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보였다.

병원? 아마도 병원이겠지. 최근 몇 년 동안 몸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시야가 어둡고 몸이 아픈 걸 보면 뻔하려나. 참… 기구한 인생이네.

어떻게든지 밥 벌어 먹고살려고 혼자서 야겜 제작하다가 응급실에 실려 오다니.

뉴스에 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거야. 멍청한 자식. 그러게 몸 좀 아끼지.


아니, 잠깐만… 무언가 좀 이상한데…

보통 병원에서 사람을 이런 딱딱한 바닥에 눕히던가…?

그리고 가슴이 왜 이렇게 무겁지… 진짜 죽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누가 날 내려다보는 것 같은데… 간호사겠지? 그러니까 죽진 않겠지.

아, 몸 좀 괜찮아지면 다시 일이나 해야지.


“저기! 저기요!? 괜찮으세요!?”

“…살아, 있어요.”

“으, 응급실로 보내야 하나…?! 119? 아니, 어떻게 하지?”

“네?”

“정기, 그래! 정기를 좀 주면 기운을 차릴지도 모르지!”


응급실? 정기? 아니, 잠깐. 그러면 여기는 도대체 어디인 거야.

무리해선 안 된다는 걸 알지만, 상황을 알아볼 수밖에 없겠지.

그래서 핑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가슴이, 보였다.


“에? 아, 아니. 뭐야. 이게…”

“야호! 정신을 차리셨구나! 후후, 당신은 제 분신으로 소환됐으니까 이제 제 명령 따라야 해요!”

“…네?”

“앞으로 저 대신 정기를 뽑아오세요. 이게, 제 명령!”

“아, 아…”


묘하게 여성스러운, 아니. 여성 같은 목소리.

게다가 확실하게 여자처럼 보이는 몸과 무게감이 있는 가슴까지.

내가 여자가 되었을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안 좋은 꿈을 꾸는 거겠지.

그러니 잠이나 자자고. 이게 꿈이 아닐 리가 없으니까.


*


꿈조차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던 탓일까.

정신이 조금 들었을 때는 몸 상태가 훨씬 좋았다.

아무래도 요즘 며칠 정도 쉬지 않았던 게 치명타가 된 거겠지.


무언가 조치가 필요할 것 같긴 했다. 그러니 당분간 잠을 좀 더 자면 되겠지.

한… 다섯 시간 정도? 마음 같아서는 여섯 시간만 자고 싶지만, 알잖아.

나 같은 게 세 시간보다 더 잘 수 있을 리가.

무엇보다 계속 일해야 하는데 몸 안 좋다고 뻗을 수도 없고.


“…아, 슬슬 마감해야.”


눈을 뜬 순간, 가장 먼저 보인 건 거대한 가슴이었다.

무척 커서 그 자체로 둔기가 될 것 같은… 거대한 지방 덩어리.

그걸 보고 나서야 조금 전에 꾸었던 꿈이 기억났다.

내가 여자가 될 리가 없으니까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꿈이 아니구나.”

“일어나셨네! 많이 피곤한 것 같아서 무릎 베개 해드렸는데, 저 착하죠?”

“…네, 뭐.”


눈앞의 여성은 무척 매력적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고개를 돌릴 정도?

분홍색과 흰색 투톤의 긴 머리카락은 윤기가 흘렀고 몸매도 대단했다.

…그리고 서큐버스라고 말한 것처럼 뿔과 날개도 있었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이게 꿈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겠지.

꿈이라면 소재고 현실이라면 적응해야 하니까.

그래서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상황을 좀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하죠! 저는 마법학과 공학을 전공한 대학원생인데, 중세에 쓰던 금기의 마법이 있거든요.”

“네?”

“용사 소환 마법을 응용한 건데, 이계의 사망한 영혼을 부르는 거에요.”

“결국, 죽었나.”

“그리고 그 영혼을 연금술로 완벽하게 복제한 제 몸에 넣었죠.”


완벽하게 이해한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었으니까.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그녀를 본떠 만든 몸에 내 영혼이 들어갔다는 거잖아.

문제는 내가 남자고 머릿속에 가득 찬 거라고는 마감과 일밖에 없는 중증 워커홀릭이라는 것.

딱히 그녀를 걱정하는 건 아니지만, 이래도 되나 싶었다. 그녀가 원하던 건 이런 실패작이 아닐 테니까.


이미 죽었다는 걸 알아서일까. 아니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정신이 나간 걸까.

기이할 정도로 평온함과 침착함이 느껴지는데다가 묘한 탈력감도 느껴졌다.

그래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해도 적당히 넘어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순간 폭탄선언이 들렸다. 


“저는 서큐버스지만, 야한 일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서큐버스라면서요.”

“서큐버스라고 죄다 음탕하진 않거든요!? 전 그런 거 생각하기도 싫어요!”

“그렇군요.”

“그러니까 당신이 앞으로 저를 대신해서 정기를 뽑아주세요.”

“흠.”

“어차피 당신도 먹고살려면 정기가 필요하거든요. 윈윈이죠.”

“그렇군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서 거울로 걸어갔다.

거울 앞에는 그녀와 똑같은 머리카락색을 한 트윈테일 미소녀가 헐렁한 옷을 입은 채 서 있었다.

완벽하게 복제한 몸에 넣었다더니, 그게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지.

그녀 옆에 서면 내가 여동생으로 보일 것 같아 헛웃음만 절로 나왔다.


“생각보다 어린 모습이네요.”

“아, 당연하죠. 서큐버스는 일종의 정신체. 몸의 나이도 조절할 수 있거든요.”

“외형이나 체형은요?”

“그건 안타깝게도 불가능. 자. 머리카락을 보면 백발과 분홍색이 같이 있죠?”

“네.”

“서큐버스는 정기가 부족할수록 머리카락이 백색으로 변하는데, 그 상태가 오래되면 쇠약사해요.”

“아사가 아니라는 건, 밥은 따로 먹어야 한다는 건가요?”

“그렇죠. 똑똑하시네요. 하여간 마법도 정기로 사용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몸을 직접 섞는 것.”

“으엑.”

“물론, 거부감이 있을 수도 있죠? 그러니까 꿈에 침입해서 정기를 얻어 와도 좋아요.”

“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뭐가 되었든 간에 내가 서큐버스로 변했다는 건 현실.

밥 먹고 사는 거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쳐도 정기를 흡수하는 건 어떻게 할 수 없겠지.

딱 봐도 정기라는 건 그거 같은데… 내가 다른 남자들에게 아양 떨며 그런 걸 얻을 수 있을 리가.

그러니 무조건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고 다행히 그녀는 다른 방법을 알려줬다.


“당연히 다른 방법도 있죠. 사람들이 자신과 연관된 걸로 쾌락을 해소해도 얻을 수 있어요.”

“…네?”

“쉽게 말하자면 딸감이 되어라, 는 거죠.”

“그러면… 방법이 있을 것 같네요.”

“아, 나체로 돌아다니진 마세요. 요즘은 그러면 풍기문란으로 잡혀가니까.”

“…그럴 생각 없었거든요. 이 세계는 제가 아는 것과 많이 다른 것 같은데, 그것도 알려주실 수 있나요?”

“당연하죠! 그쪽 세계는 어땠나요?”

“일단 서큐버스 같은 건 없었죠.”

“에에, 신기하네요. 그러면 밥 먹고 생각할까요?”


조금 불안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못 먹을 음식을 줄 것 같진 않았으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잔뜩 긴장한 채 있었는데… 그럴 필요도 없던 모양.

그녀는 조금 부지런히 돌아다니더니 김치랑 쌀밥부터 꺼냈다.

거기에 컵라면에 뜨거운 물도 붓고 햄과 계란까지 굽던데.

그걸 보고 나니까 이것도 제법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 차린 건 없지만… 양껏 드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한가요?”


이것저것 질문했지만, 딱히 유의미한 정보는 없었다.

판타지 속 종족들이 있을 뿐. 이 세계도 내가 아는 곳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솔직히 김치랑 된장 먹을 줄 알면 한국인이라며 웃는 걸 보면 뻔했다.

그러면 여기도 내가 아는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겠지. 그렇다면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저 신분 문제는 어떻게 처리하나요.”

“당연히 이미 만든 게 있죠. 짠, 제 신분증이에요.”

“…이예정?”

“그리고 당신 이름은 이예지에요! 여기 당신 신분증.”

“…이름이 좀 구리네요.”

“싫으면 국정원에서 코로 설렁탕 마셔야 하는데, 어떻게 하실래요?”


여기도 그런 농담이 있다니 어이없네.

하지만 딱히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다가 지금은 좀 쉬고 싶었으니까.

그래서 말없이 밥만 먹다가 대답했다.


“해야죠, 뭐. 어차피 지금은 깊게 생각하기도 싫네요. 전생에서 워낙 굴렀거든요.”

“전생? 전생에서 뭐하셨는데요?”

“야짤 그려서 야겜 제작하던 사람이에요. 1인 제작.”

“앗… 그림쟁이에 프로그래머까지… 고생하셨겠네요…”

“그래서 말인데, 야한 그림. 한 번 그려보죠.”

“아! 그러면 되겠네요! 부탁할게요!”

“근데 제가 여기서 뭐가 통하는지는 모르겠는데, 선생님으로 그림 그려도 될까요.”

“당연하죠! 정기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저로 뭘 그려도 상관없어요!”


의욕이 넘치는 걸 보니까 오히려 두려웠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융통성이 있는 사람인 거겠지.

여기서도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건 조금 슬프지만, 좋게 생각하자면 제2의 인생이니까.

그래서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곧장 그녀의 태블릿과 태블릿 펜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헉, 잘 그리시네요?”

“미래 다 팔아치우고 그림이랑 프로그래밍만 잡았는데, 당연히 잘해야죠.”

“아하… 맞다. 당신, 앞으로 저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알죠?”

“그림 공유 사이트 있어요?”

“있긴 하죠? 마침 성인으로 가입되어 있긴 해요. 그리고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것 알죠?”

“있다면 다행이네요.”


생각했던 것보다 몸에 적응하는 게 힘들었지만, 괜찮았다.

몇십 분 정도 지나고 나니까 오히려 몸에 힘이 넘쳐서 좋았거든.

다 죽어가던 그 몸보다는 이게 더 나은 거겠지.

그래서 그녀의 몸을 즉석에서 스케치하며 복장을 구상했다.


구상… 이라고 해도 딱히 특이한 건 없었다.

동정 죽이는 스웨터를 그린 다음에 하복부 부분을 휑하게 만들었을 뿐.

서큐버스하면 음문이 정석이니까 그것까지 분홍색으로 집어넣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뿔과 날개까지 집어넣으니 괜찮은 그림이 완성되었다.


“이게… 저?”

“그런데 이렇게 올려도 되는 거에요?”

“에이, 죽는 것보다는 낫죠. 그리고 어차피 저 밖에 잘 안 나가요? 요즘은 죄다 배달하는걸.”

“저도 그래요.”

“작품명은 뭐로 할까요? 아, 아. 그거로 해야지. 스웨터 입은 나!”

“이제 기다리면 되나요?”

“그렇죠. 기다리면 될 거에요. 아아, 잘 되었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잘 안 되었을 때 무얼 해야 하는지는 뻔했다. 발로 뛰겠지.

그리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더 자극적이고 노골적인 그림을 그리는 게 낫고.

마침 그림 실력을 높인다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그렸잖아?

역치도 높고 정신 건강도 좋으니까 뭐가 되었든 간에 그릴 수 있을 거다.


그냥… 이번에는 건강도 좀 챙기고 그러면서 살고 싶달까.

그녀가 죽은 영혼을 가져왔다는 걸 보면 나는 과로로 죽은 거니까.

인생은 마라톤이라고 했지? 그러니 이번에는 좀 더 미래를 보고 달리고 싶었다.


물론, 그것도 이번 일이 잘 해결되어야 가능한 것.

그래서 한동안 초조하게 무슨 변화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알림이 뜨는 걸 보면 적어도 보는 사람은 있다는 거잖아. 아닌가?

뭐,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 적어도 기계보단 그림을 더 잘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


“와아아아아!!!!”

“…왜요?”

“정기, 정기가 모여들고 있어요!”

“아하.”


그녀의 머리카락은 점점 분홍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미약하지만 조금씩. 느리지만 확실하게. 그렇게 머리카락색이 변하는 건… 상당히 신기했다.

도대체 어떤 원리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중요한 건 앞으로 정기 문제는 해결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랑 같은 몸이라서 그런 걸까. 내 머리카락도 분홍색으로 변하고 있었으니까.


“당신 정말 천재에요! 솔직히 가챠 실패했으면 다시 돌리려고 했는데!”

“그렇군요. 그런데 우리 호칭을 좀 재정립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앞으로 주인님이라고 부르세요.”

“주인님! 좋아요, 앞으로 계속 주인님이라고 할게요!”

“…농담이에요. 그럴 필요 없고, 남는 침대 있죠? 지금은 좀 자고 싶거든요.”

“치, 침대 여기 있어요? 그러면 안녕히 주무세요.”


일을 그르칠 수도 있다는 긴장이 풀린 탓인가. 침대에 눕자 순식간에 수마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예전이었다면 이대로 잘 수 없다고 카페인이나 들이켰겠지만, 지금은 아니거든.

새로 얻은 인생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 거다. 힐링 라이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리고… 종종 여자가 된다면 그걸 하겠다고 생각했거든.

그래, 인터넷 방송 말이야. 미소녀가 되었으니까 그거 가지고 살 수 있겠지.

자고 일어나서 그녀한테 물어보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그동안 못 잔 잠이나 자야겠지. 안녕히 주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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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