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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계관:

국정원 5급 사무관, '대악마' 기사단장 그리고 콤비네이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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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씰 대원, 고위 서큐버스 심문관 그리고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왜 그냥 포기하지 않는거야? 영원한 쾌락이 눈앞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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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충분히 도망칠 만한 것이었다는 기억은 확실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필사적으로 달리지만, 그저 멀끔한 도시의 풍경만이 보이고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라도, 하다못해 사람의 흔적이라도 있어야 할 도시는 아무도 없이 너무나 고요하고 깨끗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헉.... 헉.... 여기는 송골매 1, 누구 없나?! 아무나 들리면 대답좀 해봐!"


조종사 헬멧 무전기에 대고 외쳐보지만 지직거리는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씹, 무전기는 대체 왜 이러는거야...?"


조종사 헬멧을 벗어 맨 손으로 탁탁 두드리던 와중에, 골목에서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뚜벅 뚜벅 걸어 나온다.


검은 그림자는 어느새 금빛 갑옷을 걸치고, 적어도 트럭 1개 길이 정도는 되어보이는 거대한 날개를 활짝 편 용인으로 변한다.


금빛 갑옷, 옅은 보랏빛 비늘 구분 없이 피가 뚝 뚝 떨어질 정도로 피칠갑을 한 채 얼굴에 내게 천천히 걸어오던 그 용인은, 피에 젖은 손톱을 쫙 펴고는 얼굴에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반사적으로 권총집의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기지만 찰칵 거리는 소음만이 일어난다.


떨리는 손으로 슬라이드를 몇 번이나 당겨보고, 탄창을 꺼내보려고도 하지만 권총은 마치 돌로 만들어진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씨발, 씨발!" 


뒷걸음질을 치며 미동도 않는 권총과의 씨름을 포기하고 등을 돌려 있는 힘껏 그 용인이 있는 반대 방향으로 무작정 달려나간다.


여기가 어디인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저것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한참을 달리다가 목 끝까지 차오른 숨에 뒤를 돌아보고 쫓아오는게 없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멈춰 숨을 고른다.


"헉... 헉... 여긴 또 어디야...?"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매장 양 끝이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길다란 매대와 제품들이 내 양 옆을 가로지르고 있다. 


언제 들어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흔히 보이는 편의점의 로고가 매대에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새 편의점으로 들어온 듯 했다.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조용히 고르며 혹시 모를 추격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주변은 고요했고 쿵 쿵 뛰는 심장소리만이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다.


한참을 귀를 기울여도 조용한 적막만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처음 보는 과자들이 잔뜩 있는 매대에 몸을 기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근데, 이렇게 큰 편의점도 있었나?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갑자기 맞은편 매대가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박살이 난다. 봉지과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고, 반으로 쪼개진 매대 가운데에서는 금빛 갑옷을 입은 푸른 피부의 장신 여성이 걸어나온다.


너무 놀라 뭐라 말을 꺼낼 새도 없이 허겁지겁 등을 돌려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딜 보아도 탈출로 대신 상품들로 가득차 있는 매대만이 보일 뿐이다.


어느새 내 바로 뒤에 온 거대한 뿔을 가진 여성이 한 쪽 팔로 나를 잡아 끌자, 그저 저항할 새도 없이 주욱- 끌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꺼져, 씨발! 뭐야? 뭐냐고!"


온 몸을 비틀며 악을 써보지만 거대한 여성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나를 잡아 끈 뒤 내 얼굴을 마주한다.


마치 쓰레기만도 못한 것을 보는듯, 차가운 노란색 눈동자로 몇 초간 나를 내려다 보던 그것은, 날카로운 이빨로 가득찬 입을 쩍 벌리더니 내 머리를 통째로-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으윽.... 안...돼..."


"앗, 일어났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온다. 


마치 자다가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듯 머릿속은 희뿌옇기만 하고, 몽롱한 기억들만이 머릿속을 둥실둥실 떠다닌다.


여기가 사후세계인가? 결국 난 그 괴물에게 잡아 먹힌 건가?


간신히 손을 움직여 내 머리를 만져보자, 파일럿용 장갑 위로 뻣뻣한 머리칼이 만져진다. 잡아 먹힌 것 치고는 꽤 깔끔하게 달려있는 것 같은데...


눈을 살짝 뜨자마자  부신 눈을 애써 깜박이며 뜨자 곳곳이 젖어있는 카키색 비행복 바지가 시야에 들어온다.


잠깐, 저거 피인가? 왜 내 다리에 피가....


동시에, 희뿌여진 머릿속으로 퍼즐이 짜맞추어지듯 기억이 머릿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용인에 의해 추락했던 헬기, 부상을 입은 동료, 간신히 피신했던 편의점, 그리고 그 '괴물' 과의 만남.


정신이 번쩍 들며 반사적으로 허벅지에 있는 권총집에 손을 뻗었지만 차가운 금속성 그립 대신, 그저 텅 비어있는 권총집 내부의 뻣뻣한 인조가죽만이 만져질 뿐이다.


"이거 찾아?"


여성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머리 양 옆으로 솟아있는 검은색 뿔과, 옅은 보라색 피부의 히죽 히죽 웃고있는 여성의 얼굴이 나를 마주한다.



내가 의식을 잃기 전 보았던 거구의 황금빛 갑옷을 입은 '괴물'과 비슷한 종족 같지만, 황금빛 갑옷 대신 전체적으로 검은색을 띤 갑옷을 입고 있는 여성의 검은색 장갑을 낀 손에서 K5 권총이 달랑 거리며 흔들린다.


익숙한 편의점 백색 카운터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내개 말을 거는 그 광경에, 이 광경이 정녕 현실인지, 대체 정체가 뭔지, 내가 사후세계에서 환각을 보는건지, 너무나 많은 질문이 머릿속에 들어차 그저 만들어지다 만 문장만이 입에서 흘러 나온다.


"무.... 뭐... 어떻게... 너... 대체... 무슨..."


"뭐? 머리를 다쳤나 보네~? 똑바로 말을 해야 알아듣지~"


여전히 걸터앉은 채로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히죽거리는 그녀가 비꼬듯이 말했다.


"너... 어떻게 한국어를..."


"음? 니들 말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냥 네 머릿속을 조금 '조정' 한것 뿐이라구~"


"뭐라고...? 대...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공포와 불안감에 가득찬 마음이 목소리에 배어나오지 않게 호기롭게 외쳤지만, 보라색 피부의 여성은 그 모습이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킥킥대며 과장스러운 목소리로 흉내를 낸다.


"푸핫! '대체 내핸태 뮤슨 지슬 핸걔얘~~' 누가 인간 아니랄까봐, 겨우 통역 마법 가지고 과대망상 하는거 아니야? 누가 보면 내가 세뇌해서 가족이라도 죽이게 한 줄 알겠네~"


섬뜩한 그녀의 말에 목 뒤가 서늘해지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내 머릿속을 애써 뒤져보며 혹시 모를 위화감을 찾는다. 


내 신분은 대한민국 육군 대위, 군번 15-18532, 제2전투항공여단 903대대 5번기 조종사. 대전 중입자가속기 연구소에서 발생한 기괴한 '차원문' 현상에서 튀어나온 괴물들이 대전 시내로 들어오는 걸 저지하기 위해 11월 17일 명령을 받고 이륙했고...  


당장 머릿속에 생각나는 내 신분과 있었던 일들을 복기해 보지만, 딱히 위화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야, 세뇌를 잘 했다면 위화감을 못느끼는게 당연하지. 내가 배신을 하게끔 세뇌를 했을 수도... 그래, 복무신조를 외워보자.


복무신조.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하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통일의 역군이 된다. 둘...


그렇게 머릿속으로 복무신조를 되뇌이고 있던 와중에,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저기? 진짜 이상한 짓은 안했으니까 머리좀 그만 굴려~ 애초에 죽이고 싶었으면 너랑 니 친구 자고 있었을때 그냥 머리를 터뜨리거나 했겠지!"


친구? 맞다, 김 준위가...! 


잠시나마 동료를 잊은 나 자신을 책망하며 황급히 입을 열었다.


"내 동료는 어딨지? 당장 응급조치를 받지 않으면...!"


"걱정마~ 저기 진열대 뒤에 지금 편하게 누워있으니까. 고작 붕대 쪼가리 감아두고 응급조치라고 네가 해놓은 것보다는 훨씬 제대로 해놨으니 안심해~"


그녀의 사람 속을 긁어대는 말투는 귓등으로 흘리고 급하게 일어나 그녀가 고갯짓한 진열대 뒤로 절뚝거리며 뛰어갔다.


진열대 뒤로 돌아가자마자, 상당히 커보이는 진갈색 가죽 깔개위에 가지런히 눕혀져 있는 김 준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나를 맨 손으로 붙잡아 진열대에 처박았던 푸른 피부의 여성이 앉아있었다. 


시야에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마치 브레이크라도 작동한 듯 다리가 멈춰서고, 숨 조차도 목 끝에서 턱 걸려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


내가 그렇게 도로 한복판에서 헤드 라이트가 비춰진 사슴처럼 꼼짝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 동안 인기척을 느낀 거구의 여성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우리의 시선은 다시 한번 고요한 편의점에서 마주쳤다.


그때와 같이, 웅- 하는 편의점 냉장고 소리만이 몇 초간 정적을 채운다.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그녀는, 나에게 잠깐 주었던 눈길을 거두고 다시 본인의 손에 들고 있던 금빛 갑옷의 흉부 장갑을 다시 만지작 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게 관심, 아니면 최소한, 적대적인 의도가 없다는 것은 확실해 보였지만 나는 쉽사리 그녀에게서 관심을 거둘 수 가 없었다.


기절 전 본 마지막 광경이 마치 내게 먹이를 포착한 사자처럼 달려드는 그녀의 노란 동공이었는데, 어떻게 아무런 일 도 없었던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금방이라도 눈을 그녀에게서 떼었다간 아까와 같이 순식간에 진열대에 내 몸뚱아리가 쳐박힐 것 같아 김 준위와 앉아있는 그녀를 번갈아 보며 조심 조심 김 준위에게 다가갔다.


김 준위의 일체형 카키색 비행복은 상의가 벗겨진 채, 국방색 반팔티 차림으로 가지런히 눕혀져 있었다. 국방색 반팔티의 옆구리는 피로 흥건하게 젖어있었지만 어떻게든 지혈은 한건지 피가 더 이상 새어나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살짝 찢겨있던 반팔티를 들추자 아까 옆구리에 박혀있던 금속 조각 대신 무언가... 기묘한 무늬들이 그려진 붕대들이 옆구리에 잔뜩 감겨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중세의 종교 서적이나 연금술 서적에서 튀어나올 법한 기묘한 기호들과 도형들이 붕대 사방에 그려져 있었다. 


"뭐야, 이건...?"


"만지지 않는게 좋을거다. 술식이 어그러지면 네 친구는 한 시간안에 과다출혈로 죽을테니."


기묘한 무늬의 붕대를 만지려는 순간, 깊은 여성의 목소리가 내 옆에서 들려온다.


예상치 못한 말에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지만 파란 피부의 여성은 여전히 아까와 변함없는 자세로 앉아 갑옷을 손질하고 있었다.


"술... 식이라니, 무슨 소리야?"


"기본적인 치유 술식이다. 가죽이나 붕대같은 넓은 표면에 그린 뒤 몸에 감싸면 피를 가둬두는 역할을 하지. 제대로 각인 된게 아니라, 일단 보이는 붕대에 술식을 그려넣고 마력을 넣은 것이라 상당히 불안정하다. 니 친구가 피를 바가지째 쏟으며 죽어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로 두는게 좋을거다."


푸른 피부의 여성은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그저 무덤덤하게 갑옷을 닦으면서 대답했다.


"아까 만났으니 얼굴은 익숙하지? 후훗, 서로 통성명은 했어?"


어느새 옆으로 따라온 보라색 피부의 여성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까는 눈치 채지 못했지만, 그녀에 한 쪽 손에 들려있는 지팡이가 내 시야에 들어온다. 마치 매끈한 검은색 돌로 만들어 진 듯 형광등의 조명을 약하게 반사하는 그 지팡이의 끝에는 계란 크기의 보라색 자수정이 약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에휴, 덩치는 산만해서 쑥쓰럼만 많아 가지고는..."


힐끗 그녀를 쳐다본 뒤 다시 묵묵하게 갑옷을 손질하는 푸른 피부의 여성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아랑곳 않고 보라색 피부의 여성은 나를 향해 몸을 돌려 조소가 옅게 깔린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이 쪽에 앉아있는 우리 덩치는~ '검은 불꽃' 군단의 호위 기사, 케세흐! 아, 이젠 '전' 호위 기사네. 당신은?"


"..."


이 여자, 지금 진심인건가? 우리 둘이 서로 죽이려고... 아, 생각해보니 죽이려고 한 건 나 뿐이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사투를 벌인게 불과 방금 전인데 서로 통성명이나 하라고? 지금 이 상황의 심각성을 알고는 있는건가?


무거운 분위기에도 아랑곳 않고 옆에서 재잘대는 그녀의 말에 어이가 없어 무어라 대답할 생각도 못한 채 가만히 있자, 그녀는 갑자기 히죽대던 표정을 굳히며 손에 보랏빛 불꽃을 피어올리며 중얼 거렸다.


"하아... 인간 따위가 살려주니 고마운 줄도 모르고... 그렇게 내 말이 듣기 싫으면 그냥 이 자리에서 죽여줄까?"


불과 몇 초전에 히죽대던 얼굴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소름이 쭉 돋으며, 다년간 장교 생활을 하며 생긴 내 직감이 말했다.


아, 이거 미친년 맞구나. 진짜 이딴걸로도 사람 죽일 년이다.


"씹... 육... 육군 대위 안성준. 됐어?"


정말 내 대답에 만족한건지, 아니면 그냥 내가 화들짝 놀라 어쩔줄 모르는 모습에 만족한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을 듣고는 손에 물기를 털듯이 휙 흔들어 보랏빛 불꽃을 없애버리고는, 다시 아까의 그 깔보는 듯한 웃음을 면면에 깐 채 나를 바라보며 히죽댔다.


"음, 그래도 눈치는 있네? 좋아. 내 말을 잘 들어줬으니, 나도 네 말을 어느정도는 들어줘야겠지? 할 말 있으면 해 봐."


"...원하는게 뭐지?"


"나 참, 도움을 줘도 이렇게 의심만 해대고... 인간들은 이쪽이나 저쪽이나 하여튼..."


"갑자기 무슨 차원문 비스무리 한 것에서 튀어나와 도시 전체를 침공하고, 우리 병사들과 시민들을 죽이려는 놈들이 그렇게 착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데."


"하아? 네놈들이 약해 빠진걸 어떡하라고? 이렇게 큰 도시를 만들면서 성벽이나 제대로 된 병력도 배치 하지 않은, 배때지에 기름만 찬 너희 인간 귀족 놈들 잘못이지!"


역시 툭 치기만 해도 발끈하는구만. 그나저나 귀족이라니, 뭔 소리야?


내 말에 어이 없다는 듯 비웃으며 쏘아붙이는 그녀 옆으로 푸른 피부의 여성이 다가와 그녀를 제지했다.


"릴라쉬, 시간이 없으니 필요 없는 말은 자제하지. 사실대로 설명하고 이동 준비를 하기에도 벅찬 시간이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고."


손을 휘휘 젓고는 마음에 안든다는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난 보라색 피부 옆으로, 푸른 피부가 일어나 내 앞으로 다가온다. 머리 세개는 더 커보이는 덩치 때문인지, 저절로 압도되는 느낌이지만 꿋꿋이 제자리에서 그녀의 시선을 마주했다.


"짧게 설명하지. 우리는 당신이 생각하는 저 '침공군' 에 속한 병력이 아니다."


"똑같이 인간이 아닌 종족이고, 갑옷도 똑같은 색깔인데, 같은 병력이 아니라니, 당신이 생각해도 좀 말이 안되지 않나?"


약간 붙게된 자신감으로 그녀에게 조곤 조곤 따지듯 묻는다.


"...나와 같은 황금빛 갑옷을 보았다고?"


"그래. 너랑 비슷한 황금빛 갑옷을 걸친 반인반용 괴물 한 서너 마리가 우릴 죽이려 달려 들었지. 결국 실패했지만."


"용족 호위 기사 4명을 마주 하고 살아 있다고?"


그녀의 말에서는 감정의 기복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 말을 꺼내는 그녀에게서는 약간의 놀라움이 느껴졌다. 하긴, 권총탄에는 꿈쩍도 안하는 날아다니는 탱크 4마리를 일반 병사가 상대했다고 하면 나도 믿기 어려울 거긴 할 것 같았다.


"지금 내가 죽은 것 같진 않은데."


어깨를 으쓱한 채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뭐라 말하려다 입을 다문 푸른 피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건 넘어가도록 하지. 아무튼, 당신이 말한 그 '용인' 들하고는 같은 소속 이었던게 맞다. 이젠 아니지만. 우린... 굳이 따지자면, '탈영병' 비슷한 거라고 보면 되겠군."


뭔 개소리야? 라는 말이 목 끝까지 넘어왔지만, 저 거구에게 잡혀 내 두개골이 사과 부서지듯이 깨지는 꼴을 보고싶지는 않았기에 간신히 참을 수 있었지만, 표정은 도저히 관리할 수가 없었다. 


"당신들의 세계로 넘어온 병력은 렐 연합종족군 17군단 소속 병력이다. 각기 다른 이종족들이 인류 제국의 학살극에 맞서 싸우기 위해 만든 연합군이지. 인류 제국과의 전투 과정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의도치 않게 당신들 세계로 넘어온 뒤, 모종의 반란 사건으로... 기존의 지휘관들이 모두 축출되고, 과격파 지휘관들로 대체되어 당신들의 도시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현재 그 반란 사태에서 탈출한 군단ㅈ... 온건파의 최고 지휘관에게 전달해야 할 물건이 있다. 이 물건이 그 분에게 전달 될 수 있다면, 지금 이 반란 사태를 종식 시키고 의미 없는 침공도 끝낼 수 있다. 물론, 반란을 일으킨 과격파는 우릴 막기 위해 추격하고 있고."


"...그래서, 우리를 구한 이유랑 그게 뭔 상관인데?"


"시가전이 벌어지고 있는 이런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서 옛 전우들 피해 다니는 것도 일인데, 당신들 기계 병기 까지 피하는건 도저히 못하겠거든~ 당신이 있으면, 적어도 기계 병기들 한테 영문도 모르고 죽을일은 없지 않겠어?"


"난 내 목숨 지키자고 조국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일은 할 수 없어. 내게서 어떤 기밀 같은걸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마라."


"야, 인간. 지금 네 놈 처지를 모르는...."


단호한 내 말에 보라색 피부가 잔뜩 인상 쓴 얼굴로 끼어들지만 푸른 피부가 다시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한다. 


"이해한다. 하지만, 우린 당신의 조국을 배신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 지휘관을 찾아 이 반란 사태를 종결시킬 수 있게, 당신들의 도시를 돌아다닐 수 있게끔 '상식' 선의 정보를 보조 해달라는 얘기다."


"..."


"이 침공을 빨리 끝낼 수록, 당신 조국의 병사와 시민들의 희생도 줄일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리고, 당신이 우리와 동행한다면 우리가 당신들 병사들과 마주쳤을 때 무의미한 피를 쏟게 되는 일도 줄일 수 있겠지."


"하..."


어차피 선택권은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안한다고 버텨도, 이 자리에서 저 미친년한테 목이 날아가거나 운이 좋으면 저런 반 인간 반 괴물들이 득시글 거리는 적진 한가운데에 버려지는게 고작이겠지.


그녀들이 거짓말을 하는걸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우리 둘의 환심을 얻자고 이런 거짓말을 칠 이유는... 솔직히 모르겠다. 정보가 필요했으면 그냥 대놓고 어디에 묶어서 고문하는 방식으로 했거나 저 말도 안되는 '마법'으로 뇌를 휘저었겠지. 아마도.


지금으로서는 믿는 수밖에 없겠지만... 어차피 그녀들의 말을 따르게 될 거라면, 조금이라도 무언가를 더 얻어 가는게 나을 터였다.


"좋아. 단... 이 두 가지만 요청하지. 먼저, 아까도 말했듯이 난 너희들에게 '상식' 선의 정보는 보조 해줄 수 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군사적 기밀 또는 정보에 해당되는 사항은 말할 수 없어."


"그래, 알겠다. 그건 존중하지."


생각보다 시원스레 대답을 한 푸른 피부의 여성을 보라색 피부의 여성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그저 그 뿐이었다. 서로 간의 암묵적 합의가 되었다는 판단에, 나는 조심스레 두번째 조건에 대해 입을 열었다.


"둘, 내 동료는 지금 중상을 입은 상태다. 이 상태에서 억지로 끌고 다녀봤자, 오히려 너희들의 이동 속도만 더 느려지겠지."


"뭐, 편하게 죽여 달라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라색 피부는 다시 비릿한 웃음을 만면에 띤 채 번들거리는 불꽃을 손에 피어 올렸다.


"아니 아니!! 사람 말좀 들어! 하... 지금 너희들이 부착한 저... 마법 붕대, 출혈을 막는것 외에 다른 효과가 있나?"


"마법 붕대래, 풋... 음, 지혈이랑 진통 효과 정도? 저 술식이 빛나는 동안에는 아예 칼로 찌르는 정도가 아닌 이상 큰 고통을 느끼진 않을거야."


"저런 과다 출혈은 단순히 피만 멎게 한다고 다가 아냐. 후속 조치로 봉합, 내출혈 확인, 항생제 투여와 같은 감염 예방 조치가 이어져야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내가 항공 학교에서 대충 대충 배웠던 구급법에 대한 기억을 얼기설기 끼워 맞춘 것이었지만, 보라색 피부와 푸른 피부는 이런 의료 단어들이 나 같은 일개 군인에게서 나올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예상 외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 지금 그냥 아무 말이나 지어내고 있는거 아냐? 치료 술사도 아니면서..."


"방어선에 있는 아군 병력들에게 동료를 맡기고 나서, 그 다음에 이동 하는게 훨씬 더 효율적 일거야. 지금 중환자를 데리고 이 넓은 도시를 돌아다니는 건 비효율적이야. 특히, 만일의 상황에 교전 하면서 도망 치는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테고."


가만히 말을 듣던 푸른 피부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인간들의 방어선 근처에서 도망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방어선 근처에서 날 묶어놓던, 입을 막던, 원하는 대로 해. 어떤 방법이든 좋으니 내 동료만 무사히 치료 받게 해준다면 약속은 지킬거야. 내 명예를 걸고."


내 말이 끝나자, 푸른 피부는 몇 초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그녀의 손아귀에 붙들려 편의점 진열대에 처박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그 눈빛이 돌연 생각났다. 


그 때와는 달리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깃들어 있었다.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그녀의 눈빛을 제대로 마주하지도 못할 정도라 느껴질 정도였으니.


그걸 노린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나를 아무 말 없이 응시하던 그녀는 가볍게 끄덕이며 일어섰다.


"알겠다. 대략적인 정비만 끝내고 이동하도록 하지."


"흐음~ 그래, 뭐. 어차피 안 지키면 바로 죽이면 되니까."


보라색 피부도 가볍게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았지만) 한마디 던지고는 팔짱을 풀며 물었다.


"자, 그럼 이제 협상도 끝났으니 제대로 통성명이나 해볼까? 너도 계속 인간 인간 거리는거 딱히 좋아하지 않을테고, 우리도 너 한테 괴물 1, 괴물 2 정도로 불리고 싶지는 않거든."


"대한민국 육군 대위 안성준. 잘... 부탁한다." 


"칼데아 제국군 상급 마도사 릴라쉬야. 얼마나 함께할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해? 큭큭."


자신을 '상급 마도사 릴라쉬' 라고 칭한 보라색 피부는 한 쪽 손에는 지팡이를 든 채 의도를 알 수 없는 비웃음 비스무리한 표정을 얼굴에 띤 채로 얘기했다. 저 표정은 디폴트 인건가... 


"칼데아 제국군 호위 기사 케세흐다."


여전히 변함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짧게 답한 푸른 피부의 여성은, 계속해서 손질하던 황금빛 갑옷과 비슷한 무늬가 새겨진 방패를 등에 결속하기 시작했다. 작은 자동차 문짝 정도는 되어보이는 크기였지만, 2m 30cm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덩치 때문인지 되려 딱 맞게 느껴졌다. 


"그나저나 이 도시, 마실 물이나 음식은 대체 어딨는거야? 강도 안보이고, 우물이나 저수지도 안보이고. 어딜가나 이상한 기분 나쁠 정도로 네모난 건물들이랑 검정색 석재로 만들어진 도로만 잔뜩 깔려있고 말이야."


"...이거 다 마실거랑 먹을건데...?"


주변 진열대에 가득찬 과자, 컵라면, 캔음료, 페트 음료를 가리키며 말하자 보라색 피부... 아니, 상급 마도사 릴라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 아니, 이것들이 다 먹을거라고? 기분나쁘게 반짝거리고, 곧 터질 버섯 포자주머니 처럼 빵빵한 이것들이?"


마치 과자 봉지가 폭탄이라도 되는 듯이, 지팡이로 쿡쿡 찔러대던 그녀의 옆에서 과자 봉지 하나를 집어 올려 윗쪽을 '북' 하고 찢자, 릴라쉬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친다.


봉지의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어, 납작한 노란색 과자를 꺼내 보란듯이 입에 넣고 우물 우물 씹었다. 음, 감자칩이네. 


아까 나를 산 채로 불태워 버리려던 그 광기에 가득찬 눈은 어디가고, 지금은 내가 마치 돌이라도 씹어 먹고 있는 것처럼 놀란 눈으로 바라보던 릴라쉬 옆으로 케세흐가 빨간색 봉지를 한 손으로 집어 올려 가만히 살펴본다.


마치 뚜껑이나 어떠한 개봉구를 찾으려는 듯 천천히 봉지를 살펴보는 그녀에게 내가 말한다.


"그거, 윗 부분 그냥 뜯으면 쉽게 열려."


내 말에 그녀는 아래 위로 과자 봉지를 잡아 점차 힘을 주기 시작한다. 앞쪽 뒷쪽을 잡고 당겨야 열리는 건데, 저렇게 하면 될 턱이 없다. 역시나, 과자 봉지는 그저 힘만 잔뜩 받은 채 그 내용물을 보여줄 생각도 없는 듯 부들댈 뿐이었다.


"아니, 그 방향 말고 다른 방향으로...."

 

그녀와 비닐 포장과의 다소 빗나간 최초 조우를 교정해 주려던 내 시도는 갑작스러운 '뻥'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감자칩들로 인해 중단되었다.


폭죽처럼 사방으로 튀어나가는 감자칩들 중 하나가 내 얼굴을 가볍게 때리고, 잠깐이지만 사방에 퍼져나가는 감자칩들 사이로 찢어진 봉지를 양 손에 든 채 서있는 케시흐의 동공이 잠시 흔들리는 모습이 보이는 듯 했다.


"..."


"..."


"푸하핫!!! 아니, 아, 뭘 어떻게 했길래... 풋...!"


이 어이없는 광경에 배를 잡고 웃어대는 릴라쉬를 무시하고, 감자칩 하나가 머리에 올라간 채로 이쪽을 바라본 케시흐가 다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한다.


"...미안하군."


"아니... 뭐... 미안할 것 까지야."


그저 기분 탓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무덤덤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살짝 더 낮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