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전편링크 (새탭 열기 링크) 


1편    2편    3편    4편    5편    6편    7편    8편    9편

10편  11편   12편  13편  14편   15편   16편  17편  18편

19편  20편


 


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1편 입니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담배와 커피가 엄청나게 늘었습니다.

곧 건강검진 내시경도 받아봐야 할 거 같은데... 뭐가 나올 지 두렵읍니다...


아무튼 큰 사건 하나에 슬슬 또 시동을 거는 파트입니다.

정말 언제 완결이 날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전체에서 2/3 정도? 온 거 같기도 하고?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



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1.



 

 

 차광용으로 쓴 챙 넓은 모자는 땡볕을 가리기엔 나쁘지 않았다.

 문제는 군데군데 갈라진 콘크리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찌는 듯한 열기.

 휠체어 바닥까지 뜨끈하게 데우는 열기에 정인은 혀를 내두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덥다아... 헤흐.”



 그녀는 무심코 축축한 후드티와 속의 와이셔츠 앞섶을 잡고 펄럭거렸다.

 가슴팍을 타고 흐르던 끈적한 땀방울이 바깥 공기에 닿자, 정인은 그나마 조금 시원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봐야 다시 뜨거운 공기가 그 자리를 채우며 금세 더워졌지만.


 정인은 눈살을 찡그린 채 주변을 살며시 둘러봤다.

 용산에서 돌아온 뒤 일주일만에 밖에 나온 터라, 평소보다 좀 멀리 나온 산책.

 다리를 넘어 도착한 경의선숲길은 이름이 무색하게 허허벌판이었다.


 성산로 도로변의 상록수는 밑동까지 난잡하게 벌목된 상태.

 알뜰살뜰하니 뜯겨 나간 데이지 꽃은 누렇게 변색된 꽃술만 덜렁거리고 있었다.

 데이지 뿐만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 풀은 사람들이 다 뜯어갔는지 온 사방이 가지만 앙상한 덤불 투성이.

 그나마 잔디만 무성한 바위 난간이 있었지만 그늘을 만들기엔 터무니없이 낮은 높이였다.


 부산에서 건설현장을 전전할 때는 그늘이라도 있었지, 지금은 잠시 햇볕을 피할 곳조차 없는 상황.


 홍제천에 흐드러지게 핀 연분홍 코스모스와 하늘색 산수국.

 그 은근히 화려한 색감에 무심코 이끌려, 경의선숲길도 비슷한 풍경이리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똑같은 홍제천 냇가라도 연남동 쪽은 풀 한 포기 없이 잡초만 그득했을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인은 가슴 안쪽으로 손부채질을 하다가,



 “그러게 날도 더운데 좀 얇게 입지 그러셨습니까, 누님.”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번개같이 옷에서 손을 뗐다.

 화들짝 놀란 것이, 동행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정인에게서 2m 정도 거리를 두고 걷던 민우.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땀범벅이 되면서까지 굳이 그렇게 입고 나오셔서는… 후드티에 긴 바지에. 잘못하면 열사병 걸립니다, 누님. 하다못해 반팔이라도-”



 정인은 마치 그의 시선에서 몸을 가리려는 듯,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은 채 주눅 든 목소리로 어물거렸다.



 “…내가 어, 어떻게 입든, 내 맘이지.”



 그 뿐만이 아니라 시선도 민우의 반대방향으로 돌린 정인.

 한 마디 대답을 꺼내는 것조차 용기를 짜낸 결과인 듯, 꼭 쥔 두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민우는 겁먹은 다람쥐 같은 그 모습에 익숙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미 납치 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이나 지난 시점.

 정인의 남성공포증은 도무지 나을 줄을 몰랐다.


 집 안에 있을 때도 생활공간을 거의 분리하고 사는 현 상황.

 꼭 필요한 대화가 아니면 엄두도 못 내는 데다가 식사도 따로따로, 쉬는 것도 따로따로.

 그나마 함께 하던 집안일은 이제 민우 혼자서 다 처리하고 있었다.

 같이 거실에 있는 것만으로도 눈치를 보며 달달 떠는 그녀에게 뭘 시킬 순 없었으니까.

 밖에 혼자 나가는 건 위험하니 자신이 따라 나오긴 했으나, 말이라도 한 마디 걸면 곧바로 겁을 집어먹질 않나.


 안 그런 척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정인에게, 민우는 천천히 다가갔다.

 잔뜩 긴장한 기색의 정인은 몸을 천천히 반대쪽으로 뺐다.



 “왜, 왜 그래.”



 민우는 선글라스 밑으로 주변을 살피며 대답했다.



 “슬슬 돌아가죠, 누님. 여기 오래 있어봐야 별로 볼 것도 없고… 걱정되기도 하고요.”
 “뭐가, 거, 걱정되는데.”


 “연남동은 신촌하고 성산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집 근처와는 다르게, 그, 난ㅁ… 사람들이 종종 돌아다닙니다.”

 “히끅.”



 민우는 재빨리 말을 바꿨지만 이미 늦은 모양이었다.

 ‘난민’이라는 말을 들은 정인이 갑자기 딸꾹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을 더 히끅거리던 정인은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자신의 명치를 손바닥으로 몇 번 두드렸다.

 간신히 딸꾹질을 멈춘 정인의 낯은 희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오한으로 잘게 떨리는 자신의 몸을 감싸 안으며, 답답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을 지었다.

 며칠 가고 끝날 줄 알았던 이 의문의 증상들.

 민우 앞에서 도무지 맥을 못 추고 벌벌 떤다든지, 밴 뒷좌석은 쳐다보지도 못한다든지.

 지금처럼 난민이라는 말만 나와도 기겁한다든지.

 자신이 그러는 이유도 해결 방법도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6월 25일에 있었던 사건.

 그게 난민하고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것 정도는 추론 정도는 가능했다.

 다만 그 이상을 떠올리려고 하면 머릿속에서 기억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이곤 했다.



 ‘민우에게 뭔가를 고백하려고 했지만, 그, 어, 난민 떼거리가 오니 민우가 도망갔다? 잠깐, 그건 아니지. 민우가 날 버려 두고 도망갈 리가. 밴을 타고 왔나? 아니면 중앙병원에서… 거기 난민들이 많았지.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가…?’



 기억력의 저하.

 이것도 정인을 고민케 하는 문제 중 하나였다. 

 

 전에도 마법소녀가 되기 전 모습을 떠올리지 못한 적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었다.

 말을 하려고 할 때 단어가 잘 안 떠오르는 건 약과.

 전쟁 때 있었던 일, 어릴 때 어디서 자랐는지,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

 그런 사소하면서도 중요한 것들까지 제대로 기억이 안 나는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력 사용법은 잊지 않았지만, 그 뿐.


 어쩌면 요 며칠 제대로 먹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었다.

 식사를 민우와 같이 하는 게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최근 따로 먹기 시작하며 밥이 통 넘어가지 않았으니까.


 부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소식했기에 딱히 배가 고프다는 느낌은 없었다.

 하지만 어쨌든 당이 모자라면 뇌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다.


 그런 생각에 잠긴 정인의 귀에 민우의 재촉하는 듯한 말이 파고들었다.



 “누님?”

 “딸꾹. 아, 또… 히끅.”



 기껏 멈춘 딸꾹질이 놀란 나머지 다시 나오기 시작했다.

 정인은 밉살스럽다는 듯 민우를 잠시 째려보다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러는 것만으로도 뱃속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다못해 민우가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불기라도 하면 속이나 시원하겠건만.

 그날 이후로 몇 번을 물어도 민우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죄송합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모르는 게 낫습니다, 누님.



 그런 문답이 스무 번을 넘어간 이후로 정인은 더 이상 캐묻는 걸 포기했다.

 다만 얄밉고 괘씸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민우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알게 되면 민우가 곤란해지는 비밀이라면 정인은 굳이 파헤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빈정상한 이유는, 민우가 꼭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아서였다.



 ‘넌 알아서는 안 된다.’

 ‘알면 네 손해다.’



 정인은 눈을 꾹 감고 볼이 빵빵해지도록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는 배에 힘을 주고 꾹 참았다.

 딸꾹질을 멈추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짜증스럽게 쿵쿵거리는 심장도 압력에 눌려 가라앉기를 바랐으니까.


 선글라스 밑에 가려진 민우의 시선이 잠시 그러는 그녀를 스쳤다가 금방 떨어졌다.

 행여나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또 놀라기라도 할까 봐서.



 “푸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정인은 부글거리는 속을 애써 달랬다.

 민우가 다 이유가 있으니 이러겠거니, 그런 변명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큰 효과는 없었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 기분은 조금 나았다.


 민우는 그런 정인에게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건넸다.



 “하다못해 남가좌동에서 돌아다니는 편이 좀 더 안전-“

 “아, 알았어. 알았다고. 가면 되잖아, 가면.”



 신경질적으로 대꾸한 뒤 휠체어를 낑낑거리며 돌리는 정인.

 의족이 바닥에 간간히 부딪히며 턱턱 거리는 소리가 났다.


 민우는 그녀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곧 앞서 가는 휠체어를 터덜터덜 뒤따라갔다.

 통행인도 풍경을 즐기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공원.

 약간 불규칙한 발소리와, 휠체어 바퀴가 간간히 덜컹거리는 소리가 뒤섞여 묘한 불협화음을 자아냈다.



 둘은 벌써부터 노랗게 변색되기 시작한 잔디밭과 말라붙은 개울가를 지나쳐 공원을 벗어났다.

 대화 한 마디 없이.

 정인은 민우에게 말을 걸 생각이 없었고, 민우는 정인에게 말을 걸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흰 자국만 남아있는 횡단보도를 지나쳐 홍제천로로 진입하는 오르막길을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

 다만 민우는 야트막한 경사를 어려움없이 올라갔지만, 정인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채 용을 써봐도 정인은 도무지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근력으로는 오르막길을 혼자 오르는 건 어려운 모양.


 민우는 주변을 잠시 두리번거리며 갈등했다.

 조금 전부터 묘한 기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을 끝낸 그는 의수의 손을 조작하는 레버를 당기며 정인에게 다가갔다.



 그때 정인은 마법이라도 쓸까 고민하던 차였다.

 마력을 부분적으로나마 다시 다룰 수 있게 된 게 며칠 전.

 마법으로 근력을 늘릴 순 없었지만, 뒤로 고압수를 쏴서 그 반동으로 휠체어를 미는 정도는 가능했다.

 마력 낭비가 심하겠지만 지금처럼 궁상맞은 꼴을 보이는 것보다야 나을 터.


 그런 고민을 하던 정인은, 갑자기 몸이 앞으로 쑥 나가는 걸 느끼고 화들짝 놀랐다.


 제멋대로 구르기 시작한 바퀴 손잡이.

 손을 재빨리 뗀 그녀는 뒤를 돌아보고는 민우에게 으르렁거렸다.



 “…너 뭐하냐 지금.”
 “휠체어 밀어드리겠습니다. 혼자선 힘드시잖아요.”



 민우의 시선을 피한 정인은 떨리기 시작한 손을 가랑이 사이로 쑥 숨겼다.

 그러면서도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공격적인 말투였다.

 자신이 겁먹었다는 걸 숨기려는 듯.



 “누가 ㄷ, 도와 달래?”
 “무리하다가 근육통이라도 오면 어쩌시려고요.”


 “너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까짓 거…”

 “그런 말씀하지 마십쇼, 누님…”


 “너, 너, 으… 나 혼자 올라, 올라갈 수 있-“

 “오르막길은 여기 뿐이니 딱 여기만 밀겠습니다. 누님. 부탁합니다.”


 “…이번만… 이번만이야.”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꺾인 정인의, 어딘가 서글픈 기색이 맴도는 대답.

 민우는 한숨을 삼키며 휠체어를 밀기 시작했다.


 돌무더기와 잡초 사이로 난 경사진 소로를 구르는 휠체어.

 자갈이 드문드문 바퀴에 걸리며 튀어나갔다.

 간간히 바람이라도 부는 건지, 들고양이라도 다니는 건지.

 먼 곳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 번씩 들릴 때마다 민우는 선글라스 밑에서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 와중, 정인은 두 손을 허벅지 사이에 모은 채 어깨를 잔뜩 오므리고 있었다.

 참담한 기분을 곱씹으며.



 두 다리를 잃었을 때 이미 인생의 밑바닥에 처박혔다고 생각했었다.

 외다리로 2년 넘게 생활한 정인이었기에 알 수 있었다.

 남은 한쪽 다리마저 없으면 앞으로 정상인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걸.

 그나마 사회 구조가 남아있는 부산조차 장애인을 위한 자리는 없었으니까.

 하물며 사회보장도 복지도 없는 연합에서야 두말할 나위조차 없을 터.


 그때 반쯤 자포자기한 자신을 끌어 올려줬던 게 바로 민우.

 서울연합에 마법소녀로써의 망명을 주선해주고, 온갖 뒷바라지를 다 해주고.

 덕분에 간신히 심연에서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열흘 전, 민우가 결코 알려주려 하지 않는 그 사건.

 그게 모든 걸 망쳤다.


 이제는 그와 만족스럽게 말 한 마디, 시선 한 줄기 나누지 못하는 신세.

 민우가 곁에 있으면 편안함 대신 불안감을, 목소리가 들리면 익숙함 대신 두려움만을 느끼게 되었다.



 ‘기억도 안 나는 그 따위 일 때문에.’



 휠체어가 한 차례 덜컹거리며 정인의 몸이 앞뒤로 흔들렸다.

 오르막길의 끝에 도착한 것이다.



 “다 올라왔습니다, 누님.”



 민우의 말을 듣고 정인은 옆을 슬쩍 쳐다봤다.

 반쯤 흙탕물이나 다름없는 하천.

 그 위로 줄줄이 늘어선 교각과 하천 둔치를 따라 길게 뻗은 잡초.

 반대쪽에서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색채는 이쪽에서는 한 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정인은 하천 건너편의 꽃밭을 멀거니 바라봤다.

 산들바람에 흔들거리는 유채색의 결을.

 휠체어에서 거리를 벌린 민우는 약간 초조한 기색이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그러기를 몇 분.

 정인은 말없이 고개를 돌리더니 느릿하게 바퀴 손잡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민우가 말없이 쫓아갔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그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말을 걸 만한 분위기는 아니라는 걸 파악할 눈치 정도는 있었다.


 민우의 걱정과는 다르게, 건너온 다리를 넘어갈 때까지 누군가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남가좌동 쪽으로 다시 건너온 둘은 둔치의 산책로를 따라 한동안 이동했다.

 정확히는, 정처없이 돌아다니는 정인을 민우가 졸졸 따라다니는 형국이었다.


 민우는 시종일관 옆의 도로와 덤불을 힐긋거리며 생각했다.

 집에 갈 때까지 누구와도 맞닥뜨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어차피 마주칠 인간이라 해봐야 난민들 정도.

 순찰대나 자경단은 이런 으슥한 곳까지 순회하지는 않는다.


 정인은 냇가에서 흘러오는 산수국 향기를 맡으며 생각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우울해하기만 할 순 없다고.


 분명 지금의 자신은 영혼까지 병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결국 마음의 상처는 세월이 약이니,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좋아질 터.

 처음에는 어색하기만 했던 휠체어 생활도 이제는 나름 익숙해졌다.

 마찬가지로 지금 민우에게 느끼는 불합리한 두려움도 차차 없어지리라.


 그녀는 조금 전 민우에게 오기를 부리던 자신을 떠올렸다.

 마음이 좀 진정된 지금, 정인은 왜 그랬는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어디 갈 때 민우가 휠체어 밀어준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안 그래도 조금 전부터 민우는 어딘가 안절부절못하는 기미였다.

 자신의 태도에 썩 상처받은 것 같진 않았지만, 혹시나 모르는 노릇.

 원래 민우는 부정적인 감정은 티를 잘 안 내고 묵혀 놓곤 했으니까.


 조심스럽게 휠체어의 속도를 늦춘 정인은, 뒤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민우-“



 그리고 코앞까지 다가온 민우를 보고 순간 움찔했다.



 “누님, 쉿.”
 “어, 어, 으.”



 더듬거리는 정인을 몸으로 가리듯, 민우는 앞으로 나섰다.


 조금 전까지 그가 줄곧 경계하던 덤불.

 그 사이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점점 다가오더니, 곧 네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줄근한 차림의 사십 대 남녀와 오십 대 중년 남자, 늙은이 한 명.

 중년 사내가 짊어진 황갈색 마대자루는 잡동사니로 불룩했다.

 노인은 쇠비름과 호박꽃으로 반쯤 채운 바구니를 들고, 당황한 듯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팔부바지 차림의 여자와 땅딸막한 사십 대 남자도 마찬가지.


 남가좌동 쪽으로 몰래 폐품이나 식용 풀을 모으러 온 듯했다.

 연희동이나 연남동 방면은 이런 보잘것없는 전리품도 경쟁이 치열했으니 블루오션을 노린 모양이었다.



 “…”



 넷 다 이곳에서 누군가를 마주칠 줄 몰랐다는 듯 당황한 눈빛이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척 보기에도 자신들처럼 남루한 행색도 아니고, 쓸 만한 걸 뒤지러 온 사람도 아닌 듯했다.

 즉 비슷한 처지의 난민은 아니라는 뜻.


 그들은 슬금슬금 게걸음질을 쳤다.

 그들 입장에서, 연합 관계자란 배급 이외의 일로는 얽히지 않는 게 최선인 자들이었으니까.


 민우는 노골적으로 그들을 경계하며, 휠체어를 의수로 툭툭 쳤다.

 혹시나 그녀가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원래라면 서로 못 본 척 지나치면 그만일 터.

 다만 그러기에는, 하필 휠체어가 산책로 한가운데 멈춘 게 문제였다.


 저들이 산책로변으로 붙어서 지나간다 해도 정인에게서는 5m도 안 되는 거리.

 갑자기 돌변하면 빠른 대처가 어려웠다.

 그러니 일단 그녀와 저들 간의 거리를 벌려 놓는 게 좋겠다는 게 민우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몇 번을 두드려도 휠체어는 한 뼘도 움직이지 않았다.

 뒤를 슬쩍 돌아본 민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꽉 깨물었다.



 “히끅, 힉, 힉.”



 정인은 두 팔로 눈 앞을 가린 채 휠체어 위에 웅크려 앉아 있었다.

 턱을 후들거리면서 비명이 되다 만 소리와 딸꾹질만 흘리면서.

 완전히 공포에 질린 듯했다.


 스스로 움직이길 기대하긴 어려운 모양.

 아무리 생각해도 그 원인은 눈 앞의 난민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민우는 왼손을 바지 뒤춤으로 뻗었다.

 그의 손을 따라 나온 건, 미리 챙겨온 정글도.

 살기 뻗친 그 흉흉한 몸짓과 날붙이를 보고 난민 가족이 허둥지둥 뒤로 물러났다.

 충분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민우는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기 시작한 손바닥을 애써 무시하고, 그들 쪽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큰 민우.

 그런 그가 다가오자 네 남녀는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손에 든 마대자루와 낫, 조잡한 소형 삽, 바구니, 서로의 얼굴을 오가는 시선.

 눈 앞의 덩치 큰 사내에게 덤빌 생각도 없었지만, 덤비려고 해도 수단마저 없었다.


 선글라스 밑으로 민우의 시선이 살기등등하게 쏘아졌다.


 다시 좁혀지는 한 걸음.

 난민 가족은 뒤로 두 걸음 더 물러났다.

 그들이 나왔던 덤불이 몸에 눌리며 나는 와사삭하는 소리.

 건들거리는 정글도의 첨단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난민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민우가 앞으로 불쑥 몸을 내밀자,



 “히익.”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퀴벌레 흩어지듯 덤불 사이로 다시 도망가는 난민들.


 휠체어 옆으로 돌아와서 주변을 경계하던 민우는, 그들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확신하고 나서야 숨을 크게 내쉬었다.



 “후우우…”



 대부분의 난민들은 목숨을 건 모험을 피하려 한다.

 특히 방금 마주친 자들처럼 적당히 폐품이나 들풀이나 뜯으며 연명하는 자들은 더더욱.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민우는 혼자, 상대는 네 명.

 다행히 위협이 먹혔으니 망정이지 여차하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일개 사람이 아무리 신체조건이 우월하다 해도 숫자 앞에서는 장사 없으니까.


 정글도를 다시 뒤춤에 숨긴 칼집 안에 넣고, 민우는 정인을 향해 돌아섰다.


 창백한 낯의 정인은 식은땀을 비 오듯 흘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아직도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꾹 누르듯 가슴에 주먹을 댄 채.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로 격한 반응.

 민우는 그녀의 정신상태가 생각하던 것보다 심각했다는 걸 그제서야 깨달았다.

 근 일주일 동안 정인은 집 밖으로 전혀 나가지 않았기에, 낯선 사람을 정면에서 마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

 그나마도 거리를 꽤 두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로 격한 반응이라면 심각한 문제였다.

 자신은 익히 봐서 친숙했기에 간신히 대화라도 가능했던 것이었을지도.


 민우는 조심스럽게 정인을 향해 왼손을 내밀었다.



 “다 끝났습-“

 “저리 가!!”



 짝 하는 파열음과 함께 튕겨 나간 팔.

 민우는 화끈거리기 시작한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봤다.



 “누님.”



 그 부름에 돌아온 건 정인의 충혈된 눈.

 가시지 않은 두려움과 울분, 좌절감이 뒤섞여 맵고 짠 물방울이 되어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민우는 그게 접근하면 안 되는 맹독인 것 마냥 제자리에 멈춰 섰다.


 후드티 소매로 눈가를 진득하니 비비던 정인은 몸을 휙 돌렸다.

 민우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듯.

 물기에 잠긴 중얼거림이, 스며들 듯 그녀의 입에서 빠져나왔다.



 “…잠시만, 혼자 있게 해줘…”
 “…”



 민우는 말없이 뒤로 돌아서서 휠체어와 살짝 거리를 벌렸다.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을 애써 못 들은 척하면서.

 분명 그녀도 자신이 그래 주길 바랄 테니까.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햇살은 그런 우중충한 마음을 비웃듯 뜨겁기만 했다.


 여름.


 느닷없는 기시감이 그를 사로잡았다.


 작년 이맘때쯤, 그녀의 어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그녀는 지금처럼 화를 냈었다.

 터무니없는 병원비를 대신 내주려던 자신에게, 자기를 무시하느냐고 격노했다.

 의자를 뒤집어 엎으며 불같이.


 천안연합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두 다리를 잃은 상태에 적응하지 못해 변기에서 넘어졌을 때.

 차라리 자길 죽게 내버려두지 왜 살려서 이런 비참한 꼴을 맛보게 하느냐고.

 울부짖듯이 악을 썼었다.


 어떤 사람이든 상황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면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이치.

 방금 그녀가 자신을 밀쳐낸 것도 분명 그럴 터였다.


 민우는 무심코 의수로 왼손을 매만졌다.

 그녀가 기세 좋게 후려쳤기에 살짝 따끔거리긴 했지만, 사실은 그다지 아프지 않았다.

 차라리 진짜 미성년 여자애가 때리는 게 더 아팠겠다고 무심코 생각할 정도로.


 마치 지금의 그녀가 이만큼이나 쇠약해졌다는 걸 나타내듯.



 ‘만일 그때 맞았다면 지금보단 훨씬 아팠겠지…’



 그때 그녀에게 돈을 빌려주겠다고 한 걸, 이번에 그녀를 살린 걸 민우는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얻어맞은 손보다도, 미지근한 공기에 실려오는 훌쩍임에 마음이 더 얼얼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





 

 수색로로 올라오는 샛길.

 사천교 앞의 이차선 도로와 멀리서도 보이는 병원의 잔해.

 군데군데 부서진 보도블록과, 셔터가 내려간 지하철역 입구.

 도로변의 깨진 반사경과 스폰지처럼 부드러워진 아스팔트 도로.


 그 모든 것들을 지나쳐 집합주택으로 돌아오며, 둘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돌아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있게 해달라는 자신의 말을 지키려는 듯, 정인은 휠체어에서 내리자마자 화장실에 들어가 처박혔다.

 해가 지고 아스팔트에 밴 열기가 일렁이며 올라오기 시작할 때까지.


 민우는 몇 번이고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그녀를 불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훌쩍임과 수도꼭지 트는 소리만이 전부.



 정인이 다시 나온 건 민우가 저녁으로 만들어 놓은 볶음밥이 식어갈 즈음이었다.


 민우는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나오는 그녀를 보고 일어섰다.

 부축하러 정인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던 그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린 것이다.

 비록 눈은 퉁퉁 부었지만 지금은 좀 진정된 듯한 그녀가, 갑자기 자신이 다가가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작스레 발이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정인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민우를 퉁퉁 부은 눈으로 슥 쳐다봤다.

 그러더니,



 “…”



 처음 걷는 아이처럼 어설픈 걸음걸이로 다가와 식탁 앞에 앉았다.

 다리를 테이프로 겨우 고정시켜 놔서 그런지, 그 조그마한 충격에도 흔들리는 식탁.


 모서리를 붙든 민우는 내심 안도하며 자리에 앉았다.

 기껏 반나절만에 다시 얼굴을 비추더니 밥도 안 먹고 안방으로 들어가버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인은 눈 앞에 있는 볶음밥과 장국을 생경하게 쳐다봤다.

 식탁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앉았기에, 밑으로 늘어진 검푸른 단발에서 물방울이 바지에 뚝뚝 떨어졌다.

 새빨간 눈가와 볼에 묻어 있는 물기를 보아하니, 운 흔적을 숨기느라 씻고 나온 모양이었다.


 민우는 조심스레 정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장막처럼 드리운 앞머리 때문에, 민우는 그녀의 표정을 도통 볼 수가 없었다.


 어떤 말을 꺼낼 지 고민하던 그는 결국 무난한 치렛말을 던지기로 했다.



 “그… 저녁은 볶음밥으로 했습니다. 누님.”

 “…응.”


 “전에 퇴원하셨을 때 만들어 달라셨던 게 생각나서요.”
 “응.”


 “…안 드십니까? 식습니다, 누님.”

 “응…”



 뭘 묻든 한결같이 영혼 없는 대답만 던지는 정인.

 수저는 어찌 들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흘릴 듯 위태위태했다.

 시선도 마음도 아예 머나먼 곳에 가 있는 듯한 모습.

 민우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어찌할 줄 모르고 식탁과 정인을 번갈아 쳐다봤다.


 안 그래도 그냥 놔두면 섭생이 썩 좋지 못한 그녀다.

 특히나 그 사건 이후로는 거실로 나오는 게 두려운 나머지 끼니도 거르고 안방에 처박혀 있기가 일쑤.

 오늘도 하루 종일 화장실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분명히 배는 고프련만, 정인은 허깨비처럼 어물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한동안 그러던 정인은, 가물가물한 시선을 자신의 손으로 돌렸다.

 동년배 소녀와 비교해도 올망졸망하다 할 수 있는 작은 손.

 그 손가락 사이에 쥐여 있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긴 숟가락. 



 “…잘 먹을 게.”



 예전에 쓰던 조금 짧은 놈이 딱 좋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정인은 식은 볶음밥을 반 숟갈 떠서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우물거리다가 그대로 삼키더니, 옆의 장국을 살짝 들이켰다.


 민우는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자신도 식어버린 볶음밥을 먹기 시작했다.

 정인의 빈 속을 고려해서 평소보다 덜 맵게, 덜 짜게 간을 맞췄기에 그의 입맛에는 딱 맞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조금 싱거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민우는 정인을 흘긋거렸다.

 그녀는 컨베이어 벨트처럼, 천천히 기계적으로 숟가락을 놀리고 있었다.



 “간은 좀 어떻습니까?”
 “…”



 표정 없는 얼굴로 턱을 우물거릴 뿐인 정인.

 민우는 괜히 물어봤다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휑하니 넓어진 집 안에 수저 달그락거리는 소리만 조용히 울렸다.



 정인은 입 안이 바싹 마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간이 살짝 덜 된 건 상관없었다.

 문제는 맛.


 원래라면 감칠맛과 소위 말하는 불맛, 그리고 그 속에 살짝 숨겨진 달달함까지 느껴져야 할 터.

 그러나 지금은 입도 코도 마비되어버린 듯, 마분지를 씹는 듯한 느낌이었다.

 반나절을 꼬박 울면서 지새운 탓일지도 모른다.

 지금도 코 안이든 눈가든 모두 벌에 쏘인 것 마냥 퉁퉁 부어 있었으니.


 아무런 맛도 안 나는게 고역이라면 그냥 적당히 뭉개서 뱃속으로 넘기면 그만.

 소화만 된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노릇이었다.

 고통을 버티는 건 부산 시절부터 익숙했으니까.

 그래야만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꾸역꾸역 무미, 무취의 볶음밥을 삼키던 그녀는 순간 속이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인은 반쯤 비워진 그릇에 숟가락을 힘없이 떨궜다.

 민우의 의아한 표정을 뒤로 한 채, 그녀는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님? 더 안 드십니까?”



 손으로 가린 정인의 입에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속이, 속이 안 좋아… 화장실…”



 뒤따라 일어나려는 민우에게 그러지 말라고 손을 저은 정인은,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주저앉을 뻔한 그녀는 손잡이에 거의 매달리듯 하여 화장실 문을 닫았다.

 걱정스러워 보이는 민우의 얼굴이 닫히는 틈새 사이로 슬라이드 필름처럼 사라져갔다.


 바닥을 기어가 변기 모서리를 붙든 정인은 조금 전까지 먹은 걸 모조리 토해냈다.



 “우웨엑, 에엑.”



 변기에 고개를 처박은 그녀는 잔기침을 하며, 미친듯이 물내림 스위치를 눌렀다.

 입 안에 남은 쓴맛을 뱉아낼 생각도 하지 못하고.

 1초라도 자신이 게워낸 흉물을 보기 싫다는 몸부림에 가까웠다. 



 “헉, 커억, 퉷, 씨발… 흐윽, 으흐윽…”



 소용돌이치는 변기 속으로 쓰디쓴 침과 욕지거리를 내뱉은 정인은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종일 그랬던 것처럼.

 밖에서 조용히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났으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음소리를 흘려냈다.


 위장이 꼬이는 듯한 고통은 문제가 아니었다.

 민우가 애써 만든 밥을 순간 버텨야 할 고통이라 생각한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

 그리고 결국 끝까지 먹지도 못하고 다 토해버렸다는 죄책감이, 정인의 마음을 더 아프게 쑤셨다.




 

 거의 삼십 분만에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근 일주일 동안 가장 수척한 낯이었다.

 가만히 놔두다간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듯한 몰골.


 민우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안방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뭐라도 먹는 게 좋긴 하겠으나, 방금 거하게 토한 사람에게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정인은 낮에 그랬던 것처럼 저리 가라고 몸부림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잘게 떨 뿐인 가냘픈 체구, 부축한 팔에 느껴지는 앙상한 갈빗대의 감촉이 민우를 안타깝게 했다.



 정인을 침대에 앉힌 민우는 안방 입구를 잠시 돌아봤다.

 임시 문이라도 달려고 했지만 결국 못 달고, 휑하니 뚫린 채 방치된 문틀.

 겨울이 아닌 게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날이라도 추웠다면 밖에서 들어오는 추위에 도저히 그녀를 이런 곳에 자게 할 순 없었을 테니.


 부엌에서 미지근한 물을 떠온 민우는 정인의 갈라진 입술 사이로 물을 조심스레 흘려 보냈다.

 멍하니 벌어진 입가에서 넘친 물이 이불보로 헛되이 떨어졌다.



 “물은 좀 드세요, 누님. 탈수 옵니다.”

 “으움, 으…”



 겨우 몇 모금 삼킨 정인은 목이 아픈 듯 기침을 여러 번 했다.

 가쁜 숨을 내쉬는 정인의 등을 민우가 조심스럽게 툭툭 두드렸다.

 몸을 앞으로 한껏 웅크린 정인의 입에서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스며 나왔다.



 “...해…”

 “네? 뭐라고 하셨습니까, 누님?”


 “미안해, 다 못 먹어서…”



 느닷없는 사과에 잠시 벙찐 민우.

 그가 반문할 틈도 없이 정인은 잔기침을 하며, 침대 위로 누워 몸을 옆으로 굴렸다.

 그러더니 바지를 걷어 의족을 벗으려고 했다.

 그러나 고정용 버튼을 누를 힘도 없는 듯 자꾸 헛손질만 할 뿐.



 “병신 같네…”



 허탈한 독백에 민우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그런 말씀하지 마십쇼… 도와드리겠습니다.”



 민우는 그녀의 다리에서 의족을 벗겨 침대 옆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눈물이 글썽거리는 정인의 일그러진 눈가는 본 듯 못 본 척.


 정인은 그런 민우와, 자신의 뭉툭한 다리를 번갈아 쳐다봤다.

 아주 잠깐.

 그리고는 몸을 돌려 엎드리더니,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불을 덮을 생각조차 없는 듯.


 열대야라 굳이 이불을 덮을 필요는 없겠지만, 민우가 걱정하는 건 여름 감기였다.

 마법소녀가 병에 잘 안 걸린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예 안 걸리는 건 아니라는 점 또한 주지의 사실이었다.

 실제로 연천과 철원 일대를 수복할 때 운 없게도 말라리아에 걸린 마법소녀도 있었으니까.


 민우는 얇은 이불보를 살짝 끌어올려 정인의 등 언저리까지 덮었다.



 “…새벽이라도 혹시 배고프시면 저 깨우십쇼. 죽이라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



 엎드린 정인의 허리를 덮은 이불보가 살짝 뒤척이며 사르륵거릴 뿐, 다른 반응은 없었다.

 민우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다시 부엌으로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잠들 때까지 옆에 있고 싶었지만, 자신의 존재가 오히려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기에.

 그리고 그녀의 성격 상 자신이 옆에 있으면 속 편하게 울지도 못할 게 뻔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도 있었다.


 거실로 간 민우는 TV 받침대 뒤로 손을 뻗었다.

 다행히 지난 번 납치 사건 때 부서지지 않은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

 그 안에 숨겨뒀던 물건도 분명 온전할 터였다.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건 한 권의 책.

 민우는 매트리스를 치운 딱딱한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쳤다.

 내비게이션이나 지도 어플이 대중화된 이후로 거의 안 쓰게 된 도로지도책.

 정확히는 한 달 전 탈북자 출신의 장물아비에게 구매한, 북한 지역의 도로 지도였다.



 민우는 알음알음 주워들은 이면세계 대전 당시의 북한 상황을 되새기면서, 사인펜으로 도로를 체크하기 시작했다.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따라 간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금천에서는 빠져서 예성강을 건너야 한다.

 방사능 오염지역을 피하려면 평양까지 갈 게 아니라, 41번 국도를 통해 원산까지 빙 돌아서 가야 했으니까.

 예성강을 도하하는 다리가 온전할지가 관건이었다.

 만일 안된다면 평산에서 청년이천선을 타고 원산까지 가는 수밖에.


 이후 원산함흥간 고속도로를 통해 함흥까지 가서 그대로 자강도 전천군까지.

 거기서 평양-만포 도로의 제65호선으로 갈아탄 뒤, 만포에서 철교를 통해 압록강을 건너기만 하면 된다.


 민우는 사인펜으로 그은 지도 곳곳에 동그라미 표시를 찍었다.

 우선 파주의 임진강 철교부터 개성 시내까지.

 예성강에서 41번 국도로 넘어가는 다리.

 함흥부터 전천까지의 모든 구간.

 만포 남쪽의 장자강호와 만포철교.


 일차적으로 난관이라 예상되는 곳들이었다.


 현재 모은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하자면, 북한 땅에서 가장 위험한 곳은 영변군.

 원자로 1호기와 방사화학연구소의 멜트다운으로 압록강부터 대동강까지 다 오염된 상황이다.

 얼추 반경 100km 정도는 방사능으로 완전히 오염되었다고 봐도 무방할 터.


 개성부터 신의주까지 일직선으로 뚫린 고속도로를 마다하고 빙 둘러가는 루트를 짠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누출된 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맨몸으로 통과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마법소녀인 정인이라면 어떻게든 된다 쳐도, 자신은 NBC 방호복이나 방사능 차폐막이 없으면 버티기 어려울 터.


 그렇다고 방호복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민간에도 방호복을 유통시킬 여유가 있는 부산과는 다르게, 연합은 전략물자관리부에서 철저히 관리하고 있었으니.

 기껏해야 육로를 통해 중국을 오가는 무장수송대 정도나 쓸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어떤 위협이 더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영변에서 소멸한 마신 모락스에게 바칠 산제물을 찾아 배회하는 조선인민군의 잔당.

 놈들은 이미 몬스터나 다름이 없다.

 개성부터 신의주까지 구간은 연합 무장수송대가 ‘청소’했지만, 지금 민우가 고른 루트는 원산과 함흥으로 빙 둘러가는 경로.

 그 과정에서 몇 번이나 습격이 있을지는 예상하기 어려웠다.


 거기에 개성-평양 구간이면 모르되 다른 도로가 온전하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함흥부터 전천군까지는 대놓고 아예 비포장도로.

 산지를 둘러 가야하는 곳도 있어 차량이 버틸지 의문이었다.

 그리고 개마고원이라는 점도 문제였다.

 원래도 여름 평균 기온이 20도를 넘지 않는 곳이다.

 시베리아에서 끝없이 한파가 내려오는 지금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민우는 턱을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에 잠겼다.

 주행해야 하는 거리는 얼추 610km 정도.

 중간에 예상치 못한 트러블을 고려해도 반나절에서 하루 남짓이면 충분히 주파할 수 있는 거리였다.

 환경이 가혹하다 해도 기름만 넉넉하면 금방 빠져나갈 수 있을 터.


 다만 남포에서 지안 시로 넘어간다고 해도, 랴오닝 성을 횡단하여 베이징까지 가려면 얼추 1,000km를 더 달려야 했다.

 그리고 베이징까지 간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우선 의사소통 문제.

 자신은 기초적인 중국어 정도만 할 줄 알고, 정인은 청해(聽解)조차 안되는 수준.

 시간을 두고 배우면 된다지만, 그럴 수 있을 만큼 중국의 상황이 여유롭지는 않을 터였다.


 이면세계 대전을 거치며 공산당의 통제력이 무너진 통에, 각지의 군벌들이 독립한 중국의 현 상황.

 특히나 최근은 소문이 썩 좋지 못했다.

 베이징이나 지난에서는 보통화(普通話)를 안 쓰면 상대도 안 하고, 광둥이나 푸젠에서는 보통화를 쓰면 목을 매단다는 이야기조차 있었으니까.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자신들이 과연 버틸 수 있을 것인지, 민우는 의문이 약간 들었다.

 차라리 상하이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라면 둘 다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었으니까.

 폐쇄적인 건 일본도 마찬가지지만 반쯤 내전 중인 중국보다는 조금은 사정이 나을 터.


 다만 일본 정부는 부산 정부와 지나치게 밀접하다는 게 문제였다.

 만약이라도 부산 정부가 그녀에게 씌운 간첩 누명을 빌미 삼아 송환을 요구한다면…



 “후우…”



 깊은 한숨이 공기를 울렸다.

 민우는 아파오기 시작하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너무 뒷일은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할 수 있는 것부터…”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는, 서울에서 파주로 빠져나가는 것.

 서울문산고속도로가 가장 빠른 경로지만, 무장수송대가 다니는 통로라 검문소도 많고 경비가 삼엄한 편이다.

 의정부를 통해 가거나 서울양양고속도로를 통해 빙 둘러서 가는 게 좋을 터였다.

 나머지는 연합의 고속도로 순찰대에게 안 걸리기를 비는 수밖에.

 평양-개성 고속도로에서 운 없이 무장수송대와 마주치는 경우도 고려해야 했다.



 민우는 지도책을 덮고 TV받침대 밑의 공간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불을 꺼둔 부엌으로 다시 간 그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이런저런 반찬 용기와 야채, 음료수나 계란이 들어있던 냉장실.

 지금은 쥐 파먹은 치즈 마냥 듬성듬성 비어 있었다.


 찬 물로 입을 축인 그는 물통을 손에 든 채, 훤히 열린 안방 안을 조용히 들여다봤다.

 이불의 어렴풋한 실루엣이 부스럭거리며 뒤척이는 걸 보니 완전히 잠들진 않은 모양이었다.


 민우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곧 암순응이 끝나자, 창문 쪽으로 돌아누운 정인의 등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움츠러든 등과 어깨, 그리고 가느다란 목덜미.


 이미 셀 수도 없이 본 모습이었다.

 이면세계 대전 때도, 대전이 끝난 후에도.


 민우는 그녀가 자신을 구해준 날을 무심코 떠올렸다.

 26년 7월 5일.

 공교롭게도 정확히 5년 전, 오늘과 똑같은 날짜였다.



 부산 정부군이 할파스의 격퇴에 힘입어 양산과 밀양, 울산을 탈환한 뒤 김해와 창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할 무렵.

 밀양 방면에서 김해로 진공하던 5군단 사령부가 급습당한 적이 있었다.

 마신 가미긴의 권속들.

 마신의 마력이 끊어지지 않는 한 죽지 않는 놈들이었기에, 그 점을 이용하여 지뢰처럼 김해 곳곳에 매설해 놓은 것이었다.


 창원으로 진출한 마법소녀들이 가미긴의 본대를 상대하는 동안 벌어진 일이라 대처할 방법이 없었다.

 벌집을 만들어도, 급하게 매설한 클레이모어로 산산조각내도, 심지어 전차로 깔아뭉개도 끝없이 되살아나는 괴물들.

 애초에 마신의 권속이라는 놈들 중 군대만으로 상대할 수 있는 놈은 거의 없었다.

 기껏 해봐야 화기가 통하는 할파스의 괴조와, 소수의 권속만 두는 대신 인간들을 지배해서 부리던 바알 정도.


 당시 임관한 지 반 년도 안 됐던 민우는 권총자살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가미긴의 권속에게 당한 사람들처럼, 걸어 다니며 동료들에게 총구를 겨누는 시체가 되긴 싫었으니까.

 아니면 그저 산채로 찢어져서 먹히기 싫었을지도 몰랐다.

 작전 중 마법소녀들과 몇 번 마주했고 나름 친분도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을 구원하러 오리라는 보장은 일체 없었다.

 마신 가미긴은 그만큼 벅찬 적이었으니까.


 이유야 어찌됐든, 조정간을 푼 권총을 덜덜 떨면서도 스스로의 입 안에 겨눴을 때.

 물보라와 함께 나타난 마법소녀가 그녀였다.


 지금처럼 무덥고 어두운 밤, 혜성처럼 날아와서.

 자신을 뜯어먹으려 하던 불사의 괴물들을 한순간에 처치하면서.

 쏟아지는 소총탄을 물의 장벽으로 막아내면서, 다른 마법소녀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던 그녀.


 아마도 그게 계기였을 것이다.

 그 이후 만들어진 국군 마법소녀지원단에 곧바로 전출을 자원한 동기는.

 그녀가 23사단 소속이라는 걸 알고는 곧바로 그곳으로 배속을 희망한 이유는.


 그때 봤던, 자신보다 훨씬 작은 체구였지만, 한없이 커 보였던 그녀의 뒷모습 때문에.


 그런 그녀의 등이 지금은 너무나도 연약해 보였다.

 금방이라도 똑 부러질 것만 같아, 완전히 부서지기 전에 손을 대고 싶을 정도로.



 민우는 침대 곁에서 퍼뜩 정신을 차렸다.

 왼손은 어느 새 그녀의 등에 닿을락 말락.


 정인은 그런 민우를 눈치채지 못했는지, 얕은 날숨을 내쉬며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마침내 잠에 든 모양이었다.



 “…”



 처음에는 그저 숭배할 수밖에 없었던 먼 밤하늘의 유성.

 그 궤적을 뒤쫓아가며 존경이 친애로 바뀌고, 친애가 사랑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같은 소대의 다른 마법소녀들과는 다르게, 이상할 정도로 말이 잘 통했고 관심사도 비슷한 점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범상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흐르는 별을 어디까지고 쫓아갈 수는 없는 법.

 결국 김천에서 본대를 휩쓴 마신의 태풍에 휘말려 한 팔을 대가로 치르고 전역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27년 8월부터 시작된 서울과 인천 탈환전을 민우는 TV로밖에 볼 수 없었다.

 무인 드론과 종군기자들이 중계하는 그녀의 활약상을 보면서, 그는 크게 낙심했었다.

 이제 그녀라는 별은 자신이 영영 닿을 수 없는 곳으로 흘러가버렸다고.


 그래서 부산에서 세파에 찌든 듯한 그녀와 재회했을 때 그는 날아갈 듯한 기분이었다.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입고 있던 복장은 연하늘색의 마법소녀복이 아닌, 우중충한 진회색의 작업복.

 어깨 밑으로 내려오던 긴 머리는 짧게 쳐서 목덜미나 간신히 덮을까 말까.


 그럼에도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그 빛과 아름다움을, 민우는 본 순간 깨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여자가 바로 그녀라는 것을.


 그리고 그녀는 이제 결코 다다를 수 없었던 유성이 아니라, 땅에 떨어진 별똥별이 되었다는 것을.


 어찌 보면 저열한 환희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과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사실.

 떨어지며 불타버린 이 보석이 드디어 자신의 손에 닿는 곳까지 내려왔다는 기쁨.


 그에 비하면 한쪽 다리가 없다느니,

 생각보다도 좀 더 까다로운 성격이라느니,

 선머슴 마냥 꾸미려는 노력조차 잘 안하는 여자라느니,

 그런 것들은 사소한 것.

 그녀라는 보석에 낀 불순물일지라도 그저 이채(異彩)를 더할 뿐.



 민우는 거두던 손을 다시 뻗어 정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건드렸다.

 반질반질하지만 동시에 푸석한, 상반되는 촉감.


 부서지고 금 가기 시작한 보석의 꺼끌한 표면을 만지는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



 “으응…”



 꿈결 같은 웅얼거림에 민우는 한순간 움찔했다.

 민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인은 선잠에서 깨지 않았다.

 단지 두피의 간질거림에 잠깐 반응했을 뿐.


 민우는 잠시 붕 떴던 감정을 다시 회수했다.

 내뻗은 손과 함께.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을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여자 하나 지키지 못하는 자신 따위에게는.


 그리고 후회에 잠겨 있을 자격은 물론, 시간조차 없었다.



 부산과 연합의 전쟁은 이제 초읽기.

 부산 정부군의 규모에 대해 연합 측에 제대로 알려진 바는 없었다.

 본부의 고위 간부들은 알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민우는 몰랐다.


 그러나 돌아가는 분위기만 봐도 연합이 초비상사태라는 건 명백했다.

 서울에 있는 18세 이상, 45세 미만의 난민들이 모조리 징집당하여 씨가 마른 것이다.

 이 집합주택의 전략물자관리부 사원들도 대부분 군사국방부로 옮겨진 상황.

 이전 응급실에서 나은에게 들었던 말로 짐작컨데, 연합에 소속된 마법소녀들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민우는 생각했다.

 그런 연합이 그녀에게 예외를 둘 리가 없다고.


 연합은 얼마 전까지 그녀가 마법을 일시적으로 못 쓰는 상태라 알고 있었을 터였다.

 그러나 납치 사건 당일, 고양시 자유로를 뒤덮었던 물의 반구.

 마법이 아니라면 설명이 불가능한 기현상이었다.

 그리고 그 마법이 발동한 현장에는 그녀 외의 생존자도 있었다.


 파랗게 질린 채 물을 게워내던 중년의 탈북자.


 만일 연합 대공부나 순찰대가 그 납치범을 확보했다면 그녀가 마법을 되찾았다는 정보를 분명 알게 될 터.

 전력이 하나라도 아쉬운 연합이라면 그녀를 반드시 끌어들이려 할 것이다.

 전쟁터로, 어떤 형태로든.


 연합이라 해봐야 그저 난민들 위에 군림할 뿐인 허울 뿐인 집단.

 연합이 부산 정부로 바뀐다고 해서 일반인들의 삶이 바뀔 건 없다.

 오히려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집단이라도 자신의 존속을 위해서는 모든 구성원을 전장으로 내몰 수 있다.

 기초군사훈련만 받고 투입되는 민간인에서부터, 그녀처럼 힘을 되찾은 과거의 영웅까지.

 괴물들에 맞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그 사람들의 생명을 보다 값싼 무언가와 맞바꾸기 위해.



 “절대 그럴 순 없지…”



 민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를 부숴버린 건, 이면세계 대전이라는 재앙이 쓸고 지나간 가혹한 세상.

 그러나 그 파도를 막지 못한 건 결국 자신의 책임이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러니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물러날 수도 없었다.

 





 *

 





 아무리 우울하더라도 병적인 우울증이 아닌 이상에야, 며칠 자고 나면 풀리기 마련.

 시원한 물로 아침내 땀에 절었던 몸을 씻어낸 지금의 정인이 그런 상태였다.



 “흐어, 시원하다.”



 그녀는 개운한 탄식을 흘리며 몸을 닦은 뒤 바닥에 앉은 채 화장실 문고리를 돌렸다.

 열린 틈새로 잠시 부엌과 거실 입구를 조심스레 살핀 그녀는, 기어나가 문 앞에 놔뒀던 옷가지를 집었다.


 민우와 동거하는 입장에선 꽤 무방비한 행동.

 그러나 정인은 어차피 지금 집에는 아무도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민우는 병원에 자신의 약을 대신 타러 갔으니까.


 매일 밤 자기 전 먹는, 환청과 망상을 줄여주는 조현병 약.

 그게 다 떨어진 게 나흘 전이었다.

 약을 며칠 안 먹는다고 증상이 바로 생기진 않았지만, 어쨌든 꾸준히 먹으라고 민 교수도 임 교수도 신신당부를 한 터.


 다만 약을 다시 타려고 해도 지금의 자신은 모르는 사람만 보면 석고상 마냥 굳어버리는 신세.

 때문에 직접 병원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람 가득한 로비에 들어서면 십중팔구는 지난 번 외출 때처럼 공포에 질리거나, 실신할 게 뻔했으니까.


 그리고 민우는 최근 모종의 일로 바빴는지 도저히 병원 진료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덕분에 며칠 약 없이 지내다가, 오늘에서야 겨우 오전 진료를 예약해서 나간 것이다.



 정인은 입구의 매트 위에 주저앉아 팬티부터 입기 시작했다.

 전쟁 전 같았으면 동네 시장에서 열 장 한 묶음에 만원에 팔 법한 면 스판 브리프.

 한동안 잊고 지내던 월경이 최근 다시 오려는 지 간간히 몸살기가 있었기에 생리대도 잊을 순 없었다.

 속옷의 안감에 약간 두툼한 생리대를 부착하고는 왼다리부터 차례대로 밀어 넣는 모습은 꽤나 익숙해 보였다.


 마법소녀가 된 지 6년, 두 다리를 모두 잃은 지 반 년.

 남자로서 드는 심리적인 거부감도, 불편한 몸으로 혼자 옷을 입는 것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였을 때는 상상조차 해본 적 없던 기저귀를 찬 듯한 감촉 역시 마찬가지.


 팬티 윗단을 골반까지 끌어올리며 정인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여자 몸에 익숙한데, 정말 내가 남자였던 적이 있긴 있었을까.’



 정인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최근 기억력이 영 떨어지게 된 탓이었다.

 옛날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그저 단편적이고 추상적인 내용만 떠오를 뿐.


 예를 들자면, 중학생 시절 수련회로 간 제주도에서 반 친구들하고 저지른 사춘기 남정네들의 바보짓.

 자신과 같은 날 치른 혜인의 모의고사 성적표를 보며 겉으로는 대범한 척 축하하면서도 내심 씁쓸하던 당시의 감정.

 밤하늘의 구름 사이로 반짝이는 위성 불빛을 보며 지샜던 방공포대에서의 첫 밤샘근무.


 그런 적이 있었다는 걸 기억으로는 떠올릴 수 있었다.

 다만 추억하며 그때의 심정을 곱씹는 건 도무지 불가능했다.

 전부 낡은 수상기 너머로 보는, 자신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뛰어다니는 흑백 무성영화처럼 느껴질 따름이었으니까.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서정인’이라는 남자과는 다른 인간이 되어버렸다고 어렴풋이 느끼는 것은.


 그렇게 된 원인이 뭔지 알 도리도 없었기에 정인은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바닥의 면 브라를 집은 그녀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벌써부터 치매라도 왔나…”



 그러던 정인의 귀에, 지금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가 와 닿은 건 그때였다



 “갑자기 무슨 말씀을… 아.”



 어느 새 거실에 서 있는 민우와, 화장실 문을 열어놓은 채 매트 위에 주저앉은 정인.

 둘의 시선이 한순간 교차했다.


 정인의 휘둥그레 커진 눈은 거실에 선 그를.

 민우의 당혹감 가득한 눈은 정인의 나신을 향했다.



 곧 정신을 차린 민우는, 평소처럼 못 본 척 다급히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어쨌든 정인은 집에서 썩 주의 깊게 행동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이런 상황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생기곤 했다.

 주로 정인이 피해자였지만, 간혹 민우가 피해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원래라면 살짝 부끄러워할 뿐, 말없이 숨은 뒤 잽싸게 착의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었을 터.

 자신도 그냥 잠시 기다렸다가 시치미를 떼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분위기야 약간 어색하겠지만, 불행한 사고라 치고 금방 잊을 수 있으니까.


 일종의 암묵적 룰이라 할 수 있었다.

 서로의 부주의를 괜히 헤집지 말 것.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하지 말고 빠르게 묻은 뒤 잊어버릴 것.


 그랬기에 민우는 이번에도 비슷한 반응을 예상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녀는 몸을 민우의 시선으로부터 은근슬쩍 가리지도 않았다.

 ‘민우 이 자식, 눈 호강했네’라면서 어설프나마 넉살 좋은 농담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저 순간적으로 패닉에 빠진 듯,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을 뿐.

 시선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고 민우의 얼굴 중앙에 고정되어 있었다.


 민우는 당황해서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곧 정인의 보드라운 볼을 중심으로 터질 듯한 홍조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뭔가를 말하려는 듯 금붕어 마냥 끔뻑거리는 입술.

 그러나 의미 있는 단어는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그저 ‘어’ ‘으’ 같은 외마디 말만 자아낼 뿐.

 벌어질 만큼 벌어진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그 얼빠졌지만 동시에 극도의 수줍음과 부끄러움이 밴 옆얼굴에, 민우는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열흘 전 외출 때 있었던 일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 틀어박혀 울던 그녀.

 하지만 다음날부터는 내면의 응어리를 약간 털어낸 것 마냥 예전의 모습을 조금 되찾은 듯했다.

 예전만큼 자신을 무서워하진 않았으니까.

 신체적인 접촉은 극구 피하려 들었지만 말 한 마디 섞는 것만으로도 떨지는 않게 되었다.


 다만 경계하는 듯한 태도는 그대로.

 집에선 편한 게 제일이라며 나시티에 숏팬츠도 가리지 않았던 그녀는, 이제 여름임에도 극구 긴 소매 옷을 고집했다.

 여름에는 땀이 차서 갑갑하다던 브래지어를 꼬박꼬박 챙겨 입기도 하고.

 잘 때도 바닥의 자신에게서 묘하게 거리를 두려는 듯 창가에 붙어 자길 곧잘.


 원래는 자신을 성별에 관계없이 마음 편한 동생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동거하기 시작한 이후 이런 불상사가 종종 생기면서 조금은 이성으로 의식하는 듯했지만, 그저 그 뿐.

 기본적인 경향은 큰 변함이 없었으니까.


 그런 당시와 비교하면, 최근의 그녀는 스스로가 여자라는 걸 좀 더 의식하는 듯한 모습.

 장족까진 아니더라도 미미한 변화나마 보이고 있다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민우에게는 여전히 예전의 이미지가 좀 더 강하게 남아있었다.

 사탕과 달콤한 숨결이 어울릴 입술 사이로 독한 담배를 물고 연기를 내뱉는 모습이.

 때때로 소녀 같은 모습을 보여주곤 민망해하기도 하지만, 금세 털털하니 굴며 잊어버리는 그녀가.



 그랬기에 오히려 지금 민우는 넋을 잃고 정인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녀의 시선이, 얼굴이 향하는 방향은 관심사 밖이었다.

 지금 그녀가 보여주는 표정이야말로, 정말로 그녀가 가장 무방비한 상태에서 보여주는 여자의 얼굴이었으니까.


 그는 정인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녀를 이루는 요소가 하나둘씩 속속들이 민우의 눈으로 들어왔다.


 어깨 바로 위까지 내려온 설마른 머리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눈가에 맺힌 물 한 방울.

 따뜻한 물로 씻은 듯 분홍빛 핏기가 도는 보송한 살결.

 도드라진 쇄골 라인 밑에 자리잡은 야트마한 언덕.

 그 꼭대기에 맺힌 분홍빛 작은 열매, 결없이 매끄러이 내리흐르는 배의 곡선, 한가운데의 아담한 배꼽…

 그 외의 모든 것들이.



 민우는 무심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저도 모르게 앞으로 살짝 뺐다.

 그러는 서슬에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며, 왼손에 들린 약 봉투가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 정인은,



 “꺄아아악!!”



 저도 모르게 요란한 비명과 함께 화장실 안으로 구르듯 도망쳤다.


 쾅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닫히는 화장실 문.

 앞의 매트 위에 남겨진 건 실내복으로 입으려 꺼내 둔 듯한 흰색 긴 팔 박스티와 검은 트레이닝복 바지 뿐.


 민우는 황망한 눈길로 닫힌 화장실 문을 쳐다보다가 곧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직도 뇌리에 인화(印畵)되어 있는 듯한 그녀의 나신을 지우려는 듯.


 화장실 문 앞에 선 민우는 널브러진 정인의 옷을 조심스럽게 치운 뒤 안으로 말을 걸었다.



 “저기, 누님.”



 대답 대신 긴 침묵만이 돌아왔다.

 민우는 점차 초조해지는 기분을 애써 억누르며 기다렸다.


 몇 분쯤 지났을 무렵, 마침내 문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뭐.”



 민우가 정인에게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잔뜩 볼멘소리였다.

 민우는 직감했다.

 아무래도 망한 모양이라고.


 그는 자신의 실수에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불문율을 깬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시선에 생리적인 불쾌감을 참을 수 없었는지.

 어느 쪽이든 수습하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그,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말하고서도 민우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사과문에 들어가면 안 될 문장의 서열을 메기자면 아마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대사였다.


 민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정인은 그를 더 들볶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정확히는 그럴 만한 정신머리가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었다.



 정인은 화장실 문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아 아직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내려앉았던 심장은 멈췄던 시간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정신없이 맥동하는 중.

 너무 세차게 피를 뿜어내고 있었기에 손발이 다 저릴 지경이었다.

 임계점을 넘은 수치심에 전신의 힘이 다 빠지는 듯했다.



 ‘다 봤어. 아주 핥듯이 봤다고! 민우 이 새끼가, 도대체 언제 거실에, 아니 그게 아니라, 변태 같은 눈으로 날… 그런, 그런 눈으로…’



 뒤늦게 가슴과 사타구니를 가리던 정인은, 이런 식으로 반응하는 스스로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웠다.


 둘은 말하자면 이미 서로 볼꼴 못 볼꼴 다 본 사이.

 천안연합병원에서도 그렇고, 집에서도 그랬다.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몇 번 뿐이었지만, 거동을 아예 못하던 자신의 기저귀까지 갈아준 게 민우였다.

 이제 와서 그에게 알몸을 보인다 한들, 길거리에서 치마 벗겨진 여자애 마냥 창피할 이유는 없을 터.


 거기다 방금 내지른 새된 비명은 정말로 자신이 낸 게 맞는 건지 의심스러울 지경.

 정인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몸을 뒤틀었다.



 ‘꺄악? 꺄악이라고 했어? 내가, 방금? 미친…’



 정인의 몸이 바닥을 밀어내며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절로 시원한 바닥을 짚은 두 손.

 정인은 후끈거리는 얼굴에 그 냉기를 들어 옮겼다.


 피부에 닿는 차가운 감촉에 그나마 조금 마음을 가라앉힌 정인.

 되찾은 사고능력으로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상황을 수습하는 대신 필사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다 민우가 잘못한 거라고.

 아무런 신호도 없이 거실에 불쑥 들어와서는 멍하니 서 있던 민우가 나쁜 거라고.

 자신의 몸을 쳐다보던 민우의 그 음흉한 시선이 문제라고.

 녀석이 먼저 불문율을 깼으니 내가 이러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정작 자기 자신도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나머지 알몸 차림으로 멍하니 앉아있던 차.

 그런 주제에 할 만한 변명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민우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으면 자괴감에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한 탓인지, 정인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변태 같은 새끼.”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자신의 입을 가렸다.

 작은 목소리였지만 혹시나 문 너머의 민우가 들었을까 봐.


 속으로만 생각하고 끝내는 것과 입 밖으로 내뱉아버리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부조리한 비난에 민우가 어떤 식으로 나오게 될 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일이 잘 풀려도 응어리가 남을 터, 잘 안 풀린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도 있었다.


 정인은 상상해봤다.

 만일 자신이 아직 남자였고, 지금의 민우와 같은 입장에 처했으면 어떻게 할 것인지.


 좋아하는 여자가 자기 집에서 의식주를 함께 하는 상황.

 그런데 정작 여자는 자신을 별로 의식하지 않는 듯, 무방비한 모습이나 보이기 일쑤.

 그러면서도 정작 상대가 조금만 세게 나오면 도망치고, 애매모호하게 얼버무리고, 상대 탓을 한다.



 ‘이거 이렇게 생각하니 내가 진짜 나쁜 년인데…?’



 문득 그녀는 민우가 고백한 날짜를 떠올렸다.

 잊을래야 잊기도 어려운 날.

 5월 14일.


 벌써 그로부터 두 달이 넘게 지난 시점, 자신은 아직 어떤 대답도 그에게 주지 않았다.


 변명거리가 없는 건 아니었다.

 환청 때문에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널 이성으로 바라보는 건 어렵다.

 물론 순간순간 충동적으로 끌릴 때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여성호르몬이 일으키는 화학적 장난질.

 6년 동안 한 번도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명확히 정의하지 못했는데, 그런 내가 널 어떻게 감히 좋아할 수 있겠느냐.

 너도 그런 여자는 싫을 거 아니냐.


 그러나 대놓고 그렇게 토로할 수 없었기에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었을 뿐.

 자신이 사실 남자였다고 밝힐 용기가 없었으니까.

 민우의 감정을 시험에 들게 해서, 지금의 관계를 무너뜨릴 위험을 감수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정인은 조금씩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한 손으로 살살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끄응.”



 그 소리에 맞장구 치듯, 문에 기댄 그녀의 등 뒤에서 민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춥지 않으십니까? 옷 넣어드릴까요?”



 조금 전 자신의 몸을 쳐다볼 때의 홀린 듯한 태도는 어느 새 씻어낸 듯, 순수하게 걱정하는 듯한 말이었다.

 정인은 얼버무리듯 대답했다.



 “괘, 괜찮아. 잠시만. 잠시만.”



 내심으로는 알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지금 같은 애매한 관계를 유지할 순 없다는 걸.

 자신을 배려해서인지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민우도 내심은 초조할 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신이 민우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분명히 그랬을 터.


 그리고 정인 역시 불안함을 평생 끌어안고 갈 순 없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민우가 질려서 떠나갈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지금의 그녀는, 민우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수도 없었으니까.

 자신이라는 존재를 알아 봐주는, 마법소녀가 아닌 그저 사람으로 대해주는, 그가 없는 생활은.



 “…문, 조금만 연다?”



 정인은 벽 뒤로 몸을 밀어 숨긴 뒤,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리며 밀었다.

 손 하나 통과할 정도로 열린 틈새.

 거실의 건조한 공기와 함께 기이한 초조함이 불현듯 정인에게로 밀려왔다.


 갑작스럽게 문틈이 확 열리는 건 아닐까.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한 민우.

 그가 얌전히 옷만 갖다 주는 대신 문을 비집고 억지로 들어와서는.

 물기 가득한 이 화장실 바닥에 자신을 쓰러뜨리고.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억지로 여자로 만들어버릴지도.


 그런데 지금 느끼는 초조함의 원인은, 정말로 두려움 때문일까.

 사실 민우가 그렇게 자신의 등을 떠밀어 주길 바라는 기대감은, 정말 한 줌조차 없는 것일까.


 정인은 얼굴을 옆으로 살짝 내밀 엄두조차 못 낸 채,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행여나 뛰는 심장소리가 남에게 들릴 세라 손바닥으로 짓누르며.


 그래서 전조도 없이 민우의 왼팔이 불쑥 들어왔을 때, 정인은 그만 숨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여기요. 물 안 묻게 조심하시고…”

 “어, 으, 응, 고, 고고! 고마워!”


 “그냥 나와서 갈아입으시죠, 덜덜 떨지 마시고… 전 잠시 밖에 나가 있겠습니다.”

 “아니, 그럴 필요는-“



 다급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멀어져가는 발소리는 그저 흐려져갈 뿐.

 정인은 두 손으로 받아 든 박스티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황망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 와중에 깔끔하게 개어져 있는 옷가지.

 자신은 대충 바닥에 던져 뒀을 뿐이니, 아마 민우가 이랬을 터.


 곧이어 현관문의 전자락이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음이 났다.

 정말로 민우는 자기 말마따나 밖으로 나가버린 모양이었다.


 정인은 화장실 밖으로 기어 나오더니 겉옷을 덮어쓰듯 허겁지겁 입었다.

 그 와중에 탑브라를 먼저 입는 걸 깜빡해서 다시 티를 벗느라 우왕좌왕.

 화장실에 남아있던 물기에 엉덩이 부분이 다 젖어버린 건 신경조차 쓰지 못하고 있었다.


 민우가 언제 다시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정신이 나간 것만 같았다.

 더군다나 방금 전, 민우가 못 참고 먼저 들이닥치기를 일순 기대해버린 건…


 도저히 자괴감을 참지 못한 정인은, 타조 마냥 고개를 두 손으로 누르며 기성을 흘렸다. 



 “으아, 으흐어아… 별 또라이 같은, 아흐으…”



 그러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여느 때보다도 진한, 붉은 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민우는 안방의 탁상 위에 약병 8개를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총 6개월 분량의 약.

 마음 같아서는 몇 년 분을 한 번에 받아오고 싶었지만 임 교수는 6개월 이상은 안 된다고 딱 자른 것이다.

 아무래도 연합을 떠나면 언제 약을 다시 구하게 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 민우는 그 점이 약간 불만이었다.


 다시 거실로 나온 민우는 거실 바닥에 앉은 정인의 등을 쳐다봤다.

 헐렁한 박스티와 긴 트레이닝복 바지라는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자세는 꽤나 불편해 보였다.

 왼쪽 허벅지를 두 팔로 껴안은 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쭈그러든 모습.

 조금 전의 해프닝 때문에 여간 토라진 게 아닌 모양이었다.



 “…왜 이리 일찍 왔냐?”



 때문에 선뜻 입을 열지 못하던 민우는, 기어들어가는 듯한 정인의 목소리에 조금 늦게 반응했다.



 “아, 그게 오늘은 중앙병원이 꽤 한산했습니다. 진료 대기 시간도 3분밖에 안 됐고요.”

 “왔다 갔다 하는 시간만 30분은 될 텐데.”


 “실제로 1시간 정도 걸렸죠. 9시 반에 나가서 10시 35분쯤 들어왔으니…”

 “내가 그렇게 오래 씻었다고…?”



 정인은 그제서야 고개를 슬쩍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때마침 11시를 지나고 있는 시침.

 민우가 나가고 나서 얼마간 뒹굴다가 샤워하러 들어갔으니, 대충 10시쯤 씻으러 들어갔다고 할 수 있을 터.

 30분 가까이 샤워했다는 말이니 오래 씻었다는 게 틀린 건 아니었다.

 머리칼도 아직 짧아 평소면 15분 정도면 끝내는 편이니까.


 그녀는 신음을 흘렸다.



 “끄응…”



 결국 자신의 미스 때문에 벌어진 사고.

 아무리 민우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다녀왔기로소니 그의 탓을 할 계제가 아니었다.

 할 말이 없어진 정인은 주제를 돌리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사람은 왜 그리 없었대?”



 민우는 평소처럼 돌아온 그녀의 톤에 내심 안도했다.

 그녀의 알몸을 빤히 쳐다보고 만 여파는 꽤 오래 갈지도 모른다고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곧이곧대로 대답해주는 건 별개의 문제였다.



 “글쎄요? 그런 날도 있는 모양이지요.”



 정인은 민우 쪽으로 몸을 반만 돌려 앉았다.

 아직까지 정면으로 돌아볼 엄두는 안 나는 듯.



 “정말로?”

 “어, 음. 정말로요.”


 “민우 너 솔직히 말해라. 안 그러면 조금 전- 아, 아니, 아니, 이게 아니라…”



 실언했다는 듯 자기 입을 손바닥으로 가볍게 탁탁 치는 정인.

 민우는 일순간 다시 떠오른 정인의 알몸을, 머릿속에서 간신히 지웠다.

 안 그래도 그녀가 걸친 티는 꽤 얇은 편.

 베란다에서 들어오는 햇살에 안의 윤곽이 훤히 비치고 있어서, 무심코 가려는 시선을 참는 게 꽤 고역이었다. 



 “…아무튼, 너 뭐 숨기는 거 있지.”

 “아이고. 제가 누님께 뭘 숨기겠습니까.”



 정인은 곁눈질로 민우의 안색을 살폈다.

 입으로야 시치미를 떼곤 있었지만 시선은 약간 틀어진 채.

 바지 주머니 부근에 어색하니 얹혀 있는 왼손의 손가락이 한순간 꿈틀댔다.

 가볍게 턱을 움찔거리며 재빠르게 입술을 축이는 모습.


 노골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태도였다.

 일면식 없는 사람이라면 눈치채기 어려울 지라도, 정인은 알 수 있었다.


 정인은 민우에게 손짓했다.

 충동적으로.



 “이리 와봐.”
 “네, 누님.”


 “…여기, 여기 옆에 앉아. 그으, 거리는 좀… 두고.”



 민우는 정인에게서 1m 정도 떨어진, 테이블 옆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인은 잠깐 움찔했지만 옆으로 물러서거나 도망치진 않았다.

 1m.

 지금의 정인하고 민우 사이에 존재하는 퍼스널 존이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말없이 시간만 흘려 보내는 둘.

 양반다리를 한 민우는 무릎 위에 얹은 왼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 지 정확히 짐작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혹시나 조금 전의 해프닝 때문에 아직도 삐져 있는 걸까?

 아니면 6월 25일의 납치 사건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민우에게, 느닷없이 정인의 불만 어린 목소리가 쏟아졌다.



 “너 요즘 왜 그러냐.”



 그는 저도 모르게 꺼벙한 대답을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네?”
 “뭘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해주는 거 하나 없고. 뭐 좋다 이거야… 네가 말 안해주는 거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한번씩 밤중에 도둑처럼 몰래 나갔다 오는 건 뭔데…?”



 말투만 살짝 불퉁할 뿐, 어조는 고저 없이 평탄했다.

 하지만 민우는 정인이 불같이 화를 냈더라도 지금만큼 간담이 서늘하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조현병 약에 수면제라도 포함되어 있는지, 그녀는 언제나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잠들곤 한다.

 그래서 민우는 간간히 그녀가 잠든 사이 밖에 나갔다 오곤 했다.

 용건은 다양했다.

 아직 간간히 연락을 주고받는 난민 밀매상과 접촉하거나, 탈출 경로를 점검하거나, 새로 파견된 경비원의 순찰 루트를 파악하거나 등등.


 물자 비축이라면 모르되, 이런 건 아무래도 정인이 깨어 있을 때는 대놓고 하긴 어려웠다.

 그래서 일부러 그녀가 약에 취해 곯아떨어진 시간을 노렸는데.

 언제였는지는 몰라도 그녀는 눈치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밤에 말도 없이, 대체 뭘 하는 거냐?”
 “그게, 누님. 별 건 아니고, 그냥 산책을 좀-“


 “거짓말이라도 좀 성의 있게 해줄 순 없냐? 민우야…”

 “그게 아니라요.”


 “방금도 그래, 뭐, 그런 날도 있는 모양이지요? 언제나 대기열이 터져 나가던 병원이, 진료 보는데 3분밖에 안 걸렸다는데…”

 “…”



 민우는 뭐라 대답할 말이 없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민우를 곁눈으로 흘기던 정인은 한숨을 푹 쉬었다.

 지금 자신이 왜 이렇게 민우를 몰아붙이고 있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기에.


 사실 민우가 뭘 몰래 하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민우의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이 전부 알아야 된다는 법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알고 있어도, 감정은 도저히 숨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민우가 자신을 그만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한 불합리한 역정을.

 그리고 그 불신이 타당하다고 납득해버리고 만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정인은 자신의 사라진 두 다리를 물끄러미 되새겼다.

 우울한 시선으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하기 싫으면, 됐어… 그래, 그냥 하던 대로 해. 더 안 묻고 얌전히 지낼 테니까…”



 그런 정인의 모습을 견딜 수 없었던 민우는, 머리를 거칠게 긁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곧 연합하고 부산 정부 간에 큰일이 벌어질 거 같습니다. 전쟁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정인은 고개를 민우에게로 휙 돌렸다.



 “어, 뭐라고?”
 “전쟁 말입니다, 누님. 난민이나 말단 사원들도 대거 징집돼서 이미 전선으로 끌려갔고, 듣기로 부산 정부군도 속속들이 전선 배치되고 있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부산 정부에서 마법소녀… 들도 일부 소집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전쟁이라는 믿을 수 없는 단어에, 정인은 민우를 멍하니 쳐다봤다.

 그 말이 사실이냐는 듯. 그러나 민우의 표정은 덤덤했다.



 “누님은 뉴스를 안 보셔서 아마 모르셨겠지만… 이야기가 나온 지는 한 달도 더 됐습니다. 오늘 중앙병원에 사람이 없던 것도 뭐, 아마 의료진이든 진료받을 사람이든 다 끌려간 거겠죠. 휴진 중인 과도 한둘이 아니었고요.”



 실제로 정인은 정신과에서 퇴원하고 나서는 뉴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입원 중에도 마찬가지.


 흥미가 안 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포커스 인 서울’이 언제 나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과거를 후벼 판 그 방송을 다시 보는 게 무서웠기 때문에.


 정인은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현듯 소름이 돋는 걸 느끼고 다급히 물었다.



 “징집이라니, 넌 괜찮아?”
 “제가요?”


 “말단 사원들도 다 징집됐다면서. 너도 끌려가는 거 아니냐고.”



 그러면서 정인은 민우의 의수에 잠시 시선을 준 뒤 말을 이었다.



 “팔 때문에 전투병과로 차출되진 않겠지만, 그래도 걱정인 걸…”

 “아, 그거 말씀이시라면 전 일단은 괜찮습니다. 명목상이라도 일단은 마법소녀 관리직이라… 하지만 어찌 흘러갈지는 모르긴 하죠.”


 “그래…”



 정인의 낯빛은 썩 좋지만은 않았다.

 민우가 끌려가면 생활에 문제가 생긴다는 타산이 아예 없다곤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민우에 대한 걱정이 더 앞섰던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전쟁이라 하면 곧 이면세계 대전.

 깔끔한 작전, 신속한 진격과 최소한의 인명피해로 끝나는 그런 ‘깨끗한’ 전쟁이 아니었다.


 총을 쏠 수 있는 국민은 모조리 전선으로 투입되는 총력전.

 초기에 낙동강 격전지에 배치된 일개 사병의 평균 생존시간은 14시간.

 부산 시내로 향하는 다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십만 이상의 목숨을 갈아 넣은 적도 있었다.


 마신에게 대항할 마법소녀가 늘어나기 전까지 자대 배치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괴조의 한 끼 식사거리가 되거나, 죽어서도 조종당하는 시체로 전락하거나, 그럴 시체조차 남지 않거나.


 그런 ‘더러운’ 전쟁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정인은 속이 탈 수밖에 없었다.

 민우는 주로 후방의 사령부에 있었으니까 실제 전선을 모른다.

 그런 민우가 혹시나 전쟁터 한복판에 떨어진다면…


 민우는 솜털이 바짝 곤두선 정인의 목덜미를 살짝 쳐다보더니 말을 이었다.



 “그 점에 관해서는 저보단 누님이 더 걱정입니다.”

 “날? …아, 무슨 말인진 알겠다.”



 부산 정부에서도 마법소녀를 소집했다면, 연합도 당연히 그럴 터.

 애초에 마법소녀는 재래식 전력으로 사살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더군다나 연합은 척 봐도 부산보다 인구도 전력도 부족한 편.

 그러니 분명 자신 같은 퇴물까지 소집하려고 할 터.


 다만 그런 대답이 정인의 의문을 완전히 해소해준 건 아니었다.

 그녀는 미심쩍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데 그거하고, 네가 밤마다 몰래 나가는 거하곤 무슨 상관이야.”

 “그건, 어, 음…”



 민우는 말하는 게 영 내키지 않는다는 듯 어물거렸다.

 정인의 시선이 답을 재촉하듯 그의 얼굴을 두드렸다.


 한참을 바닥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무릎을 두드리던 민우는, 마침내 결심을 마친 듯 입을 열었다.



 “연합에서 빠져나갈 준비를 하느라 그랬습니다.”

 “…뭐라고?”



 예상조차 못한 대답에 정인은 무심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자신이 의족을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잊어버린 채.


 뭉툭한 다리 절단면이 바닥에 미끄러지며 정인은 엉덩방아를 요란하게 찧었다.

 허리를 매만지며 신음을 흘리는 그녀를 아랑곳하지 않고, 민우는 독백하듯이 계속 말했다.



 “누님 성격 상, 본부에서 소집령이 떨어지면 거부하지 못하실 게 뻔하니까요. 전쟁이 벌어지면 전 누님을 데리고 연합을 탈출할 생각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아니, 씁, 아니, 자, 잠깐만, 야, 그게 무슨.”


 “그러려고 예비 물자를 비축해두고, 저축을 환금하고, 총기류를 사두고, 북한 지역에 대한 정보를 찾아두고, 뭐 그랬죠. 매일 밤마다.”



 정인은 뻣뻣하게 웃음 지으며 반문했다.



 “농담이지?”



 민우는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저었다.

 침중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후련한 기색이었다.


 그걸 본 정인의 얼굴에서, 어색한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대신 자리잡은 감정은 당혹감 한가득.

 그리고 그 안에 미량 섞인 노여움.


 정인은 낮은 목소리로 캐물었다.



 “탈출해서, 어디로 갈 생각이었는데.”
 “중국으로요. 베이징이나 지난까지 가되, 안 되면 상하이에서 일본으로 밀항하는 것까지 생각해두고 있었습니다.”


 “왜 진작에 말하지 않고.”

 “일부러 말씀을 안 드렸던 겁니다. 제가 누님에게 그러자고 했으면, 받아들이셨을 겁니까? 부산 정부군을 피해서 북한을 넘어 이역만리로 도망가자고, 그렇게 말했으면?”



 정인은 잠시 민우의 말에 고민하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자신은 참전했을 게 분명했으니까.



 “…아니. 아마도.”



 연합의 인간들을 위해서가 아닌, 민우를 지키기 위해서.


 민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전 때가 되면, 누님이 드시는 약을 몰래 두 배로 늘릴 셈이었습니다. 부숴서 물에 타면 되니까요. 그렇게 취해서 주무시는 사이 차에 태워 출발할 생각이었죠.”
 “너, 그게 무슨.”



 놀란 듯 크게 뜬 정인의 시선을, 민우의 시선이 되받아 쳤다.


 정인은 고개를 흠칫하며 뒤로 뺐다.

 민우의 가느다란 눈매 안에서 일렁이는 알 수 없는 불길.

 일종의 집착이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광기라 불러야 할지.



 “전 누님이 무사할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겁니다. 설령 누님의 믿음을 배신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 하더라도. 뭐든지요.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누님을 잃을 뻔했으니, 세 번은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정인은 어렴풋하게 느꼈다.

 6월 25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명확하게 떠오르진 않았으나, 아마 자신의 몸에 큰 문제가 벌어졌을 터.

 민우가 이렇게 자신의 안위에 도착(倒錯)하게 만들만큼.


 하지만 갓 떠오른 기억의 실마리에 집중할 틈은 없었다.


 정인은 어느 새 코앞까지 다가온 민우의 얼굴을 피해 뒤로 물러났다.

 조금 전 바닥에 부딪힌 엉덩이가 쓰라렸지만 멈출 순 없었다.

 생경한 그의 표정에 겁을 집어먹어서인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건지.

 어떤 이유에서든 달음박질치기 시작한 심장이 그녀의 몸을 채찍질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릎을 꿇은 채 정인을 쫓아가는 민우.

 정인이 아무리 팔다리를 놀려봐야 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질 뿐.

 등이 벽에 부딪히는 느낌에 정인은 깜짝 놀라며 눈을 꼭 감았다.

 사냥감을 노리는 육식동물 같은 냄새가, 새까맣게 닫힌 그녀의 감각을 훅 물들였다.



 “너, 잠깐, 그만...”

 “누님. …이런 제게 실망하셨습니까?”



 정인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아니, 아니, 아, 안 했어, 안 했다고!”

 “…”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말인지 민우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뒤로 물러서서 다시 거리를 좀 벌렸다.

 그녀를 괴롭히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니까.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오들오들 떨던 정인은, 멀어져가는 냄새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

 민우는 2m쯤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는 상태.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급하게 내쉰 그녀는 흐물흐물해진 몸을 늘어뜨렸다.



 “민우, 너, 이 씁… 나중에 두고 보자.”
 “죄송합니다, 누님.”



 정인은 다시 낯선 느낌을 받았다.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이렇게 당황해서 투덜대면, 민우가 적당히 너스레를 떨어 분위기를 푸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러나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은 민우의 입술은 그대로 굳게 닫힌 채.

 너스레는커녕 분위기를 풀 생각조차 없는 모양이었다.


 착잡한 심경의 정인은 반쯤 벗겨지려던 트레이닝복 바지를 주눅든 몸짓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이 대화가 시작됐을 때처럼, 왼쪽 허벅지를 품에 안고 무릎에 뺨을 묻었다.

 반 밖에 남지 않은 오른쪽 허벅지로 넘어지지 않고 버티기는 까다로운 편.

 그러나 정인은 익숙하게 균형을 잡고 버텼다.

 어쨌든 오른다리를 잃은 것도 4년이니 적응할 수밖에.


 그 자세로 정인은 거실 한복판에 앉아있는 민우를 훔쳐봤다.


 처음으로 재회한 뒤 처음으로 간 국밥집.

 삼락동 오염지대에 돈이 궁한 난민들을 밀어 넣는 일을 한다던 민우.

 그리고 방금, 자신을 위해서라면 연합 따윈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려는 민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약으로 재우고 강제로 끌고가는 것도 서슴지 않으려는 민우.


 아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대전 시기의 민우는, 소중한 전우이자 친구였던 민우는 원래 이러지 않았으니까.

 깐깐한 잔소리꾼이었지만 지금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한은 아니었다.

 만일 대전 시기의 민우가 이런 성격이었다면 진작에 관계를 끊었을 터.


 무엇이 그를 지금처럼 바꿔버렸을까.


 정인은 그 답을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의 존재.


 망가지고 뒤틀린 자신의 존재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나약하고 볼품없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민우는 괴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분명히 슬퍼하고 분노하고 실망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정인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성난 표정을 지으려고 했다.


 하지만 정인의 얼굴에 떠오른 색채는 옅은 안도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서야 확신한 것이다.

 민우는 자신을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는 걸.

 역하고도 기분 좋은 확신이었다.



 “…민우야.”
 “네, 누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러면…”



 정인은 희미한 미소를 띈 채 대답했다.



 “연합, 떠나자고. 어디로든 가면 되지 않겠냐. 우리 둘이서.”

 





 안방에서 요란한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린 건 그때였다.

 





*

 





 전쟁 이전의 병원에 대해서 이런 농담이 있었다.

 빅 파이브든 동네 스무 병상짜리 병원이든, 장례식장과 편의시설이 없으면 한 달을 못 버티고 망한다고.


 지금에 이르러서야 해당사항이 없는 말이지만 어쨌든, 장례식장이란 병원의 핵심 시설 중의 하나였다.

 벌어들이는 돈 면에서도, 편의성 측면에서도.


 특히 서울은 인구도 병원 수도 많았기에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비는 날이 별로 없다고 할 수 있었다.

 연합 중앙병원으로 개명한 지금도 마찬가지.



 암센터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올라온 위치에 서 있는 장례식장.

 서울연합이 들어선 뒤 병원 본관보다도 가장 먼저 수리가 끝난 장소였다.

 옆의 옛 연구동 터에 새로 세운 화장터와 함께.

 어쨌든 치료해야 될 사람보다도 처리해야 할 시체가 훨씬 많았으니까.


 그 취지에 걸맞게 오늘도 화장터의 굴뚝에서는 새까만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옛날이었다면 환경 보호니 님비니 분명 시끄러웠을 터.

 그러나 지금의 연합에서는 그런 배부른 불평을 늘어놓을 사람은 없었다.


 소각로 안에서 평등하게 불탄 시체들의 넋은 다 같이 손을 잡고 하늘로 녹아 사라져갔다.

 제대로 된 치료조차 못 받고 DOA(*도착 시 사망) 선언을 받은 난민들도.

 잔존한 현대의학의 정수를 쏟아 부은 끝에 숨을 거둔 VIP룸의 연합 간부도.



 햇살 사이로 섞여가는 저승길 행렬을 쳐다보던 최지훈은 문득 중얼거렸다.



 “저 안에 부장님도 있겠군…”



 옆에서 까만 상복을 입은 아람이 퉁명스레 대꾸했다.



 “차장님이 그렇게 감상적인 성격인 줄은 몰랐는데요. 장례식까지 직접 찾아오시더니...”
 “연합의 창시자나 다름없으니까, 최소한의 예의라는 거지요.”



 그렇게 대답한 최지훈은 먼지가 내려앉은 안경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아람은 딱히 돌려줄 말도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더니 그나마 자신의 상사, 최지훈이라도 온 걸 고맙게 여겨야 할 판이었으니.


 정확히는 명목 상의 상사였지만.



 “들어가지요. 일이 바빠서 인사만 드리고 가 봐야겠습니다.”



 바쁜 발걸음을 옮기는 최지훈의 뒤를 아람이 조심스레 따라갔다.

 어딘가 거리끼는 기색으로 약간 거리를 두고.



 이면세계 대전 전의 장례식장이 격조와 품위를 지킨 공간이었다면, 지금은 최소한도의 시설만 갖춰 놓은 상태.

 1층 복도에 따개비처럼 다닥다닥 붙은 빈소에서는 사람들과 곡소리가 끝없이 오갔다.

 조문객을 대접할 응접실은 아예 없었다.

 필요가 없기도 했거니와, 최대한 많은 빈소를 들여 놓으려니 그런 게 들어설 공간조차 없었으니까.


 최지훈은 입구의 전광판을 슬쩍 눈으로 훑었다.

 나열되어 있는 무수한 숫자와 이름.

 그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게 있었다.


 3층 1호실.

 고인 하 율.

 상주 양 아람.

 발인 7월 15일.



 최지훈과 아람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갔다.

 2층까지의 번잡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전쟁 이전으로 돌아온 것 마냥 조용했다.


 빈소 너댓 개가 한번에 들어갈 만큼 넓은 응접실.

 그러나 인기척은 전혀 없이, 최지훈과 아람의 발소리만이 적적한 공간을 채웠다.


 최지훈은 신발을 벗고 빈소로 들어서서 제단 앞에 섰다.

 제단 위에 놓여 있던 하율의 사진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작은 체구에 비해 약간 크고 빳빳한 정장.

 가벼운 웨이브가 들어간 머리카락은 헤어핀으로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흰 배경을 바탕으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정면을 바라보는 하율.

 꼭 취업준비생 같았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의 병색 완연한 모습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풋풋한 외모.


 최지훈은 그런 감상을 받으며 중얼거렸다.



 “전쟁 전에 찍은 사진인가 봅니다?”

 “옛날에 무슨 시험 치기 전에 찍었던 사진이라던데, 율이 언니 휴대폰에 그거 밖에 안 남아 있더라고요. 아무리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 최대한 예쁜 걸로 써야죠.”



 언니라는 말에 최지훈은 희한한 사람 보듯 아람을 잠시 돌아봤다.

 빈소 구석에 선 아람은 그 시선을 외면하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든 모양이군요. 뭐, 그만큼 정이 들었으니 하율 부장도 당신을 믿었겠지만 말입니다.”

 “…”


 “사전연명의향서를 썼다지요? 심장마비가 와도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보내 달라고. 이번에 부산 정부군의 침공 계획을 예언하면서 자신의 미래라도 봤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갈 줄은 몰랐겠지만요. 저보다도 열 살은 더 어린데, 안타깝군요. 인공심폐기라도 달고 버텼으면 그래도 한 달은 더 살았을 텐데 말입니다.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를 노릇이군요.”

 “그으, 차장님. 일 바쁘신 거 아니었나요.”



 노골적으로 대화를 피하는 아람을 보며 최지훈은 피식 웃었다.


 하율의 임시 비서, 양아람.

 표면상으로는 그랬지만, 실제로는 마법소녀관리부에 대한 감시요원으로 대공부에서 심은 프락치였다.

 권력을 잃은 하율이 혹여 마법소녀들을 모아 친위 쿠데타 같은 짓이라도 벌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그런 대공부의 걱정과는 다르게 하율은 묵묵히 자기 일만 하면서 지냈을 뿐.


 덕분에 양아람이 빼낸 정보 중 ‘쓸모 있는’ 정보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최지훈도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었다.

 오늘까지는.



 별 생각없이 찔러본 말에 이 정도의 회피 반응.

 아람이 단순히 하율에게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있었을 뿐이라면, 이런 식으로 피할 게 아니라 화를 냈을 터였다.

 지금 아람의 이런 반응은, 그녀가 하율의 급사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하율이 심폐소생술을 포기한 것?


 아니면, 국정원의 이중 스파이로서 하율을 암살한 것?



 최지훈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실질적인 힘을 잃고 상징적 의미만 남은 마법소녀 아쿠아마린.

 그 존재는 이제 연합에 있어서 불안요소일 뿐.

 국정원이 대신 치워줬다면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바였으니까.


 아람은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와 불안함을 간신히 감춘 채, 제단 앞에서 절을 하는 최지훈을 노려봤다.



 ‘눈치챈 건 아니겠지…?’



 만일 최지훈이 자신이 국정원의 흑색요원이라는 걸 눈치챘다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의심이기도 했다.

 근 열흘 동안, 하율의 심장은 조금씩이나마 호전되고 있었으니까.


 원래라면 심장마비로 급사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아쿠아마린.

 그러나 주치의가 재고가 얼마 없다던 엔트레스토라는 약을 추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10%까지 떨어졌던 심실 수축력이 일주일만에 20%까지 회복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하율이 급사했으니, 옆에 있는 자신을 가장 먼저 의심할 수밖에.



 ‘탈출은…’



 불가능.

 곧 닥쳐올 개전 때문에 교통은 제한되어 있고, ‘본사’에서 복귀 명령조차 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별도의 지령이 없다면 자신의 임무는 단 하나 뿐이었다.

 들킬 때까지 연합 본부에서 최대한의 정보를 빼내는 것.

 설령 들켜서 처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아람이 내심 안절부절 못하는 사이, 두 번 절을 하고 합장까지 한 최지훈은 미련없이 몸을 돌렸다.

 원래라면 향을 피우고 송별주라도 한 잔 따라야겠지만, 지금 시대에 그런 건 사치였다.



 “가시게요?”
 “뭐, 내가 있으면 양아람 사원이 불편해 할 것 같으니까 자리를 비워드려야 겠지요. ‘율이 언니’ 잘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비아냥대는 듯한 말에 아람은 입 안을 살짝 깨물었다.

 느물거리는 최지훈의 표정에서는 속내를 읽기 어려웠다.


 양말이 바닥을 스치는 조용한 마찰음.

 구두를 바닥에 툭툭 치는 단속적인 소리.


 자리에서 일어나는 최지훈을 보며 아람이 조마조마한 마음을 한참 다스릴 때였다.

 휴대폰의 벨소리가 정적을 깬 건.



 “뭐지?”



 최지훈은 인상을 찡그리며 정장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쳐다봤다.

 발신자 표시 제한.

 대공부 내부에서만 사용하는 폰이었기에 부하 직원일 터였다.



 “한 시간 정도는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조용히 중얼거린 최지훈은 빈소 밖으로 나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통화 버튼을 눌렀다.



 “통신보안. 스퀘어 에닉스. 무슨 일입니까?”

 [통신보안, 액티비전 블리자드, 최 차장님. 급하게 복귀하셔야 할 거 같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설명을 하세요.”



 짜증을 부리던 그는 직후 빠르게 이어진 말을 듣고 안색이 변했다.



 [제2군단, 제3군단, 제5군단이 일제히 진공을 시작했습니다. 상주하고 영덕, 안동 방면 방위군하고는 통신이 끊겼고, 청주시 방위군은 제5군단의 포격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아람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최지훈의 등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개전 소식을 듣고 달려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


 하율의 예언을 곁에서 같이 지켜봤기에 내용은 다 암기하고 있었다.

 국정원에 그 내용을 그대로 암호문으로 보냈으니, 부산 정부가 개전을 열흘이나 앞당긴 것도 당연한 결과.

 덕분에 지난 번에 받은 7월 25일이라는 암살 기한이 15일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하루였다.


 아람은 제단 위에 놓인 영정을 살짝 쳐다봤다.

 사진 속 하율은 어색하게, 하지만 순해 보이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얼굴과는 정반대.


 그 미소를 견디지 못한 아람은 고개를 떨구고 한숨을 쉬었다.



 아람은 VX용액 앰플을 핸드백에서 꺼내 만지작거렸다.

 원래라면 만에 하나 벌어질 누출에 대비해서 장갑을 끼고 만져야 하는 물건.

 하지만 지금 그 안의 내용물은 텅 비어 있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깔끔한 죽음은 아니었다.

 하율은 신경작용제에 노출된 사람의 교과서적인 경과를 밟았다.

 처음에는 식은땀.

 이후 주체할 수 없이 솟아나오는 침과 눈물.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다리와 전신의 근육.

 호흡근도 마찬가지였다.


 필사적으로 호흡하면서 보랏빛으로 질린 입술로, 아람이라는 이름을 부르던 하율.

 숨이 갑자기 너무 차다고, 산소 좀 올려 달라고 필사적으로 부르짖던 하율.

 자신의 폐에 신경작용제를 넣은 게 누군지도 모르고.


 거친 숨결은 곧 껄떡거리는 호흡으로, 실핏줄이 터질 정도로 부릅떴던 눈은 뿌옇게 흐려지며 반쯤 감기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마침내 고통스러운 생을 마감한 하율.


 자신이 죽인 ‘율이 언니’.



 아람은 다시 한 번, 투명한 깨진 앰플을 손가락 안에서 굴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괜찮아. 난 아무렇지도 않아. 동생들을 생각하자. 아영이, 가람이, 가윤이. 잘 지내고 있을 거야. 여기 난민들처럼 굶어 죽지도 않고, 노숙자들처럼 구걸할 필요도 없이. 인간다운 삶을. 이 언니는, 누나는 아무렇지도 않아.’



 그렇게 생각하면, 속을 불태우는 죄책감 같은 건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





 

 정인과 민우.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와, 연합의 전략물자관리부 사원.

 둘은 휴대폰 화면을 본 뒤, 서로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10시 28분 연합 남부 경계로 부산 정부군 침공 개시]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는 금일 내로 연합 본부로 즉시 출석할 것]






다음 편 링크


22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