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17만의 커여운 도시 서산.


삥ㅡ긋


전쟁과는 크게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도시는, 사실 동아시아의 역사를 뒤흔들었다.


때는 베트남 후기 레 왕조의 막바지. 당시 베트남은 두 개의 왕조로 쪼개져 전란이 계속되던 시기였다.


요로케


하지만 난세에 영웅이 등장하는 법. 저 남북조의 혼란이 지속되던 당시의 혼란을 종식시킨 것이 바로 떠이썬 왕조의 초대 황제 응우옌후에였다.


코에이 삼국지에 나올 비주얼이라고 생각하면 진거다


응우옌후에는 연전연승을 거듭, 베트남을 다시 하나의 국가로 만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이후에도 외세를 여러 번 격파하는 등의 업적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사후, 그가 평생을 바쳐 다시 하나로 만든 국가는 외국의 손에 휘둘리게 된다. 1802년, 그가 사망한지 겨우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어째서 그의 제국이 빨리 무너졌는가? 혹자는 프랑스의 개입을 그 원인으로 들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당시 프랑스는 혁명의 여파로 뒤숭숭하던 때였다. 왕조의 후계자도 존재했다. 그것도 정통성 있는. 그렇다면 우리는 단 한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떠이썬 왕조의 군사력이 일시에 약해진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우리는 떠이썬 왕조의 시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떠이썬의 한자음은 서산이다. 즉, 우리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의 도시 서산의 그것이다.


서산은 삼국시대부터 중요한 해안도시 중 하나였다. 무역을 크게 중시했던 백제가 센터로 삼은 도시이니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래서 서산은 예로부터 강한 바다 사나이들로 크게 이름을 떨쳤는데,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가 서산의 수군을 보고 '가히 조선의 바이킹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라고 한 기록에서 이를 잘 볼 수 있다.


여튼 서산의 수군이 떠이썬 왕조의 창립을 도왔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어떠한 이유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전쟁을 수행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 정조 대의 총신 홍국영과 관련이 있다고 추측한다. 조정의 탄핵을 받고 흔들리던 홍국영이 자신의 권위를 다시 한 번 드높이기 위해 비밀리에 지원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본론으로 돌아와보자. 도대체 서산 수군은 왜 철수했는가? 황제가 나라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우고, 황제가 일어난 고향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들이 대체 왜 본국으로 돌아왔는가? 바로 1800년. 정조의 죽음때문이리라. 겨우 11살의 세자가 왕위에 올라야 했던 만큼 나라가 뒤숭숭했던 때에 외국에 정예병을 두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더구나 청으로 부터의 눈치가 안 보일 수가 없었다. 떠이썬은 당대 최강국 10만 군대를 격파한 바 있는데, 이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게 제 1번국 조선의 군대라는 사실은 어린 임금에게 외교적으로 큰 부담을 주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베트남 사서에서 이들을 단지 '황제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니, 황제가 살던 곳의 용자들이 몰려들었다.'라고 짧고 은유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왈왈왈!