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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편



 


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0편 입니다.




뒤에 자잘한 설정이나 플롯, 메모 빼고 나니까 어느새 공미포 45만자가 됐네요

노피아 3천자 기준 150화! 와!

5달 동안 45만자니 그래도 하루 3천자는 쓰긴 했는데

정말 어느 새 이렇게 길어진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조금 더 쓰고 올릴까 싶었는데

주말에 아마 거의 못 쓸 거 같아서 일단 오늘 업로드합니다.

코로나는 줄어가는데 왜 일은 줄어들지를 않는가...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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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0.





 상궤(常軌)가 무너져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이 의존할 만한 건,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었다.

 섹스, 사랑, 가족, 돈, 술, 마약…

 담배도 그 중 하나라 할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약의 부류에 들어가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인식은 담배는 기호식품일 뿐.


 국정원 요원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대개는 직무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체포된 시위대를 경찰에게서 넘겨받아 고문하는 건 이제 일상.

 정부에 은근히 반항적으로 구는 제2작전사령부의 장성들에 대한 협박은 애교였다.

 야당 정치인의 가족을 납치하거나, 시민단체의 지도자들을 암살하거나, 기타 등등…

 중국이나 서울연합에서 가장 더러운 일을 도맡은 흑색 요원들이 차라리 깨끗해 보일 지경이었으니까.


 그 외에도 여럿 이유가 있었지만, 어쨌든 소영의 동료 요원들이 주로 주워섬기는 핑계는 그랬다.

 그러니 소영이 ‘담배를 한 번 피워보자’라고 생각한 것도 썩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제부터 줄곧 두통 때문에 우울한 기분이었기에.



 “콜록, 콜록…”



 살짝 갈라진 입술 사이로 기침과 함께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겨우 두 모금 빨아들였는데도 목구멍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뭣도 모르고 오 대리가 평소 피우던 걸 그대로 사왔더니 이렇게 독할 줄은 생각조차 못한 것이다.


 소영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쳐다봤다.

 이런 것의 효능을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자신이 바보였다는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머리는 살짝 멍하고 어지러웠지만 그 뿐.

 난생 처음으로 시도해본 흡연은 그저 쓰리고 독한 연기를 스스로에게 불어넣는 고문에 불과했다.


 이런 짓을 해서라도 머릿속을 털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찝찝한 잡념도,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는 기계적인 목소리도.


 한순간 밀려온 깨질 듯한 두통을 참으며, 소영은 1/4도 줄어들지 않은 장초를 캔 재떨이에 비벼 껐다.

 청회색 연기가 단말마처럼 올라오다가 곧 스러졌다.


 손 끝에 남은 냄새를 휘휘 털어낸 그녀.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왼쪽 팔꿈치가 시큰거렸다.

 2월에 울산에서 부러졌던 팔.

 지금은 다 붙었지만 잊을 만하면 이런 통증이 오곤 했다.


 소영은 아리는 왼팔을 주물럭거리며, ‘회사’의 유일한 흡연실에서 나왔다.

 유리문을 열자마자 복도에서 훅 풍기는 향기.

 좁은 흡연실에 찌든 냄새를 뒤덮듯 밀려오는 공기에 소영은 무심코 코를 막았다.

 청량하고 은은한 솔잎 향이었으나 갑작스레 뒤바뀐 냄새는 자극이 심했다.


 어쩌면 아직도 코 끝에 떠도는 먼지 냄새와 피비린내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됐든, 오늘의 심 전무는 소나무 향기가 맡고 싶었던 모양이다.

 ‘회사’보다도 술자리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긴 그 인간이 요즘은 웬일로 뻔질나게 얼굴을 내미는지.

 그렇게 생각하며 소영은 발걸음을 옮겼다.

 단화 굽이 바닥을 두드리며 나는 규칙적인 소음이 복도의 정적을 깼다.


 선선한 바닷바람에 흔들린 나뭇잎이 창가를 쓸고 지나갔다.

 부산 시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삼림이 보존된 해운대구의 장산.

 그 위로 강렬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햇살은, 국정원 본부 안을 빛과 그림자의 교차로로 만들고 있었다.


 소영은 이런 밝은 국정원 본부의 분위기가 영 불편했다.

 명색이 정보기관이니 창문에 블라인드 정도는 칠 법도 하건만.

 한 달 전 심 전무가 최종적으로 국정원 제2차장으로 승진한 뒤, 이렇게 바뀐 것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고 본부 출입구에 진을 쳤던 기자들과 시민단체.

 창문을 열면 어디선가 카메라 셔터음이 들리고, 문을 나서면 왁자지껄한 항의 시위 소리가 귀를 찌르곤 했다.

 덕분에 출퇴근조차 정문으론 불가능해서 인접 건물의 위장용 주차장으로 드나들던 기억이 소영에겐 생생했다.


 그들이 트집잡을 거리야 언제나 넘치고 또 넘쳤다.

 24대 총선 당시 개표기에 국정원이 조작질을 한 게 아니냐.

 신대한민국당의 중진이자 마력 친화파의 거두였던 임철규 의원.

 그의 암살 배후에 국정원이 있는 거 아니냐.

 간첩 조작 사건의 책임을 져라.

 심지어는 폭주한 마법소녀 카넬리안의 센텀시티 테러를 알면서도 방치했다는 허무맹랑한 누명까지.


 그런 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하나둘씩 없어지기 시작한 게 4월 초.

 이제 정문에 남아있는 건 철거를 기다리는 빛 바랜 현수막들 뿐이었다.


 그 주인들 중 몇몇의 행방을 소영은 잘 알고 있었다.

 지금쯤 어딘가의 양계장에서 닭들이 쪼아 먹을 고기 큐브가 되어 있을 터.


 다만 소영에게는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사정이었다.



 그녀는 메트로놈처럼 두개골을 울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화분이 놓여 있는 모서리를 돌았다.

 도착한 곳은 문 열린 회의실 앞.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소영은 잠시 그 앞에 멈춰 서서 속으로 생각을 정리한 뒤,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 안으로 들어갔다.


 장방형 원목 테이블에 일렬로 앉은 정장 차림의 사람들.

 그리고 상석에 앉은 탈모 기미의 오십 대 남자.


 심 전무와 그 파벌에 속한 간부들이다.

 그들 앞에 차례대로 늘어선 초밥 도시락은 오늘의 점심 메뉴인 모양이었다.



 소영은 유일하게 비어 있는 말석으로 가서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여러 가지 색을 띈 시선이 그녀에게 꽂혔다.


 누군가는 그녀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눈길을.

 일부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꺼림칙한 모양인지, 일부러 고개를 돌린 채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호기심 어린 듯한 곁눈질을 힐끔거리는 몇몇.

 소영의 기억에는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새로 심 전무의 파벌에 합류한 자들이거나, 단순히 마주칠 일이 없었거나 둘 중 하나일 터.


 그 시선이 퍽이나 거슬렸던 소영은, 자리에 앉아 도시락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침묵을 지켰다.

 인사도 자기 소개도 없이.

 무례하다면 무례한 행동이었으나, 신경 쓰는 자는 거의 없었다.

 정확히는 다들 외면하고 싶다는 말이 옳았으리라.


 소영의 등장과 함께 어색해진 분위기.

 상석의 심 전무는 그에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다들 힘든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우리 전소영 인턴에게 인사라도 좀 하지 그러나.”



 그 말에 소영은 잠시 움찔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심 전무의 말에 돌아온 화답은 몇몇 간부들의 내키지 않는 듯한 박수소리 뿐.

 특히 소영의 직속 상관인 손 계장은 상당히 불편한 듯 두어 번 헛기침을 했다.

 ‘임무’라는 말이 영 듣기에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마법소녀 아메지스트.

 그녀가 사흘에 걸쳐 처리하고 온,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임무.

 그 모든 것이 소시민적인 손 계장의 속을 쓰리고 술렁이게 만들었다.


 심 전무가 제발 임무에 대해 더 언급하지 말아줬으면 하는 게 손 계장의 솔직한 바람.

 그러나 그런 소망을 손 계장은 명확하게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현 여당인 민주자유당, 그리고 김길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심 전무.

 그에게 감히 말대답을 할 정도의 배짱은 없었기 때문이다.


 심 전무는 그런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인상 좀 펴지들 그래. 공식적으로는 없는 사람이라지만 그래도 엄연히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우리 ‘동료’일세. 자네들 중국이나 연합에 가 있는 요원에게도 이런 식으로 대하나? 실망이 큰데.”


 “아닙니다, 전무님. 다만…”

 “다만?”


 “…아메지스트가 페리도트를 잘 처리한 건 맞습니다만, 원주 세브란스... 연합의료원을 통째로 밀어버린 건 추후 문제의 소지가 있지 않을지 걱정입니다.”



 그러면서 소영을 한 차례 힐긋 쳐다보는 사내.

 차 부장이랬던가.

 언제나 심 전무에게 입 안의 혓바닥처럼 굴던 자.

 그가 심 전무에게 저런 말대답을 하는 것에 소영은 어색함을 느꼈다.


 다만 그런 기분은 둘째 치고, 말하는 내용은 도저히 간과할 수 없었다.

 소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차 부장을 노려봤다.

 차 부장은 태연한 척했으나 내심 찔리는 구석이 있는 듯, 책상 위에 얹은 두 손을 살살 주물러댔다.


 심 전무는 다시 젓가락을 집더니 초밥을 느긋하게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한동안 한치살을 우물거리다 목구멍으로 넘긴 그는 곧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골칫거리였던 페리도트… 그리고 우연의 산물이지만, 사도닉스까지 제거한 거에 비하면 그 정도쯤 작전 과정에서의 ‘실수’일 뿐이지. 신경 쓰지 말게. 뒤처리는 알아서 할 테니.”



 유달리 강조된 실수라는 말에 차 부장은 입을 다물었다.

 심 전무의 진의는 알 수 없었으나, 그가 실수라면 실수인 것이다.

 그리고 어차피 자신은 아메지스트에 대한 직접적인 명령권도 없었으니, 만약의 경우 책임은 심 전무가 지게 되리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소영의 주목을 끈 건 다른 단어였다.



 페리도트.

 자랑스러웠던 큰 오빠, 찬영의 원수.


 원수라고 생각했었던 여자.



 소영은 임예지의 최후를 떠올렸다.

 병상과 함께 압착되기 직전, 스스로를 방어하는 대신 자신에게 모종의 마법을 건 그 여자.

 그 모습을 떠올릴수록 머릿속을 울리는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져만 갔다.

 이제는 무시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는 테이블 밑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핏기가 빠져나가 하얗게 질린 손바닥을 손톱이 파고들며 느껴지는 뜨거운 아픔.

 그러나 지금도 맥동치듯 아픈 그녀의 머리는, 그런 자해 정도로는 좋아질 기미가 없었다.



 연합 본부에 잠입해 있던 요원이 페리도트, 임예지의 소재를 입수한 게 3주 전이었다.

 과거에는 원주 세브란스 기독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지금의 원주연합의료원.

 그곳의 중환자실에서 집중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는 첩보였다.


 그 소식을 들은 김길주 대통령이 국정원에 전달한 명령은 간단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페리도트를 제거할 것.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러서라도.


 다만 대통령은 방아쇠를 당겼을 뿐. 사실상 당파를 가릴 것 없이, 정치인들의 총의라고 봐도 무방한 명령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페리도트는 가장 두려운 마법을 가진 마법소녀였으니까.



 심 전무는 그런 생각을 대변이라도 하듯 떠들어댔다.



 “그 여자가 재기라도 했다면 아마 각하께선 밤에 잠도 못 주무셨을 걸세. 자신의 존재는 숨기고 사람들의 정신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마법소녀라니. 국회의원들이나 장관들, 아니면 장성들이 하룻밤에 세뇌 당한다고 생각해보게. 그 날이 바로 대한민국이 망하는 날이지.”



 그저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마법소녀라면 적으로 돌아서더라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사회 규범을 일탈한 폭력, 예를 들자면 마법소녀 카넬리안.

 그녀처럼 테러를 일으킨다 해도 결국 개인이 부릴 수 있는 힘에는 한계가 있다.

 마법소녀 또한 사람인 이상 먹을 것이 필요하고, 잠잘 시간도 필요하니까.


 반대로 국가는 구성원이 죽고 도시가 무너져도, 체제만 살아있다면 언제든지 재건할 수 있다.

 크게 다쳐도 중요 장기만 온전하다면 다시 소생할 수 있는 인간처럼.

 한 번이라도 죽으면 끝인 인간과, 무수한 목숨을 가진 불사의 괴물.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지는 자명했다.


 다만 페리도트는 예외에 가까웠다.

 생물의 정신을 조작할 수 있는 마법소녀.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국가의 수뇌부를 눈 깜짝할 사이에 세뇌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페리도트에게 전찬영 의원 암살의 누명을 씌우는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만일 그녀가 도주하는 대신 목숨 걸고 보복할 마음을 먹었다면, 부산의 정계는 완전히 무너졌을 테니.

 페리도트가 상궤 안에서 행동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마력 친화파라는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김길주 대통령의 조급함이 불러올 뻔한 재앙.

 이번에 그 화근을 완전히 근절하는데 성공했으니, 심 전무가 신이 나서 장광설을 떠들어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리스 신화의 아르고스라는 거인은 다들 아나? 100개의 눈을 번갈아 가면서 감으며 24시간 잠들지 않는다고 하지. 우리는 그 거인의 눈이자 주먹일세. 국가의 내적 외적인 위협을 감시하고, 그 감언이설에 거인이 잠들어 버리기 전에 놈들을 철권제재로 응징하는 게 우리 일임을 다들 명심해야 할 거야.”



 간부들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꼴을 외면하려는 듯 고개를 숙여 발치를 쳐다보는 소영.

 그녀의 가지런한 뒷덜미에 살포시 튀어나와 있는 수술 자국을 보며, 심 전무는 씩 웃었다.



 “소영 씨는 뭐 원하는 거라도 있나? 규정상 훈장이나 진급은 어렵지만, 나 개인이 들어줄 수 있는 선이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네.”



 고개를 숙인 채 소영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러던 그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대답을 자아냈다.

 원주에서 돌아온 이후 줄곧 생각해오던 말을.



 “…한 가지, 있습니다.”
 “뭔가?”

 “큰 오빠… 전찬영 의원의 부검소견서와 살해 현장 사진을 보고 싶습니다.”



 심 전무의 미소가 살짝 굳었다.


 회의실 안의 분위기가 한순간 얼어붙었다.

 진땀을 뻘뻘 흘리던 손 계장이 벌떡 일어났지만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정도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안 됩니까?”

 “소영 씨, 말대답하지 말고, 쉿, 쉿.”



 다급히 소영의 입을 막으려고 드는 손 계장.

 그에게 심 전무의 날카로운 시선이 날아들었다.

 자기 앞에서 건방 떨지 말라는 듯.


 간담이 내려앉은 손 계장이 어정쩡한 자세로 굳자, 심 전무는 손을 휘휘 저으며 짐짓 태평한 목소리를 냈다.



 “안 될 건 없지. 딱히 기밀 지정된 서류는 아니니까, ‘적절’한 사유만 있다면 누구나 볼 수 있다네.”

 “그러면.”


 “내가 궁금한 건, 작년에 작고하신 백씨(伯氏)의 부검소견서를 갑자기 확인하고 싶어진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지.”

 “…”


 “전 의원의 사인은 지근거리에서 발사된 파라벨럼 권총탄에 의한 흉부 및 두부 총상. 그렇게 결론이 났던 걸로 기억하는데 말일세.”



 의중을 떠보려는 듯한 말에 소영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을 마주 바라보며, 심 전무는 내심 웃었다.


 나름 감정을 숨긴다고 숨겼지만 결국은 인생 경험도 사회 경험도 모자란 어린 여자애.

 채 숨기지 못한 의혹과 갈등이, 가라앉은 시선 속에서 조용히 이글거리는 게 다 드러났다.

 그것만 봐도 무슨 생각으로 아메지스트가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명백했다.



 ‘페리도트가 죽기 전 쓸데없는 유언이라도 남긴 모양이지. 그 여자는 전찬영 의원이 암살당한 현장에 있었으니. 아니면 사도닉스가 가벼운 주둥이를 놀렸나?’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아직 아메지스트를 폐기할 때는 아니었으니까.


 인간의 몸으로 전술핵에 버금가는 파괴력을 부리는 마법소녀.

 겨우 진실에 근접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없애기에는, 남아있는 이용가치는 무궁무진했다.

 마력 억제장치라는 고삐가 있는 한 아메지스트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없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한 심 전무는 차가운 시선을 눈 깜짝할 사이 지우고 어깨를 으쓱했다.



 “복수를 이루고 나서 뭔가 새로이 눈에 들어오는 게 있었나 보군. 좋아. 이제는 자네도 가족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동기를 넘어서 더 큰 대의를 바라볼 때가 됐지.”

 “전무님.”



 옆에서 끼어드는 차 부장을 제지한 심 전무는 마저 대화를 이었다.



 “원하는 건 그것 뿐인가?”



 ‘사직’이라고 무심코 대답하려던 소영은 입을 다물고 대신 고개를 흔들었다.

 적어도 페리도트를 죽인 지금, 더 이상 국정원에 몸을 담을 이유도 동기도 없다.

 그러나 사직하고 싶다고 한들 받아주지도 않을 터.


 이미 열 건에 달하는 유력 인사 암살, 그리고 이번의 원주연합의료원 학살.

 한 건이라도 세상에 공표되는 순간 정부의 정당성에 큰 타격을 입을 만한 사건들이다.

 그런 국가의 치부를 직접 수행한 자신이 사직한다고, 그걸 받아줄 정도로 국정원이 마음 좋은 기관은 아닐 터.


 그러니 지금의 어정쩡한 지위라도 유지하는 게 차라리 더 안전하다는 판단이었다.

 죽는 날까지 신분 없는 자로 지내겠지만, 최소한 이용가치가 있는 동안은 비호를 받을 수 있을 테니.


 앞으로 할 일을 생각하면, 그게 옳은 판단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소영은 짧게 대답했다.



 “네.”
 “원하는 자료는 이틀 뒤에 사내 메일로 보내주지. 가서 일을 보든, 점심을 들든, 편한대로 하게.”

 “…실례하겠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소영은 미련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등 뒤로 쏟아지는 불신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문을 닫은 소영은 습관처럼 주변의 광경을 살폈다.

 점심 시간이라지만 돌아다니는 요원 한둘은 있을 법했으나, 복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아마도 심 전무가 회의라는 명목으로 출입을 막아 놓았으리라.

 아메지스트라는 비밀 무기를 백색 요원들의 눈에 띄게 하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을 터.


 그 침정(沈靜)이 지금의 소영에게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돌이 깨지고 금 가는 듯한, 소름 끼치는 사고가 다시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개체-자수정-감!@석-최후-의지-#$송-자수%^-혈육-살&*-감람석-부정-!@간-저격총-원@#리-저택-$%-음모]

 “시끄러워…”


[감람!@-최후-의#$-전송-자%^정-혈&*-살해-감람!@-부#$-인간-저%^총-원거리-&*택-밖-음모-감!@석-살#$-%^정-&*후-의!@-#$송…]



 이를 악문 소영은 귀가 먹먹해지도록 틀어막았다.

 헛수고였다.

 마스코트의 텔레파시를 물리적으로 막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임예지를 죽이기 직전 걸린 마법이 문제였다.

 아니, 마법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애매했다.

 울산에서 확인했던 페리도트의 마력광은 분명 올리브색.

 하지만 자신을 한순간 뒤덮었던 그건 투명한 유체였다.

 달팽이가 기어간 흔적에 남은 점액처럼 생긴, 부정형의 유체.


 당시에는 별 문제 없었지만, 국정원 본부로 돌아온 직후부터 이상 증세가 생기기 시작했다.

 마스코트가 끝없이 텔레파시를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면세계 대전 말미에 계약했을 당시 이후로는 한 번도 의사소통을 한 적 없는 그 괴물이.



 “그 미친년, 개 같은 년…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소영은 점점 풀려가는 다리의 힘을 다잡으며 복도를 걸었다.

 처음에는 그나마 문장 구조가 살아있었던 텔레파시.

 그러나 이제는 그저 페리도트의 결백을, 그리고 다른 누군가의 음모를 주장하는 단어만 끝없이 늘어놓을 뿐.

 고장 난 라디오도 이것보다는 더 듣기 좋을 듯했다.


 마치 굳게 닫혀 있던 바위가 물줄기에 허물어지듯, 잡념이 소영의 머릿속으로 줄줄 새어 나왔다.


 일종의 세뇌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페리도트가 죽었다는 것도, 그 여자가 마법으로 보여준 환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 죽어가던 페리도트가 쓴 마법이 과연 변신까지 했던 자신의 정신 방벽을 뚫을 수 있었을까.

 그리고, 정말 큰 오빠를 죽인 게 페리도트가 맞는 걸까.


 어찌 보면 당연한, 그리고 진작에 들었어야 하는 의문이었는데.

 지금에서야 이런 생각을 한 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


 마법소녀가 굳이 총으로 사람을 쏴 죽일 이유는 없잖아.

 마법으로 죽이는 게 훨씬 간단하고 증거도 남지 않으니까.

 더군다나 사람의 정신을 지배해서 자살하게까지 만들 수 있는 페리도트라면 더더욱.


 저격총.

 저택 밖, 먼 거리에서.


 총상은 총상이되, 사실 권총탄이 아니었다면.

 그저 그렇게 보이도록 위장한 것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누가 있을까.

 경찰? 수방사? 대통령 경호실? 프로 암살자들?


 아니면, 국정원?



 소영이 큰 오빠의 죽음에 관한 진실을 다시 파헤치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다.

 심 전무에게 의심받을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여름의 햇살과 그림자가 그물처럼 교차하는 통로.

 방금 자신이 왔던 길을 소영은 비틀거리며 다시 돌아갔다.

 어쩌면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를, 큰 오빠의 복수를 위해.

 




 한 차례 냉풍이 불고 간 듯한 회의실.

 아메지스트가 나간 자리에는 뚜껑조차 열지 않은 초밥 도시락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몇몇은 초밥을 께작거리고 있었지만, 상당수는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 물이나 홀짝이며 서로 숙덕거리는 중이었다.


 어느 새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손 계장은 옆의 차 부장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부장님. 잠시 이야기 좀 하십시다.”
 “무슨 일 있나?”

 “여기서는 좀.”



 차 부장은 심상치 않은 손 계장의 분위기에 내심 궁금증이 일었다.

 자신의 연수원 동기.

 맡은 일은 잘 하지만 원체 진급 욕심이 없어 떨어지는 떡고물이나 간간히 받아먹던 친구.

 심 전무의 파벌에서도 딱히 특색 없이 무던하게 지내던 인간이었다.

 그 때문에 다들 기피하는 아메지스트의 관리를 반강제로 맡긴 했지만.


 아무튼, 그런 친구가 갑자기 뭔가 중대한 비밀 이야기라도 털어놓으려는 듯 구는 게 그냥 넘길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 부장은 초밥 세 점이 남은 도시락 뚜껑을 덮고, 심 전무 쪽을 쳐다봤다.



 “전무님, 잠시 이 친구랑 식후땡 좀 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한참 휴대폰 메신저로 대화를 주고받던 심 전무는 알아서 하라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차 부장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 계장은 그 와중에 남아있는 초밥이 아까운 듯, 세 점을 한번에 집어먹으며 일어났다.



 몇 분 먼저 나간 아메지스트는 흔적도 없었다.

 아마 국정원 본부 구석에 있는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갔으리라.

 그리 생각한 차 부장은 앞서 흡연실로 향했다.

 손 계장은 어딘가 거북살스러운 듯 그 뒤를 조심스레 따라갔다.


 알루미늄 새시 곳곳에 노랗고 거무스름한 니코틴 자국이 배어 있는 흡연실.

 비흡연자인 손 계장은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재채기를 두어 번 했다.


 차 부장은 정장 안주머니에서 액상 전자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한 모금 빨아들였다.

 그리고 수증기와 함께 손 계장에게 말을 던졌다.



 “무슨 말이 그리 하고 싶은데?”
 “야, 야, 연기 이쪽으로 뿜지 마. 좀.”


 “자식이 연수원 동기라고 하늘 같은 부장님한테 말을 놓네?”
 “그러는 너야말로 진급 좀 빨리 했다고 너무하는 거 아니냐?”


 “아 아무튼 됐고, 용건이 대체 뭐야.”



 손 계장은 잠시 주변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메지스트 말이다. 내가 관리하고 있긴 하지만, 슬슬 처분해야 되는 거 아니냐?”



 차 부장은 전자담배를 다시 한 모금 빨아들이고는 손 계장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세월을 이길 수 없는지 벗겨지기 시작한 앞머리.

 볼과 광대뼈에 붙은 살 때문에 후덕해 보이는 안면.

 국정원 요원이라기보단 뒷골목 부동산의 게으른 사장이 좀 더 어울리는 인상이었다.


 그런 인상과는 다르게 실상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어찌 보면 잔인하고 냉정한 임무도 곧잘 해내는 친구.

 그러나 그런 일을 즐기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과는 다르게 아직도 만년 계장 신세.


 그런 손 계장의 입에서 딸 뻘인 여자애를 ‘처분’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는 게, 차 부장에게는 약간 충격이었다.



 “왜? 무슨 문제라도 일으켰냐?”
 “말도 마라. 네가 그… 괴물이, 사람을 손짓만으로 동전 사이즈로 찌그러뜨리는 걸 봤어야 해. 지난 번에 공정선거연대 본부장을 그렇게 만드는 거 보고 저절로 토악질이 나더라.”



 무심코 그 광경을 상상한 차 부장은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을 살짝 받았다.


 차 부장은 민간 감청과 휴민트 관리를 주로 담당했기에 마법소녀와 얽힐 일이 없었다.

 그저 이면세계 대전 말기에 승전 후 카 퍼레이드를 벌이는 걸 몇 번 본 것이 전부.

 그러니 마법소녀들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부릴 수 있는지, 그저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차 부장에게,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은 꽤 자극적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그거하고 아메지스트를 처분해야 되는 거하고 무슨 상관이냐? 핵무기가 사람을 끔찍하게 죽인다고 해서 폐기 처분하지는 않잖아.”
 “아니, 내 말은…”



 잠시 어물거린 손 계장은 한숨을 푹 쉬더니, 스스로도 약간 자신 없다는 듯 주눅든 목소리를 냈다.



 “감이 안 좋아.”
 “감?”

 “그래. 감. 그렇게 밖에 말 못 하겠다.”



 차 부장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차 부장에게 손 계장은 계속 말을 걸었다.



 “불안요소가 한두 개가 아니야. 내가 보기론 아메지스트 그년은 애국심이고 충성심이고 뭐고 없어. 그냥 제 오라비 복수라면 눈 돌아가는 미친 개란 말이다. 전무님은 마력 억제장치를 철석같이 믿고 있던데, 그게 백 퍼센트 안전을 보장하리라는 법이 있냐? 그년이 깽판치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막아. 거기다 오늘 전찬영의 부검 소견서하고 암살현장 사진을 달라는 걸 보면, 뭔가 눈치챘을지도 모르는 노릇이기도 하고.”



 정신이 사나워진 차 부장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아, 그만 그만. 네가 무슨 말 하고 싶은 진 알겠다, 혁재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차 부장의 얼굴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손 계장은 그 속내를 읽고는 혀를 찼다.

 좀 더 설득해볼 수야 있겠지만 반응을 보니 영 헛수고일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애초에 아메지스트라는 불안정한 폭탄을 끌어안은 게 심 전무.

 그리고 차 부장은 자신의 연수원 동기라지만, 심 전무의 측근이기도 했다.

 그런 차 부장이 심 전무의 뜻에 반기를 들 리가 만무했다.



 “그런데 전무님이 아메지스트를 저렇게 물고 빨고 하는데 나한테 이래봐야 소용없어. 전무님한테 직접 상신해보지 그러냐?”

 “쯧. 나 같은 핫바리가 어디 말해봐야 씨알이나 먹히겠냐. 그러니 너한테 이렇게 털어놓는 거지.”


 “걱정도 팔자다. 네 말마따나 아메지스트 그 여자가 위험한 건 맞지만, 다룰 만한 채찍은 얼마든지 있어. 여차하면 뭐, 그래. 원주연합의료원 학살의 책임을 덮어씌워서 제거해버려도 되고. 아메지스트의 마법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우리가 다룰 수 있는 다른 마법소녀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원래 쪽수 앞에선 장사 없는 법이지. 안 그러냐?”


 “오냐. 전무님하고 네 생각처럼 일이 다 잘 풀렸으면 참 좋겠다. 에휴…”



 손 계장은 한숨을 푹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차 부장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었다.

 그러나 현장에서 직접 아메지스트의 힘을 본 손 계장은 도무지 그렇게 생각할 수 없었다.


 동전 사이즈로 압축 당한 공정선거연대 본부장은 약과에 불과했다.

 처음으로 능력 테스트를 했을 때, 아메지스트는 주력전차 두 대를 뭉개서 공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폈다.

 별 힘조차 들이지 않고.

 김해의 폐공장으로 도주한 반정부단체를 체포할 때는 더더욱 가관이었다.

 수천 톤은 될 법한 공장 건물을 들어올려 사람을 개미 마냥 털어내는 광경은 영화라도 보는 듯했으니까.


 그리고 손 계장이 직접 보진 못했지만, 원주연합의료원의 본관은 11층 높이.

 거기에 많은 대형병원이 그렇듯이 너비는 훨씬 넓다.

 그런 건물을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는 마법소녀, 아메지스트.

 유사시에 과연 다른 마법소녀들이 그녀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단순히 그녀가 보여준 장대한 폭력에 압도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국정원은, 손 계장이 보기에는 아메지스트를 다루기에 충분한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아메지스트를 매어 두는 고삐 두 개 중 하나, 전찬영 의원의 복수라는 동기는 이제 그 괴물을 구속할 수 없다.

 남은 건 알량한 마력 억제장치 하나 뿐.

 그런 현상황이 손 계장에게는, 목줄 하나로 늑대를 매어 두려는 어리석은 조련사처럼 보였다.


 손 계장은 코 앞까지 다가온 꿉꿉한 전자담배 냄새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진급이고 염병이고, 난 월급이나 따박따박 받아먹으며 속 편하게 살고 싶다, 이 말이야.”

 “그럴 거면 이런 곳에 들어오질 말았어야지…”



 차 부장의 한심하다는 듯한 말과 함께, 손 계장의 시름은 깊어만 갔다.

 





 *

 





 봉투 안에 피를 한 바가지나 뱉은 하율은 전신의 탈력감을 느끼며 뒤로 몸을 기울였다.

 얕은 숨을 내쉬며 뒤로 등을 기댄 그녀의 이마에 닿는, 물수건의 미지근하고 축축한 감촉.

 하율은 힘없는 시선을 물끄러미 돌려 옆을 쳐다봤다.


 어깻죽지까지 내려온 갈색 머리에 가볍게 펌을 넣은 여자가 곽 티슈를 뜯어 침상 위에 올려 놨다.

 하율은 갈라진 입술을 열어 중얼거렸다.



 “고맙군… 콜록.”
 “뭘요, 제가 해야 하는 일인데요.”



 아람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분홍빛 거품으로 범벅이 된 봉투를 새것으로 갈았다.

 폐에 물이 찬 하율은 하루 종일 기침하면서 피거품을 뱉아내곤 했다.

 덕분에 이렇게 봉투를 갈아치우는 것만 하루에 대여섯 번.


 그 외에도 아람에게 하율이 신세지고 있는 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이제는 운신도 어려워진 그녀의 몸을 몇 시간마다 돌려 눕히기도 하고, 소변줄을 간호사들 대신 소독하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예언의 힘을 요청하는 타 부서의 연락에 하율 대신 맞대응하는 일까지 하고 있으니.


 지겹고 짜증날 법도 했으나 아람은 불평 한 마디 없었다.

 하율은 침침한 시야에 그런 그녀를 넣은 채 재차 쉰 목소리를 냈다.



 “미안하다…”
 “뭐가요?”

 “이런 일까지, 콜록, 하게 만들어서.”



 본래 비서의 업무는 이런 병수발 따위가 아니다.

 그러나 한달 전 원주연합의료원에서 돌아온 뒤, 다시 예언의 힘을 쓰다 쓰러진 하율은 급속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

 가정용 산소통으로는 부어버린 폐와 심장이 요구하는 산소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다.


 중앙병원의 VIP실에 입원한 것까진 좋았다.

 비록 허울 뿐인 마법소녀관리부의 부장이라 하더라도, 어쨌든 연합의 중진 중 하나.

 그런 하율을 다른 난민이나 일반 사원들이 뒤섞인 공간에 입원시킬 순 없었으니.


 그러나 반대로 그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심장병이 악화된 하율은 혼자선 거동조차 할 수 없었기에 24시간 상주간병인이 필요했는데,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족이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율의 가족은 이면세계 대전 때 모두 실종된 지 오래.

 그렇다고 신원이 불분명한 아무개나 받을 수도 없었다.

 행여나 하율이 암살당하거나 기밀이라도 유출되면 연합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니까.


 결국 남은 유일한 후보는 두 달 전 대공부에서 임차한 임시 비서, 양아람이었다.

 하율이 쓰러진 이후로 마법소녀관리부는 사실상 해체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비서라 해도 결국 이름 뿐.

 실상은 지원금만 꼬박꼬박 타먹는 백수나 다름없다는 게 상부의 생각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하율의 간병인이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람은 그런 하율을 꼭 귀여운 조카 쳐다보듯 미소 지으며, 그녀의 하늘빛 머리카락에 손을 뻗었다.



 “아유, 우리 부장님, 대견한 말씀도 할 줄 알게 되셨네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틱틱거리시던 분이.”



 능글맞게 구는 게 놔두면 정말 어린애 다루듯 머리를 쓰다듬을 기세였다.

 천천히 다가온 아람의 손바닥이 하율의 정수리와 앞머리에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



 예전의 하율이었다면 그 손을 냉랭하게 쳐냈을 터.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가늘게 흘기기만 할 뿐,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푸석하지만 여전히 보들보들한 마법소녀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사르륵하는 소리.

 그 감촉을 한참 만끽하던 아람의 인상이 순간 확 찡그려졌다.

 뒷주머니에서 요란한 진동이 울렸기 때문이다.


 미련 가득하니 손을 뗀 그녀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더니 하율의 방향으로 흔들었다.



 “부장님, 잠시 전화 좀 받고 올 게요. 아픈 사람한테 정말 너무하네.”



 휴대폰 화면에는 모르는 전화번호와 함께, ‘상사’라고만 적혀 있었다.

 허락을 구하려는 듯 돌아보는 아람에게 하율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마도 대외공작선전부에서 또다시 예언의 힘을 요청하는 연락이리라.


 아람이 나가며 내부 문을 조용히 닫았다.

 곧 병실을 채우는, 아코디언처럼 생긴 고유량 비강 캐뉼라의 산소 분사음.

 하율은 물결치듯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그 리듬에 맞춰 심호흡을 했다.

 그러는 편이 숨쉬기가 그나마 편했으니까.



 고개를 살짝 돌린 하율의 시야에 텅 비어 있는 내방객용 원탁이 들어왔다.

 그녀는 그 원탁을 보며 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입원한 지 한 달 째.

 하다못해 말단 간부가 입원해도 간단한 위로 선물 정도는 보내련만.

 그 동안 저 테이블 위에 방문자가 뭔가를 올려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병문안을 온 사람조차.


 결국 권력 없는 자란 이런 취급밖에 못 받는 거겠지.


 혼잣말을 할 기력도 없었던 하율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고는 픽 웃었다.

 그리고는 내장을 토할 것처럼 기침을 했다.



 “쿨럭, 쿨럭, 커억, 컥. 푸우, 퉷.”



 숨을 간신히 추스른 하율은 손등으로 입가를 쓱 닦았다.

 피와 침, 물이 섞인 거품.

 퉁퉁 붓고 보랏빛으로 변색된 손등에 그 분홍빛이 얼룩처럼 묻어났다.

 그런 간단한 접촉만으로도 울혈된 손은 불에 데인 듯한 쓰라림을 그녀에게 안겨줬다.


 몇 주를 강심제와 이뇨제를 맞아도 도저히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병세.

 주치의는 이미 심장이식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진단을 내린 상태였다.

 심장 내 제세동기나 재동기화 치료처럼 기계를 심는 건 하율 본인이 거부.

 하트메이트 같은 심실보조장치는 미국 말고는 생산하는 곳이 없었기에 시술이 불가능했다.


 젊은 무연고자의 시신은 언제나 넘쳐났으니 이식을 할래도 기증자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연합에는 심장이식을 집도할 만한 의사가 없었다.

 그런 의사들은 다 부산의 좋은 병원에서 거금을 받으며, 연합에서 수출한 장기로 마음껏 수술을 하고 있을 테니까.

 기껏 해봐야 심장마비가 오게 되면, 에크모(*체외막 산소요법=인공심폐기)로 연명하는 정도.

 두 달을 살면 기적이라 할 만했다.


 죽음의 선고나 마찬가지였으나 하율은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어차피 마스코트를 잃고 지병이었던 심장병이 악화된 작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

 다만 그 선고가 코 앞으로 다가오는 시시각각, 하율은 이런 생각을 했다.



 ‘그냥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사실은 지금까지 해온 게 다 무의미한 짓이었다는 걸. 얼마 남지 않았던 목숨을 쓸모 없이 낭비했다는 걸.’



 급사할 위험을 무릅쓰고 짜낸 마지막 예언마저 무시당한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달 전 아람과 함께 서울로 돌아온 하율.

 그녀가 마력을 짜내어 미래를 엿본 뒤, 가장 먼저 예언한 것이 원주연합의료원의 붕괴였다.


 병상에 누운 예지는 금속과 살점이 뒤섞인 공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나은은 더 이상 자신의 마법으로 소생할 수 없을 때까지 산산조각이 났다.

 11층짜리 본관 건물을 지하주차장 채 뿌리 뽑아 원심분리 하듯 사람과 함께 갈아버리는 광경은 그야말로 비현실적.

 그 모든 것을 한 명의 마법소녀가 저지를 거라는 사실은, 산전수전 다 겪은 하율에게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간부들이 그 예언을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일축한 것은.


 덕분에 지금 연합은 사실상 비상상태나 마찬가지였다.

 경북으로 이전한 부산 제3군단과의 지속적인 분쟁으로 잔뼈가 굵은 야전 의료진.

 그리고 페리도트와 사도닉스라는 강력한 전력을 한순간에 잃었으니.


 게다가 부산의 지상작전사령부는 이미 제5군단을 전방 배치하기 시작한 상황.

 개전이 초읽기에 들어갔으니 난리가 날 법도 했다.



 물론 그런 미래를 알고 있다 해서 과연 그 마법소녀를 막을 수 있으리라곤 하율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의 마법을 다루는 마법소녀는 이면세계 대전 시기에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최소한 병원을 미리 소개(疏開)했다면, 이런 어이없는 전력 손실은 피했을 터.



 ‘아마 다른 예언도 이제 와서야 허겁지겁 재검토하고 있겠지. 얼마나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산 정부군의 예상 진격로.

 주요 타격 목표.

 주공(主攻)에 포함된 마법소녀 전력과 재래식 전력.

 부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기까지 버티면 되는 예상 기간.

 그 모든 것들을 알려줬으나, 불신 가득한 다른 부장들이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그나마 검토라도 하면 다행이었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일부러 무시할지도 모른다.

 애써 퇴물로 만들어 놓은 자신의 발언권을 다시 올리고 싶진 않을 테니.

 배신자의 소행일지도 모른다.

 정유산업부의 차장이라는 자도 부산 정부에 연합을 팔아 넘기는 판이니.


 연합.

 서울연합.

 처음에는 폐허가 된 서울에 남은 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과 몇몇 마법소녀들이 만든 자선단체.

 그랬던 것이 3년도 안되는 사이 이런 추하고 더러운 괴물로 커버리고 말았다.


 하율은 점점 숨쉬기가 답답해지는 걸 느끼며, 나약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전쟁이 끝난 뒤 부산으로 돌아갈 걸 그랬어. 사회복지사… 자격증 땄을 때 아빠가 참 좋아했는데…”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옆의 휴지를 집어 입가와 손등을 닦았다.

 피 묻은 휴지를 옆의 봉투에 떨군 하율은, 이불을 느릿하게 목 아래까지 끌어올렸다.


 이제는 가슴께의 브로치와 리본만 겨우 남은 분홍빛의 마법소녀 드레스.

 그 위를 덮은 하얀 환자복이 시트 밑으로 사라졌다.

 이제 드러난 것은 하늘빛 머리카락보다도 더 창백한 색으로 질린 얼굴 뿐.


 무더운 한여름인데도 오한이 그녀의 몸을 사로잡아 흔들어 댔다.

 병실 안의 공기가 추운 것인지, 아니면 피를 너무 많이 뱉아서 그런지.


 하율은 축축하고 차가운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소비하는 행위.

 마디마다 물이 들어찬 손가락은 뻑뻑해서 잘 구부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짓에라도 몰두하면 조금은 몸의 떨림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스물 정도까지 센 하율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아람이가, 콜록, 느, 늦네…”

 “저 부르셨어요?”



 때마침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병실로 들어오는 아람.

 그 뒤를 따라 들어온 간호사가 부산스럽게 침상 주변을 돌아다녔다.

 자동혈압계의 버튼을 누르고, 수액 잔량을 확인하고, 소변 배액용기를 비우는 등.


 하율은 편의점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옆의 의자에 앉은 아람을 잠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불렀다만.”
 “그거 참 이상하네요. 제 귀에는 분명히 ‘아람이가 늦네, 보고싶다, 얼른 왔으면 좋겠다’라는 부장님 목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그런, 콜록, 말 한 적 없다.”

 “그럼 무슨 말 하셨어요?”


 “…”



 할 말이 없어졌는지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모습을 보며 아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싱글거릴 뿐.

 그러던 아람의 표정이 갑작스럽게 울리는 시끄러운 알람에 살짝 굳어졌다.


 간호사는 모니터에 표시된 혈압 수치에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곧 시트를 붙든 하율의 손을 발견했다.



 “환자분, 팔 펴셔야 해요.”



 실눈으로 아람을 흘기던 하율은 자신의 팔을 펴는 간호사의 손길에 잠시 신음을 흘렸다.

 차가워진 사지에 와 닿은 타인의 체온은 따뜻하다기보단 불타는 것처럼 쓰렸기에.


 아람의 안쓰러운 시선이 한순간 그녀를 스쳤다.

 실제 나이야 어쨌든, 하율은 겉으로 보기에는 중학생 정도의 외모.

 그런 소녀가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해쓱한 낯으로 앓는 모습은, 보기에 영 마음 아픈 광경이었으니.


 그러거나 말거나 다시 하율의 팔을 조이는 혈압계.

 커프를 채운 공기가 다 빠져나가고도 모니터의 알람은 꺼질 기색이 없었다.

 간호사는 혈압 항목에 표시되는 ‘71/42’이라는 숫자를 보더니,



 “잠시만 기다리세요, 환자분.”



 이런 말을 남긴 채, 커프를 놔두고 재빨리 병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하율은 욱신거리는 손을 늘어뜨린 채 긴 숨을 내쉬었다.

 간호사가 저러는 걸 보면 동요할 법도 했으나, 이미 몇 번이고 겪어서 익숙한 상황이었다.


 이제 VIP 병동에서는 자신의 저혈압에 신경 쓰지 않게 된 지 오래.

 저렇게 호들갑을 떠는 걸 보니, 방금의 간호사는 이 병동에 새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심장이 제 구실을 못하니 정상적인 혈압이 나올 리 없다.

 지금 두 손의 감각이 이토록 망가진 것도, 어떻게든 혈압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했던 약물들의 후유증.

 승압제와 혈관수축제를 다량으로 쓰다 보니 말초혈관과 신경이 망가진 것이다.


 손은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발가락에 이르러서는 이미 끄트머리부터 썩어 들어가기 시작한 상황.

 소독하러 온 의사가 새까맣게 죽은 껍데기를 긁어낼 때면 언제나 진물 때문에 고약한 냄새가 풍기곤 했다.

 괴사한 살점을 벗겨내도 각질을 뜯어내는 정도의 감각밖에 없었다.



 ‘이게 내가 죽어가는 방식이구나. 최소한 영안실에 들어갈 때는, 물귀신처럼 불어터진 꼴이 아니라 사람 모습이었으면 좋겠는데.’



 그리 생각하던 하율은 문득 한 마법소녀를 떠올렸다.


 라피스라줄리.


 전쟁으로 오른다리를 잃었지만, ‘부활의 마법소녀’라는 이명에 걸맞게 다시 일어서는 데 성공한 여자.

 연합 본부에서 그 비결을 물었을 때, ‘어머니가 있었으니까’라고 대답했던 여자.

 고문으로 남아있던 왼다리마저 잃고서도, 방송에 나와서 스스럼없이 고통을 남에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여자.


 그런 라피스라줄리도 지난 달 마지막으로 SBS의 방송에서 본 이후로는 근황을 알 수 없었다.

 조용히 잘 살고 있을지, 아니면 뭔가 일이라도 생긴 것인지.


 하율은 전자이기를 속으로 은근히 빌었다.

 자신이 끝끝내 손에 넣지 못한 평화와 안식을 얻었기를.


 자신도 옆에 소중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녀처럼 견딜 수 있었을까.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린 하율의 눈에서 한 줄기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런 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가족도, 애인도, 믿을 수 있는 친구도, 동료도.


 그런 하율의 손에 천천히 다가온 무딘 온기.

 흐린 눈을 뜬 하율은 옆을 쳐다봤다.

 옆에서 뭐라 표현하기 어려운 표정을 지은 아람이, 시트 밑으로 자신의 손을 살짝 쥐고 있었다.

 아프지 않도록 부드럽게 달래듯.



 “…뭐하는 거지?”

 “옛날에 제가 아플 때면 언제나 부모님이 이렇게 해 주셨어요. 좀 효과 있는 거 같아요?”


 “아프진, 콜록, 않다만.”
 “부장님… 율이 언니, 또 거짓말. 그렇게 인상 찡그리고 대답하셔도 다 티 나거든요. 그리고 무리해서 말하시면 또-”


 “누가, 쿨럭, 네, 언니, 쿨럭, 캑.”



 다시 요란하게 기침을 하며 피거품을 뱉는 하율.

 그녀의 입가에 아람은 기다렸다는 듯이 휴지를 가져다 댔다.

 입원한 이후로 하율은 조금만 길게 말하면 금방 객혈을 하곤 했다.


 더러워진 휴지를 버리는 아람에게, 하율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을 보냈다.

 대공부에서 보낸 임시 비서.

 프락치.

 말만 많고 경박하기만 한 인간.

 왜 하필 이런 여자가 이런 순간까지 곁에 남아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람, 아람아.”

 “넹?”
 “넌, 콜록, 왜 안 떠나고.”



 하율은 그 뒷말을 잇지 못하고, 가슴을 쥐어뜯으며 헐떡거렸다.

 점멸하기 시작하는 모니터의 산소 포화도 수치.

 삑삑 울리는 경보음을 듣고 아람은 간호사를 부르기 위해 벌떡 일어서려 했다.

 자신의 소매를 잡아당기는 미약한 힘을 느끼기 전까지는.



 “후우, 푸우, 넌 왜, 후우.”

 “심호흡, 심호흡하세요. 말 그만하시고.”



 보랏빛으로 변색된 하율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자신에게 와 닿는 아람의 불안해 보이는 시선을 느끼며, 하율은 계속 심호흡을 했다.

 터질 듯한 폐가 다시 안정을 찾을 때까지.


 조금씩 잠잠해져 가는 모니터의 경보음.

 혈색이 다시 돌아오기 시작한 그녀의 낯을 보며 아람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반대쪽 손도 마저 시트 밑으로 밀어 넣었다.

 하율의 퉁퉁 부은 손을 붙든 아람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픈 사람 옆에 있어주는데 이유가 필요한가요?”
 “…”


 “힘들기야 하지만, 적어도 전 그렇게 배웠어요. 그게 사람의 도리라고. 그런데 제가 율 언니를 어떻게 버리고 가겠어요. 우리 부장님 친구 없는 거 다 아는데.”


 “…넌, 콜록, 쓸데없는 말이, 많아.”

 “그게 제 장점이죠. 헤헤.”



 실없는 아람의 웃음소리를 듣고 하율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그와 함께 묘한 부유감이 그녀의 마음을 감쌌다.

 깊은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가 조금이나마 다시 둥실 떠오르는 듯.


 붙들린 손에서 올라오는 아람의 온기.

 그 다정한 손길이 온몸으로 천천히 퍼져가는 듯한 감각에, 하율은 다시 눈을 감았다.


 마법소녀가 된 이후로 이런 따뜻함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하율은 다음에 눈을 떴을 때도 그 온기가 남아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죽음이 턱끝까지 다가온 지금, 그런 보잘것없는 바람과 함께.

 




 아람은 시트 밑에서 손을 조심스럽게 뺐다.

 잠들어버린 하율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축축하고 차가운 감촉이 멀어져가며, 손에 남은 건 찝찝한 습기 뿐.

 그녀는 손을 옷에 문질러 닦은 뒤, 봉투를 조심스레 뒤져 유동식 캔을 꺼냈다.

 잦은 객혈로 목이 상한 하율은 유동식이 아니면 거의 먹지를 못했다.


 다만 손을 닦았음에도 찝찝함은 도무지 가시질 않았다.

 비단 손 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 자신의 ‘진짜 상사’에게서 걸려온 연락을 받은 뒤, 아람의 기분은 줄곧 개운하지 못했다.



 [7월 25일]



 그저 한 날짜를 언급할 뿐인 통화 내용.

 그 말을 남긴 ‘진짜 상사’는 그대로 통화를 끊었다.


 ‘진짜 상사’로부터의 연락은 언제나 도청을 방지하기 위해 짧은 편이었다.

 길어봐야 5초 이내.

 이럴 바에는 문자로 하는 게 낫겠지만, 문자는 패킷 스니핑이 훨씬 쉬웠기에 전화가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했다.

 애초에 아람의 휴대폰은 연합에서 쓰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스크램블러가 설치되어 있었으니까.


 도청 문제는 그렇다 치고 통화 시간이 너무 짧으면 불필요한 의심을 받을 수 있었다.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아람은 전화를 받는 척, 편의점에 다녀올 수밖에 없었다.

 유동식 캔은 때마침 생각났기에 사왔을 뿐.


 어쨌든 지금의 ‘양아람’은 하율의 충실한 비서라는 설정이었으니까.


 잠든 하율의 창백한 낯을 슬쩍 훑은 아람은, 고양이 같은 걸음으로 응접실로 조용히 나왔다.

 어지간한 사무실보다도 고급스럽게 꾸며진 응접실.

 그녀는 살색의 라텍스 장갑을 낀 뒤, 장식장 밑의 빈 공간에 넣어둔 핸드백을 꺼냈다.


 그 안을 뒤지던 아람의 손에 잡힌 건 작은 향수병처럼 생긴 불투명한 앰플.

 행여나 부서질까 봐 조심스러운 손길로 아람은 앰플을 꺼냈다.

 그 안에서 살짝 찰랑이는 호박색 기름 같은 액체.

 VX.


 신경작용제 앰플을 들고 아람은 고민했다.

 언제쯤 쓰는 게 좋을까.



 상사가 지시한 데드라인은 7월 25일.

 오늘로부터 정확히 4주.

 아마 그 시점에 부산 정부가 본격적인 진공을 개시할 것이라고 아람은 생각했다.

 지금까지 내부 공작을 통해 철저하게 망가뜨린 하율, 마법소녀 아쿠아마린을 굳이 마무리할 이유는 그 정도밖에 없었으니까.


 서울연합, 그리고 마법소녀 아쿠아마린은 언제나 부산 정부에 있어서는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서울과 경기권의 잔여 인프라를 점거하고서도 정작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고 있었으니까.

 특히 평택과 이천에 온전히 남아있는 반도체 단지는, 연합에게는 그야말로 돼지 목에 진주목걸이.

 경남권의 인프라로는 포화에 달한 인구를 감당할 수 없었던 정부로서는 탐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런 부산 정부의 공작을 고유 마법인 미래 예측으로 번번히 무산시킨 것이 마법소녀 아쿠아마린.

 다 죽어가는 지금조차 부산 정부의 침공 계획을 거의 완벽하게 예언했으니 국정원에서 이를 갈 법도 했다.

 미래는 볼 수 있어도 사람 마음 속은 볼 수 없었는지, 결국은 이렇게 반쯤 고려장 당한 신세긴 했지만.



 아람은 하율이 누워 있는 병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샌들을 신고 있었음에도 발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앉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잠든 하율.

 어깨 밑으로 내려온 연한 하늘색 곱슬머리는 그 동안 전혀 관리하지 못해서인지 서로 엉켜 있었다.

 얕은 숨이 들락날락하는 입술은 가뭄철 논두렁 마냥 쩍쩍 갈라진 상태.

 살이 홀쭉하니 빠져서, 환자복 옷깃 사이로 드러난 쇄골이 가냘프게 도드라졌다.

 그 와중에 사지만 기괴할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코에 걸려 있는 고유량 산소 캐뉼라.

 얇은 아코디언처럼 생긴 관이 무선 청소기처럼 생긴 본체에 연결되어 있는 구조였다.

 한 달 동안 그 기계를 계속 봐온 아람은, 어디에 앰플 안의 내용물을 넣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본체 밑의 가습용 물통.

 그러면 에어로졸화된 VX는 아쿠아마린의 호흡기로 빨려 들어가, 5분 안에 마법소녀의 심장을 멈추게 할 터.


 하율이 완전히 잠들었는지 다시 확인한 아람은 산소공급기의 본체 옆으로 다가갔다.

 가습용 물통을 향해 다가가는 장갑 낀 손.


 그 손이 잠시 멈칫했다.



 ‘꼭 지금, 내가 해야 하나…?’



 어차피 상부, 즉 국정원이 지정한 기한은 지금으로부터 4주 후.

 그때까지 아쿠아마린이 돌연사 하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었다.


 지금 아쿠아마린의 심장은 폐기 직전의 고물 엔진이나 마찬가지.

 1년 넘게 그녀를 치료하던 주치의조차 이식 말고는 답이 없다고 포기한 상태였다.

 오히려 지금 신속한 죽음을 안겨주는 편이 아쿠아마린에게는 구원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아쿠아마린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예언의 힘을 한 번이라도 더 쓰는 순간 백 퍼센트 심장마비로 급사할 터.

 부산 정부가 아쿠아마린을 제거하려는 게 바로 그 예언의 힘 때문이니, 굳이 자신의 손을 더럽힐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한 아람은 다시 한 번 밑에서 하율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실제 나이는 자신보다 많다지만, 겉보기는 부산에 있을 자신의 막내 동생보다도 어린 모습.


 이런 여자아이를 직접 죽인다는 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국정원의 흑색 요원이라고 해도.


 더군다나 두 달이나 같이 지내다 보면, 싫어도 약간의 정이 들 수밖에 없다.

 때때로 술에 취해 잠들 때마다 소식 없는 부모님과 동생을 찾으며 우는 걸 우연히 목격할 정도로는.

 겉으로는 무시하면서도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자신을 챙겨주려고 노력했다는 걸 깨닫을 정도로는.

 밉살맞게 튕겨내는 태도가 사실 정치적 암투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패였다는 사실을 알 정도로는.



 잠시 앰플 뚜껑을 잡은 채 고민하던 아람은, 굳은 표정 그대로 앰플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리고 라텍스 장갑을 벗은 뒤, 따뜻한 손으로 하율의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 내렸다.



 ‘…꼭 지금, 내가 할 필요는 없지. 응.’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부를지 아람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지금, 그녀의 마음은 조금은 편안해졌다.

 아주 조금.





 

 *

 





 용산의 지하상가를 메우던 수많은 난민, 호객꾼, 장사치들.

 지금은 밀물에 게 눈 감추듯 사라진 그들의 빈 흔적은 스산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어두침침한 지하 복도를 비추는 노란 백열등 밑에서 눈보라처럼 날아다니는 먼지.

 그 사이를 메우듯 딱딱한 군홧발소리가 드문드문 울렸다.

 방독면을 쓴 채 순찰을 도는 자경단원들은 치안을 지킨다기보다는 사냥감을 물색하는 듯, 빈 가게 곳곳을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징집할 난민을 찾아 헤매는 중이었다.

 어제부로 연합 전체에 발령된 모병령.

 말이 좋아 모병령이었지, 사실상 징집령이나 마찬가지였다.

 위기에 처한 연합에 봉사할 ‘자원자’를 반드시 일정 수 모으도록 각지의 자경단에 할당하였으니까.

 그러니 자경단원들이 머릿수를 채울 난민을 찾아 헤매는 것도 당연지사.



 그런 용산 지하상가에서 스테인리스 문을 열고 나온 민우는, 기침을 몇 번 했다.

 의료기상 안이나 밖이나 공기가 탁한 건 매한가지였으나 지하상가의 복도를 떠도는 먼지는 밀도부터 달랐다.

 아마 허술하게나마 돌아가던 공조가 완전히 멈춘 탓일 터.


 턱까지 내린 마스크를 다시 끌어올린 민우.

 그의 뒤를 따라, 파란 위생 마스크를 쓴 정인이 말없이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그녀는 긴 팔 후드티와 다리를 다 가리는 펑퍼짐한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거기에 뒤로 묶은 꽁지머리와 캡 모자까지.

 지하라 선선하다지만 여름에 하기에는 꽤나 더워 보이는 차림.

 실제로 후덥지근한지 목덜미를 타고 땀방울이 송글송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모자를 더 눌러쓰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민우를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안에 있는 누군가를 피하고 싶은 듯.


 곧 뒤에서 따라 나온, 곰처럼 큰 덩치의 의료기상이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시다시피 용산만이 아니라 온 서울에다 경기권도 사정이 비슷합니다. 괜찮은 놈을 맞춰드리고 싶어도 부품이 없어요. 불만족스럽겠지만 두 분 다 그걸로 참으시는 수밖에 없습니다.”



 생긴 것과는 썩 어울리지 않게 정중한 태도였다.

 민우는 어느 새 반대편의 벽까지 도망쳐서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정인을 쳐다봤다.


 그녀의 품 안에 안겨 있는, 복잡한 구조의 철회색 합금 의수.

 오른팔을 잃고 퇴역한 뒤 2년 넘게 함께 해온 버팀목.

 더 이상 수리할 부품이 수입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늘 완전히 사망 판정을 받은 놈이었다.

 전쟁이 코앞까지 다가온 현상황을 생각하면, 최소한 반 년은 수리할 엄두도 못 낼 터.


 민우는 오른쪽 어깨 앞을 더듬어 멜빵에 연결된 케이블을 세게 잡아당겼다.

 핑 하는 소리와 함께 팽팽하게 당겨지는 케이블.

 그와 동시에 실리콘으로 된 오른손이 살짝 벌어지며 펴졌다.


 케이블을 놓은 민우는 팔꿈치 안쪽의 스위치를 누른 뒤, 잠금이 풀린 팔꿈치 관절을 왼손으로 잡아 굽혔다 폈다.

 이번에 새로 맞춘 기능성 의수는 잘 작동하는 모양이었다.

 다만 센서식이 아니라서 일일이 수동으로 조작해야 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지금은 그거라도 감지덕지.

 거동이 어려운 그녀를 보살피려면 최소한의 기능은 있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중요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멜빵을 한 번 더 당겨 고정시킨 민우는 의료기상에게 물었다.



 “이제 장사 접는다고 그랬지요?”



 의료기상은 한숨을 한 번 쉬더니, 텅 빈 지하상가 복도를 손으로 훑으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꼴 좀 보세요. 연합이랍시고 완장질이나 하면서 으스대더니 이게 뭡니까. 뭐 정부군에게 패배하면 여기 사람들은 평생 전남 해안가에서 강제노역행이니 뭐니 떠들어대지 않습니까. 생사람 잡아가서는 총 한 자루 주고 탱크 앞에 밀어 넣는 자기네들은 뭐 다른 줄 알고. 퉷.”



 원래라면 자경단에게 린치를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

 하지만 주변에 당장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는 데다가, 민우는 굳이 그 발언을 책잡을 이유가 없었다.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



 ‘누님을 저렇게 무너지게 만든 개새끼들.’



 처음에야 경황이 없어서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다.

 하지만 며칠 간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이상한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난민 몇 명이 모여서는 굳이 그녀를 납치한 점.

 마법소녀라는 걸 모르고 했으면 멍청한 짓이다.

 그냥 여자를 납치해봐야 단 한 푼의 이득도 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알고 했다면 미친 짓이었다.

 보통의 마법소녀에게 어중이떠중이 난민 따위가 덤볐다면 순식간에 제압당할 게 뻔했으니.


 그럼에도 납치를 시도한 건, 사전에 그녀가 ‘보통의 마법소녀’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경비원이 그녀가 라피스라줄리라는 걸 알아봤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마법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는 건 연합에서는 민우, 그리고 고위 간부들 정도나 아는 사실.


 즉 납치를 실행한 난민들은 그저 괴뢰.

 누군가가 놈들을 사주한 것이다.

 그녀가 충분히 납치할 만하다는 정보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그리고 납치 사실을 보고조차 하지 않고 허겁지겁 달려나갔음에도, 최지훈의 부하가 그걸 알고 있었던 점.

 그 뿐만이 아니라 놈들의 위치를 놀랍도록 정확히 알고 있었던 점.

 고속도로 순찰대가 그렇게나 타이밍 좋게 나타난 이유.

 라피스라줄리를 직접 본 적도 없을 순찰대원들이 한눈에 그녀를 알아보고 ‘목표’라고 지칭한 이유.


 결론은 단순했다.

 그녀에 대한 납치 계획을, 연합 대공부는 알고서도 방치했다.


 아니면, 납치범들의 배후가 바로 놈들이었든지.



 민우가 입을 다물고 있자, 의료기상은 말실수를 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2년 가까이 알고 지낸 단골이었지만 지금의 연합에서는 배신과 밀고가 일상.

 사람이 개처럼 죽어갈 게 뻔한 전쟁에, 평소 싫어하던 놈을 밀어 넣기 위해 없는 말도 지어내는 판이다.

 눈 앞의 이 외팔이 사내가 자신을 자경단에 넘기지 말라는 보장은 없었다.



 “밀고 같은 건 안 할 테니 걱정 마십쇼. 그 동안 신세 많이 졌고, 어딜 가시든 장사 번창하길 빕니다.”



 돌아선 민우의 등을 불안한 눈으로 흘기던 의료기상은 문을 조심스레 닫았다.

 스테인리스 문 뒤로 큰 덩치가 사라지며, 자물쇠가 딸깍 잠기는 소리가 났다.


 민우는 또 하나의 관계가 끊어지는 그 단절음을 무시하고 정인에게 다가갔다.



 “이, 이야기… 끝났어?”



 한껏 위축된 목소리를 내며, 정인은 캡 모자의 챙을 밑으로 잡아당겼다.

 덩달아 고개도 숙여지며 밑으로 내리 깔리는 시선.

 민우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정인의 길고 두꺼운 바짓단 밑으로 고개를 내민 밋밋한 질감의 두 발.

 왼쪽은 SACH(*발목고정 발꿈치쿠션) 의족, 오른쪽은 무관절 단축 의족이었다.


 둘 다 관절 운동 기능은 없는, 반쯤은 미관용 의족.

 인플레이션이 절찬리에 진행 중이었기에 이런 간단한 의족 두 개를 맞추는 것조차 칠백만 원이 들었다.

 그의 기능성 의수는 거의 천만원 정도.


 이전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비싼 가격.

 그녀가 방송으로 받은 지원금의 절반이나 쓴 셈이었다.

 심지어 의료기상이 이제 연합을 뜨면 더 이상 AS조차 불가능했다.

 보장구를 파는 다른 가게도 찾아보면 있겠지만, 남이 판 의지를 수리해줄 마음씨 좋은 자들은 없었으니까.


 도주에 필요한 물자를 마련하려면, 남은 돈이 충분할 지 어떨지.

 차량도 보강해야 하고, 총기류나 환금 가능한 물건도 다시 구해야 하고.

 생활용 물자들, 방독 필터, 보존식과 식수 등등…



 민우는 닫힌 스테인리스 문을 돌아봤다.

 안에서 다루는 물건은 비쌌지만, 문은 옛날에 본 동네 철물점을 연상케 하는 허술한 것.

 전력을 다해 걷어차면 충분히 박살내고도 남을 듯했다.


 덩치만 크고 움직임은 둔하던 의료기상도, 마찬가지.


 전재산은 아무리 그래도 양심에 찔리니, 이 허술한 의지(義肢)에 지불한 돈만 다시 뺏아온다면.

 아니, 절반 정도만.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무심코 한 걸음 내딛은 민우는, 자신의 손목을 건드리는 손길을 느꼈다.



 “저기… 미, 민우야. 여기 있기 싫어. 그만 가자… 집에…”



 조심스럽게 뻗은 두 손가락.

 그것조차도 무엇이 그리 두려운지, 정인은 뻗은 오른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차게 식은 땀을 비 내리듯 흘리며. 반대쪽 손으로는 망가진 의수를 꼭 끌어안은 채.

 그게 자신을 지켜주는 부적이라도 되는 것 마냥.


 민우는 가늘게 좁힌 눈매를 바로 풀고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죠, 누님. 휠체어 밀어드리겠-”



 그러면서 휠체어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는 민우.

 정인이 휠체어에 타고 있으면 언제나 뒤에서 밀었기에, 저도 모르게 나온 습관이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은 정인은, 바퀴벌레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기겁하며 몸을 움츠렸다.



 “아냐, 아냐! 괜찮아! 건드리지 마! 내가 할 게, 내가…”



 처음에는 비명을 지르는 듯한, 그러나 뒤로 갈수록 다시 기어들어가는 외침.

 조용하던 지하통로에 메아리 치듯 ‘내가’라는 말이 울렸다.


 왼팔을 뻗은 자세 그대로 잠시 굳었던 민우는, 곧바로 정신을 차리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누님. 힘들면 언제든지 말씀하십쇼.”

 “으, 응. 미안… 건드리지 말라고 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위생 마스크 위로 드러난 정인의 파란 눈동자는 민우를 쳐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외면하듯 반대쪽으로 한껏 돌린 상태.


 민우는 다시 한 번 속이 뒤틀리는 분노를 느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납치범과 연합에 대한 울분이었다.

 남자만 보면 두려움에 떨게 만든 놈들에 대한.


 애써 그 독을 목구멍 밑으로 넘긴 민우는, 조금 전보다는 약간 뻣뻣한 미소를 지었다.



 “뭘 미안하실 것 까지야. 한 손으로는 몰기 힘드실 테니, 의수는 저한테 주시죠, 누님.”
 “…여기.”



 정인에게서 의수를 넘겨받은 민우는, 휠체어를 모는 그녀의 옆을 걸었다.

 뒤에서 따라가면 그 발소리만으로도 불안해했기 때문이다.

 조금 전에는 습관을 못 버려서 실수를 했으나 또 다시 그럴 순 없었다.


 휠체어를 몰면서 정인은 쉴 새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옆에서 걷는 민우의 큰 덩치가 시야에 들어오면 잠시 몸을 떨더니, 한동안 정면으로 시선을 고정하곤 했다.

 노골적으로 못 본 척이었다.


 썩 길지만은 않은 지하상가의 복도를 나아가며 그러기를 벌써 다섯 번.

 민우는 그때마다 그녀가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생각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한편 정인 역시 답답하기는 매일반이었다.


 자신이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소심해졌는지.

 지금 왜 남자를, 심지어 민우를 이렇게 두려워하는지, 스스로도 몰랐기 때문이다.



 “저기, 미, 민우야.”
 “네?”

 “…그, 언제쯤, 그날 무슨 일이 이, 있었는지 알려줄 건데?”



 규칙적으로 울리던 발걸음이 뚝 멎었다.

 정인 또한 휠체어를 세운 뒤 후드티 앞섶을 꼭 부여잡았다.

 민우의 대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긴장에 타 들어가는 입술.

 두어 번 입을 달싹이던 정인은, 마스크 밑으로 바짝 메마른 한숨을 토해낸 뒤 고저없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벌써 여덟 번째야. 이거 물어보는 거. 왜 대답을 안 해줘? 민우 너, 넌 알고 있을 거 아냐. 내가 왜 이러는지.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말 좀 해봐. 응? 민우야. 제발. 지난 주 금요일… 금요일, 맞지? 도대체 무슨 일이-”

 “…죄송합니다, 누님.”



 정인은 저도 모르게 민우를 휙 돌아봤다.

 어둑한 백열등이 흔들거리는 아래, 장승처럼 우뚝 서 있는 민우.

 지금의 자신보다 머리 한 개 반은 큰 키와 다부진 어깨, 반팔 셔츠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근육.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옛적에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


 쿵쾅거리기 시작한 가슴과 등골을 흘러내리는 차가운 식은땀이 정인에게 강요했다.

 보지 말라고.

 듣지 말라고.

 이유는 말할 수 없지만, 저 모습을 한 사람들은 널 해칠 것이라고.

 입에 담을 수도 없는 끔찍한 짓을 저지를 자들이라고.



 정인은 입술을 깨문 채 달달 떨면서도 이번에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대신 민우가 고개를 슬쩍 옆으로 틀었다.


 그의 반응에 정인은 순간 가슴을 저미는 듯한 아픔을 느끼고 헛숨을 쉬었다.

 불 같은 분노 또한.

 순간 두려움을 잊은 정인은 애원하는 것처럼 소리쳤다.



 “그냥 말해주면 되잖아... 그러지 마. 눈 돌리지 말라고. 무시하지 마, 야, 조민우!”



 민우의 안방 침대에서 정신을 차린 것도 이미 나흘.

 분명히 자신이 까마득하니 잊어버린 중요한 일이 있다는 건 확실했다.

 민우와 어떤 약속을 했다는 것도.

 자신에게 잘은 모르겠지만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다는 것도.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같은 변화가 벌어질 리 없었다.


 마법소녀가 된 지 이미 6년이라지만, 그래도 20년 이상을 남성으로 살아왔다.

 그런 자신이 느닷없이 동거까지 하던 민우를 무서워하게 되거나, 남자만 보면 겁에 질리게 되었다는, 말도 안되는 상황.


 하지만 6월 25일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떠올리려고 할 때마다 그저 심장만 욱신거릴 뿐.

 안개 낀 기억 속에서는 그날만 지우개로 지워낸 듯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민우에게 지금처럼 물어본다 한들,



 “죄송합니다, 누님…”



 모종의 회한, 그리고 죄책감이 묻어나는 대답만 돌아올 뿐.


 주먹을 꾹 쥔 정인은 고개를 돌렸다.

 저러는 민우를 더 이상 직시하기가 어려웠기에.

 게다가 말 한마디 한마디를 꺼낼 때마다 온몸을 좀먹는 소름.

 그걸 감수하면서까지 이렇게 헛도는 대화를 계속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민우를 내버려둔 채 혼자 휠체어를 앞으로 몰았다.

 그 뒤로 발자국 소리가 큰 폭으로 뚜벅뚜벅 뒤따랐다.

 아무리 정인이 열심히 바퀴를 굴려봐야, 가까워지지도 멀어지지도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민우의 걸음.

 하필 지금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면, 있다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느꼈을 민우의 존재감.


 지금의 정인에게는, 그게 몹시 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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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