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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4편 입니다.




오늘은 분량이 좀 짧습니다.

이쯤에서 끊는 게 분량이 적절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래도 현생에 여유가 생기니 하루에 3,000자 정도는 나오네요.

다만, 갈수록 문장이 딱딱하고 단조로워지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고치려면 인풋이 중요할 거 같은데, 

아무래도 최근 인풋이 대부분 논문이다 보니... 따흐흑...

더군다나 이런 머리 굴려야 하는 내용은 쥐약입니다...

등장인물의 지능은 작가의 지능을 넘을 수 없다는 말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습니다.


다음 화는 아마 19씬이 있을지도 모를 것 같습니다.

아마도요.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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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4.




 건조하면서도 눅진한 지하실의 공기를 타고 울리는, 바스락거리는 마찰음.

 정인의 왼팔의 핏줄을 타고 올라오는 얼음장 같은 한기.

 그 얼음은 이윽고 열화(烈火)가 되어, 의식이라는 등불을 다시 태우기 시작했다.


 천근처럼 무거운 눈을 뜬 정인은, 무저갱처럼 커진 동공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옆으로 돌아누운 몸 위에 덮여 있는 낡은 모포.

 자다가 뒤척거렸는지, 벽을 향했던 시야는 방 중앙을 향해 있었다.

 흐리멍덩한 눈에 가득 들어온 건, 여전히 지하실을 밝히고 있는 스탠드 등의 불빛.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희뿌연 그림자가 두 개.


 상체를 일으키며 눈가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던 정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탄탄한 줄 같은 뭔가가 자신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왼팔을 내려다봤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자신의 후드티 소매.

 그 밑의 왼쪽 팔뚝에는 어느샌가 정맥 카테터와 수액 줄이 꽂혀 있었다.

 조금 전 느낀 차가운 느낌은 아무래도 이 수액이 들어오는 감각인 듯했다.


 그림자 중 하나가 부자연스럽게 흔들거리며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 일어났습니까. 라피스라줄리. 정확히 21시간 42분만입니다.”



 정인은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후들거리는 오른팔로 몸을 간신히 지탱했다.

 너무 오래 잠들어있던 탓인지 전신의 근육이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몸에 힘을 꽉 주면서 정인은 다가오는 그림자를 쳐다봤다.

 쓸데없이 밝은 역광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얼굴.


 그너는 입을 열려다,



 “…누구- 윽…”



 갑작스럽게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을 느끼고 벽에 쓰러지듯 등을 기댔다.


 멍한 머리와 핑핑 돌기 시작한 시야.

 눈 앞이 순간적으로 캄캄해지면서 온 세상이 갑작스레 멀어지는 듯한 느낌.

 식은땀 때문인지 후드티 안이 기분 나쁠 정도로 축축했다.

 하지만 땀이 말라도 오한은커녕 후끈거리는 열기만이 올라올 뿐.


 그녀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억눌렀다.

 한손으로 입을 누르고 반대쪽 손으로 매트리스를 짚은 정인에게, 고막에 물이 찬 것 마냥 울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피를 많이 흘렸다고 들었습니다. 혈액 재고도 없고 의사도 없으니, 아쉬운 대로 피 대신 수액이라도 놓고 있었지요.”



 대답 없이 한동안 얕은 숨을 몰아쉬던 정인은, 곧 진저리를 내며 대꾸했다.



 “필요 없어…”



 매트리스 위에 던져지는 정맥 카테터.

 끄트머리에서 흘러나온 식염수가 매트리스를 축축히 적셨다.

 정인의 얇고 핏기 없는 팔뚝에서 점점이 떨어지는 핏방울도 마찬가지.


 두 그림자는 그러는 그녀를 말없이 쳐다봤다.

 말릴 생각은 딱히 없는 듯했다.

 이미 주사를 더 맞을 필요는 없겠다는 것 마냥.

 그러다가, 그들은 테이블 앞에서 접이식 의자를 끌고 왔다.


 정인은 비스듬하니 의자에 걸터앉는 둘을 노려봤다.

 앞에 앉은 그림자는 키가 180cm 정도 되는 것 같았고, 남자인 듯했다.

 작은 그림자는 그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고 성별이나 외모는 명확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정인은 둘의 실루엣이 어디선가 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한 명은 최근에, 한 명은 기억도 어렴풋한 예전에.


 그러다 그녀는, 남자의 동작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빠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사람의 시선이 닿자마자 어딘가의 틈새로 사라지는 바퀴벌레 마냥.



 벌레.

 문득 벌레를 떠올린 정인은, 몸이 가렵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후드티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몸에 뭔가 계속 기어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손톱으로 피가 날 때까지 긁고 싶어질 정도로.


 정말로 벌레인지, 아니면 낡은 모포에서 벼룩이라도 옮았는지.

 어느 쪽이든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충동과 초조함을 억누른 그녀는, 역광에 얼굴이 가린 둘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슨 용건이냐?”

 “연합의 귀중한 재원(才媛)의 건강을 염려하는 건 간부로써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듯, 남자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헛소리하기는.”
 “부하 앞에서 체면치레 정도는 하게 해 주시지요, 라피스라줄리. 아무튼 연합 본부 이후로 직접 이렇게 보는 건 처음이군요. 이런 누추한 곳이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여기가 어딘데.”

 “용산의 구 국방부청사 지하입니다. 본부로 모실 수 있다면야 좋았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연합의 운명을 건 전쟁에서 도망쳤다는 걸 사방에 광고하기도 그래서 말입니다.”



 용산 국방부 청사.

 어쩐지 연병장 같은 너른 운동장이 있더라니.


 그런 생각을 하던 정인은, 점점 지끈거리는 이마와 눈가를 꾹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그림자 뒤의 테이블, 그 위의 스탠드 등 불빛이 너무 밝았기 때문이다.

 분명 잠들기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눈이 타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


 그 모습을 본 남자가 옆의 작은 그림자에게 손짓했다.

 곧 테이블로 다가간 작은 그림자는 스탠드 등 밑받침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살짝 어둑할 정도까지 떨어진 광량.

 정인은 두통이 한결 가시는 걸 느끼고, 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스탠드 등을 들고 오는 자는 캐쥬얼한 차림의 여자.

 까무룩 잠들기 전 봤던 여자 요원이었다.

 의자 옆에 스탠드 등을 내려놓은 뒤 자리에 앉는 요원.

 그 앞에 앉은 남자는, 누추한 장소에는 썩 어울리지 않는 검은 정장과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피로하고 성마른 인상이었지만 분명히 어디선가 본 사람.

 정인은 떠오를 듯 말 듯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최지훈?”



 최지훈은 기괴할 정도로 환한 표정을 지었다.



 “인천의 영웅, ‘부활의 마법소녀’께서 절 기억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런 분께서 왜 비겁자처럼 굴었는지?”



 명백한 비아냥.

 그러나 정인은 발끈하는 대신, 초조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민우는.”
 “안전한 곳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모셔 놨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지금쯤 잘 치료받고 있을 겁니다. 다행히 두피가 찢어진 것 말고는 전신 타박상 정도라더군요.”


 “…어떻게 우리 위치를?”

 “엔진 룸 안에 GPS 발신기를 넣어 놨지요. 알아봐야 별 소용은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
 “뭐, 그 자보다는 쓸데없이 우리 수송대원들에게 마법을 쓰신 라피스라줄리, 당신의 상태가 더 심각했지요. 적혈구 수치가 정상치의 2/3라고 의사가 그러더군요. 적전도주의 대가 치고는 가벼운 편이지만 말입니다.”



 정인은 왠지 모를 짜증이 치미는 걸 느꼈다.

 별 것 아닌 도발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솟구쳐 오르는 화을 참기 어려웠다.


 빈정거리는 듯한 놈의 태도에 대한 역정, 그리고 어디 갇혀 있을지 모르는 민우에 대한 걱정.

 천근만근 무거운 자신의 몸.

 목덜미를 타고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한 가려움증.

 모든 것들이 돌아가며 정인의 자제심을 시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부드득 가는 섬뜩한 소리에도 최지훈은 눈 깜짝하지 않고 빙글거릴 뿐.

 정인은 가려운 목덜미를 저도 모르게 긁으며,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어디 있어.”

 “알려드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찾아서, 나가야지.”

 “가능한 일과 불가능한 일은 구분하시는 게 좋습니다. 라피스라줄리.”



 정인은 손톱으로 긁은 자리가 화끈거리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더 긁다간 정말 피를 볼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그녀는, 목덜미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손을 억지로 내리며 대답했다.



 “그럼 할 말없어. 꺼져.”



 최지훈의 충혈된 흰자가 번들거리며 정인을 쳐다봤다.



 “안타깝지만 연합도 절박한 신세라서요. 라피스라줄리, 당신의 힘까지 빌려야 할 정도로 말입니다. 제가 여기까지 온 건 당신하고 거래를 하나 하기 위해섭니다. 원래라면 김성배 과장이 할 일이지만, 그 친구는 이미 뻗어버려서 말이지요.”



 그 말을 들은 정인은 최지훈을 매섭게 노려봤다.

 예전에 그와 한 ‘거래’를 떠올린 것이다.


 프로파간다 방송에 출연하는 대신 넉넉한 출연료를 주겠다던 통화.

 결과적으로는 얼마 되지도 않는 황금과 소금을 얻는 대신, 자신의 존엄과 영혼을 팔아야만 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어 젖히는 포르노 배우처럼.


 물론 눈 앞의 최지훈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방송 대본이 사실과 다르다는 점을 알아차렸을 때 그만뒀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지금의 정인은 그런 시시비비를 가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민우의 소식 한 조각조차 알릴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 자들에게는 볼 일이 없었으니까.


 그녀는 남아있는 마력을 확인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꺼지라고 했어.”



 희미한 빛이 정인의 일그러진 얼굴에 드리운 음영.

 최지훈은 그 요철에서 그녀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거래라는 말이 영 와 닿지 않으시나 보군요. 그러면 피차 시간 낭비하지 말도록, 용어를 확실히 정리합시다. 협박이라는 말은 어떻습니까?”
 “협박?”



 꼰 발을 까딱거리며, 최지훈은 느긋하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연합의 명령에 따르십시오. 안 그러면 당신은 죽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정인의 코웃음.



 “그딴 협박이 먹힐-“
 “그리고 조민우라는 자도 당신 뒤를 따라가겠죠.”



 직후, 좁지만은 않은 방에 쩍 하는 소리가 울렸다.


 어느새 뻗어 나온 정인의 오른팔.

 그 끝의 두 손가락에서 뚝뚝 흐르듯 새어 나오는 새파란 마력광.

 최지훈의 발치부터 멀리 떨어진 콘크리트 벽까지, 워터제트로 깔끔하게 잘려 나간 균열이 벌어졌다. 


 직선으로 잘린 철제 테이블이 옆으로 넘어지는 소음.

 그제서야 이변을 알아차리고, 옆에 있던 대공부 요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최지훈이 앉아있던 의자의 귀퉁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구두 끄트머리와 함께.


 뒤늦게 권총을 꺼낸 요원을 제지하며, 최지훈은 이죽거렸다.



 “본부에서의 얌전한 모습은 내숭이었나 보군요. 아니면 조민우라는 그 남자가 정말로 중요한가 봅니다? 이렇게 쉽게 약점을 드러내서야 되겠습니까, 라피스라줄리.”



 정인은 아릿한 코끝을 왼손으로 재빨리 훔쳤다.

 입 안에 쇠맛이 감도는 게 다시 코피가 터졌나 싶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니었다.


 마력은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다.

 눈 앞에서 감히 민우를 죽이겠다며 깐족거리는 놈을 산채로 회치기에는, 충분히.



 “다시 한 번 지껄여 봐, 이 씹새끼야.”



 숨길 생각조차 없는 분노와 증오로 떨리는 목소리.

 그와 동시에 정인의 두 손가락에 맺힌 마력광이 다시 밝게 타올랐다.


 다급히 안전장치를 푸는 소리.

 대공부 요원이 그녀의 얼굴에 권총을 겨눴다.

 그러나 정인의 손이 향하는 사선은 최지훈에게 못박힌 채.

 방어마법을 펼칠 생각도 없이, 오로지 그를 죽이겠다는 생각 뿐.

 다른 마법소녀들하곤 다르게 마스코트의 방어막도 변신을 통한 부활도 없었지만, 그런 건 생각지도 않고.


 그러나 최지훈은 느물거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똑똑히 봤기 때문이다.


 흐릿한 빛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그야말로 악귀의 형상.

 하지만 벽면에 드리운 그 그림자는, 미처 숨기지 못한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는 것을.

 그것만 봐도 민우라는 자가 이 마법소녀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명약관화했다.



 ‘개가 짖는 건 위협의 의미기도 하지만, 동시에 겁을 먹었다는 뜻이기도 하지. 이 여자는 후자로군. 조금 더 겁을 줘 볼까. 보험은 이미 들어 뒀지만, 개에게 달 목줄은 많고 두꺼울 수록 좋은 법이니.’



 그런 생각을 한 최지훈은, 요원의 글록을 손등으로 밀어내며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 곱게 ‘협조’하지 않거나, 방금처럼 제 목숨을 위협한다면, 조민우 사원을 죽일 거란 소립니다. 라피스라줄리. 도살당하는 개처럼 처참하게 말입니다.”

 “이 개새-“


 “을지로에서 케이블로 목을 감아서 크레인으로 들어올리는 게 좋겠군요. 목이 부러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아주 천천히 죽어가게… 연합을 배신한 대가가 어떤 건지, 모든 사람들이 잘 볼 수 있게 말입니다.”

 “…”


 “크레인이라 하면 다른 방법도 있지요. 사슬로 묶어서 매단 뒤, 폐차 분쇄기 안으로 천천히 내리는 겁니다. 발끝부터 햄버거 패티로 만드는 거지요. 뭐, 이면세계 대전에서 시체야 많이 보셨을 테니, 이건 좀 약할지도 모르겠군요.”

 “우웁…”


 “그러면 남아공 스타일로, 네클레이싱은 어떻습니까? 사람 목에 포르네우스 기름을 꽉 채운 타이어를 두 장 걸고 불을 붙이는 겁니다. 꽤 보기 힘든 구경거리지요. 언제나 기름은 귀하니까 말입니다.”

 “그만…”


 “불타는 고통과 함께 녹은 고무가 얼굴하고 상체에 달라붙으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더군요. 보통 사람은 10분 정도 걸립니다. 타이어와 일심동체가 되서는, 눌어붙은 숯덩이로 바뀔 때까지… 조민우 그 친구는 덩치가 크니 좀 더 걸릴지도 모르겠군요. “

 “그만 해! 이 미친 새끼야!!”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 정인은 입술을 짓씹었다.

 핏기가 빠져나가며 분홍빛을 잃고 새하얗게 질린 입술.

 입 안에 배어들어온 피 때문에 비릿한 쇠맛이 감돌았다.

 그 쇠맛이 정인에게 한없이 구역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

 매트리스와 모포가 점점이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떨리는 눈이 최지훈을 노려봤다.

 연합 본부에서의 말쑥한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몰골이었다.

 며칠을 굶은 듯 퀭하니 파인 볼살.

 희미한 조명 속에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충혈되어 번들거리는 눈알.

 방금과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즐겁다는 듯 미소지은 입술과, 그 사이의 하얀 이빨.


 분명히 놈은 한다면 할 것이다.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민우를 죽일 것이다.

 도살장에서 돼지를 죽이듯.


 정인은 그런 직감을 받고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연합은 언제나 배신자의 모든 걸 뺏고 부숴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요. 한때 대한민국의 영웅이었던 당신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민우를 건드렸다간, 너, 그리고 너. 둘 다. 여기 있는 놈들. 본부에 있는 사람 하나, 하나. 다 잡아서 썰어 버릴 거야. 죽여버릴 거라고.”



 발악하듯이 내뱉은 정인의 위협이 짓밟히는 건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러길 원치 않으면 곱게 협조하는 게 좋을 겁니다. 라피스라줄리.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짐승처럼 도살당하는 걸 원치 않는다면 말이지요.”
 “…”


 “여기 들어오기 전에 부하들에게 지시해 뒀습니다. 만에 하나 불상사, 예를 들자면 제가 죽거나 크게 다친다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조민우를 공개 처형하라고. 그러니 그 손 내리고 얌전히 있으시지요.”



 정인의 곧게 편 검지와 중지가 부들거리며 구부러졌다.

 꽉 쥔 주먹 안에서 긴 손톱이 손바닥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누군가가 짓누르듯 굽혀지는 팔꿈치.

 어깨에 힘이 빠지더니, 더러운 매트리스 표면으로 힘없이 떨어지는 주먹.


 푸석하니 부풀어오른 머리카락이 그녀의 뺨을 스치며 밑으로 흘렀다.

 눈물 어린 시선과 함께.

 비참하고 괴로운 굴복의 몸짓이었다.



 이면세계 대전을 거치며 정인이 본 처참한 죽음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산 채로 괴물에게 뜯어 먹힌 사람.

 상하체가 분리된 채 따로따로 걸으며 죽여달라 절규하는 산 시체들.

 살아있는 부비트랩으로 개조되어 가족들과 폭사하는 어린아이.


 그러나 민우가 그렇게 처참하게 죽는다는 건, 그녀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다.


 어깨를 들썩이며 부들거리는 정인을 쳐다보던 최지훈은, 갑작스럽게 웃었다.



 “그러면 농담은 여기까지 할까요?”
 “…”


 “설마 우리가 감히 마법소녀를, 그 지인을 가지고 협박하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오 대리?”
 “네? 아, 네, 그렇죠. 맞습니다. 차장님.”


 “그러니 너무 그렇게 화내지는 마시지요, 라피스라줄리. 안 그래도 좋지 못한 건강이 더 상하면, 맡길 것도 못 맡기게 되니 말입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홀스터에 권총을 다시 밀어 넣는 대공부 요원.

 어디까지가 진심이었는지 모를 모습으로 히죽거리는 최지훈.


 고개를 번쩍 든 정인은, 둘을 독기어린 눈빛으로 쏘아봤다.

 지금 당장이라도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요원은 흠칫했지만 최지훈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전략병기에 필적하는 마법소녀든, 한때 나라를 구한 영웅이든, 결국은 감정과 관계에 얽매인 인간.

 그 사실만 명심하면 다루는 건 썩 어렵지 않았으니까.

 특히 눈 앞의 라피스라줄리처럼, 좁디 좁은 인간관계에 집착하는 여자는.


 원한을 품는 것 정도야 상관없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노려보는 것뿐.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이 마법소녀가 증오를 마음껏 표출할 기회 따윈 없을 테니까.


 그리 생각하던 최지훈의 메마른 낯가죽이 일순 굳었다.



 “쯧…”



 그는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차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시야가 점점 흐려지고 생각이 둔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약효가 떨어진 모양이었다.


 정장 안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내용물을 입에 털어 넣는 최지훈.

 정인은 눈을 감고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흔드는 그를 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민우가 놈들에게 잡혀 있다고 생각하자. 여기 국방부 청사라고 했던가? 같은 건물 안에 있으면 강행 돌파해서 민우를 빼낼 수 있겠지만… 만일 없다면? 없으면 어떡하지? 너무 위험해. 이런 개자식 하나 죽이려고 민우 목숨을 판돈으로 올릴 순 없어. …민우하고 합류하는 게 우선이야.’



 연합이 자신에게 뭘 원하는지, 정인은 알 수 없었다.

 마스코트도 두 다리도 잃고, 겨우 일개 중대 병력조차 처리하기 버거운 자신에게.

 하지만 배신자 운운하면서도 바로 처형하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어딘가 쓸모가 있다고 판단했을 터.


 우선은 어떤 명령이든, 자살하라는 것만 아니면 그녀는 받아들일 속셈이었다.

 끝까지 반항한다면 놈들은 정말로 민우를 죽여버릴 수도 있었으니까.

 마치 나무가 필요 없어진 나뭇잎을 고사(枯死)시켜 떨어뜨리듯.


 민우만 무사히 돌아온다면, 언젠가 탈출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정인은 허벅지 사이로 모은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때까지는 어떤 비참함이든, 괴로움이든 감내하겠다고.


 최지훈이 긴 한숨을 내쉰 건 그때였다.



 “후우…”



 그는 피로에 절은 뇌를 암페타민과 메틸페니데이트가 자극하는 느낌을 받으며 눈을 떴다.

 부산 정부와의 전쟁이 벌어지고 5일째.

 그는 지금까지 각성제에 의존해서 한숨도 안 자고 버티고 있었다.

 다른 열성적인 연합 간부들과 마찬가지로.


 동기는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 누군가는 패배의 대가가 두려워서, 그리고 누군가는 책임감이나 애국심 때문에.


 최지훈의 마음 속에 일순 걱정이 찾아왔다.

 인천공단에서 생산하는 각성제는 주로 메스암페타민.

 그걸 재가공해서 부작용을 최대한 줄였지만, 그래봐야 각성제.

 약효가 떨어지면 분명 부작용이 찾아올 터였다.


 어쩌면 마약 중독자가 될지도 모른다.

 강원도에서 유출된 아편을 찾아 헤매는 약쟁이 난민들처럼.

 하지만 전쟁 이후로 폭증한 업무량을 당장 해결하려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처리해야할 정보는 밤낮을 가리지 않았으니까.


 최지훈은 침침하던 시야가 확 밝아지면서 전신을 오한이 달리는 걸 느꼈다.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온갖 정보와 지식들이 그의 뇌리를 뒤덮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시간이 느려지는 걸 느꼈다.

 부하 요원의 미세한 근육 움직임.

 라피스라줄리에게서 풍기는 두려움과 분노, 그리고 은밀한 계획의 냄새.

 스탠드 등에서 사방으로 퍼지는 빛줄기 하나하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는 슬로 모션처럼 흐르는 세상 속에서 떠들기 시작했다.



 “거래는 간단합니다. 라피스라줄리, 당신에게는 포르네우스 유정의 시추선군(群) 방어를 맡기고 싶군요.”

 “뭐…?”



 전선에 투입될 것으로 생각했던 정인에게는 예상 외의 발언이었다.

 이면세계 대전 시절 마법소녀들의 역할은, 재래식 화기가 통하지 않는 괴물들을 전선에서 막는 것이었으니까.

 이번 전쟁에서도 전차나 자주포, 헬리콥터, 전투기 같은 기갑병기의 상대가 주 임무가 되리라 생각하던 차였다.


 의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정인에게, 최지훈은 얼굴 근육을 불규칙하게 씰룩거리며 대답했다.



 “부산 육군이 공세종말점에 도착할 때까지 최대한 발을 묶는 게 전략적 목표입니다. 대부분의 마법소녀가 지금 그 임무에 투입된 상태지요. 기동력과 유지력이 중요한데, 지금의 당신을 전선으로 보내 봐야 귀중한 자원을 낭비할 뿐입니다.”

 “…”


 “문제는 그러다 보니 다른 일에 투입할 마법소녀가 없다는 겁니다. 특히 포르네우스 유정의 시추선군을 방어할 마법소녀가 말입니다. 아, 포르네우스 유정이면 당신에게는 감개 깊은 곳이겠군요. 그 거대괴수를 직접 토벌한 곳이니까요. 위도 35.869, 경도 123.616. 기억하십니까?”



 정인은 잠시 기억을 떠올려보려다, 곧 고개를 저었다.


 마신 포르네우스.

 바다를 다시 되찾기 위해 마법소녀들이 총출동하여 간신히 처치한, 길이 4km의 일각고래.


 당시를 떠올리려 해도 기억나는 건 단편적인 이미지들 뿐이었다.

 무수한 헬리콥터의 프로펠러 구동음.

 거인이 숨쉬듯 요동치던 바다.

 흙더미처럼 허물어지는 암초.

 사방에서 쏟아지는 공격에 발광하던 거대괴수.


 최지훈이 부른 좌표 따위는 기억도 안 났고, 별 관심도 없었다.

 애초에 작전 당시에도 황해 어딘가겠거니 생각했을 따름이었으니.



 그런 생각을 하던 정인은, 왼팔을 뭔가가 기어다니는 느낌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왼팔.

 조금 전 정맥 카테터를 뺀 곳에 앉은 피딱지 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핏줄이 보일 정도로 하얀 피부 말고는.


 하지만 정인은 그 피부 밑에서 가려움증이 들어 참을 수가 없었다.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벌레가 피부 밑을 파고들어, 바스락거리며 신경과 근육을 헤집고 다니는 것 마냥.



 ‘왜 이렇게 가렵지? 미치겠네. 그냥 시원하게 긁어볼까. 긁고 싶다. 피가 날 때까지. 차라리 피부를 뜯어내면… 아니, 참자. 참자… 그래. 후드티 소매. 옷 위로라도 문지르면 조금은 낫겠지.’



 다급히 후드티 소매를 내린 뒤, 옷소매 위를 정신없이 문지르고 긁적거리는 정인.

 팔짱을 끼고 선 요원이 그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그러는 것도 아랑곳없이, 최지훈은 계속 떠들어댔다.



 “원래도 중국 놈들이 자주 얼쩡거렸지만, 최근은 인근 해상에 부산 해군의 고속정도 한 번씩 나타나는 통에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란 말이지요. 정유산업부의 해상경비대만 가지고는 대처가 안 됩니다.”



 전혀 해소되지 않는 가려움증에 조바심을 느끼며, 정인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고.”
 “말 그대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시추선이 탈취당하지 않게 지켜 주시면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입니다.”


 “…나 혼자 해군을 상대하라고? 미쳤냐?”



 물론 이면세계 대전 시기라면 충분히 가능했다.

 바다는 그녀의 주력인 물의 마법을 사용하기에 최적화된 환경.

 같은 마법을 쓴다 해도 효율이 천지 차이였으니까.

 지상에서는 우선 마력으로 물을 생성해야 하니 낭비가 심하지만, 바다에서는 넘쳐나는 게 물.

 모든 마력을 조작으로 돌릴 수 있다.

 그 때문에 추정 질량 수십만 톤의 포르네우스를 해일로 밀어 영종도에 충돌시킨다는 짓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결국은 과거의 영광일 뿐.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기껏 해봐야 고속정 한두 척 가라앉히면 분발한 편일 터.

 그나마도 선공 당하면 승산은 희박했다.

 12.7mm RCWS(*원격사격통제체계) 정도는 방어가 가능했지만, 대함로켓이나 76mm 함포는 피하는 것 외엔 대책이 없었으니.


 반쯤은 자살 임무나 다름없었다.

 정인은 다시 팔을 긁고 싶은 충동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죽으라는 소리군. 거부한다면?”



 돌아오는 최지훈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조금 전의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겠지요.”
 “쓰레기 같은 새끼…”



 욕설을 내뱉는 정인의 꼴이 퍽 우스운지, 최지훈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내 부하들 중에 당신 팬이 몇 명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꽤나 낙담하겠군요. TV에서 ‘비극적인 과거’를 푸는 걸 보더니 모금운동 하려는 걸 겨우 막았는데, 이제 보니 잘 말렸다 싶습니다.”



 이죽거리는 최지훈의 구두에 피 섞인 침이 날아왔다.

 역겹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닦는 정인.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최지훈은 발끈하여 일어나는 부하 요원을 제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연합을 배신하고 도망치려던 당신께 드리는 마지막 기회입니다. 오래 가지는 않을 전쟁이니, 끝나면 연합을 떠나든 말든 마음껏 하시죠.”



 어차피 부산 정부의 주 목적은 연합을 멸망시키는 게 아니었다.

 강원도의 약쟁이들을 소탕하느니, 반정부 단체인 연합과 그에 붙은 마법소녀들을 궤멸하느니.

 그런 것들은 시민들 들으라고 뱉은 핑계에 불과할 뿐.


 정부의 실질적 목표는 연합이 보유한 기반시설들이었다.

 청주와 평택의 반도체단지, 서해안의 화력발전소, 황해의 포르네우스 유정과 강원도의 항구들.

 힘들여 서울까지 점령해봐야 얻는 거라곤 잉여 노동력에 불과한 난민 떼거리 뿐이었으니까.


 동해의 천연가스와 셰일이 있긴 하지만 결국 주된 원유소비는 포르네우스 기름.

 그리고 노후화된 동해안의 원전으로는 더 이상 부산의 전력 소모량을 감당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부산에는, 과거의 반도체 산업 종사자들은 있었지만 생산설비가 전무했다.

 때문에 일본에서의 수입에 전량을 의존하는 상황.


 이번 전쟁은 김길주 대통령이 던진 일종의 승부수나 마찬가지였다.

 연합의 공작으로 팽배해진 반정부 여론을, 전기와 원유, 반도체로 다시 돌려놓으려는.



 “네 말을 어떻게 믿냐?”

 “뭐, 다 사정이 있다고 해두지요. 어쨌든 전쟁은 길게 끌어도 두 달은 안 넘길 겁니다. 마법소녀들의 활약에 따라서는 더 빨리 끝날지도 모르고.”



 그러나 결국 수지타산에 의하여 일으킨 전쟁은, 단기결전이 될 수밖에 없다.

 특히나 마법소녀의 존재 때문에 인명피해가 한없이 늘어날 수 있는 지금은 더더욱.

 불필요한 피해가 누적될수록, 김길주 대통령의 권좌를 향한 꿈은 불투명해질 뿐.


 즉, 시민들의 불만을 더 이상 억누르지 못하는 시점이 바로 부산 정부군의 공세종말점이나 다름없는 상황.


 백 퍼센트 확실한 계산은 아니었다.

 권력에 미친 대통령이 반전여론을 군홧발로 짓밟고 전쟁을 속행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연합은 이르든 늦든 망하는 수밖에 없다.

 압도적인 전력의 정부군에게 정면승부로 궤멸당하든, 모든 기반시설을 뺏기고 서울과 인천에 고립된 채 말라죽든.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믿을 건, 그런 덧없는 전망 뿐.


 다만 최지훈은 그런 불확실한 미래를 떠벌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어떻게든 기회만 노리고 있을 눈 앞의 배신자에게는 더더욱.



 “거기다 아무리 적전도주를 저지른 배신자라 해도, 공개적으로 당신을 처형하는 건 모양이 안 좋기도 하지요. 어쨌든 대전 시기의 당신을 그리워하고, 지금의 당신에게 동정하는 사람들이 연합에는 꽤 많으니 말입니다.”

 “…”



 그런 사실은 정인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문제였다.

 중요한 건, 눈 앞에서 떠드는 최지훈의 진짜 의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느니 뭐니 떠들던 놈이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레 전쟁만 끝나면 연합을 떠나든 말든 마음대로 하라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물론 지금의 자신은 연합에 잠재적인 위협조차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지금 연합에 있는 ‘온전한’ 마법소녀의 수만 서른 이상.

 그 중 몇 명만 있어도, 마스코트가 없는 마법소녀 정도는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터.


 그러나 그 사실이, 연합이 자신을 제거하지 않을 이유는 못 된다.

 설령 최지훈의 약속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분명 배신자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고 싶어할 테니까.



 “물론 이렇게 약속해 놓고, 나중에 당신들을 남몰래 제거하는 방법도 있지만.”



 목을 긋는 제스처를 취한 최지훈은 노골적으로 비웃는 표정을 지었다.



 “뭐,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바다 위에서라면 모르되, 지상에서는 아무런 위협도 안되는 사람을 말이지요.”



 철저하게 눈 앞의 상대를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

 그러나 역설적으로 정인은 방금의 대화에서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은 날 필요로 하지만,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전쟁이 끝나면, 날 바로 없애 버릴 셈이겠지. 힘으로 찍어 누르든, 민우를 볼모로 잡아서든…’



 이런 자들이 다른 인간의 목숨 값을 매길 때 고려하는 점은 하나 뿐.

 득이 되느냐, 실이 되느냐.

 그리고 놈들이 자신을 죽인다고 얻는 직접적인 이득은 하나도 없지만, 살려 두면 볼 손해는 있다.


 ‘부활의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를 추억하는 사람들 때문에.

 방송에서 정부를 비난하고 동정심을 산 자신을 기억하는 자들 때문에.



 ‘죽이려고 하겠지. 내가 다른 데서 쓸데없는 말을 못 흘리고 다니도록.’



 놈들이 그런 식으로 판단할 거라는 점을 정인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비록 스스로는 그럴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분명 살아있는 자신을 이용하려 들 테니.

 국정원이든, 연합 내의 불온 분자든, 제3세력이든, 누가 됐든.


 아마 배신에 대비한 대책도 분명히 있을 터였다.

 유사시 자신이나 민우를 즉결 처분할 수 있도록 감시원을 붙인다든지.

 어쩌면 국정원 놈들처럼, 마력 억제기라도 가지고 있을지도.


 정인은 허벅지 사이로 손을 모은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이제는 피부가 타버릴 것 같은 소양감을 참으면서.

 일부러 모멸감을 느끼는 척, 입술을 짓씹은 채.

 최지훈은 말없이 다리를 꼰 채, 그런 그녀를 주시했다.


 계획을 정리하던 정인은, 몇 분이 지나서야 입을 다시 열었다.



 “조건이 하나 있어.”



 그 몇 분을 몇 시간처럼 느끼던 최지훈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들어는 보죠. 뭡니까?”
 “민우는 무조건 같이 간다. 여기 남겨두고는 못 가.”


 “그걸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들어줘야 할 걸. 안 그러면 여기서 다 죽을 테니까. 너도, 나도… 그리고 민우도.”


 “흠.”



 정인은 이를 악문 채, 코웃음 치는 최지훈을 쏘아봤다.

 잠시 꺼졌던 마력광이 다시 어른거렸다.

 자신을 겨냥한 요원의 총구를 무시하며, 그녀는 두 손가락을 최지훈에게 조준했다.

 그의 몸통에.

 워터제트를 쏘면 그대로 심장을 관통할 수 있는 각도로.


 중국이나 부산 해군의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시추선군.

 위험한 장소임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전투에 휘말려 민우가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인은 민우를 이곳에 남겨두고 홀로 떠날 생각은 없었다.


 연합에 놔두면, 민우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는 살 수 있을 터였다.

 자신에 대한 족쇄로 써먹어야 하니까.

 그러나 반대로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이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그 역시 죽은 목숨.


 자신의 곁에 있으면 지켜줄 수라도 있지만, 그러지 않으면 손쓸 방법이 아예 없었다.

 그야말로 도살되기를 기다리는 가축이나 다름없는 운명인 것이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서, 최지훈은 느긋하게 생각했다.



 ‘블러핑이군.’



 처음부터 협박에 굴복하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제 와서 이러는 건 허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여자에게는 이미 굴레가 씐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민우라는 이름의, 버릴 수 없는 굴레가.


 그는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를 노려보는 정인의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

 이미 축축하게 젖어버린 속옷과 상의가 피부에 착 달라붙어, 더할 나위 없는 불쾌감을 그녀에게 안겼다.



 ‘…정말 죽이라고 하면 어쩌지. 어떡하지. 씨발…’



 기나긴, 혹은 일순간의 침묵.


 최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지요.”



 긴장이 깨지며, 정인은 한참을 참고 있던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우으…”



 그러더니 조준하던 오른손을 내리고서는, 곧바로 벽에 기댄 채 늘어지기 시작했다.

 여전히 시선만큼은 최지훈을 똑바로 쏘아보며.


 자신의 감정과 충동을 도저히 참지 못하는 모습.

 최지훈은 슬며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눌렀다.

 들어 둔 ‘보험’이 충분히 약효를 발휘하는 증거였기에.



 “그러는 편이 안심하고 연합에 봉사할 수 있다면야 얼마든지 들어드리지요. 다만 불필요한 접촉은 삼가시기 바랍니다. 라피스라줄리께서 인질을 되찾아 탈주할 계획을 꾸민다고, 누군가 착각해서 그를 없애버릴 지도 모르니 말입니다.”

 “시끄러…”


 “그러니 그 자에게 감시원을 붙이는 데는 불만이 없다고 생각하도록 하지요. 불만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넌 언젠가, 직접 죽여버릴 거야. 꼭.”



 떨리는 목소리로 증오를 토하는 정인.

 최지훈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그런 말을 하던 자들은 역사적으로도 언제나 실패했지요. 기껏해야 옛 중국 고사에 나오던 월왕 구천이나 성공했을까… 혹시 압니까? 쓸개라도 씹으면서 기다리면 기회가 올지.”



 정인은 대답없이 앓는 듯한 신음을 흘리며, 몸 이곳저곳을 긁어 댔다.

 말라버린 땀과 피부 조각이 손가락 끝에 묻어나며 질척하게 뒤섞였다.

 겉으로 보이는 살갗, 옷 안에 가려진 얇은 피부에 죽죽 그어지는 붉은 선.

 그나마 조금 남아있던 자제력은, 긴장이 풀리자마자 완전히 증발해버린 상태.

 정말 벼룩이라도 옮은 건지 온몸이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으, 씨발, 몸에 벌레가, 으읏,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아… 뭐야, 뭐야…”



 난민들도 내다버릴 더러운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아, 자해하듯 몸을 긁는 마법소녀.

 최지훈은 그 비참한 모습에서 몸을 돌렸다.

 아직까지 정인을 겨냥한 권총을 내려놓지 못하던 대공부 요원이 뒷걸음질로 그 뒤를 따랐다.






 지하 창고의 철문을 닫고 한참을 걷던 최지훈은, 갑작스레 요원에게 물었다.



 “약은 잘 들어갔나 보군요.”
 “네? 아, 네, 차장님. 그 여자가 자는 사이에.”


 “이틀 뒤에 라피스라줄리와 그… 조민우? 라는 남자, 같이 워터쉐드 1호로 보내십시오. 헬기 편으로. 감시원은 여섯을 조민우에게, 둘을 라피스라줄리에게. 라피스라줄리는 적당히 감시하되, 조민우는 24시간 철저히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수상한 정황이 보이면 즉각 보고하도록 하세요.”



 요원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 왜 조민우를 더 강도 높게 감시하는지에 대해서 묻지는 않았다.

 어차피 연합의 부속품에 불과한 자신이 알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지훈에게 뭔가를 묻는다는 것이 주저되기도 했다.

 각성제의 영향인지, 점점 성격이 날카로워지는 그에 대한.



 “알겠습니다, 차장님.”



 최지훈은 늦게 돌아오는 대답에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대답은 즉각적으로 하십시오, 오 대리.”

 “죄송합니다.”


 “쯧… 감시원들에게는 미리 전달하세요. 만일 부산 해군에게 워터쉐드 1호가 함락될 것 같으면, 놈들의 소행으로 위장해서 조민우를 사살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차장님.”


 “그리고 라피스라줄리에게는… 감시원을 통해 몰래 전달하세요. 주사 말입니다.”



 오 대리는 품 속의 약병을 만지작거리는 그에게서 시선을 슬쩍 돌리며 대답했다.



 “메스암페타민 말이지요?”



 필로폰. 아이스. 빙두. 막대기.

 연합 인천공단의 주 생산 제품 중 하나.


 몇 시간 전 정인이 잠든 사이, 오 대리가 수액을 통해 몰래 투여한 약물이었다.

 최지훈의 지시에 따라서.


 오 대리는 꺼림칙한 심정으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메스암페타민은 의존성 강한 마약 중 하나.

 더군다나 라피스라줄리에게 투여한 양은 통상의 세 배인 100mg.

 아무리 마법소녀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뇌의 도파민 회로를 부수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지금쯤 그 여자는 벌레가 온 몸을 기어다니는 환각에 미칠 지경일 터.

 찝찝해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최지훈은 근 5일간 가장 유쾌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연합은 언제나 배신자의 모든 걸 뺏고 부숴버릴 준비가 되어있다고. 도망치려는 도구에게는, 이런 족쇄가 가장 확실한 법이지요.”






 

 *

 






 청주 시내를 완전히 점령하고 평택으로 진격하던 제5군단은, 천안 시내에서 돈좌(頓挫)되어 있었다.


 이면세계 대전의 피해가 상대적으로 덜했던 천안시.

 덕분에 천안 시가지는 비록 낡고 지저분하긴 했으나, 아직도 상당수가 온전한 편이었다.


 그런 천안시에서 연합 방위군의 주요 교두보는 세 군데.

 시청 북쪽의 산업단지군, 국립공주대학교, 그리고 천안연합병원과 단국대학교 천안캠퍼스.

 세 군데 다 평택으로 가는 주요 길목에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그 중 단국대 방면은 좌우 양면이 산지라 돌파가 쉽지 않았다.

 산업단지군은 무수한 공장 건물들 때문에, 병력을 빨아들이는 늪이나 마찬가지.

 그리고 북쪽의 평택과 오산에서 무기와 병력이 계속 보충되었기에,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그 보급선을 끊기 위해 진천으로 우회한 병력은 연합 마법소녀들의 기습에 걸려 전멸.

 아산 방면으로 돌아간 부대 역시 연합 방위군의 분전에 발이 묶인 상황.


 덕분에 제5군단의 주공이 집중된 건 국립공주대학교 방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국립공주대학교 남쪽의 부성동은 이면세계 대전 이전의 재개발지구.

 건립되다 만 행복주택들을 제외하면 개활지나 마찬가지라, 대규모 병력이 진입하기 안성맞춤이었다.


 위치 또한 방위군이 상정한 천안 방어선의 중심지.

 이곳이 점령당하면, 서쪽의 산업단지군은 삼면으로 포위당한 채 말라죽을 일만 기다리게 될 터.

 동쪽의 천안연합병원은 거점으로써의 의미 자체가 사라진다.


 따라서 부성동의 미완공된 행복주택단지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지게 된 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다.



 “2시 방향 로켓!”



 관측병의 외침과 동시에, 선희는 측면에 방어막을 쳤다.

 곧이어 볼록한 방어막을 뒤덮는 폭염과 굉음.

 미끄러지며 공중으로 팝콘처럼 튀어나가는 무수한 금속 파편.

 대인 살상용 고폭탄두인 모양이었다.


 귀가 터질 것 같은 폭음에도, 은정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방향을 향해 활을 겨눴다.

 그녀의 시야 끝에 위치한 건, 5층 정도까지 올라간 상태에서 방치된 행복주택.

 거리는 약 120m 정도.


 4층의 창 없는 창틀 사이로, 후폭풍 때문인 듯 흰 연기와 흙먼지가 자욱했다.

 그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

 곧이어 2층과 3층 이곳저곳에서 피어나는 총구의 화염.

 총탄이 눈 앞에 쳐진 방어막에 부딪히는 불똥.

 선희가 친 방어막 뒤로 숨는 수색대원들.


 은정은 그 모든 모습을 똑똑히 쳐다보며, 오른손을 가볍게 폈다.


 팽팽히 당겨진 리커브 보우의 시위가 풀려났다.

 조용한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보랏빛으로 빛나는 화살이 아파트의 벽면에 박히며 부르르 떨렸다.


 직후 빛이 번쩍하고, 행복주택은 산산조각으로 무너졌다.

 그 안에 있던 연합 방위군들과 함께.



 진동하는 활을 내린 은정은, 군복에 묻은 콘크리트 가루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다섯 번째…”



 남쪽의 시가지를 소탕할 때는 이런 기습이 없었다.

 기껏 해봐야 낙오된 방위군 몇 명의 발악 정도.

 그나마도 건물 틈바구니에서 소총 사격이나 가하는 수준이었다.


 생포한 연합 방위군에게서 털어낸 이유는 단순했다.

 방위군 지휘부로부터의 지시.



 ‘정부군의 마법소녀와는 교전하지 말고 무조건 피하라고…’



 그러나 은정과 선희가 속한 부대가 국립공주대 캠퍼스에 접근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이런 식으로 중화기를 동원한 공격이 잦아진 것이다.

 덕분에 선희가 지금껏 막아낸 로켓탄이나 클레이모어만 열 개 이상.

 은정이 붕괴 마법으로 무너뜨린 건물만 다섯 채.


 상대방이 이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필사적이라는 증거였다.

 공주대학교 캠퍼스가 뚫리면 다음 방어선은 오산이나 화성이었으니까.


 연합의 중심인 서울은, 오산이 무너지더라도 바로 함락당하진 않을 터.

 시가전으로 유도하기 쉬운 안양이나 군포가 사이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성이 무너지면 또다른 핵심 지역인 인천까지는 일직선.

 이면세계 대전 때 포르네우스에게 쓸려 나간 안산과 시흥은, 방어거점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인천이 뚫리면 서울 역시 풍전등화나 마찬가지 신세.

 즉 천안을 넘어 제5군단이 북상하는 시점이 연합 방어선의 붕괴나 다름없는 상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때문에 이런 자살이나 다름없는 특공을 감행하는 걸지도 모른다.

 어차피 마법에 막힐 거라는 걸 알면서도, 찾아오지 않을 요행을 노리면서.



 은정은 그들에게 연민을 품는 대신, 귀찮다는 표정으로 화살을 허리춤에서 다시 꺼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렇게 공격을 당해야 할지 생각하면서.


 방어막을 거둔 선희는 주변의 소대원들을 확인했다.

 대전차로켓의 폭발에도 불구하고, 이명이 생겼는지 귀를 툭툭 치는 부대원만 몇 명 있을 뿐.

 사망자는커녕 부상자조차 없었다.

 다만 이미 몇 번이고 이런 공격을 당했기에, 다들 넌더리가 난다는 표정이었다.


 사전에 828포병대대가 공주대학교 캠퍼스와 부성동 일대를 포격하긴 했으나, 충분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연합 방위군들이 생각보다 아파트 단지를 잘 활용했든지.

 미완공된 행복주택단지라도 자주포 포격에 대한 방호물 역할을 하기엔 충분했으니까.

 덕분에 이런 식으로 매번 몸으로 때워가며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대전차로켓이 남아도는 것도 아닐 텐데, 사람에게 쏘기는 좀 아깝지 않나.

 아니면 여군을 보면 일단 마법소녀라고 가정하고 쏘라고 교육을 받았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던 선희의 눈에 수색대원 몇 명이 띄었다.

 무너진 행복주택으로 조심스레 엄폐하며 다가가는 모습.

 생존자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그들에게 소총탄 정도는 막아줄 수 있는 방어막을 걸어주며, 은정에게 말을 걸었다.



 “마력은?”



 돌아온 건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 시큰둥한 대답.



 “충분해요.”

 “조금은 아끼는 게 좋지 않겠니?“


 “괜찮다고 했잖아요. 저 대신 언니 마력이나 신경 써요. 어차피 남아도시겠지만.”
 “…그래, 알았어.”



 선희는 뭔가 더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은정은 몸을 휙 돌려 수색대원들의 뒤를 따라갔다.

 만에 하나 생존자가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마법 때문에 건물 전체가 산산조각 났으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은정은 만의 하나를 대비하고 싶었다.

 그리고 선희의 잔소리에 진저리가 났기도 했고.



 ‘맨날 역탐지, 역탐지. 자기 몸만 지키려고…’



 아직까지도 희뿌연 먼지가 피어 오르는 붕괴 현장.

 은정은 주변을 둘러봤다.

 블록처럼 분해된 콘크리트 덩어리 사와 휘어진 철근.

 그 사이로 부러진 소총이나 발사관, 뭉개진 팔다리가 그로테스크한 장식물 마냥 솟아나 있었다.



 “으으… 으으윽…”



 이십 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의 폐허에서 상체만 튀어나온 채.

 막 탈출하려던 차에 무너지는 건물에 깔린 모양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하반신을 빼려고 발버둥쳤다.

 그런다 해도 살 가망성은 없었지만, 본능이 명령하는 대로.

 그러다가 자신에게 드리운 그림자를 눈치채고 고개를 들었다.


 수색대원 두 명이 그에게 총구를 겨눈 채 은정을 흘긋 쳐다봤다.

 리커브 보우를 어깨에 거는 그녀를, 어딘가 찝찝한 듯한 표정으로.



 “그냥 놔둬도 죽을 것 같습니다, 소위님.”



 말없이 둘의 옆으로 다가와 권총을 홀스터에서 뽑는 은정.

 그녀는 증오에 찬 눈을 한 채, 두 손으로 꾹 쥔 권총을 신중히 겨냥했다.

 몇 살 차이도 나지 않을 연합 방위군의 머리에.


 선희의 충고는 무시한다 치더라도, 마력을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는 7그램짜리 파라벨럼탄 한 발이면 충분.


 은정은 이미 몇 번이고 체득한 그 사실을 되새기며, 방아쇠를 당겼다.



 “살려, 쏘지 마-“



 비명을 끊는 총성.

 바닥에 엎어진 남자의 코와 입에서, 잠시 후 선지 같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수리에 총을 맞고 즉사한 것이다.


 한 명이 그를 확인사살하는 사이, 다른 대원이 은정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소위님.”

 “왜 매번 다들 그런 질문을 해요?”


 “네?”



 예상 외의 뾰족한 반응에 놀란 표정으로 한 발 물러난 수색대원.

 홀스터에 다시 권총을 집어넣은 은정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마법으로 죽이나 총으로 쏴 죽이나 똑같잖아요. 뭐 제가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있는 거 같아요?”

 “아니 소위님.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뭐가 아닌데요? 네?”
 “아이고…”



 수색대원의 낯빛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청주 하이닉스 점령작전에서 첫 실전을 치른 이 어린 소위.

 장난감 같은 활을 안고 치누크의 내장(內裝)을 신기하다는 듯 두리번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꼭 군대 체험학습을 온 여고생 마냥.


 하지만 지금은 귀신이라도 들린 것 마냥, 사람이 휙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직 살아 움직이는 인간을 사살하는 데 한치의 주저함도 없는 모습.

 수색대원은 그게 못내 찝찝했다.

 전날 박 상병이 비슷한 말을 걸었다 털리는 걸 보고 나서도, 이런 말을 건넬 만큼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에게, 때마침 다가오는 구원자의 모습이 보였다.



 “너무 그러지 마시죠, 소위님.”



 은정은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는 두툼한 장갑을 보더니, 언제 짜증을 냈냐는 듯 밝은 표정으로 뒤를 돌아봤다.



 “아, 정훈 아저씨!”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소대장은, 은정의 어깨를 두드린 손을 내리며 헛웃음을 지었다.



 “아저씨라고 그만 부르십쇼, 소위님. 이제 겨우 서른인데… 자, 황 병장은 얼른 가봐. 분대원들 챙겨야지.”
 “알게씀다!”



 살았다는 듯 재빨리 멀어지는 수색대원.

 그런 그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은정은 다소곳이 두 손을 모은 채 소대장의 얼굴만 쳐다봤다.

 사랑에 빠진 소녀 마냥, 가벼운 홍조까지 띈 채.


 방금 전까지의 흉흉한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대화를 꽃피우는 둘.

 그 뒤에 서 있던 선희는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하여튼 은정이 저 기집애나 소대장이나… 어휴.’



 강력한 힘을 다루는 마법소녀라 해도, 내면은 결국 일개 인간.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겪는 공포와 상실을 뭔가로 채우려는 행위는 흔했다.

 지금 은정이 소대장, 고정훈 중사에게 빠져버린 것 또한 마찬가지.



 아마도 계기는 하이닉스 청주캠퍼스.


 작년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에 불과했던 은정이었다.

 아직까지는 생명의 가치와 소중함이라는 걸 믿고 있을 나이.

 더군다나 양궁을 배웠다는 걸 보면 꽤 잘 사는 집일 터.

 겨우 몇 만원에 불과한 돈을 뺏기 위해 동료 노숙자를 때려 죽이는, 그런 밑바닥 사회를 알 리 없다.

 그런 그녀에게, 사람들이 쓰레기처럼 죽어 나가는 광경은 큰 충격이었을 터.


 거기다가 M11 공장 점거 이후, 전황이 지지부진하던 M15 공장을 지원할 때.

 은정은 출입구 근처에 총을 맞고 방치된 아군을 구하려다가 한 번 죽을 뻔한 적이 있었다.

 병사의 배 밑에 연합 방위군이 숨겨둔 IED의 폭발 때문에.


 다치지는 않았다.

 정확히는 치명상을 입었다가, 즉시 회복했다는 말이 맞으리라.

 생명의 위협을 감지한 마스코트가 그녀를 자동으로 변신시켰으니까.


 하지만 회복한 건 몸 뿐.

 타고 녹은 살점과 내장을 온몸에 뒤집어쓴 트라우마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터였다.


 실제로 M15 점령 이후 은정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그걸 어떤 감언이설을 속삭였는지는 몰라도, 두 시간이나 대화를 한 끝에 원래대로 되돌린 게 고정훈 중사.


 그러니 그녀가 고정훈 중사에게 느끼고 있을 감정이야 뻔했다.

 마음 속에 가득하던 불안과 두려움, 고통을 몰아내 준 믿음직한 어른 정도로 여길 터.

 그에게 은정이 푹 빠져버린 것도 이해할 만은 했다.



 이면세계 대전 시절에도 선희는 저런 경우를 몇 번 봤었다.

 제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운 전쟁터에서 버팀목을 갈구하는 마법소녀들.

 그리고 그런 마법소녀들의 의존 대상을 자처한 군인들을.

 그들을 동정해서였든, 이용하려는 목적에서였든.


 대체로 결말은 좋지 않았다.

 마법소녀와 다르게 군인은 예비 목숨도 없고, 몸을 지킬 방어 마법도 없었으니까.

 다들 어이없이, 쉽게 죽어버렸으니까.



 선희는 문득 옛 동료들이 그리워졌다. 윤아, 예지, 혜인.

 서로가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준 친구들.

 조민우 중위와 꽤 가깝던 혜인이 있었다지만, 결코 선을 넘지는 않았었다.

 눈 앞의 둘과는 다르게.



 ‘얘보다 훨씬 도움이 되기도 했고…’



 만일 지금 파트너가 혜인이었다면, 자신이 방어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을 터.

 자신보다도 훨씬 빠르게 반응해서 적을 침묵시켰을 테니까.


 한숨을 쉰 선희는 탐색을 위해 마력의 파동을 퍼뜨렸다.

 부성동에 들어선 이후로 이미 다섯 번째의 탐색 마법.

 원래라면 역탐지를 걱정해야 하지만, 어차피 탐지를 피한다는 계획은 이미 틀어진 지 오래였다.

 청주에서부터 지금까지 은정이 계속 마법을 아끼지 않고 난사했기 때문에.

 자제하라고 매번 말해도, 그녀는 조금 전처럼 차갑게 무시할 뿐.



 ‘이거 하나는 확실해. 내 말을 일부러 무시하고 있다는 거… 중사가 또 이상한 바람을 불어넣었나?’



 이유야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연합의 마법소녀를 탐색하는 편이 이득이었다.

 최소한 존재라도 알아차리면 선공 당할 위험을 줄일 수 있었으니까. 



 새까만 연기와 총성 가득한 부성동을 훑고 퍼지는 마력의 파동.

 그 북쪽의 끄트머리에서, 선희는 미묘한 흔들림을 느꼈다.

 집중하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운, 백사장의 조약돌 같은.

 혹은 강물을 거슬러 올라오려는 송사리 주변의 물살 같은 흔들림.


 그녀는 그 신호를 확실히 읽기 위해 잠시 애를 쓰다가, 눈을 감은 채 입을 열었다.



 “고 중사님.”



 방금 전까지 은정과 화기애애한 이야기를 나누던 고 중사는, 웃음기를 얼굴에서 지우고 대꾸했다.



 “왜 그러십니까, 중위님.”
 “북쪽 1km 쯤에, 음… 이상한 객체가 세 개 있어요. 이쪽으로 접근 중인 듯한데.”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희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자세한 정보를 알아낼 만큼 탐색 마법이 아주 능숙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기껏 해봐야 탐지한 대상이 보유한 마력의 밀도, 움직임 여부 정도만 판단할 수 있을 뿐.

 윤아라면 대상의 형상, 생사여부, 마력의 은폐 여부 등, 더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을 터.


 다만 확실한 점은 하나 있었다.

 최소한 그녀가 탐지해낸 대상은, 마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연합의 마법소녀일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예요.”
 “확실합니까?”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별다른 감정을 못 느꼈을 대답.

 하지만 돌아온 목소리에 가득 담긴 불신감을, 선희는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딱히 기분이 상해서는 아니었다.

 하이닉스 점령작전 이후로 소대장은 줄곧 이런 태도였으니까.

 부하 대원들이 죽은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 마냥.


 역탐지를 우려해서 마법을 안 썼던 점이 문제라면, 문제는 맞았다.

 그렇다고 해도 이번에는 선희 역시 조금 기분이 상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전 때 이런 애매한 이상신호를 무시한 대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기억하고 있었으니까.



 “…한 번 더 확인해보죠.”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선희는, 다시 한 번 마력의 파동을 퍼뜨렸다.

 북쪽의 공주대학교 캠퍼스를 향해 집중적으로.



 방금 전 느꼈던 흔들림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상하네. 없어졌-“



 중얼거리는 선희의 말허리를 은정이 끊었다.



 “착각한 거 아닌가요, 언니?”

 “응?”



 팔짱을 낀 채 중사의 앞으로 나선 은정.

 뾰로통한 표정을 봐서는 기분이 썩 안 좋은 듯했다.

 마치 ‘정훈 아저씨’가 다른 여자하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보기 싫다는 것처럼.



 “잘못 느낀 거 아니냐고요. 20분 전에 공주대학교에 생명탐지 마법을 쐈을 때도, 언니가 말한 그런 건 전혀 못 느꼈는데요.”


 ‘얘는 또 왜 이래.’



 선희는 답답한 속을 억누르며, 은정을 빤히 쳐다봤다.

 마법소녀의 마력을 탐지해본 적 없는 은정이 이러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다른 문제도 있었다.



 “정훈 아저씨, 가요. 다음 구획 정리해야죠. 공주대학교 캠퍼스를 빨리 점령해야 한다면서요.”

 “어, 소위님, 잠깐만-“


 “얼른.”



 온전한 고 중사의 팔을 끌고 멀어지는 은정.

 한순간 뒤를 돌아본 그녀의 시선에 담긴 건 분명 질투였다.


 직후 선희의 눈에, 은정의 입술이 소리 없이 움직이는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아저씨는 내 거야.’



 선희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곧 중얼거렸다.



 “쟤가 미쳤나…”



 앞으로의 작전이 영 순탄치는 못하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선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전 본 것을 잊으려 노력하면서.

 은정의 태도야 어쨌든 할 일만 하자고 중얼거리면서.



 그런 그녀의 발 밑에서, 땅이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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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편


25편(19금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