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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세계관:

국정원 5급 사무관, '대악마' 기사단장 그리고 콤비네이션 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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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비씰 대원, 고위 서큐버스 심문관 그리고 윌리엄 어니스트 헨리

"왜 그냥 포기하지 않는거야? 영원한 쾌락이 눈앞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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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보자, 챙길 것들이..."


아까의 감자칩 폭발 사태 이후, 살짝은 기가 죽은듯한 케세흐를 위로해주고 짧을지 길지 모를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편의점 매대 이곳 저곳을 뒤적거렸다.


당연히 인간 문명에 대해 일체의 지식도 없는 케세흐나 릴라쉬에게 뭘 찾으라 해도 결국 내가 챙겨야 할게 뻔하니, 물품 정도는 내가 준비하겠다고 자원했다.


릴라쉬가 "흐음~ 혼자 있을 때 음식에 독이라도 넣으려고? 그렇겐 안되지~" 라고 말하며 내 옆을 감시하듯이 따라다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박물관에 데려간 초등학생 마냥 질문 세례를 받는 꼴이 되었다.


"이건 뭐야?"


매대에 일렬로 늘어선 500ml 삼다수 병을 집어 올리는 나를 빤히 보던 릴라쉬가 갑작스레 질문을 던진다.


"그냥... 물인데."


"아니, 바보야. 그건 나도 알겠고. 이 병 말이야. 유리처럼 투명한데... 질감은 다르고, 훨씬 말랑 거리네. 근데 찢어지거나 깨지지는 않고."


"아, 페트병? 그건 그냥 공장에서 대량으로 만드는거야."


"어떻게 만드는데?"


"어... 정유를 하면 나오는 부산물들을 가공해서 만들지. 아마 맞을거야."


"정유는 뭔데?"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을 정유라고 하지."


"원유는 뭔데?"


"수백만년 전에 있었던 동물이나 식물이 지층에서 고온 고압의 환경에 노출되면서 만들어지는 액체지."


"근데 그걸 왜 정제해?"


"연료로 쓸려고 하는거지. 그냥 자연 상태의 원유는..."


"아까는 그, 뭐야. 플하-스티? 만드는데 쓴다면서?"


"아니, 그게..."


"뭐야... 차갑네? 이런 잡화점에서 냉각 마도구 라도 가지고 있는거야?"


이러다가는 현대 공업 사회와 근대 화학의 역사까지 모조리 설명하게 될 것 같아 그녀에게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라 말하며 얼버무리자, 릴라쉬는 '흥. 바쁜척 하기는.' 이라 중얼거리며 불만스러운 얼굴로 한 발 물러났다.


더 이상 내게 질문을 퍼붓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호기심을 완전히 뿌리칠 수는 없었는지, 500ml 삼다수 병을 연신 만지작 대며 무언가 물약에 관련된 말들을 중얼거렸다.


케세흐로부터 건네받은 책가방 크기의 가죽 행낭에 500ml 삼다수 병, 육포, 그리고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여있는 삼각김밥과 샌드위치 몇 개와 기초적인 위생을 위한 붕대나 물티슈 몇 개와 쓸모 있어 보이는 물건 몇 개를 담은 뒤 행낭을 열어 물품을 확인했다.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무슨, 반지의 제왕에서나 나올법한 모양새의 진갈색 가죽 행낭 안에 형형색색의 캐릭터들이 그려진 삼각김밥이 있는 걸 보고 있으니, 헛웃음이 피식 나온다.


"준비는 다 되었나?"


언제 다가왔는지, 갑자기 내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와 옆에서 들려오는 케시흐의 목소리에 놀라 옆을 돌아보자, 그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갑옷을 완전히 착용한 케시흐의 모습이 보였다. 



곳곳에 유려한 무늬가 새겨진 황금빛 보호구가 어깨, 팔, 다리를 감싸고 있었지만, 흔히 '갑옷' 하면 생각나는 중세 기사들의 복장처럼 온 몸이 반짝거리는 금속으로 둘러싸인 풀 플레이트 갑옷은 아니었다. 


갑옷으로 가려진 부위 보다는, 그저 천으로 덮여있거나 노출된 부위가 더 많아 보였다. 급소 외의 부위로 들어오는 공격은 등에 멘 방패로 쳐낼 수 있으니 기동력을 위해 꼭 필요한 급소만 갑옷으로 덮은건가... 라는 생각이 들지만, 내가 중세 근접전 전문가도 아니니 그저 추측일 뿐이었다.


머릿속으로는 그녀가 어떤 방식으로 전투를 할지 상상하며 가죽 행낭을 건네자 안을 들여다 보는 케시흐의 미간이 아주 살짝이지만 좁아지는게 보였다.


"음. 식량이 너무 적은 것 같다만."


"적다고? 4명이 하루 소비하기엔 충분한 양인데."


그 말에, 옆에서 지팡이를 만지작 대던 릴라쉬가 끼어든다.


"하루??? 출정 준비 하는데 하루치 식량만 싸는 바보가 어딨어? 너, 군인 아냐? 원정도 안 나가봤어?"


아무래도, 그녀들이 생각하는 '원정'과 내가 생각하는 '원정'의 컨셉은 상당히 다른 듯 했다. 아마 옛날 중세 기사들이 전쟁을 다닐때 하듯이 수주치 식량을 잔뜩 배낭에 넣고 돌아다니는... 그런 걸 생각하는 거겠지.


그러나 먹을게 정말, 말그대로 썩어 넘치고 매대마다 유통기한 10년은 가는 통조림들이 꽉꽉 들어찬 현대 도시에서 식량을 많이 들고 다니는 건 되려 짐이다. 


"아니, 인구가 150만명인 '광역시' 에서 돌아다니는데 식량을 많이 들고 다닐 필요가 어딨어? 이런 식료품 취급하는 편의점이나 슈퍼는 정말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마다 있다고."


"배, 백오십만? ...아니, 그 정도는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수도에 차원문을 두는 바보들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150만' 이라는 말이 상당히 충격적인 모양인지, 릴라쉬는 잠깐 무어라 중얼거리다 다시 퍼뜩 정신이 든 듯 케시흐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튼, 그래도 너무 적어. 이대로 가져가면 쟤 한 끼 먹고 끝일걸?"


잠깐, 내가 챙긴게 그렇게 적었나? 라는 생각에 행낭 안을 확인해본다.


삼각김밥 4개, 샌드위치 4개, 참치 통조림 4캔, 스팸 2캔, 육포 2봉지, 그래놀라 바 8개. 오랫동안 버틸 정도는 아니지만 하루는 충분히 먹을 만큼 제대로 들어있다.


"성인 남성 4인이 하루 버틸 정도는 되는데... 한 끼라니, 무슨 소리야?"


내 말을 들은 릴라쉬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한 끼 맞네. 케시흐의 식사량은 성인 인간 4명의 식사량과 비슷하니까."


"ㅁ...뭐...? 4인?!"


또 그녀의 장난일 것이라는 생각에 케시흐를 바라보자, 눈을 마주친 케시흐가 입을 연다.


"그 정도까지는 챙기지 않아도 된다."


그래, 그렇겠지. 아무리 덩치가 크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무슨 성인 남성 네 명 식사량을...


"지금은 성인 인간 두 명 분 정도만 준비해도 충분하다. 평소라면 그 정도는 먹어야 지속적으로 근력을 유지하겠지만, 전장에서는 몸을 가볍게 유지해야 되니까."


진짜 네 명분 먹는구나. 허... 어쩐지, 힘이 존나게 세더라.


그녀를 만난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걸로 장난을 칠만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았기에, 나는 무어라 더 입을 열 생각도 않고 그저 묵묵히 하얀색 편의점 선반 위의 샌드위치 들을 양 손으로 집어 행낭에 쑤셔 넣을 뿐이었다.


"성인 남자 4명분 이라니..."


내가 어이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걸 들었는지, 케시흐가 한 마디 덧붙인다.


"...내가 식탐이 많다거나 그런건 아니다. 그저 큰 몸집과 강한 체력이 특기인 오니와 데몬의 혼혈이라는 태생이라 그런 것 뿐이야."


"어... 그래. 그냥... 신기하다고."


"..."


애매하게 끊긴 대화가 어색한 공기로 변하는게 느껴져, 나는 서둘러 행낭에 음식을 담는 일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 때, 갑자기 편의점 저 편에서 '쿠당탕' 하고 무언가 잔뜩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씨.... 팔, 대체... 뭐야, 너....!"


무슨 상황인지 대충 예측이 가 소리가 들려온 매장 저 편으로 뛰어가자, 바닥에 잔뜩 굴러다니는 통조림 옆으로 몸에 붕대를 두른 김 준위가 창백한 얼굴로 앉은 채 떨리는 손으로 군용 단검을 집어든 채 릴라쉬를 향해 겨누고 있는 광경이 보인다.


릴라쉬는 내 쪽을 보고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난 아무것도 안했다구? 뭐, 네가 잘 말해봐."


김 준위의 시선이 나에게 닿자, 그의 표정이 안심과 혼란이 섞인 복잡한 얼굴로 변한다.


"대, 대위님... 대체 뭡니까... 이건...? 쟤네들이 한국어는... 어떻게... 콜록! 하는겁니까...? 대위님은 왜..."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의 부작용인지, 눈빛은 흐릿하고 피부색은 창백한 채 연신 기침을 해대는 김 준위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다.


"김 준위, 진정해. 진짜 말도 안되는 일인거 알지만... 일단 들어봐."


여전히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겨누고 있는 김 준위에게 지금 현재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전으로 쳐들어온 저 '괴물' 들이 사실은 이계의 아인종 연합군 이라는 것, 그리고 쿠데타 비슷한 일로 인해 기존 지휘관들이 제거되고 반인류 강경파 지휘관들이 침공을 진행시켰다는 것, 그리고 이 두명은 생존한 온건파 지휘관과 합류하여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우리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내가 생각해도 너무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이게 사실인걸 어쩌겠는가. 일주일 전에 들었으면 무슨 넷플릭스에서 시즌1만 나오고 캔슬될 허접한 SF 영화 줄거리냐고 할만한 작금의 현실 설명이 끝나자, 김 준위가 힘겹게 입을 연다.


"진짜... 말도 안되는 소리네요."


"...근데, 지금 이계의 괴물들이 쳐들어 온 상황 자체가 말도 안되는 상황인데... 조금 더 말이 안될 이유는 없겠죠."


그렇게 말한 김 준위는 한 숨을 쉬며 단검을 내려놓는다. 


"뭐... 저 괴물들을 돕는 것도... 정말 전쟁을 멈출 수 있다면... 해야죠, 어쩌겠습니까. 대위님이 이런걸로 나라 팔아먹을 분도 아니고..."


이제 모르겠다는 식으로 해탈 한건지, 아니면 정말 납득 한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김 준위에게 어떻게든 현재 상황을 이해 시켰다는 안심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고맙다. 우선 너는 2차 방어선에 있는 병력에게 인계할테니, 치료부터 받아라. 이 상태로 따라다닐 수는 없으니..."


"2차 방어선... 버티고는 있습니까?"


김 준위의 질문에 쉽사리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전혀 아는게 없었으니.


"... 현 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무전기도 없고, 헬기에 있던 통신기는 지금쯤 완전히 잿덩이가 되어서 통신도 불가능 할테니..."


1차 방어선은 우리가 추락하며 완전히 붕괴 되었고, 2차 방어선도... 모르겠군. 어떻게든 그 팔 4개 달린 괴물을 막아냈어야 할텐데...


추락하기 전, 보이는 방어 진지마다 거대한 보라색 폭발과 함께 박살난 콘크리트 무덤으로 만들어 버리며 1차 방어선을 완전히 유린하던 네 팔달린 아인종 지휘관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생각이 복잡해진다.


"자, 눈물의 동료 상봉은 잘 마무리 되었나~?"


릴라쉬가 진열대 옆으로 머리를 빼꼼 내밀어 그 특유의 조소를 얼굴에 띤 채 묻는다.


"그래. 내 동료도 상황은 이해했다. 우린 언제든지 출발 가능해."


"그럼 가기 전에 식사나 하고 가자? 우리, 사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먹었거든. 맛 없는 보급 비스킷 한 줌 빼고."


릴라쉬의 말에 케시흐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말한다.


"릴라쉬, 꼭 지금 먹어야겠나. 지금은 이동을..."


"야, 넌 몰라도 난 지금 하루 종일 도망만 치느라 힘들어 죽겠거든? 언제나 전투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건 너잖아? 앞으로 계속 쫓겨 다녀서 제대로 먹을 시간도 없으면 어쩌려고?"


릴라쉬가 신경질적으로 부린 투정 이었지만, 솔직히 그렇게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았다. 하루종일 제대로 된 영양분 보충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도망 친다는 심리적 압박감까지 더해지면 심신의 피로도는 훨씬 증가하는 것이 사실이었으니.


케시흐도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녀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집어 든 행낭을 다시 내려놓았다. 


"...그래. 하지만, 지금이 여유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건 알겠지. 간단하게 먹고 빠르게 이동하자."


"큭큭, 역시 우리 훌륭한 전사 케시흐님다운 올바른 판단이십니다아~"


케시흐의 말에 반색하며 지팡이를 내려놓은 릴라쉬는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나를 향해 외쳤다.


"야, 인간! 적당히 먹을 만한 맛있는거 좀 골라서 줘봐. 맛없는거 주면 다 너 먹일거다?"


"릴라쉬..."


"뭐? 우리가 쟤네 음식을 어떻게 알어? 쟤가 도와주기로 했잖아!"


릴라쉬를 보며 한 숨 비슷한 것을 쉰 케시흐가 나를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부탁하지."


"...그래." 


아, 저 보라색 썅년 진짜... 아니, 아까 인간 인간 거리기 싫으니까 통성명 한다고 하지 않았나? 지가 말한것도 기억 못하나, 씨발년... 진짜 저년을 먼저 만나서 권총탄 좀 박아줬어야 했는데...


마음 같아서는 한대 쥐어 박고 싶었지만, 내 목숨을 댓가로 지불하면서 까지 그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10년간의 장교 생활로 다져진 '티내지 않고 속으로 쌍욕하기' 심리요법을 사용하며 편의점 식품 매대를 다시 뒤지는 것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