 걔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사귄 친구야. 같이 있으면 매일이 즐거워."


끝나지 않는 연기로 미치기 직전에 자기 내면으로 들어와 구제의 손을 내밀었고. 혼자서 감당해야 했던 짐도 덜어 준 고마운 사람이다.


전부 다 끝나고 내려놓고 도망치듯 떠났을 때도 곁에 있었고 바라는 거 하나 없이같이 노는 시간이 즐거웠다.


"매일이 즐거워서 어느새 좋아하게 됐어. 친구가 아니라 쭉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 됐지만 차마 말할 수 없었지. 혹시라도 지금의 행복이 깨질까 봐."


일어난 푸리나가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하더라."


그때 마음은 쓸쓸했지만 친구의 사랑을 응원 했다. 이미 자신은 충분히 행복했기에 친구 이상의 관계는 사치 라고 생각했다.


"정말 진심으로 너를 사랑했다고 그 녀석은, 그런데 너는 왜 그랬어? 너만 바라봤잖아. 너만 사랑했잖아."


해서는 안 될 행동이라는 걸 알았지만 푸리나는 몸을 섞어가며 위로를 했다.


이후로 접어두었던 자기 마음마저 억누를 수 없게 됐고 치오리가 무명의 이방인을 밀어낼 수록 푸리나는 서서히 자신으로 덧씌워가며 마음에 자리 잡으려 했지만, 그가 바라는 사람이 푸리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을 때 절망했다.


친구 이상의 관계로 나아갈 수 없으니. 때마침 치오리가 무명을 버렸을 때 증오 보다 삐뚤어진 욕망이 솟구쳐 올랐다.


"그래도 그때만 해도 레플리카로서 위로하려고 했어. 대체품으로서 달래주려고 했는데, 두 번이나 그 녀석을 부순 거야. 네가!"


"나한테는 아까울 만큼 좋은 사람이지."


"나는 얻을 수 없지만 치오리 너라면 가능해. 그러니까 이제 내가 치오리가 될 거야. 걔가 원하는 이상의 여자가 될 수 있어. 나는 뭐든지 해 줄 수 있고 진심을 다 해 품어 줄 수 있어."


일련의 사정을 듣고난 치오리는 한숨을 쉬었다.


"미쳤구나."


"네가 미워."


"이쯤에서 그만둬. 친구로서 마지막 기회야. 없었던 걸로 해주겠다고. 네가 이런다고 원하는 대로 될 것 같아? 결국은 나를 흉내 내는 것에 불괴하잖아."


"이제부터 내가 치오리가 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이제 퇴장해!"


강함은 사람의 마음에서 온다고. 달려든 푸리나는 치오리와 동일한 완력과 기술 그리고 움직임으로 덤벼들었고 치오리는 자기 자신과 맞서는 기분을 느꼈지만 한 가지 다른 사실이 있다면 푸리나에게는 광기와 망집에 가까운 집념이 있다는 사실이다.


치오리는 제대로 된 공격 한번 해 보지 못하고 패대기 당했다.


푸리나에게서 절대 지면 안 된다는 망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레플리카는 광기와 집착만으로 진짜를 뛰어 넘었다.


"이러면 비참해지는 건 너뿐이야."


제압 당한 치오리는 곳곳에 멍이 들었고 머리에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위에 올라탄 푸리나가 검을 들어 치오리를 겨누고 있었다.


"둘이 행복했더라면 지켜만 볼 생각이었어."


"나는 그 녀석을 좋아할 수 없었어."


치오리가 자포자기로 안기면서 기회를 준 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을 알 수 있도록 그동안 결여된 감정을 채워주기를 바랐다.

그의 진심에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노력했지만 끝내 애 쓰는 사람은 사랑을 갈구하는 쪽이다.

치오리는 끝내 그를 이해할 수도 사랑을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비참해지기 전에 상처 받기 전에 관계를 끊어내려고 자신을 잊도록 그렇게 차갑게 버리듯했지만 완전히 끊는 게 어려웠다.


"알아. 너를 연기하다 보니까 이제 안다고."


레플리카가 되는 과정에서 치오리가 어떤 심정인지 전해져 왔다. 그만큼 연기의 몰입되다 못해 치오리 그 자체가 됐다.


"부수지는 말았어야지."


"네가 틀렸다고는 생각 안 해? 돌아보면 그 정신 나간 짓이 그 녀석에게 도움이 됐을까?"


"아니."


푸리나가 검을 들자. 치오리는 손을 뻗어 널브러져 있는 다른 검을 잡았다.


"일방적이라는 거 나도 알아. 그런데 사랑은 말이야 덧씌우는 거야. 상대방이 나를 사랑하고 미치도록. 그 과정이 미쳐보여도 결국에는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거지."


치오리에게 향할 것만 같았던 검은 다름 아닌 푸리나 자기 복부를 찔렀다.


"너 뭐 하는 거야!?"


이보다 더 정신 나간 상황을 거듭 겪은 치오리가 화들짝 놀랐다.


"이제… 네가 푸리나가 되는 거야. 진짜는 이제 퇴장해야 해."


푸리나를 완전히 지우고 새로운 푸리나가 무명의 곁에 있을 거다.


푸리나는 필요한 존재. 유일한 친구로서 남아 있을 필요가 있었다.


"너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걸로… 됐어… 푸리나는 이제 퇴장… 네가 레플리카야…"


"모르겠어. 그냥 미쳐 있다고 이 모든 상황이! 너도!"


푸리나는 웃고 있었다. 검을 찔러 넣은 부위를 중심으로 피가 흠뻑 베어 나오고 있다.

당장에라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다.


"차라리 진심을 말하라고! 이딴짓을 한다고 해서 뭐가 되는데!"


결과가 어떻게든 차라리 부딪혀 보는 게 낫다고. 그 녀석 처럼


"나를 봐주지 않으니까… 그 녀석은…"


그리고 무섭다고 말하는 푸리나는 광인 같이 웃으며 상처에서 검을 뽑았다.

뿜어져 나오는 피를 꾹 누르고 푸리나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자신이 쓴 새로운 대본이라며 치오리에게 내밀었다.


"오늘부터 네가 맡을 역할은 푸리나야."




시간이 지나면서 치오리에 대한 감정도 정리 되었고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정말로 치오리를 잊었냐고 묻는다면 아니었다.

푸리나의 광인 같았던 연기는 치오리를 떠나보내면서 멈췄다.

사실 치오리를 정리하게 된 계기는 치오리의 레플리카를 연기하는 푸리나 때문이었다.


전부 다 정리했다고 앞에서 말하는지금도 눈앞에 푸리나가 정말 푸리나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지금 당장 치오리가 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몸은 괜찮아?"


"응."


잠시 안 본 사이 푸리나는 더 왜소하고 야위어 보였다.

처음 푸리나를 만났을 때처럼 소극적이고 약한 모습이었다.


"치오리는 이제 떠나보낸 거야?"


"어울리지 않았어. 이쪽에서 일방적으로 좋아했을 뿐이야."


이따금 푸리나와 치오리가 겹쳐 보였다.


레플리카에게 덧씌워진 기억이 아직 남아 혼란을 줬다.

시간이 지나도 깊게 뿌리 박혀 뒤흔들었던 레플리카는 독 처럼 남아 스며 들었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짓 그만둬. 예전처럼 친구로 있어 줘."


"아. 알겠어."


푸리나는 계속 불안 해 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아무것도… 미안 해, 오늘은 먼저 가 볼게."


"너 이상해. 전에는 더 이상했지만 지금도 이상해."


"네가 생각하는 짓은 이제 안 해. 그거면 됐잖아, 나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치오리의 레플리카를 연기한 바람에 최근 정체성의 혼란과 불안증세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히며 푸리나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지만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니었다.


푸리나에게는 다 잊고 정리한 척했지만 치오리에게 미련이 남아 있었다.


일단은 푸리나는 예전처럼 돌아왔고. 변화는 한 가지 더 있었다.


"어서 와."


쉽게 들어가지 어려웠던 부티크에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고 치오리는 예전과 다르게 웃으며 반겼다.

그렇다고 연인은 아니고. 친구와 연인의 중간. 애매한 사이를 오고 가는 정도다.


특별히 무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날 몸을 섞고 이별하고 난 다음 서로 만나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스쳐 지나간 작은 인연으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치오리는 예전과 다르게 부드러워져 있었다.


"단골들 보다 자주 온단 말이지."


부드러워졌어도 여전히 치오리였다.


"오자마자 정곡을 찌르는 거냐고."


"안 그래도 지난번에 얘기 했던 옷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잘됐네."


"정말 괜찮은데."


"똑같은 옷만 입으니까. 남성복은 홍보할 기회가 없었는데 서로 윈윈 하는 거지."


잠시 커피를 가지러 가겠다고 치오리가 잠시 뒤쪽으로 가고 쨍그랑. 깨지는 소리에 달려가니. 치오리가 배를 잡은 채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괜찮아?"


치오리를 일으켰다. 배를 잡은 손이 빨갛게 물들어 있어 놀라고 있는데.


"지난번에 다쳤는데 조금 벌어진 것 같아."


"다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부티크에서나 일상에서 다칠만한 상처 같지 않았다.


"치료 좀 받고 쉬어야 하니까, 이따 집에서 보자."


이 위화감은 도대체. 최근 들어 일상에서 두 사람에게 위화감이 느껴졌다.


"치오리 잠깐만."


"왜?"


"어쩌다 다쳤는지 물어봐도 돼?"


"푸리나랑 언쟁이 있었어. 그 과정에서 재단을 위해 둔 검이 떨어져 베였거든."


치오리도 레플리카에 대한 일을 알고 있었지만 다 끝난 일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푸리나가 레플리카를 그만둔 시기와 두 사람이 언쟁을 벌인 시점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알고 있었구나."


"너도, 푸라나를 탓할 생각은 없어. 다 끝난 일이야. 서로 잊으면 돼. 계속 끌고 가 봐야 좋을 것도 없잖아."


"쉽지 않지."


"푸리나 얘기가 나와서 그런데 언제 한번 보고 싶네. 잘하는지."


"뭘? 푸리나는 아직 혼란스러운 모양이야. 나중에 내가 물어볼게."


"잘하고 있으면 그걸로 된 거야."


치오리는 배를 부여 잡고 상처를 치료 해야겠다며 부티크의 마감을 맡겼다.


그런데 보통은 저렇게 아픈데 웃지 않잖아.


이상하다. 또 거슬리는 위화감이 들었다. 이번에야말로 레플리카가 아닌 치오리가 분명한데 푸리나에게 느꼈던 위화감이 들었다.


아니야. 계속 지켜본 결과 치오리가 확실했다. 기분 탓이겠지.





세상에 저는 X같은 글을 12편이나 올렸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