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지중해의 맑은 하늘을 가르며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 건물 하나가 붉은 화염에 삼켜지고 있었다. 나무 타는 냄새와 누린 단백질 탄내가 함께 났다. 바람소리에 희미하게 비명소리가 섞여 들리는 듯 했다. 또 저 지랄이군.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 건물의 문 앞에 번쩍이는 인형 몇 개가 보였다. 갑옷을 입은 그들은 횃불을 든 자들의 앞에 있었는데, 그들의 손에 들린 것은 장창이었다. 물론 누군가가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경비를 서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튀어나오면 바로 찌를 수 있도록, 그들은 창대를 단단히 부여잡고 있었다. 본디 햇살을 비춰 번쩍이던 창날은 죽음을 뱉는 불을 비춰 이글거렸다.


그 옆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로브를 걸치고 새주둥이가 달린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손을 지나치게 떠는 걸로 봐서 오늘 처음 사람을 태우고 나온 사람인 듯 했다. 하긴 병 걸린 사람은 물론이고 산 사람도 함께 태웠을테니 그 충격이 꽤 컸긴 했을거다. 허나 사정을 모르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는 거대한 흉조가 다음 먹잇감을 찾으려 털을 고르는 모습 정도로 보이리라. 


정처없이 걷다가 도착한 곳은 광장이었다. 과거에는 여기서 뭘 했는지 모르지만 지금은 올 곳이 못된다. 오, 저기 저 사람은 그 유대인이네. 여기 굴러다니는 대가리는 어제 골목에서 구걸하던 거지고. 이미 숨통이 끊어진게 확실했지만-목에 붙은 달랑거리는 살점이 간신히 몸과 머리를 잇고 있었다-식칼을 들고 나온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성가를 부르며 계속해서 칼질을 해댈 뿐. 핏물과 살점이 튀어 주위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또 다른 성가 소리에는 주기도문과 참회 기도가 함께 섞여있었는데, 이따금씩 비명이 간간히 들렸다. 이내 내 옆으로 서로의 몸을 채찍으로 갈기며 온몸을 피로 물들인 사람들이 용서를 빌며 울부짖었다. 회개를 미친듯이 구하는 저들을 보며 생각했다. 글쎄, 교황이 2명인데-아니 어제 생긴 사람까지 하면 3명이군-저들은 누구를 믿고 따르련지. 어떤 교황이 저들을 구원하여 병을 씻어낼 수 있을까. 일단 베니스 총대주교가 지지하는 교황은 아니겠군. 그 사람 그젠가 죽었으니.


소돔과 고모라의 재앙이 막 현세에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묵시록의 4기사-정복의 백기사가 죽음의 청기사가 역병과 함께 막 문을 두드리려 하고 있었다.


신의 이름을 앞세워 신의 계율을 어기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