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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스왑대회에  #스까듭밥 #전기고문 #목조르기   로 제출하였던 글의 26편 입니다.



원래는 이번 파트 마무리까지 다 써서 한번에 올리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25편을 올리고 벌써 18일이나 지났더라구요

뒷내용 쓰는 속도가 썩 시원찮아서 이러다가 진짜 한 달 넘게 걸릴 듯하여 일단 업로드합니다.


늦게 쓸지언정 연중은 없다.

어떻게든 마무리는 냅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평행세계인 대한민국4 에 존재하는 것으로써, 실존하는 인물 및 사건, 단체와 지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 본문에서 등장하는 인물은 전원 주민등록 상 성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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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소녀를 위한 나라는 없다



26.



 “천안 방어선이 결국 무너졌다던데. 이틀 전에 공주대학교 캠퍼스가 뚫리고 나니까 나머지는 그냥 모래성 수준으로 박살났다더군.”

 “2주일 정도 됐나? 그 정도면 오래 버틴 편이지, 뭐. 그러면 지금은 어디까지 뚫렸는데? 오산? 수원?”


 “둘 다. 화성, 수원까지 다 점령당했고 삼전 평택캠퍼스에서만 아직 마법소녀 셋하고 일부 방위군들이 버티고 있다더군.”

 “탈출 못하고 고립됐나 보구만… 그냥 빨리 항복하는 게 나을 텐데. 망명 마법소녀들인가? 부산으로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 뭐 그런 식인가 보구만.”


 “낸들 알겠어. 아무튼 이래저래 상황이 영 안 좋은 모양이야. 원주도 결국 쪽수에 마법소녀들이 묶인 사이 폭격에 시내가 아주 초토화됐다고 하고, 강원도의 전략물자관리부는 아예 소식이 끊겼고.”

 “뭐 다들 예상한 거 아니었나. 마법소녀 서른 몇 명으로 15만 명을 어떻게 막겠어. 그냥 망한 거지… 그나저나 우리는 어떻게 되나, 그럼? 부산 해군이 여길 먹으려고 기웃거린다더니, 그 동안 두 번 정찰만 하고 돌아간 게 끝이었잖나.”


 “그 치들이 어떻게 마음 먹느냐에 달렸겠지. …그리고 그, 라피스라줄리가 어떻게 나올지 그것도 중요하고 말이야.”



 라피스라줄리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잠시 입을 다문 둘.

 그들은 바닥에 걸레처럼 널려 있는 남자를 잠시 쳐다봤다.


 누운 채 아무렇게나 몸을 구긴 덩치 큰 사내.

 얼굴에는 더부룩하게 자란 수염이 가득했고 그 사이에서는 간간히 기이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간간히 현실에 없는 뭔가를 쥐려는 듯 꼼지락거리는 왼손.

 오른팔은 어깨 아래가 없었다.

 차림새 또한 꼬질꼬질한 사각팬티와 와이셔츠 차림.

 가슴이 터져 나가도록 불규칙한 숨을 몰아쉬는 그 모습은, 구리나 하남에 널려 있는 아편 중독자들을 연상케 했다.


 실제로도 맞는 말이었다.

 감시원들은 지금까지 줄곧, 그에게 주던 식사에 펜타닐을 섞어 넣었으니까.


 아편 중에서는 가장 강력한 약물 중 하나.

 그걸 2주나 꼬박꼬박 먹었으니 사실상 폐인이라 봐도 무방한 상태였다.

 아마 지금쯤 기괴한 환각 속에서 깨어나지 못할 꿈을 꾸고 있을 터.


 감시원 중 한 명은 곧 흥미를 잃은 듯, 머리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뭐… 저놈이 들어봐야 어디 기억이야 하겠어. 아무튼, 그 여자는 부산에서 당한 일이 있으니, 죽었으면 죽었지 항복하지는 않으려고 할 텐데. 더군다나 바다 위라면, 라피스라줄리의 독무대잖나. 그… 무슨 항공모함 열 배는 될 법한 마신도 혼자 반죽음으로 만들었는데. 기껏 해봐야 군함이 상대나 되겠어?”



 다른 한 명이 약간 겁먹은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틀리면 부산 해군이 아예 이 워터쉐드 1호를 통째로 폭파시키는 강수를 둘 수도 있겠군… 그러면 우리도 죽은 목숨이고.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고 항복했으면 좋겠는데.”

 “…그 여자가 부산 정부를 미워하는 건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말이야. 간첩이라고 위증 당하는 바람에 고문으로 다리까지 잃었다지 않나. 유일한 가족이던 어머니도 그 사이 죽어버렸고…”


 “요즘 세상에 어디 지만 그런가. 그때 같이 체포된 여자들 중 3명은 아예 목이 매달렸다면서? 마법소녀 협회장이라는 여자도 ‘탁 치니 억 했다’ 당했고. 그에 비하면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해도 고마워할 일이지…”

 “그 여자 앞에서 직접 그리 말해보지 그래.”


 “내가 미쳤나?”



 민우의 축 늘어진 몸이 잠시 꿈틀거렸다.

 하지만 둘은 눈치채지 못한 듯, 대화를 계속 이어나갔다.



 “아무튼 밖에 저 친구들은 좋겠어. 여기가 함락당해도 정부에서 애지중지 모셔갈 거 아닌가. 우리 같은 쓸모없는 말단은 밤중에 총살해서 바다로 던져버릴 지도 모르지.”

 “재수없는 소리 그만해, 이 친구야.”



 타박은 준 감시원은 민우와 시계를 번갈아가며 슬쩍 쳐다보더니 화색을 띄었다.

 오후 3시 55분. 다음 감시조와 교대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좀 일찍 밥 먹고, 선실에서 고스톱이나 한 판 칠 텐가?”
 “좋지. 오늘도 점당 백원?”


 “지갑이 널널한가 보구만.”

 “덕분에.”


 “지랄은… 나중에 돈 꿔 달라고 울지나 말라고.”



 의자가 달그락거리며, 곧 이어지는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둘.

 선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형광등 빛 아래 누워있는 민우만 남았다.




 민우는 죽은 듯이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떴다.


 오랫동안 눈꺼풀 밑의 어둠에 적응했던 눈이 조금 부시긴 했으나, 참을 만했다.

 좁은 선실 안에 인기척이 없는 걸 확인한 민우는 불편한 자세를 조금 바로잡았다.

 소음이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후우…”



 놈들은 교대하는 도중에는 보통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

 자신이 마약에 중독된 척을 한 뒤로는 더더욱.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만일 자신이 제정신이라는 걸 들키면 식사에 펜타닐을 섞는 어설픈 방법이 아니라, 직접 주사를 꽂을지도 모르니까.


 아편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도 순전히 요행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약의 정체를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약을 분쇄도 하지 않고 밥 안에 그대로 숨겨 놨던 것이다.

 그걸 먹는지 안 먹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처음부터 작정하고 중독시킬 생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상부의 의도야 어쨌든, 지금 감시원들은 별 의욕이 없어 보였으니까.

 아니면 경구 펜타닐은 대개 입 안에서 녹아 흡수되니 알아서 중독되리라 쉽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민우는 그리 생각하며, 피가 통하지 않아 저린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한때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근육질이었던 팔은, 2주일 사이에 꽤나 빈약해진 몰골.

 몸 곳곳도 근육이 빠지고 군살이 붙어 무겁기 짝이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고역인 건,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안에서 생리현상까지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점.

 덕분에 선실 안에는 아무리 방향제를 뿌려도 대소변 냄새가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편 중독자 흉내를 내서 놈들을 속이려면.



 ‘그나마 약쟁이들을 많이 상대해봤던 경험이 이럴 땐 도움이 되네. 펜타닐인 걸 못 알아봤으면 진짜 죽었겠지… 미친 새끼들. 400마이크로짜리를 무경험자에게 바로 줘?’



 400마이크로그램짜리 펜타닐 속효정.

 사람을 단숨에 아편 중독자로 만들 목적이라면, 나쁘지는 않은 선택.

 그러나 아편류 경험이 없는 사람에게 진통 이외의 목적으로 쓰면 호흡마비로 죽을 위험이 있다.


 민우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부산에 마약을 밀수할 때 그렇게 죽은 사람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으니.


 그는 마음 속에서 올라오려는, 애매하고 희박한 죄책감을 억눌렀다.

 그에게 주어진 자유 시간은 기껏해야 15분 남짓.

 지금은 그런 걸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민우는 계속해서 사고를 전개해 나갔다.



 ‘저놈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펜타닐을 구해올 리 없어. 상부에서 줬겠지. 그러면 왜 하필 400마이크로짜리일까? 안전하게 중독시키려면 100부터 시작하는 게 정석인데.’



 연합에서 자신을 약쟁이로 만들려는 목적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라피스라줄리, 즉 정인에 대한 인질.

 그녀를 말 잘 듣는 꼭두각시로 만들기 위해 취할 법한 수단 중 하나.


 하지만 그렇다면 왜 치명적일 수도 있는 고용량을 투여하려고 했을까.

 적정 용량을 모른다는 설명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일개 사원조차 알고 있는 사실을 놈들이 모를 리 없으니까.

 더군다나 마약에 의존시킨다고 해도, 펜타닐 중독자들의 말로는 언제나 똑같다.

 언젠가 아편 과용으로 죽거나, 금단증상으로 병신이 되거나.


 즉 이 일을 지시한 자의 의중은 셋 중 하나일 터였다.

 자신의 죽음을 그녀에게 완전히 은폐할 자신이 있거나. 인질이 없어도 그녀를 통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자신이 죽음으로써 이득을 보는 자이거나.



 ‘내가 만일 죽었다고 치고. …누님, 아니, 정인 씨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어떻게 반응할까?’



 잠깐 고민한 민우는 곧 짧은 신음을 흘렸다.

 무장수송대에 포위되었을 때 그녀가 보여준 귀기 어린 모습.

 그걸 생각해보면 백이면 백, 최악의 방향으로 일이 굴러갈 터였다.


 더군다나 아무리 마스코트를 잃은 상태라 하더라도, 지금 여긴 그녀가 최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바다 위.

 아마 연합 상부도 그 점을 모르진 않을 터였다.

 그러니 자신을 죽여서 딱히 이득을 보는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더군다나 대당 5천억 이상 하는 시추선을 위험에 노출시키면서까지는, 더더욱.


 그러므로 마지막 선택지는 우선 제외.

 나머지 두 개의 가능성을 민우는 좀 더 파고들었다.



 ‘둘 다 가능성이 있어… 그놈들의 사고방식으로 생각해보자. 정인 씨… 아니, 누님. 만일 날 죽은 걸 알게 된 누님을, 놈들은 어떻게 할 건지.’



 해답은 간단했다. 제거, 혹은 무력화.

 지금 당장은 쓸모가 있으니 살려 두더라도, 언젠가는 제거할 게 분명했다.

 아니면 다른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씌워 놓는다든지.


 민우는 초조함에, 튼 입술을 질근질근 물어뜯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이 감옥 같은 선실을 뛰쳐나가 정인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상대는 건장한 장정 여럿.

 시추선이라 총화기는 없었으나 저마다 단단한 삼단봉과 나이프로 무장하고 있다.

 그에 반해 자신은 그저 덩치가 큰 보통의 사람일 뿐.

 장교 출신이지만 전문적으로 격투나 무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

 더군다나 외팔이에, 2주 동안의 감금으로 약해진 상태.

 그리고 감시원들을 행여나 모두 쓰러뜨린다 하더라도 정인을 어떻게 찾을 것이며, 찾아서 뭘 할 것인가.


 생각에 잠긴 채 윗니 빠진 잇몸을 혀로 훑던 민우는, 선실 손잡이가 돌아가는 소리에 재빨리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조금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아편에 취한 것처럼.


 직후 감시원 둘이 들어오더니, 그 중 한 명이 민우를 발로 툭툭 걷어찼다.



 “살아 있나?”



 옆의 다른 감시원이 민우의 코 밑에 손가락을 댔다가, 덥수룩한 콧수염이 스치는 감각에 손을 휘휘 털며 대답했다.



 “숨은 쉬는 것 같은데.”

 “이 지겨운 일에서 좀 해방되나 싶더니. 에휴…”



 민우의 뒤통수를 운동화 끝으로 툭툭 건드리던 감시원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냥 죽이고 시체는 던져버릴까?”



 순간적으로 쭈뼛 서는 민우의 등골.

 그는 움찔하려는 몸을 간신히 억누른 채 귀를 쫑긋 세웠다.

 여차하면 즉각 달려들기 위해 몸에 서서히 힘을 주면서.

 가망성은 낮더라도 가만히 살해당하는 것보다는 저항이라도 해볼 심산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야 야. 어차피 아편중독으로 죽을 놈인데, 괜히 긁어서 부스럼 만들지 말고 그냥 내버려둬.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아니 뭐, 솔직히 진짜 새벽에 몰래 바다에 던져도 아무도 모를 거 같지 않냐? 무슨 똥오줌까지 다 받아내야 해. 시발.”


 “큰일 날 소리 하고 있네, 이 자식이. 그런 생각이야 나도 하지만, 입 밖으론 꺼내지 말라고. 저놈이 혹시나 죽어버리면 우리 둘 다 여기서 살아 돌아가도 인천항만에 공구리쳐질 걸.”



 민우를 건드리던 발길질이 뒤로 슥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입구 근처에 있는 의자에 누군가 주저앉는 듯 둔중한 소리.

 조금 전 자신을 죽이니 마니 하던 감시원인 모양이었다.


 민우는 긴장을 풀지 않고 계속 귀를 기울였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정보가 있을까 봐.



 “알았어. 알았어, 임마… 과민하긴. 그런데 오늘 몇 일이냐? 이 거지 같은 곳에 있으니 날짜감각이 없네.”
 “8월 1일.”


 “보자. 그럼 김성배 그 작자가 말한 날짜가… 8월 6일이지?”

 “그래. 그러니까 5일만 더 참으라고. 그날 이후로는 이놈 얼굴 볼 일도 없을 테니까.”


 “에휴… 잘 돼야 할 텐데 말이다. 그 여자에게 붙어있는 놈들은 눈치 못 챘겠지?”



 그 여자. 정인이 틀림없었다.

 온 신경을 집중한 민우의 귀에, 코웃음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염가놈이야 진작에 포섭한 지 됐고, 허 주임 그놈은 그럴 눈치도 없는 놈이야. 온통 신경이 제 딸에게 가 있더만.”

 “그러면 염 대리는 살려 두고 허 주임은 당일 새벽에 죽여서 바다에 던지면 되겠군.”


 “그냥 염 대리도 없애. 괜히 나중에 말 새어 나가면 귀찮아지니까. 거기다 만에 하나, 일이 벌어졌을 때 그놈들이 괜히 명령대로 여자를 죽여버리면 다 망하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들이지? 내분인가?’



 민우는 조금 전부터 혼란에 빠져 갈피가 잡히지 않는 머리를 계속 굴렸다.

 염 대리나 허 주임이 정인에게 붙은 감시원이라는 건 문맥 상 확실했다.

 그리고 최지훈이 그들에게, 일이 틀어지는 경우 정인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 또한.


 하지만 지금 자신을 감시하는 자들이 왜 그 요원들을 죽이려고 하는 것인지.

 아마도 김성배 과장이라는 자의 명령일 가능성이 높았다.

 문제는 그 김성배 과장이 도대체 누구냐는 것.

 원래 정인의 감시를 명령했던 최지훈하고 그가 도대체 무슨 관계냐는 것.

 그리고 결국, 김성배 과장의 지시와 목적은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



 민우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답답함을 속으로 삼켰다.

 추론을 이어 나가기에는 너무나도 정보가 모자랐다.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저 생각하는 것뿐.

 자신을 망보는 감시자들의 발치에서, 퀴퀴한 지린내와 더러운 옷에 감싸인 채.

 그렇다고 민우는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8월 6일…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아마 그날이겠지. 최소한 이놈들은 그 이전에 누님을 죽일 계획은 없는 것 같으니, 최대한 대책을 세워보자. 어떻게 하면 누님을 무사히 구할 수 있을지.’



 지금도 눈꺼풀 속, 희미한 어둠 속에서 아른거리는 그녀를.

 





 *

 





 번호판 없는 제네시스 G80의 운전석에서 김성배 과장은 시계를 한 번 슥 쳐다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금쯤이면 최지훈은 애더럴(*암페타민)에 발라 놓은 LSD에 한참 취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리라고.


 배드 트립이라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복용자의 정신 상태가 안 좋을수록, 안 좋은 환각을 볼 가능성이 높은 약물이라 하니까.

 직접 해보지는 않았기에, 김성배는 정말 그럴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급적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차의 시동을 걸었다.



 콘크리트 요새 같은 서울 구 시청건물, 지금의 이름은 서울연합 본부.

 그 앞의 너른 주차장을 빠져나오던 제네시스는 내부 경비초소 앞에서 제지를 받았다.


 창문을 내린 김성배를 향해, 소총을 둘러멘 경비대원이 공손한 말을 건넸다.



 “신분증 제시 바랍니다.”

 “여기.”



 김성배가 내민 신분증을 확인한 경비대원은 미심쩍은 눈길로 재차 물었다.



 “실례지만 행선지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이 시간에 출입 허가는 없었습니다만.”
 “안양 수도권방위기지.”


 “대공부에서 말입니까? 어떤 용건이신지…?”



 경비대원의 말대답에 김성배는 한쪽 눈썹을 슬쩍 치켜 올렸다.

 별 것 아닌 몸짓이었지만, 경비대원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가 연합에서 지낸 2년 동안 몸에 저절로 익어버린 제스처.

 의도는 명백했다.

 ‘나는 권력자고, 너는 말대답을 해서는 안 된다.’


 김성배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대꾸했다.

 마치 자비라도 베풀 듯.



 “그걸 자네가 꼭 알아야겠나?”

 “…아닙니다. 지나가시죠.”



 차단기를 열라는 경비대원의 수신호를 무시한 채, 김성배는 다시 차창을 올렸다.

 두껍게 발린 선팅 너머로 사라지는 바깥 광경.

 바리케이드 쳐진 외길을 따라 느긋하게 차를 몰며, 그는 중얼거렸다.



 “이젠 별 의미도 없는 직위지만 이럴 땐 유용하군.”



 외부 검문소를 똑같은 방법으로 통과한 그는 남동쪽의 소공로로 제네시스를 타고 나아갔다.

 과거 고층빌딩들이 굽어보고 있던 대로는, 지금은 평평한 공터로 둘러싸여 있었다.

 좌측의 유일하게 복원된 한국 최고(最古)의 호텔은 문을 닫은 지 이미 1주일이 넘었다.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 뼈대들은, 주변에 쌓여 있는 자재만이 공사 중이었음을 알릴 뿐.

 고용된 난민 인부들, 작업복 차림의 연합 감독관들, 몇 대 안되던 중장비들.

 아무 것도 없었다.

 다들 연합의 존속을 지키기 위한 의미 없는 싸움터로 향한 것이다.


 정면 멀리 보이는 흙더미 뿐인 남산을 향해 달리며, 김성배는 동료들을 생각했다.

 연합을 지키고자 하는 동료들이 아닌, 연합을 탈출하고자 하는 동료들을.



 ‘철중이 그 친구만 빼고는 다 잘 빠져나갔겠지. 그 녀석, 최지훈 그 자에게 너무 감화된 모양이야. 약까지 먹어가면서 이 답도 없는 시궁창을 지키려고 하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이면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후 탈북한 구 정찰총국원들에게서 교육받은 1세대 요원인 최지훈.

 덕분에 첩보 분야에서는 비전문가밖에 없던 초기 연합에서 차장까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지만, 언제나 태도가 문제였다.

 조직에 대한 광신적일 정도의 헌신.

 연합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도 영혼도 던질 수 있는 맹목적인 충성.


 하지만 연합이라 해봐야 결국 생긴 지 3년밖에 안되는 단체일 뿐.

 몇몇 마법소녀들의 눈먼 이상과 일부 기회주의자들, 의탁할 곳 없던 난민들이 뭉친 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 걸 위해 목숨을 바칠만큼 김성배와 그 동료들은 충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황정길 그 친구에게는 고마움 뿐이군… 나중에 절에 가서 공양이라도 올려줘야겠어.”



 혼잣말을 한 김성배는 피식 웃었다.

 그 교활하고 눈치 빠른 최지훈도 몰랐으리라.

 배신자 황정길을 추적하여 암살하는 과정에서, 그 책임자인 자신이 부산 정부에 포섭되었으리라고는.


 황정길이 끝까지 국정원에 넘기지 않고 아껴 두던 포르네우스 유정 시추선에 대한 정보.

 그걸 정부에 넘기는 대가로 안전을 보장받는다. 나쁘지 않은 장사였다.

 어차피 초기에 연합이 일개 법인에 불과하던 시절, 반쯤 사기나 다름없는 소유권 주장으로 가져온 물건.

 이제 와서 정부에 다시 귀속된다 한들 무슨 상관이랴.


 기름도 마찬가지였다.

 연합의 난민들도 차라리 부산 행정부나 석유공사가 그 배분을 관할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걸 위한 밑작업도 착실히 진행 중일 터였다.


 최지훈이 인질과 마약을 족쇄로 하여 시추선에 묶어놓은 마법소녀 라피스라줄리.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그녀에게 투여될 메스암페타민은 그저 집중력과 활력을 올려줄 정도의 소량일 터였다.

 시추선을 지키게 만든다는 목적과 금단증상을 일으킨다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속셈.


 하지만 실제로는 환각과 극단적인 정신작용을 일으킬 양이 들어가고 있었다.

 김성배의 지시로, 그녀를 완전히 무력화하기 위해.


 어차피 말단에게 명령자가 누구냐는 썩 중요하지 않았다.

 암페타민 과용으로 쓰러진 척 자리를 비우고, 최지훈의 지시를 가로채서 날조하는 것 정도는 썩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 여자가 설치면 정부가 시추선군을 접수하는 데 문제가 생기니까. 암살할 수 있으면 훨씬 편하긴 했겠지만… 물을 다루는 마법소녀를 바다 위에서 암살? 비현실적이지. 애초에 최지훈 그놈도 그걸 믿고 그 여자를 보냈을 테니.’



 라피스라줄리만 무력화된다면 정유산업부의 해상경비대 따위로 부산 해군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

 중국이 어부지리를 취할 가능성은 낮았다.

 지금 칭다오의 산동 해군은 닝보와 상하이의 동해함대를 견제하느라 바쁠 테니.

 기껏 해봐야 상하이 함대가 자기네 시추선군을 탈취하지 못하게 막는 게 전부일 터.


 별다른 변수가 없다면 아마 8월 6일에는 정부의 해군이 시추선군을 무탈히 접수할 것이다.

 자신은 그 동안 하남이나 광주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전쟁이 끝날 때쯤 부산으로 들어가면 그만.

 그러면 이면세계 대전 이전과 같은, 평온한 중산층의 삶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던 무의미한 3년은 끝난 것이다.



 한남대교 검문소를 통과한 김성배는 한동안 구 강남대로를 나아갔다.

 복원도 멈추고, 난민들도 더 이상 없는 폐허 같은 강남을.


 무심한 눈길로 그 광경을 흘기던 그는, 복정교차로에서 하남으로 차의 방향을 꺾었다.

 미리 준비해둔 은거처를 향해.

 얼룩얼룩 번져가는, 포르네우스 기름이 타다 남은 매연을 뿌리며.





 

 *

 





 알음알음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지 어언 두 달.



 ‘찬영이 오빠 왔… 아 술 냄새! 좀! 담배 쩐내도 엄청 구려.’



 소영은 여전히 폐부를 찌르는 독한 연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페브리즈 뿌리고 들어왔는데 아직도 냄새 나니? 미안하다, 소영아. 어후… 오늘은 좀 빡세네.’

 ‘임철규인지 김철구인지 그 아저씨 진짜 못됐다. 맨날 자기 비서한테 술을 이렇게 먹이고… 여기 찬물.’


 ‘고맙다. 푸허- 아이고. 집안 가장이 왔는데 챙겨주는 건 우리 막내밖에 없구나!’

 ‘아이, 들러붙지 말고 좀! 어휴… 서류가방 이리 주고 들어가서 빨리 씻어. …잠옷에 담배 냄새 다 뱄잖아. 씨잉…’



 어쩌면 평생 적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소영은 담배를 옆으로 툭 던졌다.

 폐공장의 울퉁불퉁한 바닥에 불똥을 튀기며 구르는 꽁초.


 그녀의 앞, 녹슨 밀링 머신에는 사내 한 명이 묶여 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묶여 있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세게 묶어 놓지도 않았거니와, 발광하며 몸부림친 탓에 지금은 매듭조차 헐겁게 풀어진 상태.

 그러나 헐거워진 그 속박을 탈출할 힘도 없는 듯, 사내는 힘없이 고개를 떨군 채 기침을 했다.

 찢어진 입술 사이로 피가 섞인 침이 흘러 그의 바지춤을 적셨다.


 갈비뼈를 부러뜨린 적은 없었는데. 고통에 혀라도 씹었나?

 소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이젠 기억이 좀 나?”
 “그윽… 으으으… 그만, 쿨럭, 살려줘…”



 살려 달라는 말만 네 번째. 이번에도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다.


 소영은 싫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을 툭 튕겼다.

 일순간 솟아올라, 사내의 검붉은 소시지 마냥 퉁퉁 부은 왼손에 스며드는 보랏빛 마력광.

 곧 손등이 기괴하게 울룩불룩 튀어나오며 스크류에 휘말린 것처럼 뒤틀리기 시작했다.



 “아아악!! 어으아악!!”



 갈라진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사내.

 염동력으로 조각난 손뼈가 살 안에서 기괴하게 말리며 끔찍한 고통을 그에게 안겨줬다.


 말려들어간 손가락 뼈가 손의 신경을 긁을 때마다 남자는 허옇게 질린 채 게거품을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영은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잠금을 푼 뒤 메모장 앱을 켠 그녀는 화면을 스크롤하며 천천히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볼까. 권주민. 88년생. 출생지는… 별로 안 중요할 거 같으니까 넘어가자.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석사 졸업. 27년 11월, 전쟁 중에 임철규 의원 사무실에 6급 비서관으로 발탁… 그리고 30년 1월에 전찬영 후보 캠프로 이전...”

 “으으억, 그륵, 그르륵…”



 권주민은 대답할 정신도 없는 듯,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영은 눈만 굴려 그 모습을 쳐다보더니, 눈썹을 한 번 까딱하고는 스크롤을 계속 내렸다.



 “30년 2월에 5급 비서관으로 승진했네. 가족은 서동에 살고 있는 부모님이 있고… 두 살 차이 아내, 김연하, 그리고 여섯 살 짜리 아들 권지후. 집은 수영구 민락수변로 17번길. 오피스텔이네. 전입일자는 30년 7월이라. 흐응… 그 전에는 우암동에 살았는데, 5급 비서관의 월급으로 어떻게 수영구로 이사를 갔지?”


 “꺽, 그, 꺼억, 꺼윽…”

 “대답은.”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내출혈과 근육 파열 때문에 고기뭉치처럼 변한 그의 왼손에서 다시 보라색 빛줄기가 빠져나왔다.

 실신한 듯 힘없이 옆으로 고꾸라지려는 권주민.

 김해의 폐공장으로 납치당한 후 벌써 여덟 번째 기절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평온은 없었다.



 “웁. 우웨엑!”



 프레스 기계에 눌린 듯, 일순 움푹 들어가는 명치.

 내장이 터지는 듯한 고통에 권주민은 눈을 부릅뜨고 구토했다.

 소영은 혀를 차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혹시나 긴 랩스커트 자락이나 신발에 토사물이 묻을까 걱정하는 것 마냥.


 숨을 헐떡이던 권주민은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를 겨우겨우 짜냈다.



 “허억, 커억,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



 소영은 잠시 귀를 울리는 이명에 인상을 찡그렸다.

 페리도트가 죽어가며 남긴 발악에 당한 지 이미 두 달.

 끝없이 자신을 괴롭히던 마스코트의 텔레파시는 이제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간간히 이런 이명이 들리곤 했다.

 잊지 말라는 것처럼.

 누가 존경하고 사랑하던 큰 오빠를 죽였는지, 반드시 알아내라는 것처럼.



 “잘 못 들었어. 뭐라고?”
 “몰라요. 모른다고… 페리도트 그 여자가… 의원님을 암살했다는 것 밖에…”


 “흐응.”



 비웃는 듯한 코웃음.

 그 뒤를 이은 랩스커트 자락이 사부작대는 소음과, 운동화 밑창이 바닥을 긁는 소리.

 벌벌 떨기 시작한 권주민에게 소영은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머리채라도 잡아당겨진 듯 위로 당겨지는 그의 머리.

 소영은 염동력으로 그의 고개를 좌우로 탁탁 꺾으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6급 비서의 연봉은 세전 3,900만원… 5급 비서관으로 승진하면 세전 7,600으로 오르지만, 그래도 평당 1,200이 넘는 오피스텔을 전세구매하려면 턱없이 부족해. 전쟁 전에 코인이나 주식으로 벌어 뒀을까?”

 “으으윽… 그건, 대출… 대출을 받아서…”



 소영은 미소를 짓고는 손을 활짝 폈다.

 잡고 있던 머리채를 놓는 것처럼.

 권주민의 고개가 뒤로 푹 꺾이며 밀링 머신의 금속판에 텅 부딪혔다.

 공장 밖에서도 들릴 만큼 큰 소리였지만 어차피 아무도 눈치챌 사람은 없었다.

 오염지대인 밀양 외진 곳의 폐공장을 어슬렁거릴 만큼 간 큰 자는 없을 테니.


 고통에 신음하는 그는 안중에도 없는 듯, 소영은 페이퍼셔츠의 소매를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대출 이력이 있긴 있었지. 30년 7월 2일에 BNK에서 1억, NH에서 7천, 신한에서 8천… 총 2억 5천을 대출 받았더라고. 그것도 신용대출로.”

 “…”


 “요즘 세상에 담보대출도 아니고, 신용대출로만 그 거금을 제1금융권에서? 누가 보증이라도 서 줬나 봐?”

 “사업하는, 콜록, 지인이 보증을-“



 말하려던 권주민의 턱을 무형의 힘이 꽉 움켜쥐었다.

 공포와 격통에 질린 그의 시선이 소영을 쳐다봤다.

 소영은 염동력으로 붙든 그의 얼굴에 코가 맞닿을 정도로 상체를 들이대고,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알아. 동서펀드.”
 “엑, 으극, 극.”


 “자산운용회사가 왜 일개 비서관에게 보증을 서 줬을까? 그것도 하필 전찬영 의원이 암살당하고 며칠 뒤에, 그 비서관에게? 이상하기도 해라. 그러고 보니-“



 소영은 손을 권주민의 정강이에 얹었다.

 사지 중 그나마 온전한 오른쪽 다리.

 그의 눈빛이 극심한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이 여자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몸을 건드릴 때면, 언제나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으니까.

 이를 악물고 싶어도 정체불명의 힘으로 턱이 잡힌 상태라, 그는 침을 흘리며 벌벌 떠는 수밖에 없었다.


 곧 찾아온 고통은, 그가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였다.



 “가아아악!! 아아아악!!”



 목구멍에서 피가 터지도록 비명을 지르는 권주민.

 소영은 평온한 얼굴로 그 정강이에 손을 얹은 채, 쓰다듬듯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녀의 손에 맺힌 보랏빛의 염동력 또한 마찬가지.


 부숴진 정강이뼈를 끌, 다리 안의 조직을 나무 삼아 벌이는 대패질.

 한 번 뼛조각이 다리 안을 왕복할 때마다 근육, 신경, 혈관이 찢어지며 권주민의 얼굴이 검붉게 죽어갔다.

 폐공장에 헛되이 메아리 치는, 뼈 가는 소리와 남자의 비명.


 그의 오른다리는 금세 시뻘겋게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큰 혈관이라도 터진 모양이었다.



 “동서펀드는 국정원의 자회사잖아. 응? 몰랐어?”



 평온한 목소리로 말하며, 소영은 반대쪽 손가락을 한 차례 튕겼다.

 권주민의 턱을 붙들던 염동력을 없애고, 다른 곳을 붙들기 위해.


 권주민의 무릎 위 허벅지가 순간 고리 모양으로 움푹 파였다.

 우드득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지혈대라도 채운 것처럼.

 권주민은 눈을 까뒤집은 채 게거품을 물고 뒤통수를 밀링 머신에 쿵쿵 찧어 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체를 속에서 대패질하는 소영의 마법은 계속됐다.


 오래 가지는 못할 방법이다.

 피가 통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릎 아래로는 모두 괴사할 터.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면, 사지가 괴사한 사람은 며칠 못 산다.

 더군다나 이만한 고통을 받으면 사람은 그 충격만으로도 죽을 수 있다.


 실제로 권주민은 이미 20분에 걸친 파괴적인 고문 끝에 빈사상태나 다름없는 상태.

 하지만 소영에게는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르든 늦든 죽일 셈이었으니.



 “살려줘!! 아아악!! 살려주세요!!”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왔는지 필사적으로 부르짖는 권주민에게 소영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래봐야 아무도 안 와. 주민 아저씨.”

 “나한테 왜 이래 씨발년아! 내가 뭘 했다고! 아악! 끄아악!!”



 소영은 피식 웃고는 권주민의 오른쪽 정강이를 놨다.

 뼈를 잡고 있던 염동력이 사라지자 축 늘어진 그의 다리는, 기괴하게 뒤틀린 개불 같은 꼴이었다.

 인체로써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린 죽은 조직.

 권주민은 그걸 잠시 멍하니 쳐다보더니, 짐승처럼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허헝… 으어엉…”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국정원하고 어떤 거래를 했는지 말해. 그러면 다리 하나로 봐줄 테니까.”


 “살려주세요… 제발… 지후야, 연하야…”

 “찬영 오빠 사무소에서 봤을 때는 그렇게 달변이더니, 오늘은 왜 이리 입이 무거울까.”



 반대쪽 다리에 소영의 손이 다가오는 모습에, 권주민은 피눈물을 흘리며 고함을 질렀다.



 “말하면 가족까지 다 죽는단 말입니다! 제발!!”
 “나도 알고 있어.”



 소영은 가볍게 마력을 끌어올려 주입했다.

 권주민의 왼쪽 무릎뼈에. 인대가 찢어지고 부숴지는 파열음.

 무릎뼈가 하키 퍽처럼 피부 밑에서 회전하는 고통에 그는 비명을 지르며 울었다.

 소영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저씨 가족들 이름도 다 알고 있고, 행동 반경, 주로 장 보는 마트, 아들이 좋아하는 반찬, 다니는 유치원 이름, 등하원할 때 타고 다니는 스쿨버스 번호, 와이프의 휴대폰 잠금 패턴까지…” 

 “으으흑, 꺽, 끄으어엉…”


 “내가 가족들에게 찾아가는 걸 보고 싶어? 기대해. 지후를 태아 크기로 접어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해줄 테니까. 제 엄마 뱃속에서.”

 “했습니다악!! 거래!! 다 말할 테니까 제바아악!!”



 처절한 절규에 소영은 마법을 다시 거뒀다.

 눈물 콧물을 줄줄 흘리며 헐떡거리는 권주민의 입에서 부러진 이빨 조각이 흘러내렸다.

 포마드로 넘긴 머리는 이미 짓눌려 떡진 산발이 된 지 오래.

 단정하던 40대 가장이자 국회의원 비서관은 온데간데없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막힌 둑이 뚫린 것처럼, 권주민은 거침없이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자들이 접촉해온 건 24대 총선이 끝나고 한 달 뒤.

 처음에는 그냥 지역구에서 경합했던 민주자유당 박정원 후보측 인사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까 조금 희한했다.

 6월 28일에 임예지를 하루만 민주자유당 당사로 보내줄 수 있냐는 제안이었다.

 꼭 당사가 아니더라도, 아무 곳이나 상관없이.


 처음에는 거절하려고 했다.

 하지만 매일 같이 찾아와서 치근거리는 데다가, 나중에는 아픈 문제까지 들이댔다.

 우암동이 치안이 좋지 못한 동네인 건 알지 않느냐.

 임예지만 잠시 다른 곳으로 보내주면, 집을 옮길 수 있도록 대출 보증까지 서 주겠다는데.


 실제로 선수금이라고 대뜸 3천만원을 입금하는데, 잠시 그 돈에 혹했다.

 내가 미쳤었다. 그 자들이 국정원인 줄은 정말로 몰랐다.

 예지 비서가 의원님을 죽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지만, 입막음 당했다.

 그자들이 나중에 찾아와서는 입을 함부로 놀리면 아내와 아들은 물론 부모님도 무사하지 못할 거라면서 사진을 들이댔다.

 거리를 거니는 가족들의 사진을, 하나하나.


 지금은 죄책감에 잠도 못 이룬다.

 그렇게 열정적이었던 의원님을 내가 죽게 만든 것 같다.

 미안합니다. 의원님. 그럴 줄 알았으면 절대 그놈들 제안을 받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가족들만은 부디, 부디…



 점점 의식이 흐려지는지 횡설수설하는 권주민을 보며, 소영은 이제는 가물가물한 기억을 잠시 떠올렸다.



 ‘저기… 안녕하세요? 이거…’

 ‘아, 의원님께 민원 상담이신지요? 제가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뇨, 그게 아니라. 그… 아이 참. 저, 찬영 오빠 동생인데요… 다들 이번 선거 고생하셨다고 들어서, 이거라도 드시라고 감사의 의미로…’

 ‘네?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신분증 있으신지요?’


 ‘소영. 전소영이예요. 주민등록증… 깜빡했네. 운전면허증 여기요…’

 ‘아이고 막내 아가씨 분이시군요. 안 그래도 의원님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자자, 어서 들어오시죠.’


 ‘아, 이, 이것만 전달하면 되는데…’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의원님이 평소에 소영 아가씨 이야기를 얼마나 하시는 데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플만큼 예쁜 동생이라고 자랑하는 게 아주 팔불출이 따로 없다니까요. 흠흠... 아무튼 저는 의원님 밑에서 지역구 업무를 담당하는 권주민입니다.’


 ‘아 예, 주민 아저씨…’

 ‘어… 아가씨, 아저씨라고 부르실 정도로 제가 나이 들어 보입니까?’


 ‘…좀 패션이 낡아 보이긴 하세요. 탈모 기미도 조금… 죄, 죄송합니다.’

 ‘탈모… 어흑…’



 소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때 코디도 지금하고 똑같았어요. 주민 아저씨. 한손에는 핸드백, 한손에는 과일바구니… 뭐, 못 알아보시는 것도 당연하겠지만요.”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때는 이런 힘을 쓸 이유도, 필요도 없었는데.”



 입 안 가득 고인 쓴 맛을 한숨으로 내뱉은 소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권주민의 반쯤 흐려진 눈이 느릿하게 구르다가 툭 감겼다.

 아무래도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소영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의 몸을 뭉개는 건 썩 내키지 않았으니.


 거리를 조금 벌린 소영은 밀링 머신과 그 옆에 늘어진 권주민을 손아귀 안에 넣었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중얼거리며,



 “잘 가요. 주민 아저씨.”



 주먹을 꾹 쥐었다.




 밀링 머신이 우그러드는 굉음과 터져 나오는 피보라를 뒤로 하고 소영은 발걸음을 옮겼다.

 어둑하고 먼지내 자욱한 폐공장 밖으로.

 코 앞까지 다가온 복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이윽고 야외로 나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황량한 밀양 삼남면의 풍경.

 뒤에는 야트막한 야산이, 앞에는 그저 초토화된 산업단지와 농토가 펼쳐져 있을 뿐.

 공기 중에는 모래가루가 가득하니 퍽 건조하고 텁텁했다.


 소영은 따끔거리는 뒷목의 수술 자국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만져지는 건 피부 밑의 딱딱한 칩 대신, 흔적조차 희미해진 흉터 자국 뿐.



 ‘원주에서 적출해두길 잘했어.’



 반쯤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마력억제장치의 기능이 해제된 사이 억제기를 제거한다는 발상은.


 원래라면 마법소녀는 충분한 마력만 남아있으면 얼마든지 되살아나는 존재.

 치명상을 입어도 마스코트가 자동으로 변신시켜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초 고문치사한 마법소녀 협회장과 사형당한 마법소녀들은 이야기가 달랐다.

 마력억제기를 장착한 상태에서 죽었기에, 부활이 불가능했다.

 회복에 필요한 마력까지 가미긴의 저주가 차단했기 때문에.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 역류의 저주가 꺼진 상태에서는 얼마든지 부활이 가능하다는 뜻.


 페리도트를 제거하러 원주연합의료원에 가기 전, 소영은 칼로 뒷덜미를 한 차례 찢어냈었다.

 칩에 내장되어 있는 초소형 폭탄을 일부러 작동시키기 위해.

 그대로 죽어버릴 가능성도 있는 도박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배팅은 성공했다.

 이제 그녀를 제한하는 족쇄는 없었으니까.


 손 계장도 차 부장도, 국정원의 누구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사실.

 소영은 이를 뿌드득 소리 나게 갈았다.



 ‘큰오빠의 죽음에 어떤 방식으로든 일조한 녀석들이야. …다 죽여버릴 거야. 전부 다. 고통스럽게.’



 한 국가의 중추에 있는 기관을 적으로 돌리는 일이었다.

 상대는 그저 몇몇 개인이 아닌 경찰, 군대, 정치가, 시민, 그리고 같은 마법소녀들.

 그 모든 자들의 집합체.

 아무리 마법소녀의 힘이 있다 한들, 사실상 자살 공격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소영에게는 그런 건 염두에 둘 가치가 없는 문제였다.

 얼마나 많은 희생을 내든,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자신의 차로 향하며, 그녀는 가족들을 떠올렸다.

 네 살, 일곱 살 터울의 언니와 오빠. 해운대구에 있는 자택에서 유유히 지내고 있을 부모를.



 ‘내가 죽든 말든 얼굴도 안 내비치겠지. 잘 됐어.’



 사실상 의절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마법소녀 특별법이 발효된 이후로는 특히.

 원래부터 몸이 약하고 재주도 없어 가족들의 짐만 된 쓸모없는 막내.

 그걸 극복하려고 마스코트라는 정체도 모를 외계 생물을 받아들인 어리석은 막내.

 덕분에 정치계에 출마하려는 장남의 발목을 잡은, 불필요한 막내.

 그들과 서로 주고받을 정 따위는 없었다.


 그렇기에 자신에게 유일한 가족은, 내쳐진 자신을 오롯이 사랑해주던 큰오빠 뿐.

 이 세상과의 유일한 연결고리도, 지금은 죽어버린 그 뿐.


 그의 복수를 위해서라면 그녀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허약한 여자애 전소영이 아니라 마법소녀 아메지스트가 된 그녀는.

 





*

 





 빈촌과 부촌의 경계를 가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다.

 옛날에 그런 역할을 하던 건 성벽이나 궁궐의 긴 담장.

 거지들은 밖에서 비바람과 땡볕, 호환을 맞아가며 살았고 부자들은 상대적으로 그런 횡액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현대에는 노골적으로 그런 차별을 할 수 없어서인지, ‘장벽’의 성격이 달라지긴 했다.

 내부에서 도시의 모든 문화생활을 향유할 수 있는 고급 아파트단지.

 그 입구를 막는 출입사무소와 비거주민을 가차없이 쫓아내는 경비원.

 뭐 그런 것들이었다.


 지금은 바야흐로 천만 가까운 노숙자와 셋방살이, 판자촌 거지들이 도가니탕처럼 뒤섞인 시대.

 부산에는 그런 가난뱅이들과 부자들이 거리를 둘 수 있는 천연의 장벽이 있었다.

 수영강. 

 비렁뱅이 떼가 자산가와 정치가들의 궁궐에 감히 침입하는 걸 막아주는 자연의 은혜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어쨌든 강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다리가 생기기 마련.

 아직도 복구가 다 되지 않은 광안대교를 빼면, 수영강 위를 가로지르는 교각은 10개 이상.

 최북단의 회동교부터 최남단의 민락교까지.


 그 다리들 덕분에 해운대구의 권력자들도 황산 자락을 빙 둘러 다니는 시간낭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반대로, 굶주린 거지들 또한 마음껏 부자들의 궁궐로 들락날락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중에는 제2의 테러범, 마법소녀 카넬리안이 존재하지 않으리란 법도 없었고.


 그래서 부산 수도방위사령부의 현재 주요 업무는, 그 다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어둑해진 부산 시내에서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센텀시티.

 수영강물에 반사된 그 불빛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그만큼 눈을 피로하게 만들기도 했다.

 8차선으로 된 수영교의 센텀시티 방향을 막고 있는 바리케이드와 검문소.

 장갑차 측면에 기대 서 있던 선희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하품을 했다.

 이미 때는 밤 9시.

 전선에 있는 것보다는 나았지만, 하루 종일 검문소에 있는 것도 사람 할 짓은 못됐다.


 이면세계 대전 시기였으면 어떻게든 이를 악물고 버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희는 도저히 의욕이 일지 않았다.

 공주대학교 캠퍼스를 점령하자마자 갑작스러운 수방사로의 전출.

 그러더니 보람도 뭣도 없는 해운대구 경비에 투입된 그녀로서는.


 심지어 왜 하필 부산 수방사로 전출되었는지 이유조차 알 수 없었다.

 상식적으로 연합과의 다른 전선에 투입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연합 마법소녀들의 게릴라전에 이미 큰 피해를 입은 2군단이라든지.

 물론 선희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더더욱 이해가 안 가는 점은, 그렇게 수방사로 갑자기 전출된 게 자신 뿐만이 아니라는 점.

 5군단에서 자신을 포함한 두 명, 3군단에서 또 두 명.

 총 네 명이 자신처럼 해운대구 경비 업무에 투입된 것이다.


 전선의 마법소녀 13명 중 4명이나 뺄 정도로 이게 중요한 일인지, 선희는 영 아리송했다.

 여기 와서 하는 일이라고는 땡볕에 12시간 넘게 서 있거나 초소 안에서 쉬는 게 전부.

 애초에 검문은 군인들이 알아서 다 하고 있었으니까.


 마법소녀들은 그저 비상사태에 대비한 예비전력이라는 게 지원단 장교의 설명이었다.

 그녀는 잠깐 그 의도를 궁리해보다 그만뒀다.

 알아봐야 뭐하겠냐 싶었기 때문이다.

 대신 그녀는 간간히 머릿속에 떠오르곤 하던 광경을 되새김질했다.



 “은정이 걘 좀 괜찮을까 모르겠네… 충격이 클 텐데…”



 쓴 입맛을 다신 그녀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오열하던 은정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그 발 밑에 뒹굴던 고정훈 중사의 시체를 사이에 두고 오간 말다툼 역시.



 ‘아, 아저씨. 눈 떠봐요. 장난치지 말고. 숨 좀 쉬라구요!’

 ‘…죽었어. 은정아. 그만해.’


 ‘안돼… 제발, 아저씨…’

 ‘일단 사단본부하고 지원단에 보고를-‘


 ‘왜 안 지켜줬어요! 언니라면, 언니 방어 마법이라면 충분히 지켜줄 수 있었잖아요! 아저씨를… 그 씨발년들한테서!’

 ‘…’


 ‘이게 뭐냐고요! 이번에도 비겁하게 자기 목숨만 지키고!’

 ‘…야, 마법소녀 둘을 나 혼자 막고 있었는데 그럴 여유가 어딨어? 네가 아스베스토스 그 여자만 제대로 견제했어도 훨씬 많이 살렸을 거야. 엉뚱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말고 너나 잘했어야지.’


 ‘아…’

 ‘말하지 않았니? 맨손으로 마법은 못 써도, 하다못해 총에 익숙해지라고. 무작정 활로 고비용 마법만 쏴 대니 견제 하나 제대로 못 하는 거야. 너, 하나도 도움 안 됐어. 정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이었다. 그리고 옳은 말도 아니었다.

 공주대학교 캠퍼스에서 매복하고 있던 연합의 마법소녀 세 명.

 그들 중 두 명의 집중공격을 받으면서도, 선희에게는 은정에게까지 방어 마법을 유지해줄 여력이 있었으니까.


 고 중사를 죽게 내버려둔 건 순전히 효율 때문.

 마법소녀에게 유효한 타격을 주지 못할 일반 군인에게까지 마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언제나 여유분의 마력은 남겨둬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으니.

 도움 안되는 파트너와 함께, 이면세계 대전을 겪은 베테랑 세 명을 상대로 버텨야 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실제로 충주의 2군단에서 지원이 5분만 늦었더라면 자신이나 은정 둘 중 하나는 죽었을 터.

 그리고 시체가 될 가능성이 더 높은 사람은 미숙한 은정이었을 터였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그 여자애의 목숨을 지킨 셈이다.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어.’



 자기합리화를 마친 선희는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일그러진 은정의 얼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고 중사와 수색대원들의 시체와 함께.

 아마 앞으로 다시는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잊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런 비극은 이면세계 대전 때 이미 수도 없이 경험했으니.


 다시 찾아온 무료함.

 흐려져가는 씁쓸함을 입 안에서 굴리던 그녀는, 천천히 다가오는 배기음에 백미러 건너편을 쳐다봤다.

 민락교차로 쪽에서 접근 중인 차량.

 요즘 흔히 찾아보기 힘든 오픈카 스타일의 스포츠카였다.

 야밤인데도 노란 도장이 확 눈에 띄었다.


 스포츠카의 주인은 20대 남자. 애인인지 뭔지 모를 여자를 옆에 태우고 있었다.

 떫은 표정으로 내민 신분증을 잠시 쳐다본 군인이 수신호를 보내자, 프리패스처럼 열리는 차단기.

 부잣집 자제라도 되는 모양이었다.


 급가속하여 사라지는 스포츠카를 보며 선희는 자신의 모닝을 떠올렸다.

 처음 살 때부터 연식을 꽤 먹었는지 비만 오면 시동이 잘 안 걸리는 중고차.

 아마 백 대를 팔아도 저런 스포츠카는 살 수 없을 터였다.

 어차피 돈이 있다고 해도 저런데 부릴 사치는 없었지만.



 선희는 간간히 하품을 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비싸 보이는 차량들이 검문소를 제 집 마냥 들락거리는 걸 멍하니 쳐다보면서.

 개중에는 묘하게 먼지와 모래 투성이인 일반 승용차도 한 대 있었지만, 선희는 본체만체였다.

 다른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기에.


 지금 부산 시내는 치안 유지를 핑계로 정부의 통금령이 내려진 상태.

 때문에 밤 10시 이후로는 민간인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그때가 되면 검문소도 당직만 남으니, 자신은 관사로 돌아갈 수 있을 터였다.



 ‘오랜만에 엄마 아빠 얼굴 보러 갈 수 있겠네… 아빠는 당뇨약은 잘 드시나 몰라. 가영이는 기분이 좀 그렇겠다. 남친도 못 만나고. 케이크라도 사갈 수 있으면 좋겠는데, 지금 시간에 연 가게가 있으려나. 선우는 하반기 장학금 신청은 했나 모르겠네.’



 수방사 본부와 관사가 위치한 토곡근린공원에서 집까지는 1km 정도.

 오늘은 1시간 정도 외출허가를 받아놨으니 시간은 충분했다.

 선희는 땡볕 아래 서 있느라 튼 피부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했다.

 통금조치 때문에 남친을 못 만나게 된 여동생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 마음이 풀릴지.



 “…중위님! 중위님!”



 상상의 나래를 깨부수는 걸죽한 목소리.

 선희는 자신을 부르는 군인을 쳐다봤다.

 이름이 뭐랬더라. 뭐, 어차피 썩 중요한 사람은 아니니 굳이 알 필요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판단한 선희는 시큰둥하게 물었다.



 “왜?”
 “22시 됐슴다. 퇴근하실 시간임다, 중위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싶었던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21시 59분.

 가볍게 둘러본 다리 너머의 민락교차로는 가로등이 다 꺼져 있었다.


 어차피 더 있아봐야 할 일도 없었기에, 선희는 가벼운 경례를 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응, 수고. 나 먼저 가볼게.”
 “고생 많으셨슴다! 드가십쇼!”


 “고생은 무슨…”



 초소 옆으로 간 그녀는 안에서 인수인계를 하던 초소장을 불렀다.



 “퇴근할 게요.”
 “잠시만 기다리십쇼. 발신기가…”



 초소장이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발신기 버튼을 눌렀다.

 선희는 약간의 짜증이 섞인 눈빛으로 그걸 쳐다봤다.

 자신에게 이식된 마력 억제장치를 켜는 신호.

 근무시간이 끝났으니 어쩔 수 없다지만, 저걸 켤 때마다 선희는 기분 탓인지 뒷목이 찌릿하고 머리가 무거웠다.


 부사관 둘의 수군거림을 뒤로 하고, 선희는 자신의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모닝을 주차해둔 곳은 다리 옆의 운전학원 주행코스.

 비스듬한 내리막길은 서늘하고, 강가라 그런지 약간은 습했다.


 주행코스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한 선희는 차 키를 꺼내 몇 번 눌렀다.

 신호수신기가 상태가 안 좋은지, 요즘은 여러 번 눌러야 잠금이 풀리곤 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운전석 문.

 군화 바닥에 묻은 흙을 턴 선희는 운전석에 올랐다.

 평소에는 어지간해선 시속 80 이상은 안 내지만, 오늘의 제한시간은 밤 11시였기에 적당히 속도를 낼 셈이었다.


 탈탈거리는 엔진음와 함께 오르막길을 오르던 선희는, 문득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읏!”



 브레이크를 밟고 탐색 마법을 쓴 건 거의 본능이나 다름없었다.


 손에 묻은 식은땀을 닦은 선희는, 떨리는 눈으로 오른쪽을 쳐다봤다.

 벡스코 건물의 파란 조명 사이로 고개를 내민 야트막한 봉대산.

 그 너머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마력의 일렁임을.



 ‘거리는 대략 4km… 장산터널 쪽인데. 해운대 한가운데서 왜…?’



 마법소녀 한 명이 전력을 다하는 수준, 그 이상의 마력.


 지금 국내에서 마법을 허가 없이 쓰는 건 금지되어 있다.

 특히나 마법 테러를 한 차례 겪었던 해운대구에서는.


 하지만 아직 도심을 울리는 공습 사이렌도, 상공을 비추는 탐조등도 켜지지 않은 상황.

 선희는 갈등했다.

 당장 검문소에 가서 이걸 알려야 할지, 아니면 모르는 척 집으로 돌아갈지.



 ‘그냥 마력을 활성화시켰을 뿐일지도 몰라. 어떤 멍청한 애가 사고라도 내서 자동변신했을지도 모르잖아. 굳이 먼저 머리를 들이밀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도 믿지 않는 생각을 주워섬기며 선희는 엑셀을 밟았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선 수영교 앞의 검문소를 지나쳐야 했으니.

 이동하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두 선택지가 그녀의 뇌리를 수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먼저 알릴 것이냐, 아니면 무시할 것이냐. 


 올라가는 검문소의 차단기 앞에서도 그녀는 아직 결론을 못 내린 상태였다.

 창문을 내린 채 생각에 잠긴 그녀에게, 초병이 경례를 건넸다.



 “충성! 조심해서 들어가으어어! 어!“



 이변에 예고 따위는 없었다.


 일순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지표면.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온 천지가 흔들렸다.

 바닥에 넘어진 초병을 무시하고, 선희는 다급히 백미러를 쳐다봤다.


 조금 전 마력의 파동이 일어난 황산 기슭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듯 피어 오르는 흙먼지.

 빛나는 야경 사이에서도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보랏빛 광채.

 빌딩 몇 채가 그 빛에 둘러싸인 채 공중을 떠다녔다.

 상공 200m쯤 되어 보이는 높이에서 레고 블록처럼.


 검문소에 있는 모든 자들의 이목이 그 방향으로 집중됐다.

 선희, 바닥에 넘어진 초병, 인수인계를 주고받던 부사관들, 영내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다른 병사들 모두.

 누구도 감상 한 마디, 말 한 줌을 뱉을 생각도 못했다.



 서늘한 침묵이 흐르기도 잠시.

 공습 사이렌이 그들의 심장을 관통하듯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지막하니 누군가 중얼거렸다.



 “좆 됐네.”



 그 말을 뒷받침하려는 것처럼, 초소에서 마력억제장치 통제기를 들고 달려 나온 부사관이 소리질렀다.



 “전원 차량 탑승! 탑승! 지금 즉각 국정원 본부로 출동한다! 중위님도 얼른 차에서 내리시지 말입니다!”



 설마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마법소녀들을 불러들였나.

 중고 모닝에서 내린 선희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다시 봉대산 너머를 쳐다봤다.


 장갑차의 후문으로 올라타는 병사들의 철모 너머로, 거인이 붙잡은 장난감처럼 선회하는 국정원 본부 건물.

 작년 뉴스에서 본 센텀시티 테러가 저절로 그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강어귀 한가운데서 붕괴된 채 연기를 피어 올리는 광안대교.

 골판지처럼 부스러진 고급 아파트들과 길거리에 널려 있는 타버린 시체들.


 아마 저 건물이 떨어지는 순간, 해운대구는 생지옥으로 돌변할 것이다.

 그때와 똑같이.

 하지만 선희에게 그런 건 지금 아무래도 좋았다.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을 떼며 속으로 한탄을 늘어놓았다.



 ‘가기 싫다. 왜 하필 오늘이야. 왜. 가족들 보러 오랜만에 가는 날에…’



 상대의 전력은 미지수.

 그러나 8층짜리 건물을 장난감처럼 뽑을 정도라면, 다른 마법소녀들과도 궤를 달리하는 존재임이 분명했다.

 이번에 공주대학교 캠퍼스에서 마주친 연합의 마법소녀 셋을 합쳐도 상대조차 안 될 수준.

 그런 적의 공격을 막으려면 한계까지 힘을 끌어내도 역부족일 지도 몰랐다.


 이렇게 성패가 불확실할 때는 도망치는 게 상책.

 그러나 그런 선택지는 지금의 그녀에게는 없었다.


 살아서 돌아올 수 있기를.

 그렇게 빌며 선희는, 긴장에 찬 병사들로 가득한 장갑차에 몸을 실었다.





 

 *

 





 허물어진 해변 주택의 옆.

 텐트 안에서 선잠에 빠지려 하던 윤아는, 문득 피부가 따끔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엉?”



 선크림도 안 바르고 하루 종일 땡볕 아래를 돌아다닌 탓일까.

 하지만 이 따가운 소양감은 어딘가 익숙했다.

 동쪽 멀리서 전해져 온, 탐지 마법 없이도 느껴질 만큼 강력한 마력의 파동과 충돌.

 기분 탓인지 지면도 일순 흔들린 것 같았다.



 “지진이라도 났나?”



 입구를 열고 슬쩍 고개를 내민 그녀는 동쪽을 쳐다봤다.

 그러나 보이는 건 부서진 민박집, 어둠이 내려앉은 울창한 산자락, 그 위로 장승처럼 서 있는 휘어진 송전탑 뿐.

 들개들이 영역다툼이라도 하는지 멀리서 컹컹거리는 짖는 소리가 메아리 쳤다.


 윤아는 잠시 머리를 긁다가 하품을 했다.

 작은아버지인 정신조의 조언을 따라 부산에서 도망쳐 나온 것도 이미 석 달.

 원래라면 지금쯤 이미 꿈나라에 빠져 있어야 정상이었다.

 전기도 기름도 없는 야외 생활을 계속하다 보니 빠른 기상과 빠른 수면이 몸에 밴 것이다.


 하지만 조금 전 받은 섬뜩한 느낌에 잠기운은 달아난 지 오래.

 윤아는 툴툴대면서 손전등을 집었다.



 “에이 씁… 뭐꼬 참말로.”



 건전지가 다 됐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 손전등.

 다만 눈이 암순응이 끝나서 생각보다 썩 어둡지는 않았다.

 오늘은 구름도 한 점 없는 밤이라 별빛과 달빛으로 나름 밝기도 했고.


 박자를 맞추듯 철썩이는 파도 소리.

 리듬을 맞추며 불씨만 남은 모닥불을 들쑤신 윤아는, 다시 피어 오르는 불티를 보며 무너진 담장 위에 주저앉았다.

 엉덩이에 닿는 축축한 느낌이 찝찝했지만 뭐 어떠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게 된 것도 한 달이 넘었다.


 조용하던 참매미들이 불빛을 보고 밤낮을 헷갈렸는지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10m쯤 떨어진 곳의 노송.

 윤아는 홧김에 그 소나무에 번개라도 떨굴까 고민하다 그만뒀다.

 해안가에 있는 바르바토스의 권속의 잔해 때문에 들개들이 접근하진 않겠지만, 괜히 이목을 끌 필요는 없었으니까.


 대신 그녀는 몸을 반 바퀴 돌려 해안가를 쳐다봤다.

 연회색의 물결에 쓸려 나가는 해안가.

 온통 기름에 오염된 모래밭은 백사장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거무죽죽했다.

 파도에 부딪히며 포말을 일으키는, 높이만 3m는 될 법한 거대 파충류의 갈비뼈.

 바르바토스의 권속이 남긴 시체는 감상하기 썩 좋은 오브제는 아니었다.


 변산반도에 와서 본 놈들의 잔해만 이미 열 구 이상.

 덕분에 썩 환경이 나쁘진 않은 곳임에도, 변산반도에 와서 윤아는 사람을 한 명도 본 적이 없었다.

 사실상 오염지대나 마찬가지였으니.



 “뭐 즈그 때문에 개새끼들이 귀찮구로 안 찝적대는 거 하난 좋구마.”



 지금 야영할 때의 가장 큰 위협은 들개 떼거리.

 특히 죽은 사람고기 맛을 본 놈들은 살아있는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들도 잔머리는 돌아가는지, 몬스터의 잔해로 오염된 지역에는 접근하는 법이 없었다.


 물론 지금 해안가의 잔해는 번개로 태워 정화하긴 했지만, 개들이 그런 걸 알 턱이 없다.

 덕분에 윤아는 들개가 귀찮게 굴 걱정 없이 유유적적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윤아는 달빛 하나 비치지 않는 검은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에게 말을 걸 듯 혼잣말을 했다.



 “근데 차가 콱 고장나뿟네. 바다가 저라니 낚시도 못하겠고. 우짜면 좋겠노? 마 대답해봐라 피카츄 임마야.”

 [---]



 마스코트에게서 돌아오는 텔레파시는 없었다.

 애초부터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윤아는 낙담하지 않았다.

 마법소녀가 된 지 6년, 처음 계약할 때 이후로 놈이 말하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차라리 지금은 진짜 피카츄처럼 '삐까 삐까' 소리라도 내줬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었다.



 “머 묵을 거야 아직 많은데, 광주로 돌아갈라카니 내가 당장 거서 군바리들 피해서 왔다 아이가. 내나 익산에는 그래도 사는 사람들 쪼매 있다 카던데, 거나 가보까?”
 [---]


 “내 얼라 때도 이래 여행 다니본 적이 없는데, 하이고 먼 팔자가 이렇노. 배낭여행도 아이고, 석달이나 이랄라니 지겨버 디지겄다. 샤워도 하고 싶고, 고마 침대에서 발 편히 좀 뻗고 자보고 싶다.”

 [---]



 허무함을 느낀 윤아는 발로 바닥의 잡초를 툭툭 걷어찼다.

 지루함을 못 이겨 혼잣말을 늘어놓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진 것이다.



 “하… 내가 미칬제. 차라리 내가 톰 행크스고 니가 윌슨이었음 좋았겄네.”



 최소한 부산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심심하지는 않았다.

 선희나 정인하고 문자나 전화로 잡담이라도 주고받을 수 있었으니까.

 아무리 영양가 없는 대화라 해도 지금처럼 답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보다야 건전할 터였다.

 심지어 이름이 마스코트지, 반쯤은 몬스터나 다름없는 녀석에게 피카츄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서는.

 헛짓거리도 버틸 수 있는 한도가 있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다시 부산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

 지금 돌아가면 안전할 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휴대폰도 노트북도 부산을 나올 때 버린 상태.

 정신조나 부모님과 접촉할 수단도 없었기에 도무지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자신처럼 도망친 마법소녀를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추적하진 않았지만, 그것도 얼마 전까지의 이야기.

 당장 광주에 모습을 드러낸 헌병대를 보고 도망친 게 3일 전이었다.

 이제는 부산 밖도 안전하지 않았다.



 답답한 기분을 삭히기 위해 윤아는 긴 허리를 뒤로 쭉 눕혔다.

 도심의 먹장 같은 하늘이 아닌, 심해처럼 깊고 검푸른 밤하늘.

 서로 얽힌 채 반짝이는 별빛은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고왔다.


 윤아는 문득 그런 것보다도 사람이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음껏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고 싶다고 느꼈다.


 지금껏 거쳐온 곳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부산과 경남 남동권역 밖에도 사람은 산다.

 진주, 사천, 순천, 남원, 광주…

 하지만 최소한의 접촉만 할 수밖에 없었다.

 엄한 말이라도 했다가 군부대에 밀고 당할지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하고 백날천날 이야기를 한다고 마음 속의 허기가 채워지는 건 아니었다.

 최소한의 추억도 관심사도 공유하지 못하는 생판 남들하고는.


 눈꺼풀 밑의 어둠 속에서, 그녀는 옛 동료들을 떠올렸다.

 선희, 예지, 정인.

 예지는 부산 시절부터 소식이 끊어진 지 오래.

 선희는 아마 지금 부산에 있을 터.

 그리고 정인은…


 윤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다. 금마 연합으로 튔다 그랬제.”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낸 윤아는 텐트로 다시 기어들어가 지도를 가지고 나왔다.

 모닥불 덕분에 희미하게나마 보이는 지도를 보며, 윤아는 진로를 가늠했다.

 내심 기대감에 차오르는 마음을 품고.



 “논산, 공주로 올라가믄 가깝긴 한데… 안되겄네. 타이밍 안 좋으믄 전쟁통에 고대로 휘말리뿌겠다. 해안 따라 가는 게 그나마 낫겠다. 그라믄 중간에 보자, 군산에 들러가꼬…”



 타닥거리는 모닥불을 벗삼아, 외로운 그녀의 밤이 별과 함께 조용히 흘러갔다.

 어떻게 흘러갈 지 모르는 계획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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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