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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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머리가 꽤 길어졌는데 다듬을지 말지 걱정이에요. 아무래도 머리가 길어야 더 안전하기는 한데, 너무 음침해보이면 어떡하죠. 게다가 이 기묘한 색의 머리카락은 나를 더 눈에 띄게 만들잖아요. 난 조용히 살고 싶은데. 뒷말이 간간이 들려오지만 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요. 어차피 안 바뀌잖아요.

  이 순간이 꿈만 같아요. 내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뿐이에요. 나도 내가 장학생으로 선발될 줄은 몰랐거든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기분좋은 꿈인지 끔찍한 악몽인지는 모르겠어요. 똑같은 일이 또 반복될까봐 두렵기만 해요.

  정신을 차려보니 잠들어 있었어요. 또 꿈을 꿨네요. 어딘지 모를 혼잡한 공간이었어요. 사람들이 돌아다니다가 나를 보곤 겁에 질리더니 사라져버리더라고요. 익숙한 사람 같았어요. 그래서 찾아 뛰어다녔지만 눈 앞에 보이는 것은 황량한 회색 벌판밖에 없었어요. 문득 손에 거울이 잡혔는데, 거울을 쳐다봤더니 거울도 사라지고 거울을 잡고 있던 나도 사라졌어요. 어딘가로 던져졌는데, 그곳에 익숙한 얼굴들이 있어서 안도했어요. 그런데 표정이 심상치 않았어요. 얼굴들이 바람에 휘날려서 사라졌어요. 그 순간 나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어요.

  식은땀을 흘리며 간신히 깨어났어요. 오늘도 집에는 아무도 없어요. 아마 이모님과 고모님 모두 일을 가셨을 거예요. 머리가 너무 아파요. 나 이대로 정말 가도 괜찮은걸까요? 무서워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내가 여기서 도망쳐버리면 다른 누군가는 날 원망하겠죠? 비겁하다고. 왜 남의 기회를 빼앗았냐고. 괜히 도전했던 걸까요? 어지러워요…….

  그래도 힘내 볼게요. 여기 있으면 더 죽을 것 같아요.


  당신은 왜 내가 어떻게 바라봐도 사라지지 않나요? 마법이 걸려있는 것 같진 않은데. 고도의 완성도를 자랑하던 방어 마법 도구를 걸치고 다니시던 우리 부모님도 한 번은 ‘틈새’에 다녀온 적이 있는데, 어째서 당신은 과묵하게 남아 있나요?

  아니, 어쩌면 그 방어구가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낡았거나, 이렇게 생각하긴 싫지만 사기였을 수도 있겠네요. 그게 제대로 작동했다면 그 야만스러운 것들한테 살해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역시나, 지금도 이렇게 쳐다봐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네요. 참 의문이네요. 왜 내가 발견하기 전까지 아무도 상점에서 당신을 고르지 않았을까요? 속지도 많고, 내구성도 뛰어난데. 일반인들은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있어도 활용할 줄 모르는 걸까요? 그렇다면 정말 한심하네요.

  당신이 수명을 다한 뒤에 난 당신 같은 걸 다시 구할 수 있을까요, 내 일기장님? 

  아, 그냥 차라리 당신이 살아 있다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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