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수의사가 진단을 내리자 바로 오타쿠와 자리를 교체했다. 오타쿠는 죽은 남자의 주머니를 뒤졌다.

“나이스, 담배하고 라이터 발견.”

오타쿠는 지갑도 찾았지만, 열어보지 않고, 죽은 남자의 배 위에 올려놨다.

“형씨, 당신 물건은 우리가 고맙게 생각하고 가져갈게. 그러니까 괜히 저주 같은 건 하지 말라고.”

담배와 라이터를 주머니에 찔러 넣은 오타쿠는 다시 원래 진형을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앞으로 이동했다. 복도는 군데군데 핏자국이 있었지만, 시체는 처음에 봤던 남자의 것밖에 보지 못했다. 괴물처럼 변한 감염자들이 어둠속에 숨어 우리를 습격할 거라고 예상 했던 게 빗나간 셈이었다. 내 바로 뒤에 붙어 걷고 있던 아줌마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금방 반대쪽 복도로 갈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요?”
“우리가 무기까지 준비하고 야단법석을 친 것 치고는 아주 순조롭군. 오히려 긴장이 풀어질까 봐 걱정이 될 정도다.”
“아줌마, 형씨 그렇게 생각하면 큰코다칠 걸. 감염자든 아니든 여기에는 100명이나 되는 사람이 있다고, 복도에 사람이 없다는 건, 사고 직후 죽은 사람들만 빼놓고 방으로 도망쳤다는 거야 즉 우리가 지나친 방 안에 상처를 입고 감염이 된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거지. 언제 앞뒤로 협공당할지 모르니까 긴장 풀지 마.”
“생긴 것과는 달리 잔소리가 많은 녀석이군.”

나는 두 사람이 뭐라 떠들든 말든 신경쓰지 않고 손전등 불빛에 집중했다. 만약 한눈이라도 팔았다간 감염자가 순식간에 덮칠지도 모를 두려움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깐만요.”

바짝 온몸을 긴장시키고 걷던 중에 내 귀에 뭔가 자그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훌쩍이는 소리였다.

“누가 우는 소리가 들려요. 아직 감염이 안 된 사람일지도 몰라요.”
“소리?”

모두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자 훌쩍거리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소리는 9호실에서 나고 있었다.

“이 안에서 들리는 것 같군.”
“어린애 울음소리 같은데 아직 감염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네.”
“좋아, 그러면 이 안으로 진입한다. 혹시 감염자일지도 모르니까 준비 확실히 해.”
“그럴 경우에는 나한테 맡겨라.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숨통을 끊어버릴 테니까.”

검사는 목검을 양손으로 잡고 가볍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검사가 준비됐다는 신호를 보내자 나는 9호실의 문을 잡아당기고, 손전등으로 안을 비췄다. 안에는 초등학생 정도 나이의 소녀가 우리한테서 등을 돌리고 훌쩍이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안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아이고 가여워라. 난리 통에 부모를 잃어버렸나 보네. 애야 이제 괜찮으니까 아줌마한테 오렴.”

아줌마는 아이를 달래기 위해 아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오타쿠는 아이를 달래려는 아줌마의 팔을 붙잡아 이를 저지했다.

“잠깐만 아줌마. 혹시 모르니까 나하고 검사가 먼저 확인을 해볼게. 학생 불빛 흔들리지 않게 확실히 비춰.”

나는 손전등의 불빛을 훌쩍이는 소녀 등에 비췄다. 검사와 오타쿠는 무기로 철저한 태세를 갖추고 소녀에게 다가갔다.

“애야 잠깐 이쪽을 좀 봐 볼래?”

오타쿠가 말하자 소녀는 울음을 그치고 이쪽을 쳐다봤다.

“꺄아아아아악!”

소녀의 얼굴은 끔찍하게 변해있었다. 두 눈은 흰자의 만 들어낸 체 뒤집혔고, 얼굴에는 흉측한 검은 반점이 나 있었다. 소녀는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끔찍한 비명을 질러댔다. 비명이 너무 공포스러웠던 탓에 감염자의 얼굴을 보고 비명이 나오려던 게 멈춰질 정도였다.

“핫!”

검사는 순간적으로 감염자를 향해 목검을 내려쳤다. 목검은 감염자의 머리를 향했고, 목검에 맞은 감염자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그대로 쓰러졌다. 검사는 목검에 흐르는 피를 허공에 휘둘러 털어내고 말했다.

“이거 장난이 아니군.
“뭐야 검사 형씨. 겨우 이런 꼬마한테 겁먹은 건 아니겠지.”
“농담이 아니다. 어떤 바이러스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긴 건 공포영화에서나 본 게 전부란 말이다.”
“주온에 나오는 귀신도 감염자에 비교하면 멀쩡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여기선 감염자가 어린 아이였다는 사실에 감사하자고.”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누군가 문을 미친 듯이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다행히 문을 잠가서 열리지 않았지만, 문을 때리는 기세는 점점 더 강해졌다.
쾅! 쾅! 쾅! 쾅! 쾅!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 문을 막기엔 너무 늦었다는 걸 알았다. 우리는 누가 말하지 않아도 빨리 진형을 맞춰 섰다.

“상대가 어떻게 생긴 괴물이란 걸 안 이상. 두려워할 건 없다. 일격에 한명씩 보낼 테니까 불빛이 흔들리지만 않게 해라!”
“네!”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도 힘이 들어갔다. 지금은 생존하고 싶다는 생각보단 만약 감염되면 저들과 같은 모습을 해야 된다는 사실이 제일 무서웠다.

콰광!

문이 부서지고 감염자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어금니를 꽉 물고 양손으로 손전등을 잡아 문 쪽을 비췄다. 끔찍하게 생긴 감염자가 괴성을 지르면서 우리들을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검사는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일격필살의 검법으로 감염자의 목과 머리에 있는 급소를 정확히 공격했다. 목검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목검이 감염자들한테 적중할 때 나는 둔탁할 소리가 날 때마다. 감염자들은 피를 흘리며 한 명씩 쓰러졌다. 검사가 목검을 다섯 번 휘두르자 우리를 습격했던 감염자 다섯이 모두 쓰러졌다. 검사는 눈앞의 모든 감염자가 죽은 걸 확인하고 심호흡을 했다.

“굉장하군. 자네! 말하는 거나 행동을 봐서 보통 사람은 아닌 줄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숙련된 검사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수의사! 뒤에!”

뒤를 돌아보자 수의사의 바로 뒤에 아까 검사가 해치웠던 소녀 감염자가 피를 흘리며 수의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수의는 손에 든 파이프를 풀 스윙으로 휘둘러 감염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깡!-
복도가 파이프가 울리는 소리가 퍼졌다. 수의사의 파이프에 얻어맞은 소녀 감염자는 그대로 뒤로 넘어가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괜찮아요?”
“괜찮아. 검사 씨 덕분에 살았네.”
“인사는 됐다. 다음부턴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우리는 가방에 든 물을 마시면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감염자들의 시체 사이에서 하는 휴식이었지만, 누구도 그걸 가지로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타쿠는 우리는 쉬는 동안 천과 파이프로 뭔가를 만들었다.
“오타쿠, 자네 아까부터 뭘 만드는 건가?”

오타쿠는 수의사에게 자기가 만든 걸 보여 주었다. 오타쿠가 만든 건 파이프에 천을 감아 만든 횃불이었다.

“별다른 도구도 없이 급조한 거지만, 복도 끝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야. 나도 만화책을 읽은 게 이렇게 도움될 줄은 몰랐네.”
“오타쿠 자네, 혹시 밖에 있을 때 뭔가 대단한 일을 하던 사람이 아니었나? 자네의 냉정한 상황판단과 리더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닐텐데 말이야.”
수위사의 칭찬에 오타쿠는 기쁜 건지 슬픈 것인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오타쿠가 뭔가 말을 하는 걸 기다렸지만, 오타쿠는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 얻은 라이터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횃불을 잡은 손에는 파이프의 열이 전달되는 걸 막기 위해 모포를 잘라서 감았다. 충분히 휴식을 취한 우리는 다시 지하 2층을 향해 움직였다. 오타쿠가 만든 횃불 덕분에 처음보다는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움직일 수 있었다. 나는 한두 차례 감염자들과 싸울 걸 예상했지만 뜻밖에 감염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처참한 몰골의 시체들을 몇구 봤을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2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계단은 길지 않았다. 조심해서 계단을 내려가자 단단한 철문이 우리 앞을 막았다. 철문 위에는 식량고라고 써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군.”
“방심하기엔 아직 일러, 이 안에 감염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럴 경우에는 목숨을 걸고 싸워 이기는 수밖에는 없다는 걸 명심해.”
“만약 그렇다면 비상등이라도 켜져 있기를 바라야겠군. 복도와는 달리 넓은 공간에서는 이 진형이 효력을 못 볼 테니까 말이다.”
“검사 형씨 말이 맞아. 여기까지 와서 이런 말을 하기 싫지만, 이번에는 하늘에 운명을 맡기자고.”

나는 식량고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나는 힘을 줘서 열려고 했지만 식량고는 열리지 않았다.

“잠긴 건가. 아주 최악의 상황의 상황이군.”
“먼저 이곳으로 도망친 사람들이 안에서 잠갔을 가능성도 있어. 검사 형씨 내가 문을 두들길 테니까 후방을 부탁해.”
“알겠다.”

오타쿠는 횃불을 수의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철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이 보소! 안에 우리는 감염자를 피해 여기까지 내려온 사람입니다. 여기에 감염된 사람은 없으니 안에 사람이 있다면 문을 열어줘요.”

오타쿠가 소리치자 굳건히 닫혀있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드디어 살았다는 안도감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철컥하고 안에서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고 드디어 식량고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해 준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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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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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자의 얼굴이었다.
가장 빠르게 대응한 건 오타쿠였다. 오타쿠는 파이프로 감염자의 머리를 후려쳐 뒤로 넘어뜨렸고, 검사가 앞으로 달려와 문을 연 감염자의 숨통을 끊었다. 나는 손전등으로 식량고의 안을 비췄다. 안에는 10명 아니 15명은 되어 보이는 감염자들이 어둠속에 숨어 있었다.

“아줌마! 문 닫아!”

나는 이 위기만 버텨내면 모두가 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뿐만 아니라 여기까지 온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거다. 우리는 감염자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으로 가장 가까이 있는 감염자부터 빛을 비춰 공격을 성공하게 했다. 우리에겐 검사가 있었기 때문에 치열했던 싸움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싸움이 끝나고 우리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무기로 사용한 파이프는 피가 잔뜩 묻은 채 찌그러져 있었고, 검사의 목검도 피에 완전히 물들어 갈색이 아니라 진한 붉은색으로 보였다. 우리는 모두가 상처 하나 없이 무사히 이 고비를 넘긴 걸 확인하고 드디어 안도했다. 수의사 부부는 서로 껴안고 기쁨의 포옹을 했고. 오타쿠와 검사는 멋지게 하이파이브를 짝 소리 나게 했다. 우리의 흥분이 충분히 가라앉았을 때 오타쿠가 말했다.

“감염자들의 시체는 식량고 밖으로 운반하는 게 좋겠어. 썩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그거 좋은 생각이군. 기뻐하는 것도 좋지만, 이거부터 끝내지.”

남자들이 감염자들의 시체를 옮기는 동안 아줌마와 나는 이곳에 있는 식량 상태를 확인하기로 했다. 식량은 대부분 통조림과 건조식량이었는데, 나는 그중에 페트병에 담긴 생수가 있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었다. 식량고 안을 한참 조사하고 있을 때 아줌마가 말했다.

“학생, 뭔가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요?”
“여기 있는 식량. 아무리 봐도 100명이 10년 동안 먹을 식량치고는 너무 많은 거 같은데?”

아줌마의 말을 듣고 식량고를 다시 보니 이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책임자가 우리 100명만 방공호에 보호한 이유는 식량이100명분 밖에 준비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식량고의 식량들은 식량고 선반을 빈틈없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건 1,000명분의 식량 같은데…….”

나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량고의 바닥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고. 나는 의식을 잃었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색 벽이었다.

“여긴?”
“일어나셨군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다음으로 보인 건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였다. 오늘 방공호에 왔을 때 의료팀의 스텝이라고 소개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내가 하는 산소 호흡기를 제거한 다음 상반신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

“여기는 3층 스텝룸 이에요. 식량고에 도착하신 여러분들을 수면가스로 재운 다음 이곳으로 옮겨 드렸죠. 다른 분들도 곧 있으면 깨어나실 거예요.”

주위를 둘러보니, 오타쿠, 검사, 아줌마, 수의사도 침대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우리가 정신을 차리는 사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우리가 있는 방에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책임자인 김진윤도 있었다. 책임자는 얼굴에 연신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축하합니다. 여러분!”

책임자의 축하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성대한 박수가 시작됐다.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뭘 축하한다는 거야 책임자 양반.”

역시나 먼저 질문을 한 건 오타쿠였다.

“테스트에 통과하신 여러분들을 축하한다는 겁니다. 이제 여러분은 정식으로 방공호의 입주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테스트? 그건 또 무슨 말이지?”

책임자는 오타쿠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방 안에 있는 텔레비전을 켰다. 화면에는 오타쿠와 책임자가 책상을 사이에 두고 문답을 주고받고 있었다.

-테스트에 참가하시면 강력한 최면을 사용해서 방공호에 들어오기 이전의 기억을 조작할 겁니다. 대단한 걸 조작하는 건 아니고, 테스트를 원활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지금이 지구멸망 상황이라고 믿게끔 할 겁니다.-
-당신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하지만 말이야 한 번 더 확인받고 싶은데 2012년 12월 30일에 지구가 멸망한다는 게 사실이 확실한 거야?-
-네, 안타깝지만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구의 모든 나라는 인류가 조금이라도 생존할 가능성을 높이게 하려고 이 프로젝트를 실시한 겁니다. 이 지역 방공호에 수용할 수 인원은 천명입니다. 그리고 이천 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테스트이기 때문에, 이게 겁나시면 지금 테스트를 거부하셔도 좋습니다. 단 이곳에서의 기억은 제거되며, 아무것도 모른 체로 2012년 12월 30일 지구멸망에 날을 맞이하시게 되겠지요.-
-좋아, 테스트에 참가하겠어. 어차피 죽을 거라면 한 번이라도 이런 만화 같은 상황 속에서 살고 싶으니까.-
-좋은 결정입니다.-

오타쿠의 모습이 나오던 녹화 영상이 끝나고 검사, 수의사, 아줌마의 녹화 영상이 차례로 나왔다. 각자 하는 질문은 달랐지만, 책임자의 대답은 비슷했다. 마지막으로 내 모습이 녹화된 영상이 나왔다.

-안 할래요-
-아직 설명이 끝나지 않았는데요?-
-어떤 실험을 하시는지는 몰라도 저는 못할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특별히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없었고 결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백수가 됐어요. 전 남들 다 하는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못해서 짤렸던 사람이에요.-
-이 실험에 그런 건 상관없어요. 오히려 당신이라면 이 실험을 통과할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생존에만 집중하는 거 이게 포인트거든요.-
-정말 제가 이 실험에서 쓸모가 있을까요?-
-확답은 드릴 수 없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봅니다.-

영상을 본 우리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영상의 내용대로라면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내용은 테스트의 과정이었고, 스스로 이 테스트를 받는 걸 승낙했다는 거니까.

“믿을 수가 없군. 최면을 이용해서 기억을 지웠다니.”

검사가 말했다. 책임자는 미소를 지우지 않고 검사의 말에 대답했다.

“그걸 증명할 방법은 간단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면을 풀어드리면 되니까요. 하나, 둘, 셋!”

책임자가 박수를 강하게 치는 순간, 머릿속의 한 부분이 딸각하고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잃어버리고 있던 기억들이 돌아왔다. 책임자의 말은 진짜였다. 기억이 돌아온 수의사와 아줌마는 침대에서 내려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검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방공호에서 지구멸망을 피할 수 있다는 좋은 일이지만, 크게 감흥이 느껴지진 않았다. 기뻐하지 않는 사람은 나만이 아니었다. 내 건너편 침대에 있는 오타쿠도 마찬가지로 아직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있었다.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 테스트에 나온 감염자들은 도대체 뭐지? 그쪽에서 바이러스를 주입해서 이런 상황을 만든 건가?”
“아! 그거요 실은 그 질문이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모든 진실을 알고, 충격에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있는가? 이게 핵심이거든요.”

책임자는 리모컨을 조작해 다른 영상을 재생시켰다. CCTV 영상이었는데, 오늘 1호실에 있었던 우리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우리가 했던 일을 다시 보는 게 테스트인가?”
“계속 보시면 압니다.”

영상은 2배속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정전되고, 내가 손전등을 켜고, 침대로 문을 막고, 그리고 나중에는 복도로 나가 시체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얻은 다음. 소녀 감염자가 있었던 곳에 들어가는 거까지 영상으로 보니 내가 한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을 보는 것은 기분이 들었다.

“잠깐, 저게 뭐야?”

흉측한 얼굴의 소녀 감염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엉엉 울고 있는 평범한 소녀가 있었다. 적외선 CCTV라 녹색으로 보였지만 절대 감염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영상에는 검사가 목검으로 소녀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후려치는 모습이 나왔다. 그리고 문이 열리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게 보였다. 모두 평범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누가 봐도, 소녀를 구하러 온 사람들을 검사는 목검으로 급소를 노려 확실하게 숨통을 끊었다. 그리고 겨우 치명상을 피한 소녀가 수의사에게 도움을 청하러 다가오는 걸 수의사가 파이프로 끝장을 내는 장면이 나왔다.

“이게 무슨 더러운 장난이야!”

보다 못한 검사를 소리를 질렀다. 책임자는 영상에 관해 설명했다.

“사실 여러분의 방에 있는 환풍기로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기체를 투입했습니다. 이 기체의 효과는 한 장소에 있는 사람들끼리 공통의 환각을 체험한다는 것이죠. 여러분에게는 그게 좀비로 보인 것이고요. 물론 다른 방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들은 정상이지만 다른 방의 사람들은 괴물로 보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난동을 부렸던 여자는 뭐지?”
“승강기에 있을 때 호흡기로 그 기체를 먼저 주입했죠.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효과가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한 연출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식량고에 있던 감염자들은?”
“출구 쪽에 있던 방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여러분들을 식량고 안으로 들어오게 해서 보호할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여러분들은 가스에 중독된 상태에서 말이지요.”
“아니야! 그딴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믿을 거 같아! 거짓말! 내가 죽인 건 감염자라고!”
“내가, 사람을 그것도 어린 소녀를 죽이다니…….”

이성을 잃은 검사가 날뛰자 방공호의 스텝들이 강제로 진정제를 투여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다. 수의사는 날뛰진 않았지만, 입에서 선혈을 흘렸다. 혀를 깨물고 자살을 기도한 거였다. 옆에선 아줌마가 오열하며 난리를 쳤고, 수의사도 침대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방에 남은 건 나와 오타쿠, 그리고 책임자뿐이었다.

“당신들은 괜찮나요? 아무리 테스트라 해도 사람을 죽였는데요.”

오타쿠는 처음부터 지금까지이었던 이죽거리던 표정을 없애고 말했다.

“조금은 예상하였거든. 세상에 내가 생각하는 대로 감염자가 나타나고 게임처럼 행동하는 거로 위기 상황을 돌파할 수 있었을 때부터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방공호 측에서 뭔가 수작을 부린다고 생각했었지. 그리고 어차피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목숨을 걸고 테스트에 응한 거잖아. 그렇다면 우리 손에 죽었다고 해서 뭐라 원망하지는 않을거야.”

오타쿠의 말을 들은 책임자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당신은요?”

나는 오늘 있었던 모든 일을 떠올렸다. 정전되고, 사람이 죽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필사의 폭력을 휘둘렀던 우리를. 하지만 난 그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한 일이 없었다. 그저 손전등 하나를 들고 여기저기를 비췄을 뿐이었다.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선택해서 행동한 적도 없었고, 그냥 이리저리 끌려 당하면서 시키는 대로 한 거 뿐이었다. 나는 어렵게 대답할 말을 찾아서 말했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전……. 아무도 죽이지 않았으니까요.”

소장은 원하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환히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가 생각했던 대로군요. 자신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 법이지요. 어쩌면 앞으로 우리가 생존해야 할 세상은 현실감각을 잃어버리고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사는 당신이나, 민정씨처럼 무리에 섞여서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사람들에 의해 지탱될지도 몰라요. 어쨌든 방공호에서의 생존을 축하드립니다.”

책임자가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피곤이 몰려왔다. 나는 더는 아무 것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