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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2편 입니다.




오늘은 좀 내용이 짧습니다.

쓰다 보니까 분량이 매우 길어져서 분할해서 올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

뒷내용을 아직 다 쓴 게 아니라서, 아마 23화는 내일이나 모레 쯤 올라갈 것 같습니다.


여담이지만, 대회용으로 처음 쓰기 시작한 뒤로 벌써 반 년이나 지났네요.

처음에는 이렇게 길어질 줄 상상도 못했는데 말입니다.

뭔가 쓰다 보니까 이 내용도 넣고 싶고 저 내용도 쓰고 싶고

이런 욕심을 주체 못한 탓이 큰 것 같습니다.


최근 업로드 주기가 개박살난 점은 정말로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현생 때문에 바빴던 점도 있지만, 한 번 손을 놓기 시작하니 관성이 사라지고

그러다 보니 갖가지 핑계로 다른 걸 쓰거나, 아예 안 쓰고 자버린 날도 많은 것 같습니다.


키보드 앞에 앉으면 이젠 '오늘은 뭘 어떻게 쓸까' 하는 기대감보다는 

'아 오늘은 뭘 어떻게 써야 하지'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아마 깜냥에 맞지 않게 너무 긴 호흡으로 글을 써서 그런 듯합니다.

반성해야 할 점입니다. 따흐흑


그래도 이왕 여기까지 달린 거 완결까지는 써야지요

게임으로 치면 이미 가챠에 수백 단위로 꼴아박은 셈입니다

지금까지 쓴 플롯이 아까워서라도 끝까지 갑니다

조회수 1이 되더라도 갑니다ㅏㅏㅏ

가즈아아ㅏㅏㅏㅏㅏ아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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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2.



 터널 입구에 매달린 빛 바랜 졸음운전 방지 표지판.

 근 3년간 교통이 거의 없었기에 누구도 보수하지 않은 철제 구조물 위에는, 파랑새 한 가족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좌우의 야트막한 야산은 인적 없이 수풀이 무성했기에 먹이는 언제나 풍부했다.

 그래서 어미 파랑새는 무럭무럭 커가는 새끼들에게 한참 먹이를 나르고 있던 참이었다.

 어미 파랑새의 부리에서 새끼의 뱃속으로 넘어가는 잘 소화된 곤충 몇 마리.


 다시 허기지기 시작한 배를 채우고자 어미 새가 막 둥지를 뜬 시점이었다.

 육중한 헬리콥터의 엔진소리와 무한궤도가 아스팔트를 긁는 소음이 둥지를 뒤흔든 건.



 날아가는 파랑새의 밑으로, 문의1터널을 줄지어 빠져나오는 K200A1 보병전투차와 K-511 트럭의 행렬.

 그 위로 길을 인도하듯, 수리온과 치누크가 찢어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비행했다.



 선희는 귀마개를 뚫고 들려오는 로터 소음을 흘려 보내며, 창 너머의 호수를 쳐다봤다.

 폭 150m, 길이 600m 정도의 노현지.

 수면은 당진영덕고속도로의 때아닌 소란을 모른다는 듯 잠잠히 일렁였다.

 호수 옆의 산기슭을 타고 갈지자 모양으로 퍼진 논밭은 버려진 지 오래된 모양.

 들풀과 잡초가 폐농가를 둘러싸듯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 구미였나? 어디였더라… 아무튼 거기에서 본 광경하고 비슷한 걸.’



 썩 떠올리고 싶은 광경은 아니었다.

 이면세계 대전의 지옥 같은 매일 속에서 본 모습이었으니까.


 심란한 기시감을 느끼면서 선희는 다시 치누크 안으로 시선을 돌린 뒤 눈을 감았다.


 치누크 안에 탑승한 수색부대원들은 꽤나 긴장한 듯하면서도, 간간히 그녀 쪽을 힐끔거렸다.

 비단 대원들 뿐만 아니라 고정줄을 잡고 있는 소대장도 마찬가지로, 신기한 걸 보는 마냥.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디지털 전투복과 방탄모, 가벼운 군장 차림의 젊은 여자.

 옷깃에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있지만 무장은 허리춤에 찬 권총 한 자루 뿐.

 생김새는 민간인 티가 풀풀 나지만 지금 상황이 매우 익숙한 듯 덤덤한 태도였다.

 심지어 소대장도 불안증이 도진 것 마냥 괜히 서성거리고 있는 판국에.

 희한할 법도 했다.


 선희는 시선이 썩 거슬렸지만 그냥 무시했다.

 굳이 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생각도 없었을 뿐더러, 왜 그런 시선을 보내는지는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세계 대전이 공식적으로 종결된 지 3년 반.

 지금 복무 중인 신병들이나 짬 모자란 부사관들이 마법소녀와 같이 작전을 뛰어봤을 리 없으니까.



 ‘작전지역까지 도착하려면 대충 6-7분 정도 남았겠네.’



 얕은 숨을 내쉬며 선희는 눈을 감았다.

 그 동안 딱히 자신이 할 일은 없었으니 긴장이라도 조금 풀려고 생각한 것이다.



 연합의 청주방위군 거점인 구 충북도청과 청주국제공항은 이미 2시간 전에 무너진 상태.

 남아있는 잔당들은 앞서 투입된 제6보병사단이 소탕 중일 터였다.

 천안에서 오는 연합의 증원군은 오창과 옥산JC에서 제1기갑여단에게 분쇄당하는 중.

 거기다 제5포병여단이 지속적으로 천안을 두들기고 있었으니 천안의 연합 병력은 제 몸 건사하기도 힘들 게 분명했다.

 충주시의 연합 방위군 역시 문경과 괴산을 통해 북상하는 제2군단을 막는 것만 급급할 터.


 그러니 자신이 신경 써야할 건 이번 작전 목표를 달성하는 것 뿐.

 술렁이는 마음을 도착할 때까지 가라앉히기만 하면 된다.



 다만 옆에 앉아있는 소녀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선희는 허벅지를 건드리는 손길을 느끼고 눈을 떴다.

 그녀를 깨운 건 안전벨트로 매인 몸을 한껏 기울인, 학생 티를 채 벗지 못한 여자애.

 선희와 마찬가지로 군복과 방탄모, 가벼운 군장을 하고 있었다.

 힘껏 벌린 입이 뭔가를 떠들고 있는 듯했으나 귀마개 때문에 선희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답답하다는 듯 몇 번을 반복해서 뻐끔거리던 소녀.

 선희는 무시할까 생각하다가 어쩔 수 없이 귀마개를 뺐다.


 순간 고막을 두드리는 엔진 폭음.

 그 사이를 뚫고 하이톤의 목소리가 날아들어왔다.



 “우리 언제쯤 도착하나요, 선배님!!”

 “한 6분!”



 마주 소리지르며 손가락 여섯 개를 펼친 선희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이전에 혜인의 건으로 경찰조사를 받은 이후, 잊을 만하면 이렇게 두통이 오곤 했다.

 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로할 때.


 이번 두통의 근원은 눈 앞의 소녀, 최은정.

 마법소녀 아이보리.

 그리고 자신의 부사수.



 선희는 뻐근한 뒷목을 손으로 꾹꾹 주물렀다.

 그녀의 손등을 스치는 방탄모 모서리의 딱딱한 감촉.

 그리고 손가락 끝에 자리잡은, 경추 위의 불룩한 칩.


 선희는 그 칩 때문에 머리가 더 아픈 걸지도 모른다고 문득 생각했다.



 4월에 통과된 마법소녀 특별관리법 개정안.

 이후 정부에 등록된 모든 마법소녀는 의무적으로 이 임플란트를 시술 받아야 했다.

 명목상으로든 실질적으로든, 범죄자에게 붙이는 전자 발찌나 다름없는 기구.

 심지어 수술로도 제거가 불가능하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억지로 제거하려고 하면 전기충격을 준다던가, 폭발한다던가.


 일부 ‘빽’이 있는 마법소녀들은 이 시술을 피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가족이 국회의원이라든지, 아니면 어딘가의 사장 딸이라든지.


 하지만 선희는 결국 부산 연제구청의 일개 공무원에 불과할 뿐.

 이 시술을 피할 방법은 없었던 것이다.



 선희는 인상을 찡그린 채 마력을 살짝 끌어올렸다.

 그녀의 머리 주변에서 무색의 마력광이 일어나며, 옆의 공간이 살짝 일렁였다.

 갑작스럽게 마력을 감지한 은정은 흠칫하며 몸을 살짝 뒤로 뺐다.


 그 모습에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몇몇 수색부대원들.

 선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머리에 통증 경감 마법을 썼다.

 주력은 방어 마법이지만, 이런 간단한 마법 정도는 쓸 줄 알았으니까.

 두통약을 개인적으로 챙겨 오긴 했으나 아껴 먹어야 했다.

 이면세계 대전 때는 고무줄 하나, 물 한 병조차 모자랐기에 자연스레 든 버릇이었다.



 “후우…”



 머리의 지끈거림이 조금 가신 선희는 한숨을 쉬며 마력을 가라앉혔다.

 허깨비처럼 사라지는 투명한 마력광.

 수색부대원들은 뭘 잘못 봤나 싶어서 다시 시선을 거뒀다.


 기분이 조금 괜찮아진 선희는 옆의 은정을 곁눈질로 쳐다봤다.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은정.

 어떻게 변신도 안 하고 마법을 쓸 수 있는지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선희는 다시금 심란한 기분을 느꼈다.

 부사수인 은정의 경력을 다시 떠올린 것이다.



 마법소녀 아이보리, 최은정. 19살.

 물체에 마력을 부여해서 투사하는 마법이 주력.

 그 때문에 화력 담당으로 선희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었다.

 방어막이 주력인 선희로서는 적에게 충분한 파괴력을 투사하기에는 부족했기에.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28년도, 중학생이었던 그녀가 계약했을 때, 전쟁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마신 다섯 중 셋이 소멸하고, 서울의 바알과 황해의 포르네우스만 살아남아 있던 시점.

 당시 미성년자였기에 당시 그녀는 징집을 피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이면세계 대전을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다.

 때문에 이번 연합과의 전쟁이 실질적으로 그녀가 겪게 된 첫 전투다.


 좋게 말하면 신병, 속된 말로는 짬찌.

 그런 은정이 과연 역할은커녕 사람 구실은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선희는 은정이 들고 있는 활과 군장 밑에 메어 둔 화살을 쳐다봤다.

 작은 체구에 걸맞는 54인치, 18파운드짜리 리커브 보우.

 앞의 군인들이 무장한 K2C1 소총이나 K15 경기관총에 비하면 장난감 같아 보이는 물건.


 은정은 선희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멋쩍게 웃으며 소리쳤다.



 “이거요! 총보다 이게 더 쓰기 편하더라고요! 고등학교 때부터 양궁 배워서 저 잘 쏴요!”



 조금 전 수색대원들의 신기한 듯한 시선은 이 때문이기도 했다.

 총포탄이 난무하는 현대전장에서 활을 들고 설치는 여자애.

 옷깃의 소위 계급장 따위로는 그들의 호기심을 막을 순 없었으니까.


 그와는 별개로, 선희는 그런 은정이 도저히 못 미더웠다.

 물론 작전 훈련에서 확인한 사거리와 화력은 충분.

 시간만 준다면 화살 한 발로 수 킬로미터 밖의 빌딩도 무너뜨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마법 발동에 걸리는 시간.

 마력 화살을 집중해서 한 번 쏠 시간이면 소총 탄창 두 개를 비울 수 있다.


 그리고 선희라면, 그 시간에 방어막 스무 개를 중첩할 수 있다.

 처음 마법소녀가 되었을 때 마법의 매개체로 삼았던 요술봉 없이도.



 선희는 이면세계 대전 초기에 죽어 나간 마법소녀들을 떠올렸다.

 당시 마법에 저런 ‘불필요한’ 것들이 필요했던 마법소녀들은 대부분 한 달을 못 넘겼다.

 살아남은 마법소녀들은 모든 매개체를 버리고, 최대한 빠르게 마법을 발동하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


 그걸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그녀 입장에서는 은정이 염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사수와 부사수 관계라 하더라도 24시간 옆에 붙어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만일 이게 이면세계 대전이었다면. 초월적인 반사신경과 속도를 가진 몬스터들이 상대라면, 은정은 화살을 재기도 전에 죽을 터.



 “총에 익숙해져! 하다못해 권총이라도!”
 “네?”



 멍청하게 반문하는 은정의 허리춤에는 한 번도 꺼낸 적 없는 듯 깔끔한 홀스터와 K5 권총이 있었다.


 선희는 문득 대전 시기의 농담을 떠올렸다.

 서로 장난삼아 ‘이거 적지 한복판에서 마력 떨어지면 그나마 깔끔하게 죽으라고 준 거 아니냐’던 걸.


 그런 권총이라도 은정에게는 활보다는 훨씬 나을 터.

 권총의 유효 사거리가 활보다도 훨씬 짧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마력으로 강화하면 그만이니까.


 중요한 건 연사력.

 그리고 마법을 발동하기까지 걸리는 시간.



 선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젓더니, 남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고 떫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제식 총기 정도는 교육은 했어야지…’



 소집 전 업무 인수인계 때문에 은정에게 시간을 전혀 할애하지 못했던 게 문제였다.

 덕분에 방어 담당인 자신만 고생할 게 눈에 선했다.



 ‘그러고 보면 후임자는 잘 하고 있을지 모르겠네. 연제구 진상들 많은데.’



 문득 그런 생각이 선희의 뇌리를 스쳤다.

 선희는 곧 그 생각을 지워버리려는 듯 눈을 감았다.


 작년 마법소녀 특별법이 통과되고 나서, 연제구청에서 자신의 취급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높으신 분들이 노골적으로 위험분자라고 낙인 찍은 마법소녀라는 존재.

 안전무사, 복지부동이 모토인 공무원들이 친해지고 싶어할 리가 없다.

 그나마 체면 차린다고, 대놓고 자리를 빼 버리진 않고 은근히 권고사직 이야기를 꺼내는 게 배려의 전부.


 몇 번이고 원하는 대로 그만둬줄까 생각했지만, 자신만 바라보는 동생들을 생각하면 그만두지도 못하던 게 현실.

 그런 사람들이 고생하든 말든 선희에게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했다.


 그때 인터컴에서 치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조종사의 약간 잠긴 목소리가 치누크 내부에 울렸다.



 [착륙 지점까지 2.5km.]



 선희는 좁은 창 밖을 내다봤다.

 밑에는 충주와 천안 사이를 봉쇄하기 위해 중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제105기계화보병대대.

 그 왼쪽으로는 야트막한 야산, 오른쪽으로는 청주 시가지가 펼쳐져 있었다.



 세종시에서 가미긴을 몰아내기 위해 기갑사단과 함께 이동하며 본 풍경이 그녀가 기억하는 청주의 전부.

 도심까지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당시 본 광경하고 지금 청주 도심은 전혀 차이가 없었다.

 마치 27년 9월로부터 한 줌의 시간조차 흐르지 않은 듯.


 무덤 같은 잔해만 남은 무수한 아파트단지와 빌라단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도로 위에는 쏟아진 콘크리트 철근 잔해가 쌓여 있었다.

 반대쪽의 녹음으로 뒤덮인 낮은 산과는 색조부터 다른 폐허.

 멀리 보이는 7층짜리 백화점 건물, 그 너머의 넓은 상아색 공장들이 온전한 게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방탄모 끈을 꽉 동여맨 소대장이 갈라지는 고함을 질렀다.



 “이번 작전 목표는 현대백화점에서 하차해서 2시 방향의 하이닉스 M11 반도체 생산 기지와 11시 방향의 제2공장 인근을 소탕하는 것이다! 연합 잔당이 남아있을 수 있으니 다들 정신 바짝 차리고 훈련한 대로만 잘 하자! 알겠냐!”

 “예!!”



 우렁찬, 하지만 일말의 불안함이 담긴 함성.

 조금은 느슨한 분위기였던 수색대원들 사이에서 긴장이 감돌았다.

 한 번도 가 본적 없는 곳에서,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와 목숨을 걸고 드잡이질을 벌여야 한다는 불안감이었다.


 목표인 하이닉스 반도체단지는 아직 상당수의 건물이 온전히 남아있는 곳.

 포병대가 이미 청주시 곳곳을 선제타격으로 무너뜨렸지만, 하이닉스 청주캠퍼스와 옆의 LG화학공장은 예외였다.

 그 두 군데가 아니라면 제5군단이 청주를 점령할 이유 자체가 없으니까.


 살아남은 연합 방위군들도 당연히 반도체단지와 화학공장으로 집결할 터.

 그 말은 곧 시가전, 어디서 총탄이 날아오고 부비트랩이 터져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전장이 됨을 의미했다.

 아무리 기계화보병대대와 마법소녀의 지원이 있다 해도, 다들 분위기가 경직될 수밖에.


 자연스럽게 은정 역시 잔뜩 굳은 표정으로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자애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공기였다.

 짙은 보조개가 팰 정도로 앙다문 입술.

 리커브 보우를 움켜쥔 주먹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선희는 그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예전의 자신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저러면 예지 언니가 매번 손을 잡아줬었지. 그러고 보면 예지 언니가 연락이 안 된 것도 벌써 1년짼데… 어떻게 됐는지는 몰라도 잘 지내고 있었으면 좋겠는데.’



 한참 긴장하고 있던 은정은, 장갑 위로 자신의 손등을 가볍게 누르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저기…?”



 선희는 저도 모르게 은정의 주먹 위에 얹힌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뭐라 말할지 잠시 고민하던 선희는, 아무렇게나 입을 열었다.

 어차피 로터 소리가 시끄러워서 긴 말을 해봐야 들리지도 않을 터였다.



 “괜찮아.”



 결코 괜찮지는 않을 것이다.

 예지도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언제나 이런 말을 했었다.

 괜찮을 거라고.


 예지가 그럴 때는 언제나 심각한 상황이었다.

 대구의 이면세계 안에서 소대가 통째로 고립되었을 때.

 김천에서 마신 바르바토스가 현실의 경계를 찢고 강림했을 때.

 순천에서 가미긴의 계략에 걸려 마신 본인을 포함한 불사신 군단에게 포위당했을 때.


 선희는 그때 예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은정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얄팍한 위로 밖에 없었으니까.

 예지가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런 긴장감이 무색하게, 착륙과 하차는 무난하니 진행됐다.


 반쯤 무너진 현대백화점 충청점 옆의 넓은 주차장.

 먼저 도착하여 하차를 완료한 치누크 헬기가 떠나가는 모습이 갓 내린 선희의 눈에 들어왔다.

 뒤를 이어, 목표인 M11 공장 옥상에서 다른 대원들이 레펠 강하하는 모습 또한.



 선발대로 도착한 수색대원들은 이미 분주히 움직이는 중이었다.

 주차장 이곳저곳에 진지와 바리케이드를 치고, 무너진 백화점 귀퉁이에서 쌍안경으로 북쪽 단지를 살피는 등.

 재빠르게 움직이고들 있었지만 어딘가 여유로운 구석들이 있었다.

 적어도 선희가 받은 인상은 그러했다.


 다만 은정은 여전히 긴장을 풀지 못하고 활을 꼭 쥔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선희는 그런 은정의 등을 몇 번 두드려주고는,



 “갈까?”

 “네, 네!”



 소대원들과 함께 현대백화점의 북서쪽 귀퉁이로 이동하며 주변을 살폈다.



 주차장 자체는 엄폐물이 거의 없는 개활지.

 방치된 폐차조차 거의 없었다.

 기껏 해봐야 창문이 다 깨지고 외장이 녹슨 버스 두 대 정도.


 다만 3시 방향의 현대백화점, 10시 방향의 '신영지웰시티 106'이라는 이름의 아파트는 온전했다.

 덕분에 북쪽에서 날아올지도 모르는 포격에 대한 엄폐물은 충분하다 할 수 있었다.


 6시 방향 역시 무너진 아파트 단지로 막힌 상태.

 다만 8시 방향에는 철근 콘크리트 잔해 사이로 수풀이 무성했기에, 대원들이 인근을 수색하고 있었다.


 차량이 출입 가능한 유일한 출입구는 12시 방향의 직지대로.

 선희는 눈을 찡그리고 대로 너머를 살폈다.


 도로 한복판에는 납작해진 채, 바닥 깊숙이 처박힌 자동차가 몇 대 뿐.

 거대한 짐승이 밟기라도 한 듯 발자국 모양으로 아스팔트가 깨져 있었다.

 대전 시기에 거대 괴수라도 출현한 모양이었다.


 북서쪽에는 건물 몇 채의 잔해와 함께 줄지어 서 있는 사일로.

 두 개는 완전히 무너졌고, 나머지 다섯 개는 온전했다.

 그 상공에는 자신들과 같이 진입한 수리온 헬기 한 대가 선회하며 주변을 정찰 중인 듯했다.



 선희는 시선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목표인 하이닉스 M11 공장 옆의 도로는 콘크리트 더미로 막혀 있는 상태.

 제105기계화보병대대에서 지원 나온 장갑차 두 대가 그 잔해를 엄폐물 삼아 정차 중이었다.

 좌측으로 20m 정도 거리에는 컨테이너 박스가 비스듬한 각도로 두 채.

 그 너머로는 자동차 정비공장처럼 보이는 3층 높이의 건물이 한 채.


 숨어있는 연합 병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장갑차 한두 대보다 더 좋은 기회를 노리며 숨을 죽이고 있든지.


 그런 생각을 하던 선희의 눈에, 옆의 은정이 빈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들어왔다.



 “…스톱, 스톱!”
 “네? 왜요?”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하는 은정.

 집중이 깨지는 바람에, 시위에 재어졌던 희미한 마력의 화살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선희는 은정의 귀를 재빨리 잡아당기고 뒤로 잡아 끌었다.



 “아야야야.”



 소대장과 몇몇 소대원들의 벙찐 듯한 시선.

 선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울상이 된 은정을 나무랐다.



 “얘가 정신이 있어 없어. 다짜고짜 마법 쏴서 역탐지 당하게?”



 은정이 발사하려던 건 아마도 생명탐색 마법.

 산업단지 내부에 연합 병력이 얼마나 숨어있는지 확인하려고 사용했을 터였다.


 판단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돌입 전에 저격수나 매복 중인 병력을 미리 알아낼 수만 있다면 불필요한 희생을 줄일 수 있으니까.


 산업단지의 연합 병력 측에 마법소녀만 없다면.


 상대에도 마법소녀가 있다면, 이쪽에서 먼저 마법을 쓰는 건 선제공격해달라고 비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물론 선제공격을 당하더라도 마스코트가 기초적인 방어마법 정도는 자동으로 펼쳐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방어막을 구사한다면 대부분의 공격은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다.


 문제는 상대의 수단과 전력을 전혀 모른다는 점.

 예지처럼 예고 없이 정신을 조작하거나, 윤아처럼 인지속도를 넘어선 강력한 공격마법을 쏘는 경우 당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만한 힘을 가진 마법소녀가 흔하지는 않으나, 혹시나 모르는 노릇.


 그런 상황을 대비하려고 상시 방어막을 전개할 수도 없다.

 방어 마법이 마력 효율이 좋다 하더라도, 작전 내내 유지하고 있다간 마력 소진으로 쓰러질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기에 마법을 써서 선탐지 당하는 건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하는 짓이었다.


 냉정하게 판단하면, 상대 측의 마법소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다.

 연합의 일반 병력이야 자신과 은정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관총으로 집중사격이라도 당하지 않는다면 마스코트의 자동방어와 부활로 살 수 있으니까.


 이면세계 내부, 그리고 마신 가미긴과 바알을 상대하며 얻은 피투성이 교훈.

 선희는 그걸 주저리주저리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눈 앞의 수색대원들 앞에서는.



 “죄송해요오…”



 그래서 은정이 왜 안되냐고 따지는 대신 울상을 지으며 사과했을 때, 선희는 내심 다행이라 생각했다.

 눈 앞의 대원들을 버리는 패로 삼을 거라는 이야기를 굳이 안 해도 되었으니까.


 눈치 빠른 소대장과 몇몇 대원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까진 어쩔 수 없었다.

 사실상 인간 모습의 전차, 혹은 그 이상의 전력인 마법소녀.

 그런 존재가 상대 측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발상을 이제야 떠올린 건지.

 아니면 자신들을 그런 마법소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삼겠다는 말에 분노한 건지.


 선희는 그들의 속내까지는 알 수 없었다.

 딱히 그들이 뭐라고 느낄지 관심도 없었고.

 어차피 소대장이라 해도, 사단장 직속인 선희와 은정에게 직접적으로 명령할 권한은 없었다.



 “이동.”



 소대장의 한결 딱딱한 목소리와 함께 조심스럽게 이동하는 대원들.

 선희는 약간 원망스러운 듯 자신을 흘기는 소대원들을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대전 때도 저런 시선은 익숙했으니까.



 대원 두 명이 먼저 대로를 건넌 뒤, 장갑차 옆에서 수신호를 보냈다.

 선희와 은정은 후열에 가까운 위치에서 다른 소대원들을 따라갔다.

 은정은 활을, 선희는 홀스터에서 꺼낸 권총을 손에 쥐고.


 먼저 도착해서 K200A1의 단차장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대장.

 단차장이 인상을 찡그린 채 고개를 젓고, 소대장이 그를 열심히 설득하는 모양새였다.

 선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은 채 기다렸다.


 곧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의 단차장이 장갑차 안으로 들어가더니 해치를 닫았다.

 그러더니 엔진 소리와 함께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장갑차.

 콘크리트 더미에서 좌측으로 돌아서 가는 경로였다.

 자동차 정비공장을 돌아서 들어갈 속셈인 듯.


 소대원들은 장갑차 뒤에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주변의 무너진 건물 잔해를 엄폐물 삼아 나아갔다.


 조용하면서도 무질서한 발자국 소리.

 그리고 그를 묻듯 사방을 울리는 장갑차의 엔진음.


 선희의 손바닥에 진땀이 살짝 배기 시작했다.

 누군가 숨어 있다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은 저 앞의 정비공장.

 마스코트가 있으니 자신이나 은정이 저격 정도로 즉사하진 않을 터.

 다만 대전차로켓의 경우 방어마법이 늦는다면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재수 없으면 치명상까지도.


 만일 그렇게 되어 마스코트의 자동 변신이 발동한다면, 그 마력의 파동을 누군가 감지할 지도 모른다.


 만일에 대비해 남몰래 마력을 집중할 준비를 한 선희.

 그녀의 눈에 정비공장과 컨테이너 박스 사이로 천천히 통과하는 장갑차가 들어왔다.

 소대원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몇몇을 제외하고는 컨테이너와 정비공장 상부를 조준하고 있었다.



 “…”



 은정 역시 긴장 가득한 시선으로 위를 두리번거리며, 화살을 미리 재어 놓은 시위를 살짝 당겼다.

 마력만으로 화살을 만들어 날릴 수도 있지만 시간이 걸리는 편.

 급할 때는 미리 실제 화살을 재어 놓고, 필요할 때 마법을 담는 게 빨리 쏠 수 있었기에.


 모두의 긴장한 시선이 향한 가운데, 장갑차가 거북이처럼 천천히 두 건물 사이를 통과했다.

 무성히 자란 수풀을 부스러뜨리며.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해치가 살짝 열리고 고개를 내민 단차장.

 주변을 둘러본 그가 뒤의 소대장을 향해 팔을 흔들었다.

 괜찮다는 의미였다.



 “전진.”



 통로를 비워주려는 듯 앞으로 좀 더 나아간 장갑차.

 단차장은 장갑차 위에 거치된 M60 기관총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이리저리 시선을 돌렸다.


 정면에는 파괴된 시멘트 공장과 2층짜리 물류창고 사이의 길을 막고 있는 부러진 거목.

 오른쪽의 소로 또한 굳은 시멘트 덩어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람은 건너갈 수 있겠지만 차량이 넘어가기는 어려운 상태.

 왼쪽의 개활지로 빙 둘러 가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장갑차가 좌회전하는 사이, 소대원들은 조심스럽게 장갑차가 밀고 간 수풀 사이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가며, 당겨진 시위를 천천히 놓은 뒤 안도의 한숨을 쉬는 은정.


 아직 마력을 풀지 않은 선희가 그녀를 쳐다보며 한 마디 했다.



 “은정아, 긴장 풀지 말-“



 직후, 로켓에 맞은 장갑차가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충격파와 파편에 맞고 쓰러지는 소대원 한 명.

 다른 수색대원들은 엄폐물을 찾아 우르르 흩어졌다.

 선희 또한 마찬가지.

 그녀는 귀를 막고 넘어진 은정을 질질 끌어, 수풀 옆의 폐차 뒤로 밀어 넣었다.



 “꺽.”



 누군가의 단말마.

 뒤를 이어 쏟아지는 총성.

 시멘트와 금속, 슬레이트와 총탄이 부딪히는 소리가 번개 치듯 울렸다.



 “매복이다, 씨발 새끼들!”
 “쏴! 쏴!”
 “시멘트 공장 옆 창고! 창고에서 온다!”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듯,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바뀌는 단지.

 곳곳에서 폭음과 총성이 울렸다.


 선희는 폐차 뒤에 주저앉은 뒤 약간 찌릿한 느낌이 드는 옆구리를 털었다.

 어느새 펼쳐진 반투명한 방어막.

 그 위에 박혀 옷을 누르고 있던, 찌그러진 금속 덩어리 두 개.

 저도 모르는 새 두 발 맞은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내장을 쏟으며 바닥을 기고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한 선희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꼭 감고 있는 은정의 어깨를 후려쳤다.



 “은정아, 야, 최은정!”
 “어, 언니, 언니.”



 정신을 못 차리고 품에 엉겨 붙으려는 은정.

 때마침 누가 수류탄이라도 던졌는지, 창고 근처에서 쿵 하는 폭음이 울렸다.

 은정은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악! 아아악!”

 “정신차려! 훈련 안 받았어?”
 “차, 차자, 차장 아저, 아저씨가, 그, 아저씨가, 언니, 폭죽처럼. 펑 하고, 팔이, 새까만 팔이.”



 정신이 나간 듯, 은정은 활도 놓친 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렸다.


 로켓에 맞고 장갑차가 폭발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날아간 승무원들.

 자신의 코 앞까지 튕겨 날아온 단차장의 불타는 팔.

 작년까지 여고생에 불과했던 은정이 처음으로 본 사람의 죽음이었다.

 패닉에 빠지는 것도 당연지사.


 은정은 두 팔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폐차 범퍼에 기대 웅크린 그녀의 등에 전해지는 콩 볶는 듯한 총격의 진동.

 처음 헬기를 탔을 때의 들뜬 감정, 폐허가 된 청주시 위를 날며 느낀 긴장감.

 그런 것들은 하얗게 지워지고 남은 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공포 뿐.

 감은 눈꺼풀 속에서는 아직도 찢겨진 사람의 팔이 얼룩처럼 아른거렸다.


 선희는 은정의 따귀를 세차게 후려쳤다.

 한 번, 두 번.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얻어맞은 은정의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일어나!”



 돌아오는 물기 고인 멍한 시선.

 선희는 그런 은정의 멱살을 잡고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리커브 보우도 회수하는 건 잊지 않고.


 선희는 은정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뒤로 달렸다.

 머리와 종아리 부근에 불똥과 함께 따끔한 느낌이 몇 번 들었지만 선희는 무시했다.

 마스코트의 자동방어가 무한한 건 아니지만 5.56mm 수십 발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으니까.



 “아악! 꺄아악!”



 반대로 총탄이 몸을 두드릴 때마다 비명을 지르는 은정.

 발은 정신없이 놀리고 있었지만 무릎이 자꾸 푹푹 꺾였다.


 그런 그녀의 눈에, 태평하게 바닥에 포복해 있는 대원 한 명이 눈에 들어왔다.

 방탄모도 아무렇게나 옆에 흘린 채.


 은정은 저도 모르게 빨리 피하라고 소리치려고 했다.

 대원의 터진 머리에서 삐져나온 분홍빛 뇌를 보기 전까지는.


 포복한 사람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시체였다.

 안색이 허옇게 질린 은정이 딸꾹질을 하기 시작했다.


 선희는 그 시체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정비공장 옆의 컨테이너 박스 뒤로 몸을 숨겼다.



 선객은 5명.

 대원 두 명이 컨테이너 모서리로 팔만 내민 채 물류창고 쪽으로 대응사격을 가하고 있었다.

 소대장은 이미 피범벅이 된 왼팔을 다른 한 명의 도움을 받아 지혈대로 꽉 조르는 중.


 은정은 한결 줄어든 총소리에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다쳤습니까?”



 소대장의 물음에 선희는 고개를 저으며, 몸을 낮춘 채 컨테이너 모서리 너머로 시선을 보냈다.

 총격이 날아오는 방향은 파괴된 시멘트 공장 옆의 2층짜리 물류창고.

 1층과 2층의 창문이란 창문마다 끊임없이 화염이 번뜩이고 화약연기가 올라왔다.

 정확한 수를 추산하긴 어려웠지만 못해도 10명은 넘는 듯했다.


 물류창고의 두꺼운 벽에는 새까만 폭발흔이 두 개.

 조금 전 누군가 던진 수류탄이 남긴 자국인 듯했다.

 창문은 깨졌지만 안의 연합 방위군에게는 유의미한 피해를 주지 못한 모양.


 반대로 이쪽의 피해는 이미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뜨거운 시멘트 바닥에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그 중에는 판저파우스트 사수도 포함되어 있었다.


 첫 기습으로 못해도 여덟 명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은 상황.


 선희는 잠시 은정을 돌아봤다.

 표정이 완전히 풀린 것이 넋을 놓은 모양.

 그런 그녀의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듯, 소대장이 수통의 물을 그녀에게 먹이는 모습이 선희의 눈에 들어왔다.



 “소위님, 정신이 좀 듭니까?”



 소대장의 말에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몇 번 하던 은정은, 곧 정신없이 물을 들이켰다.

 아무래도 물을 마실 정신은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시선을 다시 돌린 선희를 소대장이 불렀다.



 “중위님?”



 개활지로 우회하는 소대원 네 명을 쳐다보던 선희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네.”
 “그 마법인지 뭔지 그걸로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까?”



 이미 열 멍 가까이 희생당한 상황이었기에 소대장의 시선이 썩 곱지는 않았다.


 사단에서 지원 나왔다는 눈 앞의 여자 둘.

 그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소대장은 잘 몰랐다.

 마법소녀들의 신상이나 마법소녀명, 능력 등의 정보는 기밀 취급.

 일개 부사관에게까지 내려올 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뭐가 어찌됐든, 지금 이 마법소녀라는 것들은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덩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명은 총을 몇 발이나 맞고도 무사하지만 도망치기만 바쁘고, 한 명은 아예 넋을 반쯤 놓은 상태.

 자연스럽게 소대장의 물음에도 짜증이 섞일 수밖에.


 대응사격을 잠시 멈추고 탄창을 갈던 소대원 한 명의 시선이 선희에게 꽂혔다.

 죽음에 대한 희미한 공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원망, 불신 등등…


 선희에게는 꽤 익숙한 시선이었다.



 “연합쪽 마법소녀에게 선탐지당하는 게 더 안 좋아요. 그냥 일단 후퇴해서 재정비하는 게.”

 “연합에 그게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잖습니까? 저기 나가 있는 우리 애들이라도 살려야 합니다.”
 “있으면요. 당장,”



 선희는 은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쟤하고 비슷한 수준의 마법소녀 한 명만 와도 나하고 쟤, 둘 빼고는 다 죽을 건데.”
 “아니 좀, 중위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화가 난 듯 커지기 시작하는 소대장의 목소리.

 교전 중간중간에 시선을 보내는 다른 대원들의 시선도 점점 험악해졌다.

 당장 프래깅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


 그러나 선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면세계 대전 때부터 그녀의 원동력은 단 하나, 자신이 살아남는 것.

 살아서 부모님, 동생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으니까.



 어차피 이 전쟁은 이면세계 대전이 아니었다.

 자신과 가족들의 목숨을 지켜야 하는 싸움이 아니라, 부산 정부와 서울연합이라는 두 괴물의 싸움.

 휴대폰에 들어갈 1g짜리 칩, 누군가의 집을 반나절 데울 양의 포르네우스 기름.

 자신도 은정도 눈 앞의 군인들도, 그런 것들을 위해 생과 사의 교차로로 끌려온 일개 개미일 뿐.

 그런 전쟁에서 선희는 연합의 마법소녀를 상대한다는, 목숨을 걸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기껏 해봐야 은정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주는 정도.

 그 정도가 선희가 느끼는 책임감의 한계였다.



 소대장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고 느꼈는지 몸을 휙 돌렸다.

 선희는 그런 소대장을 일별하고는 다시 컨테이너의 모서리로 걸어갔다.



 “…”



 수색대원들의 따가운 눈총을 무시하고, 선희는 모서리 너머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소대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총격전은 조금 잦아들고 있었다.

 정부군이든 연합 방위군이든, 피차 탄약을 지나치게 낭비할 수 없는 입장.

 그러나 여전히 간헐적으로 총탄이 교차하며, 시멘트 바닥에서 돌가루가 튀고 폐차에서 불똥이 튀었다.


 어디선가 클레이모어라도 터진 듯 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울렸다.

 직후 물류창고 왼쪽의 가드레일 쪽에서 풀풀 피어 오르는 연기.

 우회하던 소대원들이 당한 모양이었다.


 선희는 그 사이로, 조금 전 쓰러져 있던 시체들을 눈으로 재빨리 훑었다.

 무너진 시멘트 공장 남쪽 벽면 근처에 쓰러져 있는 한 군인.

 집중사격이라도 당한 듯, 방탄복 곳곳이 움푹 파인 데다가 팔다리는 거의 몸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옆에 굴러다니는, 탄두가 장전된 판처파우스트3.


 대전차로켓 정도면 물류창고에 유의미한 타격은 줄 수 있을 터.

 마법을 써서 마력을 탐지당한다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도 없었다.



 “저거 쏠 수 있는 사람?”

 “예?”

 “가져올 테니 견제사격 좀 해봐요. 안 해도 상관없고.”



 선희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달려나갔다.

 등 뒤에서 놀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한 채.


 일순 늘어난 발포음과 선희의 몸을 두드리는 몇 발의 유탄.

 그러나 반투명한 막에 막힌 총탄은 불똥만 남기고 떨어졌다.


 선희는 폐차와 덤불 사이로 몸을 최대한 숨기며 이동했다.

 대놓고 총격을 무시한 채 이동했다가 수상하게 여긴 연합 방위군이 다른 마법소녀를 부르기라도 하면 큰일이었기에.


 장갑차의 잔해 뒤에 숨은 선희는, 아직도 주변에 맴도는 고기 타는 냄새에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바닥에 굴러다니며 희미한 연기를 흘리는, 목탄처럼 생긴 덩어리들.

 아마 장갑차 승무원 중 누군가의 잔해인 모양이었다.


 최소한 저 상태로 뛰어다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전 시기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무감각한 시선을 잠시 보내던 선희는 다시 판처파우스트 쪽으로 눈을 돌렸다.

 거리는 대략 25m 정도.

 주워서 다시 돌아오려면 못해도 10초 이상은 걸릴 터였다.


 스스로 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선희는 대전차로켓을 다뤄본 적도 사용방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이면세계 대전때는 배울 필요가 없었고, 이번에는 배울 기회도 없었으니까.

 어쨌든 가져가기만 하면 나머지는 군인들이 알아서 할 터.


 그렇게 생각하며 뛰쳐나갈 준비를 하던 선희는,



 “쟤, 쟤 뭐하는 거야!”



 시멘트 공장 대신 컨테이너 박스 쪽으로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은정은 그렁그렁한 눈을 부릅뜨고 활시위를 당기기 시작했다.

 양궁을 배웠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반듯한 사선과 쭉 뻗은 팔.

 조준기와 스태빌라이저, 왼팔과 화살이 일직선을 그렸다.


 폐자동차의 보닛에 몸을 최대한 숨겼지만 그럼에도 총에 맞는 건 피할 수 없었다.

 불똥과 함께 군복 위로 이는 따끔한 통증.

 조금 전 같았으면 움찔하거나 비명을 질렀겠지만, 은정은 입을 꾹 다물고 물류창고를 노려봤다.


 잰 화살에서 줄기줄기 스며 나오는 주홍색 마력광.

 그 일렁이는 빛의 끝에 정신을 집중하며, 은정은 조금 전 소대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소위님, 저기 다리에 총상 입은 유석민 상병 보입니까?’

 ‘네? 네에…’


 ‘올림픽 육상 선수가 꿈이었다 그럽디다. 나라가 이 꼴이 되면서 올림픽이고 아시안대회고 다 없어졌지만 그래도 매일 구보 때마다 제일 앞서서 달리고, 체단 시간만 되면 하루 종일 러닝하던 놈입니다. 그런데 다리가 저 모양 저 꼴이 됐단 말입니다.‘

 ‘…’


 ‘보십쇼. 저기 쓰러져 있는 김현철 병장, 박시우 상병, 오재승 일병. 보시란 말입니다! 다 내 새끼 같은 놈들인데, 지금 쟤들 부모님한테 나중에 뭐라고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소위님.’

 ‘아… 그, 저기… 제, 제가 어떻게… 그, 뭘 해야…’


 ‘중위님한테는 도저히 뭘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저런 쓰ㄹ… 쯧, 아닙니다. 하지만, 저 애들 목숨이 소위님 손에 달려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명심해주십쇼.’



 이런 곳에 끌려왔지만, 그냥 평범한 삶을 꿈꾸던 녀석들이란 말입니다.

 소위님하고 마찬가지로.


 소대장의 마지막 말이 은정의 머릿속을 불태우듯 지졌다.

 지금 그녀가 장전한 화살 마냥, 새빨갛게 달아오른 인두처럼.


 뼈대만 남은 트럭 옆에 선, 군복 차림으로 총 대신 활을 겨냥한 여자애.

 연합 방위군들도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은정에게로 총격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어딘가로 무전을 치는 듯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은정의 부릅뜬 눈을 총탄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스쳤다.

 마스코트의 얇은 방어막 너머로 갈비뼈를 어깨, 목덜미를 두드리는 충격.

 수 발이 수십 발이, 수백 발이 되는 건 금방이었다.


 자동방어가 점점 깎여 나갔지만 그녀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뭐라 고함을 치며 달려오는 선희.

 그 목소리가 은정의 귀에 들어오는 일조차 없었다.

 역탐지 운운하던 내용은 이미 은정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

 그런 걸 고려할 만한 이성은 지금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의 눈 앞에 환각처럼, 장갑차 단차장의 불타버린 팔뚝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마법을 쓰면, 군인 오빠들과 아저씨들을 살려 보낼 수 있어.”



 한계까지 집중한 정신과 마력이 은정의 육신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공기 중으로 녹아들어가는 군복과 방탄모.

 그 빈 자리를 뒤덮듯 리본 달린 머리띠와, 주홍색과 상아색이 섞인 짧은 원피스가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극도로 끌어올린 마력에 의해 자동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녀의 마력이 집중된 텅스텐 화살은 이제 화살의 형상을 한 쇳물이나 다름없었다.

 복사(輻射)되는 열기에 은정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끓어오르는 대기와 시멘트 바닥.

 바로 앞의 폐자동차가 진흙처럼 녹아 내리기 시작했다.

 그 한가운데 유일하게 온전한 건 그녀 자신, 마법소녀 아이보리 뿐.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수색대원들에게 일순 투명한 방어막이 씌워졌다.

 소대장에게도, 은정에게도 마찬가지.


 다급히 전 소대원들과 은정에게 방어막을 씌운 선희는 머리를 붙들었다.

 연합 마법소녀의 탐지를 걱정하는 건 이제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이 시점부터, 이 단지 내의 모든 연합 방위군들이 마법소녀의 존재를 알게 될 터.



 ‘그 짜증나는 중사가 결국…’



 소대장이 은정에게 쓸데없는 바람을 불어넣은 모양이었다.

 정의감을 자극했든, 동정심을 유발했든.


 이면세계 대전 당시에도 부사관들이 자주 써먹던 수법이었다.

 갓 임관한 마법소녀를 감언이설로 꼬드겨서 쓸데없이 마법을 사용하게 하는 식.


 운이 좋으면 그저 귀찮은 잡일이 많이 떨어지는 정도.

 하지만 그런 결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군대 내에 잠복해 있던 마신 바알의 수하에게 암살당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선희는 한숨을 쉬며 은정의 주변에 마력을 집중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언제 연합 마법소녀의 기습이 들어올지 알 수 없었기에.


 은정은 그런 선희의 속내는 모른 채 물류창고를 조준했다.

 몇몇 허름한 차림의 사람들이 도망치려는 듯, 다급히 창문에서 뛰쳐나오는 게 보였다.

 나이는 이십 대부터 사십 대까지.

 남자도 여자도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자신들에게 닥쳐올 운명을 깨닫기라도 한 듯. 도망치려는 발걸음은 절박했다.

 남들은 그렇게 처참하게 죽여 놓고 자신들의 목숨은 아깝다는 듯.



 전쟁을 처음으로 겪은 마법소녀는 사랑과 희망이 아닌, 증오를 담아 시위를 놓았다.


 다음 순간, 그녀의 앞에 있던 모든 것이 일직선으로 증발했다.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초목도, 돌도, 금속도.

 모두 공평하게.

 





 *

 





 정인은 청재킷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눈 앞의 사진을 한참 노려보다 고개를 저었다.



 “…몰라.”
 “그러면 이 사람은요?”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캐쥬얼한 차림의 여자.

 그녀가 내민 사진에는, 남자 한 명이 이름이 적힌 나무판을 들고 서 있었다.

 입고 있는 낚시꾼용 조끼는 군데군데 찢어진 상태.

 얼굴도 멍이 들고 입술에 찢어졌다 아문 흔적이 보였다.

 사진을 찍기 전 몇 대 얻어맞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이미 열 번도 넘게 반복된 행위.

 염증을 느낀 정인은 사진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불만 가득한 목소리를 내뱉았다.



 “몰라.”



 그에 반발하듯 탁상을 탕 내리치는 손길.

 스탠드 등이 흔들리며 어두운 취조실 안의 그림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이렇게 비협조적이시면 곤란한데요, 라피스라줄리.”

 “모르는 걸 어쩌라고.”



 움찔하면서도 완고하게 대답하는 정인을 보며, 대공부 요원은 짧게 친 머리를 피곤한 듯 헝클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가 내밀던 사진은, 6월 25일 인천 항만에서 나포한 부산 국정원 요원들.

 물밑에서 눈 앞의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를 납치하려는 공작을 시도하던 자들이었다.

 그 중 라피스라줄리가 알고 있는 얼굴이 있는지 확인해봤지만 아무래도 허탕인 모양.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진 않았으나, 애초부터 요원도 별 기대는 하지 않던 사안이었다.


 만일 이 여자가 국정원과 모종의 연결이 있었다면, 망명한 후 그렇게 소극적으로 지내진 않았을 터.

 오죽했으면 상사인 최지훈조차 라피스라줄리를 퇴물이라 여길지언정, 스파이로 여기진 않았다.

 그녀가 망명했을 때 대공부에서 별도로 행한 뒷조사 역시 흑백을 따지자면 백이었다.


 무엇보다 흑이라 치더라도 방법이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굳이 다리까지 하나 잘라가면서 라피스라줄리를 스파이로 잠입시킬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면세계 대전 때의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냥 배 한 척 태워서 보내면 그만.

 그녀 혼자 인천과 서울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히는 것도 가능할 터였으니.



 대공부 요원은 테이블 위에 펼쳐 놓은 여러 장의 사진을 회수하여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정인은 그런 그녀를 외면하듯 눈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는 철제 테이블.

 연식이 오래되었는지 아니면 그 동안 관리를 안 했는지, 모서리는 닳아 있고 표면에는 흠집이 가득했다.

 정인은 주머니에서 오른손을 뺀 뒤, 살며시 그 밑바닥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엄지와 검지를 비비자 만져지는 먼지의 까끌한 감촉.

 아무래도 후자가 정답인 듯했다.


 그러던 그녀의 고막을 두드리는 차가운 목소리.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죠. 잘 대답하셔야 할 겁니다. 왜 전시 소집령을 거부하고 연합에서 도주하려고 하셨죠?”

 “…”


 “대답하시죠, 라피스라줄리.”

 “민우는?”



 대공부 요원은 지겹다는 듯 긴 한숨을 쉬었다.



 “하아…”



 이런 대화를 이미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쪽의 질문에는 모르쇠, 반대로 먼저 입을 열었다 하면 민우, 민우.


 도대체 조민우라는 남자와 라피스라줄리는 무슨 관계란 말인가.

 연인이라도 된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 담백한 편이었다.

 조민우의 집이나 차에서 회수한 녹음기로 확인한 둘의 평소 대화는.



 “설마 제가 곧이곧대로 대답해드릴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지금까지 질의에 한 번도 답하지 않으신 분에게?”

 “…”



 이번에는 묵비권이라도 행사하려는 듯 입을 꾹 다문 정인.

 대공부 요원은 긴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밀려나는 접이식 의자.

 거슬리는 마찰음에 정인은 어깨를 움찔했다.



 “뭐, 됐습니다. 다른 사람이면 손톱이나 발톱… 발톱은 없군요. 아무튼 몇 개는 뽑았겠지만.”



 정인의 뭉툭한 다리가 있을 법한 위치로 시선을 잠깐 보낸 요원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당분간 거기서 머리나 좀 식히고 있으시죠.”



 요원이 나가며 철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방 안에 울렸다.

 남은 건 먼지로 흐려진 공기와 귀를 찌르는 듯한 침묵, 테이블 위에서 조용한 빛을 발하는 스탠드 등 뿐.



 정인은 울렁이는 속을 가라앉히려고, 테이블의 냉기에 얼굴을 맞댔다.

 여전히 모르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대화하는 건 불편하고 힘들었다.

 다행히 요원이 여자였기에 망정이지, 남자였다면 게거품이라도 물었을지도 모른다.


 눈 앞에 희미하니 쌓인 먼지를 손으로 살살 쓸어내며 정인은 중얼거렸다.



 “아마 민우도 여기 어딘가 있겠지…?”



 제발 무사히만 있기를.


 정인은 속으로 빌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자신은 마법소녀라고 함부로 대하진 않은 듯했으나, 민우까지 봐 주리란 보장은 없었으니까.


 그녀의 뇌리에 언뜻 스치는 상상.


 의자에 묶여 있는 민우가 각목으로 얻어맞는다.

 하나밖에 없는 손에서, 손톱을 꽉 붙든 채 살점으로부터 뜯어내는 펜치.

 욕조 가득한 물에 거꾸로 머리부터 처박힌 채 발버둥치는 민우.

 지금까지 한순간도 못 잔 채 코피를 줄줄 흘리며 의미 없는 글귀를 적는 민우.

 손과 발에 전극을 매단 채 몸에서 연기를 피어 올리는 민우...


 북받쳐 오르는 초조함과 두려움에, 정인은 이마를 테이블에 한 차례 찧었다.

 그럼에도 두근거리는 심장은 도저히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자신처럼 고문을 당한다면, 보통 사람인 민우는 분명 폐인이 되거나 죽을 터.


 끔찍한 상상을 떨쳐버리려는 듯, 정인은 애써 사고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 갇히고 며칠 째지? 지금까지 세 번 잠들었으니, 대충 사흘인가? 용산 어딘가 같긴 한데, 반쯤 무너진 고층빌딩. 연병장 한가운데. 그런 곳이 어디였더라…’



 아무리 생각해봐야 속 시원한 답을 구할 순 없었다.

 답답해진 정인은 고개를 살짝 들고 주변을 둘러봤다.


 시계도 창도 없는 지하실.

 가운데는 스탠드 등이 올려진 철제 테이블과 접이식 의자 두 개.

 구석에는 잠자리로 쓰라고 놔둔 듯, 낡은 모포와 군데군데 때 낀 매트리스.

 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살풍경한, 그저 넓기만 한 방이었다.

 이곳으로 끌려올 때 계단을 통해 내려왔으니 지하실인 건 확실하지만 그뿐.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방금 요원에게 거짓말이라도 해서 뭐라도 얻어낼 걸.


 그런 생각을 하던 정인은, 다시 한 번 테이블을 이마로 콩 두드렸다.

 애초에 적전도주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을 바로 처벌하지 않고 이런 곳에 가둔 대외공작선전부.

 그 속셈이 뭔지도 모르는 판에 함부로 입을 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한숨을 쉰 정인은 의자에서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빳빳한 의족이 바닥을 밟으며 울리는 따각거리는 소음.

 의족의 발목 관절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에 정인의 걷는 모습은 로봇 마냥 뻣뻣했다.


 어설프게 균형을 잡으며 매트리스까지 걸어간 정인은, 그 위에 느릿한 몸짓으로 앉았다.

 전에 한 번 그 위에 넘어졌다가 먼지만 잔뜩 들이마시고 기침하느라 고생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복장뼈가 아렸기에 괜히 그런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스탠드 등의 밝은 빛에서 등을 돌린 채 웅크리고 누운 정인.

 회칠이 벗겨진 벽면을 바라보며, 그녀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런 자세에서 그녀는 몸을 뒤척이거나, 눈가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초조하게 손으로 꼬아댔다.

 민우에 대한 걱정을 도저히 떨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심려도 피로에는 이길 수 없는 법.

 더군다나 탈출 당일의 후유증이 아직 가시지 않아 그런지, 전신에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정인은 지친 눈이 점점 게슴츠레 감기는 걸 느끼고 하품을 했다.



 ‘민우… 무사해야 할 텐데.’



 그녀의 의식이 흐릿한 기억 속으로 조금씩 잠겨갔다.


 자신과 민우가 탈출을 시도했고, 결국은 실패한 며칠 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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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