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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19편 입니다.



처음 쓸 때 생각했던 스토리 노선에서 꽤 많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원래는 국정원 고문 이후로

와! 각성! 와! 암흑타락! 와! 국정원 떼죽음! 부산 멸망! 끝!

이런 내용으로 생각했던 거 같은데, 어쩌다 보니 부산 파트보다 서울연합 파트가 훨씬 길어지게 되었네요.


앞으로 30만자 이내로 완결이 목표...인데 과연 가능할지.

묘사나 글을 좀 짧게 짧게 줄여야 할 거 같은데...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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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19.





 서울연합 중앙병원의 응급실은 오늘도 인산인해를 이뤘다.

 안 그런 날이 드문 편이었지만, 오늘처럼 돌발성 호우가 쏟아진 날은 더더욱.

 언제나 붐비는 진료구역 뿐만 아니라 접수처나 센터 출입구에도 사람, 혹은 시체가 드러누운 침상이 가득했다.


 민둥산이 되어버린 남산에서 밀려온 토사류에 휘말린 난민들은 운 좋으면 경상.

 운 없는 자들은 이미 얼굴 위까지 흰 천을 덮은 채 꽉 찬 영안실로 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한 군데 부러지거나 잘린 채 비명을 지르는 자들은 둘 중 하나였다.

 공사현장에서 무너진 자재에 깔렸든지, 빗길에 미끄러진 차량에 들이 받혔든지.

 옛날 같았으면 당장 수술방으로 실려갈 자들이건만, 지금은 수액과 진통제에 의존한 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여덟 개로 늘린 수술실의 로젯(*구역)은 이미 꽉 찬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침수된 반지하에서 구출되어 온 자들은 대개 인공호흡기를 달고도 생사의 기로에 놓여 있기 마련이었다.

 인공호흡기계가 모자란 자들은 고유량 마스크나 비강 캐뉼라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그러다가 숨이 끊어지면, 소생실로 이동할 틈도 없이 그 자리에서 심폐소생술이 바로 벌어지곤 했다.


 그 와중에 정신없이 침상과 침상 사이를 돌아다니는 의료진.

 덤덤하게 죽음을 선고하는 의사와 그 멱살을 잡고 울부짖다가 끌려 나가는 망자의 가족들.

 영안실로 옮겨지는 침대와 그 뒤를 넋 놓고 따라가는 자들.

 고통스러운 절규와 다급한 외침, 신음과 울음소리, 총천연색의 생사가 뒤섞인 난장판이었다.



 소생실 내부는 그런 아비규환하고 완전히 격절(隔絶)된 듯,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크흠.”



 모노톤의 심전도 소리를 견디다 못한 순찰대원 한 명이 괜히 헛기침 소리를 냈다.

 다른 순찰대원이 조용히 하라는 듯 눈치를 줬지만, 그 역시 갑갑하고 지루한 건 마찬가지.

 응급처치가 끝난 이후의 소생실은 간간히 들락날락하는 간호사를 빼면 놀랄 정도로 사람의 출입이 없었다.


 그렇다고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살갑게 떠들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고개를 돌리고 남몰래 하품을 한 순찰대원.

 그의 시선이 소생실 한쪽 끝을 향했다.


 얼굴이 잔뜩 일그러진 채 색색거리는 가쁜 숨을 내쉬는 마법소녀.

 조금 전에 모르핀을 투여 받고서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듯 간헐적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생김새만 보면 실크 장막이 드리운 퀸 사이즈 침대에나 누워 있어야 할 법한 여자아이였다.

 하지만 지금 누워있는 곳은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아닌, 의료용 침대의 딱딱한 시트.

 천장에는 베일 대신 혐오스러울 정도로 많은 수액이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순찰대원은 심심한 나머지 그 수액들에 적혀 있는 이름을 속으로 되뇌기 시작했다.



 ‘플라즈마 솔루션, 덱사메타손(*스테로이드), 트라넥사메이트(*지혈제), 레미펜타닐(*마약성 진통제), 덱스메데토미딘(*최면 진정제), 노르에피네프린(*혈압상승제), 피페라실린 타조박탐(*항생제), 헤파멜즈…

 거 참, 이름 길기도 하다. 거기다 미국으로부터 수입이 끊긴 지가 언젠데, 약 이름은 아직도 다 영어야.’



 내심 툴툴거린 그는 곧 무신경한 감상을 떠올렸다.


 저게 다 얼마일까.


 수액이나 약물 뿐만이 아니었다.

 구출해온 이 마법소녀는 응급실에 들어오고 나서 전신 CT를 다 찍을 때까지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거기다 사전에 상부의 연락이라도 있었는지, 귀하신 의사 넷이 한 번에 달려오질 않나.

 내출혈이 심한 탓에 수혈도 이미 다섯 팩이나 받은 몸이다.


 적십자도 없고 헌혈하는 자도 드문 세상.

 혈액 재고는 언제나 모자라니, 같은 무게의 금만큼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은보다는 비싼 편이다.

 자신이 받는 분기별 지원금 따위는 수혈 두 팩만 받아도 모조리 사라질 정도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그의 입에서 무심코 푸념이 튀어나왔다.



 “귀하신 몸은 우리하곤 다르게 저렇게까지 해주는 구만. 에휴…”

 “입 좀 다물어. 넌 눈치도 없냐.”



 옆의 동료가 던지는 핀잔에 그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순찰대원들은 직무 특성 상 부상이 흔한 편.

 하지만 연합 조직에서 보면 말단에 불과했기에, 저런 집중적인 치료를 기대하긴 힘들다.

 재수없이 총상이라도 입으면 알거지가 되어 길거리에 나앉기 딱 좋았다.

 아니면 연합 신탁에 빚만 잔뜩 진 채무자 신세가 되든지.


 그럼에도 그가 입을 다문 이유는, 괜한 분란을 일으키긴 싫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만약에 대비해서 마법소녀의 신변을 지키는 것만큼 꿀 같은 임무는 흔치 않다.

 입 한 번 잘못 놀려서 보직이라도 변경되면 손해도 그만한 손해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마법소녀의 옆에서 잠도 안 자고 뜬 눈으로 지새는 외팔이 남자.

 그 앞에서 그런 말을 던지는 게 무신경한 짓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니까.



 민우는 조용한 소생실에 오가는 그들의 수군거림을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정확히는 신경 쓸 정신이 없다고 하는 게 옳았다.



 “…”



 여기 도착한 것도 어언 여덟 시간.

 아무리 여름 해가 지는 시간이 늦다고 한들, 지금쯤 밖은 땅거미가 자욱한 밤일 터였다.

 그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민우의 위장은 귀찮을 정도로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틀었던 등은 하루 종일 지끈거리는 게 염좌라도 온 모양이었다.

 순찰대원에게 제압당했을 때 바닥에 쓸린 얼굴에 붙어있는 거즈는 축축했다.


 하지만 민우의 신경은 자신의 몸보다는, 온전히 눈 앞의 정인에게 쏠려 있었다.


 정인의 얼굴은 말하자면 표정의 불협화음이라 할 만했다.

 고통스러운 듯 잔뜩 찡그린 얼굴과는 정반대로, 반쯤 감은 눈은 흐리멍덩하니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마약으로도 다 가라앉힐 수 없는 진통 때문에 꾹 악문 이빨.

 그러나 그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신음과 혼잣말은 천연덕스러운 아기의 옹알이 같았다.


 그녀의 손목에 묶여 있던 억제대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침상 옆의 레일에서 텅텅 소리가 났다.

 거뭇하니 부은 손이 옆구리에 꽂혀 있는 관을 자꾸 쓸어 내리듯 매만졌다.

 뼈마디가 다 부러진 손가락에 힘을 줄 수는 없는 법.

 약에 취한 정인은 그것도 모르는 듯, 자꾸 관을 잡아 빼려고 하고 있었다.


 민우는 왼손으로 그녀의 손을 살짝 부여잡고 흉관에서 떼어냈다.

 힘없이 밀려난 정인의 손은 관 대신 민우의 손이라도 만지작거리려는 듯 꼼지락거렸다.



 대충 십 분 정도의 간격으로 반복되는, 실랑이 같지도 않은 실랑이. 

 고통에 젖은 신음을 제외하면, 정인이 보이는 유일한 반응이었다.


 민우는 그럴 때마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초조함과 조바심을 느꼈다.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정인의 상태는 반쯤 시체나 마찬가지였다.

 혈압은 바닥을 치고 있었고 잠시 돌아왔던 안색은 다시 시퍼렇게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의무병은 최선을 다했지만, 정인의 상태는 그런 임시방편으로 좋아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도 심각했으나 내상은 더 심했다.

 어떻게든 혈압이 안정된 후 CT를 찍은 결과는 민우의 눈이 뒤집어질 만한 것이었다.

 부러진 뼈만 해도 양쪽 손의 중수골과 근위부 수지골, 노뼈와 자뼈, 왼쪽 갈비뼈 전체와 오른쪽 갈비뼈 절반.

 쇄골, 복장뼈, 양쪽 대퇴골두(頭), 왼쪽 어깨뼈, 광대뼈, 코뼈, 기타 등등…

 척추와 두개골만 빼면 거의 전신이 망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수한 타박상과 창상은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정작 정인의 상태를 악화시킨 원인은 그런 자잘한 게 아니었다.



 민우는 정인의 양쪽 갈비뼈 사이에 꽂혀 있는 굵직한 관 두 개를 쳐다봤다.

 차마 못 볼 걸 본다는 듯.


 관 끝에는 각각 사각형 플라스틱 병이 두 개씩 연결되어 있었다.

 병 하나에는 물이, 나머지 하나에는 피가 가득했다.

 정인이 가쁜 숨을 색색거리며 쉴 때마다 물이 차 있는 병에서 공기방울이 보글거리면서 올라왔다.


 부러진 갈비뼈가 늑막을 찢는 바람에 양쪽 폐에 모두 기흉이 생긴 것이다.

 거기에 혈관이라도 건드렸는지 피까지 차는 바람에 찾아온 저혈량 쇼크.

 늑막에 가득 들어찬 공기가 심장을 짓누르기까지 했으니, 살아서 응급실까지 온 것이 용한 수준이었다.



 CT를 보더니 속사포처럼 그런 말을 던졌던 의사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다.

 다른 의사 한 명까지 허겁지겁 오더니, 둘이 달라붙어서는 5분만에 저 흉관을 넣고는 급하게 사라진 것이다.

 그런 일이 벌어진 것도 이미 6시간 전.

 흉물스러운 관이었지만, 저 관이 없었으면 지금쯤 그녀는 삼도천을 건넜을 터.


 분명히 감사해야 마땅한 일이었다.

 실제로 당시만 해도, 민우는 의사가 전재산을 내놓으라 해도 그럴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불 꺼진 건물에 전기 배선을 새로 깔 듯 차곡차곡 수액만 연결하는 걸 보면서, 그 감사의 심정은 조금씩 희석되어갔다.

 그리고 소식도 없는 누군가를 몇 시간이고 기다린 지금.

 민우는 아무라도 좋으니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은 기분이었다.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헤매던 정인이 다시 까무룩 잠들었다.

 민우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이미 수백 수천 번을 본 바이탈 모니터를 다시 쳐다봤다.


 다행스럽게도 혈압이나 산소 수치는 정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수 차례 있었던 일이지만 그럴 때마다 민우는 심장이 멈추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한숨을 돌린 민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입구 근처에 서있던 순찰대원 둘이 움찔했다.

 몇 시간이고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사람이 갑작스레 일어나니 그럴 수밖에.



 그들을 의도적으로 쳐다보지 않으려 하며, 민우는 소생실 밖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조용한 소리와 함께 열리는 자동문.

 중증 구역에 가득한 침상과 죽어가는 사람들,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민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테이션에서 정신없이 약을 믹스하는 간호사에게로 다가갔다.



 “저기요.”



 간호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카트 위에 방금 약을 탄 수액에 바코드를 붙인 뒤 올려 놓았다.

 민우는 다시 한 번,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간호사를 불렀다.



 “저기요, 선생님!”



 돌아온 건 매몰찬 거절의 대꾸였다.



 “지금 바쁜 거 안 보이세요? 선생님 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이런 대화도 벌써 네 번째였다.

 민우는 울컥 치솟는 화를 간신히 억누르고 재차 말을 걸었다.



 “그렇게 기다린 게 지금 벌써 여섯 시간 짼데, 사람을 저 안에 넣어 놓고 기다려라, 기다려라, 이 말만 할 거면. 도대체 언제쯤 온다는 말입니까? 죽고 나서 사망 선고하러 올 겁니까? 네?”



 나름대로는 침착하게 따진다고 따졌지만, 말미에 이르러서 목소리가 커지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고성(高聲)에 싸움이라도 났나 싶었는지 몇몇 사람들이 민우를 흘긋 돌아봤다.

 그 중에는 중증 구역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무장 경비원도 있었다.


 간호사는 익숙하다는 듯 지친 한숨을 쉬면서, 스테이션에서 가장 가까운 경비원에게 손짓했다.

 귀찮다는 듯 삼단봉을 건들거리며 다가온 무장 경비원.

 스테이션 너머로 몸을 기울인 민우의 뒷덜미를 그의 빈 손이 잡아당겼다.


 그리 센 힘은 아니었기에 버티려면 충분히 버틸 수 있었지만, 민우는 순순히 스테이션에서 몸을 뗐다.

 무장 경비원의 시선이 잠시 민우의 복색을 살폈다.


 원래 입고 있던 웃옷은 흙탕물에 푹 절어 도저히 사람이 입을 꼴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그는 순찰대원 정복 상의를 빌려 입은 상태였다.

 사이즈가 안 맞는 국방색 상의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난민은 아닌 듯하니, 다짜고짜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기엔 부담스러운 상대.

 무장 경비원은 자신보다 몇 치는 높은 위치에 있는 민우의 얼굴을 뻔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요?”



 민우는 잠시 무장 경비와 간호사를 번갈아 노려봤다.


 이런 식으로 늦어지는 치료에 항의한 건 민우만이 아니었다.

 때 아닌 수해에 허망하게 죽어 나간 난민들은 이미 수십 명에 달했다.

 이미 사망한 상태로 도착했든, 돈이 없어 치료를 포기했든, 후순위로 밀리고 밀리다가 침상에서 명을 달리하든.


 이유야 어쨌든, 언제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못 받아들이는 자들은 있게 마련이다.

 생명의 존엄보다는 개죽음이 훨씬 가까운 세상이라 해도.

 대개는 치료가 밀려서 죽은 자들의 유족이 그러했다.


 그런 자들의 분노에 돌아오는 건 심심한 유감의 말이 아니라, 무장 경비원들의 삼단봉이었다.


 중앙병원은 연합의 가장 중요한 시설 중 하나.

 특히 응급실은 현재 서울에 있는 거의 유일한 외상센터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곳에서 감히 소란을 부리는 ‘난동꾼’들이 흠씬 얻어터지고 쫓겨나는 것 정도는 아무런 문제될 소지가 없었다.


 오히려 연합에서는 암암리에 그러기를 권장하곤 했다.

 그러니 다짜고짜 두들겨 패지 않는 것만 해도 이 경비원은 나름 조심스럽게 굴고 있는 것이다.


 민우는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울분을 꿀꺽 삼키고, 대신 최대한의 점잔을 가장하며 대답했다.



 “저기 소생실에 있는 환자 보호잡니다. 주나은 씨는 언제쯤 오는 겁니까?”



 무장 경비원은 그 이름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소생실을 손가락질했다.



 “지금 다친 사람들이 산더미라 순서 되면 올 거요. 안에 들어가서 기다려요.”

 “아니, 벌써 몇 시간을 기다렸는데 아직도 순서가 안 돌아옵니까? 말이 돼요? 응급처치만 해놓고 수술도 안 된다, 주나은 씨도 못 온다, 도대체 뭡니까?”



 나은의 치유 마법이 효과를 잃어버리는 임계 시간이 어느 정도였는지, 민우는 명확하게 떠올릴 수 없었다.

 현역 시절 마법소녀들의 ‘제원’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지만, 그것도 이미 4년이나 지난 지금.

 자신이 담당하던 마법소녀도 아닌 나은의 마법 효과까지 깔끔하게 기억해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모든 치료가 그렇듯, 적시를 놓치면 후유증이 남게 마련.


 비정상적으로 꺾인 고관절이 다시는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

 칼로 베인 곳에 거친 흉터가 남을지도 모른다.

 양 손을 절단해야 될 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 제 힘으로는 숨쉬기 어렵게 될지도 몰랐다.


 그런 가혹한 미래를 상상한 민우의 입에서 고운 말이 나올 수는 없었다.



 삼단봉을 쥔 무장 경비원의 손에서 힘줄이 꿈틀거렸다.

 불쑥 들이민 민우의 머리통을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어하는 모양이었다.

 상대가 순찰대원 정복을 입고 있든 뭐든, 응급실에서는 그들이 곧 법이었으니까.


 팽팽한 긴장감이 둘 사이에 오가자, 눈치를 보던 다른 무장 경비원들이 줄줄이 몰려왔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싸움 구경 좋아하는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시선을 보냈다.

 질리지도 않고.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신경하게 그 광경을 일별했다.

 오늘만 해도 이미 열 번은 넘게 본 광경이기 때문이다.


 일촉즉발이 된 분위기를 깬 것은, 지친 여자의 목소리였다.



 “거기 멈춰요. 저 왔으니까.”



 민우는 중증구역의 입구를 홱 소리 나게 돌아봤다.

 얼마나 고개를 세차게 돌렸는지 목덜미의 힘줄이 팍 솟아났다.



 해쓱한 낯의 나은이 그곳에 서 있었다.


 목덜미 근처에서 고무줄로 묶은 검은 머리카락은 푸석했다.

 거기다가 입고 있는 건 잔뜩 구겨지고 핏자국이 여기저기 묻어 있는 파란 수술복.

 신고 있는 크록스조차 말라붙은 피로 꾀죄죄했다.

 평소의 은근히 멋 부리던 차림은 어디로 갔는지 흔적조차 없었다.


 터덜터덜 스테이션으로 다가온 나은은 민우와 무장 경비원들의 사이를 헤집고 지나갔다.

 밀려난 무장 경비원은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으며, 민우에게 경고를 던졌다.



 “댁이 바라던 대로 왔으니 잘 됐네. 얌전히 있으쇼. 괜한 짓 하다가 험한 꼴 보지 말고.”
 “…”



 민우는 그 경고를 무시했다.

 정확히는 경고가 귀에 아예 들어오지도 않았다는 말이 옳았다.


 나은은 스테이션 뒤에서, 어느 새 찾아온 응급실 의사에게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차례대로 의사의 입에서 나오는 환자의 이름과 진단명.

 끝없이 이어지는 명단을 듣는 나은의 볼은 홀쭉하니 들어가 있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굳게 닫힌 입매에서는 피로함과 왠지 모를 체념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민우는 조금 전까지 분노로 들끓던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했다.

 원래도 그녀에게 가진 감정이 썩 좋진 않았기에, 얼굴을 보자마자 비아냥이라도 퍼부을 셈이었다.

 무슨 농땡이를 피웠기에 이렇게 늦게 왔냐고.


 하지만 말라죽기 직전의 사슴 같은 행색을 보니 도저히 그렇게 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예전에 중앙병원 주차장에서 그녀에게 들은 이야기도 민우를 진정시키는 데 한몫 했다.


 마법소녀 앰버.

 연합의 편리한 도구로 혹사당하다 결국 자살해버린, 정신 마법을 다루는 마법소녀.

 그 그림자가 나은의 어두운 낯에서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앰버를 들먹이면서, 마법소녀를 만능 도구 정도로 여기는 거 아니냐고 비꼰 당사자.

 그런 나은이 정작 이렇게 소모된 모습을 보니 민우는 불편하면서도 꽤 심란한 기분이었다.



 들을 정보는 다 들었는지, 환자 명단이 적힌 프린트물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은.

 현기증이 도는지 살짝 비틀거리는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고, 브리핑하던 의사는 자리를 떴다.

 의사뿐 아니라 주변의 간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은을 사람이라 생각하기보단 로봇 청소기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나은 역시 별 기대도 안 한다는 듯, 스테이션에 몸을 기댄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민우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까?”

 “이게 괜찮아 보여요? 하나도 안 괜찮으니 빨리 일이나 끝내죠… 으.”



 오기 어린 내용과는 다르게, 목소리에는 피로만이 가득했다.

 민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생실로 향했다.


 안에서 잡담을 나누던 순찰대원 둘은 민우가 들어오자마자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더니 그 뒤에 따라 들어오는 수술복 차림의 나은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은은 그들의 시선을 완전히 무시하고는 크록스를 질질 끌며 침대로 다가갔다.


 정인과 차트를 번갈아 보던 나은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뭘 했길래 이렇게 다친 거예요? 아주 성한 데가 없네.”



 민우는 죄책감이 속을 쑤시는 느낌을 받으며, 나은의 시선을 피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그럴 일은 무슨. 어쭙잖은 변명하지 말아요. 초진 기록에 다 적혀 있으니까. 거기, 순찰대원 두 분은 잠시 나가 계세요.”



 갑작스럽게 화살이 돌아온 순찰대원 둘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선임 순찰대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경호 중이라 자리는 지켜야 됩니다.”
 “환자 프라이버시에 관련된 일이라 관계자 아닌 당신들 앞에서는 못 해요. 말씨름하기도 피곤하니까 빨리 나가요. 다른 환자들도 많으니까.”



 순찰대원 둘은 잠시 서로 수군거렸다.


 저거 사도닉스 아닌가?

 중앙병원에서 밤낮없이 노예처럼 일한다더니 진짜였나 보네.

 여자가 아주 뼈 밖에 안 남았구만.

 사도닉스가 나가라고 했으니 우리는 잘못 없는 거 맞지?

 마법소녀님께서 내린 명령인데 우리 같은 똘마니가 어쩌겠어.

 잘 됐네. 편의점이나 좀 다녀오자고.



 결론을 낸 순찰대원 둘은 건성으로 경례를 붙이고는 소생실을 나갔다.

 내심 해방되어서 신이 난다는 듯 경쾌한 걸음이었다.


 둘이 쑥덕거리는 걸 모두 들은 나은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병신들…”



 민우는 나은의 욕설에 살짝 놀랐다.

 나은의 성격이 결코 좋다고는 할 수 없는데다 화법도 톡 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욕설을 하는 건 처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건강만이 아니라 성격도 많이 버린 모양이었다.


 민우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나은은 정인이 누워 있는 침대 주변의 커튼을 휙 쳤다.

 그리고는 정인의 몸을 덮고 있는 두꺼운 시트를 걷어 내렸다.


 작은 몸 이곳저곳에 가득한, 이제는 거무죽죽하게 바뀌어 버린 무수한 피멍.

 그 중에서도 목덜미에는, 지금도 유령이 목을 움켜쥔 듯한 형상의 멍이 섬뜩하게 자리잡았다.

 흉곽 양쪽에는 갈비뼈 사이로 들어가 있는 관 두 개가 늑막에 고인 공기와 피를 끊임없이 빨아내고 있었다.


 인대가 끊어지고 뼈가 부러진 고관절은 120도에 가깝게 벌어진 상태.

 각도 또한 비정상적으로 안으로 휘어 있었다.

 훤히 드러난 그녀의 국부를 가리는 건 얄팍한 거즈 몇 장뿐.


 가슴 밑과 사타구니에 난 창상은 겨우 베타딘 소독 정도만 되어 있었다.

 원래라면 봉합이 필요한 상처지만, 치유 마법을 받을 때 봉합사가 남아있으면 새로 자란 살 밑에 파묻혀 염증이 생긴다.

 그 때문에 봉합을 하지 않고 벌어진 채 놔둔 것이다.



 서늘한 공기에 노출된 그녀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런 미세한 움직임에도 격통이 밀려오는지, 정인은 흐느끼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으흑…”



 커튼 안으로 들어온 민우는 도저히 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몇 번을 목도해도 도저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국정원에서 구출해왔을 때보다도 몇 배는 더 처참한 몰골.

 프로페셔널이 가한 절제된 고문하고는 다른, 되는 대로 살아온 자들의 날 것 그대로인 폭력이 낳은 산물이었다.


 그리고 명백한 자신의 실수가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그와는 반대로, 나은은 정인의 곳곳을 덮고 있는 거즈를 무신경하게 치웠다.

 길게, 혹은 깊게 베인 무수한 열상.

 그 속에서 삐져나온, 새빨갛고 노란 지방과 진피층.


 카트에 놓여 있던 라텍스 장갑을 낀 나은은 정인의 음부로 손을 뻗었다.

 초진 당시 제대로 체크가 안 된 사항이 있었기에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정인의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벌려서 속을 잠시 들여다본 나은은, 사무적인 태도를 유지한 채 민우에게 물었다.



 “성폭행을 당한 흔적 같은데, 검사는 해보는 게 좋겠네요.”



 민우의 뇌는 잠시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멍하니 서 있다가 재촉하는 듯한 나은의 시선에, 악몽에서라도 깬 듯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뭐라고요?”

 “질구하고 질 내벽에도 상처가 있어요. 출혈은 멎었지만 칼로 찔린 창상하고는 다른 형태라, 뭔가 삽입된 흔적 같아요. 막에도 손상이 있고.”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로 입을 벌린 민우를 무시하고, 나은은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물론 단순 폭행에 의한 흔적일 수도 있지만, 가능성이 높진 않아요. 맞았다고 질 안의 점막에 열상이나 찰과상이 생기진 않으니까. 시간이 오래 되어서 그런지 육안상 체액은 안 보이지만, 질내 사정을 당했는지는 검사해봐야 알죠.”

 “…”


 “언ㄴ… 환자의 민감한 프라이버시하고 관련된 검사지만, 지금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니까 보호자에게 묻는 거예요. 할지, 말지.”



 한참을 넋을 놓은 채 입을 떨던 민우는,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이, 일단, 해주, 해주십쇼. …그, 겨, 결과 확인까지는, 어, 얼마 정도 걸립니까.”

 “글쎄요. 여기 진검(*진단검사의학과)에서 하는 게 아니라서. 짧으면 3일, 길면 1주일 넘게 걸릴 걸요. 애초에 강간 피해자가 병원까지 살아서 오는 경우는 요즘 드문 편이니까 잘 안 하는 검사긴 하죠.”



 무신경한 대꾸를 던지며, 나은은 피 묻은 장갑을 벗어 폐기물통에 던졌다.

 확인할 건 확인했고 이제 치료하는 일만 남았는데, 마법을 쓸 때는 굳이 손으로 건드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질 분비물로 검사하는데 검출율은 30% 밖에 안 되니까, 4주 뒤에 꼭 임신 테스트기는 써보는 게 좋을 거예요.”
 “…”



 할 말을 잊은 민우는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도저히 참지 못하고 바닥에 발을 굴렀다.

 납치범들을 자신의 손으로 못 죽여버린 게 천추의 한이었다.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떠들어대는 나은 역시 꼴도 보기 싫은 건 매한가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그녀에게 화풀이를 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아직 민우에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은은 분을 삭히지 못하고 씩씩거리는 민우를 외면하더니, 정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뒤로 한걸음 물러나서는 기라도 모으듯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곧 일어난 유백색의 마력광이 서서히 나은, 그리고 정인의 몸을 감쌌다.

 효과는 자신에게는 투시.

 정인에게는 마취, 그리고 재생과 유합.


 마취는 예전에 그녀에게 썼을 때와는 다르게, 통각신경만 마비시키도록 강도를 섬세하게 조절한 마법이었다.

 부러진 뼈를 강제로 다시 붙이는 고통은 마약성 진통제로도 감당하기 어려웠으니까.


 어깨를 들썩거리며 분을 삭히던 민우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병상에 누워 있는 정인의 몸에서 마치 막대기를 부러뜨리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들렸기 때문이었다.



 “뭐하는… 아.”



 무심코 따지려던 민우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정인의 나신에 가득하던 피멍이 순식간에 흐려져가는 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퉁퉁 부었던 옆구리는 풍선이 꺼지듯 가라앉고,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져 있던 고관절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갈비뼈 사이로 들어간 흉관이 새로 자라난 살과 늑막에 서서히 밀려나오더니, 쑥 빠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들썩이던 정인의 호흡이 잔잔해지고, 고통에 일그러졌던 얼굴은 평온을 되찾아갔다.

 그에 비례하듯, 풍랑 치던 민우의 마음 역시 점차 가라앉아갔다.



 진땀을 흘리며 집중하던 나은은 곧 깊은 숨을 내쉬면서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전원이 내려간 형광등처럼 훅 꺼지는 마력광.


 민우는 그런 나은보다도, 정인에게 먼저 다가가서 용태를 살폈다.

 멍이 흡수되며 희미하니 노르스름한 흔적 정도만 남은 몸과 얼굴.

 가슴과 음부에 남은 칼자국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깨끗했다.

 흉관이 빠져나간 자리도 마찬가지.

 민우가 절단까지 각오했던 손은 언제 소시지처럼 부었냐는 듯, 원래의 아기자기한 소녀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두 다리는 여전히 쩍 벌어져 사타구니가 훤히 드러난 상태였다.

 하필이면 나은이 그 위를 덮은 거즈도 치웠기에, 솜털이 살짝 난 두덩과 굳게 닫힌 음부가 그대로 민우의 눈에 들어왔다.


 그 광경이 보기 낯뜨거웠던 민우는 시선을 옆으로 슬쩍 돌렸다.

 한순간 든, 조금만 더 자세히 보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면서.


 그는 정인의 뭉툭한 다리를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밀었다.

 그녀의 존엄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둘 순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새 옅은 잠에 든 정인은 허리를 옆으로 틀며 잠꼬대 같은 말을 웅얼거렸다.



 “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다리에 닿는 뭔가를 피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민우는 순간 움찔거리면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나은의 치유 마법이 제대로 안 들어서 아직도 부러진 상태라, 통증이 심한 건가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면 저런 혼미한 정신으로도 저절로 몸서리칠만큼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인지.

 저도 모르게 그런 상상이 드는 행동이었기에.


 가슴이 한순간 철렁 내려앉은 민우는, 곧 정인이 다리를 스스로 오므리는 걸 보며 조금은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골절이 안 나았다면 저럴 순 없었을 테니까.


 민우는 잡념을 억누르고, 간신히 잠든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시트를 끌어올려 그 몸 위에 덮었다.



 나은은 어지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일어났다.

 짧고 푸석한 포니테일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녀는 침상 옆으로 다가와서는 민우를 옆으로 슬쩍 밀었다.



 “좀 비켜 봐요. 옆에 서 있지 말고.”



 얌전히 민우가 물러나자, 나은은 복잡하게 얽힌 수액줄을 뒤져 레미펜타닐 수액을 잠갔다.

 마법으로 골절을 유합시켜도 통증은 바로 사라지진 않지만, 부러져 있을 때보다는 훨씬 호전될 터.

 그런 상황에서 마약성 진통제가 계속 들어가면 호흡부전을 유발할 가능성만 높아진다.


 덱스메데토미딘 수액의 주입 속도도 줄인 나은은 가드레일을 두 팔로 붙들고 몸을 기댔다.

 어느 새 땀으로 푹 절어 까매진 그녀의 수술복.


 그걸 본 민우는 그제서야 약간 미안한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꺼냈다.



 “고생 많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주나은 씨.”



 그래도 전에 주차장에서는 성은 빼고 불러주더니.

 이제는 아주 남남 취급이다 이거지.


 속으로 무심코 투덜거린 나은은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고마우면… 저기 의자, 의자나 좀 갖다 줘요. 드레싱 카트 옆에…”

 “이거 말입니까?”
 “그래요, 거기, 거기 놔요.”



 진찰용 회전의자에 앉은 나은은 숨을 고르면서 수술복 앞섶을 펄럭거렸다.

 희미한 열기가 훅 하고 솟아올랐다.

 가슴골이 살짝 드러났지만, 누가 있든 말든 신경조차 쓰지 않는 태도.

 중앙병원에 배치된 지 반 년도 되지 않았건만, 나은은 이미 수십 년은 찌든 듯했다.


 그런 나은을 잠시 쳐다본 민우는 곧 자신이 원래 앉아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그리고는 레일 틈새로 왼손을 뻗어, 원래대로 돌아온 정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전과는 다르게 보들보들한 피부의 감촉이 느껴졌다.

 민우는 잘못 건드리면 깨질 것 같은 유리 세공품을 만지듯 그 손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눈가를 비비던 나은은, 침상의 레일에 턱을 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인에게만 온통 관심이 가 있는 민우.

 안정되어가는 정인의 심전도 그래프가 소생실의 공기를 단조롭게 만들어갔다.


 나은은 잠시 쉴 시간이라도 벌 겸, 병상 건너편의 민우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의수는 어쨌어요? 꽤 비싼 물건 같던데.”



 자신의 텅 빈 오른 소매를 뒤로 슬쩍 뺀 민우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고장 나서 수리 맡겨야 합니다.”

 “혜인… 언니 구하다가 고장 난 건가요? 어쩌다가?”


 “그런 건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일 아닙니까. 누님을 치료해준 건 고맙지만 피차 쓸데없이 대화는 피하고 싶을 테니, 쉬려면 조용히 쉬다 가십쇼.”
 “그냥 물어봤어요. 까칠하게 굴기는. 언니한테도 그런 식으로 굴어요? 그러다가 정나미 다 떨어져서 도망가도 몰라요.”



 나은의 말을 듣고 민우는 열이 확 올랐다.


 제까짓 게 누님에 대해서 뭘 안다고.

 누님의 신세를 망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년이 아니던가.

 이 여자만 아니었어도 누님이 고문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다 망해버린 동네까지 강제로 오게 될 일도 없었으리라.

 부산에 계속 살고 있었다면 가난하고 힘들었겠지만, 언젠가는 빛이 들었을지도 모르지.

 지금처럼 끔찍한 일을 안 당해도 됐을 터였다.


 그 모든 원흉이 지금 염치도 없이 언니, 언니 타령을 해.



 그는 입이 댓발이나 나온 나은에게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러는 주나은 씨야말로 여기 와서 다이어트 한 번 톡톡히 하고 있는 것 같군요. 거 참, 피골이 상접한 게 예전보다 훨씬 보기 좋습니다. 지난 번에 과로사 운운하더니 스스로 실천하는 게, 참 모범적인 연합의 마법소녀라 할 만하군요. 끝까지 그 마음가짐 잘 지키기 바랍니다.”



 빙글거리며 독을 쏘아내는 게 살모사가 따로 없었다.

 그녀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매운 악담.


 애초에 좋은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기에, 나은은 굳이 되받아 치지는 않았다.

 더 대화를 나눠봐야 유치한 말싸움이나 벌어질 게 뻔하리라 판단했으니까.

 민우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곧바로 나은에게서 시선을 돌려, 정인의 잠든 얼굴을 쳐다봤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나은은 레일에 턱을 괸 채 잠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때아닌 상념이 떠돌았다.



 주차장에서의 마지막 만남.


 민우에게 다시는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던진 지 두 달도 되지 않았다.

 조금 전 민우가 내뱉은 말은 그때의 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은이 그런 말을 던진 이유는, 둘의 얼굴을 다시 마주치게 되는 게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민우보다는, 지금 눈 앞의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에.


 한때는 존경해 마지 않았던 선배 마법소녀를 더러운 정치판에 끌어들여, 결국은 망가뜨리는데 일조했다는 죄책감.

 아무리 오갑용의 사주가 있었다 한들 자신의 책임이 없는 건 아니었다.

 계기가 된, 임철규 의원의 암살 지시를 다른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었다.

 적어도 그녀에게 피해가 안 가게 해결하는 것 정도야 불가능하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자신에게 피해가 오는 방법이었기 때문.

 오갑용이 대놓고 ‘라피스라줄리’를 암살자로 지정한 이상, 그걸 어겼다면 분명 모종의 페널티가 있었으리라.


 당시 나은에게는 그걸 면피할 생각밖에 없었다.

 그녀를 부산 정치권에 제물로 바침으로써 풍파를 피해갈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아무튼 그런 죄의식 때문에, 나은은 보안분실에서 그녀를 구출한 이후 한 번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애써 파묻어버린 과거를 굳이 헤집어 꺼낼 이유는 없었으니.


 그런데 그렇게 외면해버린 과거가, 오늘 서울연합 중앙병원에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또다시 완전히 망가져버린 모습으로.


 파견 나갔던 원주연합의료원에서 나은이 급하게 복귀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

 물론 표면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1시간 동안 150mm 이상 쏟아진 집중호우 때문에 발생한 수많은 부상자들의 치료 지원을 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은의 마음 속에서 경중을 따지자면, 라피스라줄리를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좀 더 무거웠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나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마주오는 것과 맞대결하기보단, 언제나 회피하면서 살아온 삶이었다.


 사소하게는 어린 시절, 부모님을 따라 억지로 성당에 꼬박꼬박 나가던 것부터.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재수하지 말고 그냥 성적에 맞춰서 가라는 주변의 강권에 간호대를 갔을 때도.

 의료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뒤 물밀듯이 몰려오는 언론의 비난에 공개 사죄를 해야만 했을 때.

 썩 하고 싶지도 않았던 돈놀음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을 때.

 오갑용의 더러운 속셈을 눈치채고서도 눈을 감아야 했을 때조차.


 심지어는 지금조차도.


 어쩌면 얼룩처럼 묻어 있던 죄의식을 청산할 기회라고 여겼는지도 몰라.

 그래서 36시간 당직을 선 졸린 몸을 이끌고 허겁지겁 달려왔을지도.


 그렇게 생각한 나은은, 소생실의 서늘한 공기에 가볍게 몸을 떠는 정인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런 그녀의 어깨까지 시트를 끌어올려 주는 민우의 모습도.


 금방이라도 떨어지려는 눈꺼풀을 억지로 붙들어 맨 채 그 모습을 지켜본 나은은, 가벼운 코웃음을 쳤다.



 “…흥.”



 오래 묵은 곰팡이 자국처럼 찜찜한 기분은 그래봐야 도통 가시지를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걸 청산할, 형편 좋은 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은에게는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마음의 빚을 털어낼 다음 기회는 더 이상 없을지도 모르니까.



 그녀는 아무런 전조도 없이 불쑥 입을 열었다.



 “7월 말까지 한 달쯤 남았네요.”



 시트를 부여잡은 정인의 손을 쓰다듬던 민우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나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부산에서는 김길주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했다는 소문이 있더라고요. 시위대가 수도 없이 잡혀가고 황령산이나 백양산 난민촌도 싹 밀렸다지 뭐예요. 노숙자들은 다 징집해서 교육대로 끌고 가고… 창원하고 울산 공단은 불이 꺼지는 날이 없다네요. 듣기로는 마법소녀들도 다시 재소집 당한 모양이라죠.”



 민우는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느냐는 듯, 차갑게 식은 눈길을 나은에게 던졌다.


 부산에서도 마법소녀들을 다시 소집했다는 건 몰랐다.

 그러나 나머지는, 그에게는 하등 새로울 것도 없는 소식들이었다.

 부산 정부가 서울연합을 적당히 손 봐주기로 작심했다는 것 정도야 이미 널리 퍼진 사실이니까.


 민우의 뇌리에 문득 23사단 소속의 마법소녀들이 떠올랐다.

 눈 앞의 라피스라줄리, 서혜인.

 자신이 부산에서 탈출한 이후 한 번도 기별이 없는 시트린, 정윤아.

 울산에 파견되었다가 소식이 끊어진 페리도트, 임예지.

 마지막으로 다이아몬드, 김선희.

 지금쯤 부산에 남아있을 시트린과 다이아몬드는, 어쩌면 다시 정부군에 다시 소속되었을지도 모른다.


 민우는 무심코 둘의 전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면세계 대전 시절처럼.


 파괴력이 높은 전기 계열의 마법을 다루는 시트린.

 마력과 물리력 대부분을 차단할 수 있는 다이아몬드.

 공방 면에서 궁합이 좋은 둘이니 격전지에 투입될 가능성도 높을 것이다.

 마법소녀 코랄, 윤은하처럼 뒷배가 든든한 것도 아니니 최전방 배치를 피할 수도 없으리라.


 다이아몬드가 심약하다지만 그녀의 장기는 방어 마법.

 연합 마법소녀들의 공격에서 시트린을 지키기만 해도 역할은 다하는 셈이다.

 경남 서부전선에서 마신 가미긴의 마법조차 완봉한 그녀의 방어막을 뚫을 수 있는 공격은 거의 없으니까.


 그러니 방어는 다이아몬드에게 맡기고, 시트린은 연합의 마법소녀 무력화에 초점을 맞추면 그만.

 어차피 기계화 보병이든 뭐든, 방어에 집중하는 다이아몬드를 뚫는 건 불가능하다.

 둘을 상대해야 하는 연합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상 재앙이나 다름없다.


 최선은 연합의 마법소녀들 중 누군가가 둘을 봉쇄해서 전선에서 이탈하도록 만드는 것.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적인 사람은…



 거기까지 생각한 민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다 어쨌단 말인가.

 지금의 자신은 지상작전사령부 소속의 중위 조민우가 아니다.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들락날락하는 인력소 사장, 부산 뒷골목의 마약상이라는 가면도 버린 지 오래.

 연합의 안위 따위는 민우의 관심 밖이었다.


 정부든 연합이든 자기네들끼리 알아서 치고 받고 싸우라지.

 누님에게 불똥만 튀기지 말란 말이다.

 제발.


 그런 민우의 의중은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나은은 계속 말을 걸었다.



 “민주자유당하고 김길주. 부산 수도방위사령관 윤관. 그 사람들이 왜 전쟁을 원하는지는 뭐, 추측만 나돌 뿐이죠. 전쟁보다는 사실 계엄령이 주 목적이다. 아니다, 황해에 있는 포르네우스 유정의 채굴권을 노리고 있다. 청주와 평택의 주인 없는 반도체단지 때문이다…”


 “…”

 “사족이 길었네요. 그, 중요한 건, 전쟁이 나면 다치고 죽는 사람이 나오겠죠. 마법소녀들이 투입된다면, 아주 많이.”



 ‘마법소녀’라는 대목에서 나은은, 정인을 흘긋 쳐다봤다.

 힐난하거나 비난하는 시선은 아니었으나, 민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은이 그녀에게 그런 눈길을 보내는 속내, 쳐다보는 타이밍.

 그리고 이런 쓸데없는 소리나 해대는 나은의 존재까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렇게 혓바닥이 깁니까? 요점만 말하십쇼.”

 “…그래요. 그러면 질문 하나. 부상병 한 명을 살리는 데 돈이 얼마나 들 거 같아요?"



 민우는 저도 모르게 정인의 비어 있는 무릎 아래를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천안연합병원에서 어쩔 수 없이 절단한 다리.

 당시 정인의 치료 비용이 얼마나 들었는지 민우는 모르고 있었다.

 마법소녀에 대한 의료비 지원은 연합 본부에서 병원에 직통으로 지급하는 것이기에.

 하지만 모르긴 몰라도 개인이 감당하기는 어려운 거금일 터였다.


 두런거리는 소리가 거슬렸는지, 정인이 희미한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민우는 잠시 놓았던 그녀의 손 위에 다시 왼손을 겹쳤다.

 민우의 긴 손가락 마디 사이로 흐르듯 비집고 들어와, 살며시 깍지를 끼려는 정인의 작은 손가락.

 무의식 중에 사람의 온기를 갈구하려는 듯한 모양이었다.


 그 온도와는 정반대로, 나은에게 향한 민우의 말은 냉담한 무시였다.



 “제 알 바 아닙니다.”

 “좀 오래된 논문인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캐나다군은 부상자 1인당 2-4만 달러 정도를 지출했다더라고요. 본국으로 후송해서 치료하는 데는 12만 달러 정도를 썼고요.”


 “…”

 “이면세계 대전 때의 데이터가 있으면 정확하게 추산이 가능하겠지만, 그럴 여유는 연합이나 부산이나 없었으니까요. 결국 얼마나 돈이 들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리고 거금을 들여서 살려 놔도 남는 건…”


 “요점만 말하라고 했습니다, 주나은 씨. 쓸데없이 말 빙빙 돌리지 말고.“



 으르렁거린 민우는 왼손 안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을 느꼈다.

 꽉 쥐여진 주먹이 아픈 듯, 손을 빼려고 정인이 꼬물거린 것이다.

 아차 싶었던 민우가 손아귀를 풀자 정인은 살짝 찡그린 인상을 풀고 잠잠해졌다.


 나은은 그 모습을 쳐다보다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이 성가신 여자가 떠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던 민우의 표정은 나은의 다음 말에 살짝 굳었다.



 “저 일주일 후에 천안으로 가요. 충북 라인 쪽으로 배치될 거래요.”
 “왜 당신이? …아.”



 무심코 되물었던 민우는 곧바로 뭔가를 깨달은 듯, 탄식 같은 감탄사를 내뱉았다.

 나은은 머리카락에 쓸려 간지러운 뒷덜미를 긁으면서 중얼거렸다.



 “전쟁터에서 저 하나 있으면 얼마나 나갈지 모르는 치료비를 다 아낄 수 있으니 당연한 결론이겠죠. 지금도 천안연합병원은 부상자들로 포화 상태라던데, 가면 또 얼마나 치유 마법을 써야 할지. 벌써부터 한숨만 나오네요. 뭐 어쩌겠어요. 몸 뺄 길도 없는데…”



 푸념처럼 늘어놓는 말에 민우는 새삼스럽게 나은의 행색을 다시 살폈다.

 살이 홀쭉하니 빠진 얼굴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무표정.

 그러나 민우는 그 속에서 채 숨길 수 없는 피로감과 체념을 읽어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꼭 알아 봐주기를 원하는 것 마냥 나은이 티를 내고 있다는 말이 옳았다.


 이런 말을 이 여자 앞에서 꺼내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민우는 찝찝한 기분에 그만 입을 열고 말았다.



 “꼭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뜻이죠?”


 “의뭉떨지 말죠. 예전에 앰버… 예솔이라는 사람이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꺼낸 당신이, 그 사람하고 똑같은 길을 걸을 필요가 있냐. 이 말입니다.”

 “제가 걔처럼 과로에 지쳐서 자살이라도 할 것 같다? 재밌는 소릴 하시네.”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나은의 낯에는 웃음기라곤 일절 없었다.

 민우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나은을 보면서 경계하듯 몸을 뒤로 조금 뺐다.


 두 걸음 거리.

 병상의 발치에 멈춰선 나은은 팔짱을 낀 채 민우를 정면으로 쳐다봤다.



 “하기 싫으면 뭐 어쩌라는 건가요. 연합에서 도망이라도 칠까요? 아니면 난 못 하겠다, 배 째라, 이러고 그냥 드러누워요?”

 “그걸 왜 나한테 묻습니까? 그냥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소리니까, 도망칠지 말지는 알아서 판단하세요.”


 “남이 숨기려는 의도를 억지로 파헤쳐 놓고서는, 알아서 하라는 건 너무 무책임한 태도 아니예요?”



 민우는 나은과의 대화에 염증을 느꼈다.

 하기 싫다는 기색은 있는 대로 부리면서 정작 그러라고 하면 발을 빼면서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저 모습.

 스스로 내린 선택에 자신이 없는 자들의 전형적인 행색이었다.


 누군가 강력하게 등을 떠밀어주지 않으면 줏대도 없이 세파에 쓸려갈 뿐인 갈대 같은 인간.

 그런 부류를 한심하게 여길지언정 미워하진 않던 민우였지만, 한 번 미운 털이 박힌 사람은 뭘 해도 곱게 볼 수 없는 법.


 나은의 그런 면모조차도 혐오스럽게 느껴진 민우는 독살스럽게 내뱉았다.



 “내 알 밥니까. 애초에 숨길 거면 티를 내지나 말았어야지. 주나은 씨야말로 무책임하게 떠들지 마십쇼, 남의 조언에 그딴 식으로 굴지 말고. 내가 당신 감정 쓰레기통인 줄 압니까?”



 그를 잠시 노려보던 나은은, 더 말해봐야 뭐하냐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쌀쌀한 시선을 보내던 민우는 고개를 세차게 휙 돌려, 정인의 잠든 얼굴을 쳐다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대화 따위는 하지 않겠다는 듯.


 나은은 처음 올 때보다도 더 무거워진 몸과 마음을 이끌고, 소생실을 나서려고 했다.

 크록스를 질질 끄는 마찰음과, 자동문이 열리는 ‘위잉’ 하는 소리가 민우의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들릴 듯 말 듯한 희미한 나은의 목소리도.



 “혜인 언니가 깨어나면 미안했다고 좀 전해 줄래요?”



 등을 돌린 채 민우는 마찬가지로, 낮게 깐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도망치려는 겁니까? 비겁하게 굴지 말고 직접 하시죠.”
 “직접 말하고 싶지만,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기도 하고, 끝나면 바로 원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언니가 깰 때까지 기다릴 순 없어요.”


 “핑계 하나는 좋군요. 그 성실함을 누님께도 보였으면 누님이 이렇게 될 일은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린 채 제 할말만 중얼거리듯 하는 기묘한 대화.

 미끄러져 닫힌 소생실의 문이 그 대화의 허리를 끊었다.

 마지막으로 남긴 나은의 말이 심전도의 비프음 사이로 가볍게 메아리치다 부스러졌다.


 귓가에 맴돌던 그 남은 조각을, 민우는 고개를 살짝 흔들어 털어냈다.

 그리고는 손을 통해 전해지는 정인의 온기에만 집중했다.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것처럼.





 

 *

 





 민우의 중형 밴은 여기저기 깨지고 흠집이 잔뜩 가 있는 처참한 몰골이었다.

 자유로에서 분리대를 들이받고 범퍼가 떨어진 자리에는 차체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헤드라이트도 한 쪽이 깨지는 통에, 정면에서 보니 꼭 외눈박이 딱정벌레를 연상케 했다.


 민우는 수리비가 얼마나 나올지 생각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속으로만.

 휠체어에 앉아 고개를 까딱거리고 있는 그녀에게 괜한 한숨소리를 들려주긴 싫었으니.


 조수석 문을 연 민우는 잠시 기다렸다.

 정인이 평소처럼 좌석과 문 손잡이를 붙들고 약간은 아슬아슬하게, 동시에 기운차게 넘어가기를.



 “…”



 정인은 어두컴컴한 밴 안을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입에서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표정으로.



 “누님?”
 “…아.”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정인은 문 손잡이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우레탄 재질의 손잡이에 간신히 걸친 손.

 그녀의 가냘픈 팔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건너갈 수 없을 듯했다.

 민우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정인을 평소처럼 안아 올리려 하다가, 지금 자신이 외팔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정인의 몸무게를 들 근력이 없진 않았으나, 외팔로는 안정성이 전혀 없다.

 조수석에 던져 놓은 고장 난 의수는 관절이 깨진 듯 아예 움직이질 않았으니, 지금은 그저 무거운 쇳덩이일 뿐.

 괜히 무리하다가 그녀가 바닥에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민우는 트렁크에 설치해 놨던 휠체어 리프트를 떠올렸다.

 매번 정인이 조수석을 고집했기에 자리만 차지하는 애물단지 신세가 된 물건.

 박스를 넣느라 구석으로 치워 놓긴 했지만, 지금이야말로 그 리프트를 쓸 때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쇼, 누님.”



 민우는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건 뒤, 운전석으로 향했다.

 운전석 문은 분리대를 들이받았을 때의 충격 때문인지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당시 영 열리는 게 뻑뻑하다 싶더니 이 때문인 모양이었다.


 민우는 힘껏 운전석 문을 당겨 열고는 트렁크 문의 스위치를 눌렀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차체에 전해지는 가벼운 진동.


 그는 밴의 뒷면으로 다시 가서는 트렁크 문을 들어올렸다.

 눈 앞에 펼쳐진 엉망이 된 광경에, 이번에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민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알뜰살뜰하게도 털어갔네, 망할 새끼들…”



 좌석을 뜯어낸 뒤 칸의 절반 가까이 채워 놓은 박스들은 흔적도 없었다.

 남은 건 급하게 털어갔는지 다 부서진 골판지 조각 뿐.



 험비 1호차를 타고 오는 동안 자유로에 방치된 민우의 밴.

 그걸 몰고 온 건 중앙분리대에 충돌했던 레토나에 탔던 순찰대원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면 지원 요청을 받고 나온 지부의 요원이든지.


 어느 쪽이든, 그 자가 비상용 물자들을 모조리 도둑질해간 모양이었다.


 민우는 밴에 올라타서 엉망이 된 바닥을 적당히 치우기 시작했다.

 다행히 휠체어용 리프트는 한쪽 면에 기댄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는 속으로 이걸 지부에 따져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연합에서 이런 강도질 아닌 강도질은 흔한 일이다.

 얼마 안되는 목숨값으로 근무하는 순찰대원들은 돈이 될 만한 거라면 뭐든지 챙기고 보니까.

 항의해봐야 되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출처와 용도를 역으로 문제 삼을 소지도 있었다.

 괘씸죄라는 명목으로.


 애초에 문제가 될 만한 물건들은 차량에 보관해두지 않았으니, 입 다물고 있으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소지는 낮았다.

 예를 들자면 총기류나 마약, 다량의 현찰 같은 것들.



 ‘뭐 그것도 전부 그… 개 같은 납치범 놈들에게 털렸지만.’



 민우는 쓰린 속을 붙들고 바닥을 쓸어냈다.

 아무리 그래도 속이 쓰리지 않을 순 없었다.

 지금까지 모아 온 유동자산 대부분을 털린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은, 정인의 명의로 된 자산은 온전하다는 점.


 그런 생각을 한 민우는 잠시 자기혐오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스스로의 정신을 망가뜨리면서 번 돈.

 건드리고 싶지도 않은 돈이었기에 연합 신탁에 맡겨 두고 지금껏 한 푼도 인출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에휴…”



 자신과 그녀의 기초 지원금을 합쳐봐야 둘의 생활비가 고작.

 여유 자금은 그녀가 방송 출연의 대가로 대공부에서 지원받은, 바로 그 돈 밖에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맨몸으로 연합을 탈출할 순 없는 노릇이니까.

 북한을 거쳐 중국으로 가든, 오염이 다 정화되지 않은 태안반도나 변산반도 같은 곳으로 가든.


 전자는 여정이 몹시 험난하기에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방독장비, 식수, 비상식량, 스스로를 지킬 무기, 현금화할 물건 등등…

 하지만 그 과정에서 알거지가 되더라도 베이징이나 톈진까지 가기만 하면 재기할 수 있다.

 막노동을 하든 불법에 손을 담그든.


 후자 역시 여정이 험난하긴 마찬가지.

 무인지경인 북쪽 방면에 비해, 서울 남쪽 루트는 주요 도로마다 연합의 초소와 순찰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그러나 북쪽과는 반대로, 사람만 조심하면 환경은 아주 가혹하진 않다.

 그러니 순찰대원들의 감시망만 뚫으면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변산반도나 태안반도는 이면세계 대전 이후론 사람들의 사회라 할 만한 게 없었다.

 최소한 민우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렇기에 결국 땅만 파먹고 살 게 아니라면, 부산 정부나 연합 측과의 간헐적인 접촉이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정체가 탄로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선박을 이용할 수 없으니 해로는 이용 불가능.

 강원도는 전략물자관리부의 본거지나 마찬가지라, 최악의 선택.


 결국 미래를 생각하면 중국으로 탈출하는 수밖에 없다.



 잠시 그런 상념을 하며 바닥을 치운 민우는, 벽에 기대어 놓은 리프트를 용을 쓰며 꺼냈다.

 크기도 크고 무게도 30kg 가까이 나가는 육중한 리프트.

 오른팔이 없는 민우가 그걸 설치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호우가 쓸고 지나간 서울은 어느 덧 원래의 열대야로 돌아와 있었다.

 한층 더 끈적하게 바뀐 대기에, 어느 새 민우는 땀 범벅이었다.


 축축한 이마를 닦으며 조수석 옆으로 다가간 민우는 가로등의 희미한 주황색 빛 사이를 쳐다봤다.

 그 가운데서 오뚝이 마냥 멍하니 고개를 까딱거리는 정인.

 한껏 탈력한 그 얼굴은 영혼이 없는 것만 같았다.



 “오늘은 뒤 칸으로 탑시다, 누님.”



 귓가를 스치는 민우의 말을 듣는 듯 마는 듯, 정인은 반쯤 감은 눈을 끔뻑거렸다.

 이미 자정을 넘은 늦은 시간이라 퍽이나 졸린 듯했다.


 아니면 뭔가 다른 문제가 있든지.


 민우는 그 ‘다른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려 애쓰며,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푼 뒤 방향을 돌렸다.

 그에 맞춰 힘없이 까딱거리는 정인의 고개.

 살짝 벌어진 입가에서 흐르는 침을 슬며시 닦는 걸 봐서는, 아예 정신이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뒷문에 설치한 리프트를 따라, 민우는 한 팔로 힘겹게 휠체어를 밀어 올렸다.



 “끄으응.”



 몸을 한껏 기울인 민우.

 경사진 리프트 위로 휠체어가 덜컹거리며 올라갔다.

 중력 때문에 고개가 뒤로 꺾인 정인의 시선이, 민우의 시선과 뒤얽히며 교차했다.



 “…”



 넓게 개조된 뒷좌석 위에 휠체어가 올라섰다.

 그러나 정인의 고개는 뒤로 젖혀진 그대로.

 그 뿐만 아니라 더더욱 머리를 늘어뜨리며, 허리를 펴는 민우의 얼굴을 시선으로 좇았다.

 어미 새를 쳐다보는 새끼처럼.


 민우는 그 흐려진 벽안(碧眼)을 피하듯 고개를 돌리며, 정인을 왼팔로 받쳐 바닥에 내려놓았다.


 밴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은 정인은 순찰대 상의 한 장만 걸친 상태였다.

 발가벗은 채 구조된 정인을 보다 못한 순찰대원들이 입고 가라고 내준 옷.


 품이 지나치게 큰 나머지, 소위 말하는 하의실종 패션이나 마찬가지였다.

 그토록 다쳤건만 바닥에 늘어뜨린 정인의 하얀 허벅지는, 치유 마법 덕분인지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절단되어 길이가 맞지 않는 뭉툭한 흔적,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남은 푹 패인 봉합 자국.

 그것만 없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어쩌면 보는 사람들마다 저절로 감탄사를 흘렸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는 민우에게는 안타까움과 상실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휠체어 반납하고 올 테니 좀 주무시고 있으십쇼, 누님.”



 그 말이 방심(放心)한 정인의 뇌리에 닿았을지 아닐지, 민우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전자였기를 바라면서 민우는 텅 빈 휠체어를 차 밑으로 내린 뒤, 리프트를 다시 조심스럽게 밴 안으로 수납했다.


 트렁크의 문을 조용히 닫은 민우는 접어 놓은 휠체어를 들고 주차장을 가로질렀다.

 습기가 올라오는 콘크리트 블록이 민우의 발을 무겁게 만들었다.


 붐비는 응급실 입구에 다시 도착한 민우는, 때마침 지나가던 원무과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빌린 휠체어는 어디 반납하면 됩니까?”
 “안에 들어가서, 저기 대기실 옆에 휠체어 세워 둔 곳 보입니까? 거기 두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감정 없는 문답을 나눈 민우는 빌린 휠체어를 반납한 뒤 다시 응급실을 나섰다.

 어디선가 음질 조악한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걸 봐서는 또 다른 구급차가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구급차라 해봐야 민우의 밴처럼, 승합차의 내부를 적당히 개조한 뒤 응급키트만 비치해둔 차량일 뿐.

 그러나 서울연합은 그런 차라도 앰뷸런스로 굴려야 돌아가는 곳이었다.


 민우는 하나뿐인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잰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런 그의 곁을, 경광등을 번쩍이며 경사진 출입구를 쏜살같이 내려온 승합차가 스쳤다.


 눅눅한 공기를 끼얹힌 민우는 저도 모르게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물벼락을 맞은 것보다야 훨씬 나았지만, 괜히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경사로를 올라온 민우는 드문드문 선 가로등 사이를 걸었다.

 가로등의 노란 빛이 물안개 낀 야음을 더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 속에 숨겨진 주차장으로 가던 민우의 머릿속에, 의사가 했던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내원 당시에 있던 외상은 뭐, 지금은 다 나았습니다. 마법이라는 거 좋긴 좋네요. 입원해서 치료하려면 수술만 몇 번을 해야 될지 모를 판이었는데 열 시간도 안 돼서 완치라. 아니 뭐, 열 시간이 아니라 십 분은 걸렸나 모르겠네. 요즘 세상, 응급실 의사라는 게 참 쓸모가 없어요. 의사가 아니라 장의사라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시답잖은 농담.



 ‘기흉도 깔끔하게 좋아졌고… 익수했다고 했던가요? 익수하면 보통 며칠 정도는 경과를 보는 게 흡인성 폐렴이 잘 생겨서 그러는데, 전혀 없네요. 거 참 신기하네. 거기 액팅, 저 환자 플루이드(*수액)하고 안티(*항생제) 다 끊어요. 퇴원할 거니까.’



 그 속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축객령.



 ‘다른 엑스레이 사진도 아-주 좋습니다. 부러졌던 고관절이니 빗장뼈니 갈비뼈니, 모조리 다 깔끔하게 붙었으니까 걱정 놓고 퇴원하세요. 보이죠? 환자 관절 잘 돌아가는 거? 아니, 그 머리 MRI에서도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볼 소견은 없다니까 그러시네. 어차피 여기서 백날 천날 기다려봐야 지금은 병상이 없어요, 병상이. 치료할 것도 이제 없고. 응급실은 환자 먹이고 재워주는 곳 아니란 말입니다.’



 걱정과 불안감을 짓밟으며, 거침없이 쏟아지는 괜찮다는 말들.



 ‘처음에야 출혈 때문에 간당간당했지, 수혈하고 나서 빈혈기도 교정됐고. 뭐, 아직 조금 남아있긴 한데 별 증상은 없을 겁니다. 두 달쯤 지나면 괜찮아 질 거니까 가시라고요. 요즘 고기 값이 좀 오르긴 했는데, 그래도 여유 있으면 적당히 좀 사 먹이고. 챠지(*책임간호사)쌤, 알방(*소생실) 환자 라인 제거하고 퇴원시켜 주세요.’



 그 끝에 자리잡고 있던 건, 결국 다 나았으니 안심하고 집에 가라는 소리였다.



 답답함을 한숨 한 번으로 털어낸 민우는 어느 새 눈 앞까지 다가온 밴의 운전석을 비집어 열었다.

 좌석에 몸을 던진 민우는 목받침 옆으로 고개를 틀어 뒤를 쳐다봤다.


 등을 기대 주저앉은 채 반쯤 감은 눈을 허공에 못박은 정인.

 자세는 처음 앉혀 놨을 때와 한치도 변함없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웬 인형에 군복을 입혀서 앉혀 놨나,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다.


 도대체 저 모습을 보고 어떻게 안심하라는 말인지.


 민우는 속으로 무책임한 의사를 욕하며 시동을 걸었다.

 어쨌든 일단 어딘가 그녀를 재울 곳을 찾아가는 게 급선무였다.

 까끌까끌한 데다 딱딱하기까지 한 밴 바닥에 그녀를 눕힐 순 없었으니까.



 “출발하겠습니다, 누님.”



 최대한 천천히 차량을 출발시킨 민우는, 그 와중에도 백미러를 계속 힐끔거렸다.

 다행히 정인은 넘어지지 않고 용케 앉아있었다.



 밤하늘의 희미한 별빛보다도 드문드문한 거리의 불빛.

 불야성이나 다름없던 전쟁 전의 서울은 흔적조차 없었다.


 그 가운데를 나아가는 밴의 속도는, 평소와는 다르게 시속 60km나 될까 말까.

 어둠이 눌어붙은 폐허와 텅 빈 건물들이 차례대로 느릿하게 그 곁을 지나갔다.


 예전 같았으면 조수석에 앉은 그녀와 도란도란 대화라도 나누고 있었을 터.

 하지만 지금의 밴 안에는 타이어 구르는 소리만 조용히 흘렀다.

 족히 한 달은 켜지 않은 블루투스 플레이어 대신, 차의 엔진이 연주하는 클래식이었다.

 듣는 사람의 졸음기, 그리고 터무니없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민우는 간간히 백미러를 눈으로 기웃거렸다.

 주저앉은 정인은 고개를 비스듬히 옆으로 기울인 채, 차의 덜컹거림에 맞춰 흔들댔다.

 민우는 몇 번이고 침묵을 깨려 했으나, 결국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의사는 저산소성 뇌손상은 없다고 그랬을 터.

 하지만 MRI만으로 인간의 마음을 재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편했을까.


 나은이 던진 의혹.

 그녀가 성폭행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소리.


 민우는 내심 억측이라고 일축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정인을 본 민우의 마음 속에서는, 그 말이 자꾸만 맴도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최근 불안정한 정신 상태 때문에 입원했다가 회복된 게 겨우 며칠 전.

 그런 그녀가 오늘 같은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마음을 닫아버렸다는 추론은, 정말로 억측일까?


 민우는 속이 꼬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들끓는 울분을 나은에게 풀어놓긴 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사랑한다느니 뭐니. 말만 떠들어대더니 결국 속 빈 강정이었군. 병신 같은 새끼.’





 별빛 하나 없는 밤을 가로질러 도착한 사원주택은 한두 가구를 빼곤 불이 꺼져 있었다.

 언제나 형광등이 켜져 있던 주차장 옆의 경비초소도 마찬가지.

 초소의 미닫이창에는 언제 붙여 놓은 것인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경비 업무를 담당하던 사원 류경화 씨가 사임하여, 당분간 불편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경비 업무를 담당할 새 인원을 구인 중이오니 아무쪼록 양해 바랍니다.’



 민우는 텅 비어 있는 초소를 보며 이를 갈았다.


 류경화.

 민우는 그 세 글자 이름을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주차공간에 밴을 밀어 넣은 민우는 의수를 챙길까 잠시 고민하다 그냥 놔두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은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나중에 용산에서 수리하려면 차 안에 넣어두는 게 더 편했으니까.



 “누님, 휠체어 가져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때마침 정인의 고개가 앞뒤로 까딱였다.

 그러나 결코 긍정의 의미는 아니었다는 걸 민우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흐리멍덩한 눈은 거의 감기다시피 한 상태였으니까.


 민우는 밴에서 내린 뒤 차 문을 잠그고, 사원주택 안으로 들어갔다.

 자동으로 불이 들어온 복도는 오전에 나올 때와 똑같은 모습.

 다른 것은, 바닥 여기저기에 흩뿌려져 있는 담황색 마대 줄기 뿐이었다.


 아마도 바닥에 마대자루 같은 걸 질질 끌고 간 흔적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113호 앞으로 갔다.

 문은 아직도 살짝 열린 채인 것이 아무래도 경칩이 고장이라도 난 듯했다.


 피로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들어간 민우는 현관의 불을 켰다.

 그리고는 아차 싶었다.



 “하... 누님 들이기 전에 청소부터 좀 해야겠네.”



 당장 신발장부터가 문 한 짝은 반쯤 떨어져 나가고, 안의 선반도 모두 부서진 꼴이었다.

 그는 한숨을 쉬며, 덜렁거리는 신발장 문을 아예 뜯어내서 구석에 대충 기댔다.


 발로 바닥의 나무 파편을 대충 밀어낸 그는, 아예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에 들어섰다.

 바닥에 뭐가 있을지 몰랐으니까.


 다행스럽게도 납치범들이 천장까지 들쑤시진 않았는지 조명은 모두 온전했다.

 거실과 안방, 화장실까지 모두 불을 켠 민우는 환해진 집안을 한 차례 둘러봤다.


 매트리스가 찢어진 소파는 그 틈새로 내용물이 다 비집고 나와 있었다.

 식탁은 다리 하나만 남기고 모두 박살 난 채 바닥에 모로 나뒹군 상태.

 거실로 한 걸음 내딛은 민우의 발 밑이 바스락거렸다.

 바닥에 눈송이 마냥 뿌려진, TV 액정의 유리조각이 부스러지는 소리였다.


 부엌, 안방, 화장실, 베란다…

 집 안을 쭉 훑어본 민우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씨발…”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낮에도 한 차례 본 광경이었지만 그때 민우의 신경은 온통 정인에게 쏠려 있었다.

 말하자면 눈 앞에서 펄럭이는 붉은 천에 잔뜩 흥분한 황소라 할 만할 정도로.

 그러니 깨진 그릇이나 찢어진 옷가지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은 지금, 민우의 눈 앞에 펼쳐진 난지도.

 이런 곳에 그녀를 재운다는 건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다른 숙소를 찾을 수도 없었다.

 서울 전역을 뒤져봐야 호텔이나 모텔 같은 숙박업소는 열 군데도 되지 않았으니까.


 연합에서 거주지를 제공하는 서울의 연합 사원들에게는 숙박업소라는 게 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정해진 주거가 없는 난민들은 숙박할 돈이 있으면 차라리 포르네우스 기름 한 통을 살 터였다.


 그렇다고 믿을 만한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전에 ‘포커스 인 서울’ 녹화 파일을 보내준 동료가 있었으나, 군사국방부로 옮겨간 이후로 연락이 되질 않았다.

 설령 연락이 된다 하더라도 그 자의 집에 그녀를 데려갈 순 없었다.

 애초에 그럴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고.



 결국 민우는 집 안을 대충이나마 치우는 걸 택했다.

 밴 안에 방치되어 있을 정인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어지럽게 널브러진 유리조각과 그릇 조각이 빗자루에 쓸리는 짤그랑거리는 소리.

 바닥을 쓸어낸 민우는 폐신문지 더미 위에 파편을 모아 몇 겹으로 싼 뒤 40L짜리 봉투에 넣었다.

 전원이 꺼진 냉장고는 코드만 연결해두고 일단 방치.

 상한 반찬까지 골라내서 처리하기엔 마음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휘어진 숟가락 하나가 민우의 눈에 들어왔다.


 신발에 몇 번이고 밟혔는지 도금이 군데군데 벗겨진 짧은 숟가락.

 민우는 눈에 익은 그 숟가락을 집어 버리려다 말고, 몇 번이나 주저했다.


 처음 이 집에 입주했을 때 마트에서 사 온 수저 세트.

 그 중 이것만 불량품이었는지 유달리 길이가 짧았다.

 혼자 살 때는 통에 넣어두고 거들떠도 안 봤는데 그녀의 작은 손에는 쓰기 꽤 편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애용하던 숟가락.

 민우는 갈등하다가, 결국 그 숟가락을 종량제 봉투에 넣었다.

 다른 쓰레기들과 함께.

 아마 다시는 못 쓸 정도로 완전히 망가져 있었기에.



 안방은 좀 더 청소해야 될 게 많았다.


 문이 부서지면서 흩뿌려진 합판 파편.

 엉망으로 뜯어진 침대 이불보.

 경첩이 덜렁거리는 벽장 문.

 그 앞에 나뒹굴고 있는, 프레임에 금이 간 의족과 꺾인 목발, 박살 난 휴대폰 조각들.


 민우는 침대를 가장 먼저 살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매트리스와 뼈대는 온전해서 시트만 갈면 될 것 같았다.


 그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식칼을 부엌 싱크대로 옮겼다.

 그리고는 침대 옆까지 밀려나 넘어져 있는 서랍장을 방 구석으로 밀었다.

 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어 일으켜 세우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러던 민우는, 그 서랍의 용도를 문득 떠올렸다.

 그녀가 사적인 물건들을 보관해두기로 자신과 합의했던 것.


 그 안에 뭐가 있는지 그는 몰랐다.

 굳이 파헤치려 들지도 않았고.

 아무리 같은 집에 살고 같은 방에서 잔다지만, 모든 것을 공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다만 서랍장을 원래 용도로 쓰기 힘든 지금, 안의 내용물은 챙겨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니까…”



 괜한 사족을 덧붙인 민우는 서랍의 가장 위칸을 열었다.


 그는 무심코 코를 왼손으로 감싸 쥐었다.



 “윽.”



 푸석한 가루와 독할 정도로 농축된 파우더 냄새가 확 풍겼다.

 납작한 원통 모양의 화장품도, 두툼한 치약처럼 생긴 크림도 모두 부서지고 터진 상태.

 덕분에 화장품 가루와 끈적한 크림이 서랍 안에 덕지덕지했다.


 퇴원하기 며칠 전 그녀가 몰래 사온 화장품인 듯했다.

 민우는 코 끝에 맴도는 진한 냄새를 손으로 털어낸 뒤 서랍을 다시 닫았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내일 청소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나자 시간은 이미 새벽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최대한 필요한 것만 정리했는데도 30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셈이었다.


 민우는 땀에 젖은 티셔츠의 목덜미를 당기며 베란다로 나갔다.

 휠체어는 한쪽 구석에 처박힌 채 쓰러져 있었다.

 그는 휠체어를 일으켜 세운 뒤, 다리로 한쪽 바퀴를 밀며 반대쪽을 손으로 당겨 휠체어를 폈다.

 다행히 프레임이 부러지거나 휘지는 않은 듯했다.

 다만 한쪽 바퀴 축이 살짝 휘어 있었는데, 시험삼아 민우가 밀어보자 조금 뻑뻑하긴 했지만 굴러는 갔다.

 그는 휠체어를 다시 접어 든 뒤 현관을 나섰다.


 밴 뒤에 도착한 그는 트렁크 문을 열며 정인을 깨웠다.



 “죄송합니다, 누님. 집안 좀 정리하느라.”

 “…”



 민우의 예상과는 다르게 정인은 전혀 잠들지 않은 상태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열었다지만, 트렁크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깼을지도 모른다고 민우는 생각했다.

 다만 그녀는 눈만 게슴츠레 뜨고 있을 뿐, 공허한 시선은 여전히 어딘지 모를 곳을 헤매고 있었다.


 다시 정인을 밴에서 내리기 위해 휠체어용 리프트를 들어올린 민우.

 느닷없이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의 허리를 덮쳤다.



 “윽…”



 낮에 삔 허리가 결국 문제를 일으킨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민우는 발바닥까지 살짝 저린 느낌이 들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쉬고 싶었지만 그는 통증을 애써 눌러 참았다.

 일단 그녀를 옮긴 뒤 쉬어도 늦진 않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무거운 휠체어용 리프트를 꾸역꾸역 설치한 민우는 왼손으로 허리를 누르며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숨을 돌린 그는 등허리를 몇 번 두드린 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엄살 부리지 마라, 조민우 이 새끼야. 누님 앞에서 추태 보이지 말라고.”



 휠체어를 밴 위로 끌어올려 편 뒤, 민우는 정인에게 말을 걸었다.



 “누님, 집에 갑시다. 침대에서 주무셔야죠.”
 “…아.”



 백치 같은 대답.

 그나마 알아듣기는 했는지, 정인은 민우의 왼팔을 붙들고 기다시피 휠체어에 올라탔다.

 그녀의 체중이 쏠리자 민우는 다시 허리에 통증을 느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리프트를 다시 수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바퀴 축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113호로 돌아온 둘.

 정인은 여전히 넋이 나가 있었지만, 엉망이 된 집안이 시야에 돌아오자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그 와중에 민우는 턱 끝까지 차오른 피로감에 허덕였다.

 납치된 정인을 되찾으려 동분서주하던 오전부터 지금까지 한 숨도 쉬지 못한 것이다.

 거기에 운신을 못하는 사람까지 챙기다 보니 몸이 축날 수밖에.


 아무래도 며칠은 근육통에 시달릴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민우는 휠체어를 그대로 안방까지 밀었다.

 손잡이에 거의 몸을 기대다시피 하면서.


 정인의 시선이 흔들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문이 떨어져 나간 안방 입구를 보자 그녀의 가느다란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구석에 치워진 서랍장, 급하게 정리하느라 흐트러진 침대 시트, 덜렁거리는 벽장 문.

 그 모든 것들이 정인의 탈색된 마음을 다시 불안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민우는 그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침대 앞에 휠체어를 세운 민우는 어깨를 들썩이며 몇 번 숨을 골랐다.

 힘들기도 힘들었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조금 전부터 발바닥에 간간히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이젠 종아리까지 저려오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근육통으로 끝날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현역 시절 디스크 때문에 한번씩 절뚝거리며 다니던 합참 간부가 민우의 기억에 문득 떠올랐다.



 ‘조금만 참자. 조금만…’



 속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며, 민우는 휠체어 바퀴 옆의 레버를 당겼다.

 브레이크가 걸리며 휠체어가 살짝 흔들렸다.

 그 위에 앉은 정인의 몸도 기분 탓인지 약간 떨리는 듯했다.


 민우는 생각했다.

 이제 그녀를 침대 위로 옮기고 재우기만 하면 기나긴 하루가 끝난다.

 곳곳이 쑤시는 삭신과 피로에 절은 마음에 쉴 시간을 줄 수 있다.

 내일은 조금 느지막하게 일어나서 집을 마저 청소하고, 냉장고 안도 정리하고, 부서진 가재도구를 다시 사오고, 그리고…



 “흐윽.”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듯 가냘픈 소리가 민우의 상념을 끊었다.



 “누님?”



 놀란 민우는 허리를 숙여, 몸을 앞으로 웅크린 정인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멍했지만 그만큼 평온했던 얼굴은 어느 새 핏기가 싹 빠져나간 상태.

 송골송골한 식은땀이 한없이 그 턱 밑으로 흘러내렸다.

 잔뜩 일그러진 눈매와 사방을 배회하는 시선, 스스로를 지키듯 꼭 끌어안은 두 팔.

 쉴 새 없이 떨리며 아랫입술을 씹어 대는 이빨 사이로는 헐떡거리는 숨소리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산채로 잡아 먹히기 직전의 초식동물 같은 모습.

 원인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민우는 왼팔로 벌벌 떠는 정인의 상체를 껴안고 정신없이 말을 걸었다.



 “다 끝났습니다, 누님. 괜찮아요. 다 끝났다고요. 진정하세요. 여기 집입니다. 괜찮아요.”
 “히익. 히이, 흐익, 히익.”



 그에게 돌아온 건 숫제 비명으로 바뀐 정인의 숨소리와 발버둥질 뿐.

 민우는 왼팔에 힘을 꽉 줘서 정인의 상체를 품 속으로 잡아당겼다.

 도망치려는 듯 거세게 저항하던 정인은 속절없이 끌려오더니, 곧 얼굴을 민우의 가슴팍에 파묻고 억눌린 신음을 냈다.


 몰아쉬는 숨결과 얇은 머리카락이 셔츠 너머로 피부에 와 닿는 간질간질한 느낌.

 정수리에서 나는 희미한 꽃내음을 닮은 냄새.

 그런 것들이 민우의 오감을 자극했지만, 그의 신경은 정인의 패닉을 진정시키는 데 온통 쏠려 있었다.


 갑작스레 이러는 이유를 민우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문득 오늘 있었던 일에 생각이 닿았다.

 이곳에 남은 처절한 항거, 그리고 그게 무참히 짓밟힌 흔적.


 어쩌면 안방 자체가 문제일지도 모른다.

 오늘 납치당하면서 있었던 끔찍한 일들을 다시 떠올리는 스위치가 됐을지도.


 민우는 절망적인 기분을 느꼈다.

 그녀가 가장 안락해야 할, 편안하게 느끼도록 노력했던 공간이었다.

 그게 이제는 악몽과 두려움만을 일으키는 곳이 되었단 말인가.


 자신이 저지른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흐윽, 흐어엉, 끄윽, 흐아아앙.”



 듣는 민우의 정신을 파헤치는 듯한 울음.

 이제 정인은 제 몸을 감싸 안은 채 울기만 하고 있었다.

 공포에 질려 발버둥치는 것도 지친 듯.


 축축하게 젖어가는 민우의 가슴과 함께, 길었던 6월 25일이 저물어갔다.

 





 *

 





 숨쉬는 것도 잊고 울부짖던 정인이 까무러치고, 사흘을 내리 잠들었다 깨어났을 무렵.

 강원도 지부로부터 하나의 비보(悲報)가 급하게 연합 본부에 날아들었다.


 부산 정부군 수색대와의 충돌에서 발생한 부상자들.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다시 복귀시켰던 마노의 마법소녀, 주나은.

 그리고 중상을 입고 치료 중이던 감람석의 마법소녀, 임예지.

 그 외 수많은 외상 전문 의료진과 직원들까지.


 모두 살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돌가루 하나 남기지 않고 소멸한 원주연합의료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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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