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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18편 입니다.



따지고 보면 17-2편이라는 말이 좀 더 맞겠습니다.

그래도 큰? 에피소드 하나가 끝났네요.

계획으로는 이런 게 아직 두 개는 더 남았는데 과연 언제쯤 완결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읍니다.

따흐흐흐흑








* 지난 화와 이번 화는 보기에 좀 (성적으로) 불쾌한 표현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 본문은 픽션이며,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를 조장할 의도는 일체 없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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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18.




 사내 네 명의 아귀다툼은 몇 분을 더 이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먼저 달려들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매부리코는 회칼을 들고 있었고 뒤에 두 명이 더 있었지만, 경비원은 사거리가 훨씬 길고 묵직한 도끼로 무장한 상태.

 먼저 덤비자니 자신만 크게 다치거나 죽을 가능성이 높았다.


 반대로 경비원은 매부리코를 먼저 때려죽여도 뒤의 둘이 달려들면 당해내기 어려웠다.

 상대도 50줄에 다가가는 연배인 데다가 오랜 떠돌이 생활로 몸이 많이 축났다지만, 자신은 이미 환갑을 넘은 몸.

 체구도 왜소하기에 육탄전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선공 대신 입씨름만 하는 상황.


 그런 어정쩡한 대치는, 딱 소리와 함께 경비원이 썩은 짚단처럼 앞으로 고꾸라지며 끝났다.



 “이 씨불알 노데기(*노인네), 종간나 새끼!”



 콘솔박스 너머로 몸을 어정쩡하게 내민 조수석의 사내.

 안면에 피 칠갑을 한 놈은 갑작스럽게 움직여서 현기증이 돌았는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 손에는 두피 조각과 피가 묻은 장도리가 들려 있었다.


 뒤통수가 깨진 늙은 경비는 엎어진 채 신음을 흘렸다.

 벗겨진 머리카락 사이로 찢어진 머릿가죽, 원형으로 깨진 두개골과 그 사이의 분홍빛 뇌수가 보였다.

 밖으로 흐르는 피는 얼마 없었지만, 뼛조각에 찢어진 경비의 뇌는 빠르게 부어 오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꿈틀거리며 어떻게든 일어나려는 경비원에게, 이미 잔뜩 흥분한 매부리코가 잽싸게 달려들었다.



 “칵 뒤배디라이(*뒈져라), 똥통에가 처배길 노데기 같으니!”



 발로 경비원의 등을 짓밟은 놈은, 역수로 쥔 회칼을 경비원의 목덜미와 등, 옆구리에 마구잡이로 찔렀다.

 입에서 침과 피를 쏟으며 단말마를 내지르는 경비원.

 하지만 이미 머리가 터져서 뇌수를 흘리는 노인이, 무자비한 칼질을 버틸 방법은 없다.


 도살당하는 돼지처럼 버르적거리던 경비원은 이내 숨이 끊어졌다.

 어찌나 찔러댔는지 등골이고 뒷덜미고 성한 곳이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매부리코는 씩씩거리며, 시체의 훤히 드러낸 목뼈에 회칼을 꽂았다.

 얇은 칼날이 휘어지면서 가운데가 뚝 끊어졌다.


 매부리코는 성질을 부리며, 토막 난 회칼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조수석의 사내, 구 씨는 긴장이 풀린 듯,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어지러운 모양이었다.


 중년인이 놈의 머리를 지혈하는 동안, 기름때 면상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기런데 해면(*이러면) 운뎐이래 니가(*누가) 하간?”



 그 말에 매부리코는 찬물을 얻어맞은 것 마냥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방금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깨닫은 것이다.


 놈들 중에서 이런 대형 밴을 몰아본 자는, 지금 죽어 널브러져 있는 경비원 뿐이었다. 


 대전 이전의 북한에서는 운전면허 취득이 훨씬 까다로웠고 차량 소지도 어려웠다.

 핫바지 밀수꾼, 해외 건설 노동자, 협동농장 작업반장이 자동차를 몰아볼 기회 따윈 거의 없었다.

 그런 사정은 지금의 연합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었다.

 어찌 보면 목숨만큼 귀한 포르네우스 기름을 소모하는 차량 따윈, 난민들에게는 사치품이나 다름없으니.


 중년인은 자신에게 꽂히는 여러 시선에, 난감한 듯 손사래를 쳤다.



 “내레 고조 휘파람 1607이나 몰아봤지 이런 창전 같은 큰 놈이래 맨져본 적도 업수웨다.”



 북한 시절 약사였던 놈은, 그나마 이들 중 가장 부유하게 살아본 자였다.

 그래서 옛날에 평양에서 2종 면허를 딴 적은 있었으나, 이런 대형 차량을 몰아본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나마 그것도 이면세계 대전이 터지기 전까지의 이야기일 뿐.

 6년의 떠돌이 생활을 거친 지금은 시동 거는 방법이나 기억나면 천만 다행이었다.


 맨 뒷좌석에서 졸고 있는 노인에 이르러선 기대조차 할 수 없었다.

 매부리코는 노인을 보고 혀를 찼다.

 그는 얼마 전부터 치매기가 왔는지 영 이상한 소리나 하고, 틈만 나면 졸기 일쑤였다.

 학질(*말라리아)이라도 걸린 건지 며칠에 한 번씩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도 했고.

 기름하고 습격에 필요한 도구들을 마련해온 전주(錢主)라 데려온 것이지 안 그랬으면 진작에 내다버렸을 터였다.


 아무튼, 결국 이 차를 몰 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셈이었다.

 차가 없으면 사실상 시간에 맞춰 인천까지 가기란 불가능.


 매부리코는 그나마 가망성이 있는 중년인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래두 시도는 해 봐야 쓰지. 어드랬든 인천꺼정으 가야 남한에 발이라도 붙여보지 아이 하겠소.”

 “…그래 죽이긴 왜 죽이서래…”



 매부리코는 찢어진 머리를 원피스 조각으로 누르고 있는 조수석 사내를 곁눈질하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대구리가 깨지가 차승(*어차피) 살아두 싸람 구실 못 했을 거이야. 그래서리, 어쩔기오? 운뎐해 볼 테냐, 아니문.”



 생략된 뒷내용이 무엇일지 중년인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기세등등함은 어디로 갔는지, 절박함에 놈들의 눈깔이 번들거렸다.


 중년인의 등골이 찔끔 떨렸다.

 여기서 못하겠다고 했다간 잘해봐야 린치.

 수틀리면 자신도 경비원처럼 죽여서 내버릴 놈들이었다.

 그리고 어딘지도 모를 이런 곳에서 조난당하는 것보다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해보는 게 낫기도 했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바지를 주섬주섬 챙겨 입는 중년인.

 놈을 뒤로 하고, 기름때 면상은 창문을 내리는 스위치를 더듬거리며 찾았다.

 차 안에 가득 찬 비릿한 피비린내 때문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매부리코는 밴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뒤 경비원의 시체를 손가락질했다.



 “쓰잘데기 업는 짓거리 하디 말구, 걸르덩(*얼른) 이놈 시체나 내그버리디(*내다버리지).”

 “차라리 그게 낫갓구만.”



 열린 문 밖에서 신선하고도 후덥지근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쨍하니 내리쬐던 햇빛은 어느 새 먹구름 뒤로 자취를 감춘 상황.

 당장 소나기라도 오려는 듯, 축축한 식물과 흙냄새가 밀려왔다.

 차량 안의 피비린내와 뒤섞인 그 냄새는, 뭐라 말할 수 없는 불쾌감을 놈들에게 안겼다.


 매부리코와 기름때 면상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체의 팔다리를 잡아 들더니 바닥에 질질 끌며 내렸다.


 자유로는 연합에서 거의 관리를 안 했기에, 아스팔트는 울퉁불퉁했고 차선을 표시하는 페인트는 다 닳아 없어져 있었다.

 가드레일은 흉물스럽게 휘어진 상태였고 부서진 태양광 패널 위에는 군데군데 새 둥지가 자리잡았다.

 그 너머로 펼쳐진, 갈대와 이름 모를 키 큰 식물들이 울창하게 넝쿨진 습지.

 예전보다 한참 수위가 낮아진 한강변은 질퍽한 늪이나 마찬가지였다.


 수풀 안에서 뭔가 돌아다니는 듯 간간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길고양이일 수도 있었고, 멧돼지일 수도 있었다. 살쾡이일 수도 있고.

 무엇이 되었든, 저 너머로 시체를 버리면 아마 하루도 못 되어 들짐승들의 밥이 될 게 뻔해 보였다.



 경비원의 시체가 아스팔트 위로 질질 끌리며 까만 핏자국이 남았다.

 둘은 그 시체를, 넝쿨투성이의 휘어진 가드레일 너머로 집어 던졌다.

 빗자루 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풀 너머로 사라지는 몸뚱이.


 매부리코는 피 묻은 손을 옷에 문질러 닦으면서 투덜거렸다.



 “진창 한바탕 쏟아지꺼 같으이. 발써(*벌써) 장마철이오?”



 아직도 코끝에 맴도는 비린내를 손 끝으로 저어내며, 기름때 면상이 그 말을 받았다.



 “아주 기래 쌔완하게(*시원하게) 내랬으문 좋겠구만. 요좀 날두 에지간히 더워야디.”

 “장마라 하문 좋은 기억이 없다. 걸르덩 가기나 하기오.”



 밴으로 돌아온 두 난민.

 때마침 시동을 거는데 성공한 중년인이 놈들에게 말을 걸었다.



 “남한 자동차는 치차(*기어) 바꾸는 법이래 내 도통 몰르겠어서 아무래도 남남이(*천천히) 몰아야 하갓서.”

 “지금이 몇 시오?”

 “11시하구 27분.”



 매부리코는 머릿속으로 남은 시간을 계산해보고는 대답했다.



 “2시꺼정 가야 하이 시간은 수두구리(*넉넉)하구만. 탈 안 날 정도맨치로만 속도 내라.”

 “그리 해야간. 글구 거모사니, 그 마법소녀인지 뭔지 하는 간나는 어찌 할 거인?”



 그 말에 둘은 마법소녀를 다시 떠올렸다.

 도끼를 든 경비와 대치하느라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혹시나 문을 열어놓은 사이에 밖으로 도망치기라도 했으면 낭패였다.

 도망칠 힘이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여자는 체구가 작아서 수풀 사이로 숨어버리면 찾아낼 방법이 없었다.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둘에게, 혈색이 좀 돌아온 구 씨가 한쪽을 손가락질했다.



 “더구메(*저기) 좌석 밑이래 숨는 걸 봤디.”



 놈이 가리키는 곳은 중간 좌석 밑의 좁은 공간이었다.

 매부리코는 그곳으로 고개를 숙여 살폈다.


 두 다리가 없는 작달막한 체구의 마법소녀가 웅크린 채 쓰러져 있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없던 군청색 빛무리가 그녀의 피부를 둘러싼 채 깜빡였다.

 검붉은, 혹은 보라색 멍 위를 덮은 빛은 어딘가 모르게 섬뜩한 느낌을 줬다.



 매부리코는 마법소녀가 마법을 쓰는 걸 한 번도 직접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게 뭘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놈의 관심사는 여자가 살아있는지 여부 뿐이었다.

 살려서 국정원에 넘겨야 부산행 티켓이 보장될 뿐더러, 싸늘한 시체를 겁탈하는 취미는 없었으니까.


 흉곽이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걸로 봐서 다행히 살아는 있는 듯했다.

 주변의 매트에 물이 흥건한 걸로 봐서는 실금이라도 한 모양이었다.

 응당 나야 할 지린내가 전혀 없는 게 좀 이상하긴 했으나, 놈에게는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매부리코는 정인의 뭉툭한 왼쪽 무릎을 두 손으로 잡고 좌석 밖으로 끌어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이 거친 매트에 이리저리 긁히며 끌려 나왔다.


 검은 바닥 매트 위에 나뒹구는 정인의 유백색 나신.

 완전히 실신해버린 듯 거친 취급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걸 본 기름때 면상은 무심코 울대를 울리며 군침을 삼켰다.

 이곳저곳이 피범벅에 얻어맞은 곳은 멍 투성이였지만, 여전히 상등품의 여체.

 기절했으니 반항하는 걸 억지로 능욕하는 맛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감지덕지라 할 만했다.

 주변에 떠도는 불길한 색의 빛은 놈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매부리코가 어정쩡하게 걸친 바지를 다시 벗는 사이 기름때 면상은 정인을 똑바로 돌려 눕혔다.

 그 와중에 왼쪽 어깨가 이상한 방향으로 돌아가며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부은 눈꺼풀 밑으로 가늘게 뜬 파란 눈동자는 초점이 전혀 없었다.

 터지고 갈라진 입술 사이에서는 실바람 같은 숨소리만 새어 나왔다.


 놈은 한쪽 손으로 정인의 턱을 붙잡고는, 그녀의 윗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잇몸을 혀로 핥았다.

 그러면서 한쪽 손은 목덜미, 가슴, 겨드랑이 등 부드러운 곳을 탐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읍…”



 숨이 막히는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도 정인은 꿈틀거렸지만, 그 몸짓은 매우 미약했다.

 개미 하나 떨쳐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와중에 털투성이 하체를 그녀에게 들이민 매부리코는, 곧 맛볼 처녀의 속살을 기대하며 짐승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 웃음을 들었는지 운전석에서 중년인이 짜증을 부렸다.



 “야 이 못된 것들아. 나 없이 네놈들끼리만 재미 보니?”

 “동무 돌려먹으껀 냄겨 놓을끼니 운뎐이나 날래 하라우.”



 그 와중에 머리를 지혈하던 구 씨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을 받았다.

 조금 전부터 마법소녀의 몸에서 발광하는 빛이 영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좀 전부터 눅눅해지기 시작한 차 안의 공기도 거북살스러웠다.


 하지만 놈 역시 지금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곧바로 알아차릴 순 없었다.

 기름때 면상이나 매부리코와는 다르게, 구 씨는 마법소녀가 마법을 행사하는 걸 직접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몇 년이나 된 일이었기에 당장 떠올리지는 못한 것이다.



 차 안의 공기가 점점 피부에 느껴질 정도로 축축하게 젖어갔다.

 왠지 모르게 숨쉬기가 답답해진 걸 느낀 맨 뒷좌석의 노인이 잔기침을 하며 눈을 떴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창문을 열 손잡이를 찾던 노인의 시야에, 밴 바닥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노인이 꽥 소리질렀다.



 “그 기집아이 마법 쓴다!”



 정인의 부어 오른 입술을 빨던 기름때 면상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허리에 힘을 주고 고간을 밀어 넣으려던 매부리코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동작을 멈췄다.

 구 씨의 손에서 피투성이가 된 정인의 원피스 조각이 툭 떨어졌다.

 엑셀 페달을 막 밟으려던 중년인은 기겁을 하며 뒤를 돌아봤다.


 한순간, 차 안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정인에게로 집중되었다.



 정인이 정신을 차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녀의 파란 눈동자에 서서히 자리 잡히는 초점.

 작아졌던 동공이 눈 앞의 현실을 포착했다.

 바로 코 앞까지 다가온 기름때 면상의 너저분한 얼굴.

 사내의 두툼한 팔에 쫙 벌어진 채 억눌린 자신의 두 다리.

 그 사이로 불쑥 솟아 있는 매부리코의 발기한 기둥.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터무니없는 광경이라고, 정인은 잠시 생각했다.


 그 순진한 생각은 직후 절망적인 현실감에 씹어 먹혔다.

 모든 오감이 지금의 상황을 실제라고, 받아들이라고 강압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온몸을 비틀었다.

 이 악몽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일념 하나로.


 그러자마자 그녀의 몸이 발하던 마력광이 점차 강렬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군청색에서 깊은 바닷속 같은 코발트 블루로, 그리고 순수한 파란색으로.


 가장 먼저 제정신이 든 기름때 면상이 소리를 지르며 정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 간나가 어데 개수작을 부리네! 당장 멈추라우!”



 정인의 가느다란 목이 거센 손아귀 힘에 콱 짓눌렸다.

 숨통이 틀어 막히면서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캑캑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허리를 튕겨 올리지만 놈의 손아귀를 벗어나기엔 역부족.

 거기에 팔도 아직 묶여 있는 데다가 왼쪽 어깨는 탈구되었는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다리를 발버둥치려 해봐도 매부리코와 구 씨에게 짓눌린 다리는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간신히 되찾은 의식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목숨을 빼앗기게 생긴 정인은 필사적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한계까지 좁아진 기도에서는 바람 새는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정인은 절망적인 무력감을 느끼며, 서서히 흐려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러나 눈 앞이 캄캄해져만 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그에 비례해서, 점점 그녀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은 늘어만 갔다.

 차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 일체 통제되지 않는 마력.

 정인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벌어지는 일이었다.



 호흡기가 약한 맨 뒷좌석의 노인이 가장 먼저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곧이어 숨쉬기가 점점 답답해지는 지, 점점 호흡이 거칠어지는 다른 난민들.

 마치 물 속에서 수면을 바라보는 것처럼 대기가 일렁였다.


 수분을 한껏 머금어 무거워진 공기가 밑으로 가라앉으며, 바닥의 매트와 좌석 시트가 축축하게 젖어갔다.

 이미 푹 젖은 천장의 스웨이드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 씩, 곧 소나기처럼 우수수, 그러다가 급기야는 작은 폭포처럼 줄줄.


 기름때 면상은 희박한 산소를 필사적으로 호흡하면서, 정인의 목을 미친듯이 졸랐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 이 마법소녀가 부린 수작이 틀림없다.

 살려서 국정원 요원들에게 넘겨야 한다는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진 지 오래.

 지금 당장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자신들이 다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뒤늦게 아까 떨어뜨린 회칼에 신경이 닿은 매부리코는 바닥을 기다시피 하며 좌석 밑을 뒤졌다.

 옆구리라도 몇 번 쑤시면 지금 이 괴이한 마법도 멈추겠거니 하는 판단이었다.

 어느 덧 발치까지 고인 물이 놈의 무릎과 손 밑에서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다.


 운전석의 중년인은 나름 머리를 굴렸는지, 스위치를 눌러 차의 창을 모두 내리며 소리쳤다.



 “도대테 무신 일이... 컥. 캑캑.”



 중년인은 자기 목을 붙들고 콜록거리기 시작했다.

 한껏 허파에 들이켠 신선한 공기가 곧바로 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바깥 공기가 들어오면 이 원인 모를 호흡곤란도 좀 나아지리란 생각이었으나, 완전한 오판이었다.

 고삐 풀린 정인의 마력은, 주변의 모든 공기를 순수한 물로 바꾸고 있었으니까.



 차량 주변은 어느 새 급류가 땅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기괴한 풍경으로 변해 있었다.

 대기가 사라지며 발생한 압력 차이 때문에 몰려온 기류가 모조리 물로 바뀐 것이다.

 아스팔트 위로 쏟아지는 물길이 경사를 타고 콸콸 흘러, 홍수라도 난 것 마냥 배수로와 옆의 습지로 흘러갔다.


 열린 창문을 타고, 물길은 여지없이 차 안에도 쏟아졌다.

 마치 범람하는 급류처럼.


 바닥에 엎드렸던 매부리코와 구 씨는 어느 새 턱 끝까지 차오른 물을 피해 일어났다. 

 노인은 파랗게 질린 낯으로 쌕쌕거리며, 점점 차오르는 물을 피하려는 듯 좌석 시트 위로 올라섰다.

 완전히 패닉에 빠진 중년인은 다시 차창을 올리려고 했으나, 스위치를 아무리 올려도 내려간 창문은 꼼짝조차 하지 않았다.

 차량의 전자계통이 이미 모두 침수된 모양이었다.


 기름때 면상은 그 와중에도 정인의 목을 조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물 밑에 완전히 잠긴 채 버둥거리는 그녀의 목을.


 찰랑거리는 물이 입과 코에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름때 면상은 광기에 절은 고함을 내질렀다. 



 “뒈디, 쿨럭, 뒈디라우, 이 종간나, 쿨럭, 켈록!”



 이제는 검붉다 못해 새까맣게 죽어가는 얼굴의 정인.

 이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발버둥쳤다.



 처음에 왼다리를 잃었을 때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어머니를 잃고, 같은 소대의 마법소녀 전우들도 모두 잃었으니까.

 살아갈 목적도 이유도 모두 사라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는 평온한 생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민우가,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이런 자신이라도 좋아한다고 해준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 살아야만 했다.

 어떻게든 살아서 민우를 다시 봐야만.


 정인의 생각은 그 시점에서 훅 꺼졌다.



 버르적거리던 정인의 움직임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기름때 면상은 어느 새 물 속에 머리 끝까지 잠긴 채, 숨을 참고 한동안 마법소녀의 목을 계속 졸랐다.

 정인은 죽어버린 듯 꼼짝도 하지 않고, 물결의 흐름을 따라 일렁거렸다.


 자신의 폐활량이 한계에 달할 때쯤, 놈은 다급히 손을 놓고 물 위로 고개를 내밀었다.



 “푸어, 흐어, 흐어어억.”



 어느 새 밴의 문은 모두 활짝 열려 있었다.

 패닉에 빠진 중년인이 운전석을 시작으로 조수석, 뒷좌석 출입구를 모두 열어젖힌 것이다.


 가슴팍까지 물에 잠긴 매부리코가 구 씨를 부축하면서, 기름때 면상에게 냅다 소리질렀다.



 “살쳤니(*죽였니)?”
 “내가, 헉, 아니, 뒈뎠겠디!”



 헐떡거리며 마주 받아 친 놈은 반쯤 헤엄치다시피 밴 밖으로 허겁지겁 나갔다.

 그 뒤를 따라 매부리코와 구 씨, 그리고 중년인이 튀어나왔다.



 “내두 데리가라야! 내두 데리가라야!”



 뒷좌석의 등 받침대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노인의 절박한 외침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제 목숨이 급했지, 쓸모도 없는 치매 노인 따위를 도와줄 여유는 없었으니까.



 밖으로 나온 놈들의 눈에 기괴한 광경이 들어왔다.


 밴 주변의 수 미터를 반구형으로 감싼 두터운 수막(水幕).

 마치 물로 만들어진 돔 안에 갇힌 듯한 모습이었다.


 수막의 표면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면서, 안으로 폭포수 마냥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밖으로도 계속 물이 범람해서, 길게 펼쳐진 도로는 수해라도 입은 것 마냥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돔으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오는 대기 때문에 주변의 수풀은 태풍이라도 치듯 사정없이 휩쓸려 나갔다.

 그 와중에 천지 사방을 울리는 벼락 치는 소리까지.

 곧 하늘에 가득한 먹구름에서 소나기마저 쏟아지기 시작했다.


 뇌우와 돌풍, 넘쳐 흐르는 물길.

 마치 세상의 종말이라도 찾아온 듯한 풍경에 놈들은 입을 벌렸다.

 가슴께까지 차고 올라온 수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제자리에 선 중년인이 구시렁거렸다.



 “그 죽어 싼 녕감탱이, 마법이래 못 쓴다데니만…”
 “싸람이가 어띃게 이런 일으 벌길 수가 있노?”



 대꾸하는 매부리코의 부축을 뿌리치고, 구 씨가 답답하다는 듯 앞으로 먼저 나섰다.



 “지끔 그게 둥요하니? 얼르덩 탈출버텀 해야디!”



 기이하게도 돔 안에 찬 물은 밖으로 일절 나가는 법이 없었다.

 밖의 물도 들어오지는 않았으나, 수막 안으로는 물이 계속 쏟아지는 중.

 덕분에 수위는 점점 오르기만 하고 있었다. 


 키가 남들보다 한 뼘은 작은 구 씨는 이미 턱 끝까지 물에 잠긴 상태였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탈출이 절박했던 것이다.


 허우적거리며 돔의 표면으로 다가간 구 씨는 소용돌이치는 수막으로 손을 내뻗었다.


 직후, 놈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끄아아악, 아으악! 내 손!”



 구 씨의 손은 그라인더에 갈린 것 마냥, 손목까지 살가죽이 벗겨져 있었다.

 피가 박동 치듯 뿜어져 나오는 걸 봐서는 동맥이라도 끊어진 모양이었다.

 돔의 표면을 따라 눈 깜짝할 사이 흩어지는, 갈기갈기 찢어진 살점과 가죽, 피.

 수막은 그저 소용돌이칠 뿐만 아니라, 고속으로 흐르며 안에 들어온 것을 갈아내고 있었다.


 매부리코가 극심한 고통에 울부짖는 구 씨를 뒤로 끌고 오는 사이, 기름때 면상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성을 질렀다.

 탈출할 수 있다는 희망이 눈 앞에서 산산조각난 것이다.


 옆에서 중년인이 놈의 멱살을 부여잡고 소리질렀다.



 “죽였다멘! 와 마법이래 기채루(*그대로) 남아있니!”

 “닥치라우, 탕수(*홍수)에 아구리만 동동 뜰 놈아! 내 분멩히 목이래 졸라 죽였다고!”



 그 와중에 밴의 뒷 창문에서 고개만 겨우 내민 노인이, 물에 반쯤 얼굴이 잠긴 채 허우적거렸다.

 구 씨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렸는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늘어지고 있었다.


 매부리코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봤다.

 물 위에 둥둥 뜬 채 늘어진 구 씨의 몸에서 수면을 타고 퍼지는 선혈.

 멱살잡이를 하다 말고 목까지 차오른 물에, 두려움에 질려 버둥거리는 중년인과 기름때 면상.

 수면에 고개를 처박은 노인의 머리 옆으로 보글거리며 올라오는 공기방울.


 살아날 방법이 없었다.

 탈출하려고 하면 수류에 갈려서 죽고, 가만히 있으면 익사할 판이었다.

 마법소녀의 숨통을 끊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건 피할 수 없는 죽음 뿐.


 놈은 까치발을 든 채 부들거리며, 황망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이거… 이런 게 마법이니?”



 놈이 마법이라는 걸 직접 본 바는 없었으나, 마법소녀들의 활약상을 못 들은 건 아니었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빌딩만한 괴수를 마법소녀 한 명이 홀로 떨어뜨렸다느니.

 무수한 불사의 괴물들을 상대로 몇 달이나 전선을 유지한 마법소녀 소대의 이야기라든지.

 서울과 인천 일대에서 벌어졌던 무수한 마법소녀들의 희생과 영웅담이라든지.


 그 중에서도 백미는, 얼마 전까지 같이 지내던 동향 난민들이 떠들던 한 마법소녀의 이야기였다.


 대전 말미에 영변 원자로가 융해되면서, 신의주부터 평양까지 모조리 죽음의 땅이 되어버린 북한.

 끝까지 버티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숨을 걸고 임진강을 건넌 그들을 기다린 건, 또 다른 죽음의 땅이었다.


 파주 이면세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집결한 몬스터 무리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백여 명의 난민들.

 그들을 구원한 건, 군대도 하늘도 아닌, 한 마법소녀였다.

 어떤 예술보다도 아름다운 마법을 부리던 구원자.


 그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파주에서 목숨을 건진 난민들은 다들 그 마법소녀를 수령 동지처럼 찬양하곤 했다.


 그게 퍽 인상 깊었기에, 놈은 마법이란 게 아름다운 것인 줄로만 알았다.

 지금 같은 천재지변이나 살인 돔 같은 게 아니라.


 마법소녀를 납치하고 윤간하려고 한 자신들에게는 이런 마법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아니면 원래 마법이란 이런, 사람을 손쉽게 죽이기 위한 거였든지.



 매부리코의 코와 입에서 쏟아져 나온 기포와 함께, 그런 마지막 생각이 흩어져 사라졌다.

 




 *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돌려도, 전방창에 쏟아져 흐르는 소나기는 도무지 지워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간신히 붙든 채 민우는 엑셀 페달을 계속 밟았다.

 계기판의 속도는 이미 시속 150km.

 때 아닌 폭우로 물바다가 된 도로에서 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속도였다.

 조금이라도 핸들을 잘못 꺾으면 그대로 미끄러지며 전복될 판.

 그러나 민우의 오른발은 페달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누님 : 집에강도여럿 경비원이한패 도움]

 [누님 : 강도아님 납치목적인듯]

 [누님 : 여섯명 목적지인천 차량은미상]

 [누님 : 사인승 두대이상 아니면 대형밴 가능성]



 얼마나 급박하게 쳤는지, 평소에는 칼같이 띄어쓰기를 지키던 그녀라곤 믿기 어려운 난잡한 문자.

 연료탱크만 겨우 교체한 차를 몰고 다급히 돌아온 집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가구든 집기든 모조리 깨지고 부서진 난장판.

 벽감 깊숙이 숨겨 놨던 AK-47 2정과 탄약 박스, 현금 1,500만원까지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그녀를 데리고 도피해야 될 때를 대비해서 모아둔 물건이라 아까울 법도 했으나,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산산이 조각난 안방 문과 그 앞을 가로막듯이 넘어져 있는 서랍장.

 덜렁거리는 문짝에 박혀 있는 식칼 한 자루.

 그리고 벽감 앞에 부러진 채 내동댕이쳐져 있는 그녀의 의족과 목발, 박살 난 휴대폰.


 그 필사적인 저항의 흔적을 본 순간, 민우는 미칠 듯한 자기혐오와 분노에 사로잡혔다.



 집의 보안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알량한 안전고리 하나만 믿을 게 아니라, 다른 자물쇠라도 추가로 마련했어야 했다.


 현관문 옆에 매번 나 있던 빗금 모양의 흠집에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다.

 모종의 표시라고 처음부터 의심을 했어야 했다.


 연료탱크에 구멍이 났을 때 경비원을 가장 먼저 의심했어야 했다.

 자기 차에서 누가 기름을 훔쳐갔다고 그랬을 때, 왜 연료탱크 교체에 걸리는 시간을 물어봤겠는가.

 범행에 걸리는 시간과 미리 비교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 수상한 징조들이 분명 있었는데도 눈치를 못 챈, 자신에 대한 분노와 혐오였다.


 현충원에 가는 걸 미루기만 했어도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었으리라.

 누님은 조금 낙담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실망한다 한들, 잘 설득하고 빌면 분명히 들어줄 터였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자신은 멍청하게도 그녀를 위한답시고, 결과적으로는 위험에 그대로 내던진 꼴이 된 것이다.



 “제발 무사히만 있어 주십쇼… 누님, 제발…”



 그럴 가망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민우는 기도를 올리듯 중얼거리며 이를 갈았다.


 민우의 밴은 쏜살같이 제1순환고속도로를 달려, 김포대교에 들어섰다.

 대낮임에도 하늘 가득한 먹구름에 사위가 어두침침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소나기는 점점 거세져만 갔다.

 대교 위에 가득한 물안개 때문에 시야는 최악.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민우는 브레이크를 밟을 수 없었다.



 ‘자유로JC에서 우회전. 가능하면 역주행해서 간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를 따라 인천으로 향하다가 대공부의 연락을 받고 다급히 돌아온 민우였다.

 때문에 그의 밴이 질주하는 방향은 납치범들과는 정반대.

 자유로의 왕복 차선이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기에, 둘이 마주치려면 역주행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자유로라지만 역주행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짓.

 행여나 반대 차선에서 오는 차가 있으면 피하지도 못하고 충돌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최지훈의 부하가 전해준 정보에 의하면, 납치범들은 현재 행주고가차도와 김포대교 사이에 있을 터.

 신뢰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믿을 건 그 정도 뿐이었다.

 민우가 알고 있는 건 정인이 문자로 넘겨준, ‘목적지는 인천’이라는 것 밖에 없었으니까.


 서울 내부순환로를 순찰 중이던 순찰대 2개 분대가 향하고는 있다지만, 날씨는 이런 심각한 악천후다.

 그들이 납치범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조차 애매한 상황.

 그랬기에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좋았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자유로JC에 도착한 민우는, 고가로를 통해 김포대교에서 내려와서 자유로로 진입했다.

 다행히 자유로JC에서는 왕복 차선 분리가 거의 되어있지 않았다.


 민우는 그대로 유턴하여 서울 방면을 향해 역주행하기 시작했다.


 밴의 타이어가 물살을 가르며 좌우로 물의 장막이 펼쳐졌다.

 브레이크 페달을 밟지 않았음에도 차량의 속도가 자연스럽게 떨어지며 좌우로 거세게 흔들렸다.


 운전에 집중하던 민우는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다.



 ‘도로에 물이 너무 많아.’



 자유로는 연합에서 현재 거의 관리하고 있지 않은 도로.

 그랬기에 노면 상태는 원래부터 썩 좋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폭포처럼 쏟아붓는 집중 호우까지 합치면, 노면 곳곳에 연못만한 웅덩이가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물이 많았다.

 거의 한강이 범람한 것 마냥.

 아무리 강수량이 많다 하더라도 말이 안되는 경우였다.


 민우는 밴의 속도를 조금 줄일 수밖에 없었다.

 헤드라이트를 켜도 전방 10m조차 제대로 안 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속 100km에 달하는 속도로, 밴은 개울이 되어버린 자유로를 나아갔다.


 핸들 위로 고개를 쭉 빼다시피 민우의 눈에, 기이한 광경이 들어온 건 그때였다.


 거센 회색 비보라의 방해를 뚫고 그의 시야에 들어온, 대로 한가운데 서 있는 투명한 하늘빛 돔.

 주변에는 대해의 소용돌이처럼, 반시계방향으로 흙탕물이 회전하며 돔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그렇게 돔으로 모여든 흙탕물은 언제 더러웠냐는 듯, 물만 남기고 순식간에 투명하게 변하여 빨려 들어갔다.

 흙도 나뭇잎도 풀줄기도 돌멩이도 순식간에 갈려 나가면서.


 거리가 멀어서 당장은 작아 보이는 반구.

 그러나 밴이 다가갈수록 점점 커지는 물의 돔은, 족히 반경 15m는 되어 보였다.


 자유로의 대부분을 뒤덮은 그 모습에, 민우는 저절로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가 부리는 물의 마법.


 “누님!”



 민우는 저도 모르게 소리치며 엑셀 페달을 확 밟았다.

 가속도를 받은 밴이 돌풍과 뇌우를 뚫고 가며 거칠게 덜컹거렸다.

 금방이라도 차가 뒤집어져도 이상하지 않았으나, 민우는 이를 악물고 눈 앞에 보이는 것에 정신을 집중했다.



 밴이 물의 돔에서 300m 정도 거리에 도착할 때쯤, 갑작스럽게 이변은 종말을 고했다.



 어린애가 걷어찬 눈사람처럼 돔이 와르르 무너지면서, 사방으로 물보라와 파도가 튀었다.

 밴을 눈 깜짝할 사이에 뒤덮는, 사람 키 만한 급류.

 민우는 브레이크 페달을 꾹 밟으며 눈을 부릅떴다.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가드레일을 뚫고 튀어나가 늪이 되어버린 도로변에 처박힐 판이었으니까.


 수 톤에 달하는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곳에는 수풀과 땅, 아스팔트의 잔해, 그리고 중앙분리대에 주둥이를 처박은 밴 한 대가 남아 있었다.

 그 위로 새카만 먹구름이 유유히 흘러가며 끝없이 비를 뿌려 댔다.



 운전석의 찌그러진 문이 잠시 후 벌컥 열렸다.



 “헉, 으윽, 허억.”



 차에서 내린 민우는 거칠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추스를 틈도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방금 전에 본 물의 반구 같은 현상이 자연 발생했다는 건 말도 안되는 추론이다.

 마법이 아니고선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민우가 아는 한, 마법소녀들 중에서 그만한 물의 마법을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



 “누님! 누니이임!! 어디 계십니까!”



 민우는 어깨로 숨을 쉬면서 앞으로 더듬더듬 나아갔다.

 눈 위로 두른 팔도, 깜빡이는 눈꺼풀도 무시하고 눈에 직접 쏟아지는 빗방울.

 그리고 모질게 불어 젖히는 바람 때문에 그는 눈을 도저히 뜰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내리기 직전, 민우는 분명히 보았던 것이다.

 물의 반구가 사라진 위치에 전복되어 있는 밴 한 대.

 소형 스쿨버스처럼 생긴 그 차량 주변에 쓰러져 있는 몇 명의 인영(人影)을.



 정강이까지 차오른 급류 때문에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도 민우는 꾸준히 전진했다.

 옷자락을 깃발처럼 펄럭이게 만드는 돌풍을 거스르며.


 그러던 그의 발치에 물컹한 몸뚱이가 하나 부딪혔다.


 민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발 밑을 내려다봤다.


 조그마한 덩치의 까무잡잡한 사내.

 물 위에 드러누운 그 시체는, 한쪽 손을 믹서기에 집어넣기라도 한 듯 팔꿈치 아래까지 갈려 나간 상태였다.

 창백하니 퉁퉁 불어터진 전신의 주름, 그리고 반쯤 감은 채 흰자만 드러낸 눈깔이 보기에 섬뜩했다.


 시체는 시체였는데 형상은 물귀신에 가까웠다.

 민우는 등허리에 올라오는 소름을 느끼면서, 생명 없는 그 몸뚱이를 발로 슬쩍 밀었다.

 물에 살짝 뜬 상태였기에 구 씨의 익사체는 그대로 느릿느릿 밀려나갔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반구 안쪽에서 벌어진 참상의 흔적이 민우의 시야에 훅 들어왔다.


 옆으로 넘어진 밴.

 맨 뒤 차창에서 튀어나와 창틀을 거머쥔 주름진 두 손은 이미 사후강직이라도 온 듯 힘줄이 빳빳하게 돋아 있었다.

 노인은 필사적으로 차에서 탈출하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한 모양이었다.


 민우는 그 모습에서 눈을 돌리며 그대로 지나쳤다.

 고여 있는 물 속에 잠겨 있을 시체를 보고 싶진 않았으니.


 정인을 찾아 밴 주변을 반바퀴쯤 돌던 민우의 몸에, 가드레일에 걸린 불어터진 시체가 툭 부딪혔다.

 생전에는 뾰족하니 툭 튀어나왔던 코는 잔뜩 불어 어린애 손 마냥 커져 있었다.

 익사한 매부리코는 민우의 밀어내는 손길에 도로변의 수풀로 그대로 굴러 떨어졌다.


 밴의 정면을 돌아 간 민우는, 비명을 지르다시피 소리쳤다.



 “안 돼!!”



 방금 본 작달막한 사내처럼, 물 위에 누운 채 동동 떠 있는 나체의 소녀.

 두 다리는 오래 전에 잘린 듯 주먹처럼 뭉툭했고 낯빛은 창백했다.

 코에서는 아직도 빨간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는 데다가, 두 팔은 뒤로 묶여 있었다.


 하얗게 질린 온몸에 가득한 울긋불긋한 피멍.

 거기에 물살에 쓸려온 진흙과 나뭇잎, 온갖 잔해들이 묻어 엉망이었다.

 살짝 봉긋한 가슴은 일체 오르내리는 법 없이 석고상처럼 굳은 상태였다.


 첨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물을 튀기며 뛰쳐나간 민우.

 누군가 멀리서 엎드린 채 물과 토사물을 게워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 들어오는 건 오로지 정인과 그 옆에 놓인 사내의 시체 뿐.


 그는 정인의 목에 한 손을 얹은 채 죽어 있는 자를 정신없이 걷어냈다.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땟국물 가득한 면상의 시체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나뒹굴었다.

 치워진 그 손 밑에서, 손가락 모양으로 새까맣게 멍든 가느다란 목이 드러났다.


 민우는 차게 식은 정인의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흙탕물이 조금이라도 덜 고여 있고 평평한 곳으로 달려갔다.


 아스팔트 바닥에 그녀를 눕힌 민우는, 그녀의 어깨를 잡고 미친듯이 흔들었다.



 “누님, 정신차리십쇼! 제 말 들리십니까, 누님!!”



 힘없이 흔들거리는 고개.

 민우는 재빨리 정인의 얼굴에 귀를 들이대고 손가락으로 경동맥을 짚었다.

 파랗게 질린 입술 사이로 숨결이 새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뛰어야 할 심장은 음산한 침묵만을 지키는 중이었다.


 민우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곧바로 왼손과 의수를 한데 모아, 정인의 가슴 한복판을 세게 누르기 시작했다.

 소녀의 흉곽이 짓눌렸다가 펴지며 뚝뚝 하는 섬뜩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들은 민우의 팔에서 무심코 힘이 빠져나갔다.

 심지어 케이블 타이에 묶인 두 팔이 몸에 눌려서 그런지 압박도 제대로 되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케이블 타이를 자르기 위해 나이프를 가져올 시간조차 아까운 상황.

 그는 현역 시절 교육받은 심폐소생술의 내용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흉부압박을 계속했다.


 속으로 서른을 센 민우는, 왼손으로 정인의 턱을 잡아 벌리고는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는 폐활량 가득 빨아들인 숨을 그녀의 폐 안으로 불어넣었다.

 입술에 와 닿는 서늘하고도 말랑한 감촉에는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기를 두 번.

 다시 왼손과 의수를 모은 그는 심폐소생술을 재개했다.

 그러면서 숫자 대신, 거친 날숨을 내뱉으면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훅, 누님, 숨을, 좀, 쉬십, 쇼! 제발! 혜인 씨!”



 자신이 제대로 하고 있는지 생각하는 대신, 민우는 눈 앞의 죽어가는 소녀가 숨을 쉬는지에 집중했다.

 그녀가 생명을 되찾는 것만이 중요할 따름이었으니.


 그의 머리 위로 무정한 폭우가 쏟아지며, 눈가와 뺨을 타고 물줄기가 끝없이 밑으로 흘러내렸다.

 정인의 얼굴에 떨어진 그 물줄기는 부서진 방울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민우의 간절한 기도와 함께.


 한 사이클. 두 사이클, 세 사이클…


 열 사이클이 지나도록, 정인이 눈을 뜨는 일은 없었다.



 그녀의 가슴을 누르던 민우의 팔과 허리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무겁고 습한, 그리고 여름임에도 차디찬 폭우가 그의 체력을 급격히 뺏아가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의 골든 타임은 보통 5분이라고들 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살아도 뇌손상이 올 가능성이 높다.


 현역 시절 심폐소생술 교육에서 배웠던 그런 내용이 민우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 말대로라면, 그녀의 머리는, 인간성은 어딘가 망가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는 설령 한 시간이라도 두 시간이라도, 그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 계속할 작정이었다.


 설령 뇌가 손상되어 말 한 마디 못하는 백치가 된다 하더라도.

 식물인간처럼 평생 누워서 지내야 하는 몸이 된다 하더라도, 살아만 곁에 있을 수 있다면.



 흘러내리는 빗물과 함께, 덧없는 시간이 길게 길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정인의 입과 코에서 왈칵 물이 튀어나왔다.



 “컥! 꺽, 케흑, 케윽.”



 정신없이 기침을 하기 시작한 정인의 몸을, 민우는 다급히 옆으로 돌려 눕혔다.



 “기침하십쇼, 그래야 삽니다!”
 “쿨럭, 게에엑, 우에엑.”



 그녀의 좁은 등을 두드리는 민우의 손바닥.

 정인은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몸 안에 가득 들어찼던 물을 토했다.

 그 작은 몸에 어떻게 그렇게 물이 들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많은 양이었다.


 민우는 한쪽 손으로 그녀의 고개를 받친 채 등을 계속 세게 두드렸다.

 토사물로 손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동안 속이 뒤집어져라 토하던 정인은 새는 듯한 숨소리를 내며 축 늘어졌다.

 민우는 정인을 자신의 품 속에 기대어 눕혔다.

 그 뒤 재빨리 웃옷을 벗어 그녀의 나체를 덮었다.

 사시나무 떨듯이 온몸을 벌벌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옷이라 해봐야 이미 푹 젖어버렸지만 맨몸으로 지금 같은 호우를 맞는 것보다야 나을 터였다.


 민우는 상체를 기울여 그녀의 몸 위를 덮었다.

 그러면서 정신없이 소리쳤다.



 “누님! 심호흡하십쇼, 심호흡! 저 알아 보시겠습니까? 알아 보시겠냐구요! 민웁니다, 저 민우라고요! 누님!”

 “허억, 흐으, 윽, 아파… 흐윽, 어마, 엄마, 아파…”



 바들바들 떠는 정인은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간신히 뜬 눈은 완전히 풀린 상태.

 코 앞에 있는 민우의 형상조차 포착하지 못하고, 방금 간신히 빠져나온 죽음 속을 아직도 떠돌고 있었다.


 민우는 다시 정인을 번쩎 안아들고 호우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물에 젖은 민우의 상의가 달리는 서슬에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졌다.


 기적적으로 소생한 그녀였지만 그저 그 뿐.

 사신의 손길은 아직 끈덕지게 그녀의 영혼을 잡아채려고 하고 있었다.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다.


 정인의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은 달달거리며 말이 되지 않는 헛소리만 조잘거렸다.



 “나, 나 왜 이렇게, 끅, 왜 이런 일이,

 아파, 진통제를, 그냥 죽여줘,

 흐윽, 민우야. 내 다리.

 가슴이 아파. 배가 아파. 숨을,

 흐으, 못 쉬겠어. 민우야.

 어디 갔어. 민우야, 도와줘…!”


 “저 여기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어요, 누님! 잠들지 마세요! 잠들면 정말 죽습니다!”


 “다리가 없어. 엄마, 너무 아파요.

 싫어. 으극, 이렇게 살기, 싫다고.

 혜인아, 미안해. 미안해. 그윽,

 어디야. 민우야. 도와줘.

 나 병신 되면, 살리지 마.

 죽여줘… 끄윽, 아파…”


 “꼭 살릴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살릴 거니까, 그런 말 하지 말라고, 제발!”


 “하지 마… 벌 받은… 나 같은 병신… 혜인이를… 마법소녀가, 되어서는…”



 빗소리에 점점 파묻혀가는 정인의 희미한 목소리.

 파란 눈동자가 다시 색채를 잃으며 눈꺼풀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민우는 터질 것 같은 다리 근육에 힘을 주고, 달리는 걸음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흙탕물에 젖은 슬랙스 바지는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

 소나기에 체온을 뺏긴 민우의 몸도 식어갔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중앙분리대에 추돌한 자신의 밴에 도착한 민우는, 뒷문을 열고 거의 구르듯이 뛰어들어갔다.

 정인을 다급히 바닥에 내려놓고 모로 눕힌 뒤, 그는 개조한 뒷좌석에 잔뜩 쌓아 놓은 박스를 열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덮을 만한 건 모조리 꺼내 정인의 몸 위에 덮었다.

 담요, 덮는 이불, 옷감 등등.


 콘솔박스 너머로 쓰러질 것 마냥 몸을 내밀어 히터를 최대한 올리는 민우.

 그런 뒤 그녀의 손을 결박하고 있는 케이블 타이를 자를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아미 나이프를 꺼낸 그는 정인의 몸을 살짝 들어올려, 케이블 타이를 톱질하듯 잘라냈다.

 오랫동안 몸에 눌리고 꺾인 정인의 손가락은 모두 부러져 있었다.

 손목까지 소시지처럼 부은 그 모습에 민우는 자연스럽게 연상하고 말았다.

 국정원에서 구출했을 당시 그녀의 모습을.


 만일 그녀가 살아나서 손마저 잘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안 돼, 씨발, 이럴 순 없어…”



 자신은 또 늦어버리고 만 것인가.

 그런 절망감에 머리를 쥐어뜯은 민우는, 곧 정신을 차렸다.


 그녀가 살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다고 생각한 지 몇 분조차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생긴 지 얼마 안된 부상이라면 아직 살릴 가망은 있었다.

 중앙병원 응급실에 치유의 마법소녀, 주나은이 일하고 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분명히 급성 외상이라면 뭐든 고칠 수 있다고 했을 터.

 그러지 않으면 안 됐다.


 겨우 이 정도로 무력감에 사로잡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만일 치료가 늦기라도 한다면 보안분실의 재탕이나 다름없었으니.


 민우는 왼손으로 정신없이 정인의 다리와 어깨를 번갈아 주물렀다.

 조금이라도 혈색이 다시 돌기를 기대하면서.


 차 안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자 정인의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숨결은 여전히 몹시 희미했다.

 언제 다시 생명의 불꽃이 꺼져갈지 알 수 없는 상태.


 민우는 담요와 이불로 정인의 몸을 둘둘 만 뒤 들쳐 메었다.

 좁은 틈새를 비집고 앞좌석으로 넘어간 뒤, 그는 정인을 조수석에 앉히고 등받이를 최대한 뒤로 넘겼다.

 그리고는 안전벨트를 재빨리 매어줬다.


 뒷좌석에 눕혀 두기에는 상태가 너무 불안했다.

 차가 출발할 때 구르면서 박스나 모서리에 부딪힐 가능성도 있었다.


 차의 시동을 건 민우는 곧바로 후진해서 밴을 뒤로 빼려고 했다. 

 하지만 기어가 올라가지 않아 타이어는 공회전만 할 뿐.

 민우는 기어 봉을 돌아보다가 그제서야 알아차렸다.

 무리하게 정인을 들고 뛴 탓인지 오른팔의 의수가 헐거워져서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씨발!”



 욕지거리를 내뱉은 민우는, 허리를 꺾어 왼손으로 기어 봉을 후진으로 맞췄다.

 그리고는 차를 뒤로 급하게 뺀 뒤, 다시 기어를 올리고 그대로 도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기 시작했지만 그 정도는 버틸 만했다.



 도로 전체에 강물처럼 흘러 넘치는 물살.

 그 사이를 가르며 밴은 쏜살같이 달려갔다.


 중앙병원까지의 거리는 약 16km.

 최고 속도로 밟으면 10분 안에 도착할 거리였다.

 민우는 그때까지 그녀가 버텨 주기만을 빌면서, 엑셀 페달을 힘주어 밟았다.

 계기판의 바늘은 12시 방향을 넘어 1시, 2시 방향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잿빛 경관이 길게 늘어진 채 휙휙 지나가면서, 전방창을 세차게 두드리던 빗방울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조수석에 누운 정인은 알 수 없는 소리를 웅얼거리면서 간간히 기침을 했다.

 그럴 때마다 코피와 함께 피가 섞인 가래가 튀어나왔다.

 간혹 꺼질 듯한 깊은 숨을 들이킬 때마다 몹시 고통스러운 신음도 흘리곤 했다.

 갈비뼈라도 부러진 모양이었다.


 정인의 코에서 흐르는 선홍색 피는 허옇게 질린 피부와 대비되어 더더욱 선명해 보였다.

 비가 그쳐가면서 시계(視界)는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전방 100m도 잘 안 보이는 악천후.


 운전에 집중해야 된다는 건 민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무심코 시선을 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도착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피를 쏟고,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 지.

 저 작은 몸에서 어떻게 저렇게 많은 피를 흘리게 할 수 있는지.

 그걸 생각하면 민우는 속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지만 않았더라도, 납치범들의 시체를 모조리 토막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를 부득부득 갈며 다시 전방을 주시하는 민우.

 칠이 다 벗겨져 녹슨 표지판을 지나쳐, 밴은 강변북로에 들어섰다.

 소나기는 어느 새 그쳤지만 컴컴한 먹구름은 여전히 햇빛을 가리고, 희뿌연 물안개가 사방에 가득했다.



 갑작스럽게 여러 쌍의 헤드라이트가 그의 시야에 불쑥 나타났다.


 상방에 M60 기관총을 설치해 놓은 험비 두 대.

 그리고 군용 레토나 두 대였다.


 민우는 핸들을 오른쪽으로 다급히 꺾었다.

 강변북로를 역주행 중인 데다가, 공교롭게도 최전방의 험비와 차선이 겹친 상황.

 이대로 달리다간 정면으로 충돌할 판이었다.


 때마침 정면에서 질주해오는 민우의 밴을 그제서야 눈치챘는지, 험비 역시 방향을 오른쪽으로 휙 꺾었다.

 그 뒤를 이어 다른 험비와 레토나 두 대가 줄줄이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빗물이 남아있는 도로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며 밴이 휘청거렸다.

 왼쪽으로 휙 꺾인 정인의 몸을, 안전벨트가 마치 낚아채듯이 잡아당겼다.

 횡설수설하던 정인은 짜부라진 개구리처럼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으극, 으으으…”



 죄송하다는 속마음을 내뱉을 틈도 없이, 민우는 왼손만으로 필사적으로 핸들을 돌렸다.

 밴의 범퍼가 녹슨 가드레일에 긁히며 소름 끼치는 진동이 차체를 타고 퍼졌다.

 결국 완전히 떨어져 나가 뒤쪽으로 멀어져 가는 범퍼 조각. 


 간신히 차체의 균형을 잡은 민우는 그제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조금만 참으십쇼, 누님!”
 “흐, 흐흐흐, 끄흐윽, 쿨럭.”



 실소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둘둘 말린 담요가 흔들렸다.

 민우의 말에 돌아온 대답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미지근한 선혈.

 금연하기 전까지 정인이 쓰던 재떨이 위로 빨간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격하게 몇 번 더 기침을 한 그녀는 창백한 동공을 드러내며 고개를 푹 떨궜다.


 민우는 당장이라도 차를 세우고 그녀의 상태를 살피고 싶었다.

 혹시나 또 다시 심장이 멎어버린 건 아닌지.

 아직 연합 중앙병원에 도착하기까지는 10분 이상 남은 상황.

 만일 심정지가 왔다면 그 동안 정인이 버텨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으니까.


 차가 빗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브레이크 페달을 밟던 민우.

 그의 귀를 뒤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확성기 소리가 강타했다.



 [연합 순찰대다! 전방의 역주행 중인 검은색 밴 차량, 즉각 갓길에 정차하라! 명령에 불응 시 발포하겠다!]



 사이드 미러에 다급히 유턴해서 쫓아오는 험비 두 대와 레토나 한 대가 보였다.

 레토나 한 대는 빗길에 미끄러졌는지 중앙분리대를 들이받고 멈춰 있었다.

 아무래도 경고 방송은 험비에서 나온 모양.


 민우의 뇌리에 순간 고민이 휘몰아쳤다.



 여기서 연합 순찰대의 명령을 따른다면,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게 될지 알 수 없었다.

 말이 잘 통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일을 망칠 위험도 충분히 있었다.

 뇌물을 요구하면서 시간을 질질 끈다든지, 아니면 난민이나 범죄자 대하듯 어깃장과 횡포를 부린다든지.


 만일 그들이 후자에 속한다면 그녀의 목숨은 바람 앞의 촛불이나 다름없다.


 따돌리려고 한다면 충분히 따돌릴 수는 있었다.

 험비의 주행 성능은 그가 알기로 썩 좋은 편은 아니다.

 레토나 역시 마찬가지.

 최고 속도라 해봐야 시속 120-140km 정도였으니까.



 [반복한다! 전방의 검은색 밴 차량은 즉각 갓길에 정차하라! 반복한다!]



 불행 중 다행인지, 순찰대는 위협사격조차 가하지 않고 그저 거리를 유지하며 쫓아올 뿐이었다.

 하지만 확성기로 증폭된 순찰대의 말은 민우에게 선택을 종용하고 있었다.

 그들을 믿어볼 것이냐, 그러지 않을 것이냐.


 민우는 정인을 일순간 곁눈질했다.

 얕으나마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창백하다 못해 이젠 투명하기까지 한 피부는, 잠시 눈을 떼면 그대로 공기 중으로 녹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연합 중앙병원까지 전속력으로 밟는다고 해도 10분.

 과연 그 10분을 그녀는 버틸 수 있을 것인가.



 이를 악문 민우는, 천천히 브레이크 페달을 밟았다.



 중앙분리대 근처에 멈춘 민우의 밴.

 그 전방과 측방에 포위라도 하듯이 험비가 급제동하며 멈췄다.

 두터운 장갑을 두른 문이 열리며, 택티컬 베스트를 입은 사람 여럿이 우르르 내렸다.


 곧바로 문을 엄폐물 삼아 숨은 채, 소총으로 운전석과 조수석을 조준하는 순찰대원들.

 그들 중 한 명이 확성기를 입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문 천천히 열고 무장 해제한 뒤 두 손 들고 내려! 조금이라도 수상한 거동하면 사살하겠다!]



 민우는 옆의 정인을 다시 한 번 살핀 뒤, 자신의 선택이 부디 맞았기를 빌면서 문을 천천히 열었다.

 움직이지 않는 의수를 왼손으로 붙잡아 머리 위로 올리면서, 민우는 문틈을 향해 소리쳤다.



 “저항할 생각 없습니다! 전관부(*전략물자관리부) 사원입니다! 지금 위독한 사람을 데리-“

 [일단 내리라고 하지 않았나! 끌어내!]



 두 사내가 번개같이 달려들어 어정쩡한 자세의 민우를 붙들었다.

 그러더니 그를 차에서 끌어내리고는 바닥에 처박았다.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을 부딪힌 민우는 무심코 신음을 내뱉았다.


 한 명은 민우의 왼팔을 다리 사이에 끼워 꺾은 채, 등 뒤에 걸터앉았다.

 능숙하게 의수 고정 끈을 풀어버리는 그를 뒤로하고, 다른 한 명이 운전석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다른 순찰대원들이 소총을 겨눈 채 밴을 빙 둘러가는 모습이 민우의 눈에 들어왔다.

 조수석과 뒷문으로 다가가는 모양이었다.


 그는 애원하듯이 목소리를 짜냈다.



 “제발 쏘지 마십쇼! 부상자! 부상잡니다! 마법소녀라고요! 윽.”



 입을 다물게 할 목적인지, 등 뒤에 걸터앉은 순찰대원이 민우의 고개를 바닥에 다시 처박았다.

 물기 머금은 아스팔트 바닥에 갈리는 피부.


 민우의 귀에 밴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를 뒤지는 듯 부스럭거리는 소음.

 소총의 조정간이 돌아가는 섬뜩한 마찰음.

 민우의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잠시 후 밴 건너편에서 순찰대원 한 명이 소리쳤다.



 “목표 발견! 상태가 많이 안 좋아 보입니다. 어떡할까요?”



 터져라 뛰는 심장 때문인지 민우의 눈 앞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번민이 맴돌았다.


 납치범들을 추격하고 있다는 순찰대 분대가 정말 이들이 맞는 걸까?

 목표라는 건 무슨 뜻에서 한 소리지?

 설마 구출이 아니라 제거가 목표는 아니겠지?

 지금 이 선택이 과연 잘한 짓일까?

 제발 방아쇠를 당기지 말기를.

 부디 저들이 살인멸구 같은 걸 생각하고 있지 않기를.

 하느님.


 확성기를 내린 분대장이 밴의 운전석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민우는 기도했다.


 잠시 후 고개를 다시 내민 분대장의 입에서 나온 말은,



 “1호차에 옮겨 태워. 의무병도 1호차로 옮기고, 너, 너하고 바꿔 타라. 그리고 본부하고 대공부에 무전 쳐. 목표는 구출했지만 상태가 위독해서 연합 중앙병원으로 시급히 데려간다 그래.”



 구원이었다.



 “저 친구도 그만 풀어주고, 2호차에 태우면 되겠네.”



 턱짓을 하는 분대장의 말에, 민우를 깔고 앉은 대원은 제압하고 있던 그의 왼팔을 풀어줬다.

 그리고는 멍하니 엎드려 있는 민우를 일으켜 세우며 미안하다는 듯 말을 걸었다.



 “거 거칠게 굴어서 미안하게 됐어요, 형씨. 댁이 납치범일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민우는 전신에 힘이 빠진 듯 흐물흐물한 몸을 추스르며, 거의 울먹이듯이 대답했다.



 “아닙, 아닙니다… 누님을 제발, 꼭, 부탁드립니다…”

 “거 둘이 대체 무슨 관계시길래. 걱정 놓아요, 김 병장 저 친구 짬이 장난 아니야. 저번에는 반 시체도 어떻게든 목숨 붙여서 병원까지 보내더라니까.”



 민우는 말을 잇지 못한 채, 시시덕거리는 대원의 부축을 받으며 험비에 올라탔다.

 딱딱한 뒷좌석 시트에 죄인처럼 걸터앉은 그는, 창 밖으로 대원들에게 들린 채 1호차로 옮겨지는 정인을 지켜봤다.

 응급처치키트와 수액 세트를 든 대원 한 명이 그 뒤를 따라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김 병장이라 불린 의무병인 듯했다.


 지금으로서는 그의 솜씨가 좋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창 밖에 꽂힌 시선을 끝까지 못 떼는 민우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험비가 출발한 것이다.



 일렬로 빠르게 도로를 나아가는 세 대의 차량.

 온 서울 하늘을 뒤덮었던 먹구름이 그 진로를 따라 서서히 개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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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