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아가씨는 약지에 낀 사파이어 반지를 빼서 내 손아귀에 쥐어주었다. 아가씨에게 사랑을 고백했던 그 날, 기쁨에 찬 눈물을 흘리던 아가씨의 눈을 닮은 푸른 눈망울이 오늘 제 주인을 잃었다.


 "제 출신이... 비천하기 때문입니까?"


 집사와 아가씨, 평민과 귀족, 이어질 수 없는 신분이란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난 아가씨의 백마 탄 왕자님이 아니니까, 악역영애인 아가씨를 소설 속 배드엔딩에서 구해낸 것은 나밖에 모르는 사실이다.


 아가씨가 행복하다면 내 마음 따윈 보답받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던 걸까. 그런데 아가씨에게 돌아온 대답은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너, 바람필 거니까."


 바람? 내가 아가씨를 두고 바람이라니, 모함도 이런 모함이 없다.


 설마 내가 아가씨를 배신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렇게까지 내가 신뢰를 주지 못했냐고 물으려던 찰나 내 앞에 한 권의 책이 떨어졌다.


 '악역영애의 집사가 되었다'


 마치 전생의 인터넷 소설 같은, 이질적이면서도 친숙한 이름의 책. 아래 나열되어있는 태그들까지 보면 더욱 그런 소설 같았다.


 "태그 하렘, 누군가의 악질적인 장난같은 얘기네."


 책에서 위로 시선을 들어올리자 그곳엔 얼음장처럼 차갑게 날 내려보는 아가씨의 시선이 있었다.


 "처음엔 너와 날 염탐한 누군가가 날 흔들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일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렇게 믿고 싶었고."


 하지만 아니더라


 이어지는 아가씨의 말투는 담담하면서도 평소와 달랐다. 아가씨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찍어누른 울분이 느껴졌다.


 "오늘 네가 한 프로포즈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 책의 내용과 똑같았어, 감동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얼빠진 아가씨는 여기 없지만 말이야."


 아가씨의 비난은 부당했다. 이건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즉, 원작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그러나 아가씨가 내게 들이민 책의 구절에는 내 청혼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책의 앞 장에는 그간의 내 행적부터 내적 고민까지 소스라치게 놀랄 만큼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태그 캣파이트, 내가 발정난 암고양이들이랑 널 두고 경쟁이라도 하길 바랬어?"


 청혼의 뒷부분 이야기인가 싶어 책을 넘겨봤지만 읽을 수 없었다. 누군가 뒷장부터 사정없이 찢어버려서 글자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정황상 이런 일을 할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네가 원작이라 부르는 몰락에서 날 구해준 건 고맙게 생각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많은 걸 숨겨온 것도 그걸 이용해 날 기만해온 것도 명백한 사실이잖아."


 그러니까.


 아가씨는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윽!"


 갑작스레 날라온 아가씨의 발길질에 중심을 잃고 그만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아가씨가 나한테... 왜?


 "이제 내가 되갚을 시간이야."


 내가 망연자실하게 쓰러지자 아가씨는 그대로 몸을 겹치듯 내 허리 위에 앉는다.


 "네가 날 구해줬듯이 나도 널 구원해줄게."


 아가씨는 두려우면서도 다정하게 내 귓가에 속삭였다.


 "하렘순애라는 끔찍한 운명에서."


 영문 모를 속삭임이 끝나자마자 아가씨는 내 허벅지에 정체모를 주사를 꽂았다.


 따끔하던 고통도 잠시, 허벅지의 통증도 책에 대한 의문도 모두, 암전하는 시야 속에 의식 저편으로 흩어지기 시작한다. 하렘순애라는 터무니 없는 단서만 남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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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렘순애를 죽입시다

하렘순애는 나의 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